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호텔.지적이고 우아한 여자가 건물 맨 꼭대기 층에서 진주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녀 손가락사이에 낀 담배 한 개비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깊고 그윽한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똑똑똑!”노크 소리가 나자 여자는 손에 든 담배를 눌러 불씨를 껐다.“들어와.”윤소현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엄마.”정수미는 돌아서며 매서웠던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졌다.“이리 와.”윤소현이 가까이 다가가자 손을 들어 그녀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며 물었다.“요즘 잘 지내고 있었어?”정수미는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처리하느라 매우 바빴지만 이번에 한수민이 살인했다는 소식을 듣고 딸 윤소현이 걱정되어 보러 왔다.윤소현은 정수미 앞에서 어리숙한 아이처럼 행동했다.“엄마, 나 잘 못 지내요. 요즘 너무 힘들어요.”이 말에 정수미는 눈빛을 달리하며 물었다.“누가 우리 딸을 힘들게 해? 유남우니?”그녀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유남우가 유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에 앉았다고 감히 그녀의 딸한테 함부로 하는 건가?하나 윤소현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그 사람 아니에요, 남우 씨는 저한테 잘해줘요.”“그럼 누구?”“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박민정이라고. 유남준의 와이픈데 나중에 제 형수님이 될 사람이에요.”박민정이라는 이름을 듣더니 정수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하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허, 고작 그 여자야?”아무 세력도 없는 귀머거리가 자신의 딸을 괴롭힌다고?비록 윤소현은 수양딸이긴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녀는 윤소현을 친딸처럼 키웠다. 그리하여 곱게 자란 윤소현은 소싯적부터 성격이 제멋대로여서 누구도 감히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다.“엄마가 잘 몰라서 그래요. 그 여자가 엄청 계략적이고 호박씨 까는 스타일이에요. 글쎄, 몰래 남우 씨를 유혹하고 있더라니까요. 저도 제 눈으로 보지 못했으면 안 믿었을 거예요.”윤소현이 흐느끼면서 하소연하는 말을 듣자마자 정수미는 버럭하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내 평생
차는 박민정과 불과 1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멈춰 섰다.그녀의 눈동자는 약간 움츠러들었지만 얼굴색은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여기에는 감시카메라도 있는데 백주대낮에 대놓고 자신을 해코지할 거라 생각지 않았다.눈앞에 보이는 예쁘고도 표정이 덤덤한 여자를 보며, 정수미는 만약 딸 때문이 아니었다면 박민정한테 아껴주고 싶은 감정이 조금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정말 내 딸과 맞서겠다는 거야?”정수미가 서늘한 얼굴로 묻자 박민정은 사실대로 얘기했다.“전 유남우 씨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에요. 지금도 아니고, 앞으로는 더더욱 아닐 거예요.”유남준과 함께 하기로 결심한 그녀가 유남우의 마음을 받을 리 없었다.설령 유남준과 헤어지더라도 유남우의 품에 안길 가능성은 없었다. 그녀와 유남준 사이에 아이가 몇 명이나 있으니 말이다.“그 말 꼭 지키는 게 좋을 거야.”정수미는 기사한테 돌아가자고 지시했다. 그리고 가는 길에 백미러에 비친 박민정의 얼굴을 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방금 본 박민정의 성격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속으로 가늠하고 있었다.그 후 그녀가 고영란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얘기를 한 것인지, 그날 저녁이 되자 고영란은 윤소현을 집에 초대해 며칠 묵었다가 설을 같이 보내자고 했다.윤소현은 정수미의 수단에 탄복했다. 진주에서 철의 여자로 유명한 고영란도 정수미의 말 몇 마디에 바로 집에 오라는 말을 하니 말이다.윤소현은 들뜬 마음으로 정수미한테 전화했다.“엄마, 엄마 정말 대단해요. 그리고 너무 고마워요.”정수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내가 이미 박민정한테 경고했어. 보아하니 이젠 유남우한테 딴 마음을 품지 못할 거야.”‘그냥 경고만 했다고?’윤소현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짝 삐죽거렸다.“엄마 혹시 그 여자의 순진한 모습에 속은 거 아니에요? 제가 얘기했잖아요, 그 여자 겉 다르고 속 다르다고요. 전에도 나한테 남우 씨랑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그러더니, 얼마 안 지나서 또 사적으로 연락해서 만나고 그랬
