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지시를 내렸는지 유남준조차도 그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교통사고를 당한 박민정이 기분 좋게 몸을 회복했으면 해서일까? 어쩌면 과거의 죄책감과 며칠 전 고소를 취하하라고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이런 식으로 달래려는 것일 수도 있다.이한석은 갑작스러운 지시에 의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오늘 당장 말씀이십니까? 어떤 꽃으로 하면 될까요? 손님맞이용이신가요?”유남준은 창문 가까이에 다가가 밖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알아서 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네, 알겠습니다.”두원 별장의 정원 설계를 알고 있는 이한석은 곧장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꽃을 구하기 시작했다.늦은 저녁, 여러 대의 트럭이 두원 별장 안으로 줄지어 들어왔고 작업복을 입은 정원사들은 차에서 내려 꽃을 심기 시작했다. 유남준이 어떤 꽃인지를 얘기해주지 않은 바람에 현재 진주시에 있는 꽃들은 전부 다 공수해왔다.늦은 시각이었던지라 박민정은 그들이 작업하고 있을 때 꿈나라에 있었다.다음 날 아침.잠에서 깬 박민정은 베란다로 향했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하룻밤 사이에 정원에 꽃밭이 펼쳐져 있었으니까.볼을 꼬집지 않았더라면 아직 꿈속인 줄 착각했을 것이다.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보니 유남준은 벌써 출근하고 없었다.거실을 지나쳐 정원으로 가보자 거기에는 어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 펼쳐졌고 그녀는 놀라움에 더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한편, 유남준은 회사로 가는 차 안에서 끊임없이 재채기했다.꽃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다.오늘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부터 그는 줄곧 이 상태였다. 가벼운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그에게 정원을 가득 채운 꽃들은 그야말로 고역이나 다름없었다.“대표님, 괜찮으세요? 병원으로 모실까요?”운전기사가 룸 미러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오늘 아침 유남준을 데리러 갔을 때 운전기사조차 별장의 풍경에 깜짝 놀랐다. 이건 단순히 정원을 꾸민 것이 아
박민정은 조하랑과 얘기를 조금 더 나눈 후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더는 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작업실로 가 연주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쉬이 진정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다시 작업실을 나와 밖으로 향했다.정원 쪽으로 가보니 거기에는 백발에 턱시도를 입은 이한석이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이한석은 정원사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다 어느샌가 정원으로 다가온 박민정을 보고는 꽤 놀란 얼굴을 했다.하지만 곧바로 다시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와 정원사들에게 일을 마저 분부한 다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저희가 혹시 방해된 건가요?”어쩌다 예의 있게 얘기하나 싶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박민정 씨는 청력이 좋지 않아 이 정도 공사로 시끄러워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헌데 박민정 씨는 이 시간에 대체 왜 아직도 집에 계신지요? 상류층 가문 아가씨들과 사모님들은 오전 10시가 다 되어가는 이 시간에 태평하게 집에서 늘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혹시 할 일이 없으셔서 이러시는 거라면 저희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근처 산책이라도 하는 게 어떠신지요?”이한석은 예전에 항상 그녀에게 유씨 가문 안주인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 엄격하게 교육해 왔다. 그리고 박민정은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위한다고 생각해 순순히 그의 말을 듣곤 했었다.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그가 그의 딸 이혜림과 나눴던 대화를 들어버리고는 그를 향한 호감도 싹 사라져버렸다.“촌구석에서 자란 계집이라 그런지 내가 뭐라고 하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더라고.”박민정은 그제야 이한석은 그저 자신을 교육하고 가르치는 데 우월감을 느꼈던 것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유남준의 법적 부인이자 유씨 가문의 명실상부 며느리를 일개 하인이 교육한다는 게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이 집사님이 하시는 말에 동의할 수 없네요. 저는 집사님이 방금 얘기한 상류층 가문 아가씨도 아니고 사모님도 아니에요. 그러니 이 집사님이 정해놓은 수준에 달할 필요도 없겠죠.”오
