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보니 이마는 땀으로 가득했고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그녀의 외침에 옆에 있는 보호자 방에서 유남준이 뛰쳐나왔다. 그러다 별다른 일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그녀에게 물었다.“왜 그래?”박민정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방금 죽는 꿈을 꿨어요.”비록 꿈이었지만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한편 죽음이라는 단어에 유남준은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고는 천천히 등을 토닥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꿈이야. 현실 아니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박민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이성을 되찾았고 고개를 들어 그에게 말했다.“고마워요.”그러고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마치 선을 그으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유남준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는 보호자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불을 걷더니 박민정의 곁에 누워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그의 행동에 박민정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내가 필요한 일이면 언제든지 얘기해도 돼.”그녀는 갑자기 목이 막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밖에는 거센 바람과 함께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무더웠던 날이 갑작스럽게 내린 비로 인해 조금은 시원해졌다.아까의 악몽으로 아직 불안함이 가시지 않던 그녀의 마음은 유남준이 곁에 있어 줌으로써 많이 괜찮아진 듯했다.3년이라는 결혼생활 동안 결벽증 탓에 실수로라도 안으려 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당신은 내가 아직도 싫어요?”그녀를 안고 있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박민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난 정말 당신을 모르겠어요...”유남준은 누군가가 목구멍을 막아놓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답답하고 복잡한 지금 이 마음을 그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웠다.박민정에게 특별한 감정이 생긴 건 아닐 것이다. 단지 누군가를 새롭게 알아가야 하는 일이 귀찮을 뿐이고 지금은 그저 그녀가 죽는 게 두려운 것뿐이다.한참을 그렇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유남준이
임수호는 아직 이지원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도 얼마 가지 않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임수호는 검은색 승용차 안에 앉아 풀숲에 잠복해 있는 경찰들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봤어? 그 여자는 애초에 당신을 구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 이제까지 당신을 이용하기만 했지.”임수호를 감시하던 경호원이 말했다. 그러자 임수호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그럴 리가 없어. 경찰들이 지원이 휴대폰을 도청한 게 분명해!”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를 보며 경호원은 혀를 끌끌 찼다. 그가 받은 임무는 임수호가 이지원의 실체를 확실히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꽤 시간이 걸릴 듯하다.임수호를 체포하러 왔던 경찰들은 당연하게도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리고 임수호가 금방 잡힐 줄 알았던 이지원은 상황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게 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두원 별장.퇴원 후 집에 도착한 박민정은 바로 조하랑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통화버튼을 누르니 박예찬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잘 지내고 있어?”박민정의 부탁으로 연지석은 조하랑과 아이들에게 교통사고에 관해서는 전하지 않았다. 하여 박예찬은 그녀의 사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엄마는 잘 지내고 있지.”박민정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예찬이는 유치원 잘 다니고 있었어? 하랑이 이모 힘들게 하지는 않았고?”“엄마, 나 이제 어린애 아니야.”박예찬은 고개를 돌려 잔뜩 어질러진 방 한가운데서 법률 서적을 외우고 있는 조하랑을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엄마는 아마 모를 것이다. 조하랑이 자신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조하랑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심지어 박예찬은 조하랑이 조금 바보 같다는 생각까지도 했다.그때 그 시선을 느꼈던 건지 조하랑이 법률 서적을 끌어안고 아이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역시...”바보 같다.박민정은 박예찬과 조금 더 대화한 다음 조하랑을 바꿔 달라고 했다.박예찬은 조하랑 앞으로
