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에 남아 있는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남준은 지금껏 회의 중에 나가는 일이 없었다.서다희가 눈총에 못 이겨 유남준을 쫓아나갔다."대표님."유남준이 조용히 하라는 눈빛을 보내고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지금 전화를 건다면 자신이 박민정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유남준은 그대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결국 유남준은 종일 안절부절못하며 밤이 올 때까지 밥도 못 먹고 집으로 갔다.문을 열자 유남준을 반기는 건 소름 끼치도록 조용하고 어두운 집이었지만 유남준은 불을 켜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핸드폰을 수시로 확인하면서도 유남준은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때쯤 화면이 켜졌다.「사모님께서 공항으로 가셨습니다.」경호원이 보낸 메시지였다.동공이 축소되며 박민정이 도망가려 한다 생각했다.박민정은 한 번 사라졌다 하면 4년이기에 유남준은 겉옷도 제대로 못 챙기고 차 키만 챙겨 그대로 집을 나섰다.풀 악셀을 밟으며 정림원 쪽으로 전화해 물었다."그 아이 잘 있나 확인해 봐."잠들었었던 가정부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박윤우의 방으로 향해 확인했다. "네, 잘 있어요."박윤우는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그제야 유남준이 한시름 놓았다. 박윤우가 있는 한 박민정이 도망갈 일은 없으니."오늘 밤 잘 감시하고 계세요."정림원은 경비가 삼엄해서 아무나 아이를 데려갈 수는 없었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당부했다."네."가정부는 다시 자려던 생각을 지워 버리고는 사람을 시켜 보안 장치를 모두 켜게 했다.금세 경호원이 보낸 위치에 도착한 유남준이 인파 사이에서 공항으로 들어가는 박민정을 발견했다.출구 게이트 가까이 박민정이 시간을 확인하니 연지석이 나오기까지는 십여 분 남아 있었다.그녀는 오늘 나올 때 미행하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공항으로 출발했다. 그녀는 유남준의 부하들이 시간이 늦었으니 집에 갔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유남
30분 뒤.박민정과 연지석은 마침내 조하랑의 별장에 도착했다.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조심해. 이따 너의 엄마에게 서프라이즈를 줘야 해. 케이크는 이쪽, 이쪽에...”듣고 있던 박민정은 그만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 졸려서 공항에 못 가겠다고 속이더니. 생일 축하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두 사람 실망하게 생겼는데.”연지석이 입을 열었다.“아니면 우리 이따가 들어갈까?”“그러자.”연지석은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보면서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밖에서 잠깐 저녁 바람을 쐬고 있었다.“아줌마는 요즘 잘 지내?”“응. 잘 지내셔. 너희들 빨리 데려오라고 닦달하셔.”박민정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나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 그런데 우선 윤우의 병을 빨리 치료해야 해.”“응. 다 이해해.”연지석은 고개를 숙여 박민정을 달랬다.“그러니까 얼굴을 펴. 다 지나갈 거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지석은 단둘이 있는 틈을 타 그녀에게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주려는 순간 뒤에서 문소리가 들렸다.“하랑 이모, 케이크를 떨어뜨리면 어떡해요!”“내가 일부러 그랬니? 다 네가 바닥을 이렇게 미끄럽게 닦으니까 그렇지. 다시 나가 사 오는 수밖에...”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밖에 서있던 박민정과 연지석을 발견했다.“지석 삼촌。”“그래.”연지석은 그런 박윤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조하랑은 한참 동안 연지석을 넋 놓고 보다가 정신 차리고 인사했다.“연지석 씨 안녕하세요. 저희 민정이를 잘 챙겨주셔서 감사해요.”“별말씀을요. 제 친구이기도 한 걸요.”“하하, 그러네요. 안으로 들어오세요.”조하랑은 어색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이내 박민정을 향해 말했다.“민정아, 미안해. 우리가 아까...”“응. 밖에서 다 들었어.”“그럼 케이크는...”“괜찮아. 시간도 늦었으니 케이크 안 먹어도 돼. 우리 일찍 들어가서 쉬자.”“알았어.”방안에 들어온 조하랑은 박예찬에게 눈짓했다.“예찬아, 너도 졸리지? 피곤하
