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란은 손을 꽉 그러쥐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목소리를 낮추어 박민정한테 말했다.“너랑 얘가 결혼한 지 이제 몇 년째니? 그동안 네가 후사를 봤더라면 내가 남준이를 대신할 사람을 왜 급히 찾았겠니?”가족 기업의 대를 이을 대표가 아이가 없다는 게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네가 날 훈계할 자격 있니? 자기 자식 안 아낄 부모가 어디 있어?”고영란은 이 말 한마디를 내던지고 떠나갔다.박민정은 제 자리에 선 채, 왠지 모르게 슬퍼졌다.그녀의 어머니는 한 번도 친딸인 자신을 아껴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방금 오지랖 넓게 나섰던 것이다. 멍하니 서 있는데 뒤에 있는 유남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고마워, 민정아.”유남준의 지금처럼 기분이 좋았던 적이 없다.정신을 차린 박민정은 그한테 잡힌 손을 서둘러 빼냈다.“고마워할 거 없어요. 아까는 당신이 불쌍해 보여서 순간 감정이 격해져서 그랬던 거예요. 다른 이유 없어요.”말을 마치고 바로 은정숙의 방으로 향했다.아래층에서 생긴 기척 때문에 혹여나 은정숙이 깨어났을지도 모른다.다행히 예찬이는 정민기와 물건 사러 나갔기에 고영란과 마주치지 않았다....한편, 고영란은 돌아가는 길에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눌렀다.박민정이 이젠 대놓고 시어머니인 그녀와 대들고 훈계질까지 할 줄 몰랐다.미간을 짓누르며 짜증 섞인 어조로 기사한테 빨리 가라고 다그쳤다.마침 중심가를 지나가고 있던 터라 차가 막혀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답답한 고영란은 차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익숙한 작은 인영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예찬이?! 쟤가 왜 저기 있어?”기사한테 차를 세우라 하고 얼른 차에서 내려 예찬이의 뒤를 쫓았다.요즘 일이 너무 많았지만 예찬이의 신상에 대해서는 늘 조사하고 있었다.전에 예찬이가 강연우의 아들인 줄 알았는데 강연우한테 물어보니 아니라고 했다. 또 자세히 조사한 결과, 조하랑은 외국에 간 뒤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없고 주변 이성과의 관계도 깨
박민정은 당황했다.유남준은 부모님도 계시고 형제에 사촌들까지 가족이 너무 많다 못해 그녀가 다 기억 못할 정도인데 어떻게 고아란 말인가.하지만 어린 아이를 속이기 위해서는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래, 맞아. 그래서 불쌍하다고 한 거야. 엄마가 아저씨를 데리고 있어야 해. 그리고 저분은 이상한 아저씨니까 이상한 말을 많이 할 거야. 윤우는 아저씨 말 절대 믿으면 안 돼.”박민정은 계속해서 윤우를 달랬다.그러나 윤우는 연기가 일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눈동자에 믿음이 가득했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안 믿을게요.”박민정은 윤우의 순수한 눈빛을 보고 이렇게 어린 아이를 속인 데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알기론 윤우는 자신을 많이 닮아서 보통아이들과 다름없었다.하지만 예찬이는 유남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서 기억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아이큐도 높았다. 어떨 때 보면 어른보다 더 똑똑했다.그래서 예찬이는 유남준이 자신의 친아빠인 것을 알지만 윤우는 아직 모른다...박민정은 윤우가 좀 더 크면 진실을 알려주려고 했다.그들은 곧장 집으로 갔다.박윤우는 집안의 해피바이러스답게 들어가자마자 형, 할머니, 할아버지를 불렀다. 그리고 유남준을 보자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아저씨, 오랜만이에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유남준이 일부분의 기억이 돌아와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윤우의 순수함에 깜빡 속을 뻔했다.“어떻게 보고 싶었는데?”유남준이 이렇게 묻자 윤우는 잠시 얼어붙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아주 많이 보고 싶었어요. 매일 화장실 가고 싶은 것처럼 아저씨가 보고 싶었어요!”순간 유남준은 당시에 윤우 때문에 온몸에 오줌을 덮어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막 식사하려던 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왠지 기분이 찝찝했다.건반을 두드리고 있던 박예찬은 동작을 멈췄다. 은정숙 외에도 ‘쓰레기 아빠’의 적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윤우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줄 몰랐는데 말
