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의 답을 본 이지원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오빠, 오빠가 민정 씨랑 무슨 사이인진 몰라도 민정 씨 절대 보통 아니에요.」「못 믿으시겠으면 오늘 밤 열 시, 사거리 카페로 오세요.」반드시 유남준이 보는 데서 박민정의 속내를 드러내고 말겠다 다짐한 이지원이었다.박민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간단하게 씻고 거실로 나왔는데 유남준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는 중이었다.발소리를 들은 유남준이 이지원에게서 온 메시지를 지우고 박민정을 봤다.“나가서 밥 먹자.”분명 식탁에 음식이 있는 걸 본 박민정은 의아했지만 별생각 없이 따라나갔다.식당에는 아침에 먹기 적절한 음식이 가득이었고 박민정은 그중 좋아하는 것 몇 가지만 골라 먹기 시작했다. 이에 유남준이 박민정의 행동을 주시했다.“나한테 할 말 없어?”“무슨 말이요?”박민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지원과의 일을 떠올렸다.“됐어.”유남준도 더 묻지는 않았다.박민정은 최근 너무 한가한 유남준 때문에 그가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를 할 것만 같았다.얼마 걸리지 않아 밥을 다 먹은 둘을 기사가 회사까지 데려다주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각자 일을 시작했건만 박민정은 전혀 곡이 써지지 않았고 결국 슬금슬금 유남준의 책상으로 다가갔다.“나가고 싶어요.”“그래.”서류를 넘기던 손이 멈췄다.유남준이 이렇게까지 순순히 대답할 줄 몰랐던 박민정은 당황스러웠다.사무실을 나가기 전에 박민정이 덧붙였다.“저 오늘 일이 있어서 조금 늦을 것 같아요.”유남준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잠깐 박민정의 얼굴을 살피던 유남준의 얇은 입술이 달싹였다.“무슨 일?”“개인사정이요.”박민정이 비밀인 양 말했다.딱잘라 말하는 박민정에 조금 당황한 유남준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얼음장 같아졌다.“경고하는데, 무슨 짓을 하든 날 화나게만 하지 마.”그의 말을 통해 박민정은 이지원이 일러바쳤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런데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유남준은 이런 일을 참
박민정은 그저 멀리서 그 밭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아직 있을 줄은 몰랐네...”정민기가 박민정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곳엔 자유롭고 드넓은 초원을 연상시키는 해당화 밭이 펼쳐져 있었다. 조금 낡아 보이긴 했지만 모든것이 누군가의 손길을 거친듯 생기가 돌지 않는 곳이 없다. 별장의 주인이 정성스레 고심해서 가꾼듯 했다.“여긴?”“옛날에 진주에서 살 때 살던 집이에요.”정민기의 질문에 박민정이 답했다.들어갈 자격이 없어 그저 보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이만 가죠.”박민정이 차에 올라탔고 곧이어 차는 천천히 별장에서 멀어져갔다. 관목숲 사이 어딘가 한 남자가 이상한 모습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박민정은 그 남자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시내에서 한 바퀴 더 돌던 박민정이 정민기에게 이만 두원에 데려다 달라고 했고 두원에 도착한뒤 그녀는 작업실에서 곡을 썼다.경호원이 박민정의 행적을 모두 유남준에게 알렸고 유남준은 그 카페로 가기 위해 아홉 시 조금 넘은 시각에 출발했다.한편, 박민정도 두원에서 출발하려는 참에 정민기가 메시지를 보냈다.「유남준 씨 차가 역시나 사거리로 가고 있습니다.」두원으로 가기 전, 정민기에게 유남준이 어디로 가는지 지켜봐 달라 했는데 역시 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이지원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고자질을 좋아했으니.늦은 밤, 카페에는 별다른 사람이 없었다.이지원이 예약한 룸은 야경뷰였고 박민정은 정시에 도착했다.박민정이 원피스에 위에 작은 겉옷 하나를 걸친 이유는 알레르기 때문이었는데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겉옷을 챙겼을 것이다. 밖에 오래 있을 때면 추위를 극도로 타는 체질이기에 여름이더라도 늘 겉옷을 챙겼기 때문이다. 박민정의 분위기와 모습은 시야를 탁 트이게 하기 충분한 모습이었다. 몸매는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왔고 얼굴은 고상하여 한 번 본 사람은 절대 잊지 못할 모습이었다.이지원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박민정을 질투한다 하는 게 더 맞았다.한수민
