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민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보아낼 수 없을 위선이었다.박민정은 예쁜 눈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이번엔 또 어디로 나를 팔려고요? 또 뭐가 필요해서 왔는데요? 왜요, 제가 이용가치라도 생겼나 봐요?"제 위선이 단번에 들키자 한수민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본심을 드러냈다."내가 그런 눈으로 보지 말랬지."저런 박민정의 경멸 어린 눈을 볼 때마다 한수민은 그 눈을 파내 자근자근 밟아주고 싶었다.박민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그냥 돌아가실래요 아니면 제가 갈까요?"박민정이 저를 바라보던 그 눈빛은 아무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가던 한수민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회사를 박민정에게 넘겨준다는 박민호에게서 전해 들은 박형식의 유언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그 무덤을 파버리고 싶었다. 딸이나 그 아비나 어떻게 하나같이 저 모양인지, 한수민은 회사를 하나뿐인 아들이 아니라 딸에게 물려주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죽어서도 짐이야."...누군가에게는 한평생을 들여 치유해야 하는 것이 어린 시절이었다. 박민정이 바로 그러했다.박민정은 한수민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서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그때, 누군가의 코트가 박민정의 어깨 위로 걸쳐졌다.뒤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모를 연지석이 서 있었다."언제 왔어?""유감스럽게도 한수민 가기 전에."박민정은 눈꼬리를 가볍게 내리며 말했다."그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연지석은 손을 들어 박민정 머리 위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였는데 뭘.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걸 신경 써."박민정은 눈물이 맺힌 채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근데 갑자기 왜 온 거야?""정숙 아주머니가 불러서 왔어.박민정은 은정숙이 무슨 얘기를 할지 알아 방으로 들어가기 전 연지석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지석아, 아줌마가 하는 말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아줌마는 그냥 나를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래. 근데 나는 이제 혼자서도
하민재도 당연히 장난이었기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미안해 형. 나 진짜 할 말 있어."연지석은 귀찮지만 하민재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형이 전에 유앤케이 그룹 프로젝트 몇 개 뺏어왔다고 했었잖아? 근데 거기서도 눈치챈 것 같아. 유남준이 우리 사람한테 협박했대."연지석은 유앤케이 대표가 가짜라는 것을 아직은 하민재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다."그럼 일단 프로젝트 중단해."근데 아마 가짜라고 너무 방심한 듯싶다."알겠어."...한편 유남준은 전주 보디가드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는 박예찬이 클럽에 간 사실과 그의 이름이 연윤우가 아니라 박예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왜 그 어린애가 클럽에 가서 카드를 긁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전화를 끊자 들리는 발소리와 다른 남자의 목소리에 눈썹을 치켜세운 유남준이 방을 나갔다.금방 들어온 건지 아직 열린 문으로 느껴지는 한기에 박민정과 연지석을 향해 유남준이 물었다."민정아, 손님 왔어?"박민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연지석이 말했다."접니다 연지석."연지석이라는 이름을 들은 유남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두 남자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박민정은 밥을 하러 가겠다 말했다."난 저녁 준비할게요. 얘기 나눠요.""내가 도울게.""도와줄게."주방 앞에 선 박민정이 거절하려 하는데 연지석이 말해왔다."유남준 씨는 앞이 안 보이니까 내가 도울 게 민정아."그 말을 들은 유남준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구겨졌다.지금 상황을 보아 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유남준도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아 박민정은 연지석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유남준이 앞이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고 또 요리를 배운다 배운다 하면서도 지금까지 밥을 짓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도움이 되지 않을 듯했다."그래."연지석은 자신이 이겼다는 듯한 표정으로 유남준을 한번 보고 나서 박민정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 홀로 남은 유남준은 주방에서 들려오는 둘의 다정한 대화와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점점 심
