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밤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유남준은 박민정을 뒤에서 꼭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박민정은 머리맡에 둔 작은 유리병을 보고는 드디어 떠날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그 유리병 안에는 드디어 그녀가 얻고 싶었던 것이 들어있다.박민정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하자 유남준이 더욱 세게 안아왔다.어쩔 수 없이 그녀는 일단 그 물건을 침대 아래 숨겨두고 내일 유남준이 출근하면 다시 꺼내기로 했다.그러고는 몸을 돌려 깊은 잠에 빠져있는 유남준을 바라봤다. 괜히 죄책감이 밀려왔던 그녀는 속으로 그에게 말했다.‘아까 미안하다고 했던 건 진심이었어요. 그 이유가 죽은 척하고 당신을 떠난 것에 대한 건 아니었지만...’지금 그녀의 행동은 유남준을 속이는 것이 된다.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만 아이를 곁에 둘 수 있으니까.다음날, 날이 밝아오고 유남준은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품에는 아직 박민정이 있었고 이에 안도감이 들어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그러다 문득 그녀의 매끄러운 등에 오래된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형태로 봐서는 자상인 듯했다.그때 박민정도 잠에서 깼고 유남준은 그녀에게 물었다.“등에 이 상처는 뭐야?”박민정이 몸을 흠칫 떨더니 이내 원망과 슬픔이 가득 들어있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기억 안 나요?”이 상처는 그때 칼을 맞을 뻔한 그를 구해주려다가 생긴 것이었다.그런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유남준과 김인우는 정말 친구가 맞나 보다. 두 사람 다 똑같이 은혜도 모르는 인간들이었다.유남준은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 듯 다시 물었다.“언제 생긴 건데?”박민정은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열일곱 살 때요.”즉 유남준이 유씨 가문에서의 입지를 굳히기 시작할 때였다.당시 그 범인이 유씨 가문에서 보낸 것인지 아니면 라이벌 회사에서 보낸 것인지는 몰랐지만 유남준은 하마터면 칼에 맞을 뻔했고 그런 그를 구해준 것이 바로 그녀였다.유씨 가문 사람들조차 알고 있는 일을 당사자인 그는 까맣게 잊어버렸
박민정은 나쁜 짓을 하고 들킨 아이 얼굴을 한 채 그와 눈이 마주쳤다.하지만 유남준은 화를 내지 않았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이제 알려 줘. 네가 원하는 게 뭔지.”박민정은 그와 금방이라도 코가 닿을 거리에서 유남준의 시선을 마주하며 거짓말했다.“그냥 단순히 당신과 하룻밤 보내고 싶었을 뿐이에요.”그녀는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유남준은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언뜻 슬퍼 보이기도 했다.“그럼 그 다음은? 이제 날 떠나려고?”박민정은 그에게 꽉 잡힌 어깨가 부서질 듯 아파 났다.“나는...”하지만 그녀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너는 내 허락 없이 진주시에서 절대로 못 나가. 벌써 잊었어?”박민정의 몸이 살짝 떨렸다.“잊은 적 없어요. 당신 돈 다 갚고 떠나겠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윤우가 여기 있는데 내가 몰래 떠날 리가 없잖아요.”“그 많은 돈은 어떻게 마련하게?”유남준이 물었다.박민정이 해외에서 꽤 유명세를 떨치는 작곡가인 건 맞지만 그가 준 돈을 다 갚으려면 아직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돈은 내가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어요.”박민정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어 말했다.“당신 돈 갚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하지만 유남준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힘을 더 꽉 주었다.“아파요.”박민정이 미간을 찌푸리고 나서야 그는 손에 힘을 풀었다.박민정은 이불로 몸을 가리며 천천히 뒤로 갔다.“그럼 난 먼저 씻을게요.”원래 그녀는 옷을 입으려고 했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그녀의 옷을 보니 전부 찢어져 있고 유남준의 옷과 함께 뒤엉켜 있는 바람에 이불이라도 쓸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이불을 돌돌 말은 채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유남준이 다시 한번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뭐가 그렇게 급해?”그의 목소리는 살짝 젖어있었다.“네가 전에 그랬지? 나와 부부처럼 지내고 싶다고. 손도 잡고 포옹도 하고 키스도 하고...”