왜 이런 지시를 내렸는지 유남준조차도 그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교통사고를 당한 박민정이 기분 좋게 몸을 회복했으면 해서일까? 어쩌면 과거의 죄책감과 며칠 전 고소를 취하하라고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이런 식으로 달래려는 것일 수도 있다.이한석은 갑작스러운 지시에 의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오늘 당장 말씀이십니까? 어떤 꽃으로 하면 될까요? 손님맞이용이신가요?”유남준은 창문 가까이에 다가가 밖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알아서 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네, 알겠습니다.”두원 별장의 정원 설계를 알고 있는 이한석은 곧장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꽃을 구하기 시작했다.늦은 저녁, 여러 대의 트럭이 두원 별장 안으로 줄지어 들어왔고 작업복을 입은 정원사들은 차에서 내려 꽃을 심기 시작했다. 유남준이 어떤 꽃인지를 얘기해주지 않은 바람에 현재 진주시에 있는 꽃들은 전부 다 공수해왔다.늦은 시각이었던지라 박민정은 그들이 작업하고 있을 때 꿈나라에 있었다.다음 날 아침.잠에서 깬 박민정은 베란다로 향했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하룻밤 사이에 정원에 꽃밭이 펼쳐져 있었으니까.볼을 꼬집지 않았더라면 아직 꿈속인 줄 착각했을 것이다.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보니 유남준은 벌써 출근하고 없었다.거실을 지나쳐 정원으로 가보자 거기에는 어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 펼쳐졌고 그녀는 놀라움에 더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한편, 유남준은 회사로 가는 차 안에서 끊임없이 재채기했다.꽃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다.오늘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부터 그는 줄곧 이 상태였다. 가벼운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그에게 정원을 가득 채운 꽃들은 그야말로 고역이나 다름없었다.“대표님, 괜찮으세요? 병원으로 모실까요?”운전기사가 룸 미러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오늘 아침 유남준을 데리러 갔을 때 운전기사조차 별장의 풍경에 깜짝 놀랐다. 이건 단순히 정원을 꾸민 것이 아
박민정은 조하랑과 얘기를 조금 더 나눈 후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더는 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작업실로 가 연주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쉬이 진정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다시 작업실을 나와 밖으로 향했다.정원 쪽으로 가보니 거기에는 백발에 턱시도를 입은 이한석이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이한석은 정원사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다 어느샌가 정원으로 다가온 박민정을 보고는 꽤 놀란 얼굴을 했다.하지만 곧바로 다시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와 정원사들에게 일을 마저 분부한 다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저희가 혹시 방해된 건가요?”어쩌다 예의 있게 얘기하나 싶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박민정 씨는 청력이 좋지 않아 이 정도 공사로 시끄러워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헌데 박민정 씨는 이 시간에 대체 왜 아직도 집에 계신지요? 상류층 가문 아가씨들과 사모님들은 오전 10시가 다 되어가는 이 시간에 태평하게 집에서 늘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혹시 할 일이 없으셔서 이러시는 거라면 저희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근처 산책이라도 하는 게 어떠신지요?”이한석은 예전에 항상 그녀에게 유씨 가문 안주인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 엄격하게 교육해 왔다. 그리고 박민정은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위한다고 생각해 순순히 그의 말을 듣곤 했었다.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그가 그의 딸 이혜림과 나눴던 대화를 들어버리고는 그를 향한 호감도 싹 사라져버렸다.“촌구석에서 자란 계집이라 그런지 내가 뭐라고 하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더라고.”박민정은 그제야 이한석은 그저 자신을 교육하고 가르치는 데 우월감을 느꼈던 것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유남준의 법적 부인이자 유씨 가문의 명실상부 며느리를 일개 하인이 교육한다는 게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이 집사님이 하시는 말에 동의할 수 없네요. 저는 집사님이 방금 얘기한 상류층 가문 아가씨도 아니고 사모님도 아니에요. 그러니 이 집사님이 정해놓은 수준에 달할 필요도 없겠죠.”오
