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박민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남준 씨, 곧 설날이에요.”“응, 맞아.”“이제 아줌마는 여기 없네요.”박민정은 유남준의 옷을 꽉 붙들며 슬픔을 참아보려 했다. 유남준은 위로의 말 대신 그녀를 꼭 껴안으며 이마에 다정한 뽀뽀를 남겼다.그 순간, 이미 흘릴 만큼 흘려 말라버린 줄만 알았던 눈가에 또 눈물이 차올라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다 제 탓이에요. 나 때문이 아니면 한수민을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되지도 않았을 건데...”“아주머니가 너한테 남긴 편지가 있어. 영천댁이 아주머니의 심부름을 받고 그 편지를 가져왔어.”그녀의 자책을 끊어내며 유남준이 말했다. 박민정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을 들고 그를 보며 물었다.“어디 있어요, 편지?”유남준은 몸을 일으켜 협탁 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편지를 꺼내 박민정에게 건넸다.박민정이 서둘러 그 편지를 열어 보니 은정숙이 쓴 몇 구절 글씨가 눈 안에 들어왔다.“민정아. 아마 네가 이 편지를 보게 됐을 때는 난 이미 세상에 없을 거야. 너무 슬퍼하지 마. 이건 다 엄마의 팔자고 운명이야.”“엄마가 너한테 했던 얘기 기억하니? 사람이 늙으면 결국 다 죽는 거야. 그래서 엄마는 두렵지 않아. 그저 죽기 전에 널 위해서 뭔가를 해주고 싶을 뿐이야.”“의사 말로는 엄마가 이제 살날이 며칠 안 남았대. 나도 한수민을 어찌 못할 거란 걸 잘 알아. 어리석은 방법이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 여자를 감옥에 보내면 다신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끝으로, 너의 엄마라고 자칭한 걸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정말로 널 내 친딸로 생각해 왔어. 이번 한 번만 염치 불문하고 싶구나. 다음 생엔 우리 꼭 친 모녀로 태어나자. 나랑 약속할래?”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박민정은 마음이 찢겨나가는 듯이 아팠다.“그런 거였구나...”그녀는 은정숙이 무슨 마음으로 이 편지를 남겼는지 알 것만 같았다.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려는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한수민이
유남우는 그녀한테 쌓인 눈을 털어주려고 하였지만 박민정은 무의식에 몸을 피했다.“도련님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도련님이라는 호칭에 유남우는 손을 뻗은 채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가 뒤늦게야 거둬들였다.“뉴스를 보고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됐어. 전에 나한테 아주머니는 네 친어머니만큼 중요하다고 했었잖아. 그런 분이 돌아가셨으니 네가 많이 슬퍼할 거 같아, 걱정돼서 보러 왔어.”말을 마치고 유남우는 은정숙의 묘비를 향해 절을 했다.그가 어린 시절의 일을 아직도 그렇게 똑똑히 기억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박민정은 입꼬리를 어색하게 끌어당기며 말했다.“고마워요... 괜찮아요, 전.”추위로 얼굴이 퍼레진 박민정은 눈시울이 빨갛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앞에서는 강한 척, 괜찮은 척 안 해도 돼. 내가 얘기했잖아,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라고.”박민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한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그렇게 오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끝내 입을 열었다.“전 이제 돌아가야겠어요.”“데려다줄게.”그가 데려다주겠다는 말에 박민정은 바로 거절했다.“아뇨, 차를 근처에 주차했어요.”“너 지금 이 상태로 어떻게 운전하려고 그래?”유남우의 책망하는 말투에는 관심이 듬뿍 담겨있었다.“내 차로 가.”더는 거절하기가 어려운 박민정은 그를 따라 차로 향했다.유남우는 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며 여느 때와 같은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눈 좀 털어. 아니면 이따 감기 걸릴 수도 있어.”“고마워요.”수건을 받아 몸에 있는 눈을 털고 나서 차에 올라타자 유남우가 운전석에서 히터를 켜고 그녀가 어릴 때 가장 좋아하던 노래를 틀었다.순간 박민정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이 노래를 여기서 다시 듣게 될 줄 몰랐네요.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해외에서 치료받을 때 자주 들었었어.”유남우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동안 해외에서 잘
