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몰려들기 시작하자 김인우는 황급히 자리를 피해 다시 차에 다시 올라탔다.한편 박예찬은 유치원 안쪽 구석에 숨어 김인우의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그가 차에 올라탄 것까지는 좋았지만 여전히 자리를 떠나려는 생각은 없어 보이자 박예찬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유치원까지 찾으러 오다니 참으로 유치한 어른이 아닐 수 없다. 박예찬은 아직 김인우가 자신을 아들로 착각해서 찾아온 것은 모르고 있다.그렇게 한참을 구석에 숨어 어떻게 이 상황을 타파해야 할지 생각을 하던 차에 마침 워치폰이 울렸다. 조하랑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이모!”“너 이 녀석 지금 어디야? 어디 있길래 코빼기도 안 보여?”조하랑은 유치원 입구 앞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박예찬은 아까까지 주변을 서성이던 경호원들이 전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잽싸게 달려갔다.“이모, 나 여기 있어.”조하랑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왜 거기 있었어? 이모가 한참 찾았잖아.”“그게 실은... 저번에 봤던 아저씨가 찾아왔어...”박예찬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차량을 가리켰다.차 안에 있던 김인우는 미간을 치켜세우더니 곧바로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해.”하지만 이곳은 아직 하원하는 아이들로 북적였기에 함부로 시동을 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체되자 청순한 얼굴의 여자가 하이힐을 신은 채 씩씩거리며 다가왔다.그녀는 손을 창문에 갖다 대고는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김인우 씨 이게 지금 뭐 하시는 거죠?”김인우는 화부터 내는 그녀를 향해 순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렸다.“다 큰 어른이 꼭 어린애를 이겨 먹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경고하는데 다음번에 또다시 이런 식으로 찾아오면 그때는 제 아들을 괴롭히고 스토킹한 죄로 경찰에 신고해 버릴 줄 아세요!”조하랑은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김인우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다시 박예찬에게로 걸어갔다.박예찬은 조하랑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차로 향하다가 김인우 쪽을
고영란은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그때 옆에 있던 비서에게 얼마 전 조사를 의뢰했던 유남준의 최근 행동에 관한 보고 문자가 왔다.“유남준 대표님께서 현재 진주시에서 아이 한 명을 키우고 계신답니다. 키운 지는 벌써 보름 정도 됐다고 하고요.”...박예찬은 집으로 돌아간 후 요즘은 특별히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윤우가 들켜버린 마당에 자신마저 들켜버리면 안 되니까.아이는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이리저리 두드렸다. 그러다 얼마 안 가 곧바로 박윤우와 연결이 됐다.어젯밤 정림원의 시스템을 몰래 뚫어놓아 박윤우와 연락할 수 있게 된 것이다.유남준은 그때 박윤우의 워치폰만 뺏어갔을 뿐 아이가 가지고 있던 다른 미니 통신 기기는 눈치채지 못했다.박윤우는 병상에 누워있다가 작은 기기에 불이 들어오는 걸 보고 다급하게 귀 쪽으로 가져다 댔다.“형.”“윤우야, 괜찮아?”박예찬이 물었다.“응, 괜찮아. 나 돌봐주는 사람도 많고 내가 원하는 건 다 해줘.”박윤우는 검은 하늘을 쳐다봤다.만약 자신이 아프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전처럼 가족끼리 평온하게 살았을 것이다.“그럼 됐어.”박예찬은 혹시라도 박윤우가 슬퍼하거나 울고 있었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에 그칠 수밖에 없다. 아이는 아직 어리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으니까.“형,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뭔데?”“우리 아빠 정말 나쁜 사람이야?”박윤우에게 이런 생각이 든 건 유남준을 골탕 먹이러 한 게 발각됐을 때 그가 손찌검을 안 하고 심지어는 진심으로 화를 내는 걸 본 이후부터였다.“그런 건 왜 물어? 아내를 버린 사람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사람이지.”박예찬은 동생이 정이 많아 그저 금세 다른 사람에게 정이 들어버린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박윤우는 그게 아니었다.“형, 나는 아빠가 우리 엄마를 좋아하는 것 같아.”그 말에 박예찬이 멈칫했다.“엄마 생일날 나
