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후와 한수민은 오늘 진주 중심가에 있는 땅 한 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특별히 김훈을 찾아왔다.지금 윤씨 가문과 유씨 가문이 인연을 맺은 데다 유씨 가문은 김씨 가문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한수민과 윤석후는 유씨 가문과의 혼약을 빌미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면 이 일은 다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한수민은 오늘 여기에 의외의 요소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거실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박예찬이었다. 당시 윤우와 그저 스치듯 만난 탓에 처음에는 낯익은 느낌만 들었지 누구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김훈은 차를 마실 뿐 두 사람을 맞이하러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사업하느라 도가 튼 그는 자연스레 윤석후와 한수민에 대해 조사를 했고 두 사람이 벌인 추악한 짓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윤석후의 딸이 유남우와 약혼한 것만 아니었으면 저 둘을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윤 사장님, 최 여사님, 앉으세요.”김훈이 덤덤하게 말했고 윤석후와 한수민은 마다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한수민은 다시 한번 박예찬을 바라보았다. 앳된 분홍빛 얼굴에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맞춤 정장을 입은 아이는 유난히 귀티가 났다.그 옆에는 조하랑도 있었는데 예쁘다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명문가 아가씨였다.진작 조하랑을 알고 있었던 한수민은 한낱 조씨 가문처럼 작은 집안이 김씨 가문 같은 명문가로 시집가는 게 배알이 꼴렸다.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다.“하랑아, 아줌마 기억나? 옛날에 너랑 민정이랑 같이 대학 다닐 때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했었잖아.”조하랑이 그녀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겠나. 그녀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당연히 기억나죠. 처음 아줌마 집에 갔을 때 졸부의 딸인 내가 어떻게 감히 박씨 가문을 넘보냐며 저랑 민정이를 쫓아내셨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조하랑은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고 김훈은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미래의 손주며느리가 될 그녀를 총애하던 그
“증조할아버지, 제가 알기로는 사흘 안에 위에서 공장을 철거하고 지하철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올 텐데 그러면 땅값이 올라 윤 사장님이 제시한 가격의 최소 3배는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약 할아버지께서 그 땅을 개발하면 그 가치는 몇 배는 더 뛰겠죠.”박예찬은 여유롭게 말을 이어갔고 순간 놀란 김훈이 얼른 손짓하자 부하가 귀를 들이댔다.“가서 확인해 봐.”“네.”김훈은 공장 철거 지시가 내려올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고 윤석후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수작을 부린다는 사실에만 신경을 썼다.윤석후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몇 살 안 된 아이를 바라보며 충격에 빠졌다.저 아이가 이런 내부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지?“아가야, 함부로 말하면 안 돼.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는 걸 내가 모를 리가 있어?”윤석후가 허허 웃으며 말하자 한수민도 남편이 아이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얼른 거들었다.“그래 꼬맹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그녀는 결국 박예찬도 어른을 무서워하는 어린아이라는 생각에 조용히 박예찬을 노려보았다.그런데 박예찬은 그녀의 체면 따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증조할아버지, 저 사람 맘에 안 드는데 나가라고 하면 안 돼요?”한수민과 윤석후는 순식간에 당황했다.3분 후 두 사람은 결국 밖으로 내보내졌다.이를 지켜보던 조하랑은 무척 통쾌해했고, 김훈은 박예찬이 두 사람을 싫어해서 일부러 공장을 철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말한 거라 생각하며 물었다.“예찬아, 왜 최 여사님이 싫어?”박예찬이 대답하기도 전에 김훈이 시켰던 부하 직원이 서둘러 달려왔다.“회장님, 제가 방금 나가서 알아본 결과 작은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대롭니다. 윤석후는 진작 정보를 매수해 김씨 가문을 이용하려 했습니다.”헐레벌떡 뛰어와 숨을 헐떡이며 말하는 부하 직원은 탄복하는 눈빛으로 박예찬을 바라보았다.어떻게 저렇게 어린아이가 위에서 내려온 소식을 그리 똑똑하게 알 수 있단 말인가.사실 김씨 가문의 힘으로 이 정보를 입수하는 건 아주 쉬웠지만 워
