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미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겨우 말을 내뱉었다.“민, 민정이를 찾았대.”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윤소현은 정수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지금 어디에 있대요?”“병원에 데려갔다는데 별로 다친 데는 없나 봐.”정수미는 활짝 웃으며 다시 정호철에게 말했다.“우리도 괜찮은지 가보자. 분명 많이 놀랐을 거야.”“네.”정호철도 그제야 한시름 놓이는 것 같았다.그러나 윤소현은 옆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혼란에 빠졌다.‘이럴 수가?’‘어떻게 찾아냈지?’윤소현은 순간 너무 어지러워 몸을 휘청거리다가 금방에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다.정수미와 같이 왔던 차들이 하나둘씩 모두 떠나가는 모습을 본 윤소현의 비서가 그녀에게 살짝 다가와 물었다.“혹시 저희도 따라가야 하나요?”그러자 윤소현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당연하지!”당장 가서 박민정이 진짜 살아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차에 올라타서도 윤소현은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이 자꾸만 떨려왔다.병원.박민정은 전면 검사를 받았는데 별다른 문제 없이 그저 너무 피곤해서 잠든 것뿐이라고 했다.그리고 팔과 다리도 그저 작은 찰과상만 있다고 의사가 전했다.박민정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몇 시간이 흐른 뒤였다.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자기 곁을 지키고 있는 유남준을 보게 되었다.“좀 어때?”유남준의 물음에 박민정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전 괜찮아요. 그저... 배고프고 목이 너무 말라요.”어제 납치된 뒤로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그녀의 대답에 유남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빠르게 물 한 잔과 간식거리를 가져왔고 박민정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정수미는 사람들과 같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마침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재빨리 박민정에게 달려와 울먹거리며 물었다.“민정아,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박민정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어쩔 줄 몰라 했다.“왜요? 전 아무렇지 않아요.”그녀의 대답에 정수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
“뭐? 그럴 리가 없는데?”윤석후는 그녀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뭐가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사람들이 민정이를 풀어줬다고요!”윤소현은 다급한 나머지 발까지 동동 굴렀다.“우리가 직접 나서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나란히 손잡고 감옥에 들어가야 할 판이에요.”더 이상 윤석후와 말하기 싫어 윤소현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런 곧바로 이지원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또 무슨 일이시죠?”“소현 씨, 들어보니 어제 진주시에 무슨 일이 터졌다고 하던데요?”이지원은 살살 간을 보면서 낚시질하기 시작했다.“민정 씨는 잘 있죠?”윤소현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빠르게 평정심을 갖고 모르는 척 답했다.“민정이가 글쎄 어젯밤 누군가에게 납치당했어요. 지금은 다시 돌아왔고 몸도 멀쩡하더라고요.”“네?”이지원도 깜짝 놀란 척 연기했지만 사실 이 납치사건이 윤소현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게 무슨 일이에요? 민정 씨가 어떻게 납치를 당해요. 누구 짓이에요?”쏟아지는 물음에 윤소현은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렇게 궁금하면 가서 직접 물어보든지요.”그녀가 금방에라도 전화를 끊으려 하자 이지원이 다급히 다시 말을 이었다.“소현 씨, 그저 호기심에 물어본 것뿐인데 왜 이렇게 화를 내요? 그리고 우리 둘 다 박민정이 살아있는 게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잖아요.”“거짓말하지 말아요. 그렇게 불편하면 진작에 손을 썼어야죠.”윤소현이 다시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멀리서부터 정호철이 다가오는 걸 보고 그녀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아저씨, 빨리 나오셨네요?”그러자 정호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답했다.“네.”원래부터 윤소현에게 별다른 호감을 느끼지 못했고 그저 정수미가 키우는 딸이라 여태껏 상대해 줬을 뿐이다.“아저씨, 제 철없을 적 범했던 행동들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윤소현은 지금 정호철이 정수미한테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
