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뜻인지 알겠어. 이번 일은 나한테 맡기고 너는 푹 쉬기나 해.”그는 곧바로 의사를 불러 박민정의 상태에 대해 보고를 들은 후 아무 문제가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유남준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연지석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김인우도 유남준을 따라 함께 병원으로 왔다.병실에 가보니 마침 간호사가 약을 갈아주고 있어 두 남자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병원 산책로에 도착했다.“갑자기 교통사고는 왜 난 거야? 뺑소니범은 잡았어?”김인우의 질문에 유남준은 사고가 있고 난 뒤 자신이 박민정을 병원에 데려온 사실부터 연지석이 뺑소니범을 잡은 사실까지 전부 다 얘기해주었다.그러자 김인우의 표정이 조금 달라지더니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했다.“너보다 먼저 뺑소니범을 잡은 걸 보면 보통 놈은 아닌데?”유남준은 그의 말에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했다.“나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아?”박민정이 사고 난 후 가장 먼저 연락했던 사람이 연지석이라는 걸 떠올린 듯싶다.그에 김인우가 몇 초간 반응이 없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남준아, 비교할 걸 해야지. 국내에서 네 힘이 어디까지 닿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걸 말이라고.”유남준은 그저 묵묵히 들을 뿐 기뻐하거나 만족스러워하지는 않았다.“박민정이 사고를 당하고 가장 먼저 연락한 사람이 바로 연지석이야.”김인우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곧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여자 다루는 데 도가 텄나 보지. 여자들은 조금만 공감해주고 달콤한 말로 속삭이면 금세 넘어오잖아. 지금 보니 얼굴도 약간 여자들 잘 홀릴 것처럼 생기긴 했어.”유남준이 쉽게 다가가지 못할 것 같은 냉 미남 얼굴이라면 연지석은 잘생긴 얼굴에 매혹적인 느낌이 더해져 비유하자면 꼭 여우 같은 느낌이었다.그리고 여자들은 높은 확률로 이러한 여우과 남자들의 사탕발림에 쉽게 넘어간다.물론 김인우는 이런 부류의 남자는 겉만 번지르르한 알맹이 없는 인간이라며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늦었는데 이만 가봐.”유남준
잠에서 깨어보니 이마는 땀으로 가득했고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그녀의 외침에 옆에 있는 보호자 방에서 유남준이 뛰쳐나왔다. 그러다 별다른 일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그녀에게 물었다.“왜 그래?”박민정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방금 죽는 꿈을 꿨어요.”비록 꿈이었지만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한편 죽음이라는 단어에 유남준은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고는 천천히 등을 토닥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꿈이야. 현실 아니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박민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이성을 되찾았고 고개를 들어 그에게 말했다.“고마워요.”그러고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마치 선을 그으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유남준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는 보호자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불을 걷더니 박민정의 곁에 누워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그의 행동에 박민정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내가 필요한 일이면 언제든지 얘기해도 돼.”그녀는 갑자기 목이 막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밖에는 거센 바람과 함께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무더웠던 날이 갑작스럽게 내린 비로 인해 조금은 시원해졌다.아까의 악몽으로 아직 불안함이 가시지 않던 그녀의 마음은 유남준이 곁에 있어 줌으로써 많이 괜찮아진 듯했다.3년이라는 결혼생활 동안 결벽증 탓에 실수로라도 안으려 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당신은 내가 아직도 싫어요?”그녀를 안고 있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박민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난 정말 당신을 모르겠어요...”유남준은 누군가가 목구멍을 막아놓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답답하고 복잡한 지금 이 마음을 그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웠다.박민정에게 특별한 감정이 생긴 건 아닐 것이다. 단지 누군가를 새롭게 알아가야 하는 일이 귀찮을 뿐이고 지금은 그저 그녀가 죽는 게 두려운 것뿐이다.한참을 그렇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유남준이
