”말하지 마요, 아줌마. 의사가 치료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힘을 아껴요.”목소리가 벌써 잠겨버린 박민정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되었다. “응...”은정숙은 억지로 웃음을 내보이며 그녀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손을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세한 움직임으로부터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볼에 갖다 대었다.“아줌마...”“그래... 민정아... 울지 마, 울지 마...”너무 울어서 눈두덩이가 벌겋게 부어오른 박민정은 흐느끼며 대답했다.“네, 저 안 울어요. 아줌마는 괜찮아질 거예요. 꼭 괜찮을 거예요.”은정숙의 아직 남아있는 기운은 분명 회광반조로 인한 것이었다. 그녀의 눈길은 천천히 창밖으로 향해 하얀 바깥세상을 눈동자에 담았다.“이제... 곧 새해구나... 설날이야...”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박민정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네, 맞아요.”“우리 집에 가자꾸나.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네, 그래요. 우리 집에 가요.”박민정은 두 팔을 뻗어 은정숙을 안았다. 마르다 못해 뼈밖에 없는 은정숙은 별로 힘이 없는 박민정도 거뜬히 안아 들 수가 있었다.은정숙을 안고 긴 복도를 따라 밖으로 나가면서, 그녀가 갑자기 떠나갈까 봐 박민정은그녀한테 계속하여 말을 걸었다.“지금 바로 집에 갈 거예요. 설이 되면 떡국도 먹고 만두도 빚어요, 우리. 설이니까 물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겠죠? 윤우랑 예찬이가 세배도 하고, 세뱃돈도 주셔야죠.”은정숙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멀게 느껴지고 눈앞도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박민정도 품 안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엄마. 엄마... 가면 안 돼요. 제발... 저랑 계속 같이 있기로 약속했잖아요...”박민정은 진작에 은정숙을 자신의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엄마보다 더 친한 엄마였다.그녀가 엄마라고 부르는 걸 들은 은정숙은 마지막 힘을 다 해 두 글자를 뱉었다.“그
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박민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남준 씨, 곧 설날이에요.”“응, 맞아.”“이제 아줌마는 여기 없네요.”박민정은 유남준의 옷을 꽉 붙들며 슬픔을 참아보려 했다. 유남준은 위로의 말 대신 그녀를 꼭 껴안으며 이마에 다정한 뽀뽀를 남겼다.그 순간, 이미 흘릴 만큼 흘려 말라버린 줄만 알았던 눈가에 또 눈물이 차올라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다 제 탓이에요. 나 때문이 아니면 한수민을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되지도 않았을 건데...”“아주머니가 너한테 남긴 편지가 있어. 영천댁이 아주머니의 심부름을 받고 그 편지를 가져왔어.”그녀의 자책을 끊어내며 유남준이 말했다. 박민정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을 들고 그를 보며 물었다.“어디 있어요, 편지?”유남준은 몸을 일으켜 협탁 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편지를 꺼내 박민정에게 건넸다.박민정이 서둘러 그 편지를 열어 보니 은정숙이 쓴 몇 구절 글씨가 눈 안에 들어왔다.“민정아. 아마 네가 이 편지를 보게 됐을 때는 난 이미 세상에 없을 거야. 너무 슬퍼하지 마. 이건 다 엄마의 팔자고 운명이야.”“엄마가 너한테 했던 얘기 기억하니? 사람이 늙으면 결국 다 죽는 거야. 그래서 엄마는 두렵지 않아. 그저 죽기 전에 널 위해서 뭔가를 해주고 싶을 뿐이야.”“의사 말로는 엄마가 이제 살날이 며칠 안 남았대. 나도 한수민을 어찌 못할 거란 걸 잘 알아. 어리석은 방법이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 여자를 감옥에 보내면 다신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끝으로, 너의 엄마라고 자칭한 걸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정말로 널 내 친딸로 생각해 왔어. 이번 한 번만 염치 불문하고 싶구나. 다음 생엔 우리 꼭 친 모녀로 태어나자. 나랑 약속할래?”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박민정은 마음이 찢겨나가는 듯이 아팠다.“그런 거였구나...”그녀는 은정숙이 무슨 마음으로 이 편지를 남겼는지 알 것만 같았다.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려는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한수민이