두원 별장.집으로 돌아온 유남준은 정원이 예쁘게 꾸며진 걸 볼 수 있었다. 재채기도 적게 나는 것이 이한석이 일을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박민정은 오늘 유남준이 이지원을 데려와 정원을 구경시켜줄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그는 혼자였다.“밥은 먹었어?”유남준은 홀로 거실 소파에 앉아 뭔가 끄적거리는 박민정을 보며 물었다.“네, 먹었어요.”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유남준이 고개를 돌려 보니 주방 쪽은 요리한 흔적 하나 없이 매우 깔끔했다.“오늘 안 들어오실 줄 알고 남준 씨 밥은 주문 안 했어요.”전에는 유남준이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항상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렸다. 하지만 유남준은 거의 젓가락조차 들지 않았다.박민정은 해외에서 박예찬과 박윤우를 임신한 후 일에 매진해야 했기에 식사는 전부 은정숙에게 맡겼었다.그리고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지고지순한 아내 노릇을 할 생각이 없었다.유남준은 그녀의 표정에 스친 감정을 읽어내지 못했다.“나도 먹고 왔어.”거짓말이었다.그는 오늘 박민정이 준비해 둔 저녁밥을 먹으려고 이제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빨리 들어온 것이었다.“다행이네요. 참, 하랑이가 감기에 걸려서 이따 병원에 같이 가주기로 했어요.”물론 이건 거짓말이고 병원은 조하랑의 신분으로 지금 임신할 수 있는 몸인지를 체크하기 위해 가는 것이었다.유남준은 이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박민정이 차를 타고 병원에 도착해 보니 조하랑은 진작에 도착해있었다.“접수는 내가 했으니까 바로 들어가면 돼.”“응, 알겠어.”박민정은 조하랑과 함께 병원으로 들어가 검사를 받았다.한 시간 후 결과를 받아보니 요 며칠은 임신 최적기라고 한다.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 조하랑은 가방에서 약 같은 것을 그녀에게 건넸다.“자, 이거 받아.”박민정이 궁금해서 보니 그건 남자들의 정력에 좋은 약품이었다.“필요 없어.”박민정이 기겁하며 거절했다.“뭐가 필요 없어. 술에 취하면 제대로 못 하는 남자들도 많아. 혹시 모를
고영란은 아이의 엄마가 변변치 않은 여자라 자기 아들이 여태껏 숨기고 있는 줄 알았다.유남준은 그 말에 머리가 지끈해졌다.만약 그게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해도 핏줄로 인정할 수 있을까?“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머니는 신경 쓰지 마세요.”그 말을 끝으로 유남준은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러고는 괜히 마음이 심란해져 휴대폰 앨범 폴더에 숨겨뒀던 사진 석 장을 꺼내 봤다.첫 번째 사진은 박민정이 임신했을 당시의 신체검사 보고서 사진이었고 두 번째 사진은 박윤우의 사진,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청순가련한 한 여성의 뒷모습이었다.이리저리 번갈아 보다 그의 시선은 결국 박윤우의 사진에 머물렀다.이 아이가 정말 연지석의 아들인 걸까?의심은 되지만 유전자 검사까지 할 용기는 없었다.만약 검사 결과 아이가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보고가 나오면 모든 희망이 다 무너져내릴 테니까.그럴 바에는 차라리 유전자 검사는 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한편 고영란은 갑자기 끊긴 전화에도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아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야겠어.”그녀는 비서에게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아 올 것을 명령했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꼭 찾아내야 했다.그녀가 손주에 집착하는 건 유남준에게 드디어 후계자가 생겨서일 뿐만이 아니라 유씨 가문 어르신들에게 그녀의 유전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몇십 년 전, 고영란은 쌍둥이를 임신했지만 낳고 보니 둘 중 작은 아이는 유전적 결함이 있었고 그 일 때문에 당시 시어머니에게 오랫동안 시달렸었다.그러다 유남준이 유씨 가문을 이어받으면서 드디어 당당하게 설 자리가 생긴 것이다.하지만 유남준과 박민정에게서는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이에 유씨 가문 사람들은 유남준에게 문제가 있을 것이라며 쉬쉬했다...유남준에게 문제가 있으면 결국 돌고 돌아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게 될 텐데 어떻게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볼 수 있을까.유남준은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박민정은 그에게 안긴 채로 가만히 굳어버렸다가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이건 진심이다.유남준은 박민정의 대답에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그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박민정이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느껴졌다.박민정은 지금이 바로 분위기를 끌어올릴 타이밍이라고 생각해 고개를 들어 유남준을 바라봤다. 그리고 발끝을 들어 그의 목에 입을 맞춘 다음 서서히 그의 입술을 포갰다.유남준이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 유혹은 거부하기 힘들었다. 그는 박민정의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 쥐더니 서서히 키스 주도권을 빼앗아갔다.지금 박민정이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건지는 몰라도 오늘 밤 유남준은 그녀를 갖기로 했다.박민정은 세차게 몰아치는 키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떼고 말했다.“나 조금 무서워서 그러는데 우리 술 좀 마실래요?”“그래.”촉촉하게 변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유남준은 자신의 욕망을 꾹 눌러 담았다.박민정은 가장 독한 술을 가져왔고 유남준의 술잔에 조하랑이 줬던 약을 풀었다. 