임수호는 아직 이지원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도 얼마 가지 않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임수호는 검은색 승용차 안에 앉아 풀숲에 잠복해 있는 경찰들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봤어? 그 여자는 애초에 당신을 구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 이제까지 당신을 이용하기만 했지.”임수호를 감시하던 경호원이 말했다. 그러자 임수호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그럴 리가 없어. 경찰들이 지원이 휴대폰을 도청한 게 분명해!”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를 보며 경호원은 혀를 끌끌 찼다. 그가 받은 임무는 임수호가 이지원의 실체를 확실히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꽤 시간이 걸릴 듯하다.임수호를 체포하러 왔던 경찰들은 당연하게도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리고 임수호가 금방 잡힐 줄 알았던 이지원은 상황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게 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두원 별장.퇴원 후 집에 도착한 박민정은 바로 조하랑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통화버튼을 누르니 박예찬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잘 지내고 있어?”박민정의 부탁으로 연지석은 조하랑과 아이들에게 교통사고에 관해서는 전하지 않았다. 하여 박예찬은 그녀의 사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엄마는 잘 지내고 있지.”박민정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예찬이는 유치원 잘 다니고 있었어? 하랑이 이모 힘들게 하지는 않았고?”“엄마, 나 이제 어린애 아니야.”박예찬은 고개를 돌려 잔뜩 어질러진 방 한가운데서 법률 서적을 외우고 있는 조하랑을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엄마는 아마 모를 것이다. 조하랑이 자신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조하랑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심지어 박예찬은 조하랑이 조금 바보 같다는 생각까지도 했다.그때 그 시선을 느꼈던 건지 조하랑이 법률 서적을 끌어안고 아이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역시...”바보 같다.박민정은 박예찬과 조금 더 대화한 다음 조하랑을 바꿔 달라고 했다.박예찬은 조하랑 앞으로
왜 이런 지시를 내렸는지 유남준조차도 그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교통사고를 당한 박민정이 기분 좋게 몸을 회복했으면 해서일까? 어쩌면 과거의 죄책감과 며칠 전 고소를 취하하라고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이런 식으로 달래려는 것일 수도 있다.이한석은 갑작스러운 지시에 의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오늘 당장 말씀이십니까? 어떤 꽃으로 하면 될까요? 손님맞이용이신가요?”유남준은 창문 가까이에 다가가 밖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알아서 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네, 알겠습니다.”두원 별장의 정원 설계를 알고 있는 이한석은 곧장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꽃을 구하기 시작했다.늦은 저녁, 여러 대의 트럭이 두원 별장 안으로 줄지어 들어왔고 작업복을 입은 정원사들은 차에서 내려 꽃을 심기 시작했다. 유남준이 어떤 꽃인지를 얘기해주지 않은 바람에 현재 진주시에 있는 꽃들은 전부 다 공수해왔다.늦은 시각이었던지라 박민정은 그들이 작업하고 있을 때 꿈나라에 있었다.다음 날 아침.잠에서 깬 박민정은 베란다로 향했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하룻밤 사이에 정원에 꽃밭이 펼쳐져 있었으니까.볼을 꼬집지 않았더라면 아직 꿈속인 줄 착각했을 것이다.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보니 유남준은 벌써 출근하고 없었다.거실을 지나쳐 정원으로 가보자 거기에는 어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 펼쳐졌고 그녀는 놀라움에 더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한편, 유남준은 회사로 가는 차 안에서 끊임없이 재채기했다.꽃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다.오늘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부터 그는 줄곧 이 상태였다. 가벼운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그에게 정원을 가득 채운 꽃들은 그야말로 고역이나 다름없었다.“대표님, 괜찮으세요? 병원으로 모실까요?”운전기사가 룸 미러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오늘 아침 유남준을 데리러 갔을 때 운전기사조차 별장의 풍경에 깜짝 놀랐다. 이건 단순히 정원을 꾸민 것이 아