정수미가 완전히 잠에 든 걸 보고 난 후에야 박민정은 자기 손을 살짝 뺐다.그리고 병실 밖으로 나와보니 유남준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늘 출근 안 했어요?”줄곧 들어오지 않으니 이미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네가 여기에 입원해 있는데 회사에 어떻게 가?”“그리고 회사에 사람이 많아서 나 하나 없다고 무너지지 않아.”박민정은 싱긋 미소를 짓다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할 말이 있어요.”유남준은 단번에 눈치채고 그녀에게 다가왔다.“우리 나가서 말하자.”그렇게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고 박민정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누가 저를 죽이려 했는지 저 알아요.”유남준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더니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누구야?”“윤석후, 윤소현 부녀요.”박민정은 어젯밤에 자신이 봤던 모든 걸 그에게 알려줬다.그러자 유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이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너는 일단 푹 쉬고 있어.”두 사람은 다시 앉을 곳을 찾아 앉은 뒤 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직 이 일을 정 대표님께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말해도 윤소현 씨 편을 들면 어쩌죠?”어쨌든 정수미는 20년 도 넘게 윤소현을 키워준 사람인데 그녀한테 아무 감정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이것이 바로 박민정이 여태껏 누가 자신을 해쳤는지 말하지 않은 원인이기도 했다.유남준이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정 대표가 너 몰래 윤소현 씨를 도와줬을까 봐 걱정되는 거야, 아니면 윤소현 씨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는데 이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 게 걱정되는 거야?”“만약 첫 번째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절대로 윤소현 씨를 가만두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날 믿어줘.”유남준의 단호한 말에도 박민정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어렵게 답했다.“알겠어요. 이따 정 대표님께 말해줘야겠네요.”“그래.”유남준의 그녀의 결정을 존중해주기로 했다.오후가 되어 정수미가 깨어나 보니 자
정수미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넌 내 친딸인데 망설일 이유가 뭐가 있어?”단호한 대답에 박민정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예전에 자신이 찾은 몇 가지 자료들을 정수미에게 보여줬다.“이건 윤소현 씨가 회사 재산을 빼돌린 증거들이에요.”만약 정수미가 방금 명확하게 자기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면 아마 이렇게 빨리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정수미는 떨리는 손으로 하나씩 읽어보다가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여태껏 부족함 없이 키워줬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저런 인간을 지금까지 키워준 게 내가 멍청이지!”그러다가 너무 흥분했는지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깜짝 놀란 박민정이 빠르게 의사를 부르려고 하자 정수미가 그녀를 말렸다.“쿨럭... 잠깐!”“왜요?”“물 한 잔이면 돼.”“네.”박민정은 냉큼 따뜻한 물 한 잔을 정수미에게 건넸고 몇 모금 마시니 기침도 점점 잦아들었다.그리고 침대에 한참 동안 누워있다가 곧바로 길연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길 비서, 지금 할 말이 있는데 당장 이쪽으로 와줘.”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민정아, 너랑 유남준 씨는 이 일에 대해 신경 쓰지 말고 전부 나한테 맡겨. 내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한편, 윤소현은 자기 개인 별장으로 돌아갔다.어젯밤의 일로 그녀도 잠 한숨을 못 잔 상황이기에 앞으로의 일들은 천천히 계획해 보고 일단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윤소현은 겨우 통화버튼을 누르고 신경질적으로 물었다.“여보세요?”이때, 수화기 너머에서 윤석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현아, 빨리 도망쳐!”그러나 여전히 비몽사몽 상태인 윤소현은 눈을 비비며 되물었다.“뜬금없이 왜 도망가야 해요?”윤석후가 다시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수미 쪽에서 이미 우리가 박민정 살인 사건의 주범이란 사실을 다 알아버렸