지금은 한창 아이들이 하원 할 시간이라 김인우는 유치원 앞에서 대기하기로 했다.유치원 앞에 도착한 후 그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입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 헤맨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유치원 앞에는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들도 많았다. 하여 그는 험악하게 생긴 경호원보다는 자신이 직접 아이를 잡으러 가기로 했다.“너희들은 혹시라도 애가 도망가지 않게 주변을 막고 있어.”아이가 똑똑하다는 걸 알고 있는 그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호원들까지 주위에 배치했다.그 시각 박예찬은 자신을 데리러 올 차량을 기다리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김인우의 무서운 얼굴을 발견해버렸다.“...”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온 거지?박예찬은 황급히 아이들 틈에 숨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너 뭐해?”박예찬은 김인우를 향해 손짓하며 유지훈에게 얘기했다.“너 데리러 오는 사람 바뀐 것 같은데 빨리 가봐.”유지훈은 박예찬의 손짓을 따라 김인우를 발견하고는 조금 놀란 듯 말했다.“어, 삼촌 친구네? 나 데리러 왔나 보다. 그럼 난 가볼게, 안녕.”김인우는 박예찬이 아이들 틈에 섞여 숨으려는 것을 보고 얼른 달려가려고 했는데 그때 누군가에 의해 다리가 묶여버렸다.“인우 삼촌.”김인우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유지훈은 유씨 가문의 장손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는 아이이다.“지훈이네. 그래, 무슨 일이야?”유지훈이 애써 다정한 얼굴로 물었다.“어? 삼촌 나 데리러 온 거 아니에요?”그러자 김인우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유씨 집안의 장손이라고는 하지만 김씨 가문까지 받들어 모셔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게다가 김인우는 아이를 싫어했다.“지훈이가 오해했네. 삼촌은 누구 찾으러 온 거야.”김인우가 자신을 밀어내며 오해라고 하자 유지훈은 조금 실망한 얼굴을 했다.아까 분명 자신을 데리러 온 거라고 박예찬이 말했으니까.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하기도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몰려들기 시작하자 김인우는 황급히 자리를 피해 다시 차에 다시 올라탔다.한편 박예찬은 유치원 안쪽 구석에 숨어 김인우의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그가 차에 올라탄 것까지는 좋았지만 여전히 자리를 떠나려는 생각은 없어 보이자 박예찬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유치원까지 찾으러 오다니 참으로 유치한 어른이 아닐 수 없다. 박예찬은 아직 김인우가 자신을 아들로 착각해서 찾아온 것은 모르고 있다.그렇게 한참을 구석에 숨어 어떻게 이 상황을 타파해야 할지 생각을 하던 차에 마침 워치폰이 울렸다. 조하랑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이모!”“너 이 녀석 지금 어디야? 어디 있길래 코빼기도 안 보여?”조하랑은 유치원 입구 앞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박예찬은 아까까지 주변을 서성이던 경호원들이 전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잽싸게 달려갔다.“이모, 나 여기 있어.”조하랑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왜 거기 있었어? 이모가 한참 찾았잖아.”“그게 실은... 저번에 봤던 아저씨가 찾아왔어...”박예찬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차량을 가리켰다.차 안에 있던 김인우는 미간을 치켜세우더니 곧바로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해.”하지만 이곳은 아직 하원하는 아이들로 북적였기에 함부로 시동을 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체되자 청순한 얼굴의 여자가 하이힐을 신은 채 씩씩거리며 다가왔다.그녀는 손을 창문에 갖다 대고는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김인우 씨 이게 지금 뭐 하시는 거죠?”김인우는 화부터 내는 그녀를 향해 순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렸다.“다 큰 어른이 꼭 어린애를 이겨 먹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경고하는데 다음번에 또다시 이런 식으로 찾아오면 그때는 제 아들을 괴롭히고 스토킹한 죄로 경찰에 신고해 버릴 줄 아세요!”조하랑은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김인우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다시 박예찬에게로 걸어갔다.박예찬은 조하랑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차로 향하다가 김인우 쪽을