이혼을 결심한 이후로 박민정은 유남준과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유남준은 그녀의 잔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내 이름 불러줘.”박민정의 빨간 입술이 서서히 움직였다.“남준 씨.”유남준은 다시 한번 그녀에게 입 맞출 생각이었지만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 때문에 아쉽게도 분위기가 깨져버렸다.도우미가 두 사람의 식사를 올려왔다.그리고 한 시간 뒤, 식사를 마친 후 박민정이 물었다.“오늘 정말 출근 안 해도 되겠어요?”유남준은 그녀가 자신을 회사로 보내려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응, 직원들이 알아서 해 줄 거야.”사실 처음부터 이래야 했다. 한 회사의 대표가 많은 것을 끌어안기보다는 적당히 부하 직원에게 업무를 나눠줄 줄도 알아야 한다.박민정은 조금 곤란해졌다. 그가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 정자가 들어있는 그 유리병을 찾기 힘들 테니까.유남준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내가 회사로 갔으면 좋겠어?”“아뇨.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이번 달은 일에서 손을 뗄 생각이야. 너한테 더 신경 쓸 거니까.”일에서 손을 뗀다고...박민정은 조금 믿기 힘든 얼굴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참, 너 전에 신림현으로 가고 싶다고 했었지?”그가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를 건네자 컵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두 사람이 막 결혼했을 당시 박민정은 자주 그에게 자신이 크고 자란 곳을 언급했다.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걸 공유하고 싶었으니까.“그랬죠.”“그럼 이따 거기로 갈 거니까 준비해.”한 달간 진짜 부부가 되기로 약속은 했지만, 정확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하여 그는 문득 누군가가 허니문 얘기를 했던 것이 생각나 이런 제안을 꺼낸 것이다.박민정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알겠어요. 지금 준비할게요.”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휴대폰을 집어 들다가 조하랑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걸려온 것을 봤다
신림현으로 가는 길에 장대비가 내렸다.박민정은 조수석에 앉아 우연히 운전석에 있는 유남준의 옆얼굴을 보고는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그러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차창 밖을 바라봤다.솔직히 유남준을 얻기 전에는 그의 곁에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그가 있었다.유남준은 아주 잠깐 자신에게 머물었던 박민정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휴게소에 거의 다다를 때 그녀의 손을 잡았다.“네가 조용하니까 적응이 안 돼.”그에 박민정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전에는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그 말에 박민정은 쓰게 웃었다.“그런 내게 말 많은 거 싫다고 한 건 당신이었죠.”그녀의 말에 차 안의 분위기가 바로 차갑게 가라앉았다.박민정은 괜한 얘기를 했다는 생각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여기 휴게소에서 조금만 더 가면 단풍나무 숲이 보일 거예요. 되게 예뻐요.”벌써 가을이 훌쩍 다가온 시점이라 해가 빨리 지기 시작했고 비 때문인지 날씨도 점점 추워졌다.단풍나무 숲을 지나갈 때 저녁이기도 하고 비도 와 날이 어둡기는 했지만, 다행히 예쁜 단풍나무는 볼 수 있었다.그리고 이때 유남준은 실로 오랜만에 활짝 웃는 박민정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마치 순진무구한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단풍나무 숲 풍경은 금세 사라졌고 박민정은 심심함을 달래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배터리가 없는 바람에 다시 휴대폰을 집어넣었다.그때 유남준이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다.“이거 써. 비번은 없어.”박민정은 조금 고민하더니 결국에는 휴대폰을 건네받았다.그의 핸드폰에는 업무에 필요한 앱들과 연락할 때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흔한 노래를 듣는 앱도 없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최근 뉴스를 확인하러 포털에 들어갔다.그러자 인기 검색어에 이지원의 [공개 사과문]이라는 다섯 글자가 보였다.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인 줄 알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유남준이 그녀에게
은은한 불빛 아래 박민정은 너무나도 익숙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유남준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고 박민정은 이불을 꽉 쥐었다.“오늘은 힘들어서 싫어요.”유남준은 잠깐 멈칫하더니 그녀를 살포시 끌어안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유남준의 품에서 규칙적으로 뛰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남준 씨...”“응.”“우리가 처음 포옹한 게 언제인지 기억해요?”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그를 꽉 끌어안은 건 두 사람의 첫날밤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그때 유남준은 그녀의 기분을 헤아리려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매몰차게 떼어놨었다.박민정이 그때 일로 자신을 원망하려는 건 줄 안 유남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때와 같은 일은 다시는 없을 거야.”그에게 이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사과나 다름없었다.한편 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두 사람이 처음 포옹한 건 아직 학생이었을 당시 그가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괴롭힘당하던 그녀를 구해줬을 때였다.그런데 그때와 같은 일은 다시는 없을 거라니?