그러고는 미리 술을 컵에 따라 그에게 건넸고 의심을 피하고자 자신도 술을 한잔 마셨다.“건배.”유남준은 그녀가 건넨 술을 남김없이 전부 마셔버렸다.박민정은 한 모금 하더니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에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앞으로 술은 와인으로 가져와. 이건 네가 마시기 힘들 테니까.”유남준은 아까 술 병을 힐끔 본 것만으로 그녀가 가지고 온 게 알코올 도수가 제일 센 술이라는 것을 알았다.와인은 상대적으로 알코올 도수가 세지 않아 여성들이 마시기에도 부담이 없다.“그럴게요.”박민정은 그 뒤로 그에게 술을 건네지 않았다. 괜히 더 권했다가 그의 의심이라도 사면 안 되니까. 게다가 방금 탄 약을 보면 아마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예상대로 유남준은 그 뒤로 혼자 두어 번 자작하더니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는 잠옷 단추를 거칠게 풀며 심호흡을 내쉬더니 눈 깜짝할 새
격렬한 밤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유남준은 박민정을 뒤에서 꼭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박민정은 머리맡에 둔 작은 유리병을 보고는 드디어 떠날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그 유리병 안에는 드디어 그녀가 얻고 싶었던 것이 들어있다.박민정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하자 유남준이 더욱 세게 안아왔다.어쩔 수 없이 그녀는 일단 그 물건을 침대 아래 숨겨두고 내일 유남준이 출근하면 다시 꺼내기로 했다.그러고는 몸을 돌려 깊은 잠에 빠져있는 유남준을 바라봤다. 괜히 죄책감이 밀려왔던 그녀는 속으로 그에게 말했다.‘아까 미안하다고 했던 건 진심이었어요. 그 이유가 죽은 척하고 당신을 떠난 것에 대한 건 아니었지만...’지금 그녀의 행동은 유남준을 속이는 것이 된다.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만 아이를 곁에 둘 수 있으니까.다음날, 날이 밝아오고 유남준은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품에는 아직 박민정이 있었고 이에 안도감이 들어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그러다 문득 그녀의 매끄러운 등에 오래된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형태로 봐서는 자상인 듯했다.그때 박민정도 잠에서 깼고 유남준은 그녀에게 물었다.“등에 이 상처는 뭐야?”박민정이 몸을 흠칫 떨더니 이내 원망과 슬픔이 가득 들어있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기억 안 나요?”이 상처는 그때 칼을 맞을 뻔한 그를 구해주려다가 생긴 것이었다.그런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유남준과 김인우는 정말 친구가 맞나 보다. 두 사람 다 똑같이 은혜도 모르는 인간들이었다.유남준은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 듯 다시 물었다.“언제 생긴 건데?”박민정은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열일곱 살 때요.”즉 유남준이 유씨 가문에서의 입지를 굳히기 시작할 때였다.당시 그 범인이 유씨 가문에서 보낸 것인지 아니면 라이벌 회사에서 보낸 것인지는 몰랐지만 유남준은 하마터면 칼에 맞을 뻔했고 그런 그를 구해준 것이 바로 그녀였다.유씨 가문 사람들조차 알고 있는 일을 당사자인 그는 까맣게 잊어버렸
박민정은 나쁜 짓을 하고 들킨 아이 얼굴을 한 채 그와 눈이 마주쳤다.하지만 유남준은 화를 내지 않았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이제 알려 줘. 네가 원하는 게 뭔지.”박민정은 그와 금방이라도 코가 닿을 거리에서 유남준의 시선을 마주하며 거짓말했다.“그냥 단순히 당신과 하룻밤 보내고 싶었을 뿐이에요.”그녀는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유남준은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언뜻 슬퍼 보이기도 했다.“그럼 그 다음은? 이제 날 떠나려고?”박민정은 그에게 꽉 잡힌 어깨가 부서질 듯 아파 났다.“나는...”하지만 그녀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너는 내 허락 없이 진주시에서 절대로 못 나가. 벌써 잊었어?”박민정의 몸이 살짝 떨렸다.“잊은 적 없어요. 당신 돈 다 갚고 떠나겠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윤우가 여기 있는데 내가 몰래 떠날 리가 없잖아요.”“그 많은 돈은 어떻게 마련하게?”유남준이 물었다.박민정이 해외에서 꽤 유명세를 떨치는 작곡가인 건 맞지만 그가 준 돈을 다 갚으려면 아직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돈은 내가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어요.”박민정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어 말했다.“당신 돈 갚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하지만 유남준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힘을 더 꽉 주었다.“아파요.”박민정이 미간을 찌푸리고 나서야 그는 손에 힘을 풀었다.박민정은 이불로 몸을 가리며 천천히 뒤로 갔다.“그럼 난 먼저 씻을게요.”원래 그녀는 옷을 입으려고 했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그녀의 옷을 보니 전부 찢어져 있고 유남준의 옷과 함께 뒤엉켜 있는 바람에 이불이라도 쓸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이불을 돌돌 말은 채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유남준이 다시 한번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뭐가 그렇게 급해?”그의 목소리는 살짝 젖어있었다.“네가 전에 그랬지? 나와 부부처럼 지내고 싶다고. 손도 잡고 포옹도 하고 키스도 하고...”
