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민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보아낼 수 없을 위선이었다.박민정은 예쁜 눈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이번엔 또 어디로 나를 팔려고요? 또 뭐가 필요해서 왔는데요? 왜요, 제가 이용가치라도 생겼나 봐요?"제 위선이 단번에 들키자 한수민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본심을 드러냈다."내가 그런 눈으로 보지 말랬지."저런 박민정의 경멸 어린 눈을 볼 때마다 한수민은 그 눈을 파내 자근자근 밟아주고 싶었다.박민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그냥 돌아가실래요 아니면 제가 갈까요?"박민정이 저를 바라보던 그 눈빛은 아무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가던 한수민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회사를 박민정에게 넘겨준다는 박민호에게서 전해 들은 박형식의 유언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그 무덤을 파버리고 싶었다. 딸이나 그 아비나 어떻게 하나같이 저 모양인지, 한수민은 회사를 하나뿐인 아들이 아니라 딸에게 물려주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죽어서도 짐이야."...누군가에게는 한평생을 들여 치유해야 하는 것이 어린 시절이었다. 박민정이 바로 그러했다.박민정은 한수민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서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그때, 누군가의 코트가 박민정의 어깨 위로 걸쳐졌다.뒤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모를 연지석이 서 있었다."언제 왔어?""유감스럽게도 한수민 가기 전에."박민정은 눈꼬리를 가볍게 내리며 말했다."그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연지석은 손을 들어 박민정 머리 위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였는데 뭘.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걸 신경 써."박민정은 눈물이 맺힌 채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근데 갑자기 왜 온 거야?""정숙 아주머니가 불러서 왔어.박민정은 은정숙이 무슨 얘기를 할지 알아 방으로 들어가기 전 연지석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지석아, 아줌마가 하는 말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아줌마는 그냥 나를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래. 근데 나는 이제 혼자서도
하민재도 당연히 장난이었기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미안해 형. 나 진짜 할 말 있어."연지석은 귀찮지만 하민재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형이 전에 유앤케이 그룹 프로젝트 몇 개 뺏어왔다고 했었잖아? 근데 거기서도 눈치챈 것 같아. 유남준이 우리 사람한테 협박했대."연지석은 유앤케이 대표가 가짜라는 것을 아직은 하민재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다."그럼 일단 프로젝트 중단해."근데 아마 가짜라고 너무 방심한 듯싶다."알겠어."...한편 유남준은 전주 보디가드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는 박예찬이 클럽에 간 사실과 그의 이름이 연윤우가 아니라 박예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왜 그 어린애가 클럽에 가서 카드를 긁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전화를 끊자 들리는 발소리와 다른 남자의 목소리에 눈썹을 치켜세운 유남준이 방을 나갔다.금방 들어온 건지 아직 열린 문으로 느껴지는 한기에 박민정과 연지석을 향해 유남준이 물었다."민정아, 손님 왔어?"박민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연지석이 말했다."접니다 연지석."연지석이라는 이름을 들은 유남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두 남자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박민정은 밥을 하러 가겠다 말했다."난 저녁 준비할게요. 얘기 나눠요.""내가 도울게.""도와줄게."주방 앞에 선 박민정이 거절하려 하는데 연지석이 말해왔다."유남준 씨는 앞이 안 보이니까 내가 도울 게 민정아."그 말을 들은 유남준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구겨졌다.