지금은 한창 아이들이 하원 할 시간이라 김인우는 유치원 앞에서 대기하기로 했다.유치원 앞에 도착한 후 그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입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 헤맨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유치원 앞에는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들도 많았다. 하여 그는 험악하게 생긴 경호원보다는 자신이 직접 아이를 잡으러 가기로 했다.“너희들은 혹시라도 애가 도망가지 않게 주변을 막고 있어.”아이가 똑똑하다는 걸 알고 있는 그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호원들까지 주위에 배치했다.그 시각 박예찬은 자신을 데리러 올 차량을 기다리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김인우의 무서운 얼굴을 발견해버렸다.“...”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온 거지?박예찬은 황급히 아이들 틈에 숨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너 뭐해?”박예찬은 김인우를 향해 손짓하며 유지훈에게 얘기했다.“너 데리러 오는 사람 바뀐 것 같은데 빨리 가봐.”유지훈은 박예찬의 손짓을 따라 김인우를 발견하고는 조금 놀란 듯 말했다.“어, 삼촌 친구네? 나 데리러 왔나 보다. 그럼 난 가볼게, 안녕.”김인우는 박예찬이 아이들 틈에 섞여 숨으려는 것을 보고 얼른 달려가려고 했는데 그때 누군가에 의해 다리가 묶여버렸다.“인우 삼촌.”김인우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유지훈은 유씨 가문의 장손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는 아이이다.“지훈이네. 그래, 무슨 일이야?”유지훈이 애써 다정한 얼굴로 물었다.“어? 삼촌 나 데리러 온 거 아니에요?”그러자 김인우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유씨 집안의 장손이라고는 하지만 김씨 가문까지 받들어 모셔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게다가 김인우는 아이를 싫어했다.“지훈이가 오해했네. 삼촌은 누구 찾으러 온 거야.”김인우가 자신을 밀어내며 오해라고 하자 유지훈은 조금 실망한 얼굴을 했다.아까 분명 자신을 데리러 온 거라고 박예찬이 말했으니까.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하기도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몰려들기 시작하자 김인우는 황급히 자리를 피해 다시 차에 다시 올라탔다.한편 박예찬은 유치원 안쪽 구석에 숨어 김인우의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그가 차에 올라탄 것까지는 좋았지만 여전히 자리를 떠나려는 생각은 없어 보이자 박예찬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유치원까지 찾으러 오다니 참으로 유치한 어른이 아닐 수 없다. 박예찬은 아직 김인우가 자신을 아들로 착각해서 찾아온 것은 모르고 있다.그렇게 한참을 구석에 숨어 어떻게 이 상황을 타파해야 할지 생각을 하던 차에 마침 워치폰이 울렸다. 조하랑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이모!”“너 이 녀석 지금 어디야? 어디 있길래 코빼기도 안 보여?”조하랑은 유치원 입구 앞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박예찬은 아까까지 주변을 서성이던 경호원들이 전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잽싸게 달려갔다.“이모, 나 여기 있어.”조하랑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왜 거기 있었어? 이모가 한참 찾았잖아.”“그게 실은... 저번에 봤던 아저씨가 찾아왔어...”박예찬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차량을 가리켰다.차 안에 있던 김인우는 미간을 치켜세우더니 곧바로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해.”하지만 이곳은 아직 하원하는 아이들로 북적였기에 함부로 시동을 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체되자 청순한 얼굴의 여자가 하이힐을 신은 채 씩씩거리며 다가왔다.그녀는 손을 창문에 갖다 대고는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김인우 씨 이게 지금 뭐 하시는 거죠?”김인우는 화부터 내는 그녀를 향해 순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렸다.“다 큰 어른이 꼭 어린애를 이겨 먹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경고하는데 다음번에 또다시 이런 식으로 찾아오면 그때는 제 아들을 괴롭히고 스토킹한 죄로 경찰에 신고해 버릴 줄 아세요!”조하랑은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김인우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다시 박예찬에게로 걸어갔다.박예찬은 조하랑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차로 향하다가 김인우 쪽을
고영란은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그때 옆에 있던 비서에게 얼마 전 조사를 의뢰했던 유남준의 최근 행동에 관한 보고 문자가 왔다.“유남준 대표님께서 현재 진주시에서 아이 한 명을 키우고 계신답니다. 키운 지는 벌써 보름 정도 됐다고 하고요.”...박예찬은 집으로 돌아간 후 요즘은 특별히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윤우가 들켜버린 마당에 자신마저 들켜버리면 안 되니까.아이는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이리저리 두드렸다. 그러다 얼마 안 가 곧바로 박윤우와 연결이 됐다.어젯밤 정림원의 시스템을 몰래 뚫어놓아 박윤우와 연락할 수 있게 된 것이다.유남준은 그때 박윤우의 워치폰만 뺏어갔을 뿐 아이가 가지고 있던 다른 미니 통신 기기는 눈치채지 못했다.박윤우는 병상에 누워있다가 작은 기기에 불이 들어오는 걸 보고 다급하게 귀 쪽으로 가져다 댔다.“형.”