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하랑은 사람들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을 들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김인우 씨, 할아버지께서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셨어요.”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자 사방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사람들은 의심스럽게 그녀를 쳐다보다가 점차 그녀의 말을 되새겼다.밥 먹으러 오라고?현장에 있던 부잣집 도련님들은 하나 둘 정신을 차리고 하나같이 웃음을 참았다.김 씨네 도련님이 지금 저 여자한테 집에 와서 밥 먹으라는 소리를 들은 거야?김인우는 안색이 하얗게 변해 그녀를 모른 척하려고 했다.조하랑은 두 번 말 하기 귀찮아 옆을 바라보았다.그러자 박예찬이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는데, 내일은 섣달 그믐날인데 내일도 늦게 온다면 영원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그리고 그는 조하랑을 향해 말했다."엄마, 말 전했으니 이제 집에 가자.”조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떠나기 전에 김인우의 곁에 있는 그 친구들을 노려보며 큰소리로 말했다."우리 조씨 가문은 가난한 집안이지만 한번도 김씨 가문의 재산을 탐낸 적은 없어요. 오히려 김씨 가문에서 나를 시집오게 하려고 하는 거 거든요.”말을 마친 그녀는 박예찬을 데리고 떠났다.솔직히 말해서 그녀 또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기에는 약간 부끄러웠다.사람들은 방금 봤던 여자가 그 조하랑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쩐지 김인우가 싫어한다 싶더니. 누가 봐도 기가 엄청 세보이지 않는가.아이도 데리고 있었고."인우야, 저 사람들이 네... 약혼녀와 아들?"옆에서 방성원이 놀리듯 물었다.김인우은 방금 떠나간 두 사람을 떠올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성원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나는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볼게.”김인우는 외투를 들고 황급히 나갔다.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등뒤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저 사람이 조하랑이야? 배짱도 두둑하네. 감히 인우 오빠에게 그렇게 말을 하다니.”"김씨 집안 장손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모양이지.”"그런데 그 애,
조하랑은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민정아, 사실 생각해봤는데, 예전에는 사실 네가 사람을 잘못 알고 유남준을 유남우로 생각했잖아. 그래서 그가 널 사랑하지 않는 쓰레기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지.”"이렇게 보면 그는 너와 전혀 모르는 사이나 다름 없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보는게 맞겠지.”"딱 한 가지 나쁜 게 있다면 네 어머니와 동생이 잘못한 걸 네 탓으로 돌린 것 뿐인 것 같은데.”"결국엔 그냥 자존심이 너무 센 짠돌이 정도지, 쓰레기까지는 아닌 것 같아.”여기까지 생각한 조하랑은 약간 마음이 놓였다.박민정도 대답했다."응, 알아.”그러나 조하랑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는 지금 기억상실 외에도 눈이 멀었잖아. 민정아, 그와 함께 있으면 넌 아주 힘들어 질 거야.”장님이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게다가 상류사회에서 태어났으니 험한 일을 하려고 하지도 않겠지.이런 생각을 하자 조하랑은 다시 걱정이 되었다."민정아, 그 얼굴에 눈이 멀어서는 안돼. 그 사람보다는 연지석 씨가 나은 것 같은데.”하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입장의 변화에도 박민정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게 모두 조하랑이 자신을 걱정해서라는 것을 알았다."왜 또 지석이 얘기야, 저번에 지석이가 나한테 말했어, 우리는 그저 친구라고. 나도 걔한테는 안 어울리고.”조하랑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할 때, 도우미가 와서 밥을 먹으라고 전했다.그녀는 황급히 전화를 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를 개인적으로 만나 얘기를 해 그가 알아서 물러서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사람이 박민정과 두 아이를 방해하게 둬서는 안됐다.박민정도 저녁을 먹으러 가려고 돌아섰을 때, 그녀는 유남준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유남준은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얇은 입술을 약간 벌렸다.”밥 먹으러 가자.”"그래요.""일부러 전화하는 걸 들은 건 아니야."유남준이 말하자 박민정이 약간 웃었
