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깜빡거리다 겨우 정신을 차린 박민정은 그제야 자신의 이마와 손 그리고 다리가 전부 붕대로 감겨있다는 걸 발견했다.창문 밖을 바라보니 새벽이라 그런지 하늘이 유독 까맣게 느껴졌다.병실을 둘러보다 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거기에는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지석아...”목소리가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지석은 바로 눈을 떴다.“깼어? 몸은 좀 어때? 괜찮아?”의사 말로는 그녀가 뒷좌석에 앉아 큰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고 했다.“기사님은...”“괜찮아. 다행히 빨리 병원으로 옮겨져서 무사해.”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이 기절할 뒤의 상황에 관해 물었다.연지석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기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사람을 데리고 현장에 도착해 임수호를 잡았다고 한다.“유남준 씨도 왔었어. 널 병원에 데려다준 거 그 사람이야.”연지석은 굳이 그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다만 유남준이 어떻게 그녀를 차에서 구했는지와 그가 이제까지 줄곧 그녀 곁에 있다가 반 시간 전에 막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서는 구태여 전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자신에게 경호원을 붙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사고 당시 같이 있었던 기사 역시 유남준 사람이라 그가 현장에 도착한 것이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그리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연지석이 유남준보다 더 빨리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것이고 자신을 차 안에서 구해준 사람도 당연히 연지석일 거라고 생각했다.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마음도 이기적으로 변하게 되는 걸까? 연지석은 그녀에게 사고 당시 구체적인 상황 설명은 하지 않았다.“남준 씨는 우리가 만나는 걸 싫어해. 너 여기 있는 거 그 사람은 알아?”연지석은 박민정이 뭘 걱정하는지 안다는 듯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유남준 씨도 알아.”몇 시간 전 박민정이 응급 수술에 들어간 후 두 남자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누구도 서로를 건드리지 않았다.그리고 급한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됐을 때 유남준은 경호
연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뜻인지 알겠어. 이번 일은 나한테 맡기고 너는 푹 쉬기나 해.”그는 곧바로 의사를 불러 박민정의 상태에 대해 보고를 들은 후 아무 문제가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유남준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연지석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김인우도 유남준을 따라 함께 병원으로 왔다.병실에 가보니 마침 간호사가 약을 갈아주고 있어 두 남자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병원 산책로에 도착했다.“갑자기 교통사고는 왜 난 거야? 뺑소니범은 잡았어?”김인우의 질문에 유남준은 사고가 있고 난 뒤 자신이 박민정을 병원에 데려온 사실부터 연지석이 뺑소니범을 잡은 사실까지 전부 다 얘기해주었다.그러자 김인우의 표정이 조금 달라지더니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했다.“너보다 먼저 뺑소니범을 잡은 걸 보면 보통 놈은 아닌데?”유남준은 그의 말에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했다.“나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아?”박민정이 사고 난 후 가장 먼저 연락했던 사람이 연지석이라는 걸 떠올린 듯싶다.그에 김인우가 몇 초간 반응이 없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남준아, 비교할 걸 해야지. 국내에서 네 힘이 어디까지 닿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걸 말이라고.”유남준은 그저 묵묵히 들을 뿐 기뻐하거나 만족스러워하지는 않았다.“박민정이 사고를 당하고 가장 먼저 연락한 사람이 바로 연지석이야.”김인우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곧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여자 다루는 데 도가 텄나 보지. 여자들은 조금만 공감해주고 달콤한 말로 속삭이면 금세 넘어오잖아. 지금 보니 얼굴도 약간 여자들 잘 홀릴 것처럼 생기긴 했어.”유남준이 쉽게 다가가지 못할 것 같은 냉 미남 얼굴이라면 연지석은 잘생긴 얼굴에 매혹적인 느낌이 더해져 비유하자면 꼭 여우 같은 느낌이었다.그리고 여자들은 높은 확률로 이러한 여우과 남자들의 사탕발림에 쉽게 넘어간다.물론 김인우는 이런 부류의 남자는 겉만 번지르르한 알맹이 없는 인간이라며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늦었는데 이만 가봐.”유남준
잠에서 깨어보니 이마는 땀으로 가득했고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그녀의 외침에 옆에 있는 보호자 방에서 유남준이 뛰쳐나왔다. 그러다 별다른 일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그녀에게 물었다.“왜 그래?”박민정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방금 죽는 꿈을 꿨어요.”비록 꿈이었지만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한편 죽음이라는 단어에 유남준은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고는 천천히 등을 토닥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꿈이야. 현실 아니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박민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이성을 되찾았고 고개를 들어 그에게 말했다.“고마워요.”