박민정이 일어나 이지원의 앞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제가 변했다면서 왜 아직도 예전의 저를 대하듯 하세요? 아직도 지원 씨한테 속을 것 같나요, 제가? 사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요. 그냥 지원 씨랑 같은 사람 되기 싫어서 반격하지 않았던 거지."박민정이 룸을 나가며 덧붙였다."다음에는 조금 발전하셨으면 좋겠네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안타깝다는 표정이 어딘가 음침해 보여 두렵기 시작했다.카페를 벗어난 박민정이 정민기가 알려 준 자리의 차가 없어진 걸 발견하고 숨을 내쉬었다.문득 유남준이 더 이상 자신이 예전에 좋아하던 그 어린 소년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그 소년은 속내를 다 드러냈고, 자신에게 잘해 줬다. 물론 의심 같은 것도 하지 않았었다.박민정이 생각에 잠긴 채 차를 타고 떠났다.이지원이 건물을 나와 몇 걸음 채 걷지 않았을 때 어떤 남자가 불쑥 나타나 이지원의 손목을 붙잡고 으슥한 곳으로 갔다."지원아, 보고 싶었어."눈앞의 남자는 수염이 거뭇거뭇했고 눈 밑은 푸르뎅뎅했다. 누가 봐도 잠을 못 잔 사람의 모습이었다."임수호,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몇 번을 더 얘기해야 해? 난 너랑 LA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정말 날 위한 거면 어서 돌아가."임수호가 상처받은 눈빛으로 말했다."유남준 때문이지? 걘 너한테 마음 없다니까? 널 좋아했다면 진작 결혼했겠지.""그게 뭐? 적어도 내가 원하는 건 줄 수 있는 사람이야."이지원은 흔들리지 않았다."넌 뭘 줄 수 있는데?""난...""지금의 넌 아무것도 못 해."임수호가 이지원의 팔을 단단하게 잡았다."내 회사는 망했지만, 곡은 아직 쓸 수 있어. 너만을 위한 노래를 써 줄게."이지원이 비웃었다."그딴 곡 필요 없어. 넌 재능이 없다고. 언제 인정할래?"임수호의 눈이 빨개졌다."사람이 어떻게... 왜 이렇게 냉정해진 거야. 그때 내가 없었으면 지금의 네가 있을 것 같아? 이제는 내가 널 원한다고!"임수호가 화내는 걸 보더니 이지원이 말투를
박민정이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유남준은 짙은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강렬한 눈빛을 박민정에게 보냈다."재미있었어?""나쁘지 않았어요."유남준이 일어나자 그 몸이 박민정의 시야 반을 가렸다."이지원이 그러던데, 2,000억에 날 팔려 했다고."박민정이 멈칫했다. 분명 다 들었으면서 왜 나한테 또 묻는 건지 의아했다."그런 적 없어요.""그래?"유남준이 몸을 가까이하자 박민정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저랑 지원 씨 사이가 안 좋은 건 아실 테고, 전에 어머님께서 주신 돈도 받지 않았는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예요?"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을 다 듣고도 쉽사리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이지원이 박민정에게 자신이 했던 짓을 모두 들킨 게 아니라면 유남준을 부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딱히 더 묻지는 않았다."더 하실 말씀 있어요?"박민정의 등이 벽에 닿았다.그 조심스러운 모습에 유남준의 목울대가 울렁였다.탐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할 때면 정신줄을 꽉 붙잡고 있기 힘들었다."돈은, 준비했어?"이렇게 빨리 달라 할 줄 몰랐던 박민정이 흠칫했다."아직이요.""그럼 내가 제안 하나 하지."유남준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우린 결혼한 사이인데, 당신이 아내로서의 책임을 다한다면 예물은 당연히 안 줘도 돼."‘아내로서의 책임?’성인인 박민정이 이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오른 박민정이 당황한 틈을 타 유남준의 뜨거운 손이 박민정의 얼굴을 쥐고 살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한 번에 200억, 어때?"박민정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대체 유남준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짜증이 났다.이 말을 들으니 첫날 반항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탐했던 유남준이 떠올랐다."싫어요."박민정이 유남준을 밀어내고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문을 잠갔다.품속이 갑자기 텅 비어 버린 유남준은 박민정이 왜 또 화난 건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그는 자신이 아는 여자들 중 오직 박민정만이
"난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는데."유남준이 차갑게 말했다.그럼에도 강은지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 경호원이 끌어내려 해도 테이블을 잡고 놓지 않았다."대표님, 절 때린 사람이 그랬어요. 제가 일을 잘 못해서 대표님께 누가 되었다고. 제발 저 좀 한 번만 봐주세요, 대표님. 여기서 죽고 싶진 않아요..."강은지가 통곡하며 간절하게 말했다. 그 얼굴에 가득한 상처는 다 나은 뒤에도 흉터가 남을 게 뻔했다.유남준은 원래 개입할 생각이 없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명분으로 내세워 폭력을 휘두른다니 생각이 바뀌었다."자세히 얘기해 보지."경호원에게 강은지를 놓으라 이르자 강은지가 다시 무릎 꿇고 말했다."대표님을 뵌 날, 퇴근하고 돌아갔는데 새벽 두세 시쯤에 누가 절 침대에서 끌어내렸어요. 절 때리고 욕하면서 어떻게 감히 저 같은 게 대표님을 성가시게 하냐고... 그날부터 저한테 손님 접대를 하라고 시켰어요. 거부하면 또 때리고 욕하면서..."강은지의 눈에서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렀다. 