은정숙의 묘 앞에서 절을 올리고 난 조하랑과 예찬이는 박민정과 함께 돌아가기로 했다. 유남우의 차가 하도 커서 네 명이 탔는데도 전혀 비좁지 않았다.고급 차라면 조하랑도 꽤 많이 타봤다. 특히 최근에는 예찬이 덕분에 고급 차 구경을 더 많이 해보긴 하였지만, 차 내에 각종 의료 장비와 의사까지 갖춰져 있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차에서 바로 치료하면 될 것 같았다.세 사람을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박민정과 작별하고 난 뒤 유남우는 기사에게 돌아가자고 했다.그의 차가 떠나는 걸 보며 조하랑은 박민정한테 물었다.“남준 씨는 어디 갔어?”“내가 먼저 윤우랑 같이 돌아가라고 했어.”“아아...”조하랑은 또 박민정의 옷이 일부 젖어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며 유남준을 나무랐다.“그런다고 그냥 돌아가? 곁에서 널 지키지도 않고. 우산이라도 씌워주든가 해야지.”절친으로서 조하랑은 박민정이 그녀한테 잘 해주는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했다.“내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서 그런 거야. 들어가자, 춥다. 너랑 예찬이 감기 걸리겠어.”“어, 그래.”조하랑은 예찬이를 데리고 박민정의 뒤를 따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밖이 추워서 그런지 집안은 유난히 따뜻했다.유남준과 윤우는 이미 요리사한테 부탁하여 박민정이 평소 즐겨 먹는 음식으로 한 상 푸짐하게 차려 놓았다. 윤우는 조하랑과 예찬이를 보고 좀 의아해했다.“이모, 형. 여긴 어떻게 왔어?”“좀 늦었는데 같이 식사해도 괜찮겠지?”조하랑이 오자 집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물론이지.”조하랑은 두 아이와 함께 주방에서 일을 거들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왠지 텅 빈 것 같은 느낌에 박민정은 별로 밥맛이 없었다.유남우가 그녀의 곁으로 걸어와 물었다.“괜찮아?”그는 유남우처럼 따뜻한 말로 남을 위로해 주는 말재주가 없었다.“네.”박민정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배고플 텐데 얼른 식사부터 해요. 난 배가 안 고파요.”“안 고파도 먹어야 해.”은정숙한테 일이 생기고 나서부터
그한테 일이 생기기 전에 박민정은 몰래 떠났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대놓고 떠나겠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눈이 보이지 않아 능력이 없고 만만하다고 생각하여, 더는 그녀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잡아둘 실력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박민정은 그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눈꺼풀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우리 전에 이미 다 얘기가 된 거 아니었어요? 남준 씨도 저랑 이혼하기랑 약속했고, 더 이상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그녀를 잡은 유남준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순간 박민정은 손이 너무 아파 숨을 들이쉬며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유남준은 곧바로 손의 힘을 풀며 서늘하게 말했다.“난 동의 못 해.”“제가 적당한 선에서 보상할게요. 빚진 것도 일부 갚아줄 수 있어요. 교통사고에 대한 보상인 셈 치자고요.”사고가 날 때 유남준이 자신을 감싸며 다치지 않도록 해주었기에 박민정은 어느 정도의 보상을 해주는 것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그 말을 듣는 유남준은 처음으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다.“누가 그런 보상 해달래?!”그의 목소리 톤이 저도 몰래 높아지며, 하마터면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할 뻔하였다.“그럼 뭘 원해요? 말만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다... 읍...”유남준은 그녀의 말을 채 듣기도 전에 키스로 입을 막아버렸다.박민정은 경악한 눈으로 그를 밀어내려고 애썼지만 남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오늘 먼저 떠난 뒤에 그녀한테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경호원을 몰래 붙인 유남준은 유남우가 묘소에 와서 그녀와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의 점점 깊고 거칠어지는 키스에 박민정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어 그의 어깨를 세게 두드렸고, 그제야 입술이 살짝 떨어지자 숨을 가쁘게 들이쉬었다.“널 갖고 싶어.”유남준의 밭은 숨소리가 섞인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그의 말에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를 들쳐 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원래 몸이 약하고 요새 피곤하기까지 한 박민정은 그와 실