고영란은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그때 옆에 있던 비서에게 얼마 전 조사를 의뢰했던 유남준의 최근 행동에 관한 보고 문자가 왔다.“유남준 대표님께서 현재 진주시에서 아이 한 명을 키우고 계신답니다. 키운 지는 벌써 보름 정도 됐다고 하고요.”...박예찬은 집으로 돌아간 후 요즘은 특별히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윤우가 들켜버린 마당에 자신마저 들켜버리면 안 되니까.아이는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이리저리 두드렸다. 그러다 얼마 안 가 곧바로 박윤우와 연결이 됐다.어젯밤 정림원의 시스템을 몰래 뚫어놓아 박윤우와 연락할 수 있게 된 것이다.유남준은 그때 박윤우의 워치폰만 뺏어갔을 뿐 아이가 가지고 있던 다른 미니 통신 기기는 눈치채지 못했다.박윤우는 병상에 누워있다가 작은 기기에 불이 들어오는 걸 보고 다급하게 귀 쪽으로 가져다 댔다.“형.”“윤우야, 괜찮아?”박예찬이 물었다.“응, 괜찮아. 나 돌봐주는 사람도 많고 내가 원하는 건 다 해줘.”박윤우는 검은 하늘을 쳐다봤다.만약 자신이 아프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전처럼 가족끼리 평온하게 살았을 것이다.“그럼 됐어.”박예찬은 혹시라도 박윤우가 슬퍼하거나 울고 있었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에 그칠 수밖에 없다. 아이는 아직 어리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으니까.“형,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뭔데?”“우리 아빠 정말 나쁜 사람이야?”박윤우에게 이런 생각이 든 건 유남준을 골탕 먹이러 한 게 발각됐을 때 그가 손찌검을 안 하고 심지어는 진심으로 화를 내는 걸 본 이후부터였다.“그런 건 왜 물어? 아내를 버린 사람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사람이지.”박예찬은 동생이 정이 많아 그저 금세 다른 사람에게 정이 들어버린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박윤우는 그게 아니었다.“형, 나는 아빠가 우리 엄마를 좋아하는 것 같아.”그 말에 박예찬이 멈칫했다.“엄마 생일날 나
두원 별장.집으로 돌아온 유남준은 정원이 예쁘게 꾸며진 걸 볼 수 있었다. 재채기도 적게 나는 것이 이한석이 일을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박민정은 오늘 유남준이 이지원을 데려와 정원을 구경시켜줄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그는 혼자였다.“밥은 먹었어?”유남준은 홀로 거실 소파에 앉아 뭔가 끄적거리는 박민정을 보며 물었다.“네, 먹었어요.”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유남준이 고개를 돌려 보니 주방 쪽은 요리한 흔적 하나 없이 매우 깔끔했다.“오늘 안 들어오실 줄 알고 남준 씨 밥은 주문 안 했어요.”전에는 유남준이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항상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렸다. 하지만 유남준은 거의 젓가락조차 들지 않았다.박민정은 해외에서 박예찬과 박윤우를 임신한 후 일에 매진해야 했기에 식사는 전부 은정숙에게 맡겼었다.그리고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지고지순한 아내 노릇을 할 생각이 없었다.유남준은 그녀의 표정에 스친 감정을 읽어내지 못했다.“나도 먹고 왔어.”거짓말이었다.그는 오늘 박민정이 준비해 둔 저녁밥을 먹으려고 이제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빨리 들어온 것이었다.“다행이네요. 참, 하랑이가 감기에 걸려서 이따 병원에 같이 가주기로 했어요.”물론 이건 거짓말이고 병원은 조하랑의 신분으로 지금 임신할 수 있는 몸인지를 체크하기 위해 가는 것이었다.유남준은 이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박민정이 차를 타고 병원에 도착해 보니 조하랑은 진작에 도착해있었다.“접수는 내가 했으니까 바로 들어가면 돼.”“응, 알겠어.”박민정은 조하랑과 함께 병원으로 들어가 검사를 받았다.한 시간 후 결과를 받아보니 요 며칠은 임신 최적기라고 한다.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 조하랑은 가방에서 약 같은 것을 그녀에게 건넸다.“자, 이거 받아.”박민정이 궁금해서 보니 그건 남자들의 정력에 좋은 약품이었다.“필요 없어.”박민정이 기겁하며 거절했다.“뭐가 필요 없어. 술에 취하면 제대로 못 하는 남자들도 많아. 혹시 모를
방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급히 안으로 들어선 김인우는 침대 위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조하랑을 발견했다.심장이 철렁한 김인우는 빠른 걸음으로 조하랑에게 다가갔다.“하랑아!”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깨어난 조하랑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김인우의 얼굴이 가까이서 보였다.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내가 왜 여기 있지?”말을 마친 조하랑의 머릿속에는 불쾌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더니 이내 온몸을 감싸며 방 한구석으로 자신의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다 꺼져, 꺼져! 아무도 오지 마, 오지 말라고!”그 모습을 보며 김인우는 조하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믿고 싶지 않았다.“하랑아,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김인우는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조하랑은 대답하기 싫다는 듯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나가! 