바로 정호철이 모든 부하와 같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순간 윤소현은 온몸이 떨려왔지만 애써 괜찮은 척 그에게 말을 걸었다.“아저씨, 여긴 웬일이에요?”정호철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그 말은 제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러는 소현 씨는 이 늦은 밤에 창문까지 넘으면서 어디로 가는지?”“그게...”윤소현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순간 뭐라고 둘러대면 좋을지 몰라 했다.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호철은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 더는 참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윤소현 씨랑 윤석후 씨가 바로 민정 씨를 살해하려 했던 주범이죠? 당신 아버지는 이미 저희한테 잡힌 상황인데 지금 순순히 저희 따라갈 건가요, 아니면 끌고 갈까요?”윤소현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그리고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며 그에게 애원했다.“아저씨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자라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잖아요. 제발 이번 한 번만 저 좀 봐주세요. 진짜 일부러 그런게 아니고 감옥에 가기 싫단 말이에요!”‘사람을 사주해 박민정을 죽이려고 했으면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그녀의 말대로 어릴 때부터 봐온 아이가 지금은 이렇게 고약하게 변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솔직히 이런 아이를 입양해 키울 바엔 차라리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애초에 왜 그런 행동을 했지? 데리고 가!”정호철이 부하들을 향해 외치자 한 명은 그녀의 짐을 챙기고 다른 두 사람은 양쪽으로 윤소현의 팔을 끼고 데려가려 했다.윤소현은 끌려가다가 누군가가 자신의 캐리어를 건드리는 모습을 보고 흥분해서 소리쳤다.“내 짐에 손대지 마! 난 여전히 정 대표 딸이야. 아무리 지금은 날 미워한다고 해도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걸 보면 절대로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윤소현의 으름장에 짐을 챙기던 부하는 겁을 먹고 빠르게 다시 내려놓더니 정호철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이 부하들은 정수미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감히 윤
정수미는 핏기 없는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다가 윤소현이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에 순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윤소현, 내가 엄마라고 부르지 말랬지.”윤소현은 재빨리 무릎을 꿇고 침대 쪽으로 기어갔다.“엄마, 한 번 엄마는 영원한 엄마이고 저 또한 영원히 엄마의 딸이에요. 그리고 여태껏 키워주신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게요.”“웃기지 마!”정수미가 차갑게 코웃음 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은혜를 잊지 않는다고? 네가 지금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그럼 그때 내가 마신 우유에 그 더러운 것들을 탈 때는 왜 그런 생각이 안 들었어?”정수미의 물음에 윤소현은 폭풍 같은 눈물을 쏟아내며 답했다.“엄마, 그건 정말 생각 없이 한 행동이고 진짜 죽이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 후로 깊이 반성하고 있고요.”이게 어딜 봐서 뉘우치는 태도인지, 그저 궁지에 몰리니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인정하는 걸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말이다.정수미가 한숨을 몰아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저번에도 말했지만 날 독살하려던 일은 내가 여태껏 키워준 정을 봐서 눈감아주겠어. 그런데 너는 민정이만큼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해. 그 애는 내 유일한 딸이자 20 년동안 애타게 찾아 겨우 데려온 사람이란걸 네가 제일 잘 알잖아.”“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봐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꼭 민정이를 도와 회사를 잘 관리하겠습니다.”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말을 이었다.“진짜 맹세해요.”그러나 정수미의 눈에는 그저 쇼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이제 와서 회사를 관리하겠다는 그녀의 말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장난해?’“그럴 필요 없어. 그리고 우리 가문의 일은 이제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정수미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내 손으로 널 감옥에 넣을 거야. 아무리 네가 직접 죽이려 했던 게 아니더라도 벌은 받아야겠지. 이제부터 거기서 나올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윤소현은