유남우는 그녀한테 쌓인 눈을 털어주려고 하였지만 박민정은 무의식에 몸을 피했다.“도련님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도련님이라는 호칭에 유남우는 손을 뻗은 채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가 뒤늦게야 거둬들였다.“뉴스를 보고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됐어. 전에 나한테 아주머니는 네 친어머니만큼 중요하다고 했었잖아. 그런 분이 돌아가셨으니 네가 많이 슬퍼할 거 같아, 걱정돼서 보러 왔어.”말을 마치고 유남우는 은정숙의 묘비를 향해 절을 했다.그가 어린 시절의 일을 아직도 그렇게 똑똑히 기억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박민정은 입꼬리를 어색하게 끌어당기며 말했다.“고마워요... 괜찮아요, 전.”추위로 얼굴이 퍼레진 박민정은 눈시울이 빨갛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앞에서는 강한 척, 괜찮은 척 안 해도 돼. 내가 얘기했잖아,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라고.”박민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한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그렇게 오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끝내 입을 열었다.“전 이제 돌아가야겠어요.”“데려다줄게.”그가 데려다주겠다는 말에 박민정은 바로 거절했다.“아뇨, 차를 근처에 주차했어요.”“너 지금 이 상태로 어떻게 운전하려고 그래?”유남우의 책망하는 말투에는 관심이 듬뿍 담겨있었다.“내 차로 가.”더는 거절하기가 어려운 박민정은 그를 따라 차로 향했다.유남우는 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며 여느 때와 같은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눈 좀 털어. 아니면 이따 감기 걸릴 수도 있어.”“고마워요.”수건을 받아 몸에 있는 눈을 털고 나서 차에 올라타자 유남우가 운전석에서 히터를 켜고 그녀가 어릴 때 가장 좋아하던 노래를 틀었다.순간 박민정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이 노래를 여기서 다시 듣게 될 줄 몰랐네요.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해외에서 치료받을 때 자주 들었었어.”유남우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동안 해외에서 잘
은정숙의 묘 앞에서 절을 올리고 난 조하랑과 예찬이는 박민정과 함께 돌아가기로 했다. 유남우의 차가 하도 커서 네 명이 탔는데도 전혀 비좁지 않았다.고급 차라면 조하랑도 꽤 많이 타봤다. 특히 최근에는 예찬이 덕분에 고급 차 구경을 더 많이 해보긴 하였지만, 차 내에 각종 의료 장비와 의사까지 갖춰져 있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차에서 바로 치료하면 될 것 같았다.세 사람을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박민정과 작별하고 난 뒤 유남우는 기사에게 돌아가자고 했다.그의 차가 떠나는 걸 보며 조하랑은 박민정한테 물었다.“남준 씨는 어디 갔어?”“내가 먼저 윤우랑 같이 돌아가라고 했어.”“아아...”조하랑은 또 박민정의 옷이 일부 젖어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며 유남준을 나무랐다.“그런다고 그냥 돌아가? 곁에서 널 지키지도 않고. 우산이라도 씌워주든가 해야지.”절친으로서 조하랑은 박민정이 그녀한테 잘 해주는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했다.“내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서 그런 거야. 들어가자, 춥다. 너랑 예찬이 감기 걸리겠어.”“어, 그래.”조하랑은 예찬이를 데리고 박민정의 뒤를 따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밖이 추워서 그런지 집안은 유난히 따뜻했다.유남준과 윤우는 이미 요리사한테 부탁하여 박민정이 평소 즐겨 먹는 음식으로 한 상 푸짐하게 차려 놓았다. 윤우는 조하랑과 예찬이를 보고 좀 의아해했다.“이모, 형. 여긴 어떻게 왔어?”“좀 늦었는데 같이 식사해도 괜찮겠지?”조하랑이 오자 집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물론이지.”조하랑은 두 아이와 함께 주방에서 일을 거들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왠지 텅 빈 것 같은 느낌에 박민정은 별로 밥맛이 없었다.유남우가 그녀의 곁으로 걸어와 물었다.“괜찮아?”그는 유남우처럼 따뜻한 말로 남을 위로해 주는 말재주가 없었다.“네.”박민정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배고플 텐데 얼른 식사부터 해요. 난 배가 안 고파요.”“안 고파도 먹어야 해.”은정숙한테 일이 생기고 나서부터
그한테 일이 생기기 전에 박민정은 몰래 떠났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대놓고 떠나겠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눈이 보이지 않아 능력이 없고 만만하다고 생각하여, 더는 그녀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잡아둘 실력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박민정은 그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눈꺼풀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우리 전에 이미 다 얘기가 된 거 아니었어요? 남준 씨도 저랑 이혼하기랑 약속했고, 더 이상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그녀를 잡은 유남준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순간 박민정은 손이 너무 아파 숨을 들이쉬며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유남준은 곧바로 손의 힘을 풀며 서늘하게 말했다.“난 동의 못 해.”“제가 적당한 선에서 보상할게요. 빚진 것도 일부 갚아줄 수 있어요. 교통사고에 대한 보상인 셈 치자고요.”사고가 날 때 유남준이 자신을 감싸며 다치지 않도록 해주었기에 박민정은 어느 정도의 보상을 해주는 것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그 말을 듣는 유남준은 처음으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다.“누가 그런 보상 해달래?!”그의 목소리 톤이 저도 몰래 높아지며, 하마터면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할 뻔하였다.