이혼을 결심한 이후로 박민정은 유남준과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유남준은 그녀의 잔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내 이름 불러줘.”박민정의 빨간 입술이 서서히 움직였다.“남준 씨.”유남준은 다시 한번 그녀에게 입 맞출 생각이었지만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 때문에 아쉽게도 분위기가 깨져버렸다.도우미가 두 사람의 식사를 올려왔다.그리고 한 시간 뒤, 식사를 마친 후 박민정이 물었다.“오늘 정말 출근 안 해도 되겠어요?”유남준은 그녀가 자신을 회사로 보내려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응, 직원들이 알아서 해 줄 거야.”사실 처음부터 이래야 했다. 한 회사의 대표가 많은 것을 끌어안기보다는 적당히 부하 직원에게 업무를 나눠줄 줄도 알아야 한다.박민정은 조금 곤란해졌다. 그가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 정자가 들어있는 그 유리병을 찾기 힘들 테니까.유남준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내가 회사로 갔으면 좋겠어?”“아뇨.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이번 달은 일에서 손을 뗄 생각이야. 너한테 더 신경 쓸 거니까.”일에서 손을 뗀다고...박민정은 조금 믿기 힘든 얼굴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참, 너 전에 신림현으로 가고 싶다고 했었지?”그가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를 건네자 컵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두 사람이 막 결혼했을 당시 박민정은 자주 그에게 자신이 크고 자란 곳을 언급했다.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걸 공유하고 싶었으니까.“그랬죠.”“그럼 이따 거기로 갈 거니까 준비해.”한 달간 진짜 부부가 되기로 약속은 했지만, 정확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하여 그는 문득 누군가가 허니문 얘기를 했던 것이 생각나 이런 제안을 꺼낸 것이다.박민정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알겠어요. 지금 준비할게요.”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휴대폰을 집어 들다가 조하랑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걸려온 것을 봤다
온갖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을 확인해 보니 시아버지인 유석진이었고 재빨리 구석 쪽으로 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오늘 저녁에 호우주의보가 떴던데 남준이랑 민정이 모두 거기에 있어?”“네.”“그러면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주 자연스럽겠지?”유석진이 묻는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최현아는 다급히 그에게 설명했다.“여기에는 다른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도 계세요.”“난 그저 유남준이랑 박민정만 사라진다면 다른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이 없어.”유석진의 말대로 그는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최현아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더니 눈길은 자기도 모르게 유남준에게로 향했다.“알겠어요. 그럼 준비되면 알려주세요.”“그래. 너랑 지훈이는 꼭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네.”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 전화를 끊었다.그러다가 머릿속에서는 진짜로 유남준과 박민정이 사고 나는 걸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지 온갖 잡생각으로 뒤엉켜있었다.박민정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지만 몰래 마음을 두고 있는 유남준이 이대로 죽는 건 아쉬웠다.두통이 몰려오던 이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치 싸우고 있는 듯했다.이때 여교사 한 명이 최현아에게 다급히 달려왔다.“지훈이 어머님, 빨리 가보셔야겠어요. 지훈이가 다른 아이랑 지금 싸움 났거든요.”이건 선생님들이 관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워낙 유지훈의 부모님이 극성이라는 소문이 있어 감히 먼저 말리지 못했다.또한 유씨 가문의 세력만 봐도 선생님들 쪽에서 밉보이는 행동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처지였다.“누가 감히 내 아들을 때려?”최현아가 빠르게 싸움 현장에 달려와 보니 유지훈과 조하랑의 조카인 조동민이 한창 주먹다짐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훈은 조동민보다 덩치가 한참 작았기에 전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내 물고기 당장 물어내! 우리 아빠가 직접 잡은 물고기인데 물어내라고!”