유남준은 그럴 생각은 없었다.박예찬을 데려온 것도 박민정한테 서프라이즈를 주려고 한 건데 오히려 그녀는 이젠 그와 말도 잘 섞지 않았는다. 예찬이는 유남준이 잠자코 있자 방금 자기가 한 말 때문에 유남준이 좀 수그러든 줄 알고 어젯밤에 내기에 져서 아빠라고 불러야 했던 복수를 하느라 계속해서 비꼬았다.“아저씨 때문만 아니었으면 엄마랑 아빠 결혼한 지 오래예요. 그러니까 어서 둘 사이에서 빠져요. 누가 그러던데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세컨드라고.” 이 말을 하자마자 예찬이는 이마에 꿀밤을 한 대 세게 맞았다.유남준은 엄숙한 얼굴로 그를 봤다.“그런 말 다시 듣고 싶지 않아. 앞으로 인터넷에서 그런 이상한 소리만 배워서 나르기만 해 봐.”예찬이도 나쁜 말이란 걸 알지만 쓰레기 아빠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이 말이 잘못된 건 줄은 아는 걸 보니 유남준이 아주 구제 불능은 아닌 것 같았다.예찬이는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이런 말 누가 했는지 왜 안 물어봐요?”“누가 했는데?”“이지원. 아저씨가 그렇게 아끼던 첫사랑, 마음속 여신님.”유남준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고작 네 살짜리 애가 대체 어디서 이런 세컨드니, 여신님이니, 하는 말들을 배웠는지 모르겠다.예찬이는 전에 이지원의 개인 자료를 찾다가 그녀의 부계정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서 저런 말들을 퍼뜨리고 있었다.그걸 보고 예찬이는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유남준의 아내는 분명 엄마인데 오히려 이지원은 엄마를 세컨드라고 얘기하고 있었다.예찬이는 그 일이 상기되어 분노가 차 넘치는 얼굴이었지만 유남준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그의 기억 속에 이지원이라는 인물은 없었다.하지만 예찬이의 말투로 봐서 지어낸 얘기 같지는 않았다.“네 말은 그 여자가 나랑 민정이 사이에 끼어들었다는 거야?”“혼자 천천히 생각해 봐요. 내가 지금 알려줘도 어차피 기억도 안 날 건데요, 뭘.”예찬이는 가려다 또 뭔가 생각났는지 한마디 보탰다.“나한테서 그 이야기 듣고 싶으면, 날 아빠라고 불러요.”
유남준은 다급히 당근을 밥과 함께 입에 떠넣었다. 옆에 앉은 예찬이는 그 당근이 제 입안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보고는 몸서리를 쳤다. 저렇게 맛없는 당근을 한꺼번에 다 먹어 치우다니. 쓰레기 아빠에 대해 감탄이 절로 나왔다.당근을 깨끗이 비운 유남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와이프가 해주는 밥은 그게 뭐든 다 맛있어요.”박민정은 천천히 시선을 거둬들였다.와이프라는 호칭에 연지석의 기분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젓가락으로 유남준의 밥그릇에 반찬을 또 얹어주며 그가 말했다.“이 당근 볶음은 내가 한 거예요. 그렇지, 민정아?”“아... 응, 그렇지.”박민정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한편 유남준이 골탕먹는 듯한 처지에 놓이자 왠지 우습기도 하고 속이 약간 후련한 것 같기도 했다.아무튼 항상 고고한 부잣집 도련님한테서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당근을 집어 또 한 번 그의 밥그릇에 올려놨다. “맛있으면 많이 먹어요.”유남준의 밥그릇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당근을 보며 예찬이는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갑자기 유남준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아저씨, 당근 좋아하면 제 것도 드릴게요.”천진난만한 얼굴의 예찬이는 마음속에 작은 악마가 살고 있었다. ‘쓰레기 아빠, 날 탓하지 마요. 사나이는 독하고 모진 맛이 있어야 하는 거래요.’자기 밥그릇 안에 있는 당근을 유남준한테 넘겨놓으려 하는 그때, 유남준이 귀신같이 알고 시선을 그아이한테로 돌렸다.“예찬아, 오늘 유치원에서 뭘 배웠어?”예찬이의 손에 쥐고 있는 젓가락이 당근을 잔뜩 집은 채 유남준한테로 향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이때 유남준은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너도 당근 좋아하지? 내 것 다 너 줄까?”예찬이가 즉시 거절 의사를 표하려는데 유남준이 또 입을 열었다.“민정아. 너 모르지, 오늘 예찬이가...”“아, 네! 당근 다 제게 주세요. 저 당근 좋아해요.”예찬이는 유남준의 밥그릇에 담긴 당근을 얼른 다 집어와 자기 밥그릇에 담았다.박민정과 은정숙은 경악한