“윤우야, 괜찮아?”박예찬이 물었다.“응, 괜찮아. 나 돌봐주는 사람도 많고 내가 원하는 건 다 해줘.”박윤우는 검은 하늘을 쳐다봤다.만약 자신이 아프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전처럼 가족끼리 평온하게 살았을 것이다.“그럼 됐어.”박예찬은 혹시라도 박윤우가 슬퍼하거나 울고 있었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에 그칠 수밖에 없다. 아이는 아직 어리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으니까.“형,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뭔데?”“우리 아빠 정말 나쁜 사람이야?”박윤우에게 이런 생각이 든 건 유남준을 골탕 먹이러 한 게 발각됐을 때 그가 손찌검을 안 하고 심지어는 진심으로 화를 내는 걸 본 이후부터였다.“그런 건 왜 물어? 아내를 버린 사람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사람이지.”박예찬은 동생이 정이 많아 그저 금세 다른 사람에게 정이 들어버린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박윤우는 그게 아니었다.“형, 나는 아빠가 우리 엄마를 좋아하는 것 같아.”그 말에 박예찬이 멈칫했다.“엄마 생일날 나
두원 별장.집으로 돌아온 유남준은 정원이 예쁘게 꾸며진 걸 볼 수 있었다. 재채기도 적게 나는 것이 이한석이 일을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박민정은 오늘 유남준이 이지원을 데려와 정원을 구경시켜줄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그는 혼자였다.“밥은 먹었어?”유남준은 홀로 거실 소파에 앉아 뭔가 끄적거리는 박민정을 보며 물었다.“네, 먹었어요.”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유남준이 고개를 돌려 보니 주방 쪽은 요리한 흔적 하나 없이 매우 깔끔했다.“오늘 안 들어오실 줄 알고 남준 씨 밥은 주문 안 했어요.”전에는 유남준이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항상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렸다. 하지만 유남준은 거의 젓가락조차 들지 않았다.박민정은 해외에서 박예찬과 박윤우를 임신한 후 일에 매진해야 했기에 식사는 전부 은정숙에게 맡겼었다.그리고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지고지순한 아내 노릇을 할 생각이 없었다.유남준은 그녀의 표정에 스친 감정을 읽어내지 못했다.“나도 먹고 왔어.”거짓말이었다.그는 오늘 박민정이 준비해 둔 저녁밥을 먹으려고 이제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빨리 들어온 것이었다.“다행이네요. 참, 하랑이가 감기에 걸려서 이따 병원에 같이 가주기로 했어요.”물론 이건 거짓말이고 병원은 조하랑의 신분으로 지금 임신할 수 있는 몸인지를 체크하기 위해 가는 것이었다.유남준은 이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박민정이 차를 타고 병원에 도착해 보니 조하랑은 진작에 도착해있었다.“접수는 내가 했으니까 바로 들어가면 돼.”“응, 알겠어.”박민정은 조하랑과 함께 병원으로 들어가 검사를 받았다.한 시간 후 결과를 받아보니 요 며칠은 임신 최적기라고 한다.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 조하랑은 가방에서 약 같은 것을 그녀에게 건넸다.“자, 이거 받아.”박민정이 궁금해서 보니 그건 남자들의 정력에 좋은 약품이었다.“필요 없어.”박민정이 기겁하며 거절했다.“뭐가 필요 없어. 술에 취하면 제대로 못 하는 남자들도 많아. 혹시 모를
고영란은 아이의 엄마가 변변치 않은 여자라 자기 아들이 여태껏 숨기고 있는 줄 알았다.유남준은 그 말에 머리가 지끈해졌다.만약 그게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해도 핏줄로 인정할 수 있을까?“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머니는 신경 쓰지 마세요.”그 말을 끝으로 유남준은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러고는 괜히 마음이 심란해져 휴대폰 앨범 폴더에 숨겨뒀던 사진 석 장을 꺼내 봤다.첫 번째 사진은 박민정이 임신했을 당시의 신체검사 보고서 사진이었고 두 번째 사진은 박윤우의 사진,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청순가련한 한 여성의 뒷모습이었다.이리저리 번갈아 보다 그의 시선은 결국 박윤우의 사진에 머물렀다.이 아이가 정말 연지석의 아들인 걸까?의심은 되지만 유전자 검사까지 할 용기는 없었다.만약 검사 결과 아이가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보고가 나오면 모든 희망이 다 무너져내릴 테니까.그럴 바에는 차라리 유전자 검사는 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한편 고영란은 갑자기 끊긴 전화에도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아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야겠어.”그녀는 비서에게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아 올 것을 명령했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꼭 찾아내야 했다.그녀가 손주에 집착하는 건 유남준에게 드디어 후계자가 생겨서일 뿐만이 아니라 유씨 가문 어르신들에게 그녀의 유전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몇십 년 전, 고영란은 쌍둥이를 임신했지만 낳고 보니 둘 중 작은 아이는 유전적 결함이 있었고 그 일 때문에 당시 시어머니에게 오랫동안 시달렸었다.그러다 유남준이 유씨 가문을 이어받으면서 드디어 당당하게 설 자리가 생긴 것이다.하지만 유남준과 박민정에게서는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이에 유씨 가문 사람들은 유남준에게 문제가 있을 것이라며 쉬쉬했다...