“네가 뭘 들었는데?” 아들에 관한 일이라면 고영란은 사소한 것도 빼먹지 않고 일일이 신경을 썼다.윤소현은 얼렁뚱땅 말을 얼버무리며 그녀의 궁금증을 한층 더 유발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헛소문일 거예요. 남우 씨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그녀가 이럴수록 고영란은 무슨 일인지 더욱 알고 싶어졌다. “우물쭈물 숨기지 말고 아줌마한테 말해봐.” 윤소현은 마지못한 척하며 천천히 얘기를 꺼냈다.“저도 들은 얘긴데, 형수님이 예전에 남우 씨를 좋아했다더라고요. 둘이 연애도 했었다고 하던데...” 이 말을 들은 고영란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워낙에 박민정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유남우한테도 찝쩍댔다니 더 화가 치밀었다.“걔 때문에 진짜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구먼.”고영란이 심기 불편한 얼굴로 차갑게 말을 내뱉자 윤소현은 얼른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화내지 마세요, 아줌마. 사실 난 남우 씨가 형수님과 연애했단 얘길 안 믿어요. 그냥 좀 걱정인 게...”“무슨 걱정?”“형수님이 지금 이대로 만족 안 하실까 봐...”윤소현의 눈에는 근심이 잔뜩 어려있었다.“원래는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 여기까지 나왔으니 저도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지난번에 형수님이 남우 씨를 따로 만나는 걸 봤는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형수님 눈시울이 빨갛더라고요.”묵묵히 듣고 있던 고영란은 참을 수 없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집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소현아, 이 일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알겠지?”고영란은 목소리를 낮추며 신신당부했다.그러자 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물론이죠.”...두원 별장. 박민정은 마음을 갈무리하고 유남준과 윤우와 함께 새해를 맞이할 장식을 꾸미며 은정숙의 영정사진을 가장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두었다.“엄마, 이러면 우리같이 설 쇠는 셈이지, 그렇지?”은정숙의 사진을 쓰다듬으며 한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하였다. 한참 뒤 윤우가 다가왔다.“할머니는 하늘
박민정은 깨어나서 눈을 뜨니 유남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윤우는 없어 눈동자에 의문이 가득 들어찼다.일어나려고 하며 아주 가볍게 부스럭거렸는데도 유남준은 깨어나서 그녀를 다시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깼어?”“윤우는 어디 갔어요?” 그녀가 묻자 유남준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했다.“좀 비좁은 거 같아서 옆방 침대에 눕혔어.”‘2미터가 넘는 큰 침대가 비좁다고?’박민정은 일어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은 오히려 더 세게 끌어당겼고 그의 목울대도 살짝 울렁였다.“좀 더 자자.”얇은 잠옷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몸이 닿았다.“싫어요, 잠이 안 와요.” 박민정은 유남준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큰 손바닥으로 꼭 감싸 쥐었다.“말 들어.” 그의 나지막한 저음의 목소리와 뜨거운 호흡이 귓속을 파고들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고개를 들어보니 창밖의 햇살이 그의 얼굴에 부서져 금가루를 뿌린 듯이 반짝반짝했다.시선은 저도 모르게 그의 얇은 입술에 머물러졌고,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상황이 믿기 어려웠다. 잠깐 넋을 잃었을 때, 유남준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뽀뽀를 했다.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손바닥을 가볍게 쓸며 동그라미를 그렸다.“민정아, 나 좀 불편해.”박민정은 멍하니 그를 보며 물었다.“어디가 불편해요?” 유남준은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하체로 향했다.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이런 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침대 협탁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렸다.박민정은 휴대전화를 가지러 몸을 일으키기 위해 유남준의 팔뚝을 깨물었다. 유남준은 한번 끙, 하는 소리를 내더니 그녀를 놓아주었다. 고영란한테서 온 전화인 걸 확인하고 박민정은 처음에 받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 유남준과 다시 시작하기로 했으므로 생각 끝에 전화를 받았다.“내일이면 설인데, 남준이랑 같이 오늘 바로