박예찬은 단어선택에 무척 신중을 기했다. 외할머니라고 직접 말하지 않고 단지 혈연적인 할머니라고만 말했다.박민정은 아이가 인터넷에서 한수민을 안 게 틀림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박예찬이 다시 말했다.“엄마, 할머니가 엄마를 나쁘게 대하면 난 할머니로 인정 못 해요. 감히 엄마를 괴롭히면 나한테 말해요. 내가 지켜줄게요.”영상 반대편에서 진지함이 가득한 예찬이를 보며 박민정은 마음속으로 안도감을 느꼈다.“걱정하지 마, 엄마는 엄마 스스로 지킬 수 있어. 다른 사람한테 괴롭힘 안 당해.”박민정이 다시 당부했다.“요즘은 하랑 이모 말 잘 듣고 절대 이모 성가시게 굴지 마.”조하랑은 옆에서 이 말을 들으며 얼굴을 붉혔다.사실 예찬이를 성가시게 구는 건 자신이었고, 예찬이가 없었다면 어른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을 것이다.심지어 아빠도 예찬이 때문에 그녀에게 잘해주고 있었다.“걱정 마, 예찬이는 어른들보다 더 어른스러워.”조하랑이 다른 말을 하려던 찰나 누군가 방 문을 두드렸고 그녀는 예찬에게 전화를 끊으라고 말해야 했다.걸어가 문을 열자 병원에서 막 돌아온 듯 먼지가 쌓인 흰 가운을 입은 김인우가 문 앞에 서 있었다.“무슨 일이죠?”그가 옷도 안 갈아입고 온 것을 본 조하랑은 무슨 급한 일이 생겼나 싶었는데 김인우가 이렇게 말했다.“할아버지가 웨딩 사진 찍으러 가자고 하셨어요.”“우리 이제 겨우 약혼했는데 이렇게 빨리 웨딩 사진을 찍어요?”조하랑은 전혀 가고 싶지 않았다.두 사람이 약혼을 하고 결혼까지 하려면 반년은 족히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웨딩 사진을 찍고 보정하는 데 보름 이상 걸릴 테니 할아버지가 설 전에 하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김인우도 짜증스러운 눈빛이 가득했다.그는 조하랑의 앳된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곧 자신의 아내가 된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대체 할아버지는 뭘 보고 그러시는 건지.새해를 보름 남짓 앞둔
유지훈도 밖에 서서 호화로운 호송 행렬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진주 국제 유치원에서 자신보다 더 많은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경호원이 차 문을 열고 박예찬이 내려오자 유지훈은 물론 다른 아이들도 충격을 받았다.박예찬의 아버지를 본 적 없는 아이들은 그가 박예찬의 아버지라고 생각했다.“박예찬, 차 부르는 데 얼마나 썼어?” 유지훈은 믿지 못하며 거만하게 물었고 옆에서 조동민은 하품을 했다.“너 아직 모르지? 예찬이 우리 이모 따라 김씨 가문으로 가서 김씨 가문의 첫 증손자가 될 예정이야.”사실 박예찬은 김훈에게 자신이 증손자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그런데 김훈은 김인우와 마찬가지로 나사 하나가 빠졌는지 그를 김씨 가문의 자식이라고 생각하며 며칠 뒤엔 성까지 바꾸러 데려가겠다고 말했다.심지어 김훈은 그들의 관계를 세상에 알리는 보도자료까지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박예찬이 겨우 어르신을 설득해 기사 내는 걸 말렸다.인자한 노인을 속이고 싶지 않았던 아이는 나중에 꼭 해명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안 되면 친자 확인을 할 생각이었다.그리하여 조씨 가문 사람들과 김씨 가문과 가까운 일부 사람들만 김예찬이 김훈의 증손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김씨 가문의 증손자라고?”유지훈은 믿을 수 없었다.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참지 못하고 예찬에게 속삭였다.“예찬아, 김훈 할아버지 정말 네 증조할아버지야?”유지훈은 예전에 유명훈이 김씨 가문에 자랑하러 자주 데려갔기 때문에 김훈을 잘 알고 있었다.“지난번 유씨 가문에서 약혼식 할 때 나도 따라갔던 거 잊었어?”박예찬은 대답 대신 이렇게 되물었고 유지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남우 삼촌과 윤소현이 약혼식을 할 때 박예찬이 실제로 와서 김훈 할아버지 옆에 섰던 것을 떠올렸다.“나한테도 안 알려주고, 나빴어.”유지훈은 유난히 창피함을 느꼈다. 김씨 가문도 유씨 가문에 뒤처지지 않을 만큼 큰 가문인데 과거 그는 박예찬 앞에서 온갖 자랑을 다 해댔던 탓에 지금 체