유남준은 누군가의 지시가 없이는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그는 경호원에게 강은지를 데려다주게 하고, 누가 벌인 짓인지 찾아내게 했다.수호 클럽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범인을 찾는 건 시간 문제였고 한 시간 정도 지나자 경호원이 보고를 올렸다."대표님, 범인을 찾아보니 배후에 이지원 씨가 있었습니다."또 이지원이다.유남준이 전부터 이지원이 하는 일에 관심을 껐더니 이젠 이렇게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짓을 한다."이지원한테 전해.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그땐 이렇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잠깐 멈칫했던 경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유남준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유남준이 화를 낸 포인트는 사람을 시켜 강은지를 때린 게 아니라, 명분으로 자기를 댔다는 것이었다.이지원은 유남준이 이 사실을 알게 돼도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경호원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선을 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어떻게 변명해
박민정이 슬리퍼를 끌고 거실로 나왔을 때 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언제?""오전 열 시."조하랑이었다."지금 갈게."박민정이 전화를 끊고 잠시 고민하더니 유남준에게 문자를 남겼다.「친구 집 좀 갔다 올게요.」조하랑네 집에 가는 김에 박예찬도 볼 수 있으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고작 며칠 못 본 것뿐인데도 꽤 오래 못 본 것처럼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수호 클럽 내부는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남준아, 아침부터 무슨 술이야."억지로 불려 온 김인우가 피곤한 듯 말했다."나 요즘 바쁜 거 알잖아."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김인우는 가운조차 못 벗고 달려왔다.건들거리는 김인우를 보던 유남준이 말했다."네가 성원이처럼 아내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바쁘긴 뭐가 바빠.""그럼 넌 아내도 있는 놈이 왜 여기 있어?"유남준이 할 말을 잃자 분위기를 읽은 김인우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요즘 의학 제대로 배우느라 요 며칠 수술만 몇 번 집도했는지 몰라."물론 조하랑을 조사하는 것도 바쁜 일에 포함이었다.그 여자가 도대체 자신과 겹치는 게 얼마나 있는지 알고 싶었는데 심지어 애도 있었다. 물론 그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왜?"유남준은 김인우가 이렇게까지 변한 이유가 궁금했다."왜라니?""전엔 죽어도 의사는 안 한다며."김인우가 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그땐 어렸잖아. 이제 보니까 의사 하면 사람도 살릴 수 있고 얼마나 좋아."거짓이었다.박민정이 돌아온 후, 김인우는 쭉 박민정의 난청과 출혈을 연구했다.얼른 의사가 되어서 박민정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들었으면 좋겠다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건 그가 박민정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했다.유남준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아 굳이 더 묻지 않았다.핸드폰을 보니 박민정이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사과하려는 줄 알았더니 친구 집에 간다는 통보였다."왜, 민정이가 감시해?"유남준의 얇은 입술이 달싹였다."아니, 친
박민정은 일찍이 조하랑의 집에 도착하여 함께 아침밥을 먹고 이지원을 기다렸다."이지원이 왜 갑자기 사과하겠다는 거야?"조하랑이 궁금증을 못 참고 물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지원은 돈으로 기사를 막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사과하겠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그런데 박민정도 의문스러운건 마찬가지였다.이지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유남준과 김인우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스캔들은 그들에게 있어 손쉽게 덮어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무슨 연유든 간에 이지원을 돕고 싶지 않아진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됐어. 억울한 것만 풀면 됐지."박민정이 가볍게 답했다."이따가 자리 비켜 줄 테니까 잘해 봐.""알았어~"열 시가 되자 이지원이 정말로 조하랑의 거실에 발을 들였다. 박민정은 잠시 안방에 들어가 있었다.이지원은 변호사와 함께였는데 마스크와 선글라스까지 쓴 채였고 소파에 앉아 있는 조하랑은 젖살이 있어 나이답지 않게 꽤나 어려 보였다."하랑 씨, 안녕하세요."이지원은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이에 조하랑은 이지원에게 앉으라 권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이지원 씨, 그런 건 됐고 사과부터 하시죠."