”하랑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할아버지는 그저 너라는 사람을 좋게 본거니까. 너와 인우 사이에 아이가 없어도 할아버지는 너를 손자며느리로 인정해."김훈이 말했다.조하랑은 여태껏 이렇게 누군가에게서 인정받은 적이 없었기에 감동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이러고 보니 사실 김씨 집안으로 시집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김인우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고부갈등도 없고, 유일한 할아버지께서는 그녀를 이렇게 잘 대해주시니."할아버지한테는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 없단다.”내친김에 조하랑은 계속 생각하고 있던 일을 말했다."할아버지, 내일 제 친구를 만나러 가도 될까요?”"물론이지. 하지만 예찬이는 남겨 놓고 가야 한다. 친척들이랑 만나기로 약속했거든. 다들 똑똑한 증손자 얼굴 보려고 지방에서 올라왔어.”"알겠어요."마침 조하랑도 유남준과 두 사람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이튿날.밖에는 흰 눈이 내리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정말로 유씨네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고영란은 원래 두 사람이 본가에 온 틈을 타서 박민정을 혼내려 했지만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유남우는 아침을 먹고 윤소현과 고영란에게 일하러 가겠다고 인사했다.이를 본 윤소현이 말했다."오늘 설인데도 일을 해요?”"응, 요즘 회사 프로젝트 몇 개에 문제가 생겼어.”유남우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까만 눈동자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줘요.”고영란의 앞이었기에 윤소현은 잘 보이려 했다."응."유준우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나섰다.고영란이 흐뭇하게 윤소현을 보며 말했다. "소현아, 너도 남우가 회사를 인수한 지 얼마 안 됐다는 걸 알지?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고 있어요.”"며칠 전 어머니께 호산 그룹과의 협업도 고려해 달라고 말씀드렸어요.”윤소현이 말하는 어머니는 바로 정수미였다.그 말을 들은 고영란은 윤소현이 더욱 좋아졌다.현재 유남우는 호산 그룹에서 불안정
조하랑은 차에서 내려 용기를 내어 유남준을 향해 걸어갔다."유남준 씨."유남준이 자리에 서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무슨 일입니까?”조하랑은 오는 길에 할 말을 다 생각하고 있었기에 대뜸 이렇게 말했다."우리 민정이는 착하고 순수해요. 그 애가 최근 몇 달 동안 당신에게 그렇게 잘 대해준 이유는 당신이 기억을 잃고 눈이 멀었기 때문이지, 무슨 개똥같은 사랑 때문이 아니니까 오해마세요.”유남준은 약간 눈썹을 찡그렸다."그래서요?""민정이에게서 떠나세요, 귀찮게 굴지 말고요, 아시겠어요?”조하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용기를 내려 했다.유남준은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만약 제가 싫다고 하면요?”겨우 박민정에게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는데, 어떻게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조하랑은 그 말에 멍해졌다. 기억을 잃은 후의 유남준은 여전히 상대하기 어려웠다."민정이가 당신이랑 함께 살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 앞이 안 보이잖아요. 자기 몸도 혼자서 돌볼 수 없는데, 어떻게 그 애와 그 애 아이까지 돌볼 수 있겠어요?”"설마 민정이더러 당신을 돌보라고 하고 싶은 건 아니겠죠? 민정이 덕 볼 생각이라면 어림도 없어요!”"그리고 당신은 기억을 잃어서 당신이 민정에게 한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데, 난 다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은 단지 민정이가 난청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싫어했어요. 근데 지금 당신은 앞이 안보이는데, 왜 그렇게 뻔뻔하게 민정이에게 붙어있죠? 자신이 싫지 않아요?”조하랑은 욕설에 서툴렀기에 겨우 긴 말을 마치고 얼굴이 빨개졌다.과거 유남준이었다면 진작 화를 냈을 텐데, 지금 그는 그저 복잡한 눈을 할 뿐이었다."당신이 걱정하는 그 모든 일은 제가 해결할 겁니다. 전 결코 누구 덕을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어떻게 해결할 거죠? 민정이는 당신이 거액의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던데요."조하랑의 말에 유남준은 잠시 멍해졌다. 그는 두 사람이 이렇게 사이가 좋을 줄은 몰랐다. 박민정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해준 모양이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너한테 잘해주래."유남준이 대답했다.그는 조하랑의 협박이 두렵지 않았다. 다만 자신과 조하랑 중 누가 박민정에 더 중요한지 확신하지 못했다.박민정은 어제 한 말이 조하랑을 불안하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떡국 다 됐으니 먹으러 가요.”박민정은 조하랑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떡국을 먹으며 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자신이 새로운 회사를 차렸다고 말했다.오늘 조하랑을 만나고 나서야 계속 가난한 척하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이 거짓말도 천천히 풀어야 했다."어떤 회사요?"박민정이 물었다."무역."예전의 호산 그룹은 유남준이 대외무역이라는 노선을 추가한 후 천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처음 해외 사람들과 사업을 시작했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했다.외국인들도, 본국 사람들도, 모두 그가 젊다는 이유로 괴롭혔다.