지금 상황을 보아 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유남준도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아 박민정은 연지석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유남준이 앞이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고 또 요리를 배운다 배운다 하면서도 지금까지 밥을 짓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도움이 되지 않을 듯했다."그래."연지석은 자신이 이겼다는 듯한 표정으로 유남준을 한번 보고 나서 박민정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 홀로 남은 유남준은 주방에서 들려오는 둘의 다정한 대화와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점점 심
유남준은 그럴 생각은 없었다.박예찬을 데려온 것도 박민정한테 서프라이즈를 주려고 한 건데 오히려 그녀는 이젠 그와 말도 잘 섞지 않았는다. 예찬이는 유남준이 잠자코 있자 방금 자기가 한 말 때문에 유남준이 좀 수그러든 줄 알고 어젯밤에 내기에 져서 아빠라고 불러야 했던 복수를 하느라 계속해서 비꼬았다.“아저씨 때문만 아니었으면 엄마랑 아빠 결혼한 지 오래예요. 그러니까 어서 둘 사이에서 빠져요. 누가 그러던데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세컨드라고.” 이 말을 하자마자 예찬이는 이마에 꿀밤을 한 대 세게 맞았다.유남준은 엄숙한 얼굴로 그를 봤다.“그런 말 다시 듣고 싶지 않아. 앞으로 인터넷에서 그런 이상한 소리만 배워서 나르기만 해 봐.”예찬이도 나쁜 말이란 걸 알지만 쓰레기 아빠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이 말이 잘못된 건 줄은 아는 걸 보니 유남준이 아주 구제 불능은 아닌 것 같았다.예찬이는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이런 말 누가 했는지 왜 안 물어봐요?”“누가 했는데?”“이지원. 아저씨가 그렇게 아끼던 첫사랑, 마음속 여신님.”유남준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고작 네 살짜리 애가 대체 어디서 이런 세컨드니, 여신님이니, 하는 말들을 배웠는지 모르겠다.예찬이는 전에 이지원의 개인 자료를 찾다가 그녀의 부계정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서 저런 말들을 퍼뜨리고 있었다.그걸 보고 예찬이는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유남준의 아내는 분명 엄마인데 오히려 이지원은 엄마를 세컨드라고 얘기하고 있었다.예찬이는 그 일이 상기되어 분노가 차 넘치는 얼굴이었지만 유남준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그의 기억 속에 이지원이라는 인물은 없었다.하지만 예찬이의 말투로 봐서 지어낸 얘기 같지는 않았다.“네 말은 그 여자가 나랑 민정이 사이에 끼어들었다는 거야?”“혼자 천천히 생각해 봐요. 내가 지금 알려줘도 어차피 기억도 안 날 건데요, 뭘.”예찬이는 가려다 또 뭔가 생각났는지 한마디 보탰다.“나한테서 그 이야기 듣고 싶으면, 날 아빠라고 불러요.”
유남준은 다급히 당근을 밥과 함께 입에 떠넣었다. 옆에 앉은 예찬이는 그 당근이 제 입안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보고는 몸서리를 쳤다. 저렇게 맛없는 당근을 한꺼번에 다 먹어 치우다니. 쓰레기 아빠에 대해 감탄이 절로 나왔다.당근을 깨끗이 비운 유남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와이프가 해주는 밥은 그게 뭐든 다 맛있어요.”박민정은 천천히 시선을 거둬들였다.와이프라는 호칭에 연지석의 기분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젓가락으로 유남준의 밥그릇에 반찬을 또 얹어주며 그가 말했다.“이 당근 볶음은 내가 한 거예요. 그렇지, 민정아?”“아... 응, 그렇지.”박민정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한편 유남준이 골탕먹는 듯한 처지에 놓이자 왠지 우습기도 하고 속이 약간 후련한 것 같기도 했다.아무튼 항상 고고한 부잣집 도련님한테서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당근을 집어 또 한 번 그의 밥그릇에 올려놨다. “맛있으면 많이 먹어요.”유남준의 밥그릇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당근을 보며 예찬이는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갑자기 유남준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아저씨, 당근 좋아하면 제 것도 드릴게요.”천진난만한 얼굴의 예찬이는 마음속에 작은 악마가 살고 있었다. ‘쓰레기 아빠, 날 탓하지 마요. 사나이는 독하고 모진 맛이 있어야 하는 거래요.’자기 밥그릇 안에 있는 당근을 유남준한테 넘겨놓으려 하는 그때, 유남준이 귀신같이 알고 시선을 그아이한테로 돌렸다.“예찬아, 오늘 유치원에서 뭘 배웠어?”예찬이의 손에 쥐고 있는 젓가락이 당근을 잔뜩 집은 채 유남준한테로 향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이때 유남준은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너도 당근 좋아하지? 내 것 다 너 줄까?”예찬이가 즉시 거절 의사를 표하려는데 유남준이 또 입을 열었다.“민정아. 너 모르지, 오늘 예찬이가...”“아, 네! 당근 다 제게 주세요. 저 당근 좋아해요.”예찬이는 유남준의 밥그릇에 담긴 당근을 얼른 다 집어와 자기 밥그릇에 담았다.박민정과 은정숙은 경악한