두 사람은 손을 다 씻고 자리로 돌아갔다. 유남준은 조금 어두운 안색이었지만 박윤우의 가식적인 친절함에 이끌려 식탁에 앉았다.“아저씨, 지금 눈이 안 보이시니까 자주 넘어지시겠네요?”박윤우가 물었다.“아니, 안 넘어져.”“그럼 앞이 보인다는 거네요?”박윤우는 여전히 단순하고 무해한 질문을 던졌다.유남준은 많이 지쳤지만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대답했다.“이제 길을 기억해서 넘어지지 않아.”“그렇군요.”“됐어. 이제 그만하고 밥 먹어. 이따가 다시 얘기해.”박민정이 말했다.이렇듯 박윤우는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었다.식탁을 훑어보다가 당근 요리를 발견한 박윤우는 당근을 먹을 수 있는 자신은 엄마를 닮았지만은 당근을 안 먹는 형은 무조건 쓰레기 아빠를 닮았을 거라고 생각했다.박윤우는 젓가락으로 당근을 가득 집어서 유남준의 그릇에 놓아주며 말했다.“아저씨, 당근 많이 드세요. 선생님이 당근을 많이 먹으면 눈 건강에 좋다고 하셨어요.”박예찬은 박윤우가 쓰레기 아빠에게 골탕을 먹이려는 것을 보고 어리지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도 곧바로 기회를 잡고 옆에서 거들었다.“윤우야, 너 바보야? 아저씨는 눈이 안 보이잖아.”유남준은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어? 당근은 눈이 안 보이는 사람한테 소용이 없는 거야?”박윤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했다.두 아이가 번갈아 가며 눈이 안 보인다고 말하는 모습은 마치 사람들이 유남준 앞에서 박민정이 귀가 안 들린다고 놀리는 것과 흡사했다.결국 박민정은 나서서 아이들을 제지했다.“윤우야, 그렇게 말하지 마. 그거 예의에 어긋나는 거야.”어쨌든 유남준은 두 아이의 생부다.박윤우는 박민정이 화가 난 것을 보고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 이제 엄마가 없을 때 유남준에게 골탕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비록 유남준은 앞이 안 보이지만 두 아이가 좋은 마음에서 한 말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박윤우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 틀림없었다.유남준은 당연히 이런 일로 아이들에게 뭐라고
소리를 듣고 박예찬과 은정숙도 뛰어왔다.은정숙은 박윤우를 껴안으며 물었다.“아이고, 내 새끼, 아저씨가 어디를 때렸어?”은정숙은 너무 화가 나 호흡이 가빠졌다.박예찬은 박윤우에게 눈짓을 보냈다.그러자 박윤우는 황급히 말했다.“제가 농담한 거예요.”“농담이라고?”은정숙이 유남준을 쳐다보자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했다.“방금 저랑 윤우가 내기했거든요. 윤우가 제가 때렸다고 말하면 다들 믿는지 않는지요.”박윤우와 박예찬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쓰레기 아빠의 연기 실력이 자신들보다 더 높을 줄은 몰랐다.박윤우는 마음속에 후회가 가득했다.반면에 은정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 바보야, 왜 이런 내기를 해? 사람은 솔직해야 해. 거짓말하는 건 나빠. 콜록콜록... 알겠니?”“네, 알겠어요. 미안해요, 할머니.”박윤우는 즉시 사과했다.박민정도 약간 화가 나서 말했다.“윤우야, 앞으로는 이런 장난하지 마, 알겠어? 엄마랑 할머니가 깜짝 놀랐잖아.”박윤우는 한 번도 이렇게까지 억울한 적이 없었다.집에서 애지중지 예쁨 받던 그가 쓰레기 아빠에게 당하다니,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이렇게 생각한 박윤우는 갑자기 유남준의 다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아저씨, 아저씨가 내기에서 이기면 사탕 사 준다고 하셨잖아요?”박예찬은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윤우가 더 강하군.’은정숙은 유남준을 노려보며 말했다.“우리 윤우는 말 잘 듣는 아이였는데 자네가 나쁜 걸 가르쳤군.”“윤우야, 가자. 할머니랑 같이 올라가서 쉬자.”박윤우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은 채 유남준을 보고는 다시 불쌍한 표정으로 은정숙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박예찬도 함께 끌려갔다.은정숙은 손자들을 너무 예뻐한 나머지 이번에도 그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보아내지 못했지만 박민정은 발견했다.그녀는 박윤우가 꾸중을 들을까 봐 잔머리를 굴린 것이라고 생각했다.“민정아.”유남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박민정은 유남준 앞에 서서 말했다.“내가 아직 안 간