나가라고!”박민정은 놀란 듯한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조석천이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하랑아, 아빠 여기 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빠한테 얼른 얘기해 보렴. 설마 강연우 그 짐승 새끼가 그런 거니?”그는 조하랑에게 몹쓸 짓을 저지른 사람이 강연우라고 생각했다.조하랑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고 마음은 더욱 답답했다.그녀는 아무것도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나가! 다 나가라고!”김인우는 조하랑의 상태를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일단 우리 다 나갑시다. 혼자 진정할 시간을 줘야 할 것 같아요.”그 말에 주위 사람들도 모두 방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리를 뜨면서도 조하랑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함부로 추측하고 있었다.조하랑의 상태를 확인한 박민정 역시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민정아, 넌 남아줘.”조하랑이 박민정을 불러세웠다.“알겠어.”박민정은 곧바로 대답했다.그렇게 방 안에는 박민정과 조하랑 두 사람만 남게
조석천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럼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하랑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요. 하랑이 여기 있나요? 얘기 좀 하고 싶은데요.”강연우가 대답했다.오자마자 자신의 딸을 찾는 강연우의 모습에 조석천은 또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감히 내 딸을 찾아와? 아까까지는 잊고 있었는데, 설마 네가 우리 딸 납치한 거 아니니? 그런 게 아니고서야 왜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건데? 너 김씨 가문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는 거야?”그 말을 들은 강연우는 조하랑이 이곳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오늘은 조하랑의 결혼식 날인데, 대체 그녀는 어디로 간 걸까?강연우는 더 조석천과 말을 섞어 봤자 아무 소용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곧장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 순간, 조석천이 강연우를 붙잡았다.“잠깐, 여기서 나갈 거면 당장 우리 하랑이 내놓고 나가!”“하랑이가 저한테 있었다면, 제가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하랑이를 찾아왔겠어요?”강연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뒤늦게 강연우의 말을 이해한 조석천이 그를 놓아주었다.강연우가 떠나는 모습을 보던 조석천은 그가 예전의 힘없고 겁 많던 소년에 비해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조석천은 어딘가 모르게 후회되었다.만약 처음부터 그를 조하랑과 사귈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두 사람의 아이는 지금의 박예찬보다 더 나이가 많을 것이었다.게다가 지금의 강연우도 예전의 그 촌놈이 아니라 능력 있는 남자 같아 보였다.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조석천은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강연우가 아무리 노력해도 김인우는 평생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며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그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결혼식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다. 김인우의 집에서도 계속 준비 중일 테니 말이다....아침 일찍 조하랑의 집을 찾아갔던 박민정도 조하랑을 만나지 못했다.그녀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만날 수 없었다 해도
그 말에 강연우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저를 찾아온 적은 없어요. 저는 지금 집에 있고요. 혹시 무슨 일 있나요?”김인우는 그 말에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무것도 아닙니다.”말을 마친 김인우는 또 전화를 끊어버렸다.강연우는 그렇게 끊겨버린 전화에 휴대폰만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느새 자신의 뒤로 다가와 서 있는 황예지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황예지의 안색은 오늘따라 창백해 보였다.“연우야, 아직 안 늦었어. 난 다 알아. 하랑 씨도 널 잊지 않았다는 걸. 네가 먼저 찾아가서 모든 일을 설명한다면, 하랑 씨는 분명 네 곁으로 다시 돌아올 거야.”그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강연우가 몸을 돌려 황예지를 바라보았다.“왜 또 그 얘기야?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난 이미 너랑 결혼했고, 다른 여자는 쳐다도 보고 싶지 않다고.”