다음 날 아침, 죽을 끓이려던 박민정은 어제 음식하고 남은 당근 몇 개가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오랫동안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한 그녀는 다른 재료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유남준은 아침 댓바람부터 병원에 간다고 나가고 없었다....어두컴컴한 지하실 내에서, 연지석은 천천히 눈을 떴다.그의 팔다리는 의자에 묶여 있고 이마에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온몸에 나 있는 상처는 소금물에 적셔진 것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팠다.맞은편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저 자식 꽤 솜씨가 있던 데요. 열다섯 명 불렀는데 모두 다쳤어요. 저것도겨우겨우 묶어둔 거예요.”서다희가 유남준한테 말했다.그 소리를 따라 연지석이 고개를 들어보니 유남준이 나른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기척이 들리자 서다희는 바로 유남준한테 알려줬다.“저놈 깼어요.”연지석은 일이 생겼을 때부터 유남준의 소행이겠거니 예상하였다. 그가 박민정을 찾아온 건 그 누구도 알지 못하니 해외에 있는 세력은 용의선상에서 배제할 수 있었다. 다만 국내는 안정된 편이다 보니 그도 조심을 기울이지 않아 보디가드를 대동시키지 않았다.“유남준, 날 여기로 잡아 오면 민정이가 다시 널 받아줄 거 같아?”연지석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싸늘한 미소를 흘렸다.“너랑 다시 같이 잘 해볼 생각이었으면 나와 애를 낳지도 않았어.”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이 삽시에 굳어버렸다.“그래? 그럼 만약 네가 이 세상에 없다면?”“아이가 아빠를 잃게 되면 민정이가 널 더 미워하지 않을까?”연지석은 매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그도 같은 남자로서 또 다른 남자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더 세게 후벼팔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의 말이 유남준의 정곡을 찔렀다. 하나 유남준은 이대로 그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수하들이 연지석을 향해 무참하게 발길질을 했다. 연지석은 입을 꾹 다물고 신음조차도 내지 않았다.서다희는 연지석을 보며 그가 보기와 다르게 깡이 있다는 걸 느꼈다. 남의 와이프를
이웃이 보기에는 유남준이 건넨 것이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해 혹시 미친 건 아닐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박민정이 들어오자 이웃 아주머니는 그녀를 잡아끌고 말했다."새댁 남편이 생긴 건 멀쩡한데 성격이 좀 이상한 것 같아. 아까 야채 가져다줄 때 돈이 아니라 종이 쪼가리를 주면서 우리 보고 알아서 숫자 적으라고 하더라니까."이웃 아주머니는 유남준이 미친놈 같다고는 하지 않고 애써 돌려 말했다. 박민정은 아주머니가 오해했음을 알지만 뭐라고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유남준의 성격이 이상하다는 말에 동조했다."채소 고마워요 아주머니. 다음엔 그 사람 말고 저 기다렸다가 받으세요.""그래."이웃 아주머니는 웃으며 박민정이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자리를 떴다.어쩌다 저런 아가씨가 눈이 멀고 정신까지 이상한 사람한테 시집을 간 걸까, 전에 박민정이 재벌 집 아가씨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상대도 재벌이라 뭐 정략결혼 그런 건가 하는 생각들을 하며 아주머니도 집으로 향했다.박민정은 윤우를 보러 병원에 갔다가 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산부인과에 들러 검사도 하고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말을 듣고 집에 들어오는데 마침 유남준이 주방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보이지도 않으면서 뭘 하겠다고 그러는지 손은 몇 번이나 데일 뻔해 보는 사람이 더 아슬아슬했다."뭐해요 지금?""밥하잖아."유남준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을 하며 설탕을 소금으로 착각한 채 쏟아 넣고 있었다."그거 설탕이에요. 소금이 아니라..."그 말에 유남준은 잠시 멈칫하고는 말했다."여기 전에는 소금이었잖아.""어제저녁 하다가 위치를 옮겼어요. 이리 줘요. 내가 할게요."눈도 보이지 않는 사람을 힘들게 하기 싫었던 박민정이 제가 하겠다고 나섰지만 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계속 요리를 하고 있었다."앞으로 밥은 내가 다해."어젯밤 연지석과 박민정이 주방에서 다정하게 요리하는 모습만 생각하면 치가 떨려 당장이라고 전용 요리사를 불러오고 싶었