이지원이 멈칫했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사과했다."죄송해요.""성의가 전혀 안 보이는데, 합의는 없던 걸로 하는 게 낫겠네요."조하랑이 일부러 이지원을 궁지에 몰자 욱한 이지원을 변호사가 겨우 말렸다."죄송합니다."이지원이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허리 굽혀 사과했다."일을 더 이상 크게 벌리지 않는 대신 원하시는 모든 보상을 해 드리겠습니다."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던 이지원이 저렇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조하랑의 마음속에 말로 설명 못 할 쾌감이 피어올랐다."제 위탁인이 말한 조건에 따르면 사과한 뒤에 표절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하던데, 괜찮으시겠어요?"박민정이 이미 조하랑에게 조건을 말해 뒀다.조하랑은 이지원이 표절한 사건을 묻으라니, 누구 좋으라고
이지원이 전화를 끊고 조하랑 집위치를 보냈다.한편, 조하랑은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몰래카메라를 가져왔다."역시 박민정. 공식적으로 사과할 리 없으니까 동영상으로 남긴거구나. 이런건 어떻게 생각해냈대?"이지원이 사과하는 과정, 매수하는 과정까지 전부 카메라에 담겨 있었다."이지원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으니까. 뭔가 얻는 게 없다면 절대 사과하지 않을 사람이야.""당장 인터넷에 뿌릴게."흥분한 조하랑을 박민정이 말렸다."좀 참아 봐. 아직 때가 아니니까..."아직 이지원은 명성이 있기에 이 영상만으로는 많이 봐야 명예훼손이고 잘못하면 맞고소까지 당할 수 있었다."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조하랑은 박민정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박민정이 조하랑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해보니 연지석이었다."민정아, 나 이제 곧 비행기 타는데 진주시에 도착하는 건 아마 밤 열한 시쯤일 거야."낮고 굵은 목소리였다.밤 열한 시라면 박민정이 마중 나갈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그 시각, 연지석은 핸드폰을 꽉 쥐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내일 네 생일이지?"자신도 까먹은 생일을 연지석이 언급하자 박민정은 잠시 놀랐다.박민정의 생일이 한수민에게는 재난이나 다름없어 부모님과 함께 산 후로는 생일을 지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남준과 결혼하고 나서는 매번 혼자 보내다 보니 결국 생일을 안 쇠게 되었다."응.""오늘 밤에 같이 축하하자.""그래, 마중 나갈게. 오늘 친구네서 자기로 했거든."그러자 연지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실례 아닐까?"박민정이 엿듣고 있던 조하랑을 쳐다보자 조하랑이 말했다."괜찮아, 와도 돼."근 사 년 동안 조하랑은 그저 멀리서 몇 번 본 게 다였지만, 그의 용모는 늘 단정하고 수려했기에 조하랑은 그를 거의 남자 구미호로 여기고 있었다."와도 괜찮대.""알았어, 이만 끊을게. 저녁에 봐."전화를 끊은 연지석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전용기에 오
연지석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이사회가 모든 경영권을 저에게 넘겼으면, 저를 전적으로 믿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네가 해외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널 모를 줄 알아? 너 지금 그 유부녀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이사회도 이미 만장일치로 결정했어. 네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의 자금 지원은 없을 거야. 그리고, 그 여자는 네가 먼저 안 끊어낸다면 우리가 대신 처리해줄 수밖에 없어!”말을 마친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연지석은 있는 힘껏 손안의 휴대폰을 꽉 쥐었다.그는 적어도 자신이 해외에 있는 동안 만큼은 이 고집불통 꼰대들이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연지석은 곧장 하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늙은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도 알고 있었어?”그 말에 하민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처음부터 내가 얘기했잖아. 그 사람들이 형이랑 박민정이 무슨 사이인지 알게 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네가 일러바친 거야?”연지석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서늘해졌다.그 목소리에 불안감을 느낀 하민재가 다급하게 해명했다.“당연히 아니지. 내가 어떻게 형을 배신할 수 있겠어? 벌써 잊은 거야? 내가 누구 때문에 유남준이 보낸 사람한테 그렇게 처맞았는데.”연지석 역시 하민재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그럼 연우석이겠네.”연우석이라면 연지석의 형이자 명목상 연씨 가문의 후계자였다.하지만 그런 연우석의 위치는 최근 들어 연지석 때문에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었다.“그 형 원래 이런 짓 많이 하잖아. 조심해.”하민재가 당부했다.“응, 나도 알고 있어.”전화를 끊은 연지석은 답답한 마음에 책상을 초조하게 두드렸다....정씨 가문에서 XS 그룹을 고립시켰다는 소식은 빠르게 회사 전체에 퍼졌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주겠다던 회사들도 모두 다급하게 XS 그룹과 계약을 해지했다.결국, 남은 것은 손연서와