유남준에게 문제가 있으면 결국 돌고 돌아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게 될 텐데 어떻게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볼 수 있을까.유남준은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박민정은 그에게 안긴 채로 가만히 굳어버렸다가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이건 진심이다.유남준은 박민정의 대답에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그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박민정이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느껴졌다.박민정은 지금이 바로 분위기를 끌어올릴 타이밍이라고 생각해 고개를 들어 유남준을 바라봤다. 그리고 발끝을 들어 그의 목에 입을 맞춘 다음 서서히 그의 입술을 포갰다.유남준이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 유혹은 거부하기 힘들었다. 그는 박민정의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 쥐더니 서서히 키스 주도권을 빼앗아갔다.지금 박민정이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건지는 몰라도 오늘 밤 유남준은 그녀를 갖기로 했다.박민정은 세차게 몰아치는 키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떼고 말했다.“나 조금 무서워서 그러는데 우리 술 좀 마실래요?”“그래.”촉촉하게 변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유남준은 자신의 욕망을 꾹 눌러 담았다.박민정은 가장 독한 술을 가져왔고 유남준의 술잔에 조하랑이 줬던 약을 풀었다. 그러고는 미리 술을 컵에 따라 그에게 건넸고 의심을 피하고자 자신도 술을 한잔 마셨다.“건배.”유남준은 그녀가 건넨 술을 남김없이 전부 마셔버렸다.박민정은 한 모금 하더니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에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앞으로 술은 와인으로 가져와. 이건 네가 마시기 힘들 테니까.”유남준은 아까 술 병을 힐끔 본 것만으로 그녀가 가지고 온 게 알코올 도수가 제일 센 술이라는 것을 알았다.와인은 상대적으로 알코올 도수가 세지 않아 여성들이 마시기에도 부담이 없다.“그럴게요.”박민정은 그 뒤로 그에게 술을 건네지 않았다. 괜히 더 권했다가 그의 의심이라도 사면 안 되니까. 게다가 방금 탄 약을 보면 아마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예상대로 유남준은 그 뒤로 혼자 두어 번 자작하더니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는 잠옷 단추를 거칠게 풀며 심호흡을 내쉬더니 눈 깜짝할 새
오늘 저녁은 학교에서 준비해 줬다.사실 물고기를 잡아서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했는데 다들 많이 잡지 못한 바람에 식사가 조금 부실했다.하여 저녁 식사 시간이 돌아오니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에너지 소모가 많았던 탓에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게 되었다.유지훈은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박예찬을 신경 썼다.그리고 내심 박예찬 주변에 친구가 많은 게 부러웠지만 이제 와서 그에게 붙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한편, 최현아는 오늘 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되어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 쪽을 바라보았는데 세 가족이 화기애애해 보이는 모습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피어올랐다.저녁 식사가 다 끝난 뒤 각자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최현아가 어느새 유남준의 곁에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남준 씨, 음식은 입에 잘 맞았나요? 제가 음식을 따로 싸 왔는데 괜찮으시면 좀 드실래요?”그러나 유남준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괜찮습니다.”어제랑 다르게 차가운 그의 태도 때문에 최현아는 순간 멍해졌다.분명 어제 자신이 땀을 닦아줘도 가만히 있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나 싶었다.“그래도 제가 남준 씨 형수인데 너무 체면 차릴 필요 없어요. 제가 금방 가지고 올게요.”최현아는 유남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빨리 음식 가지러 달려갔다.그저 유남준이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보고 오해할까 봐 철벽친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박예찬과 무료함을 달래려 잡초를 뽑고 있다가 무심결에 최현아와 유남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박예찬에게 물었다.“저 두 사람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박예찬은 박민정이 풀 뽑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열심히 같이 뽑다가 문득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유남준이 또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다.“엄마,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하나는 유남준의 좋은 시간을 방해할 것 같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괜히 박예찬이 가서 물어보면 마치 그