하지만 박민정은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얘기했다.“내가 당신을 좋아하게 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예요.”유남준은 그녀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그의 기억으로 박민정은 결혼식을 올리기 전부터 자신을 좋아했다. 그런데 갑자기 결혼한 첫날밤에 자신을 좋아하게 됐다니?그의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박민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그때는 남준 씨가 정말 멋져 보였어요. 그리고 나는 그런 당신과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결혼 같은 건 꿈도 꿔본 적이 없어요.”유남준도 그 어린 여자아이와 결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박민정을 처음 만났던 건 그녀가 10살이었을 때였다. 그때의 그녀는 여리고 가녀렸지만, 얼굴에 띤 미소만큼은 그 누구보다 빛이 났다.“우리는 다
박민정은 그 말에 유남준의 손을 잡고 포옹한 후 가볍게 입까지 맞췄다.그렇게 끝난 줄 알고 방에 들어가자 유남준이 손에 들린 떡볶이를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그녀의 머리를 잡고 짙은 키스를 해왔다.유남준은 방금 스킨십을 해오는 박민정의 눈동자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그는 괜히 심통이 나 그녀의 입술을 꽉 깨물어버렸다.박민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밀치려고 하자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아버렸다. 이에 그녀는 복수라도 하려는 듯 그의 입술을 똑같이 깨물어버렸다. 그러고는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 때쯤 입술을 뗐다.유남준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속삭였다.“내 얼굴 똑바로 보고 내 이름을 불러.”박민정이 고개를 들어보니 그의 입술은 그녀 때문에 빨갛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남준 씨.”평온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두 눈에 언제나 자신만 담던 여자아이의 눈이 아니었다.유남준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끼고는 눈가가 빨갛게 변해버린 채 그대로 박민정을 안아 들었다.그는 그녀가 발버둥 치는 것도 무시한 채 그렇게 소파에 올려놓았다.“내 이름을 불러.”유남준은 한없이 다정했다가 또다시 지금처럼 발작했다.“남준 씨.”담담한 그녀의 말투에서는 역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유남준은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내리치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그는 아무 말 없이 박민정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뜨거운 행위를 마치고 보니 그가 사온 떡볶이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있었다.유남준은 직원에게 부탁해 다시 사 오라고 하려 했지만, 박민정이 그를 제지했다.방 안에는 전자레인지가 있었기에 데워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데운 후의 떡볶이는 그녀가 알던 그 맛이 아니었다.그러다 문득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이 떠올라 자조하듯 웃었다. 두 사람 사이는 마치 이 떡볶이처럼 다시 데운다고 한들 처음 같은 느낌은 아닐 것이다.아침을 먹은 후, 유남준은 차를 몰아 박민정과 함께 그
방안에는 그녀의 아버지인 박형식의 유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중 그녀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그림은 그의 아버지가 직접 그린 것이었다.박형식이 죽은 후 그녀의 어머니인 한수민과 동생 박민호는 회사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종국에는 집안에 돈이 되는 물건들은 전부 다 경매에 넘겨버렸다.박민정이 귀국한 이유 중에는 그의 아버지 유품들을 되찾기 위함도 있었다. 특히 자신을 그린 이 작품을 말이다.박형식이 이 그림을 그렸을 때 그녀는 막 10살이었고 흰색 원피스를 입은 채 베란다에 앉아 꽃을 들고 웃고 있었다.박민정은 한 걸음 한 걸음 그림을 향해 다가갔다. 그림을 보면 볼수록 흰색 머리로 뒤덮인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녀에게 그림을 그려줄 때 그의 아버지는 항상 인자하고 다정한 얼굴을 했었다.박민정은 손을 들어 그림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다시는 못 찾을 줄 알았는데...”그녀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이 그림은 특별함 따위는 없는 그림이라 분명히 어딘가에 버려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유남준이 찾아낼 줄이야...유남준은 박민정의 표정을 보며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원하는 걸 선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이것들 전부 두원 별장으로 옮겨가도 돼.”그는 그녀가 두원 별장을 떠나기 싫어지도록, 그녀의 발목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집에 들이고 싶었다.박민정은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고마움 가득 한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고마워요.”“그러니까 앞으로는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을 해. 괜히 이상한 투정부리지 말고.”이상한 투정...그 마지막 한마디 때문에 박민정의 눈동자가 다시 차갑게 식었다.유남준은 이때다 싶어 블랙카드를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네가 원하는 대로 써.”두 사람이 결혼했을 당시 유남준은 항상 서다희를 통해 그녀에게 생활비를 주곤 했었다. 그러다 박민정이 떠나고 나서야 그녀가 서다희가 건네준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박민정은 눈앞에 놓인 카드를 보며 전혀 기