박민정은 조하랑과 얘기를 조금 더 나눈 후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더는 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작업실로 가 연주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쉬이 진정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다시 작업실을 나와 밖으로 향했다.정원 쪽으로 가보니 거기에는 백발에 턱시도를 입은 이한석이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이한석은 정원사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다 어느샌가 정원으로 다가온 박민정을 보고는 꽤 놀란 얼굴을 했다.하지만 곧바로 다시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와 정원사들에게 일을 마저 분부한 다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저희가 혹시 방해된 건가요?”어쩌다 예의 있게 얘기하나 싶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박민정 씨는 청력이 좋지 않아 이 정도 공사로 시끄러워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헌데 박민정 씨는 이 시간에 대체 왜 아직도 집에 계신지요? 상류층 가문 아가씨들과 사모님들은 오전 10시가 다 되어가는 이 시간에 태평하게 집에서 늘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혹시 할 일이 없으셔서 이러시는 거라면 저희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근처 산책이라도 하는 게 어떠신지요?”이한석은 예전에 항상 그녀에게 유씨 가문 안주인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 엄격하게 교육해 왔다. 그리고 박민정은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위한다고 생각해 순순히 그의 말을 듣곤 했었다.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그가 그의 딸 이혜림과 나눴던 대화를 들어버리고는 그를 향한 호감도 싹 사라져버렸다.“촌구석에서 자란 계집이라 그런지 내가 뭐라고 하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더라고.”박민정은 그제야 이한석은 그저 자신을 교육하고 가르치는 데 우월감을 느꼈던 것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유남준의 법적 부인이자 유씨 가문의 명실상부 며느리를 일개 하인이 교육한다는 게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이 집사님이 하시는 말에 동의할 수 없네요. 저는 집사님이 방금 얘기한 상류층 가문 아가씨도 아니고 사모님도 아니에요. 그러니 이 집사님이 정해놓은 수준에 달할 필요도 없겠죠.”오
지금은 한창 아이들이 하원 할 시간이라 김인우는 유치원 앞에서 대기하기로 했다.유치원 앞에 도착한 후 그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입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 헤맨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유치원 앞에는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들도 많았다. 하여 그는 험악하게 생긴 경호원보다는 자신이 직접 아이를 잡으러 가기로 했다.“너희들은 혹시라도 애가 도망가지 않게 주변을 막고 있어.”아이가 똑똑하다는 걸 알고 있는 그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호원들까지 주위에 배치했다.그 시각 박예찬은 자신을 데리러 올 차량을 기다리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김인우의 무서운 얼굴을 발견해버렸다.“...”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온 거지?박예찬은 황급히 아이들 틈에 숨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너 뭐해?”박예찬은 김인우를 향해 손짓하며 유지훈에게 얘기했다.“너 데리러 오는 사람 바뀐 것 같은데 빨리 가봐.”유지훈은 박예찬의 손짓을 따라 김인우를 발견하고는 조금 놀란 듯 말했다.“어, 삼촌 친구네? 나 데리러 왔나 보다. 그럼 난 가볼게, 안녕.”김인우는 박예찬이 아이들 틈에 섞여 숨으려는 것을 보고 얼른 달려가려고 했는데 그때 누군가에 의해 다리가 묶여버렸다.“인우 삼촌.”김인우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유지훈은 유씨 가문의 장손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는 아이이다.“지훈이네. 그래, 무슨 일이야?”유지훈이 애써 다정한 얼굴로 물었다.“어? 삼촌 나 데리러 온 거 아니에요?”그러자 김인우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유씨 집안의 장손이라고는 하지만 김씨 가문까지 받들어 모셔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게다가 김인우는 아이를 싫어했다.