“그럼 뭘 원해요? 말만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다... 읍...”유남준은 그녀의 말을 채 듣기도 전에 키스로 입을 막아버렸다.박민정은 경악한 눈으로 그를 밀어내려고 애썼지만 남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오늘 먼저 떠난 뒤에 그녀한테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경호원을 몰래 붙인 유남준은 유남우가 묘소에 와서 그녀와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의 점점 깊고 거칠어지는 키스에 박민정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어 그의 어깨를 세게 두드렸고, 그제야 입술이 살짝 떨어지자 숨을 가쁘게 들이쉬었다.“널 갖고 싶어.”유남준의 밭은 숨소리가 섞인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그의 말에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를 들쳐 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원래 몸이 약하고 요새 피곤하기까지 한 박민정은 그와 실
진주시.한수민의 상해치사 사건은 온 시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논란이 잠재울 수 없을 만큼 커져 아무리 많은 돈을 갖고 있어도 일시적으로 풀려나긴 힘들게 되었다.그녀는 처음으로 공포를 맛보았다.진주시에 돌아온 박민정은 구치소에 그녀를 만나러 갔다.잘 나가던 사모님의 화려한 겉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만 남은 한수민은 박민정을 보자 다짜고짜 물었다.“그 가정부는 어디 갔어?”“죽었어요. 당신이 해쳐서.”아무리 은정숙이 한수민은 억울하다고 했어도 박민정은 그녀가 아주 미웠다. 이제 가슴속에 일말의 모녀의 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은정숙이 참으로 어렵사리 그녀를 감옥에 보낸 만큼, 박민정 역시 이대로 풀려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아니야, 그 여자가 날 모함한 거야. 내가 죽인 거 아니라고!”“누가 목숨을 대가로 당신을 모함해요?”차갑기만 한 박민정의 눈동자를 보며 한수민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걸 알고, 답답하고 분한 마음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내가 어떻게 알아, 왜 갑자기 그런 미친 짓을 하는지! 나야말로 묻고 싶어, 왜 죽을 각오로 날 해치려 드는지!”한수민의 말에 박민정의 마음은 더 씁쓸해졌다.이 세상에 오로지 남을 해치려는 목적으로 목숨을 내놓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지키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면.박민정은 일어서며 말했다.“여사님, 한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그게 뭔데?”한수민이 의문스러운 눈길로 박민정을 쳐다봤다.“가까이 와보세요.”박민정은 자신의 말대로 한수민이 가까이 다가오자 오직 둘만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당신이 한 짓이 아니라는 걸 난 알아요. 모함을 당했다는 증거도 갖고 있어요.”한수민의 동공이 순간 움츠러들었다.“뭐라고? 증거 어디 있어? 얼른 내놔, 증거! 가서 증언하라고!”“우리 엄마가 목숨으로 당신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내가 풀어줄 리가 있어요? 방금 한 말은 단지, 당신한테 나올 희망이 있는데 나올 수 없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예요
병원 치료가 끝나 한창 쉬고 있는 와중에 윤우는 누군가 밖에서 자신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이상하네...”자신의 직감은 틀려본 적이 없는지라 윤우는 일부러 자는 척하며 눈을 감았다가 한참 뒤에 갑자기 눈을 떠보니 창밖 풀숲에 어떤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황급히 몸을 숨기느라 쪼그려 앉는 것이었다.그러자 윤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은 사색에 빠진 유남준과 정말로 비슷했다.“말도 없이 몰래 사진을 찍네, 괘씸하게. 포즈도 못 취했는데 말이야.”윤우는 중얼거리며 한편으로 누가 보낸 사람일까 생각했다.한창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박민정이 문을 두드렸다.“윤우야, 다 쉬었어? 우리 이제 집에 갈까?”윤우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대답했다.“응.”침대에서 일어나 병복을 갈아입은 후 윤우는 박민정과 함께 병원을 떠났다.“엄마, 그 나쁜 여자는 이제 잡혀서 다신 못 나오는 거지?”윤우가 말한 나쁜 여자는 한수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박민정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럼 됐어.”윤우는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까 몰래 사진을 찍던 남자는 자취를 감춰 보이지 않았다....윤씨 가문 저택.한수민의 일로 YN 그룹 주식도 하루아침에 바닥을 쳐, 윤석후는 종일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만 풀풀 쉬었다.그러나 박민호는 맨날 소파에 앉아 만사태평하게 노트북으로 게임만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윤석후는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넌 나가서 일자리도 좀 찾고 그러면 안 되냐? 평생 부모한테 얹혀살 거냐? 네 엄마도 감옥에 갔는데 너도 따라갈 거냐?”그의 말을 듣던 박민호는 마우스를 탁자 위에 내팽개치며 소리쳤다.“지금 누가 부모한테 얹혀산다는 거예요? 당신이 지금 쓰고 있는 거, 모두 우리 박씨 집안 돈이란 걸 잊었어요? 엄마가 잡혀들어간 지 며칠이나 된다고 벌써 나한테 인상 쓰고 난리예요? 내가 당신이 먹은 거 도로 뱉게 해줘요?!”박민호가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