“현재, XS 그룹의 모든 업무는 중단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협력사들이 계속해서 박민정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고 하더군요. 일주일 내로 문제를 해결하기만 한다면 계속해서 거래를 이어나가겠다고 한 모양입니다.”정수미가 태연하게 물었다.“일주일 안에?”뒤이어 그녀가 서늘한 냉소를 흘렸다.“만약 정말 일주일 내로 해결한다면, 내가 직접 박민정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정수미가 휴식을 취하려던 그때, 그녀의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 보니 박민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있었다.정수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여자가 감히 자신에게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수신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은 정수미가 물었다.“민정이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다니, 무슨 일이지?”뒤이어 수화기 너머에서는 박민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정 대표님, 사업 경쟁을 하고 싶으면 정당한 수단으로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제 기밀문서를 빼돌리시고, 제 회사 건물까지 침입하신 건 선을 넘은 것 같습니다만.”박민정은 이미 회사 직원에게서 모든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정수미 역시 박민정이 이렇게나 빨리 배후를 알아차릴 줄 몰랐지만 굳이 놀란 티를 내지는 않았다.“그 선이 도대체 뭘까? 민정이 네가 함미현, 염혜란이랑 짜고 날 속일 때는 그 선이라는 걸 생각해봤니?”“아, 그 일 말씀이신가요?”박민정은 그제야 정수미가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았다는 듯 말했다.“확실하게 말해드릴 수 있는 건, 저는 단 한 번도 정 대표님을 속인 적 없다는 겁니다. 정 대표님께서 사람을 똑바로 못 알아보신 건, 대표님 탓 아닌가요?”한편, 옆에서 모든 대화를 다 듣고 있던 비서의 손에는 벌써 식은땀이 흥건했다.정수미가 정씨 가문을 이끌어가기 시작한 후로 그 아무도 이런 식으로 그녀를 대한 적이 없었다.박민정은 정말 다른 의미로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었다.정수미의 차분하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굳이 네가 인정하길 바라진 않아. 그래봤자 너는 네
“지석 씨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네요.”유남준은 이 말만 남긴 채 사무실을 벗어났다.문을 열자 문 앞에 서 있는 에리가 보였다.단순히 사무실 앞에서 자신의 두 경쟁자가 서로를 공격하며 상처 주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에리는 자신의 예상과 달리 순조롭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당황스러워 보였다.유남준은 그런 에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다른 업무를 처리하러 걸음을 옮겼다.그리고 뒤이어 사무실에서 나오던 연지석은 사무실 앞에 서 있던 에리를 발견하자마자 혐오 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에리 씨가 유 대표한테 내가 돌아왔다고 일부러 고자질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저는 에리 씨처럼 음흉한 사람이 제일 소름 끼칩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에리도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반박했다.“사람마다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다를 뿐인데, 그걸 왜 소름 끼친다고 하세요?”그 말에 연지석이 가볍게 비웃음을 흘렸다.“정말 진심으로 민정이를 좋아하세요?”그 질문에 에리의 말문이 순간적으로 막혔다.“당연하죠.”“정말 민정이를 좋아한다면, 더 이상 민정이 곤란하게 하지 말고 행복하게 내버려 두세요.”연지석은 그렇게 에리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더니 자신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에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얼어붙은 채, 조금 전 연지석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그 역시 당연히도 박민정이 행복하길 바랐다.에리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연지석 같은 사람에게 에리 같은 연예인 한 명 나락 보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는 것을.지금 연지석은 단지 에리가 박민정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 중이었다.그리고 박민정은 자신의 사무실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이런 일을 벌일 인물이 누구일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사실, 박민정에게는 적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윤소현이나 최현아가 전부였다.요즘 들어 별다른 문제를
