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그분을 위해 친어머니와 연까지 끊었어요. 그런데 그분은요? 친딸을 찾자마자 절 버렸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윤소현은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물었으나 정수미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냉소하며 되물었다.“내가 친딸을 찾았기 때문에 널 버렸다고 생각하는 거니?”“난 분명히 말했어. 민정이를 찾았지만 내 재산은 너희 둘이서 반반씩 나누라고 했지. 그런데 네가 욕심을 부려 날 해치려 들었고 내 친딸까지 죽이려 했다고!”정수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담담하게 덧붙였다.“난 너한테 빚진 게 없어. 게다가 네가 친어머니와 연을 끊은 게 정말 나 때문이었을까? 내 손에 있는 돈이 아니라?”그녀는 조소를 머금은 눈빛으로 윤소현을 바라보며 쏘아붙였다.“내가 한 푼도 없었다면 넌 과연 친어머니와 인연을 끊었을까? 끊기 싫었다면 내가 억지로 시켰을 것 같니?”그 몇 마디에 윤소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성이 무너져 내린 듯,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그만해요! 이건 전부 엄마 잘못이에요! 대체 왜 친딸을 찾겠다고 난리예요? 제가 엄마 곁에 있는데, 그걸로 부족해요? 엄마는 평생 친딸을 못 찾았어야 했어요!”정수미는 더 이상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외면한 채 정호철에게 말했다.“호철아, 겁낼 거 없어. 어차피 난 오래 살지 못하니까 어서 들어와서 소현이를 붙잡아. 이 기회에 깔끔하게 정리하자. 사형 선고받게 만들면 되잖아.”그러나 정호철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대표님...”윤소현 역시 정호철이 정말로 정수미의 말을 들을까 두려웠다.“당장 나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죽여버릴 거야!”그녀는 단도를 더욱 깊숙이 겨누며 협박했다.그 순간, 정호철은 처음으로 정수미의 명령을 거역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단호하게 외쳤다.“뭐해? 당장 나가라고!”정수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역시 살아남지 않을 작정이었다.바로 그때 박민정이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윤소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대표님을 놔
윤소현의 손이 분노에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웅웅 울렸고 눈빛은 이성을 잃은 듯했다.“당신... 당신이 감히! 죽고 싶어요?”그녀는 더 이상 자제하지 못하고 손에 쥔 단도를 높이 치켜들었다.그러나 박민정은 재빠르게 윤소현을 향해 몸을 날려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그 순간, 윤소현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악물고 다시금 정수미를 향해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정호철이 순식간에 정수미를 감싸며 그녀를 보호했고 윤소현은 더 이상 정수미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하지만 아직 그녀에게 손쓸 방법이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박민정이었다.윤소현은 칼을 빼앗으려는 박민정을 노려보며 칼끝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박민정은 재빨리 칼을 빼앗으려 했지만 제대로 잡지 못했고 단도가 그녀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그때 누군가 그녀 앞을 가로막으며 몸을 던졌다. 칼끝이 깊숙이 파고들었고 순간 공간이 멎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박민정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고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린 정수미가 있었다.“대표님!”정호철은 즉시 윤소현을 제압하라고 명령했다.“어서! 당장 사람 불러!”밖에서는 혼란스러운 소음과 윤소현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소리가 뒤섞여 울렸지만 박민정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단지 자신을 품에 안고 희미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정수미의 말만 들릴 뿐이었다.“아가... 이번엔... 엄마가 널 지켰구나.”그 순간, 박민정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고 잊혔던 기억들이 홍수처럼 몰려왔다.비록 윤소현이 붙잡혔지만 정수미는 여전히 박민정을 놓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등에 난 상처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듯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아가야... 엄마는 정말... 네가 보고 싶었어.”박민정은 눈가가 뜨겁게 젖어오는 걸 느꼈고 목소리마저 떨려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엄마.”정수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뭐라고... 불렀니?”박민정의 목은 마치 솜