시즌 호텔.지적이고 우아한 여자가 건물 맨 꼭대기 층에서 진주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녀 손가락사이에 낀 담배 한 개비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깊고 그윽한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똑똑똑!”노크 소리가 나자 여자는 손에 든 담배를 눌러 불씨를 껐다.“들어와.”윤소현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엄마.”정수미는 돌아서며 매서웠던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졌다.“이리 와.”윤소현이 가까이 다가가자 손을 들어 그녀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며 물었다.“요즘 잘 지내고 있었어?”정수미는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처리하느라 매우 바빴지만 이번에 한수민이 살인했다는 소식을 듣고 딸 윤소현이 걱정되어 보러 왔다.윤소현은 정수미 앞에서 어리숙한 아이처럼 행동했다.“엄마, 나 잘 못 지내요. 요즘 너무 힘들어요.”이 말에 정수미는 눈빛을 달리하며 물었다.“누가 우리 딸을 힘들게 해? 유남우니?”그녀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유남우가 유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에 앉았다고 감히 그녀의 딸한테 함부로 하는 건가?하나 윤소현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그 사람 아니에요, 남우 씨는 저한테 잘해줘요.”“그럼 누구?”“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박민정이라고. 유남준의 와이픈데 나중에 제 형수님이 될 사람이에요.”박민정이라는 이름을 듣더니 정수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하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허, 고작 그 여자야?”아무 세력도 없는 귀머거리가 자신의 딸을 괴롭힌다고?비록 윤소현은 수양딸이긴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녀는 윤소현을 친딸처럼 키웠다. 그리하여 곱게 자란 윤소현은 소싯적부터 성격이 제멋대로여서 누구도 감히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다.“엄마가 잘 몰라서 그래요. 그 여자가 엄청 계략적이고 호박씨 까는 스타일이에요. 글쎄, 몰래 남우 씨를 유혹하고 있더라니까요. 저도 제 눈으로 보지 못했으면 안 믿었을 거예요.”윤소현이 흐느끼면서 하소연하는 말을 듣자마자 정수미는 버럭하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내 평생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박민정은 급하게 말했다.“어머, 또 비가 오네. 우리 우산 안 가져왔잖아요.”산에 오르기 전, 날씨 예보를 확인했을 때는 비 소식이 없었는데...유남준은 서둘러 배낭을 열어 확인했지만 역시 우산은 보이지 않았다.“괜찮아. 비가 그치면 다시 올라가면 돼.”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박민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근데 예찬이는 괜찮을까요? 혼자 있는데...”“세 살짜리도 아니잖아. 걱정하지 마.”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박예찬은 세 살은 아니지만 겨우 다섯, 여섯 살밖에 안 된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마침 그녀가 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뜻밖에도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박민정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휴대폰 화면을 보니 아이는 이미 우비를 입고 있었다.“엄마, 지금 어디예요? 비가 오고 있어요.”박민정은 주위를 비춰주며 말했다.“우린 아직 여기 정자에서 쉬고 있어. 너희는 산 정상에 도착했어?”박예찬은 대충 거리를 가늠해 보더니, 박민정이 있는 곳에서 정상까지는 아직 한 시간은 더 걸릴 거라 생각했다.“네, 저희는 도착했어요. 선생님이 비옷 나눠 주셨어요. 근데 엄마, 우산은 챙겼어요?”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박민정은 거짓말을 했다.“그럼, 챙겼지.”“다행이네요. 그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올라와요. 길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하고요.”박예찬의 다정한 당부에 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어, 조심할게.”이렇게 보니 정작 걱정할 필요가 있는 건 박예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괜히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유남준을 향해 말했다.“우리 가요. 천천히 가면 돼요.”“좋아.”유남준이 일어섰다.박민정도 기둥을 붙잡고 천천히 일어섰지만 갑자기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면서 그대로 유남준의 넓은 품속으로 쓰러지듯 안겨 버렸다.박민정은 순간 당황했다.“죄송해요. 그냥 갑자기 일어나서 약간