“전 그분을 위해 친어머니와 연까지 끊었어요. 그런데 그분은요? 친딸을 찾자마자 절 버렸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윤소현은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물었으나 정수미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냉소하며 되물었다.“내가 친딸을 찾았기 때문에 널 버렸다고 생각하는 거니?”“난 분명히 말했어. 민정이를 찾았지만 내 재산은 너희 둘이서 반반씩 나누라고 했지. 그런데 네가 욕심을 부려 날 해치려 들었고 내 친딸까지 죽이려 했다고!”정수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담담하게 덧붙였다.“난 너한테 빚진 게 없어. 게다가 네가 친어머니와 연을 끊은 게 정말 나 때문이었을까? 내 손에 있는 돈이 아니라?”그녀는 조소를 머금은 눈빛으로 윤소현을 바라보며 쏘아붙였다.“내가 한 푼도 없었다면 넌 과연 친어머니와 인연을 끊었을까? 끊기 싫었다면 내가 억지로 시켰을 것 같니?”그 몇 마디에 윤소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성이 무너져 내린 듯,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그만해요! 이건 전부 엄마 잘못이에요! 대체 왜 친딸을 찾겠다고 난리예요? 제가 엄마 곁에 있는데, 그걸로 부족해요? 엄마는 평생 친딸을 못 찾았어야 했어요!”정수미는 더 이상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외면한 채 정호철에게 말했다.“호철아, 겁낼 거 없어. 어차피 난 오래 살지 못하니까 어서 들어와서 소현이를 붙잡아. 이 기회에 깔끔하게 정리하자. 사형 선고받게 만들면 되잖아.”그러나 정호철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대표님...”윤소현 역시 정호철이 정말로 정수미의 말을 들을까 두려웠다.“당장 나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죽여버릴 거야!”그녀는 단도를 더욱 깊숙이 겨누며 협박했다.그 순간, 정호철은 처음으로 정수미의 명령을 거역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단호하게 외쳤다.“뭐해? 당장 나가라고!”정수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역시 살아남지 않을 작정이었다.바로 그때 박민정이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윤소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대표님을 놔
윤소현의 손이 분노에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웅웅 울렸고 눈빛은 이성을 잃은 듯했다.“당신... 당신이 감히! 죽고 싶어요?”그녀는 더 이상 자제하지 못하고 손에 쥔 단도를 높이 치켜들었다.그러나 박민정은 재빠르게 윤소현을 향해 몸을 날려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그 순간, 윤소현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악물고 다시금 정수미를 향해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정호철이 순식간에 정수미를 감싸며 그녀를 보호했고 윤소현은 더 이상 정수미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하지만 아직 그녀에게 손쓸 방법이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박민정이었다.윤소현은 칼을 빼앗으려는 박민정을 노려보며 칼끝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박민정은 재빨리 칼을 빼앗으려 했지만 제대로 잡지 못했고 단도가 그녀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그때 누군가 그녀 앞을 가로막으며 몸을 던졌다. 칼끝이 깊숙이 파고들었고 순간 공간이 멎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박민정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고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린 정수미가 있었다.“대표님!”정호철은 즉시 윤소현을 제압하라고 명령했다.“어서! 당장 사람 불러!”밖에서는 혼란스러운 소음과 윤소현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소리가 뒤섞여 울렸지만 박민정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단지 자신을 품에 안고 희미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정수미의 말만 들릴 뿐이었다.“아가... 이번엔... 엄마가 널 지켰구나.”그 순간, 박민정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고 잊혔던 기억들이 홍수처럼 몰려왔다.비록 윤소현이 붙잡혔지만 정수미는 여전히 박민정을 놓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등에 난 상처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듯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아가야... 엄마는 정말... 네가 보고 싶었어.”박민정은 눈가가 뜨겁게 젖어오는 걸 느꼈고 목소리마저 떨려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엄마.”정수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뭐라고... 불렀니?”박민정의 목은 마치 솜