치료를 마친 정수미는 참지 못하고 서둘러 박민정을 불렀다.박민정은 그녀 앞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어색함이 스치는 듯했지만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엄마.”정수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고 눈 깊은 곳까지 따뜻함이 가득했다.“그래.”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박민정을 만지려 했지만 혹여 그녀가 거부할까 두려워 손을 공중에 망설이듯 멈추었다. 그 모습을 본 박민정은 주저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그제야 정수미는 비로소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박민정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천천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민정아... 민정아...”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안은 듯 그녀는 연신 박민정의 이름을 불렀다.박민정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자신이 이런 온기를 느낄 날이 올 줄은. 이토록 애틋한 모정이 마침내 그녀에게도 허락될 줄은.“네, 엄마.”그녀는 조용하지만 다정하게 대답했다.그 순간, 문가에 서 있던 유남준이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사태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그는 문밖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두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서로를 받아들였고 이를 본 정호철은 기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잘됐어. 민정이랑 대표님이 드디어 가족이 되었구나.”유남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요, 민정이가 가장 원했던 일이었어요.”그들은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더니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돌려 자리를 비워 주었다. 이 시간만큼은 온전히 두 사람의 것이어야 했으니까.정수미는 오랫동안 박민정을 품에 안았고 잠시 후 박민정은 그녀의 상처를 걱정스레 살폈다.“엄마, 상처 좀 보여 주세요. 얼마나 다치신 거예요?”정수미는 태연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별일 아니야. 그냥 살짝 긁힌 정도야. 의사도 그러더라. 칼날이 살을 조금 스친 것뿐이라고.”아플 텐데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정수미를 보고 박민정은 한숨을 내쉬며 단호하게 말했다.“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엄마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해요.”그러나 정수미는 단호하게 고개를
진서연은 정수미가 다친 모습을 보자마자 곧장 그녀 곁으로 다가가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띄웠다.“정 대표님, 다음에 위험한 일이 생기면 꼭 저를 불러 주세요. 아니, 아니죠. 이제부터는 절대 그런 위험한 일 따위 없을 거예요.”“하하하, 그랬으면 좋겠구나.”그렇게 두 사람은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한편, 박민정은 조용히 병실을 나섰고 정민기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괜찮아요?”그는 조금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사적인 감정으로 공사를 망쳐서는 안 됐는데 결국 그렇게 하고 말았으니.“괜찮아요.”“경호원은 이미 해고했어요. 앞으로 훈련을 더 강화할 거예요.”“그 사람을 탓할 필요는 없어요. 당시 식당 밖에 있었고 상대는 인원도 많았잖아요.”모든 사람이 정민기처럼 싸움에 능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태도와 말투에서 뭔가 달라진 것을 감지한 정민기가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다 기억난 거예요?”박민정은 망설이지 않고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전부 기억났어요.”그녀는 이어서 덧붙였다.“부탁 하나만 할게요. 이지원을 감시해 줘요.”이제는 과거 자신을 해친 사람들과 마주해야 할 때였다. 정민기는 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고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바로 사람을 붙일게요.”정민기가 떠난 후 민수아와 설인하도 찾아왔다.“민정아!”그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물었다.“왜 그래?”“둘 다 표정이 안 좋은데?”두 사람은 눈을 마주친 후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정말 다 기억난 거야?”조금 전, 그들은 박민정과 정민기의 대화를 우연히 듣고 말았다.박민정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다 기억났어.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게 떠올랐어.”마치 무겁게 짓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진 것처럼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졌다.“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야. 