그러고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마치 선을 그으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유남준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는 보호자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불을 걷더니 박민정의 곁에 누워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그의 행동에 박민정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내가 필요한 일이면 언제든지 얘기해도 돼.”그녀는 갑자기 목이 막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밖에는 거센 바람과 함께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무더웠던 날이 갑작스럽게 내린 비로 인해 조금은 시원해졌다.아까의 악몽으로 아직 불안함이 가시지 않던 그녀의 마음은 유남준이 곁에 있어 줌으로써 많이 괜찮아진 듯했다.3년이라는 결혼생활 동안 결벽증 탓에 실수로라도 안으려 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당신은 내가 아직도 싫어요?”그녀를 안고 있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박민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난 정말 당신을 모르겠어요...”유남준은 누군가가 목구멍을 막아놓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답답하고 복잡한 지금 이 마음을 그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웠다.박민정에게 특별한 감정이 생긴 건 아닐 것이다. 단지 누군가를 새롭게 알아가야 하는 일이 귀찮을 뿐이고 지금은 그저 그녀가 죽는 게 두려운 것뿐이다.한참을 그렇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유남준이
임수호는 아직 이지원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도 얼마 가지 않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임수호는 검은색 승용차 안에 앉아 풀숲에 잠복해 있는 경찰들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봤어? 그 여자는 애초에 당신을 구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 이제까지 당신을 이용하기만 했지.”임수호를 감시하던 경호원이 말했다. 그러자 임수호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그럴 리가 없어. 경찰들이 지원이 휴대폰을 도청한 게 분명해!”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를 보며 경호원은 혀를 끌끌 찼다. 그가 받은 임무는 임수호가 이지원의 실체를 확실히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꽤 시간이 걸릴 듯하다.임수호를 체포하러 왔던 경찰들은 당연하게도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리고 임수호가 금방 잡힐 줄 알았던 이지원은 상황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게 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두원 별장.퇴원 후 집에 도착한 박민정은 바로 조하랑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통화버튼을 누르니 박예찬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잘 지내고 있어?”박민정의 부탁으로 연지석은 조하랑과 아이들에게 교통사고에 관해서는 전하지 않았다. 하여 박예찬은 그녀의 사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엄마는 잘 지내고 있지.”박민정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예찬이는 유치원 잘 다니고 있었어? 하랑이 이모 힘들게 하지는 않았고?”“엄마, 나 이제 어린애 아니야.”박예찬은 고개를 돌려 잔뜩 어질러진 방 한가운데서 법률 서적을 외우고 있는 조하랑을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엄마는 아마 모를 것이다. 조하랑이 자신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조하랑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심지어 박예찬은 조하랑이 조금 바보 같다는 생각까지도 했다.그때 그 시선을 느꼈던 건지 조하랑이 법률 서적을 끌어안고 아이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역시...”바보 같다.박민정은 박예찬과 조금 더 대화한 다음 조하랑을 바꿔 달라고 했다.박예찬은 조하랑 앞으로
왜 이런 지시를 내렸는지 유남준조차도 그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교통사고를 당한 박민정이 기분 좋게 몸을 회복했으면 해서일까? 어쩌면 과거의 죄책감과 며칠 전 고소를 취하하라고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이런 식으로 달래려는 것일 수도 있다.이한석은 갑작스러운 지시에 의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오늘 당장 말씀이십니까? 어떤 꽃으로 하면 될까요? 손님맞이용이신가요?”유남준은 창문 가까이에 다가가 밖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알아서 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네, 알겠습니다.”두원 별장의 정원 설계를 알고 있는 이한석은 곧장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꽃을 구하기 시작했다.늦은 저녁, 여러 대의 트럭이 두원 별장 안으로 줄지어 들어왔고 작업복을 입은 정원사들은 차에서 내려 꽃을 심기 시작했다. 유남준이 어떤 꽃인지를 얘기해주지 않은 바람에 현재 진주시에 있는 꽃들은 전부 다 공수해왔다.늦은 시각이었던지라 박민정은 그들이 작업하고 있을 때 꿈나라에 있었다.다음 날 아침.잠에서 깬 박민정은 베란다로 향했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하룻밤 사이에 정원에 꽃밭이 펼쳐져 있었으니까.볼을 꼬집지 않았더라면 아직 꿈속인 줄 착각했을 것이다.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보니 유남준은 벌써 출근하고 없었다.거실을 지나쳐 정원으로 가보자 거기에는 어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 펼쳐졌고 그녀는 놀라움에 더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한편, 유남준은 회사로 가는 차 안에서 끊임없이 재채기했다.꽃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다.오늘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부터 그는 줄곧 이 상태였다. 가벼운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그에게 정원을 가득 채운 꽃들은 그야말로 고역이나 다름없었다.“대표님, 괜찮으세요? 병원으로 모실까요?”운전기사가 룸 미러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오늘 아침 유남준을 데리러 갔을 때 운전기사조차 별장의 풍경에 깜짝 놀랐다. 이건 단순히 정원을 꾸민 것이 아