한수민은 의아해하며 서류를 들고 열어보니 변호사가 보낸 고지서였다.거기에는 박형식이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박민정에게 주겠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박민정은 이제 한수민과 박민호에게 바움의 모든 재산을 자신에게 돌려주길 원했다.한수민이 박형식과 결혼할 때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박정권은 바움 그룹의 모든 수익은 박형식이 소유하고 한수민과는 무관하다는 혼전 계약서를 작성했다.하여 박민정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유언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이 망할 년이 감히 나를 고소했어!”윤소현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엄마,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아빠 회사에도 영향을 미칠 거야.”윤소현은 그동안 윤석후가 한수민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 그녀의 체면을 생각해 주었다.하지만 속으로는 한수민을 진심으로 경멸했고, 아예 친엄마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알아, 내가 처리할게.”박민정이 소송에서 승소하면 그녀는 윤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박민호는 소파 한쪽에 앉아 다리를 꼬고 사탕을 먹으며 조용히 듣고 있었다.나약하고 무능한 누나가 감히 엄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보아하니 박민정이 정말 변한 것 같았고 그는 바움의 재건을 기대하고 있었다.“엄마, 나 잠깐 나갔다 올게.”박민호는 그렇게 말한 후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러 나갔다.통화가 연결되고 그가 칭찬하며 이렇게 말했다.“누나, 우리 손 잡자. 내가 소송에서 이길 수 있게 도와줄게. 그리고 누나가 돈을 돌려받으면 내가 대표하면 되지.”박민정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허무맹랑한 꿈을 꾸고 있을 줄은 몰랐다.“지난번에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어? 넌 바움의 대표가 될 자격이 없어. 일거리가 필요하면 청소부 일자리나 마련해 줄게.”전화기 너머로 박민정의 차가운 목소리가 박민호의 귓가에 들려왔고 그 목소리는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김인우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박민정의 뺨을 때려주고 싶었다.“고작 여자가 무슨 바움을 책
이 말을 들은 은정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박민정을 안은 채 등을 살살 토닥거렸다.박민정은 마음의 상처를 꾹 참았다.“알고 보니 저와 아빠를 계속 속이고 있었어요.”과거 박민정은 자신을 낳느라 엄마가 커리어를 포기해야 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고 아버지도 자주 말씀하셨다.“네 엄마는 젊었을 때 무대 위에서 유난히 예쁘고 성격도 부드러워서 모든 남자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던 여자였는데 내가 발목을 잡았네.”아버지는 죽는 것마저 한수민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여자는 처음부터 아빠를 배신했던 것이다.은정숙 역시 한수민이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다. 역시 세상은 악한 사람이 꼭 벌을 받는 건 아닌 것 같았다.“민정아, 그런 사람은 슬퍼할 가치도 없어.”“네.”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저 여자가 친엄마라는 게 믿기지 않아요.”박민정은 오래전 친자 확인을 위해 병원에 갔고 그녀는 한수민의 딸이 맞았다.그런데 왜 똑같은 딸인데도 한수민은 자신에게 그토록 잔혹하게 대했을까.아마도 평생 답을 얻지 못할 의문이겠지.박민정은 사람을 시켜 한수민의 과거를 계속 조사했고, 이제 윤씨 가문의 모든 것을 되찾을 생각이었다.그런데 어느 틈엔가 박윤우가 문 앞에 찾아왔다.“엄마, 할머니, 왜 그러세요?”박민정은 서둘러 은정숙의 품에서 벗어나 상처받은 마음을 추스르며 말했다.“괜찮아, 할머니랑 얘기 중이었어.”“아.” 박윤우는 모른 척했다.“그럼 아래층에 내려가서 얘기하는 게 어때요? 손님이 왔어요.”손님?이 시간에 누가?박민정은 의아했다.“누구?”“아저씨랑 똑같은 사람이요.”유남준이랑 똑같다면 유남우?박민정은 은정숙이 눕는 걸 도와준 뒤 박윤우에게 자신이 내려갈 테니 위층에 있으라고 했다.거실에서 유남우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앉아 있었다.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박민정의 다소곳한 모습이 부드러운 눈동자에 비쳤다.“민정아.”박윤우가 보이지 않자 유남우는