여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박민정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겠죠. 아마도 스트레스가 너무 컸던 걸 거예요.”홍주영이 애써 변호하듯 말했다. 어쨌든 두 형제 가운데 무엇이든 유남준이 앞서는 상황이었으니까.박민정은 그가 유남우를 두둔하는 걸 보곤 더는 논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마침 유남우가 커피숍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그녀는 짧게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네.”홍주영은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고 그때 유남우가 다가왔다.“방금 민정이랑 무슨 얘길 했어?”홍주영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별 얘기 아니었어요.”그러나 유남우의 눈빛에는 묘한 기색이 스쳤다.“가자, 회사로.”“네.”차 안에서 홍주영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도련님, 이번 주말에 고향에 좀 다녀오려고요.”유남우가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일 있어?”“...약혼하려고요. 가족들이 서두르네요.”순간 차 안이 고요해졌다. 늘 홍주영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등을 떠밀던 유남우였는데 이번만큼은 의외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요즘 고씨 가문과의 협력이 중요한 시기인데, 좀 미룰 수는 없겠어?”홍주영은 깜짝 놀랐다.그는 항상 자기 뜻을 존중해 주었는데 이번엔 은근히 만류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연로한 할머니, 그리고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이 떠올랐다.“...이미 다 정해졌어요. 미루기 힘들 것 같아요.”잠시 침묵하던 유남우의 시선이 깊어졌다.홍주영은 그가 늘 하던 말처럼 ‘잘됐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번엔 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널 붙잡아 둘 순 없지.”“감사합니다.”홍주영은 차분히 인사했다.“대신, 재정팀에 말해 놓을게. 약혼 선물로 두둑이 챙겨 줄 테니.”홍주영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
과거, 유남우는 암살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그 순간, 박민정은 본능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고 등에 남은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그 흉터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줄곧 자신이 구한 사람이 유남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줄곧 유남준이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믿어 왔다.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목이 텁텁해졌다.“어떻게 나한테 정신과 약을 먹일 수 있어요?”박민정은 다그치듯 물었다.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그렇게 다정했던 사람이 지금처럼 왜곡된 집착을 품게 될 줄은.유남우는 커피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채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다른 방법이 없었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 뿐이야.”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하지만 결국 넌 이미 마음을 돌렸어. 솔직히 말해서 너 처음부터 유남준을 좋아했던 거 아니야?”박민정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유남우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유남준에 대한 기억을 잃었잖아. 그런데 왜 지난 1년 동안 나랑 함께 있으면서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 처음부터 마음이 떠 있었던 거, 아니야?”그는 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 함께했던 1년동안 그녀는 그의 손길을 본능적으로 피했다. 마치 몸이 스스로 거부하는 것처럼.그리고 이제 유남우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몇 개월이나 됐어?”“...네?”박민정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임신 몇 개월이냐고.”유남우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가웠다.“얼마 전 조하랑이랑 병원에 갔었잖아.”그제야 박민정은 깨달았다. 그가 조하랑의 임신을 자신의 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해명하기도 전에 유남우가 먼저 말을 던졌다.“정말 실망이야. 형을 기억조차 못 하면서 형 아이를 가졌다고? 형이 강요한 거야? 아니면 네가 원한 거야?”그 순간 유남우의 태도는 더 이상 신사가 아니었고 그의 말
전화를 받자마자 저편에서 박민정의 차분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한 번 만나죠.”그는 휴대폰을 꼭 쥔 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좋아.”전화를 끊고 나니 박민정이 보낸 주소가 화면에 떠 있었다. 그는 운전기사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지시했다.옆자리에 앉아 있던 홍주영 역시 차가 방향을 바꾸는 것을 알아챘지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유남우는 먼저 차에서 내렸고 홍주영을 돌아보며 말했다.“홍 비서, 차에서 기다려.”홍주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유남우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는 홀로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운전사인 주범식이 그녀에게 농담조로 물었다.“홍 비서, 왜 그래? 혹시 연애가 잘 안 풀려?”