박민정은 조하랑과 얘기를 조금 더 나눈 후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더는 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작업실로 가 연주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쉬이 진정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다시 작업실을 나와 밖으로 향했다.정원 쪽으로 가보니 거기에는 백발에 턱시도를 입은 이한석이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이한석은 정원사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다 어느샌가 정원으로 다가온 박민정을 보고는 꽤 놀란 얼굴을 했다.하지만 곧바로 다시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와 정원사들에게 일을 마저 분부한 다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저희가 혹시 방해된 건가요?”어쩌다 예의 있게 얘기하나 싶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박민정 씨는 청력이 좋지 않아 이 정도 공사로 시끄러워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헌데 박민정 씨는 이 시간에 대체 왜 아직도 집에 계신지요? 상류층 가문 아가씨들과 사모님들은 오전 10시가 다 되어가는 이 시간에 태평하게 집에서 늘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혹시 할 일이 없으셔서 이러시는 거라면 저희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근처 산책이라도 하는 게 어떠신지요?”이한석은 예전에 항상 그녀에게 유씨 가문 안주인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 엄격하게 교육해 왔다. 그리고 박민정은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위한다고 생각해 순순히 그의 말을 듣곤 했었다.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그가 그의 딸 이혜림과 나눴던 대화를 들어버리고는 그를 향한 호감도 싹 사라져버렸다.“촌구석에서 자란 계집이라 그런지 내가 뭐라고 하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더라고.”박민정은 그제야 이한석은 그저 자신을 교육하고 가르치는 데 우월감을 느꼈던 것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유남준의 법적 부인이자 유씨 가문의 명실상부 며느리를 일개 하인이 교육한다는 게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이 집사님이 하시는 말에 동의할 수 없네요. 저는 집사님이 방금 얘기한 상류층 가문 아가씨도 아니고 사모님도 아니에요. 그러니 이 집사님이 정해놓은 수준에 달할 필요도 없겠죠.”오
지금은 한창 아이들이 하원 할 시간이라 김인우는 유치원 앞에서 대기하기로 했다.유치원 앞에 도착한 후 그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입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 헤맨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유치원 앞에는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들도 많았다. 하여 그는 험악하게 생긴 경호원보다는 자신이 직접 아이를 잡으러 가기로 했다.“너희들은 혹시라도 애가 도망가지 않게 주변을 막고 있어.”아이가 똑똑하다는 걸 알고 있는 그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호원들까지 주위에 배치했다.그 시각 박예찬은 자신을 데리러 올 차량을 기다리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김인우의 무서운 얼굴을 발견해버렸다.“...”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온 거지?박예찬은 황급히 아이들 틈에 숨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너 뭐해?”박예찬은 김인우를 향해 손짓하며 유지훈에게 얘기했다.“너 데리러 오는 사람 바뀐 것 같은데 빨리 가봐.”유지훈은 박예찬의 손짓을 따라 김인우를 발견하고는 조금 놀란 듯 말했다.“어, 삼촌 친구네? 나 데리러 왔나 보다. 그럼 난 가볼게, 안녕.”김인우는 박예찬이 아이들 틈에 섞여 숨으려는 것을 보고 얼른 달려가려고 했는데 그때 누군가에 의해 다리가 묶여버렸다.“인우 삼촌.”김인우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유지훈은 유씨 가문의 장손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는 아이이다.“지훈이네. 그래, 무슨 일이야?”유지훈이 애써 다정한 얼굴로 물었다.“어? 삼촌 나 데리러 온 거 아니에요?”그러자 김인우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유씨 집안의 장손이라고는 하지만 김씨 가문까지 받들어 모셔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게다가 김인우는 아이를 싫어했다.“지훈이가 오해했네. 삼촌은 누구 찾으러 온 거야.”김인우가 자신을 밀어내며 오해라고 하자 유지훈은 조금 실망한 얼굴을 했다.아까 분명 자신을 데리러 온 거라고 박예찬이 말했으니까.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하기도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몰려들기 시작하자 김인우는 황급히 자리를 피해 다시 차에 다시 올라탔다.한편 박예찬은 유치원 안쪽 구석에 숨어 김인우의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그가 차에 올라탄 것까지는 좋았지만 여전히 자리를 떠나려는 생각은 없어 보이자 박예찬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유치원까지 찾으러 오다니 참으로 유치한 어른이 아닐 수 없다. 박예찬은 아직 김인우가 자신을 아들로 착각해서 찾아온 것은 모르고 있다.그렇게 한참을 구석에 숨어 어떻게 이 상황을 타파해야 할지 생각을 하던 차에 마침 워치폰이 울렸다. 조하랑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이모!”“너 이 녀석 지금 어디야? 