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려있었고 주변에서는 누군가의 대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그래도 사람 목숨인데 고작 몇억이 뭡니까? 적어도 20억은 줘야죠!”“20억 원?”귀에 익은 중년 남자 윤석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니요. 20억 달러!”사람들은 한창 뭔가를 흥정하고 있었다.20억 달러라는 소리에 윤석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가당키나 한 금액이라고 생각해요?”애초에 이만한 돈이 그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주기 싫으면 직접 처리하던지요.”가격을 제안했던 한세용은 다시 허리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꼬았다.“이번 일은 저희가 아주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해야 하는 일인데 아마 잘 처리한다고 해도 여기에 계속 머물 수 없을 겁니다. 제가 당신 배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를 것 같나요? 그리고 과연 지엔 그룹의 대표님께 저 여자의 몸값으로 20억 원을 요구하면 저한테 줄까요?”“제 생각에는 20억이 아니라 200억도 기꺼이 주려고 할 겁니다.”윤석후는 왜 이런 사람에게 일을 부탁했는지, 순간 너무 후회스러웠다.그렇다고 해서 직접 처리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이렇게나 큰 액수는 지금 당장 구하기 힘들어요. 아니면 먼저 처리해 줘요. 그리고 해외로 출국하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입금해 드릴게요.”박민정은 여기까지 듣고 나서야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 것 같았다.누군가가 박민정을 죽이고 돈을 받으려는 상황이었다.“안 돼요! 그 말을 제가 어떻게 믿어요? 먼저 돈부터 주세요.”한세용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걱정하지 마세요. 돈만 주면 바로 저 여자를 처리해 버릴 테니까. 계속 살아있는 상태에서 제 쪽에 있는 것도 엄청 위험한 일입니다.”“조금만 기다려줘요.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요.”윤석후는 어쩔 수 없이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빌려보기로 했다.그러나 윤소현도 20억 달러라는 금액을 듣는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지금 제가 그만한 돈이 어디 있겠어요? 혹시 그 사
“그, 그럼 이제 어떡해요? 이미 다 잡은 사람을 이제 와서 풀어주지도 못하잖아요.”부하는 그녀의 몸값이 지금 20억 달러나 되는데 이대로 풀어주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한세용이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은 풀어주면 안 되지. 그렇다고 다치게 해서도 안 되고. 돈만 받으면 바로 풀어주자.”“네?”부하는 자기 보스가 이렇게 배포가 작은 사람이란걸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방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살짝 놓였다.유남준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진작에 죽였을 것이다.‘그나저나 대체 누가 나를 죽이려는 거지?’박민정은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 차가운 바닥에 누운 채로 두 사람의 대화를 계속 들었다.그러다가 한참이 지난 후, 갑자기 밖에서 차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누군가가 우르르 차에서 내렸다.이때 윤석후가 황급히 뛰어오더니 한세용에게 말했다.“돈은 준비했으니 빨리 저 여자를 처리해요.”아까 윤석후의 전화를 받은 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박민정을 이 세상에서 제거할 수만 있다면 돈이 얼마나 들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그러자 한세용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여기는 저희가 잘 처리할 테니까 그만 가보셔도 됩니다.”“이렇게 가면 제가 마음이 안 놓이잖아요.”윤석후가 고집을 부리자 한세용은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저희를 믿지 못하는 거네요. 그렇게 믿음이 안 가면 그냥 직접 처리하세요.”윤석후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은 늙은이라고 해도 아까부터 계속 불길한 예감이 들어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그런 거액을 들였는데 당연히 결과까지 봐야죠.”“걱정하지 말라니까요. 돈이 들어오는 즉시 저 여자를 죽이는 장면을 찍어서 영상으로 보내드릴게요. 그래도 못 믿겠으면 다른 방법을 찾든지 하시고요.”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이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란 것만 알아두세요.”“알겠어요.”윤석후는 어쩔 수