직장에서의 딱딱한 모습과 달리 홍주영은 연장자인 주범식 앞에서는 좀 더 편안한 태도를 보였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아뇨, 연애는 할 만해요.”“할 만하다고?”주범식은 젊은이들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그럼 언제 결혼할 건데?”결혼...그 한마디에 홍주영은 순간 말을 잃었고 머릿속에는 하민재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확신이 없었다.“...글쎄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하겠죠.”“그렇지. 하지만 우리 도련님 같은 사람을 옆에서 오래 보면 다른 남자는 눈에 안 들어올 수도 있어. 도련님은 따뜻하고 자상하잖아.”주범식이 말을 이었다.밖에서 본 유남우는 언제나 온화하고 신사적이며 부하 직원들에게도 한없이 친절한 사람이었다.홍주영은 다시 한 번 웃었으나 이번에는 어딘지 씁쓸한 미소였다.“네, 도련님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부디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응, 좋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상처받는 일이 많다니까. 윤소현 씨는 너무 심했어. 저렇게 완벽한 남자를 두고 배신이라니.”주범식은 혀를 찼다.그는 단순한 외부인의 시선으로만 판단했다. 돈 많고 잘생기고 다정한 남자를 두고도 만
전화를 끊기 전, 조하랑은 잊지 않고 당부했다.“민정아, 아줌마께 꼭 감사 인사 전해 줘.”정수미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겪었을 일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응, 알았어.” 박민정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한편, 이지원은 집에서 송달된 변호사 서한과 연이어 도착하는 계약 해지 통지서를 바라보며 극도의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그녀는 김인우나 유남준이 곧 자신을 찾아와 추궁할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러나 시간은 잔인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지나갈수록 그녀의 불안은 더욱 깊어졌다.“어떡하지...?”이지원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이전과 달랐다. 신호가 가더니 뜻밖에도 전화가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에요?”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유남우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차가웠으나 이지원의 목소리는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었다.“남우 씨... 박민정이 전부 기억해 낸 것 같아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저 그때 당신을 도우려고 했던 거잖아요! 당신도 그때 절 보호해 주겠다고 했고요!”유남우는 병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곤히 잠든 작은 아이, 유다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이지원 씨가 착각한 것 같군요. 난 당신이 다시 스타로 복귀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 평생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어요.”“뭐라고요?”이지원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아직 남은 이성이 그녀를 붙잡았다.“제발요. 한 번만 저를 도와주세요.”유남우는 잠시 말을 아꼈다.“...나도 지금 내 앞가림하기 바뻐요.”그는 짧게 덧붙였다.“스스로 잘 살아남아 봐요.”그렇게 말한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고 휴대폰을 옆으로 던진 후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다시 아이를 바라보았다.그때 간호사가 다가왔다.“어휴, 이 아이 엄마는 도대체 언제쯤 보러 오려는 걸까요? 가족이라고는 한 명도 없고...”그녀는 유남우를 힐끔 보며 물었다.“혹시 이 아이와
정수미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때 이지원이 널 사칭하고 있었잖니?”“하지만 난 처음부터 이지원이 네가 아니라는 걸 느꼈어. 그래서 사람을 붙여 몰래 이지원의 뒤를 밟게 했고 그 과정에서 이지원이 저지른 추악한 짓들을 알게 되었지.”“그날 밤 이지원이 고용한 불량배들은 이미 내가 처리했어. 덕분에 하랑이는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단다.”모든 이야기를 들은 박민정은 가슴을 쓸어내렸다.“엄마, 저 하랑이한테 전화 좀 해야겠어요.”“그래, 다녀오렴.”박민정이 밖으로 나가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조하랑은 임신한 이후로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늘어지게 소파에 기대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머릿속도 텅 빈 것 같았다.예전 같았으면 온라인 쇼핑몰 운영으로 바쁘게 지냈겠지만 이제는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과거의 박예찬이라면 벌써 그녀를 채근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난 후, 더욱 세심하게 그녀를 챙겼다.과일을 씻어 가져다주는 것은 기본이고 밤마다 이불을 잘 덮고 자라고 신신당부했다.이런 다정한 모습에 조하랑은 마음 깊이 감동했고 아이를 반드시 낳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하랑 아줌마, 엄마가 전화하셨어요.”