박민정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소리쳤다.“정말 괜찮아요!”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은 벌떡 일어나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갑작스러운 공중부양에 박민정은 깜짝 놀라 그의 옷깃을 본능적으로 움켜쥐었다.“빨리, 빨리 내려놔요!”두 사람의 다소 소란스러운 모습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여기저기서 부러운 듯한, 혹은 질투 어린 시선이 쏟아졌고 몇몇은 빈정거리는 말도 던졌다.“정말 유난이네. 겨우 산 중턱인데 남편한테 안겨 가겠다니.”그 말을 들은 어떤 여자는 남편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여보, 나도 못 걷겠어. 나도 좀 업어주든가, 안아주든가 해.”남편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꾸했다.“자기 체중이나 생각 좀 해봐. 내가 어떻게 안아?”하지만 그런 말에도 아내를 번쩍 안아 올린 남편도 있었고 애써 힘을 내던 그는 이내 체력이 바닥나 금세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뜻밖의 분위기로 웃음과 농담이 오가는 가운데 최현아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유남준의 품에 안겨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박민정은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 없었다.“제발 내려놔요. 이러니까 더 불편하단 말이에요.”유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가 불편한데?”“그냥 불편해요.”박민정은 얼굴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유남준은 그제야 조용히 그녀를 내려주었다.“너무 높이 올라와서 숨이 차서 그런 거야?”박민정은 고개를 숙여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렇게 많은 부모와 아이들 앞에서 한 회사의 대표가 이렇게 유치한 짓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정말 창피하기 그지없었다.게다가 어린아이들까지 흥미를 보였는데 작은 여자아이가 옆의 남자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나중에 우리 결혼하고 내가 힘들다고 하면 너도 나 안아줘야 해.”남자아이는 당당하게 가슴을 두드렸다.“걱정 마!”박민정은 어처구니가 없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이 어린애들이 벌써 결혼 이야기를 하다니.’유남준은 그녀가 말없이 있는 걸 보
조민혁은 아내의 말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당신 말이 맞아. 내가 너무 좁게 생각했어. 당신이랑 동민이에게 괜한 고생을 시켰네.”한가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당신이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됐어요. 나도, 동민이도 다 이해해요.”부부는 이렇게 화해했지만 그들은 모른다. 어제의 일이 조동민에게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를.조동민은 유지훈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유지훈은 이것저것 지시하며 이리저리 움직이라고 했고 조동민은 아무 말 없이 순순히 따랐다.둘이 가파른 언덕에 이르렀을 때 조동민의 머릿속에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쳤고 그는 언덕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지훈아, 저기 좀 봐.”“뭐가 있는데?”유지훈이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살피자 조동민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차가운 눈빛을 드리웠다. 그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마치 유지훈을 밀어버리려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그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동민아, 유지훈! 선생님이 산에 올라가자고 하셔!”박예찬이었다.조동민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렸으나 속으로는 아쉬움이 밀려왔다.‘조금만 더 빨랐더라면...’유지훈은 돌아서며 말했다.“알겠어, 가자.”그는 앞장서 걸었고 조동민은 묵묵히 뒤따랐다.박예찬은 그들이 출발하자 조동민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아까... 유지훈을 밀려고 했지?”조동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예찬아, 제발 이 얘기 아무한테도 하지 마.”박예찬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되물었다.“내가 그런 고자질쟁이로 보여?”조동민은 고개를 저은 뒤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냥...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한 번쯤은 혼쭐을 내주고 싶었어.”박예찬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그건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야.”“왜? 밀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조동민은 이해하지 못한 채 되물었다.박예찬은 침착하게 설명했다.“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어. 유지훈이 다치면 누가 제일 먼저 의심받을까? 당연히 그 옆에 있던 너야.