네가 기억을 잃고 있던 동안 우리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 특히 윤우랑 예찬이가 말이야.”“그리고 유 대표님도요.”설인하가 덧붙였다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어요?”그녀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자 유남준은 그녀의 은은한 향기를 어렴풋이 맡을 수 있었다. 그는 곁눈질로 그녀의 맑은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있어.”박민정도 그 말을 듣고는 나름 진지하게 자세를 바로 잡았다.하지만 몇 시간 뒤, 그녀는 그가 말한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정말이지 온몸이 마치 부서질 듯한 기분이었다.그녀는 유남준의 품에 안긴 채 이마에 닿는 입맞춤을 느꼈다. 유남준의 목소리는 아직도 욕망에 젖어 있었다.“한 번 더.”“아, 안 돼요. 나 못 하겠어요.”박민정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고 그녀가 정말 지쳐버린 모습을 보자 유남준도 더는 무리하지 않았다.“좋아. 천천히 하면 돼. 오늘 밤에 계속하면 되니까.”“...네?”박민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안 돼요. 오늘 밤엔 본가에 가서 애들을 봐야 해요. 예찬이랑 윤우도 있잖아요.”그녀는 네 명의 아이들을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윤우랑 예찬이, 그 아이들은 엄마를 잃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갓 태어난 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마 품을 잃었으니까.“그럼 본가에서 자면 되겠네.”유남준의 목소리는 유혹에 가득 차 있었다.“잘 때 이야기하자.”박민정은 어이없다는 듯 유남준을 바라보았다.‘이 남자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었지?’그녀는 더 이상 그 품에 기대어 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어서 씻고 가요. 엄마도 걱정하셨을 텐데 어서 전화해야죠.”박민정과 유남준은 그렇게 서둘러 집을 나섰고 정수미 역시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응.”유남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민정아, 넌 내가 이 시간을 얼마나 힘들게 견뎌왔는지 알아?”박민정은 그의 손을 가볍게 쓸어내렸다.“알죠. 방금 전까지도 절실히 깨달았어요.”유남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그럼 됐어.
박윤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엄마 최고예요.”박민정은 그가 눈물을 거두고 웃음을 되찾자 꼭 끌어안으며 쉽사리 손을 놓지 못했다.저택에 도착한 후에도 그녀는 박윤우의 손을 꼭 잡고 차에서 내렸다.저택의 하인들은 박민정과 유남준이 오는 것을 보고 한결같이 공손하게 맞이했다.“두 분, 도련님들을 보러 오신 거지요?”“네.” 박민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곧바로 사모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하인 중 한 명이 서둘러 고영란에게 알리러 갔다.박민정과 유남준이 함께 왔다는 소식을 들은 고영란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민정아, 왔구나. 어서 들어와서 앉아. 마침 저녁 먹으려던 참이야.”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제 겨우 한 살 된 아이 둘이 눈에 들어왔고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박민정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로 향했는데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아이들도 그녀를 보고는 전혀 낯설어 하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와 그녀의 품에 안기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윤우는 괜히 심통이 났다.박민정이 두 아이를 품에 안고서 좀처럼 놓지 못하는 걸 본 고영란은 그녀의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감지했다.곧 그녀는 유남준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민정이 오늘 이상하지 않니?”유남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기억을 되찾았어요.”이 말을 들은 고영란은 놀라면서도 기뻤다.“그래? 정말 다행이구나!”하지만 이내 걱정이 스며들었다. 박민정이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면 아이들을 데려가려 하지 않을까?이제까지 1년 넘게 정성껏 키워온 손주들이었기에 쉽사리 떠나보낼 수 있을 리 없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아이들의 친모였고 그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데려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저녁이 되자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했다. 박민정은 직접 먹는 것보다도 두 아이에게 밥을 떠먹이는 데 더 신경을 썼다. 아무래도 피는 속일 수 없는지 아이들도 박민정을 특히 좋아하는 눈치였다.고영란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고 식사