전화벨은 한참이나 울렸지만 조하랑은 깊이 잠든 채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박예찬은 박민정에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어 그녀를 조심스레 흔들었다.조하랑이 힘겹게 눈을 떴다.“예찬아, 무슨 일이야?”“전화 왔어요.”박예찬이 그녀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주자 조하랑은 하품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민정아, 무슨 일 있어?”박민정은 방금 전 정수미에게 들은 이야기를 차분히 전했고 조하랑은 깜짝 놀랐다.“...아 그래서...”그녀의 목소리에 미묘한 어색함이 묻어났는데 박민정은 이를 금방 눈치를 챘다.“하랑아, 혹시... 너 이미 알고 있었어?”조하랑은 잠시 망설였다.그녀는 방 안에 아직 박예찬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를
“이지원 씨, 오랜만이네요.”박민정의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이지원은 박민정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말투에 본능적으로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퍼져나감을 느꼈다.“박민정...”“그렇게 부르지 않는 게 좋겠네요.” 박민정은 가볍게 끊어 말했다. “우리 그 정도로 친한 사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걸요.”이지원의 손이 서서히 주먹을 쥐었다.“...그때 일은 나 혼자 결정한 게 아니었어요. 전부 유남우가 날 몰아세웠다고요.”“시키면 뭐든 다 해야 했다는 거예요?” 박민정이 서늘하게 되물었다.“이게 나한테 하고 싶은 변명이라는 거예요? 내 아이를 빼앗아가고 날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이지원의 몸이 공포에 휩싸였다. 날씨는 선선했지만 그녀의 이마에는 이미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요.”박민정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이미 한 번 용서했어요. 이번에도 용서한다면 그건 내가 어리석은 거죠.”한 마디 한 마디가 단호하게 박혔다. 이지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돌려 촬영장으로 도망치듯 뛰어갔고 박민정은 그녀의 초라한 뒷모습을 줄곧 지켜보았다. 쫓아갈 필요도 없었으니까.결국 그녀는 상반부 촬영을 마치자마자 강제로 촬영장에서 내쫓겼다.박민정이 차 안에 앉아 눈썹을 찡그린 채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을 때 정민기가 보고를 해왔다.“이제 어떻게 할까요?”박민정이 짧게 대답했다.“일단 높은 자리에서 끌어내려요.”지난 1년 그녀는 깨달았다. 착하게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때로는 단호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대가를 치루어야죠.”정민기는 그녀의 의도를 즉시 이해했다.“알겠습니다.”몇 시간 후, 각종 포털과 미디어 사이트에는 ‘이지원 은퇴’ 소식이 도배되었다.그녀가 맡았던 광고 계약들은 일제히 해지되었고 일부 브랜드에서는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순식간에
박민정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두 아이를 당분간 이곳에 머물게 하고 우리가 틈날 때마다 와서 함께 돌보는 건 어때요? 아이들이 우리와 충분히 친해진 후에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유남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그러나 박민정은 여전히 걱정이 남았다.“하지만 이렇게 하면 어머니께서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실까요? 혹시라도 힘드시면 내가 직접 돌보는 게 낫겠어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전혀. 어머니께서는 오히려 두 아이를 더 오래 돌볼 수 있길 바라고 계셔. 아까도 만약 우리가 아이들을 데려가게 되면 언제든 찾아와 볼 수 있냐고 물으시더라.”“그렇다면 이렇게 하기로 해요.”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흘끗 본 그녀는 어느새 시간이 늦었음을 깨달았다.“벌써 이렇게 늦었네요. 우리 이제 자요.”그녀는 피곤한 듯 하품을 하며 몸을 기울였으나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너... 뭐 잊은 일은 없어?”“뭔데요?”박민정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지만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 순간, 방 안의 불이 꺼졌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결이 섞여 들었다.다음 날 아침 10시가 지나서야 박민정은 밤새 쌓인 피로에 휩싸인 채 눈을 떴다. 씻고 난 후 그녀는 박윤우가 이미 학교에 간 것을 알았다.이때 하인이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남준 씨는요?”박민정이 물었다.“대표님께서는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는 푹 쉬시라고 하셨고 퇴근 후 일찍 돌아오실 예정이라고 하셨어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을 마친 후 그녀는 두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 정원에서는 두 아이가 작은 나비를 쫓으며 깔깔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영란의 눈길에는 애정이 가득했다.박민정이 다가가자 고영란은 기쁜 얼굴로 손짓했다.“민정아, 어서 와서 앉아.”“네.”박민정은 고영란 옆에 앉았다.고영란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유남