박민정이 몸을 돌려 다시 그에게 물었다.“또 무슨 할 말이 남았나요?”“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는데 영상 하나만 같이 찍어줘야겠어요.”박민정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현장에 있던 사람들과 같이 자신이 맞아서 죽는 영상을 찍게 되었다.“이만하면 된 것 같아요. 이제 가요.”박민정은 자리를 뜨려다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저랑 같이 왔던 제 비서랑 경호원은요?”“아, 그분들은 잠깐 다른 곳에 옮겼는데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겁니다.”박민정은 그의 대답을 듣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그리고 밖으로 나와보고 나서야 이곳은 인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산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아까 한세용이 알려준 대로 박민정은 큰길로 가기 위해 오른쪽으로 쭉 걸어갔다.너무 늦게 걸었다가 혹시나 방금 그 남자들이 마음이 바뀌어 따라오기라도 할까 봐 거의 달리다시피 걸음을 재촉했다.그러나 때가 이미 늦어 하늘도 점점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고 길은 온통 가시덤불이라 박민정의 팔과 다리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하지만 이대로 멈출 수 없었기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원래 여기에 큰 길이 있었는데 아까 한세용이 혹시나 지키는 사람이 없는지 조심하라고 했다.한 편.역시나 윤석후가 사람들을 데리고 큰길에서 은밀히 잠복하고 있었다.이때, 한세용이 동영상 하나를 보내왔다.“소현아, 이제 박민정도 죽었으니 아무도 우리 두 사람의 앞길을 방해하지 못할 거야.” 윤소현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영상을 보면서 기뻐했다.“너무 잘됐어요. 아빠, 빨리 장 변호사 쪽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봐요.”그녀는 박민정을 납치하자마자 바로 장 변호사 쪽에도 사람을 보냈다.윤석후는 빠르게 전화를 걸어 확인한 뒤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에게 말했다.“장 변호사도 이미 우리 쪽에서 잡아뒀대. 이제 그 사람이 상속권이 든 가짜 유언장을 만들고 정수미까지 깔끔하게 죽어주면 모든 일이 끝났어.”정수미의 얘기에 윤소현은 자기도 모르게
정호철이 마침 눈치채고는 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그리고 밖에 와보니 윤소현이 이미 차 앞에 서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엄마... 아니, 정 대표님. 아까 제가 영상 하나를 받았는데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초조한 얼굴로 다급히 되물었다.“무슨 영상? 혹시 지금 민정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줬어?”윤소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보시기 전에 꼭 마음 준비를 해주셔야 해요.”그녀의 말에 정수미는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빨리 줘!”윤소현은 빠르게 영상을 틀어 정수미에게 보여줬고 정수미는 화면 속의 박민정을 본 순간 그대로 뒤로 넘어갈 뻔했다.윤소현이 옆에서 위로하는 척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제 생각에는 민정이나 대표님께 원한을 가졌던 사람의 짓인 것 같아요. 그리고 대표님께서 지엔 그룹을 민정이한테 물려준다니까 더는 못 참고 손을 쓴 거고요.”그녀의 말은 온통 모순덩어리였다.그러나 정수미의 머릿속은 이미 뒤죽박죽인 상태라 전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이때, 옆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정호철이 차분하게 물었다.“소현 씨, 그런데 이 동영상을 왜 소현 씨한테 보냈을까요?”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윤소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답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정호철도 그녀의 대답에 더는 캐묻지 않고 다시 정수미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어쩌면 가짜 영상일 수도 있고 편집된 영상일 수도 있잖아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정씨 가문과 트러블이 있었던 회사는 없었어요. 경쟁 관계라고 해도 민정 씨의 목숨까지 위협할 만큼은 아니에요.”정수미는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아까 민정이 행적을 알아냈다고 하지 않았어?”정호철은 그제야 생각났는지 재빨리 답했다.“네, CCTV에서 민정 씨를 데려갔던 그 차량을 찾았다고 했으니까 이제 그 차가 어디로 갔는지만 쫓아가 보면 될 것 같아요. ”“그래.”정수미는 힘겹게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다 보니 누구 차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그래도 경계를 늦출 수 없으니 차들이 모두 떠나기까지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살아남으려면 이런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니다.