#유남우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갑자기 바깥 문이 열리고 유남준이 문 앞에 나타났다.“뭘 숨겨?”그는 유남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왔고 고개를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는 유남우의 눈가에 냉기가 스쳤다.“형, 왔어? 조금 전에 형은 앞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일하는 건지 형수님께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유남준의 이마가 살짝 찡그려졌다.“할 말 있으면 밖으로 나와서 해.”그제야 유남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을 슬쩍 바라본 뒤 유남준을 따라 나갔다.마당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똑같이 생긴 두 남자가 함께 서 있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대체 뭐 하자는 거야?”유남준이 물었다.박민정이 자리에 없자 유남우도 연기를 그만두고 태연하게 말했다.“내가 말하지 않았어? 내 것을 되찾겠다고. 형, 어렸을 때부터 형은 항상 좋은 건 다 가져갔어. 이제 민정이까지 빼앗으려는 건 불공평하지 않아?”유남준은 가볍게 웃으며 조롱했다.“모든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지 말고 너 자신이 한 짓을 생각해 보지 그래?”유남우는 자신이 그의 이름을 사칭했다는 걸 언급한다는 걸 알고 주저 없이 맞받아쳤다.“그러는 형도 지금 눈 안 보이는 거 다 자업자득이야.”두 사람의 칼끝이 서로를 겨냥한 찰나 유남우의 전화벨이 울렸다.그는 발신자가 윤소현이라는 걸 확인하고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차에 앉은 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무슨 일이야?”“남우 씨, 지금 어디 있어요? 사무실에 찾으러 왔는데 안 보여서요.”유남우의 사무실 소파에 앉아 있는 윤소현은 예전에 화려했던 옷차림과 달리 꽁꽁 싸맨 채 눈은 다소 겁에 질려 있었다.옆에 있던 비서 홍주영도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변할 수 있는지 조금 의아했다.“무슨 일 있어?” 유남우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나...” 윤소현은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유남우가 자신을 싫어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찾아온 것이었다.“별일 없으면 전화하지 마.”유남우는 전화를 끊고 짜증스러운 어투로 기사에게
이제 박민호는 당연히 윤석후 윤소현 부녀의 헛소리를 믿지 않았다.“아니, 용돈만 좀 주면 돼, 누나.” 박민호가 웃으며 말했다.“그게 뭐 대수라고.”윤소현은 눈을 흘겼다. 아무리 아빠가 다른 동생이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무능한 동생이 있을 수 있는지.그녀는 차를 타고 떠나는 길에 박민정을 어떻게 혼낼지 고민하면서 비서에게 물었다.“박민정은 직업이 뭐예요?”앞서 그녀는 비서에게 박민정을 조사하게 했다.“에스토니아에 작은 스튜디오가 있는데 겨우 생계를 꾸려가고 있어요.”비서가 답했다.작은 스튜디오?“그 스튜디오에 손 좀 써요. 운영하지 못하게 해야겠어요.”윤씨 가문의 현재 힘으로 외국 스튜디오 하나 처리하는 것 정도는 쉬웠다.다만 윤소현이 조사한 정보들은 모두 박민정이 대외적으로 공개한 것들이고, 이전에 국내에서 자신을 히트시킨 곡들이 모두 박민정이 만든 곡이라는 사실을 윤소현은 몰랐다.윤석후가 돈이 있다고 해도 박민정의 회사 문을 닫게 할 방법은 없었다.“알겠습니다.”윤소현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사람 몇 명 불러서 신림으로 따라와요.”박민정이 모욕을 당하고도 순결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유남우도 결국 그녀의 순수함 때문에 좋아하는 거잖아?...한편 신림현, 집의 거실.유남준은 반듯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맞은편에 있던 박민정이 그에게 물었다.“갚을 돈 많다면서 차용증은 어디 있어요?”유남준은 유남우가 왔을 때 분명 무슨 말을 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서다희한테 있어. 보고 싶으면 서다희한테 전화해서 가져오라고 할게.”“유남우 씨는 당신이 지분의 30%를 보유하고 있고,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다고 하던데요.”박민정은 덧붙였다.박민정은 빠르게 얘기를 끝내고 싶었다. 그가 또 자신을 속인 거라면 더 이상 함께 지내고 싶지 않았고 유남준도 이를 알고 있었다.“내가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었으면 서다희랑 내가 왜 회사에서 쫓겨났겠어? 민정아, 내 동생 겉으로는 다정해 보여도 속은 알 수 없는 애야. 전에 얘기했잖
유남준의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있었고 정돈되지 못한 모습이 전반적으로 초췌해 보였다.“이지원 조사하고 왔는데, 민정이의 실종과는 아무 관련도 없던데요.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거예요?”만약 윤소현이 임신 중인 아이가 유씨 가문의 아이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정수미의 양녀만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당장이라도 윤소현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윤소현의 수려한 얼굴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그럴 리 없어요, 이지원이 분명 저한테 그랬다고요. 