박민정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두 아이를 당분간 이곳에 머물게 하고 우리가 틈날 때마다 와서 함께 돌보는 건 어때요? 아이들이 우리와 충분히 친해진 후에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유남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그러나 박민정은 여전히 걱정이 남았다.“하지만 이렇게 하면 어머니께서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실까요? 혹시라도 힘드시면 내가 직접 돌보는 게 낫겠어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전혀. 어머니께서는 오히려 두 아이를 더 오래 돌볼 수 있길 바라고 계셔. 아까도 만약 우리가 아이들을 데려가게 되면 언제든 찾아와 볼 수 있냐고 물으시더라.”“그렇다면 이렇게 하기로 해요.”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흘끗 본 그녀는 어느새 시간이 늦었음을 깨달았다.“벌써 이렇게 늦었네요. 우리 이제 자요.”그녀는 피곤한 듯 하품을 하며 몸을 기울였으나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너... 뭐 잊은 일은 없어?”“뭔데요?”박민정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지만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 순간, 방 안의 불이 꺼졌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결이 섞여 들었다.다음 날 아침 10시가 지나서야 박민정은 밤새 쌓인 피로에 휩싸인 채 눈을 떴다. 씻고 난 후 그녀는 박윤우가 이미 학교에 간 것을 알았다.이때 하인이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남준 씨는요?”박민정이 물었다.“대표님께서는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는 푹 쉬시라고 하셨고 퇴근 후 일찍 돌아오실 예정이라고 하셨어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을 마친 후 그녀는 두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 정원에서는 두 아이가 작은 나비를 쫓으며 깔깔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영란의 눈길에는 애정이 가득했다.박민정이 다가가자 고영란은 기쁜 얼굴로 손짓했다.“민정아, 어서 와서 앉아.”“네.”박민정은 고영란 옆에 앉았다.고영란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유남
“이지원 씨, 오랜만이네요.”박민정의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이지원은 박민정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말투에 본능적으로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퍼져나감을 느꼈다.“박민정...”“그렇게 부르지 않는 게 좋겠네요.” 박민정은 가볍게 끊어 말했다. “우리 그 정도로 친한 사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걸요.”이지원의 손이 서서히 주먹을 쥐었다.“...그때 일은 나 혼자 결정한 게 아니었어요. 전부 유남우가 날 몰아세웠다고요.”“시키면 뭐든 다 해야 했다는 거예요?” 박민정이 서늘하게 되물었다.“이게 나한테 하고 싶은 변명이라는 거예요? 내 아이를 빼앗아가고 날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이지원의 몸이 공포에 휩싸였다. 날씨는 선선했지만 그녀의 이마에는 이미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요.”박민정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이미 한 번 용서했어요. 이번에도 용서한다면 그건 내가 어리석은 거죠.”한 마디 한 마디가 단호하게 박혔다. 이지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돌려 촬영장으로 도망치듯 뛰어갔고 박민정은 그녀의 초라한 뒷모습을 줄곧 지켜보았다. 쫓아갈 필요도 없었으니까.결국 그녀는 상반부 촬영을 마치자마자 강제로 촬영장에서 내쫓겼다.박민정이 차 안에 앉아 눈썹을 찡그린 채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을 때 정민기가 보고를 해왔다.“이제 어떻게 할까요?”박민정이 짧게 대답했다.“일단 높은 자리에서 끌어내려요.”지난 1년 그녀는 깨달았다. 착하게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때로는 단호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대가를 치루어야죠.”정민기는 그녀의 의도를 즉시 이해했다.“알겠습니다.”몇 시간 후, 각종 포털과 미디어 사이트에는 ‘이지원 은퇴’ 소식이 도배되었다.그녀가 맡았던 광고 계약들은 일제히 해지되었고 일부 브랜드에서는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순식간에
여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박민정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겠죠. 아마도 스트레스가 너무 컸던 걸 거예요.”홍주영이 애써 변호하듯 말했다. 어쨌든 두 형제 가운데 무엇이든 유남준이 앞서는 상황이었으니까.박민정은 그가 유남우를 두둔하는 걸 보곤 더는 논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마침 유남우가 커피숍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그녀는 짧게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네.”홍주영은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고 그때 유남우가 다가왔다.“방금 민정이랑 무슨 얘길 했어?”