오후가 되니 날씨가 약간 흐려지기 시작했다.박민정네는 산언덕에 앉아 바람도 쐬고 구운 생선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박예찬은 특별히 물고기 한 마리를 남기더니 조동민에게 주며 말했다.“아마 오래 살지는 못할 거야.”그의 말에 조동민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예찬아, 고마워. 넌 참 착한 아이야.”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자기 아들이 너무 따뜻한 사람이라 앞으로도 친구 사귀는 건 문제없겠다고 생각되었다.“고작 고기 한 마리 가지고 뭘.”박예찬은 아직 칭찬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쑥스러워했다.조동민은 고맙기는 한데 오늘 발생했던 일 때문에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민정 이모, 혹시 오늘 일은 진짜로 제가 잘못한 걸까요?”어린아이의 세계는 그저 흑과 백으로 단조롭게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하여 당연히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자기더러 사과하라던 아버지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다.박민정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이모는 동민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넌 단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고 있었을 뿐, 유지훈이 먼저 잘못한 거지.”그녀의 말에 조동민은 더욱 억울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런데 저희 아빠는 왜 저더러 사과하라고 했을까요?”“그건 어른들의 세계에는 옳고 그름만이 있는 게 아니거든. 이건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이해가 될 거야.”조동민은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그녀에게 답했다.“저도 알 건 알아요. 저희 아빠는 지훈이네 엄마가 무서웠던 거예요. 저희 부모님은 항상 저에게 유지훈에게 잘 보여야 우리 집안 사업도 잘되고 나중에 돈도 많이 벌 거라고 습관처럼 말하셨어요.”그의 말에 박민정은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이렇게 어린아이가 그런 말 때문에 얼마나 부담감을 느꼈을까?’그녀는 어떻게 조동민을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 그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그러나 조동민은 고개를 들고 박민정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이모, 저 오늘부로
한가영은 한껏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박민정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리고 박민정이 한마디 하자마자 장연수도 빠르게 거들었다.“최 회장님, 다 아이들 일이고 누구도 피해 본 사람이 없는데 이쯤 하시죠.”몇몇 학부모들도 최현아를 말리기 시작했다.“아이가 이 정도로 우는 걸 보면 분명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겁니다.”“맞아요.”최현아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어두운 얼굴로 가만히 서서 생각해 보았는데 보는 눈이 이리도 많은데 계속 아이를 혼내기도 뭐한 것 같았다.“그럼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내겠는데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겁니다.”조민혁은 심장이 다 타들어 갔다가 겨우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넸다.“역시나 최 회장님은 아량이 깊으십니다.”한가영은 일이 이대로 마무리되자 단번에 조민혁을 옆으로 밀쳤다.“어떻게 여동생보다도 간이 작아요? 이런 사람이랑 결혼한 제가 멍청이네요.”부모님이 자기 앞에서 다투기 시작하자 조동민은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자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박민정 덕분에 사건이 종료된 뒤 조동민은 박예찬과 놀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박민정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박민정은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어 조동민과 잠깐 통화하게 했다.조동민은 화면 속의 조하랑을 보자마자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터졌고 조하랑은 겨우 그를 달래서 울음이 그쳤다.“민정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아직 아이라 표현 능력이 제한되어 있어서 조하랑은 자기 조카가 뭔가 억울함을 당했다고는 느꼈어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하여 박민정은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조하랑에게 알려줬고 그녀는 듣자마자 불같은 화를 냈다.“최현아라는 사람 진짜 너무하네! 이렇게 어린아이더러 동급생 아이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시켰다고? 제정신으로 한 말인가 싶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 여자 가면을 벗겨버리는 건데!”조하랑은 씩씩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오빠는 진짜 쓸모없는 인간이라니까.