박민정이랑 그 두 아이들 처리해준다고...”윤소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남준은 천천히 윤소현의 앞으로 다가갔다.“말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정말로 이지원이었어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요.”윤소현이 다시 대답했다.유남준은 바닥나버린 인내심에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윤소현은 다시 어둠과 침묵 속에 갇혀 버렸다.“남준 씨, 얼른 저 내보내 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제발 나 좀 꺼내달라니까!”그제야 윤소현은 자신이 유남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밖으로 나온 유남준은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찍혀있었지만 그중 일부는 정수미에게서 온 것들이었고, 다른 몇 통은 고영란에게서 온 것이었다.그는 제일 먼저 정수미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일이시죠?”“유 대표, 민정이 소식은 있나요?”정수미가 조심스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직 없습니다.”유남준이 대답했다.정수미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더욱 절망스러워졌다.“그럼... 소현이는 어떻게 됐나요?”윤소현은 어릴 때부터 정수미가 직접 지켜봐 왔던 아이였고, 그 아이와 깊은 정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현재 임신 중이었다.“소현 씨도 아무 일 없습니다.”“그럼, 소현이 좀 풀어줄 수 있을까요? 내가 직접 물어볼게요.”정수미가 다시 물었다.정수미는 어렸을 때부터 온갖 호사만 누리며 살아온 윤소현이 그런 감금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수미 본인 역시 윤소현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엄마...”이지원은 떠보듯 정수미를 부르고는 말을 이었다.“엄마, 언니가 사라졌어요.”그녀는 박민정의 일부터 처리한 후 윤소현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도무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정수미는 멍한 표정으로 뒤돌아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뭐?”“소현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저도 모르겠어요. 오늘 언니랑 같이 산부인과 검진 가려고 했는데, 어딜 갔는지 갑자기 사라졌어요.‘이지원이 대답했다.정수미는 멍한 표정으로 이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상황파악을 마치기도 전에 유남준이 사람들을 데리고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윤소현은 제가 가둬놨습니다.”유남준이 말했다.정수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현이는 왜 가둔 거죠?”“민정이의 실종은 분명 윤소현이랑 관련이 있으니까요.”유남준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이지원에게로 옮기며 말했다.“윤소현이 그러더라, 이지원 네가 내 아이들 데리고 갔다고. 민정이는 아이들 찾으러 간 거라고 하던데, 어디로 데려간 거야?”그 말에 이지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남준 오빠?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저랑 민정 언니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하지만 유남준이 그녀의 말을 믿어줄 리 없었다.곧바로 몇 명의 경호원이 다가와 이지원을 제압했다.“끌고 가!”이지원은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유남준의 수법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그녀가 스스로 이곳에 등장한 것도 전부 유남우 때문이었다. 그가 이지원에게 직접 유남준을 찾아가 박민정의 실종이 자신과는 관련 없다는 사실을 어필하라고 조언해주었기 때문이었다.“오해예요, 오빠. 소현 언니가 왜 그런 얘길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민정 씨 아이들 데리고 간 적 없어요.”뒤이어 그녀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정수미를 바라보았다.“엄마, 엄마.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 그동안 집에만 있었고, 어디 간 적도 없어요.”하지만 정수미는