박예찬은 조동민의 단호한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그래, 알겠어.”“고마워, 예찬아!”조동민은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유지훈은 조동민의 웃음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노를 참지 못한 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며 소리쳤다.“조동민, 너 또 까부는 거야?”조동민은 젓가락을 꼭 쥐었지만 박예찬이 나서기 직전 먼저 웃으며 말했다.“지훈아,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러겠어. 어제는 내가 잘못했어. 화풀어, 응?”유지훈은 순간 어리둥절했다.‘이 녀석,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거지?’분명 전엔 자신의 심부름꾼 노릇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는데.조동민은 이제 상황을 파악할 줄 알았다. 괜한 고집은 소용없다는 걸, 자신은 멋대로 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진짜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유지훈이 묻자 조동민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다른 애들은 지훈이 너랑 안 놀아줘도 난 같이 놀아줄게.”박예찬은 이렇게 급변하는 조동민의 모습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환경은 정말 사람을 바꾸는 법이다.유지훈은 그제야 기분이 풀렸다.“그럼 밥 그만 먹고 나랑 놀러 가.”“응!”조동민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박예찬에게 말했다.“예찬아, 이따가 다시 올게.”“어딜 가? 가지 마!”유지훈이 못마땅한 듯 소리치자 조동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안 갈게.”그렇게 둘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최현아가 식당으로 들어왔고 유지훈과 조동민이 화해한 모습을 보고 조동민의 부모에게 팔짱을 낀 채 비웃듯 말했다.“보셨죠? 우리 지훈이가 얼마나 속이 넓은지. 당신 아들이랑 다시 잘 지내잖아요.”하지만 조동민의 부모는 이제 최현아에게 굳이 좋은 태도를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이제는 그들 뒤에 김씨 집안이 버티고 있으니.조동민의 어머니, 한가영이 냉소를 띠며 말했다.“근데요, 아까 보니까 다른 애들은 지훈이랑 안 놀려고 하던데요? 결국 우리 동민이만 지훈이를 마음 넓게 받아주
민박집 안, 모두가 아침 식사를 하며 여전히 아찔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칫하면 모두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유남준은 대충 식사를 마친 뒤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누가 한 짓인지 밝혀냈어?”그가 물었다.전화기 너머, 서다희는 무릎 꿇고 있는 무리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밤에 돌을 캐러 갔을 뿐, 사람을 해치려던 건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습니다.”한밤중에 돌을 캐러 갔다고?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하지만 이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으니 더 캐묻기도 애매했다.“대표님, 전 개인적으로 유석진 쪽이 의심됩니다.” 서다희가 덧붙였다.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유남준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표정은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그래. 이놈들은 전부 경찰서로 넘겨.”“알겠습니다.”전화를 끊고 돌아서던 유남준의 시야에 최현아와 그녀의 아들이 탄 차가 들어왔다.최현아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깥에 서 있는 키가 훤칠하고 냉정한 인상의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남준 씨.”그녀는 조심스레 불렀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남준 씨, 왜 혼자 밖에 있어요? 민정이랑 애들은요?”“안에서 밥 먹고 있습니다.”유남준은 냉담하게 답했다.최현아는 어색한 공기를 지우려는 듯 운전기사에게 자신이 호텔에서 포장해 온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아직 제대로 못 먹었을 것 같아서요. 여기 좀 싸 왔어요.”“괜찮습니다. 이런 건 형수님께서 드시죠.”유남준은 말만 남기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최현아는 묘한 허전함을 느꼈다.이때 곁에 있던 아들, 유지훈이 못마땅한 듯 물었다.“엄마, 제가 가져온 음식을 왜 삼촌한테 주려 해요?”최현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좋은 건 나눠야 하잖니.”하지만 유지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집에 있을 때 그는 엄마가 아빠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빠가 밥을 챙겨 먹었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엄마, 전 엄마가 이러는 거 싫어요. 앞으로 예찬이 아빠한테 이렇게 잘해주지 마세요. 전 삼촌이 싫