윤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기 낳는데도 절차를 많이 거쳐야 하는 건가? 이 방면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윤우가 사색에 빠진 사이에 박민정은 이미 옷을 다 챙겨입고 얼굴을 붉힌 채로 방에서나왔다. “서 비서님, 여긴 어쩐 일이에요?”서다희는 아무 핑계를 대며 대답했다.“대표님한테 물어볼 게 좀 있어서요.” 박민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쑥스러운 얼굴로 윤우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유남준은 서다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는 일이 있다고 밖에 나갔다. 박민정은 어디로 가는 지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간 뒤, 서다희는 요 몇 달 동안 가로채 온 프로젝트에 대한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유남준은 다 듣고 나서 말했다.“요즘 수고 많았어. 이제 설인데 며칠 푹 쉬어.” 그 말을 들은 서다희는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다름이 아니라 유남준의 입에서 수고했다는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해가 서쪽에서 뜨기라도 한 건가? “수고는요,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건데요.”상사의 갑작스러운 관심에 몸 둘 바를 몰랐다.유남준은 그의 표정 변화를 알 수 없었다. 박민정과 매일 같이 생활하다 나니 그녀한테 서서히 물들어 주변 사람들한테도 그녀가 하는 것처럼 온화하게 대하게 되었다.“다른 일은 없어?”그가 물으니 서다희는 하나 생각난 것이 있어 보고를 드렸다.“김 이사님이랑 방성원 씨가 오늘 밤에 수호 클럽에서 대표님 보자고 하네요.”유남준은 대외적으로 아직 기억상실증에 걸렸으므로 김인우가 그를 만나려면 반드시 서다희를 통해야 했다.‘오늘 밤?’유남준은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안 가, 약속 있다고 해.” 내일은 섣달그믐날이라 박민정과 같이 집에서 오붓하게 지내기로 했다.서다희는 그가 안 갈 줄 알고 있었다. 이젠 일하는 것 외에 그는 박민정하고만 시간을 보냈다. 클럽이 아니라 밖에 산책하러 가도 혼자 가는 법이 없었다.“알겠어요.”...그날 밤, 수호클럽 맨 위층. 김인우와 방성원은 룸에서 다른 부잣집 도
조하랑은 사람들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을 들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김인우 씨, 할아버지께서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셨어요.”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자 사방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사람들은 의심스럽게 그녀를 쳐다보다가 점차 그녀의 말을 되새겼다.밥 먹으러 오라고?현장에 있던 부잣집 도련님들은 하나 둘 정신을 차리고 하나같이 웃음을 참았다.김 씨네 도련님이 지금 저 여자한테 집에 와서 밥 먹으라는 소리를 들은 거야?김인우는 안색이 하얗게 변해 그녀를 모른 척하려고 했다.조하랑은 두 번 말 하기 귀찮아 옆을 바라보았다.그러자 박예찬이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는데, 내일은 섣달 그믐날인데 내일도 늦게 온다면 영원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그리고 그는 조하랑을 향해 말했다."엄마, 말 전했으니 이제 집에 가자.”조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떠나기 전에 김인우의 곁에 있는 그 친구들을 노려보며 큰소리로 말했다."우리 조씨 가문은 가난한 집안이지만 한번도 김씨 가문의 재산을 탐낸 적은 없어요. 오히려 김씨 가문에서 나를 시집오게 하려고 하는 거 거든요.”말을 마친 그녀는 박예찬을 데리고 떠났다.솔직히 말해서 그녀 또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기에는 약간 부끄러웠다.사람들은 방금 봤던 여자가 그 조하랑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쩐지 김인우가 싫어한다 싶더니. 누가 봐도 기가 엄청 세보이지 않는가.아이도 데리고 있었고."인우야, 저 사람들이 네... 약혼녀와 아들?"옆에서 방성원이 놀리듯 물었다.김인우은 방금 떠나간 두 사람을 떠올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성원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나는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볼게.”김인우는 외투를 들고 황급히 나갔다.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등뒤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저 사람이 조하랑이야? 배짱도 두둑하네. 감히 인우 오빠에게 그렇게 말을 하다니.”"김씨 집안 장손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모양이지.”"그런데 그 애,
조하랑은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민정아, 사실 생각해봤는데, 예전에는 사실 네가 사람을 잘못 알고 유남준을 유남우로 생각했잖아. 그래서 그가 널 사랑하지 않는 쓰레기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지.”"이렇게 보면 그는 너와 전혀 모르는 사이나 다름 없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보는게 맞겠지.”"딱 한 가지 나쁜 게 있다면 네 어머니와 동생이 잘못한 걸 네 탓으로 돌린 것 뿐인 것 같은데.”"결국엔 그냥 자존심이 너무 센 짠돌이 정도지, 쓰레기까지는 아닌 것 같아.”여기까지 생각한 조하랑은 약간 마음이 놓였다.박민정도 대답했다."응, 알아.”그러나 조하랑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는 지금 기억상실 외에도 눈이 멀었잖아. 민정아, 그와 함께 있으면 넌 아주 힘들어 질 거야.”장님이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게다가 상류사회에서 태어났으니 험한 일을 하려고 하지도 않겠지.이런 생각을 하자 조하랑은 다시 걱정이 되었다."