왜인지는 몰라도 유남준에게 이런 식으로 한바탕 굴려지고 나니 박민정도 더는 조급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차분해지기 시작했다.회사에 도착한 후로도 난장판 속에서 침착하게 모든 것을 차근차근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곧이어 진서연과 민수아도 회사에 도착했다.진서연은 곧장 설인하와 함께 조사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껏 화난 표정으로 돌아왔다.“조사 해봤는데 회사 직원이 한 짓이랍니다. 기밀문서를 팔아서 돈을 벌려고 했대요.”“단순히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다면서 왜 회사까지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걸까요?”박민정이 물었다.회사까지 오는 도중에도 박민정은 회사 내부 직원을 의심해 왔었다. 보안도 철저한 데다 감시카메라까지 있는 회사에 외부인이 침입하긴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단순히 화풀이를 하고 싶었대요. 회사에서 매일 힘들게 출근하고 근무하는 게 너무 짜증 나서 그런 짓을 했다고 하던데요.”하지만 진서연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우리 회사는 다른 회사보다 사내 복지가 훨씬 좋은 곳이에요 그런데 힘들다고 이런 짓을 한다고요? 분명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게 분명해요.”진서연도 다 눈치챌 정도였으니 박민정이 눈치채는 것쯤은 시간문제였다.“우선 진정하고, 사라진 기밀문서들이 어떤 건지부터 확인해 보자.”“알겠어요.”진서연은 박민정과 유남준을 데리고 대표실로 향했다.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박민정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조금이라도 중요하다 싶은 문서들은 전부 사라진 상태이었다.도대체 누가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들려 한 걸까?박민정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리고 하필 지금, XS 그룹의 기밀문서가 사라졌다는 기사가 외부로 알려지고 있었다.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관련 업체에서 전화가 걸려오더니 박민정에게 책임을 물으며 계약 파기를 요구했다.유남준은 그런 박민정이 순간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 걱정되어 직접 사태 수습에 나섰다.그리고 진서연은 이 모든 것을 그저 안타깝게 지켜봐야만 했다
이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죄송해요, 엄마. 민정 씨는 아직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있더라고요. 오히려 엄마 소원을 이뤄줬다면서 우기고 있었어요.”그 말에 정수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참, 그 여자도 정말 보통 여자가 아니야. 네가 그동안 괜히 그런 수모를 겪은 게 아니었어. 시간도 늦었으니 이제 그만 쉬러 가 봐.”“네.”이지원은 공손한 자세로 인사를 건넨 후 자리를 떴다.이지원이 밖으로 나가자 정수미의 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예전과는 다르게 그녀는 훨씬 더 차분해졌고 자신의 친딸이라며 나타난 여인을 함부로 믿지도 않았다.그런 정수미를 비서도 눈치챈 듯 물었다.“대표님, 왜 이렇게까지 지원 아가씨를 차갑게 대하시는 겁니까?”“저 아이가 나타난 시기가 너무 절묘하게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진 않아?”정수미가 되물었다.말을 마친 그녀가 서류들을 꺼내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이것들 좀 봐. 저 아이가 겪었던 일들이 너무 많아.”정수미는 ‘많다’라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게다가, 지금 저 아이의 착하고 얌전한 모습도 전부 연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지금, 정수미는 맑은 정신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였다.비서는 정수미가 내민 서류들을 펼쳐보며 이지원이 예전에 저질렀던 일들을 발견했다.“이래서 김씨 가문과 유씨 가문이 아가씨를 적으로 돌렸던 거군요.”정수미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저 아이가 정말 내 딸이 맞다면, 이참에 제대로 가르쳐야겠어.”정수미는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악인도 아니었다.