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대놓고 그의 사업을 빼앗기도 하고, 심지어 싸움에 못 이기면 악랄한 수단을 써서 사람을 보내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기도 했다."자신 있어요?”유남준이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그녀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유남준의 젓가락을 든 손이 잠깐 굳었다."그럼.”뒤늦게 그는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서다희도 다시 도와줄 거야.”“그럼 됐어요.”한편, 박윤우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못마땅해 했고 질투가 났다."엄마, 나도 커서 회사 차릴 수 있어.”사실 그는 줄곧 박민정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박민정이 알게 되면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박민정이 대답했다."그래, 앞으로 윤우는 꼭 사장님이 될 거야.”"응응." 박윤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어린애라 달래기가 쉬웠다.그들이 화기애애하게 떡국을 먹고 있을 때, 불청객이 뛰어들어 갑자기 도우미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여기 도자기를 놓고, 저쪽에 있는 꽃들을 치우고......”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연미복을 입은 노인이
유남준이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박민정이 가로막았다."그냥 바꾸라고 해요. 확실히 새해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는 것도 좋으니까요. 이 집사님, 어머님께 고맙다고 전해주세요.”말을 듣던 이 집사의 주름진 얼굴이 찡그려졌다."네."박윤우는 묵묵히 떡국을 먹고 있었지만 눈에는 한기가 가득했다.그의 외할머니가 막 감옥에 들어갔더니, 이제는 할머니가 또 와서 엄마를 괴롭히고 있다.안돼, 이번엔 엄마가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생각을 정리한 후, 박윤우가 젓가락을 놓았다. "엄마, 나 다 먹었어.”"나 산책 좀 해도 돼?”박민정이 동의했다. "그래, 엄마도 같이 가자.”"엄마, 설날 음식도 준비해야 한다며? 혼자 다녀올게, 금방 올게, 괜찮아."박윤우은 누가 봐도 꾀를 부리는 얼굴이었다."그럼 민기 삼촌이랑 같이 있을래?”박민정은 박윤우가 몰래 혼자 유씨네 저택으로 달려간 사건 이후 그를 혼자 두지 못했다.박윤우가 말했다. "엄마, 설인데 민기 삼촌한테 하루 좀 쉬라고 해.”박민정은 원래 정민기에게 집에 가서 쉬라고 제안했지만, 정민기는 그의 가족은 모두 죽었으니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내가 같이 있어줄게."그때, 유남준이 입을 열었다.박윤우가 거절하려 했지만 유남준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아니. 아니, 그게 아니...”박민정은 두 사람이 함께 나가는 것을 보았다.밖으로 나온 박윤우가 유남준을 향해 말했다."왜 이렇게 오지랖이 넓은 거에요? 놔줘요, 난 할 일이 있다고요.”유남준이 손바닥으로 그의 엉덩이를 치자 박윤우가 순간 태도를 바꿨다."흑흑, 아저씨 지금 나 때렸어요? 역시 새아버지가 생기니까 이런 대접을 받는 거겠지? 내 친아빠는... 흑흑...”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입을 막았다.“시끄러워.”이 자식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너무 짜증났을 것이다.박윤우는 그에게 입이 막힌 채 그의 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소리 없이
일단 박윤우를 돌려보내고 유남준은 고영란에게 전화해서 더 이상 참견하지 말라고 했다.아들의 쓴 소리를 거의 들을 일이 없었던 고영란은 화가 나서 박민정과 유남우의 일을 다시 꺼냈다."남준아, 너 비록 눈이 보이지 않고 기억을 잃었지만, 그래도 유씨 가문의 장손인데, 여자가 부족하겠어? 박민정처럼 도련님이나 탐내는 여자는 우리 유씨 집안에 들어올 자격이 없어.”"만약 두...”‘아이만 아니었다면...’고영란은 ‘아이’라는 두 글자를 말하지 않았다.아직 확실하게 조사하지 못해서 유남준에게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누가 뭐라고 했어요?"유남준이 눈을 가늘게 뜨자 고영란이 움찔하며 약간 어설프게 말했다.“내가 박민정과 남우 두 사람이 붙어있는 걸 직접 봤어.”때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속여야 한다.휴대전화를 꽉 움켜쥔 유남우의 손가락뼈가 약간 하얗게 질렸다."앞으로 그 얘기는 하지 마세요.”말이 끝나자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고영란은 끊어진 전화를 보고는 미간을 부자연스럽게 찌푸렸다.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유남준은 여전히 그 여자를 믿고 있었다. 교통사고 후에 귀신에 홀린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안타깝게도 의사는 기억은 당장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만약 유남준이 기억을 회복했다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고영란은 믿었다.......전화를 끊고 별장으로 돌아가려는 유남준에게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오빠."그는 걸음을 멈추었다.김인우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유남우에 의해 구출된 이지원이 다시 유남준 앞에 나타났다.그녀는 옅은 색의 모직 외투를 입고,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리고, 얼굴빛이 창백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수척해 보였다."오빠...”이지원은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고 빠른 걸음으로 그를 향해 걸어가 그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건드리자마자 유남준에 의해 뿌리쳐졌다.“꺼져.”이지원의 손이 허공에 굳어 있었다.유남준은 이 여자를 상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박민정의 신