박민정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움직일 엄두를 못 냈다.당황한 그녀는 초점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창고였던 방은 어느새 유남준에 의해 정리도 되고 인테리어도 끝난 상태였다. 쿨톤으로 바뀐 방은 크기고 더 커진 듯 보였다.유남준의 방은 예전과 같이 여전히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펜 하나도 통 오른 쪽에 잘 꽂혀 있었다.그러다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다시 유남준의 손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흉터가 남아 있었다.이 흉터들은 어쩌다가 생긴 것일까?“손은 어쩌다가 유리에 베인 거예요?”박민정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유남준은 이렇게 박민정을 안아본 것도 오래 되었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맡자 호흡이 거칠어졌다.“기억 안 나.”절대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만약 사실대로 말했다가 박민정이 자신이 기억을 회복한 것을 알고 쫓아낼 것이 아닌가?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안타깝네요. 그럼 예전에 일했던 내용도 기억 못하는 거 아니에요?”“어떤 내용?”유남준은 일부러 모른 척 하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박민정은 또다시 그날 유남준이 피아노를 치던 것이 생각나서 중얼거렸다.“그런데 피아노 치던 건 왜 잊지 않았지? 근육이 기억한 건가?”그녀는 혼잣말하면서 유남준이 자신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그이 높은 콧대는 거의 박민정의 빨간 귓불에 닿을 것 같았다.“이제 다리 괜찮아졌어요. 고마워요.”박민정은 이제 다리도 안 아프고 유남준이 아무 대답도 없으니 내려가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입술이 바로 그의 볼에 닿았다.유남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박민정은 깜짝 놀라 고개를 다시 돌리고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유남준은 다시 그녀를 힘껏 끌어당겨 품 안에 가두고 그녀에게 입맞춤했다.순간 방 안은 시간이 멈춘 듯했다.박민정은 코앞에 있는 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유남준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은은한 향기가 코에 닿았다. 박민
박민정은 이불을 꼭 감싸 쥐고 다급히 거절했다.“됐어요. 그만해요.”그녀는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와 빠른 속도로 옷을 입고 몰래 방에서 나왔다.하지만 어두운 곳에 두 녀석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박윤우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쓰레기 아빠가 왜 거짓말했지? 엄마 여기 있는 게 맞잖아.”좀 더 성숙한 박예찬은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짜증 나네!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국 못 막았어!”“무슨 말이야?”박윤우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하지만 사실 박예찬도 대개 어떤 일인지만 알 뿐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다.“가서 할머니가 좋아하는 드라마들을 보면 알아. 남자와 여자가 단둘이서 뭐 하겠어! 당연히 뽀뽀했겠지!”박윤우는 늘 병원에 있었고 박예찬은 은정숙과 함께 집에 있으면서 사랑 이야기에 관한 드라마를 여러 개 봤다. 은정숙은 매번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박예찬은 보고 싶지 않아도 효심 때문에 옆에서 같이 있어 줬다. 그렇게 드라마가 끝나면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중엔 연애에 관한 것도 있었다.“짜증 나!”이제 박윤우도 이해했다.“저 아저씨가 감히 엄마한테 뽀뽀를 해?!”박윤우는 화가 잔뜩 났다.흥분한 그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아직 방에 안 들어간 박민정의 귀에 들렸다.박민정이 고개를 돌리자 더는 숨기지 못할 것을 알고 박예찬과 박윤우는 걸어 나왔다.박윤우는 바로 입을 열었다.“엄마, 왜 아저씨 방에서 나왔어요?”그는 질투가 났다. 엄마는 오랫동안 자신의 볼에 뽀뽀를 안 했는데 쓰레기 아빠를 먼저 찾았다니.“나, 난...”박민정은 두 녀석의 큰 눈을 쳐다보면서 갑자기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하필 이때 유남준의 방문이 열렸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나오면서 말했다.“우린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왜, 너희도 들을래?”두 녀석은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꼭 저녁에 해야 하는지 물으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쿵 하고 소리가 들려왔다. 물건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딩동-집 안의 유럽식 진자시계에서 소리가 났다.은정숙은 고개를 돌려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벌써 12시야, 이제 좀 쉬어야겠다.”“네.”