“지훈이가 오해했네. 삼촌은 누구 찾으러 온 거야.”김인우가 자신을 밀어내며 오해라고 하자 유지훈은 조금 실망한 얼굴을 했다.아까 분명 자신을 데리러 온 거라고 박예찬이 말했으니까.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하기도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몰려들기 시작하자 김인우는 황급히 자리를 피해 다시 차에 다시 올라탔다.한편 박예찬은 유치원 안쪽 구석에 숨어 김인우의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그가 차에 올라탄 것까지는 좋았지만 여전히 자리를 떠나려는 생각은 없어 보이자 박예찬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유치원까지 찾으러 오다니 참으로 유치한 어른이 아닐 수 없다. 박예찬은 아직 김인우가 자신을 아들로 착각해서 찾아온 것은 모르고 있다.그렇게 한참을 구석에 숨어 어떻게 이 상황을 타파해야 할지 생각을 하던 차에 마침 워치폰이 울렸다. 조하랑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이모!”“너 이 녀석 지금 어디야? 어디 있길래 코빼기도 안 보여?”조하랑은 유치원 입구 앞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박예찬은 아까까지 주변을 서성이던 경호원들이 전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잽싸게 달려갔다.“이모, 나 여기 있어.”조하랑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왜 거기 있었어? 이모가 한참 찾았잖아.”“그게 실은... 저번에 봤던 아저씨가 찾아왔어...”박예찬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차량을 가리켰다.차 안에 있던 김인우는 미간을 치켜세우더니 곧바로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해.”하지만 이곳은 아직 하원하는 아이들로 북적였기에 함부로 시동을 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체되자 청순한 얼굴의 여자가 하이힐을 신은 채 씩씩거리며 다가왔다.그녀는 손을 창문에 갖다 대고는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김인우 씨 이게 지금 뭐 하시는 거죠?”김인우는 화부터 내는 그녀를 향해 순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렸다.“다 큰 어른이 꼭 어린애를 이겨 먹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경고하는데 다음번에 또다시 이런 식으로 찾아오면 그때는 제 아들을 괴롭히고 스토킹한 죄로 경찰에 신고해 버릴 줄 아세요!”조하랑은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김인우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다시 박예찬에게로 걸어갔다.박예찬은 조하랑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차로 향하다가 김인우 쪽을
고영란은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그때 옆에 있던 비서에게 얼마 전 조사를 의뢰했던 유남준의 최근 행동에 관한 보고 문자가 왔다.“유남준 대표님께서 현재 진주시에서 아이 한 명을 키우고 계신답니다. 키운 지는 벌써 보름 정도 됐다고 하고요.”...박예찬은 집으로 돌아간 후 요즘은 특별히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윤우가 들켜버린 마당에 자신마저 들켜버리면 안 되니까.아이는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이리저리 두드렸다. 그러다 얼마 안 가 곧바로 박윤우와 연결이 됐다.어젯밤 정림원의 시스템을 몰래 뚫어놓아 박윤우와 연락할 수 있게 된 것이다.유남준은 그때 박윤우의 워치폰만 뺏어갔을 뿐 아이가 가지고 있던 다른 미니 통신 기기는 눈치채지 못했다.박윤우는 병상에 누워있다가 작은 기기에 불이 들어오는 걸 보고 다급하게 귀 쪽으로 가져다 댔다.“형.”“윤우야, 괜찮아?”박예찬이 물었다.“응, 괜찮아. 나 돌봐주는 사람도 많고 내가 원하는 건 다 해줘.”박윤우는 검은 하늘을 쳐다봤다.만약 자신이 아프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전처럼 가족끼리 평온하게 살았을 것이다.“그럼 됐어.”박예찬은 혹시라도 박윤우가 슬퍼하거나 울고 있었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에 그칠 수밖에 없다. 아이는 아직 어리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으니까.“형,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뭔데?”“우리 아빠 정말 나쁜 사람이야?”박윤우에게 이런 생각이 든 건 유남준을 골탕 먹이러 한 게 발각됐을 때 그가 손찌검을 안 하고 심지어는 진심으로 화를 내는 걸 본 이후부터였다.“그런 건 왜 물어? 아내를 버린 사람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사람이지.”박예찬은 동생이 정이 많아 그저 금세 다른 사람에게 정이 들어버린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박윤우는 그게 아니었다.“형, 나는 아빠가 우리 엄마를 좋아하는 것 같아.”그 말에 박예찬이 멈칫했다.“엄마 생일날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