“1분 줄 테니 나와.”핸드폰 넘어 유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박민정은 손에 있는 핸드폰을 꽉 쥔 채 창밖을 내다봤다.“여기 왔어요?”“아니면?”유남준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박민정은 이내 연지석을 돌아보며 미안한 듯 얘기했다. “미안해. 나 나가봐야 할 것 같아.”유남준은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다가 박민정의 긴장한 모습을 보고선 더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조심히 갔다 와.”박민정은 가방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유남준은 말없이 베란다로 향했다. 멀어져가는 박민정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의 얼굴은 복잡한 기색이 역력했다.별장 밖에는 어두운 야경과 어우러진 무광 블랙 캐딜락 한대가 서있었다. 박민정이 다가가자 운전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지고 유남준의 옆모습이 보였다.“차에 타.”유남준의 눈빛이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개인 별장에 어떻게 들어온 건지 박민정은 의아했지만 그의 말대로 차에 탔다. 차는 출발해 별장 대문을 빠져나왔다. 그제야 박민정은 별장 문 앞에 경호원들이 까만 정장을 입은 채 줄지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갑자기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재밌게 잘 놀았나 봐?”유남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네.”박민정은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대충 둘러댔다.“나를 속이니까 더 재밌었겠네?”유남준이 갑자기 차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을 보면서 박민정은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지만 침착하게 물었다.“뭘 속였다는 거죠?”유남준은 박민정을 힐긋 보고는 갑자기 차를 세웠다. 머리를 부딪힐뻔한 박민정이 무슨 일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남자의 큰 손아귀가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차 안의 어두운 불빛만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박민정은 유남준의 어두운 윤곽만 보일 뿐 그의 붉어진 눈시울은 알아채지 못했다.“이지원의 말이 맞았네. 당신은 정말 거짓말쟁이야.”유남준이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 그의 말은 비수가 되어 박민정의 가슴에 꽂
반항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안 박민정은 가만히 있었다. 유남준의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대고 으르렁거렸다.“둘이 다시 만난다면 그땐 진짜 모두 가만 안 둘 테니까 그렇게 알아!”그 순간 유남준의 손에 끈적한 액체가 떨어졌다. 놀란 유남준이 박민정의 몸을 돌려 움켜잡았다. 선홍빛 피가 박민정의 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급히 박민정의 보청기를 빼냈다. “왜 또 피가 나는 거야?”박민정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아 그냥 멍하게 앉아 있었다. ‘어차피 또 상처 주는 말일 테지.’ 그녀는 차라리 안 들려서 다행이라 생각했다.“약은 가져왔어?”침묵만 흐르고. 유남준은 그녀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의사가 처치를 해주었지만 그녀는 한동안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의사가 떠나고 병실은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유남준은 물에 약을 타서 잘 저은 후 박민정에게 건넸다. 미동이 없는 그녀를 보고 그는 전화기를 꺼내 메모장을 켰다.[약 먹어!]핸드폰을 꺼내 자신과 대화하는 유남준을 보면서 박민정의 기억은 10여 년 전 그날 밤으로 돌아갔다. 그날도 박민정은 학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잠시 청력이 돌아오지 않았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유남준은 핸드폰으로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지금 상황은 마치 그날 밤과 똑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다정하던 소년이 아니었다. “다 소용없어요. 고쳐지지도 않는 것을.”박민정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핏기가 가신 입술을 깨물었다. 유남준은 가슴이 철렁했다. 급히 메모장을 열어 써 내려갔다.[누가 고칠 수 없다고 그래?]“의사가요.”유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컵을 박민정의 입가에 가져갔다. 이런 유남준은 예전의 그와 완전히 달랐다. 그날 밤 차가 고장이 나자 두 사람은 차 안에서 한참을 있었다. 박민정이 무서워하는 것을 알고 유남준은 밤새 노트로 그녀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박민정은 약을 단숨에 들이키고 침대에 누웠다. 유남준은