“지훈아, 우리 동민이가 먼저 때린 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리는 건 아니라고 봐.”조동민의 아버지 조민혁이 말했다.그리고 어머니 한가영도 다시 최현아에게 애원했다.“최 회장님, 작은 오해로 아이에게 무릎 꿇고 사과시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최현아는 고작 조 씨 가문 따위가 자신에게 반항하는 모습이 너무 기분이 언짢았다.또한 두 사람은 박민정의 친구이자 조하랑의 친척이라는 사실에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만약 사과할 수 없다면 법원에 고소해야겠네요.”말이 고소지, 분명 다른 방법으로 조씨 가문을 괴롭힐 게 뻔했다.그래도 한가영은 자기 아들이 이런 수모를 겪게 내버려둘 수 없어 재빨리 조동민을 품에 안았다.이 시각, 조동민은 아주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분명 잘못한 사람은 유지훈인데 왜 자신이 무릎을 당연하게 꿇어야 하는지, 왜 어른끼리 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엄마, 저는 잘못하게 없어요.”순간 목이 메어왔다.한가영도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그저 조민혁만 바라보았다.그러나 조민혁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씨 가문의 세력으로는 최씨 가문이나 유씨 가문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동민아, 미안하다!”괜히 아이 하나 때문에 큰 집안을 말아먹을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아들을 무릎 꿇리게 해야 했다.한가영은 순간 마음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자기 남편이 아무리 무능력하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고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구는 데도 가만히 있을 줄은 몰랐다.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 씨, 제발 저희를 좀 도와줘요. 민정 씨는 하랑 씨 친구잖아요. 하랑이는 동민이 고모예요.”조동민은 어렸을 적부터 조하랑을 이모라고 불렀는데 그러면 여태껏 잘못 부른 것이다.느닷없는 부탁에 박민정은 순간 눈앞의 아이가 조하랑의 조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다.조동민도 어느새 한껏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때 최현아의 떨떠름
온갖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을 확인해 보니 시아버지인 유석진이었고 재빨리 구석 쪽으로 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오늘 저녁에 호우주의보가 떴던데 남준이랑 민정이 모두 거기에 있어?”“네.”“그러면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주 자연스럽겠지?”유석진이 묻는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최현아는 다급히 그에게 설명했다.“여기에는 다른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도 계세요.”“난 그저 유남준이랑 박민정만 사라진다면 다른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이 없어.”유석진의 말대로 그는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최현아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더니 눈길은 자기도 모르게 유남준에게로 향했다.“알겠어요. 그럼 준비되면 알려주세요.”“그래. 너랑 지훈이는 꼭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네.”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 전화를 끊었다.그러다가 머릿속에서는 진짜로 유남준과 박민정이 사고 나는 걸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지 온갖 잡생각으로 뒤엉켜있었다.박민정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지만 몰래 마음을 두고 있는 유남준이 이대로 죽는 건 아쉬웠다.두통이 몰려오던 이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치 싸우고 있는 듯했다.이때 여교사 한 명이 최현아에게 다급히 달려왔다.“지훈이 어머님, 빨리 가보셔야겠어요. 지훈이가 다른 아이랑 지금 싸움 났거든요.”이건 선생님들이 관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워낙 유지훈의 부모님이 극성이라는 소문이 있어 감히 먼저 말리지 못했다.또한 유씨 가문의 세력만 봐도 선생님들 쪽에서 밉보이는 행동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처지였다.“누가 감히 내 아들을 때려?”최현아가 빠르게 싸움 현장에 달려와 보니 유지훈과 조하랑의 조카인 조동민이 한창 주먹다짐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훈은 조동민보다 덩치가 한참 작았기에 전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내 물고기 당장 물어내! 우리 아빠가 직접 잡은 물고기인데 물어내라고!”