펑! 펑!예쁜 불꽃들이 하늘에서 반짝였다가 금세 사라져 버린다.그때 옆에 있던 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성은 빨개진 얼굴로 수줍어하는 여성의 손을 잡고 평생 같이하자고 외쳤다.박민정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문득 자신도 가슴 뜨거운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유남준에게 반한 뒤로 그녀는 자신에게 구애해오는 남자들은 전부 무시해버렸고 그렇게 연애 한번 하지 못한 채 그와 결혼을 했다.그러니 달콤하고 애틋한 연애란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그녀는 눈물이 앞을 가려오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빠, 나 후회해요.”유남준과 결혼한 것을 후회하고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과 결혼한 것을 후회했다.8시 반이 되고 계속 될 것 같던 불꽃놀이도 끝이 났다.사람들이 서서히 돌아가고 서다희도 마침 박민정을 데리러 이곳에 도착했다. 그는 강변에 홀로 남겨진 쓸쓸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며칠 전 자신의 약혼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어떻게 다른 여자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려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있어?”이 순간, 서다희는 박민정을 동정했다.그는 차를 갓길에 세우고는 천천히 박민정의 곁으로 다가왔다.“민정 씨, 집까지 모시겠습니다.”박민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실망감이 가득한 눈길을 거두어들이고 애써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고마워요.”차에 올라탄 후 서다희는 히터를 조금 높게 틀었다.몇 년 동안 해외에 있으면서 박민정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아직 많이 여린 편으로 특히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 가뜩이나 허약한 몸이 후 불면 날아갈 듯했다.서다희는 유남준을 대신해 그녀에게 해명했다.“이지원 씨가 사생팬에게 습격을 당했어요. 응급 수술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대표님 얼굴이 보고 싶다는 것이였어요...”사생팬...박민정이 쓰게 웃었다. 유남준이라면 조금만 조사해도 임수호가 그녀의 사생팬이 아니라는 걸 알텐데.
“그럼 됐어. 약속했으니까 꼭 지키는 거야.”박민정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연지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연지석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다음에 보자.”“그래, 잘 가.”박민정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연지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연지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남준이 다정하게 박민정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우리도 돌아가야지.”“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인가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고 유남준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차로 향했다.가는 길에 박민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분주한 인파를 둘러보았다.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주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이 참으로 신기했다.“민정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문득,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었다.박민정도 따라서 멈춰 서며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뭔데요?”유남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박민정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참...”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박민정은 조금 쑥스러워졌다.“갑자기 왜 그래요?”유남준이 미소를 지었다.“그냥, 지금 말하고 싶었어.”“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해.”“좋아하는 게 다야?”유남준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박민정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그래, 좋아한다는 것도 괜찮지.”유남준이 흐뭇하게 웃었다.박민정이 그
옆에서 지켜보던 정수미가 박민정이 병상에서 일어나려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어디 가려고?”“친구 만나러요.”“지금은 푹 쉬어야 할 때야.”정수미가 걱정스레 만류했다.“며칠 후에 만나면 안 돼?”하지만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그 친구가 곧 해외로 떠나거든요.”연지석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다. 이번에도 배웅하지 않는다면 정말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그래. 대신 조심해야 해.”정수미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박민정이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네.”박민정은 짧게 대답하고 병실을 나섰다.밖에서는 유남준과 정윤아가 기다리고 있었다.“언니, 어디 가려고요?”정윤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은 쉬어야 하는데.”“좀 있다가 설명할게. 지금은 시간이 없어.”박민정이 이렇게 말하며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남준 씨, 지석이가 출국한대요. 지금 공항에 있어요.”그녀는 가장 중요한 신뢰를 지키고 싶었다.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숨기고 싶지 않았다.유남준은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차로 데려다줄게.”“정말요?”박민정은 망설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에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당연하지. 별일도 아닌데 뭘.”유남준은 가볍게 대답하며 차 쪽으로 걸어갔다.“가자.”“네.” 박민정이 웃으며 따라갔다.차에 오르자 유남준은 공항으로 향하며 물었다.“갑자기 왜 떠나는 거야?”박민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원래 진주시에 온 것도 국내 사업 관련 일이 있어서였어요. 