정수미는 그 질문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대답했다.“유 대표는 이미 내가 민정이 친엄마라는 걸 알고 있었죠?”유남준은 그 말에도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되물었다.“그런데 대표님은 제 말 안 믿었잖아요.”정수미는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다 내가 어리석었어요, 내 잘못이에요... 저도 너무 후회 중이에요.”그동안 윤소현이 늘 박민정에 대해 안 좋은 얘기만 늘어놨던 탓에 정수미는 박민정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못했다.그 탓에 정수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박민정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줘버렸다.박민정이 자신을 찾아왔던 그때도, 정수미는 그녀를 가차 없이 비웃고 쫓아내 버렸다.“지금 민정이 어디 있어요? 찾았어요?”눈시울이 붉어진 정수미가 다시 물었다.유남준은 폐허로 시선을 돌리며 자신의 손에 꽉 쥐고 있던 반지를 보여주었다.“마지막으로 추적된 곳이 여기인데, 방금 민정이 반지를 찾았어요.”그가 낮게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정수미는 몸을 휘청이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기색을 보였다.놀란 비서가 다급히 정수미를 부축해 주었다.“대표님.”“얼른, 얼른 주변 수색해!”정수미가 지시했다.“알겠습니다.”비서는 곧바로 인력을 충원해 폐허 속에 남았을지도 모를 박민정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밤이 깊도록 폐허 속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박민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저 박민정과 관련된 물건만 몇 가지 발견되었을 뿐이었다.비서는 멍하니 서 있는 정수미의 곁에 서서 슬쩍 말을 꺼내 보았다.“아가씨 말이에요, 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죠?”그 말에 정신을 차린 정수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비서를 올려 보았다.“지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대로 봐야 할 것이고, 죽었다면 죽은 대로 시체를 봐야만 했다.정수미는 박민정이 이렇게 실종됐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민정이 여기 없는 거 확실해. 다른 데서 계속 찾아봐.”“네.”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유남준도 폐허
“뭐라고요?”정수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어떻게 실종됐다는 거예요?”“저도 잘은 몰라요.”설인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아무튼 벌써 이틀이에요. 이틀 동안 찾아 헤매는 중인데 도통 안 보이네요.”그 말을 들은 정수미가 몸을 휘청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그런 그녀를 비서가 붙잡아 주었다.“조심하세요, 대표님.”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어지러움에 정수미는 비서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 겨우 찾았는데 실종이라니?”“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누가 데려갔는지는 알아냈으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비서가 애써 정수미를 위로했다.“그래, 얼른 사람 보내서 민정이 좀 찾아내.”정수미가 말했다.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박민정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박민정을 찾아낼 것이다.“알겠습니다.”정씨 가문에서도 사람들을 시켜 전국적으로 박민정을 수색하기 시작했다.힘없이 자리를 뜨는 정수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설인하는 의아했다. 정수미가 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민정 씨, 제발 빨리 좀 돌아와요.”설인하가 혼자 중얼거렸다....한편, 유남준은 거의 진주 시내 전체를 뒤집다시피 했지만 박민정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유남준은 주변 지역에까지 사람을 보내 수색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그렇게 마침내, 단서를 발견했다.유남준은 즉시 차를 몰고 그곳으로 향했다.그리고 정수미는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 역시 박민정을 찾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결국, 두 세력이 힘을 합쳐 공동으로 박민정을 수색하기로 했다.그렇게 수색 속도는 한층 빨라졌다.사람들은 곧장 단서가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도착했을 때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오직 불에 다 타버린 집뿐이었다.차에서 내린 유남준은 망설임 없이 까맣게 불타버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민정아!