햇빛 아래서 그의 덩치는 유난히 우람해 보였는데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웬만한 부잣집 도련님들은 보통 이런건 모르지 않나? 그런데 왜 유남준은 개울에서 물고기 잡을 줄도 아는 거지?’이때, 마침 유남준도 그들을 보고 있었고 물고기를 받으라고 손짓했다.그 모습에 박예찬은 한껏 흥분한 상태로 그를 향해 외쳤다.“여기로 던져주세요.”유남준은 그의 말대로 손바닥보다 더 큰 물고기를 박예찬에게 던져줬다. 필경 아직 어린아이라 물고기를 만져보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첫 번째로 잡은 물고기는 구덩이 하나를 파서 물을 채운 뒤 안에 넣었다.그 모습에 많은 어린이들이 구경하러 오게 되었다.“와! 예찬아, 이게 너희 아빠가 잡은 물고기야?”박예찬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어떤 여자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너희 아빠 참 대단하다. 우리 아빠는 아직 아무것도 못 잡았는데.”다른 아이들도 유남준을 칭찬하며 박예찬을 한껏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은 또 다른 물고기를 잡아 그에게 던져줬다.최현아 따라 땔감을 주우러 가려던 유지훈도 여느 사람들과 같이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엄마, 저도 가서 볼래요.”그의 말에 최현아도 말리지 않았다.“그래.”최현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유지훈은 재빨리 아이들이 몰린 쪽으로 달려가더니 자기 앞에 서 있는 아이를 밀쳐내고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나도 물고기 좀 보게 다들 비켜봐.”아이들은 이런 유지훈의 행동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내키지 않지만 저마다 자리를 비켜줬다.유지훈이 맨 앞에 다가가 두 마리의 물고기를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난 또 얼마나 대단한 물고기를 잡았다고. 저건 작아도 너무 작잖아? 우리 아빠가 돈 주고 산 물고기가 훨씬 크고 이뻐!”아이들이라 그런지 한창 비교하기 좋아하는 나이다.특히 유지훈은 모든 아이가 박예찬을 둘러싸고 칭찬하는 모습에 질투심을 느꼈다.그러나 아쉽
유남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어젯밤에 네가 계속 춥다고 잠꼬대해서 내가 안고 같이 잤어.”“네?”박민정은 그의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날씨도 이젠 어느 정도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더구나 어젯밤도 전혀 춥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때, 옆에 누워있던 박예찬이 침낭에서 일어나더니 박민정에게 말했다.“엄마, 나도 봤어. 어젯밤에 분명 엄마가 계속 춥다면서 안아달라고 했어.”박예찬의 진지한 말투가 전혀 거짓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자 순간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내가 그런 잠꼬대를 했다고? 나이 먹으면서 외로워졌나?’이때, 박예찬이 박민정 앞에 다가와 다시 말을 이었다.“엄마,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예전에도 두 사람이 자주 그렇게 잤으니까.”박민정은 그의 말에 더욱 부끄러워 어딘가 숨고 싶어졌다.“알았어.”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고개를 돌려 유남준에게 말했다.“그럼 어젯밤은 고마웠어요. 혹시 저 때문에 못 잔 건 아니죠?”유남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야. 내가 이따가 이불을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오늘 밤에는 우리 이불 덮고 자자.”“그럴 필요 없...”박민정이 단번에 거절하려는 순간 텐트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동서, 남준 씨, 깼어?”최현아였다.그녀의 물음에 박민정이 재빨리 답했다.“네. 무슨 일이에요?”“우리 지금 땔감 주어서 아이들한테 야외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짓는 방법을 가르치려 하는데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여기까지 직접 와서 물어보니 박민정은 거절하기 힘들었다.“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박민정이 침낭에서 나오자 유남준이 갑자기 그녀의 팔목을 잡으면서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이때,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최현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남준 씨, 동서가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이따 남자분들은 개울에서 낚시해야 해요.”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말없이 얼굴을 찡그렸다.박민정은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텐트 밖으로 나왔는데 최현아는 자