"그래요,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줄게요."유남우가 말하자 이지원이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둘째 도련님, 제가 이 일을 성공시키면 다시 연예계에 복귀할 수 있게 도와주시기로 약속한거 잊지 않으셨죠.”"물론이죠."이지원은 그제서야 자신의 계획을 유남우에게 몰래 알렸다.비록 계획의 내용은 악랄했지만, 이것으로 확실히 박민정을 단념시킬 수 있었기에 유남우는 동의했다.......유남준은 돌아와서 사람을 시켜 별장 밖의 감시카메라를 돌려보게 했는데, 역시 유남우가 차에 타 있었고 이지원과 접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유남준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가능한 한 빨리 이 동생을 해외로 쫓아내야 할 것 같았다.안타깝게도 그는 지금 눈이 보이지 않아 일하는 데 많은 불편함이 있었다.방 안.박민정은 섣달 그믐날의 음식을 모두 준비했다.저녁에는 살짝만 덥히기만 하면 된다.그녀는 박윤우가 혼자 돌아오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너랑 남준 아저씨 같이 산책하러 나가지 않았어?”박윤우가 하품했다. "생각해보니까 그냥 쉬고 싶어요.”"그래, 윤우야. 가서 쉬어.”박민정은 박윤우가 또 몸이 안 좋은 줄 알고 대뜸 말했다.박윤우는 위층으로 갔고, 박민정은 유남준이 아직 돌아오지 않자 밖으로 나갔다.밖으로 나온 뒤, 그녀는 마침 그 낯익은 뒷모습이 떠나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이지원을 똑똑히 기억한다.박민정은 손을 꼭 쥐고 그 자리에 섰다.유남준은 부하들의 전화를 끊고 나서야 박민정이 왔다는 걸 알아차리고 돌아섰다.“유남준 씨.”여자가 그의 이름 석자를 불렀다.유남준이 그 자리에 굳었다."민정아?”"밖이 추운데 왜 나왔어?"그는 소리를 따라 박민정을 향해 걸어갔다.그는 유남준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을 보고는 예전처럼 모든 것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고 바로 털어놨다."이지원이 여긴 뭐하러 왔죠? 당신 아직도 그녀를 기억해요?”"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지 나도 몰라."유남준이 말했다.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박민정은 급하게 말했다.“어머, 또 비가 오네. 우리 우산 안 가져왔잖아요.”산에 오르기 전, 날씨 예보를 확인했을 때는 비 소식이 없었는데...유남준은 서둘러 배낭을 열어 확인했지만 역시 우산은 보이지 않았다.“괜찮아. 비가 그치면 다시 올라가면 돼.”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박민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근데 예찬이는 괜찮을까요? 혼자 있는데...”“세 살짜리도 아니잖아. 걱정하지 마.”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박예찬은 세 살은 아니지만 겨우 다섯, 여섯 살밖에 안 된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마침 그녀가 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뜻밖에도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박민정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휴대폰 화면을 보니 아이는 이미 우비를 입고 있었다.“엄마, 지금 어디예요? 비가 오고 있어요.”박민정은 주위를 비춰주며 말했다.“우린 아직 여기 정자에서 쉬고 있어. 너희는 산 정상에 도착했어?”박예찬은 대충 거리를 가늠해 보더니, 박민정이 있는 곳에서 정상까지는 아직 한 시간은 더 걸릴 거라 생각했다.“네, 저희는 도착했어요. 선생님이 비옷 나눠 주셨어요. 근데 엄마, 우산은 챙겼어요?”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박민정은 거짓말을 했다.“그럼, 챙겼지.”“다행이네요. 그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올라와요. 길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하고요.”박예찬의 다정한 당부에 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어, 조심할게.”이렇게 보니 정작 걱정할 필요가 있는 건 박예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괜히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유남준을 향해 말했다.“우리 가요. 천천히 가면 돼요.”“좋아.”유남준이 일어섰다.박민정도 기둥을 붙잡고 천천히 일어섰지만 갑자기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면서 그대로 유남준의 넓은 품속으로 쓰러지듯 안겨 버렸다.박민정은 순간 당황했다.“죄송해요. 그냥 갑자기 일어나서 약간