홍주영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별 얘기 아니었어요.”그러나 유남우의 눈빛에는 묘한 기색이 스쳤다.“가자, 회사로.”“네.”차 안에서 홍주영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도련님, 이번 주말에 고향에 좀 다녀오려고요.”유남우가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일 있어?”“...약혼하려고요. 가족들이 서두르네요.”순간 차 안이 고요해졌다. 늘 홍주영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등을 떠밀던 유남우였는데 이번만큼은 의외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요즘 고씨 가문과의 협력이 중요한 시기인데, 좀 미룰 수는 없겠어?”홍주영은 깜짝 놀랐다.그는 항상 자기 뜻을 존중해 주었는데 이번엔 은근히 만류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연로한 할머니, 그리고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이 떠올랐다.“...이미 다 정해졌어요. 미루기 힘들 것 같아요.”잠시 침묵하던 유남우의 시선이 깊어졌다.홍주영은 그가 늘 하던 말처럼 ‘잘됐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번엔 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널 붙잡아 둘 순 없지.”“감사합니다.”홍주영은 차분히 인사했다.“대신, 재정팀에 말해 놓을게. 약혼 선물로 두둑이 챙겨 줄 테니.”홍주영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
과거, 유남우는 암살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그 순간, 박민정은 본능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고 등에 남은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그 흉터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줄곧 자신이 구한 사람이 유남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줄곧 유남준이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믿어 왔다.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목이 텁텁해졌다.“어떻게 나한테 정신과 약을 먹일 수 있어요?”박민정은 다그치듯 물었다.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그렇게 다정했던 사람이 지금처럼 왜곡된 집착을 품게 될 줄은.유남우는 커피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채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다른 방법이 없었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 뿐이야.”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하지만 결국 넌 이미 마음을 돌렸어. 솔직히 말해서 너 처음부터 유남준을 좋아했던 거 아니야?”박민정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유남우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유남준에 대한 기억을 잃었잖아. 그런데 왜 지난 1년 동안 나랑 함께 있으면서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 처음부터 마음이 떠 있었던 거, 아니야?”그는 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 함께했던 1년동안 그녀는 그의 손길을 본능적으로 피했다. 마치 몸이 스스로 거부하는 것처럼.그리고 이제 유남우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몇 개월이나 됐어?”“...네?”박민정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임신 몇 개월이냐고.”유남우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가웠다.“얼마 전 조하랑이랑 병원에 갔었잖아.”그제야 박민정은 깨달았다. 그가 조하랑의 임신을 자신의 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해명하기도 전에 유남우가 먼저 말을 던졌다.“정말 실망이야. 형을 기억조차 못 하면서 형 아이를 가졌다고? 형이 강요한 거야? 아니면 네가 원한 거야?”그 순간 유남우의 태도는 더 이상 신사가 아니었고 그의 말
전화를 받자마자 저편에서 박민정의 차분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한 번 만나죠.”그는 휴대폰을 꼭 쥔 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좋아.”전화를 끊고 나니 박민정이 보낸 주소가 화면에 떠 있었다. 그는 운전기사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지시했다.옆자리에 앉아 있던 홍주영 역시 차가 방향을 바꾸는 것을 알아챘지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유남우는 먼저 차에서 내렸고 홍주영을 돌아보며 말했다.“홍 비서, 차에서 기다려.”홍주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유남우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는 홀로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운전사인 주범식이 그녀에게 농담조로 물었다.“홍 비서, 왜 그래? 혹시 연애가 잘 안 풀려?”직장에서의 딱딱한 모습과 달리 홍주영은 연장자인 주범식 앞에서는 좀 더 편안한 태도를 보였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아뇨, 연애는 할 만해요.”