어디 있길래 코빼기도 안 보여?”조하랑은 유치원 입구 앞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박예찬은 아까까지 주변을 서성이던 경호원들이 전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잽싸게 달려갔다.“이모, 나 여기 있어.”조하랑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왜 거기 있었어? 이모가 한참 찾았잖아.”“그게 실은... 저번에 봤던 아저씨가 찾아왔어...”박예찬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차량을 가리켰다.차 안에 있던 김인우는 미간을 치켜세우더니 곧바로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해.”하지만 이곳은 아직 하원하는 아이들로 북적였기에 함부로 시동을 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체되자 청순한 얼굴의 여자가 하이힐을 신은 채 씩씩거리며 다가왔다.그녀는 손을 창문에 갖다 대고는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김인우 씨 이게 지금 뭐 하시는 거죠?”김인우는 화부터 내는 그녀를 향해 순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렸다.“다 큰 어른이 꼭 어린애를 이겨 먹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경고하는데 다음번에 또다시 이런 식으로 찾아오면 그때는 제 아들을 괴롭히고 스토킹한 죄로 경찰에 신고해 버릴 줄 아세요!”조하랑은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김인우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다시 박예찬에게로 걸어갔다.박예찬은 조하랑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차로 향하다가 김인우 쪽을
“그럼 됐어. 약속했으니까 꼭 지키는 거야.”박민정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연지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연지석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다음에 보자.”“그래, 잘 가.”박민정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연지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연지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남준이 다정하게 박민정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우리도 돌아가야지.”“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인가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고 유남준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차로 향했다.가는 길에 박민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분주한 인파를 둘러보았다.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주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이 참으로 신기했다.“민정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문득,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었다.박민정도 따라서 멈춰 서며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뭔데요?”유남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박민정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참...”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박민정은 조금 쑥스러워졌다.“갑자기 왜 그래요?”유남준이 미소를 지었다.“그냥, 지금 말하고 싶었어.”“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해.”“좋아하는 게 다야?”유남준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박민정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그래, 좋아한다는 것도 괜찮지.”유남준이 흐뭇하게 웃었다.박민정이 그
옆에서 지켜보던 정수미가 박민정이 병상에서 일어나려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어디 가려고?”“친구 만나러요.”“지금은 푹 쉬어야 할 때야.”정수미가 걱정스레 만류했다.“며칠 후에 만나면 안 돼?”하지만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그 친구가 곧 해외로 떠나거든요.”연지석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다. 이번에도 배웅하지 않는다면 정말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그래. 대신 조심해야 해.”정수미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박민정이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네.”박민정은 짧게 대답하고 병실을 나섰다.밖에서는 유남준과 정윤아가 기다리고 있었다.“언니, 어디 가려고요?”정윤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은 쉬어야 하는데.”“좀 있다가 설명할게. 지금은 시간이 없어.”박민정이 이렇게 말하며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남준 씨, 지석이가 출국한대요. 지금 공항에 있어요.”그녀는 가장 중요한 신뢰를 지키고 싶었다.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숨기고 싶지 않았다.유남준은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차로 데려다줄게.”“정말요?”박민정은 망설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에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당연하지. 별일도 아닌데 뭘.”유남준은 가볍게 대답하며 차 쪽으로 걸어갔다.“가자.”“네.” 박민정이 웃으며 따라갔다.차에 오르자 유남준은 공항으로 향하며 물었다.“갑자기 왜 떠나는 거야?”박민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원래 진주시에 온 것도 국내 사업 관련 일이 있어서였어요. 그런데 내가 실종되면서 오래 머물렀던 거죠. 아마 이제 가족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그럼 제대로 인사해야겠네.”