박민정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소리쳤다.“정말 괜찮아요!”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은 벌떡 일어나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갑작스러운 공중부양에 박민정은 깜짝 놀라 그의 옷깃을 본능적으로 움켜쥐었다.“빨리, 빨리 내려놔요!”두 사람의 다소 소란스러운 모습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여기저기서 부러운 듯한, 혹은 질투 어린 시선이 쏟아졌고 몇몇은 빈정거리는 말도 던졌다.“정말 유난이네. 겨우 산 중턱인데 남편한테 안겨 가겠다니.”그 말을 들은 어떤 여자는 남편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여보, 나도 못 걷겠어. 나도 좀 업어주든가, 안아주든가 해.”남편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꾸했다.“자기 체중이나 생각 좀 해봐. 내가 어떻게 안아?”하지만 그런 말에도 아내를 번쩍 안아 올린 남편도 있었고 애써 힘을 내던 그는 이내 체력이 바닥나 금세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뜻밖의 분위기로 웃음과 농담이 오가는 가운데 최현아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유남준의 품에 안겨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박민정은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 없었다.“제발 내려놔요. 이러니까 더 불편하단 말이에요.”유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가 불편한데?”“그냥 불편해요.”박민정은 얼굴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유남준은 그제야 조용히 그녀를 내려주었다.“너무 높이 올라와서 숨이 차서 그런 거야?”박민정은 고개를 숙여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렇게 많은 부모와 아이들 앞에서 한 회사의 대표가 이렇게 유치한 짓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정말 창피하기 그지없었다.게다가 어린아이들까지 흥미를 보였는데 작은 여자아이가 옆의 남자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나중에 우리 결혼하고 내가 힘들다고 하면 너도 나 안아줘야 해.”남자아이는 당당하게 가슴을 두드렸다.“걱정 마!”박민정은 어처구니가 없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이 어린애들이 벌써 결혼 이야기를 하다니.’유남준은 그녀가 말없이 있는 걸 보
조민혁은 아내의 말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당신 말이 맞아. 내가 너무 좁게 생각했어. 당신이랑 동민이에게 괜한 고생을 시켰네.”한가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당신이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됐어요. 나도, 동민이도 다 이해해요.”부부는 이렇게 화해했지만 그들은 모른다. 어제의 일이 조동민에게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를.조동민은 유지훈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유지훈은 이것저것 지시하며 이리저리 움직이라고 했고 조동민은 아무 말 없이 순순히 따랐다.둘이 가파른 언덕에 이르렀을 때 조동민의 머릿속에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쳤고 그는 언덕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지훈아, 저기 좀 봐.”“뭐가 있는데?”유지훈이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살피자 조동민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차가운 눈빛을 드리웠다. 그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마치 유지훈을 밀어버리려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그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동민아, 유지훈! 선생님이 산에 올라가자고 하셔!”박예찬이었다.조동민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렸으나 속으로는 아쉬움이 밀려왔다.‘조금만 더 빨랐더라면...’유지훈은 돌아서며 말했다.“알겠어, 가자.”그는 앞장서 걸었고 조동민은 묵묵히 뒤따랐다.박예찬은 그들이 출발하자 조동민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아까... 유지훈을 밀려고 했지?”조동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예찬아, 제발 이 얘기 아무한테도 하지 마.”박예찬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되물었다.“내가 그런 고자질쟁이로 보여?”조동민은 고개를 저은 뒤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냥...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한 번쯤은 혼쭐을 내주고 싶었어.”박예찬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그건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야.”“왜? 밀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조동민은 이해하지 못한 채 되물었다.박예찬은 침착하게 설명했다.“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어. 유지훈이 다치면 누가 제일 먼저 의심받을까? 당연히 그 옆에 있던 너야.