그런데 내가 실종되면서 오래 머물렀던 거죠. 아마 이제 가족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그럼 제대로 인사해야겠네.”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네.”박민정은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기분 나쁘진 않아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예전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예전에는 연지석과 박민정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연지석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머물렀다.차를 몰고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인사도 없이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박민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정아, 나 집에 가려고. 너한테 인사하려고 연락했어. 지금 몇 병동에 있어? 잠깐 보러 갈게.]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후,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한편, 박민정은 수술을 마친 뒤 처음으로 상태를 점검하는 날이었다. 실을 제거하고 청력을 확인하는 중요한 검사들이 진행됐다. 의사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김인우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는 백 퍼센트 확신하지 못했다. 과연 박민정의 청력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박민정은 눈을 감은 채 손을 살짝 떨고 있었다.오랜 세월, 그녀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만약 내가 정상적인 청력을 되찾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누구보다 떨리고 누구보다 기대됐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장비들이 제거되었고 그녀의 귀에 미세한 소음이 울렸다. 그건 수술 도구들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들려?” 김인우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자 박민정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네. 들려요.”그녀의 대답에 김인우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잘됐어! 정말 잘됐어. 수술이 성공했어.”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박민정도 고개를 끄덕였다.“당분간 푹 쉬어야 해. 무리하면 안 돼.” 김인우가 급히 덧붙였다.“이제 테스트를 좀 해볼게요.”“네.”김인우는 간단한 청력 검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완전히 정상 수준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보청기가 필요 없는 상태였다.“아주 좋아. 앞으로 조심해서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검사만 받으면 문제없을 거야.”검사를 마친 뒤, 박민정은 병실 밖으로 나왔고 거기엔 유남준, 정수미, 정윤아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어때요, 김 선생님?”정수미가 다급히 물
연지석은 잠시 말없이 있었다.“홍 비서가 처음엔 몰랐지만 이제 알고 나서 후회하는 건가?”“그건 아니야. 그냥 우리 두 사람이 약혼한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나보고 배신하지 말라고. 만약 다른 여자가 생기면 미리 한마디만 해 달래.” 하민재의 말에 연지석은 서류를 넘기면서 무심히 말했다. “괜찮은 여자 같은데?”“형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하민재가 되묻자 연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연애 전문가가 아니지만 네가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홍 비서는 너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했잖아. 너무 기대하지 마. 실망하는 건 결국 너야.”그 한마디가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하민재를 깨웠다. 그제야 왜 자신이 불편했는지 깨달았다.“형, 솔직히 말해서... 나, 주영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홍주영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알았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연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좋아한다면 노력해. 먼저 네 자신부터 바로잡고.”“하지만 주영 씨는 유남우를 좋아하잖아...”그 한마디에 연지석도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하민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형, 왜 우리가 좋아하는 여자들은 다 유씨 형제랑 얽히는 걸까?”더 이상 서류를 볼 기분이 없었던 연지석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이미 놓았어.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이미 홍 비서와 약혼까지 했으니까 널 선택한 거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잠시 말을 멈췄던 연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난 곧 해외에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해. 여긴 네가 좀 맡아줘.”“알았어.”하민재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고 반대편에서도 연지석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인하의 자리로 갔다.“인하 씨, 민정이 수술은 어떻게 됐어요?”설인하는 그제야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아마 오늘이면 수술이 성공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연지석이 묻지 않았다면 그녀는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퇴근 후 시간이 나면 병원에 가서 박민정