유남준이 나와보니 텐트와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큰 바위가 굴러떨어져 있었고 산사태도 발생한 흔적이 있었다.“위험할뻔했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사전에 점검하지 않았나?”분명 일부러 이런 짓을 벌인 게 아니라면 절대로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박민정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살짝 겁을 먹었다.“세상에. 만약 어제 비가 조금만 더 세게 내렸다면 우리 텐트도 분명 물에 잠기거나 바위에 깔렸을 것 같네요.”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는데 유남준은 겁에 질린 그녀를 보고 재빨리 다가와 안심시켰다.“우린 하느님이 도와줄 테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박민정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네.”학교 선생님들도 눈앞의 상황에 매우 놀랐다.지금은 비가 그쳤고 아무런 사고도 없었기에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이곳은 분명 최현아가 사전에 사람을 보내서 확인 후에 결정했던 곳인데 어떻게 이렇게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까?만약 이 거대한 바위들과 흙들이 비에 씻겨 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면 적어도 몇 집은 이미 큰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선생님들도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게 무리인 것 같아 모두가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오늘 저녁에는 민박집을 예약했다.“너무 좋아요. 이곳에서 자는 것보다 민박집에서 자는 게 훨씬 안전할 것 같네요.”학부모들도 선생님의 아이디어에 저마다 찬성하면서 하나둘씩 짐을 싸기 시작했다.이 시각, 최현아는 진작에 산에서 내려와 혹시나 산사태로 인한 인명피해 뉴스가 뜬 게 없는지 계속 핸드폰으로 확인했다.그러나 아침 9시가 넘었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이때, 유지훈도 진작에 잠에서 깼다가 문득 최현아에게 물었다.“엄마, 저희는 왜 계속 산에 있지 않고 내려왔나요? 저는 배도 안 아픈데.”그의 말에 최현아는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아무 말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선생님께서 오늘에는 더 높은 산에 올라갈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저도 산에
저녁이 되더니 약간의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점차 빗방울이 굵어졌다.원래 유남준은 오늘 이불을 덮고 자려고 했으나 비가 오니 어쩔 수 없이 다시 침낭에서 자야 했다.박민정은 밖에서 요란하게 들리는 천둥소리가 무서워 이불 안으로 꼭꼭 숨었다.옆에 자기 아들이 누워있어 티는 내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박민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예찬이 손을 뻗어 그녀의 침낭을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엄마, 나랑 같이 자자.”“응? 왜?”박민정은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아니면 나랑 같이 잘까? 나 천둥소리가 너무 무서운데.”이때, 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박예찬은 원래 자신이 하려던 말을 그에게 뺏긴 게 너무 괘씸해서 그를 도끼눈으로 째려봤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천둥소리를 무서워한다고요?”“응. 좀 무섭네?”유남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는데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박민정은 사람마다 약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남준같이 돈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도 분명 약점이나 두려워하는 게 있을 텐데 저 사람한테는 그게 천둥소리인가 싶었다.“괜찮아요. 잠들면 금방 안 들릴 테니까.”박민정은 아까까지 너무 무서웠지만 같이 얘기를 나누다 보니 좀 괜찮아진 것 같았다.그러나 유남준은 약간 진정된 그녀를 보고는 자신이 세워둔 작전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 같아 의기소침해졌다가 용기를 내서 다시 물었다.“이쪽으로 좀 오지 않을래?”그의 말에 박민정은 침낭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구르다가 마침 박예찬의 침낭에 딱 붙게 되었다. 박예찬이 흐뭇해하던 찰나에 또다시 유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찬이는 천둥소리가 안 무섭지?”박예찬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빠르게 답했다.“당연하죠. 남자로서 어떻게 천둥소리 따위를 무서워하겠어요? 제가 보호해 줄 테니까 안심하세요.”“그럼 네가 침낭 끝에 자면서 우리를 보호해 줄래?”유남준의 말에 박예찬은 그제야 그의 꾀에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박민정의