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네.”박민정은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기분 나쁘진 않아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예전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예전에는 연지석과 박민정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연지석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머물렀다.차를 몰고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인사도 없이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박민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정아, 나 집에 가려고. 너한테 인사하려고 연락했어. 지금 몇 병동에 있어? 잠깐 보러 갈게.]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후,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한편, 박민정은 수술을 마친 뒤 처음으로 상태를 점검하는 날이었다. 실을 제거하고 청력을 확인하는 중요한 검사들이 진행됐다. 의사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김인우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는 백 퍼센트 확신하지 못했다. 과연 박민정의 청력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박민정은 눈을 감은 채 손을 살짝 떨고 있었다.오랜 세월, 그녀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만약 내가 정상적인 청력을 되찾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누구보다 떨리고 누구보다 기대됐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장비들이 제거되었고 그녀의 귀에 미세한 소음이 울렸다. 그건 수술 도구들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들려?” 김인우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자 박민정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네. 들려요.”그녀의 대답에 김인우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잘됐어! 정말 잘됐어. 수술이 성공했어.”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박민정도 고개를 끄덕였다.“당분간 푹 쉬어야 해. 무리하면 안 돼.” 김인우가 급히 덧붙였다.“이제 테스트를 좀 해볼게요.”“네.”김인우는 간단한 청력 검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완전히 정상 수준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보청기가 필요 없는 상태였다.“아주 좋아. 앞으로 조심해서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검사만 받으면 문제없을 거야.”검사를 마친 뒤, 박민정은 병실 밖으로 나왔고 거기엔 유남준, 정수미, 정윤아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어때요, 김 선생님?”정수미가 다급히 물
연지석은 잠시 말없이 있었다.“홍 비서가 처음엔 몰랐지만 이제 알고 나서 후회하는 건가?”“그건 아니야. 그냥 우리 두 사람이 약혼한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나보고 배신하지 말라고. 만약 다른 여자가 생기면 미리 한마디만 해 달래.” 하민재의 말에 연지석은 서류를 넘기면서 무심히 말했다. “괜찮은 여자 같은데?”“형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하민재가 되묻자 연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연애 전문가가 아니지만 네가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홍 비서는 너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했잖아. 너무 기대하지 마. 실망하는 건 결국 너야.”그 한마디가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하민재를 깨웠다. 그제야 왜 자신이 불편했는지 깨달았다.“형, 솔직히 말해서... 나, 주영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홍주영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알았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연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좋아한다면 노력해. 먼저 네 자신부터 바로잡고.”“하지만 주영 씨는 유남우를 좋아하잖아...”그 한마디에 연지석도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하민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형, 왜 우리가 좋아하는 여자들은 다 유씨 형제랑 얽히는 걸까?”더 이상 서류를 볼 기분이 없었던 연지석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이미 놓았어.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이미 홍 비서와 약혼까지 했으니까 널 선택한 거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잠시 말을 멈췄던 연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난 곧 해외에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해. 여긴 네가 좀 맡아줘.”“알았어.”하민재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고 반대편에서도 연지석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인하의 자리로 갔다.“인하 씨, 민정이 수술은 어떻게 됐어요?”설인하는 그제야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아마 오늘이면 수술이 성공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연지석이 묻지 않았다면 그녀는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퇴근 후 시간이 나면 병원에 가서 박민정