햇빛 아래서 그의 덩치는 유난히 우람해 보였는데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웬만한 부잣집 도련님들은 보통 이런건 모르지 않나? 그런데 왜 유남준은 개울에서 물고기 잡을 줄도 아는 거지?’이때, 마침 유남준도 그들을 보고 있었고 물고기를 받으라고 손짓했다.그 모습에 박예찬은 한껏 흥분한 상태로 그를 향해 외쳤다.“여기로 던져주세요.”유남준은 그의 말대로 손바닥보다 더 큰 물고기를 박예찬에게 던져줬다. 필경 아직 어린아이라 물고기를 만져보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첫 번째로 잡은 물고기는 구덩이 하나를 파서 물을 채운 뒤 안에 넣었다.그 모습에 많은 어린이들이 구경하러 오게 되었다.“와! 예찬아, 이게 너희 아빠가 잡은 물고기야?”박예찬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어떤 여자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너희 아빠 참 대단하다. 우리 아빠는 아직 아무것도 못 잡았는데.”다른 아이들도 유남준을 칭찬하며 박예찬을 한껏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은 또 다른 물고기를 잡아 그에게 던져줬다.최현아 따라 땔감을 주우러 가려던 유지훈도 여느 사람들과 같이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엄마, 저도 가서 볼래요.”그의 말에 최현아도 말리지 않았다.“그래.”최현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유지훈은 재빨리 아이들이 몰린 쪽으로 달려가더니 자기 앞에 서 있는 아이를 밀쳐내고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나도 물고기 좀 보게 다들 비켜봐.”아이들은 이런 유지훈의 행동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내키지 않지만 저마다 자리를 비켜줬다.유지훈이 맨 앞에 다가가 두 마리의 물고기를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난 또 얼마나 대단한 물고기를 잡았다고. 저건 작아도 너무 작잖아? 우리 아빠가 돈 주고 산 물고기가 훨씬 크고 이뻐!”아이들이라 그런지 한창 비교하기 좋아하는 나이다.특히 유지훈은 모든 아이가 박예찬을 둘러싸고 칭찬하는 모습에 질투심을 느꼈다.그러나 아쉽
유남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어젯밤에 네가 계속 춥다고 잠꼬대해서 내가 안고 같이 잤어.”“네?”박민정은 그의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날씨도 이젠 어느 정도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더구나 어젯밤도 전혀 춥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때, 옆에 누워있던 박예찬이 침낭에서 일어나더니 박민정에게 말했다.“엄마, 나도 봤어. 어젯밤에 분명 엄마가 계속 춥다면서 안아달라고 했어.”박예찬의 진지한 말투가 전혀 거짓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자 순간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내가 그런 잠꼬대를 했다고? 나이 먹으면서 외로워졌나?’이때, 박예찬이 박민정 앞에 다가와 다시 말을 이었다.“엄마,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예전에도 두 사람이 자주 그렇게 잤으니까.”박민정은 그의 말에 더욱 부끄러워 어딘가 숨고 싶어졌다.“알았어.”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고개를 돌려 유남준에게 말했다.“그럼 어젯밤은 고마웠어요. 혹시 저 때문에 못 잔 건 아니죠?”유남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야. 내가 이따가 이불을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오늘 밤에는 우리 이불 덮고 자자.”“그럴 필요 없...”박민정이 단번에 거절하려는 순간 텐트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동서, 남준 씨, 깼어?”최현아였다.그녀의 물음에 박민정이 재빨리 답했다.“네. 무슨 일이에요?”“우리 지금 땔감 주어서 아이들한테 야외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짓는 방법을 가르치려 하는데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여기까지 직접 와서 물어보니 박민정은 거절하기 힘들었다.“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박민정이 침낭에서 나오자 유남준이 갑자기 그녀의 팔목을 잡으면서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이때,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최현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남준 씨, 동서가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이따 남자분들은 개울에서 낚시해야 해요.”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말없이 얼굴을 찡그렸다.박민정은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텐트 밖으로 나왔는데 최현아는 자