박예찬은 조동민의 단호한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그래, 알겠어.”“고마워, 예찬아!”조동민은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유지훈은 조동민의 웃음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노를 참지 못한 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며 소리쳤다.“조동민, 너 또 까부는 거야?”조동민은 젓가락을 꼭 쥐었지만 박예찬이 나서기 직전 먼저 웃으며 말했다.“지훈아,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러겠어. 어제는 내가 잘못했어. 화풀어, 응?”유지훈은 순간 어리둥절했다.‘이 녀석,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거지?’분명 전엔 자신의 심부름꾼 노릇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는데.조동민은 이제 상황을 파악할 줄 알았다. 괜한 고집은 소용없다는 걸, 자신은 멋대로 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진짜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유지훈이 묻자 조동민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다른 애들은 지훈이 너랑 안 놀아줘도 난 같이 놀아줄게.”박예찬은 이렇게 급변하는 조동민의 모습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환경은 정말 사람을 바꾸는 법이다.유지훈은 그제야 기분이 풀렸다.“그럼 밥 그만 먹고 나랑 놀러 가.”“응!”조동민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박예찬에게 말했다.“예찬아, 이따가 다시 올게.”“어딜 가? 가지 마!”유지훈이 못마땅한 듯 소리치자 조동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안 갈게.”그렇게 둘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최현아가 식당으로 들어왔고 유지훈과 조동민이 화해한 모습을 보고 조동민의 부모에게 팔짱을 낀 채 비웃듯 말했다.“보셨죠? 우리 지훈이가 얼마나 속이 넓은지. 당신 아들이랑 다시 잘 지내잖아요.”하지만 조동민의 부모는 이제 최현아에게 굳이 좋은 태도를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이제는 그들 뒤에 김씨 집안이 버티고 있으니.조동민의 어머니, 한가영이 냉소를 띠며 말했다.“근데요, 아까 보니까 다른 애들은 지훈이랑 안 놀려고 하던데요? 결국 우리 동민이만 지훈이를 마음 넓게 받아주
민박집 안, 모두가 아침 식사를 하며 여전히 아찔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칫하면 모두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유남준은 대충 식사를 마친 뒤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누가 한 짓인지 밝혀냈어?”그가 물었다.전화기 너머, 서다희는 무릎 꿇고 있는 무리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밤에 돌을 캐러 갔을 뿐, 사람을 해치려던 건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습니다.”한밤중에 돌을 캐러 갔다고?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하지만 이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으니 더 캐묻기도 애매했다.“대표님, 전 개인적으로 유석진 쪽이 의심됩니다.” 서다희가 덧붙였다.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유남준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표정은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그래. 이놈들은 전부 경찰서로 넘겨.”“알겠습니다.”전화를 끊고 돌아서던 유남준의 시야에 최현아와 그녀의 아들이 탄 차가 들어왔다.최현아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깥에 서 있는 키가 훤칠하고 냉정한 인상의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남준 씨.”그녀는 조심스레 불렀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남준 씨, 왜 혼자 밖에 있어요? 민정이랑 애들은요?”“안에서 밥 먹고 있습니다.”유남준은 냉담하게 답했다.최현아는 어색한 공기를 지우려는 듯 운전기사에게 자신이 호텔에서 포장해 온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아직 제대로 못 먹었을 것 같아서요. 여기 좀 싸 왔어요.”“괜찮습니다. 이런 건 형수님께서 드시죠.”유남준은 말만 남기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최현아는 묘한 허전함을 느꼈다.이때 곁에 있던 아들, 유지훈이 못마땅한 듯 물었다.“엄마, 제가 가져온 음식을 왜 삼촌한테 주려 해요?”최현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좋은 건 나눠야 하잖니.”하지만 유지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집에 있을 때 그는 엄마가 아빠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빠가 밥을 챙겨 먹었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엄마, 전 엄마가 이러는 거 싫어요. 앞으로 예찬이 아빠한테 이렇게 잘해주지 마세요. 전 삼촌이 싫