다음 날 아침, 죽을 끓이려던 박민정은 어제 음식하고 남은 당근 몇 개가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오랫동안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한 그녀는 다른 재료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유남준은 아침 댓바람부터 병원에 간다고 나가고 없었다....어두컴컴한 지하실 내에서, 연지석은 천천히 눈을 떴다.그의 팔다리는 의자에 묶여 있고 이마에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온몸에 나 있는 상처는 소금물에 적셔진 것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팠다.맞은편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저 자식 꽤 솜씨가 있던 데요. 열다섯 명 불렀는데 모두 다쳤어요. 저것도겨우겨우 묶어둔 거예요.”서다희가 유남준한테 말했다.그 소리를 따라 연지석이 고개를 들어보니 유남준이 나른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기척이 들리자 서다희는 바로 유남준한테 알려줬다.“저놈 깼어요.”연지석은 일이 생겼을 때부터 유남준의 소행이겠거니 예상하였다. 그가 박민정을 찾아온 건 그 누구도 알지 못하니 해외에 있는 세력은 용의선상에서 배제할 수 있었다. 다만 국내는 안정된 편이다 보니 그도 조심을 기울이지 않아 보디가드를 대동시키지 않았다.“유남준, 날 여기로 잡아 오면 민정이가 다시 널 받아줄 거 같아?”연지석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싸늘한 미소를 흘렸다.“너랑 다시 같이 잘 해볼 생각이었으면 나와 애를 낳지도 않았어.”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이 삽시에 굳어버렸다.“그래? 그럼 만약 네가 이 세상에 없다면?”“아이가 아빠를 잃게 되면 민정이가 널 더 미워하지 않을까?”연지석은 매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그도 같은 남자로서 또 다른 남자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더 세게 후벼팔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의 말이 유남준의 정곡을 찔렀다. 하나 유남준은 이대로 그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수하들이 연지석을 향해 무참하게 발길질을 했다. 연지석은 입을 꾹 다물고 신음조차도 내지 않았다.서다희는 연지석을 보며 그가 보기와 다르게 깡이 있다는 걸 느꼈다. 남의 와이프를
이웃이 보기에는 유남준이 건넨 것이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해 혹시 미친 건 아닐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박민정이 들어오자 이웃 아주머니는 그녀를 잡아끌고 말했다."새댁 남편이 생긴 건 멀쩡한데 성격이 좀 이상한 것 같아. 아까 야채 가져다줄 때 돈이 아니라 종이 쪼가리를 주면서 우리 보고 알아서 숫자 적으라고 하더라니까."이웃 아주머니는 유남준이 미친놈 같다고는 하지 않고 애써 돌려 말했다. 박민정은 아주머니가 오해했음을 알지만 뭐라고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유남준의 성격이 이상하다는 말에 동조했다."채소 고마워요 아주머니. 다음엔 그 사람 말고 저 기다렸다가 받으세요.""그래."이웃 아주머니는 웃으며 박민정이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자리를 떴다.어쩌다 저런 아가씨가 눈이 멀고 정신까지 이상한 사람한테 시집을 간 걸까, 전에 박민정이 재벌 집 아가씨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상대도 재벌이라 뭐 정략결혼 그런 건가 하는 생각들을 하며 아주머니도 집으로 향했다.박민정은 윤우를 보러 병원에 갔다가 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산부인과에 들러 검사도 하고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말을 듣고 집에 들어오는데 마침 유남준이 주방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보이지도 않으면서 뭘 하겠다고 그러는지 손은 몇 번이나 데일 뻔해 보는 사람이 더 아슬아슬했다."뭐해요 지금?""밥하잖아."유남준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을 하며 설탕을 소금으로 착각한 채 쏟아 넣고 있었다."그거 설탕이에요. 소금이 아니라..."그 말에 유남준은 잠시 멈칫하고는 말했다."여기 전에는 소금이었잖아.""어제저녁 하다가 위치를 옮겼어요. 이리 줘요. 내가 할게요."눈도 보이지 않는 사람을 힘들게 하기 싫었던 박민정이 제가 하겠다고 나섰지만 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계속 요리를 하고 있었다."앞으로 밥은 내가 다해."어젯밤 연지석과 박민정이 주방에서 다정하게 요리하는 모습만 생각하면 치가 떨려 당장이라고 전용 요리사를 불러오고 싶었
박민정이 이번에 신림현으로 돌아온 건 은정숙의 마지막을 고향에서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감을 남기고 싶지 않아 왔던 곳에서 유남준과 유앤케이에 이렇게 발목이 잡혀버릴 줄은 미처 몰랐었다.박민정은 생각하길 그만두고 진서연에게 말했다."다음 곡은 크리스마스에 낼 거야."사실 곡은 진작에 써둔 상태였지만 아직 몇몇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 좀 더 수정단계를 거쳐야 했다."알겠습니다."진서연을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럼 지금 바로 인터넷에 카운트 다운 올릴게요.""그래."박민정이 유명해진 뒤로 그녀가 쓰는 곡들은 친한 친구에게 선물하는 게 아니면 항상 먼저 SNS에 카운트 다운을 올려뒀었다. 그리고 그걸 본 다른 소속사 아티스트들이 러브콜을 보내고 진서연은 그 사이에서 협상을 진행해 곡을 발표하는 과정을 거쳤다.저번에는 회사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 박민정이 직접 용 사장을 찾아 곡을 주었었지만 지금은 또 재정이 다시 좋아졌으니 박민정은 회사의 원래 지침대로 하기로 했다.