달빛 아래, 박민정은 자신이 오랫동안 사랑해 온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목소리가 잠긴 채 물었다. “유 대표님, 저랑 약속하셨잖아요.”박민정의 얼굴을 만지던 유남준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그녀의 눈과 마주친 그는 마음이 아려왔다. 유남준은 침대에서 내려와 병실을 나왔다. 밖에 나온 유남준은 낯선 사람을 보는듯한 박민정의 눈길을 잊을 수가 없었다.“유 대표라고?”차에 탄 그는 바로 비서에게 전화 걸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새벽 두 시, 밑도 끝도 없는 전화에 서다희는 찾아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뭐지? 프로젝트 기간도 아니고. 행사 날짜도 아닌데.”허둥대던 서다희는 그제야 컴퓨터를 보고 오늘이 박민정의 생일임을 알아챘다. 그는 바로 유남준에게 전화했다.“대표님, 오늘 민정 씨 생일입니다.”다행히 둘이 결혼할 때 서다희는 박민정의 정보를 조금 외우고 있었다. 유남준은 그녀의 생일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물었나?’‘어쩐지 연지석이 어젯밤에 돌아오더라니.’유남준이 말이 없자 서다희가 물었다.“대표님, 선물 준비할까요?”담배 재가 유남준의 손에 떨어지자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전화를 끊은 뒤 유남준은 그렇게 차에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유남준은 병실에 들어섰다. 박민정은 아무 때나 퇴원할 수 있었다. “가자. 같이 갈 데가 있어.”“어디요?”박민정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당신 계속 그 아이 만나고 싶다고 했잖아.”순간 박민정의 눈이 반짝거렸다.“고마워요.”“그래.”차 안의 분위기가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정림원.병세가 안정된 박윤우는 매일 잘 먹고 잘 놀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저 언제쯤 쓰레기 아빠가 자기를 보러오는지 궁금했다. ‘오늘 엄마 생일인데. 쓰레기 아빠가 잘 챙겨주는지 모르겠네.’“이모, 아저씨 언제 또 나 보러 와요?”박윤우는 커다란 눈망울로 가정부를 쳐다봤다. 가정부도 사실 몰랐다. 지난번 그
가정부는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진짜야?”박윤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진짜 인척 꾸며댔다.“네. 그렇지 않으면 왜 부인도 없고, 아이도 없겠어요?”유남준은 올해 거의 서른이 되었다. 일반적인 남자들도 그 나이에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는데 부잣집 남자면 말할 것도 없었다. 가정부는 박윤우를 치켜세우며 칭찬했다.“윤우 진짜 대단한데. 아는 게 어쩜 그렇게 많아?”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사이 유남준과 박민정이 도착했다.박민정은 오는 동안 길을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었다. 그런 그녀를 유남준은 지켜보기만 할 뿐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곳을 안다고 해도 아이를 데려갈 수 없다. 차에서 내린 박민정은 바로 집안으로 향했다. 유남준이 예쁜 여자를 데리고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가정부는 이내 박윤우에게 알려줬다. 박윤우는 가장 처음 떠오른 사람이 이지원이었다. ‘티비에서만 봤는데 오늘은 실물을 볼 수 있겠군.'만반의 준비하고 이지원을 기다리던 박윤우는 박민정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만 눈이 빨개진 채 울먹였다. 여기에 온 후로 한번 도 울어본 적이 없는 박윤우였다. “엄마...”창백한 얼굴에 작은 몸을 달려 자신한테 달려오는 아들을 보면서 박민정은 박윤우를 와락 품에 안았다. “윤우야.”“엄마. 보고 싶었어.”“엄마도 윤우가 많이 보고 싶었어.”유남준은 문에 기댄 채 모자의 상봉을 지켜봤다. 그러고는 가정부에게 손짓해서 내보낸 후 둘만 방에 남겨두고 나왔다. 박민정은 조심스레 박윤우의 몸을 살펴보면 물었다.“요즘 아픈 곳은 없어?”“아니. 없어. 나 여기서 아주 잘 지내.”박윤우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이내 목소리를 낮춰 박민정에게 속삭였다.“엄마, 여기 아저씨 진짜 바보야. 내가 달라는 걸 다 가져다줘.”“그리고 지난번에 내가 실수로 아저씨한테 오줌도 쌌어.”박민정은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뭐? 윤우야 엄마한테 천천히 말해줘.”박윤우는 왜 유남준에게 오줌을 싸게 되었는지 자세히 얘기해줬다.“다