유남준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알겠어.”빠르게 저녁 시간이 돌아왔고 산기슭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유난히 별들이 잘 보였다.박민정과 박예찬은 같이 앉아 쉬고 있었고 유남준은 그들과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바비큐를 기다리고 있었다.고기 굽는 냄새가 순식간에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해 자기도 모르게 시선들이 이쪽으로 쏠리게 되었다.박민정은 살짝 난감한 듯 박예찬에게 말했다.“예찬아, 네가 다른 친구들이랑 학부모님들, 그리고 선생님들도 데리고 와서 같이 먹자고 해.”전날 밤, 그냥 가벼운 말로 야외에서 캠핑하면 바비큐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걸 유남준이 기억하고 준비해 줬다.“네.”박예찬이 엉덩이를 툭툭 털면서 일어서더니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그렇게 잠깐 박민정과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녀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틈에 유남준은 어느새 다 구운 고기를 접시에 담아 박민정에게 건넸다.“먹어.”“먼저 먹어요. 저는 제가 구워서 먹을게요.”박민정은 방금 그와 다퉜는데 그가 구워준 고기를 덥석 받아먹는 게 왠지 미안했다.하여 스스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유남준은 여전히 자신을 거절하는 그녀 때문에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난 고기를 원래 안 좋아해. 네가 안 먹으면 이건 그냥 버릴게.”살짝 화가 난 목소리였다.그의 말에 박민정은 어이없다는 듯이 재빨리 그의 접시를 받아서 들었다.“아깝게 왜 버려요. 고기 안 좋아하면 더 이상 굽지 말아요.”생각했던 대로 말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었다.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순간 질투가 많은 여느 여고생처럼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이제 자신이 구워주는 고기도 마다한다고 생각하니 유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러나 박민정은 이 상황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즐겁게 고기를 먹고 있다가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이 몰려오자 그들과 같이 식사 자리를 즐기기 시작했고 금세 유남준이라는 사람을 잊어버리게 되었다.그런 유남준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웃고
그러다가 최현아는 무심결에 유남준의 튼실한 팔뚝과 또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애초에 남준 씨랑 결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러다가 그에게 다가가 휴지를 꺼내며 물었다.“땀 흘렸네요. 제가 닦아 드릴까요?”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그의 땀을 닦아주려 손을 뻗었다.막 거절하려던 순간 박민정과 박예찬이 들꽃을 꺾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또다시 괘씸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가만히 서 있었다.순간 최현아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유남준때문에 심장이 또다시 나대기 시작했다.‘들은 소문에 의하면 유남준에게 첫사랑인 이지원을 제외하면 여자라고는 박민정뿐이라고 했는데?’‘역시나 남자들은 다 똑같네!’순간 최현아는 진작에 유남준에게 접근하지 않은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아니면 진작에 IM 대표의 사모님 자리를 꿰찼을 텐데.마음속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면서 손은 점점 바빠졌다.박민정과 박예찬은 마침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의 애틋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그러다가 박민정은 문득 머릿속에 기억 한 장면이 떠올랐는데 장소는 비슷했지만 유남준의 맞은편에는 최현아가 아닌 이지원이 서 있었다.순간 박민정은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유남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예찬도 화가 난 나머지 잡고 있던 박민정의 손을 놓고 재빨리 달려가 두 사람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물었다.“현아 이모, 지훈이가 급한 일이 있다고 이모 찾던데요?”그의 말에 최현아가 재빨리 되물었다.“무슨 급한 일?”“가서 직접 물어보세요.”박예찬의 말에 최현아는 두말없이 유지훈 쪽으로 향해 달려갔다.박민정은 어느새 유남준에게 다가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보통 이런 식으로 바람피웠나 보네요?”유남준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무덤덤해 보이는 박민정에게 다가가 되물었다.“화 안나?”“그저 유치해 보이는데요?”박민정의 입에서 들리는 유치하다는 말이 단번에 유남준의 가슴에 꽂혀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이제