박민정은 뜬금없이 자기 앞으로 내미는 음식을 보고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뭐예요?”“형수가 담아줬는데 안에 고기도 있더라고. 아까 잘 못 먹던데 이거라도 먹어.”최현아는 마침 그의 뒤를 따라왔다가 마지막 한마디를 똑똑히 듣게 되었는데 순간 뜨겁게 불타올랐던 마음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차갑게 식었다.유남준이 자기한테 마음이 있어서 호의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마음을 이용해서 박민정에게 애정 공세 할 줄은 몰랐다.“남준 씨는 참 다정한 남편이네요. 제가 가져다준 음식을 그대로 민정 씨에게 줄 만큼.”말속에 가시가 돋혀 있었다.솔직히 저녁 식사가 부실했던 건 사실이었고 양도 적은 데다가 온통 채소뿐이라 박민정은 진작에 허기져 있었다.그가 건네준 음식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최현아를 보고는 막 거절하려는데 유남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빨리 먹어. 너무 늦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으니까.”박민정은 그의 닦달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최현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형님, 그럼 감사히 먹을게요.”최현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겨우 답했다.“많이 먹어요.”그리고 한껏 어두워진 얼굴로 뒤돌아서더니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둬.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잖아!”최현아는 원래 유남준이 자기 마음을 받아주면 이따가 이 남자만 살려주려고 마음먹었다.그러나 이제 보니 그럴 필요 없이 그냥 세 가족을 모두 죽여버리면 될 것 같았다.그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박민정은 도시락에 담긴 다양한 음식을 보고는 순식간에 식욕이 올라왔다.“와, 너무 맛있겠다.”그리고 다시 반찬들을 가지런히 모으더니 두 사람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예찬아, 남우 씨, 너무 많아서 저 혼자는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우리 같이 먹어요.”뜬금없이 자신을 남우라고 부르는 모습에 살짝 언짢아졌지만 그래도 티를 낼 수 없었다.“그래.”그렇게 세 사람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맛있는
오늘 저녁은 학교에서 준비해 줬다.사실 물고기를 잡아서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했는데 다들 많이 잡지 못한 바람에 식사가 조금 부실했다.하여 저녁 식사 시간이 돌아오니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에너지 소모가 많았던 탓에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게 되었다.유지훈은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박예찬을 신경 썼다.그리고 내심 박예찬 주변에 친구가 많은 게 부러웠지만 이제 와서 그에게 붙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한편, 최현아는 오늘 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되어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 쪽을 바라보았는데 세 가족이 화기애애해 보이는 모습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피어올랐다.저녁 식사가 다 끝난 뒤 각자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최현아가 어느새 유남준의 곁에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남준 씨, 음식은 입에 잘 맞았나요? 제가 음식을 따로 싸 왔는데 괜찮으시면 좀 드실래요?”그러나 유남준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괜찮습니다.”어제랑 다르게 차가운 그의 태도 때문에 최현아는 순간 멍해졌다.분명 어제 자신이 땀을 닦아줘도 가만히 있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나 싶었다.“그래도 제가 남준 씨 형수인데 너무 체면 차릴 필요 없어요. 제가 금방 가지고 올게요.”최현아는 유남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빨리 음식 가지러 달려갔다.그저 유남준이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보고 오해할까 봐 철벽친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박예찬과 무료함을 달래려 잡초를 뽑고 있다가 무심결에 최현아와 유남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박예찬에게 물었다.“저 두 사람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박예찬은 박민정이 풀 뽑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열심히 같이 뽑다가 문득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유남준이 또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다.“엄마,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하나는 유남준의 좋은 시간을 방해할 것 같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괜히 박예찬이 가서 물어보면 마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