그녀가 쥔 친자 확인 감정서에는 두 사람이 모녀 관계라고 적혀 있었다.비서는 다른 병원에서도 받아온 서류들을 건네며 말했다.“이번엔 틀림없습니다, 대표님. 박민정 씨는 대표님의 친딸이 확실합니다. 지난번엔 저희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친자 확인 감정서를 쥔 정수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어떻게... 그 걔가 어떻게 내 딸이야?”박민정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수미는 너무 갑작스러운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그녀 역시 자신이 친딸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 짓들이 얼마나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제 어떡해야 하지?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어떻게 날 이런 식으로 갖고 놀아?”정수미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친자 확인 감정서를 손에 꼭 쥐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만큼 괴로웠다.“내가, 내가 그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라는 작자가 딸한테 오히려 모욕감만 잔뜩 줬으니...”정수미의 마음은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오랫동안 찾고 있던 딸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살아왔다.더군다나 친딸을 괴롭히는 자신의 양딸을 그렇게나 적극적으로 돕기까지 했다.비서 역시 이런 운명의 장난에 착잡함을 느끼고 있었다.“대표님께서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잖아요. 조금 더 일찍 아셨더라면 민정 씨를 해치지 않으셨을 겁니다.”정수미는 비서의 위로에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책을 멈추지 않았다.“그 아이가 날 찾아왔을 때도 난 상처만 잔뜩 줘버렸어. 얼마나 아팠을까.”오랜 세월 동안 눈물이라는 것을 거의 흘려보지 않았던 정수미였지만 하늘의 장난과도 같은 이 상황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난 정말 나쁜 년이야! 어떻게 친딸한테 그럴 수가 있어!”만약 이 세상에 후회 약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전 재산을 내걸고서라도 얻고 싶을 지경이었다.당장이라도 과거로 돌아가 정신 차리라며 자신의 뺨을 수차례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가야
하지만 이 세상은 생각보다 컸고, 유남우가 박민정의 모든 인간관계를 전부 끊어버린 지금, 유남준은 어쩌면 평생 박민정을 찾지 못할 지도 몰랐다.“신경 쓸 필요 없어요.”유남우가 대답했다.“네.”이지원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럼 약속한 건 어떻게 된 건가요?”“아직 일이 다 끝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자꾸 서두르는 거죠?”유남우가 다시 말했다.유남우를 이미 따르기로 한 이지원은 지금 모든 것을 그의 말에 따라야만 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죄송합니다.”“이제 마지막까지 딱 한 단계 남았어요. 유남준한테 박민정이라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리기만 하면 되거든요.”유남우가 입을 열었다.이지원은 그런 유남우를 보면서 보통 미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여자 한 명을 위해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알겠습니다, 지금 가서 준비하죠.”“그래요.”이지원이 자리를 뜨자 유남우는 다시 코트를 입고 회사로 향했다.회사에 도착하자 홍주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남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도련님, 요즘 안색이 안 좋아보이시는데, 따로 주치의라도 불러드릴까요?”“필요없어.”유남우는 단호히 홍주영의 말을 거절했다.“주영아, 난 요즘 하루하루가 정말 기쁘거든. 나쁜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 네가 괜한 걱정 하는 거야.”그 말에 홍주영도 더는 권하려 하지 않았다.유남우의 결재가 필요한 서류더미를 한아름 안고 온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도련님, 실례가 안 된다면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혹시 요 며칠 동안 어디 다녀오신 건가요?”유남우는 퇴근 들어 계속 외출을 하는 것 같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서류 위로 사인 하던 남자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실례되는 질문인 것 같은데, 묻지 말아야 할 질문 아닌가?”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냉기가 스며있었다.유남우의 이런 말투는 처음 들어보는 홍주영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유남준은 그런 윤소현의 말을 전부 믿을 정도의 바보가 아니었다.“우선 이 여자 가둬요.”그는 부하에게 명령했다.“네.”그 말에 당황한 윤소현이 말했다.“아주버님, 남우 씨를 봐서라도, 제 배 속의 아이를 봐서라고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하지만 유남준은 그런 윤소현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한 마디만 남겼다.“민정이를 찾았을 때, 민정이 입에서도 같은 말이 나온다면 그때 풀어드리죠.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소현 씨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그렇게 윤소현은 가차 없이 차에 태워졌다. 혼자 남겨진 그녀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만 갔다.후회가 물 밀듯 밀려왔다. 자신이 왜 박민정을 찾아갔었는지, 왜 그 일을 인정했던 건지.이제 윤소현은 더 도망갈 곳이 없었다.남준은 계속해서 인력을 충원해가며 박민정을 찾는 게 총력을 기울였다.마침내 유남준은 서다희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사모님께서 택시에 남기신 귀걸이를 찾았습니다. 택시 안에 내장된 블랙박스 영상으로 사모님의 이동 경로까지 모두 파악했습니다.”“알겠어, 그 영상 나한테 보내줘. 그 경로대로 찾아봐야 하니까.”“네.”수색 범위가 좁아지자 유남준은 김인우와 방성원의 인력까지 동원해 박민정을 찾기 시작했다.한편, 이지원은 유남우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장소 바꿔요. 유남준이 추적 중인 모양이니까.”“네.”이지원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유남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두 아이는 남겨놓고 가요.”두 아이가 작전을 방해할지도 몰랐다.이지원은 딱히 내키지 않았지만 유남우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남우 씨가 어떻게 저를 유남준한테서 구해준다는 거죠? 유남준 그 냉혈한이 작정하고 저를 공격하면 어쩔 건데요?”이지원은 윤소현 같은 그 바보가 유남준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지원 씨가 비밀만 지켜준다면, 제가 책임지고 지켜드리죠.”유남우가 약속했다.“좋아요.