최현아는 계속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이렇게 보면 또 남자가 너무 잘생기고 능력이 좋아도 파리들이 많이 꼬여서 마냥 기쁜일만은 아닌것 같네. 그러니까 동서도 조심해.”박민정은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어린애도 아닌데 아무리 감시하고 조심한다고 되겠어요? 그냥 신경끄고 자기 삶을 사는게 낫을 것 같네요.”최현아는 박민정이 이렇게 쿨하게 나올줄은 생각지도 못해 순간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이따가 텐트도 쳐야 할 텐데 혹시나 도울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사람 보낼 테니까.”말을 마친 뒤 자리를 떴다.“네, 고마워요.”최현아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남준이 박민정의 곁으로 돌아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방금 유남준의 곁에서 맴돌던 학부모들의 안색이 저마다 어둡더니 더 이상 그와 말을 걸지 못하는 눈치였다.“저 사람들이랑 무슨 얘기를 나눴어요?”유남준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박민정의 관심에 일부러 입을 삐쭉거리며 답했다.“맞춰봐.”그러나 박민정은 그의 도발에 순간 흥미가 뚝 떨어졌다.“됐어요. 그럼 전 텐트 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자리를 뜨는 박민정을 보고 유남준도 냉큼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별일 아니고 IM 그룹이랑 협력하고 싶다고.”“그렇군요.”갑자기 냉담해진 박민정의 태도에 유남준은 그녀의 생각을 더욱 알기 힘들었다.“민정아, 화났어?”그의 물음에 박민정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아니요? 제가 왜 화 나요?”유남준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거짓말하는 건 같지 않아 오히려 마음이 더욱 불편했다.“내가 다른 여자들이랑 수다를 떨어도 너는 아무렇지 않다는 거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텐트를 들고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는데 박민정은 그제야 유남준이 화났다는 걸 눈치챘다.유남준이 혼자서 말없이 텐트 치는 모습을 보고 있던 박예찬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재빨리 박민정에게 다가와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박민정은 순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라
박민정은 장연수란 사실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연수 씨, 무슨 일이에요?”장연수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민정 씨, 제가 오늘 오면서 돗자리를 못 챙겼는데 혹시 같이 밥 먹어도 될까요?”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세요.”어차피 갖고 온 돗자리 사이즈가 커서 비좁지는 않았다.장연수는 그녀의 허락에 활짝 웃더니 지원이만 남기고 먹거리 가지러 달려갔다.그러나 유남준은 그런 장연수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박민정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내가 다른 돗자리 사 오라고 할게.”“지금 사러 가도 이미 늦었어요. 아쉬운 대로 그냥 먹어요.”“그래.”이때 장연수는 어느새 음식을 한 보따리 가져와서 돗자리에 올려놨다.“제가 직접 한 음식들인데 괜찮으면 같이 먹어요.”“감사합니다.”그러다가 그녀느 문득 유남준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유 대표님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익히 들었고 저희 남편도 자주 언급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어느 연회에서 대화도 나눴다던데요?”“그래서 제가 오늘 대표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을 저희 남편이 듣더니 대표님 명함 하나만 부탁하던데 혹시 받아볼 수 있을까요?”박민정은 그제야 장연수가 오늘 그들에게 접근한 의도를 알아챘다.그러나 남편의 이익을 위해 관계를 맺는 건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유남준도 그녀가 그저 학부모라고 생각하고는 선뜻 자기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장연수는 밥 먹을 때도 유남준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어렴풋이 자기 남편과 같이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는 의지를 드러냈다.그러나 유남준은 그저 예의상 몇 마디 대답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식사 자리가 끝난 뒤 장연수는 박민정이 뒷정리하는 걸 가로막으며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고 박민정도 진작에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쉽세 물러서지 않았다.“지원이 엄마, 제가 하면 돼요.”“아니요. 이건 제가 정리할게요. 민정 씨는 아이들이랑 놀아