유남준이 나와보니 텐트와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큰 바위가 굴러떨어져 있었고 산사태도 발생한 흔적이 있었다.“위험할뻔했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사전에 점검하지 않았나?”분명 일부러 이런 짓을 벌인 게 아니라면 절대로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박민정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살짝 겁을 먹었다.“세상에. 만약 어제 비가 조금만 더 세게 내렸다면 우리 텐트도 분명 물에 잠기거나 바위에 깔렸을 것 같네요.”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는데 유남준은 겁에 질린 그녀를 보고 재빨리 다가와 안심시켰다.“우린 하느님이 도와줄 테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박민정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네.”학교 선생님들도 눈앞의 상황에 매우 놀랐다.지금은 비가 그쳤고 아무런 사고도 없었기에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이곳은 분명 최현아가 사전에 사람을 보내서 확인 후에 결정했던 곳인데 어떻게 이렇게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까?만약 이 거대한 바위들과 흙들이 비에 씻겨 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면 적어도 몇 집은 이미 큰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선생님들도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게 무리인 것 같아 모두가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오늘 저녁에는 민박집을 예약했다.“너무 좋아요. 이곳에서 자는 것보다 민박집에서 자는 게 훨씬 안전할 것 같네요.”학부모들도 선생님의 아이디어에 저마다 찬성하면서 하나둘씩 짐을 싸기 시작했다.이 시각, 최현아는 진작에 산에서 내려와 혹시나 산사태로 인한 인명피해 뉴스가 뜬 게 없는지 계속 핸드폰으로 확인했다.그러나 아침 9시가 넘었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이때, 유지훈도 진작에 잠에서 깼다가 문득 최현아에게 물었다.“엄마, 저희는 왜 계속 산에 있지 않고 내려왔나요? 저는 배도 안 아픈데.”그의 말에 최현아는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아무 말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선생님께서 오늘에는 더 높은 산에 올라갈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저도 산에
저녁이 되더니 약간의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점차 빗방울이 굵어졌다.원래 유남준은 오늘 이불을 덮고 자려고 했으나 비가 오니 어쩔 수 없이 다시 침낭에서 자야 했다.박민정은 밖에서 요란하게 들리는 천둥소리가 무서워 이불 안으로 꼭꼭 숨었다.옆에 자기 아들이 누워있어 티는 내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박민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예찬이 손을 뻗어 그녀의 침낭을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엄마, 나랑 같이 자자.”“응? 왜?”박민정은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아니면 나랑 같이 잘까? 나 천둥소리가 너무 무서운데.”이때, 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박예찬은 원래 자신이 하려던 말을 그에게 뺏긴 게 너무 괘씸해서 그를 도끼눈으로 째려봤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천둥소리를 무서워한다고요?”“응. 좀 무섭네?”유남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는데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박민정은 사람마다 약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남준같이 돈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도 분명 약점이나 두려워하는 게 있을 텐데 저 사람한테는 그게 천둥소리인가 싶었다.“괜찮아요. 잠들면 금방 안 들릴 테니까.”박민정은 아까까지 너무 무서웠지만 같이 얘기를 나누다 보니 좀 괜찮아진 것 같았다.그러나 유남준은 약간 진정된 그녀를 보고는 자신이 세워둔 작전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 같아 의기소침해졌다가 용기를 내서 다시 물었다.“이쪽으로 좀 오지 않을래?”그의 말에 박민정은 침낭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구르다가 마침 박예찬의 침낭에 딱 붙게 되었다. 박예찬이 흐뭇해하던 찰나에 또다시 유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찬이는 천둥소리가 안 무섭지?”박예찬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빠르게 답했다.“당연하죠. 남자로서 어떻게 천둥소리 따위를 무서워하겠어요? 제가 보호해 줄 테니까 안심하세요.”“그럼 네가 침낭 끝에 자면서 우리를 보호해 줄래?”유남준의 말에 박예찬은 그제야 그의 꾀에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박민정의