유남준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알겠어.”빠르게 저녁 시간이 돌아왔고 산기슭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유난히 별들이 잘 보였다.박민정과 박예찬은 같이 앉아 쉬고 있었고 유남준은 그들과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바비큐를 기다리고 있었다.고기 굽는 냄새가 순식간에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해 자기도 모르게 시선들이 이쪽으로 쏠리게 되었다.박민정은 살짝 난감한 듯 박예찬에게 말했다.“예찬아, 네가 다른 친구들이랑 학부모님들, 그리고 선생님들도 데리고 와서 같이 먹자고 해.”전날 밤, 그냥 가벼운 말로 야외에서 캠핑하면 바비큐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걸 유남준이 기억하고 준비해 줬다.“네.”박예찬이 엉덩이를 툭툭 털면서 일어서더니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그렇게 잠깐 박민정과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녀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틈에 유남준은 어느새 다 구운 고기를 접시에 담아 박민정에게 건넸다.“먹어.”“먼저 먹어요. 저는 제가 구워서 먹을게요.”박민정은 방금 그와 다퉜는데 그가 구워준 고기를 덥석 받아먹는 게 왠지 미안했다.하여 스스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유남준은 여전히 자신을 거절하는 그녀 때문에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난 고기를 원래 안 좋아해. 네가 안 먹으면 이건 그냥 버릴게.”살짝 화가 난 목소리였다.그의 말에 박민정은 어이없다는 듯이 재빨리 그의 접시를 받아서 들었다.“아깝게 왜 버려요. 고기 안 좋아하면 더 이상 굽지 말아요.”생각했던 대로 말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었다.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순간 질투가 많은 여느 여고생처럼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이제 자신이 구워주는 고기도 마다한다고 생각하니 유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러나 박민정은 이 상황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즐겁게 고기를 먹고 있다가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이 몰려오자 그들과 같이 식사 자리를 즐기기 시작했고 금세 유남준이라는 사람을 잊어버리게 되었다.그런 유남준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웃고
그러다가 최현아는 무심결에 유남준의 튼실한 팔뚝과 또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애초에 남준 씨랑 결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러다가 그에게 다가가 휴지를 꺼내며 물었다.“땀 흘렸네요. 제가 닦아 드릴까요?”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그의 땀을 닦아주려 손을 뻗었다.막 거절하려던 순간 박민정과 박예찬이 들꽃을 꺾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또다시 괘씸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가만히 서 있었다.순간 최현아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유남준때문에 심장이 또다시 나대기 시작했다.‘들은 소문에 의하면 유남준에게 첫사랑인 이지원을 제외하면 여자라고는 박민정뿐이라고 했는데?’‘역시나 남자들은 다 똑같네!’순간 최현아는 진작에 유남준에게 접근하지 않은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아니면 진작에 IM 대표의 사모님 자리를 꿰찼을 텐데.마음속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면서 손은 점점 바빠졌다.박민정과 박예찬은 마침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의 애틋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그러다가 박민정은 문득 머릿속에 기억 한 장면이 떠올랐는데 장소는 비슷했지만 유남준의 맞은편에는 최현아가 아닌 이지원이 서 있었다.순간 박민정은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유남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예찬도 화가 난 나머지 잡고 있던 박민정의 손을 놓고 재빨리 달려가 두 사람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물었다.“현아 이모, 지훈이가 급한 일이 있다고 이모 찾던데요?”그의 말에 최현아가 재빨리 되물었다.“무슨 급한 일?”“가서 직접 물어보세요.”박예찬의 말에 최현아는 두말없이 유지훈 쪽으로 향해 달려갔다.박민정은 어느새 유남준에게 다가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보통 이런 식으로 바람피웠나 보네요?”유남준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무덤덤해 보이는 박민정에게 다가가 되물었다.“화 안나?”“그저 유치해 보이는데요?”박민정의 입에서 들리는 유치하다는 말이 단번에 유남준의 가슴에 꽂혀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