최현아는 유남준이 계속 따라오는 게 불편했다. 그가 옆에 있으면 박민정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다른 사람에게 굳이 부탁할 필요 없이 저만 따라가는 게 왠지 더 안심될 것 같네요.”유남준의 말에 최현아는 더욱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이때 학부모들은 박민정 곁에 서 있는 유남준에게 눈길을 몇 번 더 주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저렇게 잘생기고 능력도 좋은 남편이 있는 걸 보면 예찬이 엄마는 참 복도 많아.”“그러게요. 그러니까 태어난 아들도 똑똑한가 보죠. 지난번 수학 경시대회에서도 1등 했다던데요?”“우리 딸이 나중에 예찬이랑 결혼했으면 좋겠네요.”“꿈 깨요.”그들은 말하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오늘 유남준 외에도 많은 아이의 부모님들이 야외 캠핑을 즐기기 위해 참석하게 되었다.그리고 각자의 차에 올라탄 뒤 함께 출발했다.박예찬은 차에 올라타서도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엄마, 요즘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데 없어?”박민정이 웃으며 답했다.“많이 좋아졌어. 기억들도 서서히 돌아오는 것 같고.”순간, 박예찬의 눈빛이 반짝거렸다.“뭐가 기억났는데?”“너랑 윤우에 관한 기억인 것 같은데 너무 흐릿했어.”박민정의 말에 박예찬은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당장에라도 박민정을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부끄러워 차마 그러지 못했다.“엄마, 건강도 챙기고 밥도 많이 먹어야 해.”말을 마친 뒤 그는 주머니에서 핫팩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줬다.“아직 추우니까 손에 쥐고 있어.”이건 같은 반에 여자아이가 박예찬에게 준 물건이었다.박민정은 손에 든 핫팩을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자기 아들이 말은 투박해도 참 따뜻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순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우리 아들, 고마워.”그러다가 자기 아들을 꽉 안아줬는데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박예찬은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그러나 옆에서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유남준은 괜스레 마음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아침에 그녀를 위해
유남준은 쉽사리 상대할 인물이 아니었지만 박민정은 그에게 있어 유일한 약점이었다.최현아는 학부모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겼다.[여러분, 선생님과 상의한 끝에 봄도 왔겠다 싶어 아이들과 함께 교외로 소풍을 가려고 합니다. 좋은 날씨를 놓치지 말고 모든 학부모님께서 꼭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그녀의 제안은 순식간에 대다수 부모들의 찬성을 얻었다.박민정도 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모든 학부모가 참여한다니 혼자 거절하기도 애매해 결국 그녀도 동행하기로 했다.최현아는 박민정의 답변을 확인하고 살짝 안도했다. 곧바로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주의 사항을 보냈다.[동서, 이모님께 들으니 동서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하더라. 예찬이를 데리고 가려면 조심해야 할 거야. 여기 필요한 물품 리스트가 있어. 소풍뿐만 아니라 캠핑도 할 거니까 모기 기피제나 감기약 같은 것도 꼭 챙겨가도록 해.]박민정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고마워요.]그 무렵,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지원이 엄마였다.[예전엔 이런 소풍이나 캠핑 같은 걸 한 적이 없었는데 올해는 어쩐 일로 최현아가 나서서 추진하는 걸까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이제 완전히 박민정의 편이 된 지원이 엄마였다.박민정도 신중한 태도로 답장을 보냈다.[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더 지켜봐요.][네, 알겠어요.]박민정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유남준에게 박예찬과 함께 교외로 소풍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이 말에 유남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너 혼자?”박민정은 가볍게 끄덕였다.“네, 학교에서 부모 한 명만 동행하면 된다고 했어요.”유남준의 대답은 단호했다.“안 돼. 나도 같이 갈 거야.”그녀와 박예찬을 단둘이 외부에 내보내는 건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박민정은 그를 올려다보며 망설였다.“근데 남준 씨는 회사에 나가야 하잖아요?”“일은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소풍은 1년에 몇 번 있지도 않아. 그런데 날짜는 언제야?”“모레예요.”“좋아.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