그러나 박민정이 이 차량에 구조 요청을 안 하기 천만다행인 게 차 주인이 바로 윤석후네 사람들이었다.윤석후는 박민정한테 달려가다가 화장실이 너무 급해 잠깐 멈춰섰다.차량 불빛으로 그는 내린 사람이 누군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이때 윤석후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여긴 대체 어디야? 기분 나쁘게!”분명 그때 자신을 해치려던 그 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한 순간 박민정은 머리가 어지럽고 두통이 몰려왔다.“날 해치려던 사람이 윤소현이였구나!”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가 이상하게 이 장면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졌다.박민정은 어렴풋이 1년 전에 자신이 납치되었을 때가 생각났다.그러다가 너무 기억하려고 애써서 그런지 머리가 또 아파지기 시작했다.하여 일단 모든 생각들을 접고 차들이 다 떠나간 뒤에 다시 앞만 보고 걸어갔다.얼마간 걸어가다가 그녀는 또 앞에서 차가 오는 걸 보고 다시 나무 뒤에 숨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정수미가 타고 있는 차였는데 그녀는 사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중얼거렸다.“민정이를 어떻게 이런 곳으로 데려왔을까?”이 시각 윤소현은 정수미네 차량을 뒤쫓아오다가 윤석후에게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아빠, 어떻게 되었어요?]윤석후는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그쪽에서 이미 깔끔하게 처리했는지 와보니까 아무것도 없어.][당장 거기서 나와요. 저랑 정 대표가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는데 마주치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지니까.]“그래.”윤소현은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뒤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정수미는 얼마 안 가서 목적지에 도착했다.이곳은 도로 끝이었고 낡은 집이 딱 하나가 보였는데 정호철은 두말없이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샅샅이 찾아보기 시작했다.그러나 집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집 구조는 영상에서 봤던 거랑 똑같아.”정수미는
정수미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겨우 말을 내뱉었다.“민, 민정이를 찾았대.”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윤소현은 정수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지금 어디에 있대요?”“병원에 데려갔다는데 별로 다친 데는 없나 봐.”정수미는 활짝 웃으며 다시 정호철에게 말했다.“우리도 괜찮은지 가보자. 분명 많이 놀랐을 거야.”“네.”정호철도 그제야 한시름 놓이는 것 같았다.그러나 윤소현은 옆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혼란에 빠졌다.‘이럴 수가?’‘어떻게 찾아냈지?’윤소현은 순간 너무 어지러워 몸을 휘청거리다가 금방에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다.정수미와 같이 왔던 차들이 하나둘씩 모두 떠나가는 모습을 본 윤소현의 비서가 그녀에게 살짝 다가와 물었다.“혹시 저희도 따라가야 하나요?”그러자 윤소현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당연하지!”당장 가서 박민정이 진짜 살아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차에 올라타서도 윤소현은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이 자꾸만 떨려왔다.병원.박민정은 전면 검사를 받았는데 별다른 문제 없이 그저 너무 피곤해서 잠든 것뿐이라고 했다.그리고 팔과 다리도 그저 작은 찰과상만 있다고 의사가 전했다.박민정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몇 시간이 흐른 뒤였다.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자기 곁을 지키고 있는 유남준을 보게 되었다.“좀 어때?”유남준의 물음에 박민정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전 괜찮아요. 그저... 배고프고 목이 너무 말라요.”어제 납치된 뒤로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그녀의 대답에 유남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빠르게 물 한 잔과 간식거리를 가져왔고 박민정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정수미는 사람들과 같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마침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재빨리 박민정에게 달려와 울먹거리며 물었다.“민정아,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박민정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어쩔 줄 몰라 했다.“왜요? 전 아무렇지 않아요.”그녀의 대답에 정수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