박민정은 약간 불룩 튀어나온 배에 손을 얹은 채 돌아서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조금 전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은정숙은 유남준에게 유난히 짜증을 냈는데, 왜 이제 와서 이렇게 빨리 변했나 싶었다.게다가 유남준과 만나도 된다고?박민정은 다시 한번 저 멀리 유남준과 아이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아니, 그녀는 예전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었다.길가에 쌓인 나뭇가지와 쌓인 눈을 치운 유남준은 두 아이를 방으로 데려갔고, 박민정은 곧바로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벽난로에 불을 붙이러 갔다.“이따가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자자.”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들은 유남준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뿐 춥지는 않았다.반대로 유남준은 늘씬한 손이 얼어서 빨개졌지만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유남준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모두 해냈어야 했다.박민정은 오늘 밤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했고, 두 꼬마가 몸을 녹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곧바로 욕실로 데려가 옷을 챙겨주었다.오랜 시간 추운 밖에 있었기 때문인지 유남준의 마음속 불도 겨우 꺼졌다....새해 첫날.박민정은 아침 일찍 일어나 두 아이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집 안을 꾸몄다.몇 년 전 해외에 머물렀을 때는 매번 크리스마스만 보냈는데 이제 드디어 설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주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셰프와 함께 있는 유남준을 발견했다.캐주얼한 옷차림에 앞치마를 두른 남자는 유난히 집안일에 능했다.유남준은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손에 들고 있던 만두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민정아.”의문이 아닌 서술형이었다.유남준은 사람이 적을 땐 발소리만 들어도 누가 오는지 알 수 있었다.“네.”박민정은 여전히 어색한 기색이 역력했
과거에는 크고 작은 명절이 되면 박민정은 유남준과 함께 유씨 가문 저택에 다녀와야 했다.새해 첫날은 당연히 가야 했지만 이번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전 바빠서 못 가요. 남준 씨가 가고 싶다고 하면 데려가세요.”박민정은 바로 전화를 끊었고 반대편에서 고영란은 끊어진 전화를 보며 분노했다.“버르장머리 없는 것. 남준이가 기억상실증만 아니었어도 어딜 감히 네까짓 게!”옆에 있던 비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도련님 모시러 갈까요?”“가. 박민정은 오기 싫어도 남준이는 꼭 와야 해, 유씨 집안 장남이니까.”고영란도 사실 유남준이 오늘 행사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앞을 못 보는 데다 기억상실증까지 걸렸으니 체면을 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유명훈은 콕 집어 유남준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유명훈은 오랫동안 업무에 개입하지 않았어도 회사에 심복이 꽤 많았기 때문에 유남우와 그녀가 감히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그런데 도련님이 오기 싫다고 하면요?”비서가 다시 물었다.“그럼 묶어서라도 데려와. 앞을 못 보는 사람 하나 감당 못 해?”고영란은 화를 내며 말했고 비서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신림현.박민정은 유남준에게 고영란이 전화해 오라고 한 것에 대해 말했다.“엄마, 아저씨 고아라고 하지 않았어요?”박윤우가 바로 묻자 박민정은 흠칫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맞아, 아저씨는 버려졌어.”“아, 이제야 아저씨 엄마가 집에 오길 원하시는 거예요?”“그런 셈이지.”박민정은 유남준을 힐끗 쳐다봤고 이때 박윤우가 유남준에게 말했다.“아저씨, 그럼 엄마한테 돌아가지 그래요? 우리랑 엄마 뺏지 말고요.”아이는 가장 순수한 말로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입 밖으로 꺼냈다.유남준은 화를 내지 않고 박윤우에게 말했다.“어린애들만 엄마를 찾는 거지.”박윤우는 곧바로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불쾌함에 반박하려 했지만 박민정은 두 사람이 또다시 말싸움을 벌이려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말렸다.“됐어, 윤우는 형이랑 옷 갈아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