홍주영은 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제야 하민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정리를 시작했다.혼자 소파에 앉은 홍주영은 침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스레 유남우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민재가 지금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도 그저 일시적인 신선함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예전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였으니까.하지만 이제 그녀도 나이가 찼고 결혼해야 할 때가 됐으며 무엇보다 할머니를 안심시켜야 했다.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홍주영은 노트북을 꺼내 업무를 시작했다. 일에 몰두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얼마나 지났을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하민재가 기대에 찬 얼굴로 걸어나오며 말했다.“주영 씨, 와서 좀 봐요. 내가 잘 정리했는지 확인해줘요.”홍주영은 노트북을 닫으며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문을 넘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했던 방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에 놓여 있던 여행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주영 씨 옷도 전부 정리해서 옷장에 넣어뒀어요.”하민재가 옷장 앞에 서서 문을 활짝 열자 안에는 가지런히 개켜진 옷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절별로 정리된 옷들이 걸려 있었고 색상과 종류에 따라 완벽하게 분류되어 있었다.홍주영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걸 어떻게 한 거예요?”이런 정리는 능숙한 사람도 쉽지 않다. 그런데 명문가 출신인 하민재가 직접 했다고?“그냥 만족하다고만 해주면 안 돼요?”그가 칭찬을 바라는 듯 바라보자 홍주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만족해요.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낫네요.”자신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장판이었던 방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그럼 됐어요.”“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홍주영은 유남우의 말을 들으며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하민재는 여러 여자와 함께 있었고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여자들은 모두 달랐다.그녀는 사진을 꽉 쥐었다. 마음이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하민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지금 그녀의 약혼자였다. 그녀의 약혼자로서 이렇게 많은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겠는가?그러나 약혼 전후로 하민재가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홍주영은 고개를 들어 유남우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도련님, 제 사적인 문제입니다. 신경 써 주실 필요 없습니다.”그리고 덧붙였다.“또한, 저는 도련님께서 제 약혼자를 조사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게다가 도련님께서 조사하신 것들은 제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던 내용이에요.”홍주영은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결정이라고 해서 덥석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그녀는 이미 하민재에 대해 충분히 알아본 후에야 이 결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유남우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홍 비서, 알다시피 그런 남자가 한 여자에게 마음을 정착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믿지 마. 바람둥이가 변하는 건 정말 어렵거든.”홍주영은 손을 꽉 쥐었다.“충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제 분수를 잘 알고 있어요. 저는 민재 씨가 저 때문에 변할 거라고 기대한 적 없어요. 저희는 단지 결혼이 필요했고 서로에게 적합했을 뿐입니다.”숨이 막힐 듯한 기분이 들었고 이 공간에 더 머무를 수 없었다.‘도련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홍주영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더 이상 볼일이 없으시면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막 집에 왔는데 아직 정리도 못 했거든요.”말을 마친 그녀는 유남우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나가버렸다.유남우는 텅 빈 사무실에서 홀로 남았고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과거 자신만을 바라보던 그 작은 소녀가 점점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회사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마침 택배를 가지러 나왔던 비서들이 멀리서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홍 비서는 정말 운도 좋네.”“그러게. 대체 어떻게 해서 민재 씨랑 엮이게 된 거야?”“뭐가 어때서? 민재 씨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다 알잖아. 그리 좋은 평판은 아니지. 여자도 많았고.”“그러게. 아마도 홍 비서가 유 대표님 따라다니면서 술자리에서 만난 거겠지?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실패했는데 그 와중에 홍 비서는 성공했네.”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말끝마다 시샘이 묻어나왔는데 멀리서 들어도 느껴질 정도였다.하지만 홍주영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부터 무덤덤한 성격이었고 가까운 친구도 거의 없었다. 특히 그런 자리에서 인맥은 더더욱 만들지 않았다.비서들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아까의 험담은 없던 일처럼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홍 비서님, 약혼 축하드려요!”