“박민정이 새로 세운 회사가 요즘 잘 되고 있다던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지?”정수미는 이제 자신의 딸을 들먹이며 자신을 속여온 박민정 역시 마냥 좋은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게다가 자신의 두 딸인 윤소현과 이지원 모두 그녀에게 괴롭힘을 당한 전적이 있으니 언제 한 번 박민정에게 제대로 된 복수를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네. 이제 부잣집 딸들도 이렇게 위험할 수가 있다니.”민수아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뉴스 속보를 보던 박민정은 어딘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불안한 마음에 정신이 멍해진 박민정이 입을 열었다.“하예솔은 내 동창이었어. 그 아이의 죽음이 단순하지만은 않을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배에 손을 얹었다.박민정의 말을 들은 민수아와 다른 사람들은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뉴스에까지 나온 피해자가 박민정과 아는 사이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 말이다.유남준도 뉴스를 보자마자 요 며칠 동안은 더욱더 신경을 써서 박민정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다음 달이면 박민정은 출산을 할 예정이었고 더 지나서는 박윤우의 수술도 준비해야 했다.그날 밤, 불안함에 박민정은 침대에서 한참이나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메시지 알림음이 울리자 그녀는 곧장 휴대폰을 들어 확인해 보았다. 낯선 번호로 온 문자였다.[민정 씨, 오랜만이네. 우리 만나서 얘기 좀 할까요? 나 지원이에요.]박민정에게 온 문자 메시지는 유남준도 곁에서 함께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미간을 짙게 찌푸린 채 말했다.“잠이나 자자.”박민정도 휴대폰을 끄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다시 한번 이지원에게서 문자가 왔다.[예전 일은 제가 다 잘못했어요. 다 민정 씨가 질투 나서 그랬던 거예요. 이제는 저도 친엄마를 찾았으니 이제 화해하면 안 될까요? 저 지금 민정 씨 집 근처인데.]그 메시지를 확인한 박민정은 이지원이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최대한 문자를 무시하고 싶었다.하지만 이지원에게서 또 한 번 문자가 왔다.[미현 씨가 사실대로 다 얘기해줬어요. 그러니까 저를 만나주지 않는다는 건, 민정 씨가 그 사실을 부정한다는 거겠죠.]그 문자에 박민정의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녀는 곧장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유남준에게 말했다.“한 번 가 봐야겠어요.”그녀는 이지원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가정부가 그런 이지원에게 설명했다.“아가씨, 여기는 정씨 가문의 임시 거처예요. 서울에 있는 저희 가문 본가는 정말 말도 안 되게 으리으리하거든요.”이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요, 정말 가 보고 싶네요.”“몸 다시 좋아지시면 그때 가 보세요.”가정부가 대답했다.이지원은 함미현에 전에 살던 방에 머물게 되었다.예전 같았으면 이런 방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그녀는 호화롭고도 사치스러운 침대 위에 눕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예전의 연락처 목록을 훑다가 하예솔이라는 두 글자에서 스크롤을 멈췄다.“하예솔! 예솔아! 너도 예상 못 했겠지? 세상은 원래 돌고 도는 법이야.”과거, 이지원이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의 약혼남이었던 권씨 가문의 셋째 아들이었던 권진하와 사귄다는 것을 알게 된 하예솔은 이지원을 제호 클럽의 최하위층으로 내몰았었다.이지원은 그곳에서 우연히 김인우를 만나게 되었다.그리고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각종 비인간적인 대우였다.이지원은 아직 자신이 김인우나 박민정 같은 사람들과 맞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우선 가장 만만한 상대부터 처리해야 했다....하예솔은 권진하와 결혼을 했다.과거, 유남준을 해치려 했던 권진하의 둘째 형은 그 이후로 행방이 묘연해졌다.그렇게 지금 권씨 가문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권진하였지만 학력도, 기술도 없었던 그는 매일 놀고 마시는 것에만 빠져 여자들과 어울려 지냈다.하지만 정략결혼이었던 데다가 이미 권진하에게 한 번 배신까지 당해봤던 하예솔은 권진하가 어떻게 살든 애써 모른 척하며 살아왔다.그녀 역시 이지원이 정수미의 친딸이라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술에 잔뜩 취한 채 집으로 들어온 권진하가 냅다 웃옷을 벗어 던지며 외쳤다.“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봐. 자금 우리 권씨 가문이 너 때문에 정씨 가문이랑 완전한 적이 되어버렸어!”하예솔 역시 이번 일만큼은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던 탓에 그저 고개만 푹 숙였다.“당장 이혼하러 가자.”형과는