“할 만하다고?”주범식은 젊은이들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그럼 언제 결혼할 건데?”결혼...그 한마디에 홍주영은 순간 말을 잃었고 머릿속에는 하민재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확신이 없었다.“...글쎄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하겠죠.”“그렇지. 하지만 우리 도련님 같은 사람을 옆에서 오래 보면 다른 남자는 눈에 안 들어올 수도 있어. 도련님은 따뜻하고 자상하잖아.”주범식이 말을 이었다.밖에서 본 유남우는 언제나 온화하고 신사적이며 부하 직원들에게도 한없이 친절한 사람이었다.홍주영은 다시 한 번 웃었으나 이번에는 어딘지 씁쓸한 미소였다.“네, 도련님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부디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응, 좋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상처받는 일이 많다니까. 윤소현 씨는 너무 심했어. 저렇게 완벽한 남자를 두고 배신이라니.”주범식은 혀를 찼다.그는 단순한 외부인의 시선으로만 판단했다. 돈 많고 잘생기고 다정한 남자를 두고도 만
전화를 끊기 전, 조하랑은 잊지 않고 당부했다.“민정아, 아줌마께 꼭 감사 인사 전해 줘.”정수미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겪었을 일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응, 알았어.” 박민정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한편, 이지원은 집에서 송달된 변호사 서한과 연이어 도착하는 계약 해지 통지서를 바라보며 극도의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그녀는 김인우나 유남준이 곧 자신을 찾아와 추궁할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러나 시간은 잔인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지나갈수록 그녀의 불안은 더욱 깊어졌다.“어떡하지...?”이지원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이전과 달랐다. 신호가 가더니 뜻밖에도 전화가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에요?”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유남우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차가웠으나 이지원의 목소리는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었다.“남우 씨... 박민정이 전부 기억해 낸 것 같아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저 그때 당신을 도우려고 했던 거잖아요! 당신도 그때 절 보호해 주겠다고 했고요!”유남우는 병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곤히 잠든 작은 아이, 유다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이지원 씨가 착각한 것 같군요. 난 당신이 다시 스타로 복귀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 평생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어요.”“뭐라고요?”이지원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아직 남은 이성이 그녀를 붙잡았다.“제발요. 한 번만 저를 도와주세요.”유남우는 잠시 말을 아꼈다.“...나도 지금 내 앞가림하기 바뻐요.”그는 짧게 덧붙였다.“스스로 잘 살아남아 봐요.”그렇게 말한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고 휴대폰을 옆으로 던진 후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다시 아이를 바라보았다.그때 간호사가 다가왔다.“어휴, 이 아이 엄마는 도대체 언제쯤 보러 오려는 걸까요? 가족이라고는 한 명도 없고...”그녀는 유남우를 힐끔 보며 물었다.“혹시 이 아이와
정수미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때 이지원이 널 사칭하고 있었잖니?”“하지만 난 처음부터 이지원이 네가 아니라는 걸 느꼈어. 그래서 사람을 붙여 몰래 이지원의 뒤를 밟게 했고 그 과정에서 이지원이 저지른 추악한 짓들을 알게 되었지.”“그날 밤 이지원이 고용한 불량배들은 이미 내가 처리했어. 덕분에 하랑이는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단다.”모든 이야기를 들은 박민정은 가슴을 쓸어내렸다.“엄마, 저 하랑이한테 전화 좀 해야겠어요.”“그래, 다녀오렴.”박민정이 밖으로 나가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조하랑은 임신한 이후로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늘어지게 소파에 기대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머릿속도 텅 빈 것 같았다.예전 같았으면 온라인 쇼핑몰 운영으로 바쁘게 지냈겠지만 이제는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과거의 박예찬이라면 벌써 그녀를 채근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난 후, 더욱 세심하게 그녀를 챙겼다.과일을 씻어 가져다주는 것은 기본이고 밤마다 이불을 잘 덮고 자라고 신신당부했다.이런 다정한 모습에 조하랑은 마음 깊이 감동했고 아이를 반드시 낳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하랑 아줌마, 엄마가 전화하셨어요.”