박민정의 우울한 마음을 눈치챈 박윤우는 이내 애교를 부렸다.“엄마, 뭐 잊은 거 없어?”“뭐?”“뽀뽀.”박윤우는 자신의 볼을 가리켰다. 박민정은 피식 웃으며 아들의 볼에 입맞췄다.“됐지?”“응!”아이들과 같이 있으면 박민정은 항상 따스한 마음이 들었다. 요 며칠의 서러웠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시간은 유난히 빨리 지나갔고 어느덧 오후가 되었다. 떠나기 전 박민정은 박윤우에게 여러 가지 당부를 잊지 않았다.해외에 있을 때와 달리, 오늘 박윤우는 떼도 쓰지 않고 얌전히 박민정과 작별 인사를 했다.예전에 진주시에 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박윤우는 울고불고 떼를 쓰면서 그녀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박민정은 한참 아들을 달래주곤 했었다. 박민정은 그동안 박윤우가 그저 지능이 또래 애들보다 조금 높을 뿐 보통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차 안에서 박민정은 별장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돌아보았다.옆에 앉은 유남준은 생일 얘기를 하려 했지만 결국에 꺼내지 못했다. “이따 먹고 싶은 거 있어?”“아무거나 괜찮아요.”박민정은 입맛이 없었다. 유남준은 그가 항상 가던 가계로 향했다. 박민정은 저녁 내내 음식을 별로 입에 대지 않았다. 어떻게 생일을 보내야 할지 몰라 유남준은 돌아가는 길에 집으로 케익을 주문했다. 두원 별장에 돌아온 박민정은 테이블 위의 케익을 보고 의아했다. 유남준은 아무 말 없이 서재로 향했다. 박민정은 그제야 전화기를 꺼내 확인했다. 연지석과 조하랑이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 와있었다. 무음 모드로 해놔서 전화 온 줄도 몰랐었다. 두 사람이 걱정할까봐 박민정은 우선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정아, 왜 이제야 전화 받아? 어제는 왜 그냥 갔어?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어제는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랬어. 전화가 무음으로 되어서 받지 못했어.”조하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별일 없으면 됐어.”통화가 끝나고 박민정은 바로 연지석에게도 전화해서 오늘 정림원에 갔
유남준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박민정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는 연지석이 해외 신분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어떤 일을 하는지 몰랐었다. 그저 가끔 그가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는 것만 알았다.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한테 피해 주는 게 당신 스타일은 아니잖아요?”박민정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유남준의 넓은 어깨가 박민정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를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들리네. 나한테 손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박민정은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렇게 큰 비용을 들여서 밑지는 장사를 하는데. 손해가 아닌가요?”유남준은 차갑게 비웃었다.“틀렸어. 난 한 번도 밑지는 장사를 해본 적이 없어.”“이 자리까지 오니깐, 돈이 다가 아닌 게 있더라고.”그가 몇 년 동안 국내에 있는 연지석의 회사들을 압박하여 힘들어지게 한 게 다 무엇 때문인데. 다 원한을 풀기 위해서 아닌가?"‘연지석이 아니면, 당신이 나한테 감히 이럴 수가 있을까?’유남준은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박민정은 점점 눈앞의 남자를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두 사람은 10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결혼 후에도, 지금도 그녀는 유남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도 그렇겠지...’두 사람이 헤어진 건 잘된 일이었다.“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해요?:박민정이 물었다.“그 사람과 당신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어서.”유남준은 당당한 듯 말했다. 박민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 뺨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가짜 결혼 말고 없잖아요!”유남준은 박민정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귀에 속삭였다.“당신, 도망가지 말았어야 했어. 나를 속이면 안 됐다고.”그녀가 가짜 사망을 꾸민 이 몇 년 동안, 유남준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박민정은 눈을 내리깐 채 물었다.“그래서 이렇게 나를 괴롭히고 반항도 못 하게 하는 건가요?”박민정의 어깨 올린 손이 움찔했다.“내가 언제 괴롭혔어?”결혼한 후 유남준은 그래도 그녀에게