민정아, 그 얼굴에 눈이 멀어서는 안돼. 그 사람보다는 연지석 씨가 나은 것 같은데.”하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입장의 변화에도 박민정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게 모두 조하랑이 자신을 걱정해서라는 것을 알았다."왜 또 지석이 얘기야, 저번에 지석이가 나한테 말했어, 우리는 그저 친구라고. 나도 걔한테는 안 어울리고.”조하랑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할 때, 도우미가 와서 밥을 먹으라고 전했다.그녀는 황급히 전화를 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를 개인적으로 만나 얘기를 해 그가 알아서 물러서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사람이 박민정과 두 아이를 방해하게 둬서는 안됐다.박민정도 저녁을 먹으러 가려고 돌아섰을 때, 그녀는 유남준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유남준은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얇은 입술을 약간 벌렸다.”밥 먹으러 가자.”"그래요.""일부러 전화하는 걸 들은 건 아니야."유남준이 말하자 박민정이 약간 웃었
”하랑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할아버지는 그저 너라는 사람을 좋게 본거니까. 너와 인우 사이에 아이가 없어도 할아버지는 너를 손자며느리로 인정해."김훈이 말했다.조하랑은 여태껏 이렇게 누군가에게서 인정받은 적이 없었기에 감동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이러고 보니 사실 김씨 집안으로 시집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김인우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고부갈등도 없고, 유일한 할아버지께서는 그녀를 이렇게 잘 대해주시니."할아버지한테는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 없단다.”내친김에 조하랑은 계속 생각하고 있던 일을 말했다."할아버지, 내일 제 친구를 만나러 가도 될까요?”"물론이지. 하지만 예찬이는 남겨 놓고 가야 한다. 친척들이랑 만나기로 약속했거든. 다들 똑똑한 증손자 얼굴 보려고 지방에서 올라왔어.”"알겠어요."마침 조하랑도 유남준과 두 사람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이튿날.밖에는 흰 눈이 내리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정말로 유씨네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고영란은 원래 두 사람이 본가에 온 틈을 타서 박민정을 혼내려 했지만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유남우는 아침을 먹고 윤소현과 고영란에게 일하러 가겠다고 인사했다.이를 본 윤소현이 말했다."오늘 설인데도 일을 해요?”"응, 요즘 회사 프로젝트 몇 개에 문제가 생겼어.”유남우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까만 눈동자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줘요.”고영란의 앞이었기에 윤소현은 잘 보이려 했다."응."유준우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나섰다.고영란이 흐뭇하게 윤소현을 보며 말했다. "소현아, 너도 남우가 회사를 인수한 지 얼마 안 됐다는 걸 알지?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고 있어요.”"며칠 전 어머니께 호산 그룹과의 협업도 고려해 달라고 말씀드렸어요.”윤소현이 말하는 어머니는 바로 정수미였다.그 말을 들은 고영란은 윤소현이 더욱 좋아졌다.현재 유남우는 호산 그룹에서 불안정
고영란은 투박하기 그지없는 윤소현의 말투를 들으며 왜 이런 여자가 유씨 가문에 시집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혀 상류층의 여인 다운 기품이 없었다.“그럼 남준이는? 아직도 안 왔어요?”잠시 망설이던 집사가 대답했다.“큰 도련님은 지금 두원 별장에 계십니다. 설날엔 안 오실 거라고 하셨어요.“박민정을 찾지 못한 유남준이 아직도 우울에 빠져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고영란은 더 묻지 않았다.“알겠어요. 이제 음식 준비 부탁해요.”“네.”집사는 곧바로 사람들에게 음식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영란은 두 아이를 베이비 시터에게 맡기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식탁에는 윤소현, 박윤우, 박예찬 그리고 고영란 이렇게 네 명뿐이었다. 오늘따라 식탁이 아주 썰렁하게만 느껴졌다.“고기 많이 먹어.”고영란은 두 아이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윤소현은 두 아이에게 지나친 애정을 쏟는 고영란을 바라보며 질투심으로 불편한 마음을 안고 음식을 먹었다.그때, 식탁으로 다가온 집사가 말했다.“사모님, 정 대표님이 오셨는데요.”정수미는 박민정이 자신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박민정의 행방을 찾는 동시에 네 명의 외손자들을 자주 찾아왔다.그녀는 이제라도 박민정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상하기 위해 외손자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쏟아붓고 있었다.“고마워요.”고영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미를 맞이하러 갔다. 그리고 윤소현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고영란의 뒤를 따라나섰다.하지만 박윤우와 박예찬은 식사에만 집중하며 정수미의 등장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아이들 역시 이제는 정수미가 엄마의 친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복잡했다.“엄마, 저녁 식사 중이었는데, 같이 드실래요?”윤소현은 웃는 얼굴로 정수미에게 말했다.하지만 정수미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이미 먹고 왔어. 이번에는 그냥 아이들 보러 온 거야.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네.”윤소현은 정수미의 냉한 태도를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