전화벨은 한참이나 울렸지만 조하랑은 깊이 잠든 채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박예찬은 박민정에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어 그녀를 조심스레 흔들었다.조하랑이 힘겹게 눈을 떴다.“예찬아, 무슨 일이야?”“전화 왔어요.”박예찬이 그녀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주자 조하랑은 하품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민정아, 무슨 일 있어?”박민정은 방금 전 정수미에게 들은 이야기를 차분히 전했고 조하랑은 깜짝 놀랐다.“...아 그래서...”그녀의 목소리에 미묘한 어색함이 묻어났는데 박민정은 이를 금방 눈치를 챘다.“하랑아, 혹시... 너 이미 알고 있었어?”조하랑은 잠시 망설였다.그녀는 방 안에 아직 박예찬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를
“이지원 씨, 오랜만이네요.”박민정의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이지원은 박민정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말투에 본능적으로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퍼져나감을 느꼈다.“박민정...”“그렇게 부르지 않는 게 좋겠네요.” 박민정은 가볍게 끊어 말했다. “우리 그 정도로 친한 사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걸요.”이지원의 손이 서서히 주먹을 쥐었다.“...그때 일은 나 혼자 결정한 게 아니었어요. 전부 유남우가 날 몰아세웠다고요.”“시키면 뭐든 다 해야 했다는 거예요?” 박민정이 서늘하게 되물었다.“이게 나한테 하고 싶은 변명이라는 거예요? 내 아이를 빼앗아가고 날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이지원의 몸이 공포에 휩싸였다. 날씨는 선선했지만 그녀의 이마에는 이미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요.”박민정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이미 한 번 용서했어요. 이번에도 용서한다면 그건 내가 어리석은 거죠.”한 마디 한 마디가 단호하게 박혔다. 이지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돌려 촬영장으로 도망치듯 뛰어갔고 박민정은 그녀의 초라한 뒷모습을 줄곧 지켜보았다. 쫓아갈 필요도 없었으니까.결국 그녀는 상반부 촬영을 마치자마자 강제로 촬영장에서 내쫓겼다.박민정이 차 안에 앉아 눈썹을 찡그린 채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을 때 정민기가 보고를 해왔다.“이제 어떻게 할까요?”박민정이 짧게 대답했다.“일단 높은 자리에서 끌어내려요.”지난 1년 그녀는 깨달았다. 착하게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때로는 단호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대가를 치루어야죠.”정민기는 그녀의 의도를 즉시 이해했다.“알겠습니다.”몇 시간 후, 각종 포털과 미디어 사이트에는 ‘이지원 은퇴’ 소식이 도배되었다.그녀가 맡았던 광고 계약들은 일제히 해지되었고 일부 브랜드에서는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순식간에
박민정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두 아이를 당분간 이곳에 머물게 하고 우리가 틈날 때마다 와서 함께 돌보는 건 어때요? 아이들이 우리와 충분히 친해진 후에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유남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그러나 박민정은 여전히 걱정이 남았다.“하지만 이렇게 하면 어머니께서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실까요? 혹시라도 힘드시면 내가 직접 돌보는 게 낫겠어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전혀. 어머니께서는 오히려 두 아이를 더 오래 돌볼 수 있길 바라고 계셔. 아까도 만약 우리가 아이들을 데려가게 되면 언제든 찾아와 볼 수 있냐고 물으시더라.”“그렇다면 이렇게 하기로 해요.”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흘끗 본 그녀는 어느새 시간이 늦었음을 깨달았다.“벌써 이렇게 늦었네요. 우리 이제 자요.”그녀는 피곤한 듯 하품을 하며 몸을 기울였으나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너... 뭐 잊은 일은 없어?”“뭔데요?”박민정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지만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 순간, 방 안의 불이 꺼졌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결이 섞여 들었다.다음 날 아침 10시가 지나서야 박민정은 밤새 쌓인 피로에 휩싸인 채 눈을 떴다. 씻고 난 후 그녀는 박윤우가 이미 학교에 간 것을 알았다.이때 하인이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남준 씨는요?”박민정이 물었다.“대표님께서는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는 푹 쉬시라고 하셨고 퇴근 후 일찍 돌아오실 예정이라고 하셨어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을 마친 후 그녀는 두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 정원에서는 두 아이가 작은 나비를 쫓으며 깔깔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영란의 눈길에는 애정이 가득했다.박민정이 다가가자 고영란은 기쁜 얼굴로 손짓했다.“민정아, 어서 와서 앉아.”“네.”박민정은 고영란 옆에 앉았다.고영란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유남