박민정은 제시한 액수에 따라 곡을 주는 게 아니라 이 노래를 부를 사람과 자신이 쓴 곡의 케미를 제일 중시했기에 돈이 많다고 무조건 박민정의 곡을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박민정의 신곡이 크리스마스에 나온다는 소식은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시간 검색에 10위에 올랐다.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는 이슈였다.이지원도 이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매니저에게 연락해 곡을 받아내라고 했지만 사실 이지원 말고도 곡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고 또 그들은 돈도 권력도 더 막강한 사람이기에 곡을 받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그때 모스크바에서 발레공연을 마친 한 여자가 백조마냥 사뿐히 계단을 내려와 딱 봐도 부자처럼 보이는 한 남자 앞에 섰다."아빠, 뉴스 봤어요? 나 그분 노래 갖고 싶어요."여자의 얼굴은 박민정과 많이 닮아 보였다.기업가처럼 보이는 남자는 제일 사랑하는 딸의 부탁에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우리 소현이가 갖고 싶은 건 아빠가
영상을 처음 본 순간부터 박민정은 무대 위에 여자가 꼭 제 어머니 한수민 같다고 여겼다. 어릴 때 한수민을 무척이나 따르던 박민정이 그 무대 영상을 몰래 몇 번이나 돌려봤었다. 한수민도 윤소현이라는 여자처럼 발레리나 출신이었다. "보스님, 보셨어요? 어때요?"박민정은 진서연의 목소리에 그저 닮은 사람이겠지 하며 대답을 했다."무대는 좋네. 근데 난 좀 더 기다려보고 싶어.""알겠어요, 그럼 일단 연락처만 남겨둘게요.""응."전화를 끊은 박민정은 다시 그 영상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영상만 보면 어릴 때 한수민을 따라 춤을 배우고 싶다 했을 때 한수민의 조롱 섞인 표정이 떠올랐다."너 같은 귀머거리가 무슨 춤을 배워? 박자는 들을 수 있어? 맞출 수나 있겠니? 나 쪽팔리게 하지 말고 저리 가."박민정에 그에 굴하지 않고 무대에 몇 번이나 올랐고 상도 많이 받았었지만 한수민은 한 번도 칭찬이란 걸 해주지 않았었다."그렇게 열심히 하면 뭐해? 세상일이 노력한다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니야. 알긴 하니?"한수민은 경멸 어린 눈길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같은 장애인은 장애인 다운 일을 하란 말이야. 헛된 꿈 꾸지 말고. 너는 춤을 출 자격이 없어."한수민의 반복된 조롱에도 박민정은 춤을 포기하지 않았었는데 어느 한번 국제 콩쿠르에서 누가 박민정의 보청기를 가져가 버리는 탓에 무대에 오른 박민정의 귀에는 소음밖에 들리지 않았고 박자를 하나도 맞추지 못해 결국 예선 탈락으로 떨어졌다.그날 집으로 돌아간 한수민은 박민정이 보는 앞에서 발레복이며 신발이며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지며 말했다."다시는 춤 같은 거 추지 마. 네가 또 춤을 추는 게 내 눈에 보이면 다리를 분질러 버릴 거야."옛날 일들이 떠오른 박민정은 몸을 웅크리고 눈물을 흘렸다.어린 나이에 받았던 수많은 상처들은 아마 평생동안 치유받지 못할 것 같았다.작업실에서 한수민의 한번 또 한 번의 조롱을 견뎌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치던 박민정은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오준수의 엄마, 차현영이 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울먹거리며 물었다.“준수야, 대체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왜 업체들이 갑자기 우리더러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데?”오준수는 하룻밤 사이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상태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엄마, 우리 이제 끝난 것 같아요.”두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이천애도 마음이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아무리 눈치 없다고 해도 오씨 집안이 진짜 큰일 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차현영이 아침 댓바람부터 이렇게 찾아와 울부짖지도 않았을 것이다.집에는 오직 오성훈만 아무 걱정도 없이 쿨쿨 자고 있었다.차현영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떻게 된 건지 빨리 말해. 누구한테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야?”오준수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에 대해 차현영에게 말해줬다.그러자 그녀는 대뜸 오준수를 꾸짖기 시작했다.“이 멍청한 놈, 그때 그렇게 이혼하지 말라고 뜯어말렸는데도 내 말은 귓등으로 흘려보내더니. 손씨 가문 딸이면 우리 가문에도 얼마나 득이 되고 좋아? 하필이면 아무 쓸모도 없는 모델을 데려와서는.”“이천애는 그냥 우리 집안이랑 안 맞는 여자야.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회사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는 것 좀 봐, 이제 어떡하면 좋지?”“지금 당장 연서한테 가서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사과해!”