그 말을 들은 황예지는 기뻐해야 할 것 같았지만 마음은 어딘가 묘하게 서운하면서도 아팠다.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나도 알아. 하지만 네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 나한테 먼저 얘기해 줘야 해.”그녀는 강연우가 자신에게 맞춰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여자라면 어떠한 의리나 은혜 때문에 해주는 결혼이 아닌 진심 어린 사랑 때문에 하는 결혼을 원하기 마련이다.황예지 역시 그날 밤, 침대 위에 누워 여기저기 뒤척이다가 한숨도 자지 못했다.오늘따라 이상한 황예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강연우는 혼자 발코니로 나가 담배를 한 대씩 꺼내 피우며 김인우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조하랑이 사라진 건가?설마 정말 김인우와 결혼하는 걸 후회하는 걸까?강연우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했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끝에 강연우는 결국 외투를 챙겼다.문을 나서기 전, 그는 황예지를 보며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금방 돌아올 거야.”황예지는 그런 강연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어 대답하기도 전에 현관문이 닫혀 버렸다.“연우야, 나 집에 가고 싶어.”황예
하지만 이지원이 예상 못 했던 것은 그 노인네가 자신보다 못한 소녀를 며느리로 맞는다는 사실이었다.다가 더 충격적인 것은 김인우도 그 결혼을 받았다는 것이다.조하랑을 보는 이지원의 눈빛은 질투로 가득 찼다.침대 위의 조하랑은 그제야 천천히 의식을 되찾는 듯했다.눈을 뜬 그녀는 극심한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으며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낯선 주위를 둘러보았다.“여기가 어디지?”조하랑이 눈을 뜨자 이지원은 곧장 방에서 걸어 나왔다.적어도 이지원은 지금 자신에게 도주할 여지를 남겨두어야 했다. 조하랑에게 그녀를 납치한 사람이 이지원이라는 사실을 절대 들켜서는 안 됐다. 만약 조하랑이 김인우에게 얘기라도 한다면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오늘 밤, 저 여자는 당신들 거야. 그러니까 잘 즐기도록 해. 내 호의 무시하지 말고.”이지원은 건장한 남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녀의 말에 남자들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지원 씨.”“앞으로 나 지원이라고 부르지 마. 차라리 아가씨라고만 불러.”이지원이 말했다.“알겠습니다, 아가씨.”이지원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한편, 병원에서는 박민정이 치료 중인 박윤우의 옆에 있어 주었다.아직 조하랑이 실종됐다는 사실을 모르던 박민정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박민정은 김인우에게서 조하랑이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되었다.그렇게 박민정 역시 더는 조하랑에게 연락을 하진 않고 그녀의 생각이 다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엄마, 나 물 마시고 싶어요.”박윤우가 입을 열었다.“알겠어, 엄마가 따라줄게.”박민정은 몸을 일으켜 물을 받으러 걸음을 옮겼다.빅윤우는 곧 있을 수술을 받기 위해 머리를 깔끔하게 민 상태였다.아이는 온몸이 아파왔지만 박민정을 굳이 걱정시키기는 싫었던 탓에 묵묵히 참고만 있었다.박민정이 물을 받아왔지만 박윤우는 한 모금만 마신 후 또다시 재촉하기 시작했다.“엄마, 얼른 가서 쉬어요
조하랑은 종일 그저 멍하니 호텔에만 있으며 결혼 준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다음날 오후가 되자 그녀는 김인우에게 자신의 의견을 얘기해주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방 문을 두드렸다.조하랑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슬리퍼를 끌며 문을 열어주러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문이 열린 그 순간,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나타나 그녀의 코와 입을 손수건으로 막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조하랑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김인우의 집.김인우는 오늘 종일 마음이 복잡했다. 그는 초조한 심경으로 조하랑의 결정을 기다렸지만, 오후 5시가 돼도, 6시가 돼도 울리지 않는 휴대폰에 마음은 점점 불안해져만 갔다.결국, 참지 못한 김인우가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생각 정리 끝났어요?”하지만 1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김인우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원하면 원한다, 싫으면 싫다는 의사 표현조차 똑바로 하지 않는 조하랑을 원망했다.마음 같아서는 조하랑의 앞으로 순간이동을 해서라도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초조하게 자신의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김인우를 바라보던 박예찬은 덩달아 함께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아저씨, 가만히 좀 앉아계시면 안 돼요?”