윤소현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내랑 아이를 못 지킨 건 아주버님인데, 왜 그걸 저한테서 찾아요? 웃겨, 정말.”유남준의 인내심이 결국 바닥나 버렸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유남준은 곧장 CCTV를 통해 박민정이 스스로 병원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장 부하직원들에게 박민정이 병원을 벗어난 후의 행방을 추적하도록 지시했다.한편, 윤소현은 여전히 곁에서 비아냥거렸다.“아주버님, 제가 봤을 땐 굳이 찾을 필요도 없어 보여요. 분명 바람 나서 다른 남자랑 도망간 게 분명해요. 애도 있으면서 참... 그냥 조용히 살지...”윤소현은 끝을 모르고 혼자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비아냥거렸다. 그 순간, 유남준의 마음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윤소현에게 다가간 유남준은 조금 전의 신사다운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는 손을 뻗어 윤소현의 목을 단단히 움켜잡았다.“네 애새끼가 20주쯤 됐다고 했지? 내가 지금 너 죽이고, 의사 찾아가서 애 꺼내라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우리 가문 재력 정도면 조산아 살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거든.”그 말에 윤소현의 동공이 커지더니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녀는 최대한 유남준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조금 전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던 건지 점점 땅에서 발이 떨어지더니 숨쉬기가 어려워졌다.이 미친놈은 지금 마음만 먹으면 정말 윤소현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윤소현은 필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발버둥 쳐봤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목을 움켜쥔 유남준의 힘은 점점 강해지기만 할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제야 윤소현은 처음으로 진정한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유남준을 향해 눈빛으로 용서를 구했다.그녀의 의식이 점점 흐려져 갈 때쯤, 남자는 마침내 손에서 힘을 풀었다.윤소현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채 목을 감싸고 거친 숨과 기침을 내뱉었다.“이제 말할 수 있겠지? 민정이랑 아이는 지금 어디 있어?”그 말을 하는
“그땐 내가 직접 이 애새끼 목을 졸라 죽여버릴 거니까!”이지원은 아이의 여린 목덜미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솔직히 얘도 참 귀엽게 생겼어. 네 어릴 때처럼 말이야.”순간 당황한 박민정이 외쳤다.“애한테 손대지마! 네가 원하는 게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게.”이지원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아이의 목에서 손을 뗐다.“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나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이렇게 어린 애한테까지는 손대고 싶지 않단 말이야.”말을 마친 이지원은 다시 아이를 여자에게 넘겨주었다.혹시라도 박민정이 다시 반항할까 봐 두려웠던 것인지 이지원은 두 여자에게 아이를 이곳에 두고 가게 했다.뒤이어 누군가가 박민정의 결박을 풀고는 그녀를 의료용 침대 위로 눕혔다.앞서 나섰던 흰 가운의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이제 눈을 감으시고, 제가 하는 말에 무조건 따르셔야 합니다. 아시겠죠?”“네.”박민정은 그렇게 천천히 눈을 감았다.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박민정은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해도 되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그 남자의 말에 따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봤지만 결국엔 그가 유도하는 무의식 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몸이 지나치게 허약해졌던 박민정은 의사에 유도대로 무의식 속에서 양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모든 일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그리고 뒤이어 친모인 정수미가 했던 말들도 떠올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더니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흰 가운의 남자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이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런 치료는 하루 이틀만으로는 안 됩니다. 꾸준히 받아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요.”의사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이지원은 이내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이쪽 준비는 끝났어요. 약속하신 거 꼭 지키셔야 해요.”“걱정 마세요, 제가 지원 씨를 속일 리가 없잖아요.”그 한 마디에 이지원은 청심환이라도 삼킨 듯 마음이 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