박윤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엄마 최고예요.”박민정은 그가 눈물을 거두고 웃음을 되찾자 꼭 끌어안으며 쉽사리 손을 놓지 못했다.저택에 도착한 후에도 그녀는 박윤우의 손을 꼭 잡고 차에서 내렸다.저택의 하인들은 박민정과 유남준이 오는 것을 보고 한결같이 공손하게 맞이했다.“두 분, 도련님들을 보러 오신 거지요?”“네.” 박민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곧바로 사모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하인 중 한 명이 서둘러 고영란에게 알리러 갔다.박민정과 유남준이 함께 왔다는 소식을 들은 고영란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민정아, 왔구나. 어서 들어와서 앉아. 마침 저녁 먹으려던 참이야.”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제 겨우 한 살 된 아이 둘이 눈에 들어왔고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박민정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로 향했는데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아이들도 그녀를 보고는 전혀 낯설어 하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와 그녀의 품에 안기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윤우는 괜히 심통이 났다.박민정이 두 아이를 품에 안고서 좀처럼 놓지 못하는 걸 본 고영란은 그녀의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감지했다.곧 그녀는 유남준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민정이 오늘 이상하지 않니?”유남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기억을 되찾았어요.”이 말을 들은 고영란은 놀라면서도 기뻤다.“그래? 정말 다행이구나!”하지만 이내 걱정이 스며들었다. 박민정이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면 아이들을 데려가려 하지 않을까?이제까지 1년 넘게 정성껏 키워온 손주들이었기에 쉽사리 떠나보낼 수 있을 리 없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아이들의 친모였고 그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데려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저녁이 되자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했다. 박민정은 직접 먹는 것보다도 두 아이에게 밥을 떠먹이는 데 더 신경을 썼다. 아무래도 피는 속일 수 없는지 아이들도 박민정을 특히 좋아하는 눈치였다.고영란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고 식사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어요?”그녀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자 유남준은 그녀의 은은한 향기를 어렴풋이 맡을 수 있었다. 그는 곁눈질로 그녀의 맑은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있어.”박민정도 그 말을 듣고는 나름 진지하게 자세를 바로 잡았다.하지만 몇 시간 뒤, 그녀는 그가 말한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정말이지 온몸이 마치 부서질 듯한 기분이었다.그녀는 유남준의 품에 안긴 채 이마에 닿는 입맞춤을 느꼈다. 유남준의 목소리는 아직도 욕망에 젖어 있었다.“한 번 더.”“아, 안 돼요. 나 못 하겠어요.”박민정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고 그녀가 정말 지쳐버린 모습을 보자 유남준도 더는 무리하지 않았다.“좋아. 천천히 하면 돼. 오늘 밤에 계속하면 되니까.”“...네?”박민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안 돼요. 오늘 밤엔 본가에 가서 애들을 봐야 해요. 예찬이랑 윤우도 있잖아요.”그녀는 네 명의 아이들을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윤우랑 예찬이, 그 아이들은 엄마를 잃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갓 태어난 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마 품을 잃었으니까.“그럼 본가에서 자면 되겠네.”유남준의 목소리는 유혹에 가득 차 있었다.“잘 때 이야기하자.”박민정은 어이없다는 듯 유남준을 바라보았다.‘이 남자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었지?’그녀는 더 이상 그 품에 기대어 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어서 씻고 가요. 엄마도 걱정하셨을 텐데 어서 전화해야죠.”박민정과 유남준은 그렇게 서둘러 집을 나섰고 정수미 역시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응.”유남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민정아, 넌 내가 이 시간을 얼마나 힘들게 견뎌왔는지 알아?”박민정은 그의 손을 가볍게 쓸어내렸다.“알죠. 방금 전까지도 절실히 깨달았어요.”유남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그럼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