홍주영은 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제야 하민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정리를 시작했다.혼자 소파에 앉은 홍주영은 침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스레 유남우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민재가 지금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도 그저 일시적인 신선함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예전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였으니까.하지만 이제 그녀도 나이가 찼고 결혼해야 할 때가 됐으며 무엇보다 할머니를 안심시켜야 했다.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홍주영은 노트북을 꺼내 업무를 시작했다. 일에 몰두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얼마나 지났을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하민재가 기대에 찬 얼굴로 걸어나오며 말했다.“주영 씨, 와서 좀 봐요. 내가 잘 정리했는지 확인해줘요.”홍주영은 노트북을 닫으며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문을 넘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했던 방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에 놓여 있던 여행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주영 씨 옷도 전부 정리해서 옷장에 넣어뒀어요.”하민재가 옷장 앞에 서서 문을 활짝 열자 안에는 가지런히 개켜진 옷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절별로 정리된 옷들이 걸려 있었고 색상과 종류에 따라 완벽하게 분류되어 있었다.홍주영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걸 어떻게 한 거예요?”이런 정리는 능숙한 사람도 쉽지 않다. 그런데 명문가 출신인 하민재가 직접 했다고?“그냥 만족하다고만 해주면 안 돼요?”그가 칭찬을 바라는 듯 바라보자 홍주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만족해요.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낫네요.”자신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장판이었던 방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그럼 됐어요.”“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홍주영은 유남우의 말을 들으며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하민재는 여러 여자와 함께 있었고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여자들은 모두 달랐다.그녀는 사진을 꽉 쥐었다. 마음이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하민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지금 그녀의 약혼자였다. 그녀의 약혼자로서 이렇게 많은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겠는가?그러나 약혼 전후로 하민재가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홍주영은 고개를 들어 유남우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도련님, 제 사적인 문제입니다. 신경 써 주실 필요 없습니다.”그리고 덧붙였다.“또한, 저는 도련님께서 제 약혼자를 조사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게다가 도련님께서 조사하신 것들은 제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던 내용이에요.”홍주영은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결정이라고 해서 덥석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그녀는 이미 하민재에 대해 충분히 알아본 후에야 이 결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유남우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홍 비서, 알다시피 그런 남자가 한 여자에게 마음을 정착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믿지 마. 바람둥이가 변하는 건 정말 어렵거든.”홍주영은 손을 꽉 쥐었다.“충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제 분수를 잘 알고 있어요. 저는 민재 씨가 저 때문에 변할 거라고 기대한 적 없어요. 저희는 단지 결혼이 필요했고 서로에게 적합했을 뿐입니다.”숨이 막힐 듯한 기분이 들었고 이 공간에 더 머무를 수 없었다.‘도련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홍주영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더 이상 볼일이 없으시면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막 집에 왔는데 아직 정리도 못 했거든요.”말을 마친 그녀는 유남우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나가버렸다.유남우는 텅 빈 사무실에서 홀로 남았고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과거 자신만을 바라보던 그 작은 소녀가 점점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회사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마침 택배를 가지러 나왔던 비서들이 멀리서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홍 비서는 정말 운도 좋네.”“그러게. 대체 어떻게 해서 민재 씨랑 엮이게 된 거야?”“뭐가 어때서? 민재 씨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다 알잖아. 그리 좋은 평판은 아니지. 여자도 많았고.”“그러게. 아마도 홍 비서가 유 대표님 따라다니면서 술자리에서 만난 거겠지?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실패했는데 그 와중에 홍 비서는 성공했네.”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말끝마다 시샘이 묻어나왔는데 멀리서 들어도 느껴질 정도였다.하지만 홍주영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부터 무덤덤한 성격이었고 가까운 친구도 거의 없었다. 특히 그런 자리에서 인맥은 더더욱 만들지 않았다.