1년 후, 설날.해외의 어느 한 소도시.박민정은 직접 송편을 빚으며 설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남우 오빠, 언제 도착해?”유남우는 이미 공항에 도착한 상태였다.“아마 저녁 9시쯤 도착할 거야.”“알겠어. 기다리고 있을게.”박민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유남우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그래도 배고프면 먼저 먹고 있어. 알겠지?”“알겠어, 나도 바보 아니거든.”박민정이 웃으며 대꾸했다.곧 비행기를 타야 했던 유남우는 아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비행기에 올라탄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지난 1년 동안 그는 박민정을 여러 장소로 옮기며 정기적으로 그녀에게 최면을 걸어왔다.그로 인해 박민정은 많은 것을 잊어버렸고 이제는 유남우와 유남우가 만들어준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었다.유남우는 가족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해외에 자주 나가지는 않았다. 해외로 나간다고 해도 그저 일 때문이라고만 둘러댔다.오늘은 가족들과 함께 설날을 보낼 예정이었지만 마침 걸려온 박민정의 전화에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올해 설 만큼은 박민정과 함께하고 싶었다.그 시각, 유씨 가문의 집.윤소현은 방 안에서 쉴 새 없이 울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짜증 내고 있었다.“왜 이렇게 울기만 하는 거야?”베이비 시터가 다가와 말했다.“배가 고픈 모양이네요. 제가 데리고 나가서 우유 먹일게요.”“얼른 데리고 가, 얘 정말 짜증 나 죽겠네.”윤소현은 아들이라고 믿었던 자신의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돌이 지난 두 남자아이와 함께 있던 고영란의 모습을 보자마자 질투심이 밀려왔다.“어머님, 편애가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다혜 울고 있는 건 들리지도 않으세요? 손자들 돌봐주실 시간은 있으시면서 손녀는 신경도 안 쓰시네요?”고영란은 그녀의 불평에 눈살을 찌푸렸다.고영란은 손녀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다혜에게는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았다.윤소현이 낳은 딸은
“정말 실망이다.”정수미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윤소현은 힘겹게 일어나 그녀를 쫓아가며 말했다.“엄마, 함미현 일 기억 안 나세요? 저도 그때처럼 될까 봐 두려워서 그랬어요. 엄마도 아시잖아요.”정수미는 함미현 얘기가 나오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네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정말 함미현한테 진실을 안 물어봤을 것 같니?”그 말에 윤소현의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설마 정수미가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조사를 마쳤을 줄은 몰랐다.“함미현 일은 제가 다 말씀드렸잖아요. 엄마가 어렵게 찾은 딸을 잃게 될까 봐, 혹시라도 진실을 알게 되면 상처 받으실까 봐 그랬던 거예요.”정수미는 그 말에 차가운 냉소를 흘렸다.“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랬다고? 그런데 미현이는 네가 박민정이 친딸이라는 걸 알고 그랬다고 하던데. 내가 평생 친딸을 못 찾게 하려고 미현이한테 연기시킨 거라더라.”윤소현이 변명해 보려고 했지만 정수미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제 거짓말 좀 그만해. 너 계속 이럴 거면 나도 더는 너 내 딸로 인정 못 해.”그 말에 윤소현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정수미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윤소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진짜 딸을 찾았다고 이제는 날 버리겠다는 거야? 박민정을 원한다는 거야? 하지만 이걸 어째. 박민정한테는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윤소현이 중얼거렸다.밖으로 나온 정수미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비서의 기척을 느꼈다. 비서는 애써 정수미를 위로해주며 말했다.“아가씨께서는 아무 문제 없으실 겁니다.”정수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난 정말 실패한 엄마야. 친딸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바로 옆에 내 딸을 두고도 못 알아봤어. 그런 주제에 양딸이 그렇게나 버릇없이 굴었는데도 난 계속 감싸기만 하다가 내 친딸을 해칠 뻔했어. 아마 민정이는 지금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비서를 통해 알아본 박민정은 마지막으로 정수미를 만났던 날, 심각한 모욕을 당하고 조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소식