홍주영은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고마워요.”그러자 한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결혼식은 언제쯤 하실 건가요?”“아마 설 즈음이 될 것 같아요.”양가 할머니들이 설날이 가장 흥겹다며 날짜를 그렇게 정하자고 했다.정말 결혼을 한다는 말에 비서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명문가의 사모님이 될 사람이었다.“홍 비서님, 결혼식 때 저희도 초대받을 수 있을까요?”하씨 가문에서 열리는 결혼식이라면 하객으로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인맥을 쌓을 기회였다. 비서들은 당연히 그녀가 승낙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대놓고 거절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홍주영은 단호했다.“죄송해요. 저는 가족과 친한 친구들만 초대할 생각이에요.”그 한마디에 비서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거절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홍주영은 더 이상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녀가 사라지자 비서들은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별
이튿날 아침, 홍주영은 할머니께 작별을 고하고 도주로 돌아갔다.집 앞에서는 하민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밤 술을 마신 탓에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래도 기분만큼은 한껏 들떠 있었다.홍주영이 밖으로 나오자 그는 곧장 다가가 그녀의 여행 가방을 받아들었다.“내가 들게요.”“고...”고맙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그녀는 어제 하민재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네, 좋아요.”그 말에 하민재는 활짝 웃으며 그녀의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함께 차에 올랐다.운전기사가 도와주려 했지만 하민재가 눈짓 한 번 주자 곧바로 손을 거뒀다. 이건 분명 자기 아내 될 사람 앞에서 점수를 따려는 사장님의 의도일 터였다. 그러니 굳이 끼어들어 방해할 필요는 없었다.차에 오르자마자 홍주영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녀가 화면을 열어보니 유남우였다.[언제 도착해?]답장을 하려던 찰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하민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주영 씨, 먼저 말해 두지만 주영 씨 핸드폰을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홍주영이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네, 상관없어요.”사실 그는 억울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하민재에게 휴대폰 메시지를 보여준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었으니까.그러자 하민재는 슬쩍 말을 돌렸다.“근데 주영 씨 이번에 휴가 다섯 날이나 썼잖아요?”“네, 연차 쓴 거예요.”홍주영은 평소에 휴가를 거의 쓰지 않았고 이번이 유일하게 길게 쉰 경우였다.“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이 딱 다섯 번째 날인데요? 근데 벌써 출근한다고요?”하민재는 뭔가 수상쩍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의 직감이란 게 가끔은 무서울 만큼 정확할 때가 있다.홍주영은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그러나 하민재는 곧바로 반박했다.“주영 씨는 그냥 비서예요. 주영 씨가 없다고 회사가 굴러가지도 않는 것도 아니고.”그는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
하민재는 홍주영이 왜 그렇게까지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우리 약혼한 사이잖아요. 뭐가 문제에요? 게다가 걱정 마여, 나는 절대 신사적인 사람이니까.”신사적인 사람... 스스로를 신사라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진짜 신사일까?홍주영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안 돼요. 결혼하고 나서 여기서 지낼게요.”그녀는 평생 할머니와 함께 살아왔고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남자 집에서 머무르는 걸 달가워할 리 없었다.하민재는 한참 후에야 그녀의 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내가 잠시 후에 주영 씨랑 할머니를 모셔다드릴게요.”“네, 고마워요.”그녀는 예의 바르고도 사무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그 말에 하민재는 다시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으며 불만을 토로했다.“난 주영 씨 약혼자예요. 이제 고맙다는 말 좀 하지 마요. 그냥 나한테 막 시켜요, 데려다 달라고. 부탁이 아니라, 명령하라고요. 알겠죠?”홍주영은 그가 술에 취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투정 부리는 아이 같기도 했고 그 모습에 심장이 쿵쿵 울렸다. 그녀는 그를 다시 쳐다보다가 결국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알겠어요.”“그래야죠.”하민재는 다시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홍주영은 그가 또다시 뺨에 입을 맞추려는 줄 알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피곤했을 뿐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그 순간, 마침 할머니 두 분이 나왔고 그들은 그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아이고, 저 녀석. 저렇게 커서도 주영이한테 기대서 자네.”하민재의 할머니는 휴대전화를 꺼내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사진 속에서 홍주영은 얼굴이 새빨갛고 하민재는 마치 아이처럼 편안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홍주영의 할머니도 웃음을 터뜨렸다.“주영이는 맨날 결혼 안 한다고 하더니, 내가 보기엔 제대로 된 사람을 못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