그 말에 김인우는 곧장 걸음을 멈춘 채 박예찬을 바라보며 말했다.“하랑 이모한테 전화 좀 해줄래?”박예찬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스마트워치를 이용해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아이의 스마트워치에서도 들려온 건 그저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이었다.“왜 아직도 전화기가 꺼져 있는 거지?”김인우가 미간을 찡그린 채 말했다.그때, 김훈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솔직히 말해 봐. 너 하랑이한테 뭐 잘못한 거 있지?”김인우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제가 감히 어떻게 그래요.”“그럼 하랑이가 왜 갑자기 네 연락을 안 받겠어? 휴대폰도 꺼져 있고 말이야. 내일이 당장 결혼식인데.”김훈은 김인우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어갔다.“솔직하게 말해. 너 밖에서
조하랑은 김인우를 그저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인우 씨...”김인우는 조하랑이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내일까지 고민할 시간 더 줄게요. 하지만 그다음 날에 갑자기 결혼 취소해서 나한테 망신을 준다면, 나도 하랑 씨 용서 안 해줄 거예요.”김인우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김인우가 진주시에서 그 어떤 여자를 못 만나봤을까. 적어도 진주시 90%의 여자들은 그와 결혼하고 싶어 할 것이다.만약 조하랑이 결혼식 당일 갑자기 결혼을 취소해 버린다면 그는 조하랑을 절대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김인우의 말에 조하랑은 한동안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자신이 사랑하던 강연우는 이미 유부남이었고, 황예지도 아주 좋은 여자였다.“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조하랑이 말했다.핸들을 잡고 있던 김인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이미 결혼을 확정 지은 조하랑이 이제 와서 결혼식을 취소할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그런데도 아직까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그녀는 김인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단순한 예비 후보 취급을 받은 김인우의 마음이 불쾌했다.“집으로 데려다줄까요?”이틀 뒤면 결혼식이었던 탓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집으로 갈 수 없었다. 결혼 절차라는 것은 지켜야 하는 법이었으니까.“싫어요.”조하랑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거절했다.“근처에 있는 아무 호텔로 데려다주세요.”“그래요.”김인우가 대답했다.그는 시설이 좋은 호텔 하나를 찾아 조하랑을 내려주었다.원래였다면 조하랑을 직접 방까지 데려다줬을 테지만 이미 빈정이 상해버린 탓에 김인우는 그녀를 혼자 호텔로 들어가게 두었다.그녀를 호텔까지 데려다준 김인우는 곧장 조석천에게 안부를 전했다.호텔 방 안으로 들어온 조하랑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지만 따로 하소연할 사람도 없었다.결국,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박민정에게 연락했다.마침 휴식을 취하려던 박민정은 조하랑에게서 결려온 전화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박
“하랑아, 왜 아무 말도 안 해? 제발 아빠 좀 놀라게 하지 마. 난 정말 널 위해서 그랬던 거라고. 지금 아빠는 먹고사는 데 아무 문제 없고, 딱히 바라는 것도 없어. 굳이 너를 재벌 집에 시집 보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하지만 네 미래도 생각해야지. 아무 걱정 없이, 특히 돈 걱정 없이 살기 위해서는 재벌 집으로 들어가는 게 최고야.”“너도 알잖아. 우리 집은 그냥 졸부일 뿐이야. 돈 없을 때를 생각해 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릴 무시했는지. 엄마랑 아빠는 네가 그렇게 살길 원하지 않아.”조석천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그의 아내가 세상을 뜨게 된 것도 치료비가 부족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은 탓에 조석천은 가난할지도 모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항상 갖고 있었다. 자신의 딸이 혹시라도 가난한 남자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을까 무서웠다.그 남자가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단순한 도박에 불과했으니 말이다.조하랑 역시 아버지가 이런 짓을 한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아버지의 행동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돌발행동 같은 건 할 생각 없으니까요. 지금은 조금 혼자 있고 싶네요.”말을 마친 조하랑은 전화를 끊었다.갑자기 끊긴 전화에 조석천은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조하랑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방법이 없었던 그는 결국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혼자 거리를 배회하던 조하랑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밀려오는 죄책감에 파묻혀 있었다. 눈앞에 강연우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는지, 왜 본인을 정말 쓰레기로 여기게 했는지.얼마나 걸었을까. 돌아가기 싫었던 조하랑은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혹시라도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올까 봐 휴대폰 전원을 꺼두었고, 아직도 다시 켤 용기가 나지 않았고, 연락