박예찬은 연락이 닿는 순간, 박윤우가 서둘러 물었다.“형, 엄마 어떻게 됐어?”박예찬 역시 박윤우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금방 수술을 마치고 나온 동생을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무슨 소리야, 그게? 엄마 잘 계셔.”박윤우는 형마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스럽게 이마를 찌푸렸다.“형까지 나를 세 살 먹은 어린아이로 생각하는 거야? 이렇게 오랫동안 엄마가 날 보러 안 왔다는 건, 분명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잖아. 그리고 요즘 아빠도 거의 매일 밖에만 있고, 정민기 아저씨도 요즘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들었어. 엄마 실종된 거 맞지?”박예찬은 동생이 이 정도로 많이 알고 있을 줄 몰랐다.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더는 숨기지 않았다.“맞아, 엄마 실종됐어. 그리고 아직도 못 찾았고.”“어떻게 그럴 수 있어?”박윤우는 확신 어린 소식을 듣는 순간, 밀려오는 걱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엄마 납치당한 거 아니야?”“그럴 가능성도 있지.”박예찬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넌 이제 막 수술을 끝냈으니까 잘 쉬어야 해. 절대 다른 사람들 걱정시키지 말고, 엄마 돌아오실 때까지 건강하게 있어야 해. 그래야 엄마도 기뻐하실 거야.”박윤우는 자신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알겠어.”전화를 끊은 아이는 다시 병상에 누웠다.최근 며칠 동안 정수미도 손자들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다.지금 그녀는 밀려오는 후회를 멈출 수 없었다. 만약 박민정을 조금만 더 일찍 찾았더라면,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그날, 윤소현은 풀려났다.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곧장 정수미에게 달려가 울음을 터뜨리며 하소연했다.“엄마, 저는 다시는 못 돌아오는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다고요. 그 나쁜 놈이, 유남준이 저를 가둬놨어요. 너무 어둡고, 너무 조용해서 미치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임산부를 그런 곳에 가둬놨어요!”정수미는 그런 윤소현의 불쌍한 표정
유남준의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있었고 정돈되지 못한 모습이 전반적으로 초췌해 보였다.“이지원 조사하고 왔는데, 민정이의 실종과는 아무 관련도 없던데요.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거예요?”만약 윤소현이 임신 중인 아이가 유씨 가문의 아이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정수미의 양녀만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당장이라도 윤소현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윤소현의 수려한 얼굴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그럴 리 없어요, 이지원이 분명 저한테 그랬다고요. 박민정이랑 그 두 아이들 처리해준다고...”윤소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남준은 천천히 윤소현의 앞으로 다가갔다.“말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정말로 이지원이었어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요.”윤소현이 다시 대답했다.유남준은 바닥나버린 인내심에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윤소현은 다시 어둠과 침묵 속에 갇혀 버렸다.“남준 씨, 얼른 저 내보내 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제발 나 좀 꺼내달라니까!”그제야 윤소현은 자신이 유남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밖으로 나온 유남준은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찍혀있었지만 그중 일부는 정수미에게서 온 것들이었고, 다른 몇 통은 고영란에게서 온 것이었다.그는 제일 먼저 정수미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일이시죠?”“유 대표, 민정이 소식은 있나요?”정수미가 조심스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직 없습니다.”유남준이 대답했다.정수미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더욱 절망스러워졌다.“그럼... 소현이는 어떻게 됐나요?”윤소현은 어릴 때부터 정수미가 직접 지켜봐 왔던 아이였고, 그 아이와 깊은 정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현재 임신 중이었다.“소현 씨도 아무 일 없습니다.”