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려보니 이천애가 구석에서 몰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여우 같은 계집애, 우리 집에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꺼지지 못해?”이천애는 오랜만에 집에 온 거라 이대로 순순히 돌아가기 싫었다.“어머님, 아무리 그래도 제가 성훈이 친엄마인데 아이 앞에서 굳이 이런 식으로 저를 대해야겠어요?”“그나마 성훈이가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진작에 널 밖으로 끌어냈어.”그러다가 차현영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오준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따 사과하러 갈 때 천애도 같이 데려가. 어
오준수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설마요? 혹시 저에 대해 명확히 설명한 게 맞아요? 전 오현웅 씨의 아들, 오준수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정 대표님과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저를 젊은 사람이 능력까지 갖췄다고 칭찬도 했었다고요.”순간 경호원의 눈빛이 아까보다 더욱 살벌해졌다.“계속 여기서 소란 피우면 어쩔 수 없이 저희가 손을 대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그러나 오준수는 이대로 가기 싫었다. 막무가내로 병실 안을 향해 달려던 이때, 그와 그의 비서는 몇 명의 경호원에 의해 보기 좋게 쫓겨났다.그렇게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그의 얼굴에 울긋불긋 멍이 든 모습을 본 이천애가 깜짝 놀라 물었다.“오빠, 얼굴이 왜 이래? 누구한테 맞았어? 누가 감히 오빠를 때렸는데?”이천애의 쏟아지는 물음에 오준수는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꺼져!”그러자 이천애도 슬슬 기분 나빠지기 시작했다.“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예전 같았으면 금방에라도 달려가 그녀를 달래줬을 텐데 지금 이천애를 보면 자꾸 손연서만 생각났다.“나한테 도움도 안 되는 게, 왜 쓸데없이 연서한테 시비 걸었어? 안 그랬으면 내가 이혼할 일도 없었잖아!”이혼하지만 않았으면 지금 정씨 가문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의 말에 이천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손연서랑 이혼하길 잘했다고 말했던 사람인데 말이다.“오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그녀가 다시 차분하게 되묻자 오준수는 애써 화를 억누르고 오늘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모조리 말해줬다.이천애는 그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연서 씨가 어떻게 지엔 그룹의 대표랑 친구 사이일 수가 있죠? 그리고 그 박 대표라는 사람은 고작 친구 하나 때문에 회사의 이익도 고려하지 않는대요? 우리가 어떤 가문인지 아직 잘 모르는 게 분명해요.”그러나 오준수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지엔 그룹과 같은 대기업은 오씨 가문과 계약해도 그만, 안 해도 아무 손해가 없었기 때문이
그러자 손연서가 느긋하게 하품하며 답했다.“응, 그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오준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다시 설득했다.“연서야, 만약 네가 박민정 씨한테 우리랑 재계약할 수 있도록 한 마디만 말해주면 내가 당장 너랑 재혼해 줄게.”그 말에 손연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자 오준수가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왜 웃어? 방금 내가 한 말 들었어?”손연서는 한참 웃다가 겨우 멈추고는 다시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저기요, 오준수 씨? 설마 지금 내가 그쪽이랑 재혼하고 싶어서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야? 분명히 말하는데 난 당신을 사랑한 적도 없고 재혼도 하기 싫어. 난 그저 당신이 처참하게 당하는 꼴을 보고 싶을 뿐이라고!”“기대해 봐. 이제부터 시작이니까.”말을 마치자마자 손연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오준수는 또다시 일방적으로 대화가 단절되자 화도 나는 한편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그러면서 예전에 엄마 말을 듣지 않고 기어코 손연서와 이혼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누가 손연서한테 이런 황금 동아줄과 같은 친구가 있을 줄 알았단 말인가.“오 대표님, 사모님께서 뭐라고 하나요?”비서가 조심스레 묻자 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사모님은 무슨, 이혼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사모님이야.”“내가 고작 이런 여자한테 당할 줄 알아? 지금 당장 박민정 씨가 어디 있는지 알아봐. 내가 직접 만나러 가야겠어.”“네.”말을 마치자마자 비서는 사무실을 나갔다.그리고 손쉽게 박민정은 지금 정수미와 같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그렇게 오준수는 여러 가지 고급스러워 보이는 선물을 준비한 뒤 빠르게 병원으로 향했다.병원 안.박민정은 마침 손연서와 통화 중이었다.“민정 씨, 너무 고마워요. 덕분에 오늘 제대로 그 사람 골탕 먹였거든요. 그리고 뻔뻔스럽게 저랑 재혼하자는 거 있죠?”그러자 박민정이 눈살을 찌푸리고 답했다.“그래도 아주 멍청한 사람은 아니