그 말에 강연우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그런 말은 왜 한 거야?”고개를 잠시 떨어뜨린 황예지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우리 내일 이혼하자.”또 이혼 그 소리.강연우의 목울대가 일렁였다.“예지야, 내가 얘기했을 텐데. 죽음은 있어도 이혼은 절대 없을 거라고.”황예지가 불안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강연우는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걱정하지 마. 난 정말 하랑이랑 다시 시작할 생각이 없어. 우리 둘이 잘살아가면 돼. 내가 너 잘 챙겨줄게.”말을 마친 강연우는 황예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어떤 사람이나 일은 한 번 놓친 순간, 다시는 손에 넣을 수 없게 된다.황예지는 공허하고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강연우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어쩌면 강연우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계속 자신을 챙겨주며 살겠다는 말을 할까?...조하랑은 넋 나간 사람처럼 정처 없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빠.”딸이 재벌 집에 시집간다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던 조석천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 우리 딸?”“그때, 아빠는 정말 강연우를 죽일 생각이셨어요?”그 말에 조석천의 심장이 철렁했다.이미 결혼까지 한 강연우가 그 일을 딸에게 얘기해줄 리 없다고 굳게 믿어왔건만, 결국...조하랑이 재벌 집에 시집간다는 것을 안 강연우가 중간에서 뭐라도 뜯어먹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하랑아, 아빠 말 좀 들어 봐. 강연우 그 쓰레기 자식은 신경 안 써도 돼,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이야. 지금은 김인우랑 할 결혼식에만 집중해.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니까.”그는 애써 말을 돌렸다.조석천의 말에 조하랑의 눈빛은 한층 더 공허해졌다.“아빠, 일단 대답부터 해주실래요? 왜 강연우가 갑자기 실종됐었는지, 그리고 다시 나타난 강연우가 왜 갑자기
휴대폰을 쥐고 있던 조하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강연우의 결혼식에 참석하긴 했어도 그와 결혼하는 신부가 누구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생각은 없었다.저도 모르게 본인과 신부를 픽하면 시도 때도 없이 그 기억이 불쑥 나타나 자신을 괴롭힐까 봐 두려웠다.자신을 강연우의 아내라고 소개하는 황예지를 보며 조하랑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왜 저를 만나고 싶으셨던 건데요?”조하랑이 겨우 입을 뗐다.“하랑 씨와 연우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연우 대신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 될까요?”황예지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내일모레가 당장 결혼식인 상황에 조하랑은 그녀의 부탁을 거절해야만 했다. 하지만 너무 간절하면서도 진지한 황예지의 목소리에 조하랑은 홀린 듯 대답했다.“알겠어요.”두 사람의 약속 장소는 한 평범한 식당이었다.조하랑은 여리여리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의 황예지를 바라보며 자신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안녕하세요.”조하랑은 먼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황예지도 그런 조하랑의 인사에 함께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고, 두 사람은 마주 본 상태로 한 테이블 앞에 착석했다.“저한테 하실 말씀이 뭐죠?”조하랑은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황예지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병원 진단서를 꺼내 조하랑의 앞에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진단서에는 황예지의 남은 수명이 3년밖에 안 된다는 검사 결과가 적혀있었다.조하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단서를 바라보았다.젊은 나이에 이렇게나 큰 병에 걸렸다는 것이 안쓰러웠다.조하랑이 곧장 입을 열었다.“걱정 마요, 저는 연우랑 아무 사이 아니니까. 저도 곧 결혼할 예정이에요.”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황예지 괜한 오해를 하는 일이 없길 바라서였다.황예지는 그런 조하랑을 보며 그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