“그럼, 소현이 좀 풀어줄 수 있을까요? 내가 직접 물어볼게요.”정수미가 다시 물었다.정수미는 어렸을 때부터 온갖 호사만 누리며 살아온 윤소현이 그런 감금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수미 본인 역시 윤소현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엄마...”이지원은 떠보듯 정수미를 부르고는 말을 이었다.“엄마, 언니가 사라졌어요.”그녀는 박민정의 일부터 처리한 후 윤소현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도무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정수미는 멍한 표정으로 뒤돌아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뭐?”“소현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저도 모르겠어요. 오늘 언니랑 같이 산부인과 검진 가려고 했는데, 어딜 갔는지 갑자기 사라졌어요.‘이지원이 대답했다.정수미는 멍한 표정으로 이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상황파악을 마치기도 전에 유남준이 사람들을 데리고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윤소현은 제가 가둬놨습니다.”유남준이 말했다.정수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현이는 왜 가둔 거죠?”“민정이의 실종은 분명 윤소현이랑 관련이 있으니까요.”유남준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이지원에게로 옮기며 말했다.“윤소현이 그러더라, 이지원 네가 내 아이들 데리고 갔다고. 민정이는 아이들 찾으러 간 거라고 하던데, 어디로 데려간 거야?”그 말에 이지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남준 오빠?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저랑 민정 언니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하지만 유남준이 그녀의 말을 믿어줄 리 없었다.곧바로 몇 명의 경호원이 다가와 이지원을 제압했다.“끌고 가!”이지원은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유남준의 수법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그녀가 스스로 이곳에 등장한 것도 전부 유남우 때문이었다. 그가 이지원에게 직접 유남준을 찾아가 박민정의 실종이 자신과는 관련 없다는 사실을 어필하라고 조언해주었기 때문이었다.“오해예요, 오빠. 소현 언니가 왜 그런 얘길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민정 씨 아이들 데리고 간 적 없어요.”뒤이어 그녀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정수미를 바라보았다.“엄마, 엄마.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 그동안 집에만 있었고, 어디 간 적도 없어요.”하지만 정수미는
정수미는 그 질문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대답했다.“유 대표는 이미 내가 민정이 친엄마라는 걸 알고 있었죠?”유남준은 그 말에도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되물었다.“그런데 대표님은 제 말 안 믿었잖아요.”정수미는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다 내가 어리석었어요, 내 잘못이에요... 저도 너무 후회 중이에요.”그동안 윤소현이 늘 박민정에 대해 안 좋은 얘기만 늘어놨던 탓에 정수미는 박민정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못했다.그 탓에 정수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박민정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줘버렸다.박민정이 자신을 찾아왔던 그때도, 정수미는 그녀를 가차 없이 비웃고 쫓아내 버렸다.“지금 민정이 어디 있어요? 찾았어요?”눈시울이 붉어진 정수미가 다시 물었다.유남준은 폐허로 시선을 돌리며 자신의 손에 꽉 쥐고 있던 반지를 보여주었다.“마지막으로 추적된 곳이 여기인데, 방금 민정이 반지를 찾았어요.”그가 낮게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정수미는 몸을 휘청이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기색을 보였다.놀란 비서가 다급히 정수미를 부축해 주었다.“대표님.”“얼른, 얼른 주변 수색해!”정수미가 지시했다.“알겠습니다.”비서는 곧바로 인력을 충원해 폐허 속에 남았을지도 모를 박민정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밤이 깊도록 폐허 속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박민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저 박민정과 관련된 물건만 몇 가지 발견되었을 뿐이었다.비서는 멍하니 서 있는 정수미의 곁에 서서 슬쩍 말을 꺼내 보았다.“아가씨 말이에요, 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죠?”그 말에 정신을 차린 정수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비서를 올려 보았다.“지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대로 봐야 할 것이고, 죽었다면 죽은 대로 시체를 봐야만 했다.정수미는 박민정이 이렇게 실종됐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민정이 여기 없는 거 확실해. 다른 데서 계속 찾아봐.”“네.”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유남준도 폐허