진주시.한수민의 상해치사 사건은 온 시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논란이 잠재울 수 없을 만큼 커져 아무리 많은 돈을 갖고 있어도 일시적으로 풀려나긴 힘들게 되었다.그녀는 처음으로 공포를 맛보았다.진주시에 돌아온 박민정은 구치소에 그녀를 만나러 갔다.잘 나가던 사모님의 화려한 겉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만 남은 한수민은 박민정을 보자 다짜고짜 물었다.“그 가정부는 어디 갔어?”“죽었어요. 당신이 해쳐서.”아무리 은정숙이 한수민은 억울하다고 했어도 박민정은 그녀가 아주 미웠다. 이제 가슴속에 일말의 모녀의 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은정숙이 참으로 어렵사리 그녀를 감옥에 보낸 만큼, 박민정 역시 이대로 풀려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아니야, 그 여자가 날 모함한 거야. 내가 죽인 거 아니라고!”“누가 목숨을 대가로 당신을 모함해요?”차갑기만 한 박민정의 눈동자를 보며 한수민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걸 알고, 답답하고 분한 마음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내가 어떻게 알아, 왜 갑자기 그런 미친 짓을 하는지! 나야말로 묻고 싶어, 왜 죽을 각오로 날 해치려 드는지!”한수민의 말에 박민정의 마음은 더 씁쓸해졌다.이 세상에 오로지 남을 해치려는 목적으로 목숨을 내놓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지키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면.박민정은 일어서며 말했다.“여사님, 한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그게 뭔데?”한수민이 의문스러운 눈길로 박민정을 쳐다봤다.“가까이 와보세요.”박민정은 자신의 말대로 한수민이 가까이 다가오자 오직 둘만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당신이 한 짓이 아니라는 걸 난 알아요. 모함을 당했다는 증거도 갖고 있어요.”한수민의 동공이 순간 움츠러들었다.“뭐라고? 증거 어디 있어? 얼른 내놔, 증거! 가서 증언하라고!”“우리 엄마가 목숨으로 당신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내가 풀어줄 리가 있어요? 방금 한 말은 단지, 당신한테 나올 희망이 있는데 나올 수 없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예요
병원 치료가 끝나 한창 쉬고 있는 와중에 윤우는 누군가 밖에서 자신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이상하네...”자신의 직감은 틀려본 적이 없는지라 윤우는 일부러 자는 척하며 눈을 감았다가 한참 뒤에 갑자기 눈을 떠보니 창밖 풀숲에 어떤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황급히 몸을 숨기느라 쪼그려 앉는 것이었다.그러자 윤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은 사색에 빠진 유남준과 정말로 비슷했다.“말도 없이 몰래 사진을 찍네, 괘씸하게. 포즈도 못 취했는데 말이야.”윤우는 중얼거리며 한편으로 누가 보낸 사람일까 생각했다.한창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박민정이 문을 두드렸다.“윤우야, 다 쉬었어? 우리 이제 집에 갈까?”윤우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대답했다.“응.”침대에서 일어나 병복을 갈아입은 후 윤우는 박민정과 함께 병원을 떠났다.“엄마, 그 나쁜 여자는 이제 잡혀서 다신 못 나오는 거지?”윤우가 말한 나쁜 여자는 한수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박민정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럼 됐어.”윤우는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까 몰래 사진을 찍던 남자는 자취를 감춰 보이지 않았다....윤씨 가문 저택.한수민의 일로 YN 그룹 주식도 하루아침에 바닥을 쳐, 윤석후는 종일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만 풀풀 쉬었다.그러나 박민호는 맨날 소파에 앉아 만사태평하게 노트북으로 게임만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윤석후는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넌 나가서 일자리도 좀 찾고 그러면 안 되냐? 평생 부모한테 얹혀살 거냐? 네 엄마도 감옥에 갔는데 너도 따라갈 거냐?”그의 말을 듣던 박민호는 마우스를 탁자 위에 내팽개치며 소리쳤다.“지금 누가 부모한테 얹혀산다는 거예요? 당신이 지금 쓰고 있는 거, 모두 우리 박씨 집안 돈이란 걸 잊었어요? 엄마가 잡혀들어간 지 며칠이나 된다고 벌써 나한테 인상 쓰고 난리예요? 내가 당신이 먹은 거 도로 뱉게 해줘요?!”박민호가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