오준수는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지엔 그룹 부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부사장님, 여태껏 저희랑 잘 지내왔으면서 이번 건은 왜 갑자기 취소한다는 걸까요?”이때 수화기 너머에서 한껏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굴 건드렸는지 아직도 몰라요?”오준수는 당연히 몰랐다.“저는 건드린 적이 없는데요?”한껏 주눅이 든 목소리는 전혀 오준수답지 않았다.부사장도 이처럼 멍청한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이제는 측은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지엔 그룹의 새 대표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나요?”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느라 회사 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한때, 그의 아버지 오현웅은 모든 일을 빈틈없이 깔끔하게 처리했던 사람이라 오준수가 이런 자잘한 일까지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작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부담이 오준수 한 사람에게 떠넘겨지게 되었다.오준수가 다급히 비서에게 묻자 비서는 현재 신임 대표는 정수미의 딸인 박민정이라고 알려줬다.“박민정...”오준수는 왠지 귀에 익은 듯한 이름을 계속 곱씹어 봤지만 정확하게 그녀가 누구였던지 기억나지 않았다.이때, 옆에 있던 비서가 다시 그에게 말했다.“손연서 씨 친구입니다.”순간 오준수는 온몸이 굳어졌다.애써 정신을 차리고 수화기에 대고 대답하려고 보니 상대방 쪽에서는 이미 전화를 끊어버린 상태였다.지엔 그룹 부사장은 지금 오준수와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오준수는 끊어진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힘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내가 왜 그걸 잊어버렸지?”그러면서 머리를 몇 번 세게 두드렸다.“연서가 지엔 그룹의 대표랑 친구 사이라고? 어쩐지 우리랑 갑자기 계약을 취소하더니 외부에도 우리랑 계약하지 말라고 했네.”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오 대표님, 사모님한테 빨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아까까지 손연서라고 이름을 부르던 비서도 눈치껏 사모님이라고 불렀다.그 의미를 눈치챈 오준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손연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신호음만 들릴 뿐이었다.“
옆에 있던 애인이 맞장구쳤다.“손연서 같은 여자, 설령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해도 아들을 낳긴 힘들었을걸?”그러곤 능글맞게 웃으며 덧붙였다.“오빠, 역시 나밖에 없지? 내가 오씨 가문의 대를 이었으니까.”그들이 낳은 아들, 성훈이는 이미 포동포동 살이 올라 커다란 덩치가 되어 있었다.손연서가 아이를 돌볼 때는 건강한 식습관을 신경 써서 관리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방치된 상태였다.먹고 싶은 건 다 먹고 공부도 등한시하며 오냐오냐 자랐다. 오성훈은 기름진 음식을 입안 가득 우겨넣으며 거칠게 내뱉었다.“손연서 그 여자, 진짜 재수 없어요. 더러운 년이에요.”이런 말투는 모두 엄마를 따라 배운 것이었다.하지만 오준수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다시 들었다.온 가족이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듯했으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하인이 다가와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오준수는 발신 번호를 확인했는데 비서였다.그는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뭔데?”“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엔 그룹에서 저희 그룹과의 모든 계약을 취소했습니다!”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준수는 순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뭐? 무슨 헛소리야? 지엔 그룹과의 계약은 최소 5~6년은 남았어! 갑자기 취소될 리가 없잖아!”그동안 그가 매일같이 술 마시고 노닥거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지엔 그룹과의 협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만든다고?비서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또...”그러나 남은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오준수는 불길한 예감에 다급하게 다그쳤다.“또 뭐가 있는데?”비서는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지엔 그룹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오씨 가문과 협력하는 기업은 곧 정씨 가문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요.”이 말은 마치 날벼락과도 같았다.오준수의 머릿속