박윤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엄마 최고예요.”박민정은 그가 눈물을 거두고 웃음을 되찾자 꼭 끌어안으며 쉽사리 손을 놓지 못했다.저택에 도착한 후에도 그녀는 박윤우의 손을 꼭 잡고 차에서 내렸다.저택의 하인들은 박민정과 유남준이 오는 것을 보고 한결같이 공손하게 맞이했다.“두 분, 도련님들을 보러 오신 거지요?”“네.” 박민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곧바로 사모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하인 중 한 명이 서둘러 고영란에게 알리러 갔다.박민정과 유남준이 함께 왔다는 소식을 들은 고영란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민정아, 왔구나. 어서 들어와서 앉아. 마침 저녁 먹으려던 참이야.”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제 겨우 한 살 된 아이 둘이 눈에 들어왔고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박민정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로 향했는데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아이들도 그녀를 보고는 전혀 낯설어 하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와 그녀의 품에 안기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윤우는 괜히 심통이 났다.박민정이 두 아이를 품에 안고서 좀처럼 놓지 못하는 걸 본 고영란은 그녀의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감지했다.곧 그녀는 유남준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민정이 오늘 이상하지 않니?”유남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기억을 되찾았어요.”이 말을 들은 고영란은 놀라면서도 기뻤다.“그래? 정말 다행이구나!”하지만 이내 걱정이 스며들었다. 박민정이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면 아이들을 데려가려 하지 않을까?이제까지 1년 넘게 정성껏 키워온 손주들이었기에 쉽사리 떠나보낼 수 있을 리 없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아이들의 친모였고 그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데려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저녁이 되자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했다. 박민정은 직접 먹는 것보다도 두 아이에게 밥을 떠먹이는 데 더 신경을 썼다. 아무래도 피는 속일 수 없는지 아이들도 박민정을 특히 좋아하는 눈치였다.고영란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고 식사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어요?”그녀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자 유남준은 그녀의 은은한 향기를 어렴풋이 맡을 수 있었다. 그는 곁눈질로 그녀의 맑은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있어.”박민정도 그 말을 듣고는 나름 진지하게 자세를 바로 잡았다.하지만 몇 시간 뒤, 그녀는 그가 말한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정말이지 온몸이 마치 부서질 듯한 기분이었다.그녀는 유남준의 품에 안긴 채 이마에 닿는 입맞춤을 느꼈다. 유남준의 목소리는 아직도 욕망에 젖어 있었다.“한 번 더.”“아, 안 돼요. 나 못 하겠어요.”박민정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고 그녀가 정말 지쳐버린 모습을 보자 유남준도 더는 무리하지 않았다.“좋아. 천천히 하면 돼. 오늘 밤에 계속하면 되니까.”“...네?”박민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안 돼요. 오늘 밤엔 본가에 가서 애들을 봐야 해요. 예찬이랑 윤우도 있잖아요.”그녀는 네 명의 아이들을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윤우랑 예찬이, 그 아이들은 엄마를 잃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갓 태어난 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마 품을 잃었으니까.“그럼 본가에서 자면 되겠네.”유남준의 목소리는 유혹에 가득 차 있었다.“잘 때 이야기하자.”박민정은 어이없다는 듯 유남준을 바라보았다.‘이 남자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었지?’그녀는 더 이상 그 품에 기대어 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어서 씻고 가요. 엄마도 걱정하셨을 텐데 어서 전화해야죠.”박민정과 유남준은 그렇게 서둘러 집을 나섰고 정수미 역시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응.”유남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민정아, 넌 내가 이 시간을 얼마나 힘들게 견뎌왔는지 알아?”박민정은 그의 손을 가볍게 쓸어내렸다.“알죠. 방금 전까지도 절실히 깨달았어요.”유남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그럼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