김인우 역시 그 뉴스를 보게 되었다.“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이지원 같은 거짓말쟁이가 어떻게 정수미의 친딸이라는 걸까?조하랑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맞장구쳐주었다.“내 말이, 저렇게 못돼먹은 인간인데. 거짓말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딨어?”김인우는 미간은 꾹꾹 눌렀다.만약 저게 사실이라면 자신도 꽤 곤란한 상황에 놓인 것이기 때문이다.혼자서 정씨 가문을 척치고 살 수는 없었다.“인우 아저씨, 할아버지가 들어오라고 하시던데요.”박예찬이 김훈의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진지한 김인우의 표정으로 미루어봤을 때, 안 좋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무슨 일인지 얘기해 줄래?”박예찬이 대답했다.“이지원이랑 관련된 일이에요.”김인우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더니 마지 못해 김훈의 방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김훈에게서 떨어질 불호령을 각오하고 안으로 들어섰지만 김인우의 예상과는 다른 말이 김훈의 입에서 나왔다.“내가 뭐라고 했어? 이지원 같은 인간은 절대 믿어서도, 상대해서도 안 되는 쓰레기라고!”평소 부드럽기만 하던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가 김인우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정수미에게서 오늘 연락이 왔어. 예전 일은 다 없던 일로 해줄 테니, 앞으로는 이지원에게서 신경 끄라고 하더구나.”그 말에 김인우가 성가시다는 듯 대답했다.“네.”그러자 김훈은 휠체어를 돌려 김인우를 노려보았다.“너는 줏대도 없냐, 이 자식아? 남이 그렇게 하라고 하면, 바로 수긍할 거야?”할아버지의 알 수 없는 태도에 김인우도 답답해졌다.“그럼 할아버지 생각은 어떠신데요?”“아직까지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정씨 가문과 맞설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막상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 아니냐?”김훈이 천천히 말했다.갑자기 현실적으로 변해버린 할아버지가 김인우로서는 놀랍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답변을 받아낸 김인우는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이지원이 먼저 저를 속였으니 그에 맞는 대가는 꼭 치르게 할 겁니다. 정씨 가
이지원이 친자 확인 검사 결과를 받은 그 날, 정수미는 곧장 그녀를 병원으로 보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정수미는 이지원의 몸에 남겨진 수많은 상처들과 뼈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몸을 보며 물었다“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정수미의 눈에는 안타까움만 잔뜩 묻어 있었다.이지원은 다정한 눈길로 정수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저는 괜찮아요, 하나도 아프지 않을걸요. 다 제가 너무 어리고 철이 없어서, 사람들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던 탓이에요.”이지원은 함미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그 말을 들은 정수미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미안하구나, 널 더 일찍 찾지 못했던 내 탓이야.”왜인지는 몰라도 이지원을 마주한 정수미의 마음이 아려왔다. 상처 많은 딸이 안타깝긴 했지만 함미현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감동은 느껴지지 않았다.아마 이미 한 번 데인 탓에 트라우마가 남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엄마, 그런 말씀 하세요. 제가 보육원에 보내진 건 절대 엄마 탓이 아니에요. 언니한테서 들었는데, 엄마는 저를 찾는 걸 포기한 적 없다고 그랬거든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 받고 치유 받았어요.”이지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정수미는 이지원에게서 엄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눈에 띄게 멍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다시 정신을 차렸다.“일단 쉬고 있어. 곧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난 잠깐 나갔다가 올게.”“네.”정수미는 병실을 나서자마자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녀의 뒤를 따라 나오던 비서가 말을 걸었다.“대표님, 잠깐 쉬시는 게 어때요?”그 말에 정수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분명 내 친딸을 찾았는데도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답답해.”“아마도 함미현 때문일 겁니다. 그 여자가 너무도 뻔뻔하게 대표님을 속여왔으니까요.”정수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그럴지도 모르지. 가자, 그 애 보러 가야지.”“네.”함미현의 병실은 일반 병실이었다.정수미와 그녀의 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