손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민정 씨, 고마워요.”“우리 사이에 뭘요. 예전에 제가 힘들 때 연서 씨도 도와줬잖아요.” 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과거 그녀가 윤소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손연서가 나서서 힘을 써준 적이 있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손연서는 여전히 감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손연서가 떠난 후, 박민정은 정수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정수미는 오씨 가문의 남자들을 가장 혐오했다. 자신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정부를 만들어 원래의 배우자를 해치다니. 이런 남자들과 도덕 없는 애인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민정아, 그 여자의 남편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박민정이 기억을 더듬으며 답했다.“오준수예요.”오준수.정수미가 옆에 있던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떠올렸다.“오현웅 회장의 아들입니다.”“아, 그 사람이구나.”정수미의 눈빛에 냉소가 스쳤다.“그 오준수, 몇 번 본 적 있어. 나한테도 몇 번 찾아온 적 있고. 근데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그냥 허세뿐인 한량이지.”문득 떠오른 듯, 정수미가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그 사람 아버지 체면을 봐서 오씨 가문과 거래를 한 적이 있거든. 네 친구를 돕고 싶다면 계약을 취소하면 돼.”박민정은 정수미가 오준수를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얽혀 있을 줄이야.“그거 참 잘됐네요. 마침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별것도 아닌 일에 머리 쓸 필요 없어.”정수미는 오씨 가문 따위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씨 가문이 정씨 가문과 비교하면 동네 구멍가게와 대형 프랜차이즈 마트 정도의 차이였다.“김 원장이 그러잖아. 너 요즘 며칠 푹 쉬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하게 둬.”정수미가 덧붙였다. 그때 옆에 있던 정윤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언니, 내가 해줄게요.”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먼저 찬
정수미는 자신이 여기 있으면 대화가 불편할 거란 걸 눈치채고 비서에게 밖에 가 햇볕을 쬐겠다고 했다.그녀가 나가자 세 사람은 한결 편해졌다.지원 엄마는 더욱 활기차게 말을 이어갔다.“예찬 엄마, 다음 학기부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잖아요. 예찬이는 어느 학교로 갈 예정이에요?”박예찬의 학교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박민정은 도한 엄마에게도 초청장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에게 아직 한 장 더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다.박민정은 지원 엄마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학교는 이미 정했어요. 혹시 지원이도 같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면 같이 다니게 할까요?”“좋아요!”지원 엄마는 학교가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박민정과 유남준이라면 분명 좋은 학교를 선택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럼 제가 시간 될 때 초청장을 드릴게요.”“고마워요, 예찬 엄마.”지원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한편, 손연서는 아이가 없어서 대화에 쉽게 끼지 못했다.그녀는 엄마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 자신이 왜 남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선택했던지 후회스러웠다. 만약 전 남편의 본모습을 일찍 알았더라면 좋은 남자를 만나 지금쯤 자신도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잠시 후, 지원 엄마와 도한 엄마는 집에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떴다.손연서는 계속 남아 박민정에게 과일을 깎아 주었다.박민정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기억을 잃은 후로 손연서의 소식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손연서는 사과를 깎아 한 조각 건네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주 편해요. 예전보다 훨씬 나아요.”그러다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다만, 이제 와서 좀 후회가 돼요.”“후회요?”“네, 민정 씨가 아이를 키우는 걸 보면 정말 부럽더라고요.”손연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전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왜 그런 말을 해요?”박민정은 손연서가 아직 젊은데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게 이