박민정은 뜬금없이 자기 앞으로 내미는 음식을 보고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뭐예요?”“형수가 담아줬는데 안에 고기도 있더라고. 아까 잘 못 먹던데 이거라도 먹어.”최현아는 마침 그의 뒤를 따라왔다가 마지막 한마디를 똑똑히 듣게 되었는데 순간 뜨겁게 불타올랐던 마음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차갑게 식었다.유남준이 자기한테 마음이 있어서 호의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마음을 이용해서 박민정에게 애정 공세 할 줄은 몰랐다.“남준 씨는 참 다정한 남편이네요. 제가 가져다준 음식을 그대로 민정 씨에게 줄 만큼.”말속에 가시가 돋혀 있었다.솔직히 저녁 식사가 부실했던 건 사실이었고 양도 적은 데다가 온통 채소뿐이라 박민정은 진작에 허기져 있었다.그가 건네준 음식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최현아를 보고는 막 거절하려는데 유남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빨리 먹어. 너무 늦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으니까.”박민정은 그의 닦달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최현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형님, 그럼 감사히 먹을게요.”최현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겨우 답했다.“많이 먹어요.”그리고 한껏 어두워진 얼굴로 뒤돌아서더니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둬.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잖아!”최현아는 원래 유남준이 자기 마음을 받아주면 이따가 이 남자만 살려주려고 마음먹었다.그러나 이제 보니 그럴 필요 없이 그냥 세 가족을 모두 죽여버리면 될 것 같았다.그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박민정은 도시락에 담긴 다양한 음식을 보고는 순식간에 식욕이 올라왔다.“와, 너무 맛있겠다.”그리고 다시 반찬들을 가지런히 모으더니 두 사람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예찬아, 남우 씨, 너무 많아서 저 혼자는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우리 같이 먹어요.”뜬금없이 자신을 남우라고 부르는 모습에 살짝 언짢아졌지만 그래도 티를 낼 수 없었다.“그래.”그렇게 세 사람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맛있는
오늘 저녁은 학교에서 준비해 줬다.사실 물고기를 잡아서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했는데 다들 많이 잡지 못한 바람에 식사가 조금 부실했다.하여 저녁 식사 시간이 돌아오니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에너지 소모가 많았던 탓에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게 되었다.유지훈은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박예찬을 신경 썼다.그리고 내심 박예찬 주변에 친구가 많은 게 부러웠지만 이제 와서 그에게 붙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한편, 최현아는 오늘 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되어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 쪽을 바라보았는데 세 가족이 화기애애해 보이는 모습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피어올랐다.저녁 식사가 다 끝난 뒤 각자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최현아가 어느새 유남준의 곁에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남준 씨, 음식은 입에 잘 맞았나요? 제가 음식을 따로 싸 왔는데 괜찮으시면 좀 드실래요?”그러나 유남준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괜찮습니다.”어제랑 다르게 차가운 그의 태도 때문에 최현아는 순간 멍해졌다.분명 어제 자신이 땀을 닦아줘도 가만히 있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나 싶었다.“그래도 제가 남준 씨 형수인데 너무 체면 차릴 필요 없어요. 제가 금방 가지고 올게요.”최현아는 유남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빨리 음식 가지러 달려갔다.그저 유남준이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보고 오해할까 봐 철벽친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박예찬과 무료함을 달래려 잡초를 뽑고 있다가 무심결에 최현아와 유남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박예찬에게 물었다.“저 두 사람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박예찬은 박민정이 풀 뽑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열심히 같이 뽑다가 문득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유남준이 또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다.“엄마,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하나는 유남준의 좋은 시간을 방해할 것 같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괜히 박예찬이 가서 물어보면 마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