비서들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아까의 험담은 없던 일처럼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홍 비서님, 약혼 축하드려요!”홍주영은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고마워요.”그러자 한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결혼식은 언제쯤 하실 건가요?”“아마 설 즈음이 될 것 같아요.”양가 할머니들이 설날이 가장 흥겹다며 날짜를 그렇게 정하자고 했다.정말 결혼을 한다는 말에 비서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명문가의 사모님이 될 사람이었다.“홍 비서님, 결혼식 때 저희도 초대받을 수 있을까요?”하씨 가문에서 열리는 결혼식이라면 하객으로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인맥을 쌓을 기회였다. 비서들은 당연히 그녀가 승낙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대놓고 거절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홍주영은 단호했다.“죄송해요. 저는 가족과 친한 친구들만 초대할 생각이에요.”그 한마디에 비서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거절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홍주영은 더 이상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녀가 사라지자 비서들은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별
이튿날 아침, 홍주영은 할머니께 작별을 고하고 도주로 돌아갔다.집 앞에서는 하민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밤 술을 마신 탓에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래도 기분만큼은 한껏 들떠 있었다.홍주영이 밖으로 나오자 그는 곧장 다가가 그녀의 여행 가방을 받아들었다.“내가 들게요.”“고...”고맙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그녀는 어제 하민재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네, 좋아요.”그 말에 하민재는 활짝 웃으며 그녀의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함께 차에 올랐다.운전기사가 도와주려 했지만 하민재가 눈짓 한 번 주자 곧바로 손을 거뒀다. 이건 분명 자기 아내 될 사람 앞에서 점수를 따려는 사장님의 의도일 터였다. 그러니 굳이 끼어들어 방해할 필요는 없었다.차에 오르자마자 홍주영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녀가 화면을 열어보니 유남우였다.[언제 도착해?]답장을 하려던 찰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하민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주영 씨, 먼저 말해 두지만 주영 씨 핸드폰을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홍주영이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네, 상관없어요.”사실 그는 억울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하민재에게 휴대폰 메시지를 보여준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었으니까.그러자 하민재는 슬쩍 말을 돌렸다.“근데 주영 씨 이번에 휴가 다섯 날이나 썼잖아요?”“네, 연차 쓴 거예요.”홍주영은 평소에 휴가를 거의 쓰지 않았고 이번이 유일하게 길게 쉰 경우였다.“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이 딱 다섯 번째 날인데요? 근데 벌써 출근한다고요?”하민재는 뭔가 수상쩍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의 직감이란 게 가끔은 무서울 만큼 정확할 때가 있다.홍주영은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그러나 하민재는 곧바로 반박했다.“주영 씨는 그냥 비서예요. 주영 씨가 없다고 회사가 굴러가지도 않는 것도 아니고.”그는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
하민재는 홍주영이 왜 그렇게까지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우리 약혼한 사이잖아요. 뭐가 문제에요? 게다가 걱정 마여, 나는 절대 신사적인 사람이니까.”신사적인 사람... 스스로를 신사라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진짜 신사일까?홍주영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안 돼요. 결혼하고 나서 여기서 지낼게요.”그녀는 평생 할머니와 함께 살아왔고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남자 집에서 머무르는 걸 달가워할 리 없었다.하민재는 한참 후에야 그녀의 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내가 잠시 후에 주영 씨랑 할머니를 모셔다드릴게요.”“네, 고마워요.”그녀는 예의 바르고도 사무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그 말에 하민재는 다시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으며 불만을 토로했다.“난 주영 씨 약혼자예요. 이제 고맙다는 말 좀 하지 마요. 그냥 나한테 막 시켜요, 데려다 달라고. 부탁이 아니라, 명령하라고요. 알겠죠?”홍주영은 그가 술에 취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투정 부리는 아이 같기도 했고 그 모습에 심장이 쿵쿵 울렸다. 그녀는 그를 다시 쳐다보다가 결국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알겠어요.”“그래야죠.”하민재는 다시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홍주영은 그가 또다시 뺨에 입을 맞추려는 줄 알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피곤했을 뿐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그 순간, 마침 할머니 두 분이 나왔고 그들은 그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아이고, 저 녀석. 저렇게 커서도 주영이한테 기대서 자네.”하민재의 할머니는 휴대전화를 꺼내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사진 속에서 홍주영은 얼굴이 새빨갛고 하민재는 마치 아이처럼 편안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홍주영의 할머니도 웃음을 터뜨렸다.“주영이는 맨날 결혼 안 한다고 하더니, 내가 보기엔 제대로 된 사람을 못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