박민정이 이번에 신림현으로 돌아온 건 은정숙의 마지막을 고향에서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감을 남기고 싶지 않아 왔던 곳에서 유남준과 유앤케이에 이렇게 발목이 잡혀버릴 줄은 미처 몰랐었다.박민정은 생각하길 그만두고 진서연에게 말했다."다음 곡은 크리스마스에 낼 거야."사실 곡은 진작에 써둔 상태였지만 아직 몇몇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 좀 더 수정단계를 거쳐야 했다."알겠습니다."진서연을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럼 지금 바로 인터넷에 카운트 다운 올릴게요.""그래."박민정이 유명해진 뒤로 그녀가 쓰는 곡들은 친한 친구에게 선물하는 게 아니면 항상 먼저 SNS에 카운트 다운을 올려뒀었다. 그리고 그걸 본 다른 소속사 아티스트들이 러브콜을 보내고 진서연은 그 사이에서 협상을 진행해 곡을 발표하는 과정을 거쳤다.저번에는 회사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 박민정이 직접 용 사장을 찾아 곡을 주었었지만 지금은 또 재정이 다시 좋아졌으니 박민정은 회사의 원래 지침대로 하기로 했다.박민정은 제시한 액수에 따라 곡을 주는 게 아니라 이 노래를 부를 사람과 자신이 쓴 곡의 케미를 제일 중시했기에 돈이 많다고 무조건 박민정의 곡을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박민정의 신곡이 크리스마스에 나온다는 소식은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시간 검색에 10위에 올랐다.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는 이슈였다.이지원도 이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매니저에게 연락해 곡을 받아내라고 했지만 사실 이지원 말고도 곡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고 또 그들은 돈도 권력도 더 막강한 사람이기에 곡을 받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그때 모스크바에서 발레공연을 마친 한 여자가 백조마냥 사뿐히 계단을 내려와 딱 봐도 부자처럼 보이는 한 남자 앞에 섰다."아빠, 뉴스 봤어요? 나 그분 노래 갖고 싶어요."여자의 얼굴은 박민정과 많이 닮아 보였다.기업가처럼 보이는 남자는 제일 사랑하는 딸의 부탁에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우리 소현이가 갖고 싶은 건 아빠가
영상을 처음 본 순간부터 박민정은 무대 위에 여자가 꼭 제 어머니 한수민 같다고 여겼다. 어릴 때 한수민을 무척이나 따르던 박민정이 그 무대 영상을 몰래 몇 번이나 돌려봤었다. 한수민도 윤소현이라는 여자처럼 발레리나 출신이었다. "보스님, 보셨어요? 어때요?"박민정은 진서연의 목소리에 그저 닮은 사람이겠지 하며 대답을 했다."무대는 좋네. 근데 난 좀 더 기다려보고 싶어.""알겠어요, 그럼 일단 연락처만 남겨둘게요.""응."전화를 끊은 박민정은 다시 그 영상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영상만 보면 어릴 때 한수민을 따라 춤을 배우고 싶다 했을 때 한수민의 조롱 섞인 표정이 떠올랐다."너 같은 귀머거리가 무슨 춤을 배워? 박자는 들을 수 있어? 맞출 수나 있겠니? 나 쪽팔리게 하지 말고 저리 가."박민정에 그에 굴하지 않고 무대에 몇 번이나 올랐고 상도 많이 받았었지만 한수민은 한 번도 칭찬이란 걸 해주지 않았었다."그렇게 열심히 하면 뭐해? 세상일이 노력한다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니야. 알긴 하니?"한수민은 경멸 어린 눈길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같은 장애인은 장애인 다운 일을 하란 말이야. 헛된 꿈 꾸지 말고. 너는 춤을 출 자격이 없어."한수민의 반복된 조롱에도 박민정은 춤을 포기하지 않았었는데 어느 한번 국제 콩쿠르에서 누가 박민정의 보청기를 가져가 버리는 탓에 무대에 오른 박민정의 귀에는 소음밖에 들리지 않았고 박자를 하나도 맞추지 못해 결국 예선 탈락으로 떨어졌다.그날 집으로 돌아간 한수민은 박민정이 보는 앞에서 발레복이며 신발이며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지며 말했다."다시는 춤 같은 거 추지 마. 네가 또 춤을 추는 게 내 눈에 보이면 다리를 분질러 버릴 거야."옛날 일들이 떠오른 박민정은 몸을 웅크리고 눈물을 흘렸다.어린 나이에 받았던 수많은 상처들은 아마 평생동안 치유받지 못할 것 같았다.작업실에서 한수민의 한번 또 한 번의 조롱을 견뎌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치던 박민정은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