“뭐? 그럴 리가 없는데?”윤석후는 그녀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뭐가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사람들이 민정이를 풀어줬다고요!”윤소현은 다급한 나머지 발까지 동동 굴렀다.“우리가 직접 나서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나란히 손잡고 감옥에 들어가야 할 판이에요.”더 이상 윤석후와 말하기 싫어 윤소현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런 곧바로 이지원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또 무슨 일이시죠?”“소현 씨, 들어보니 어제 진주시에 무슨 일이 터졌다고 하던데요?”이지원은 살살 간을 보면서 낚시질하기 시작했다.“민정 씨는 잘 있죠?”윤소현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빠르게 평정심을 갖고 모르는 척 답했다.“민정이가 글쎄 어젯밤 누군가에게 납치당했어요. 지금은 다시 돌아왔고 몸도 멀쩡하더라고요.”“네?”이지원도 깜짝 놀란 척 연기했지만 사실 이 납치사건이 윤소현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게 무슨 일이에요? 민정 씨가 어떻게 납치를 당해요. 누구 짓이에요?”쏟아지는 물음에 윤소현은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렇게 궁금하면 가서 직접 물어보든지요.”그녀가 금방에라도 전화를 끊으려 하자 이지원이 다급히 다시 말을 이었다.“소현 씨, 그저 호기심에 물어본 것뿐인데 왜 이렇게 화를 내요? 그리고 우리 둘 다 박민정이 살아있는 게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잖아요.”“거짓말하지 말아요. 그렇게 불편하면 진작에 손을 썼어야죠.”윤소현이 다시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멀리서부터 정호철이 다가오는 걸 보고 그녀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아저씨, 빨리 나오셨네요?”그러자 정호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답했다.“네.”원래부터 윤소현에게 별다른 호감을 느끼지 못했고 그저 정수미가 키우는 딸이라 여태껏 상대해 줬을 뿐이다.“아저씨, 제 철없을 적 범했던 행동들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윤소현은 지금 정호철이 정수미한테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
정수미가 완전히 잠에 든 걸 보고 난 후에야 박민정은 자기 손을 살짝 뺐다.그리고 병실 밖으로 나와보니 유남준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늘 출근 안 했어요?”줄곧 들어오지 않으니 이미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네가 여기에 입원해 있는데 회사에 어떻게 가?”“그리고 회사에 사람이 많아서 나 하나 없다고 무너지지 않아.”박민정은 싱긋 미소를 짓다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할 말이 있어요.”유남준은 단번에 눈치채고 그녀에게 다가왔다.“우리 나가서 말하자.”그렇게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고 박민정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누가 저를 죽이려 했는지 저 알아요.”유남준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더니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누구야?”“윤석후, 윤소현 부녀요.”박민정은 어젯밤에 자신이 봤던 모든 걸 그에게 알려줬다.그러자 유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이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너는 일단 푹 쉬고 있어.”두 사람은 다시 앉을 곳을 찾아 앉은 뒤 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직 이 일을 정 대표님께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말해도 윤소현 씨 편을 들면 어쩌죠?”어쨌든 정수미는 20년 도 넘게 윤소현을 키워준 사람인데 그녀한테 아무 감정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이것이 바로 박민정이 여태껏 누가 자신을 해쳤는지 말하지 않은 원인이기도 했다.유남준이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정 대표가 너 몰래 윤소현 씨를 도와줬을까 봐 걱정되는 거야, 아니면 윤소현 씨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는데 이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 게 걱정되는 거야?”“만약 첫 번째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절대로 윤소현 씨를 가만두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날 믿어줘.”유남준의 단호한 말에도 박민정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어렵게 답했다.“알겠어요. 이따 정 대표님께 말해줘야겠네요.”“그래.”유남준의 그녀의 결정을 존중해주기로 했다.오후가 되어 정수미가 깨어나 보니 자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