시즌 호텔.지적이고 우아한 여자가 건물 맨 꼭대기 층에서 진주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녀 손가락사이에 낀 담배 한 개비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깊고 그윽한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똑똑똑!”노크 소리가 나자 여자는 손에 든 담배를 눌러 불씨를 껐다.“들어와.”윤소현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엄마.”정수미는 돌아서며 매서웠던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졌다.“이리 와.”윤소현이 가까이 다가가자 손을 들어 그녀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며 물었다.“요즘 잘 지내고 있었어?”정수미는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처리하느라 매우 바빴지만 이번에 한수민이 살인했다는 소식을 듣고 딸 윤소현이 걱정되어 보러 왔다.윤소현은 정수미 앞에서 어리숙한 아이처럼 행동했다.“엄마, 나 잘 못 지내요. 요즘 너무 힘들어요.”이 말에 정수미는 눈빛을 달리하며 물었다.“누가 우리 딸을 힘들게 해? 유남우니?”그녀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유남우가 유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에 앉았다고 감히 그녀의 딸한테 함부로 하는 건가?하나 윤소현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그 사람 아니에요, 남우 씨는 저한테 잘해줘요.”“그럼 누구?”“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박민정이라고. 유남준의 와이픈데 나중에 제 형수님이 될 사람이에요.”박민정이라는 이름을 듣더니 정수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하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허, 고작 그 여자야?”아무 세력도 없는 귀머거리가 자신의 딸을 괴롭힌다고?비록 윤소현은 수양딸이긴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녀는 윤소현을 친딸처럼 키웠다. 그리하여 곱게 자란 윤소현은 소싯적부터 성격이 제멋대로여서 누구도 감히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다.“엄마가 잘 몰라서 그래요. 그 여자가 엄청 계략적이고 호박씨 까는 스타일이에요. 글쎄, 몰래 남우 씨를 유혹하고 있더라니까요. 저도 제 눈으로 보지 못했으면 안 믿었을 거예요.”윤소현이 흐느끼면서 하소연하는 말을 듣자마자 정수미는 버럭하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내 평생
차는 박민정과 불과 1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멈춰 섰다.그녀의 눈동자는 약간 움츠러들었지만 얼굴색은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여기에는 감시카메라도 있는데 백주대낮에 대놓고 자신을 해코지할 거라 생각지 않았다.눈앞에 보이는 예쁘고도 표정이 덤덤한 여자를 보며, 정수미는 만약 딸 때문이 아니었다면 박민정한테 아껴주고 싶은 감정이 조금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정말 내 딸과 맞서겠다는 거야?”정수미가 서늘한 얼굴로 묻자 박민정은 사실대로 얘기했다.“전 유남우 씨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에요. 지금도 아니고, 앞으로는 더더욱 아닐 거예요.”유남준과 함께 하기로 결심한 그녀가 유남우의 마음을 받을 리 없었다.설령 유남준과 헤어지더라도 유남우의 품에 안길 가능성은 없었다. 그녀와 유남준 사이에 아이가 몇 명이나 있으니 말이다.“그 말 꼭 지키는 게 좋을 거야.”정수미는 기사한테 돌아가자고 지시했다. 그리고 가는 길에 백미러에 비친 박민정의 얼굴을 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방금 본 박민정의 성격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속으로 가늠하고 있었다.그 후 그녀가 고영란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얘기를 한 것인지, 그날 저녁이 되자 고영란은 윤소현을 집에 초대해 며칠 묵었다가 설을 같이 보내자고 했다.윤소현은 정수미의 수단에 탄복했다. 진주에서 철의 여자로 유명한 고영란도 정수미의 말 몇 마디에 바로 집에 오라는 말을 하니 말이다.윤소현은 들뜬 마음으로 정수미한테 전화했다.“엄마, 엄마 정말 대단해요. 그리고 너무 고마워요.”정수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내가 이미 박민정한테 경고했어. 보아하니 이젠 유남우한테 딴 마음을 품지 못할 거야.”‘그냥 경고만 했다고?’윤소현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짝 삐죽거렸다.“엄마 혹시 그 여자의 순진한 모습에 속은 거 아니에요? 제가 얘기했잖아요, 그 여자 겉 다르고 속 다르다고요. 전에도 나한테 남우 씨랑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그러더니, 얼마 안 지나서 또 사적으로 연락해서 만나고 그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