“뭐라고요?”정수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어떻게 실종됐다는 거예요?”“저도 잘은 몰라요.”설인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아무튼 벌써 이틀이에요. 이틀 동안 찾아 헤매는 중인데 도통 안 보이네요.”그 말을 들은 정수미가 몸을 휘청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그런 그녀를 비서가 붙잡아 주었다.“조심하세요, 대표님.”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어지러움에 정수미는 비서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 겨우 찾았는데 실종이라니?”“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누가 데려갔는지는 알아냈으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비서가 애써 정수미를 위로했다.“그래, 얼른 사람 보내서 민정이 좀 찾아내.”정수미가 말했다.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박민정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박민정을 찾아낼 것이다.“알겠습니다.”정씨 가문에서도 사람들을 시켜 전국적으로 박민정을 수색하기 시작했다.힘없이 자리를 뜨는 정수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설인하는 의아했다. 정수미가 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민정 씨, 제발 빨리 좀 돌아와요.”설인하가 혼자 중얼거렸다....한편, 유남준은 거의 진주 시내 전체를 뒤집다시피 했지만 박민정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유남준은 주변 지역에까지 사람을 보내 수색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그렇게 마침내, 단서를 발견했다.유남준은 즉시 차를 몰고 그곳으로 향했다.그리고 정수미는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 역시 박민정을 찾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결국, 두 세력이 힘을 합쳐 공동으로 박민정을 수색하기로 했다.그렇게 수색 속도는 한층 빨라졌다.사람들은 곧장 단서가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도착했을 때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오직 불에 다 타버린 집뿐이었다.차에서 내린 유남준은 망설임 없이 까맣게 불타버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민정아!
그녀가 쥔 친자 확인 감정서에는 두 사람이 모녀 관계라고 적혀 있었다.비서는 다른 병원에서도 받아온 서류들을 건네며 말했다.“이번엔 틀림없습니다, 대표님. 박민정 씨는 대표님의 친딸이 확실합니다. 지난번엔 저희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친자 확인 감정서를 쥔 정수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어떻게... 그 걔가 어떻게 내 딸이야?”박민정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수미는 너무 갑작스러운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그녀 역시 자신이 친딸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 짓들이 얼마나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제 어떡해야 하지?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어떻게 날 이런 식으로 갖고 놀아?”정수미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친자 확인 감정서를 손에 꼭 쥐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만큼 괴로웠다.“내가, 내가 그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라는 작자가 딸한테 오히려 모욕감만 잔뜩 줬으니...”정수미의 마음은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오랫동안 찾고 있던 딸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살아왔다.더군다나 친딸을 괴롭히는 자신의 양딸을 그렇게나 적극적으로 돕기까지 했다.비서 역시 이런 운명의 장난에 착잡함을 느끼고 있었다.“대표님께서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잖아요. 조금 더 일찍 아셨더라면 민정 씨를 해치지 않으셨을 겁니다.”정수미는 비서의 위로에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책을 멈추지 않았다.“그 아이가 날 찾아왔을 때도 난 상처만 잔뜩 줘버렸어. 얼마나 아팠을까.”오랜 세월 동안 눈물이라는 것을 거의 흘려보지 않았던 정수미였지만 하늘의 장난과도 같은 이 상황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난 정말 나쁜 년이야! 어떻게 친딸한테 그럴 수가 있어!”만약 이 세상에 후회 약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전 재산을 내걸고서라도 얻고 싶을 지경이었다.당장이라도 과거로 돌아가 정신 차리라며 자신의 뺨을 수차례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