유남준은 떠나지 않고 혼자서 바깥을 서성이고 있었다.“남준아.”김인우가 먼저 다가왔다.“술 한잔하러 갈까?”유남준은 그를 흘겨보았다.“하랑 씨 임신했다며? 무슨 술이야.”“오늘 밤은 우리 없이도 잘 지낼 테니까, 우리도 재미 좀 찾아야지.”김인우는 그렇게 말하며 서다희, 정민기, 방성원을 바라보았다.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우리 애가 싫어할 거예요.”방성원도 거들었다.“우리 딸이 내 몸에서 술 냄새 나는 걸 싫어하거든.”정민기는 무표정하게 한마디 했다.“전 술 안 마셔요.”김인우는 입을 달싹였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자신만 아직 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좋은 남자친구, 좋은 남편이 되어 있었다.유남준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이제 너도 철들 때가 됐어.”“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지...”서다희가 말했다.“우리 애가 그러더라고요. 심심하면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굳이 술 마실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대표님?”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술은 몸에 안 좋아.”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모두 성인군자가 되어 있었다.“그럼 뭐 할 건데? 밤새 여기서 멀뚱멀뚱 서 있을 수도 없잖아.”“그건 네가 알아서 정해야지. 방이라도 하나 마련해서 쉬는 게 좋겠어. 난 그래도 딸 보러 먼저 가볼 생각이야.”방성원이 말했다.“알겠어.”김인우는 바로 옆방을 준비하도록 했다.딱히 할 일이 없는 남자들은 모여서 카드나 한 판 하며 시간을 보냈다.옆방에서는 김인우의 예상대로 모두가 박민정을 위해 오늘 밤만큼은 함께 있기로 했다.다만, 고영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돌아갔다. 박윤우와 박예찬도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비비며 유남준을 찾아왔다.유남준이 그들에게 말했다.“너희, 이제 세 살짜리 아기 아니잖아. 알아서 잘 곳 찾아가.”결국 두 아이는 방 한쪽에서 나란히 잠들었다.그 모습을 본 김인우가 감탄했다.“남준아, 유전자 진짜 대단하다. 윤우랑 예찬이, 완전 네
“그럼 됐어. 약속했으니까 꼭 지키는 거야.”박민정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연지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연지석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다음에 보자.”“그래, 잘 가.”박민정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연지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연지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남준이 다정하게 박민정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우리도 돌아가야지.”“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인가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고 유남준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차로 향했다.가는 길에 박민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분주한 인파를 둘러보았다.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주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이 참으로 신기했다.“민정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문득,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었다.박민정도 따라서 멈춰 서며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뭔데요?”유남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박민정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참...”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박민정은 조금 쑥스러워졌다.“갑자기 왜 그래요?”유남준이 미소를 지었다.“그냥, 지금 말하고 싶었어.”“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해.”“좋아하는 게 다야?”유남준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박민정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그래, 좋아한다는 것도 괜찮지.”유남준이 흐뭇하게 웃었다.박민정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