분명 윤소현이 때린 건데 정수미는 부하 직원 하나를 매수해서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참으로 가소로웠다.유남준은 천천히 양손을 움켜쥐며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꺼져!”보안요원은 이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네, 네.”그가 떠나자 이곳은 마침내 조용해졌다.김인우가 욕설을 내뱉었다. “정씨 집안 놈들은 자기가 엄청 대단한 줄 아나 봐? 이렇게 멋대로 굴다니!”조하랑도 분노에 차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여자 딸이 유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으니...”이렇게 보면 사실상 두 시누이 간의 집안 문제가 된 셈이었다.“유남우는 제정신이야? 아이를 때리는 여자랑 결혼하겠다니!” 김인우가 또 한 번 분통을 터뜨렸다.지금 이런 말들은 소용없었다.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렸고, 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왔다.박민정이 서둘러 일어나 다가갔다. “선생님, 제 아들은 지금 어때요?”“목숨은 건졌습니다만, 현재 체내의 백혈구가 너무 빠르게 확산되고 있어서 가능하다면 빨리 수술하는 게 좋겠습니다.”의사가 말했다.박민정은 배를 감싸안으며 물었다. “다음 달에 해도 될까요?”“그건 저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일단 입원시켜 놓고, 문제가 생기면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네, 네, 알겠습니다.”박민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박윤우의 입원 수속을 마치고 박민정 일행은 병실로 가서 아이를 보았다.박윤우는 여전히 매우 허약해 보였고 지친 눈을 겨우 뜨며 말했다. “엄마, 아빠, 형... 아저씨, 하랑 이모... 걱, 걱정하지 마세요.”“이제 괜찮아요.”그는 자신이 너무 미웠다. 왜 이렇게 쓸모없는 걸까, 엄마의 원수를 갚으러 갔다가 오히려 엄마에게 걱정만 끼치게 된 걸까?“그래, 윤우야. 잘 쉬어. 다 나을 거야.” 박민정이 눈물을 참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네.”박윤우는 바로 대답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그는 다시 박민정의 손을 잡았다. “엄마, 제가 말씀드린 거 안 잊으셨죠?”박민정은 그가 정수미에 관한
정수미는 컴퓨터에 적힌 자신을 저주하는 말을 보며 혀를 찼다. 역시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만약 딸을 찾는다면, 반드시 잘 대해주고 절대로 딸이 어떤 서러움도 겪지 않게 할 것이다....이지원과 윤소현이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윤소현은 꽁꽁 싸맨 자신의 손을 보며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못된 녀석, 감히 나를 물어?!”“소현 씨, 화내지 마요. 제가 보기에 그들도 얼마 못 갈 거예요.” 이지원이 달랬다.“지원 씨가 박민정이랑 그 두 못된 녀석들을 함께 없애버린다면, 제가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겠어요.”“저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어요. 저는 박민정을 소현 씨보다 더 증오하니까요!” 이지원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그러고는 아까 서재에서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린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런데, 왜 정 대표님께서 저를 싫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요?”“그럴 리가요. 엄마 눈에는 지원 씨가 친딸이에요. 저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죠. 그저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런 거니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윤소현이 설명했다.이지원은 마음속으로는 걱정되었지만, 겉으로는 멀쩡한 척했다.“그랬으면 좋겠네요.”두 사람의 대화가 정수미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이제 와서 뭘 더 의심할 게 있단 말인가?그녀의 양녀가 외부인과 손잡고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니!“소현이가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정수미는 마치 비서에게 묻는 것처럼, 또 자신에게 묻는 것처럼 말했다.비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했다. “아가씨의 입장에서는 대표님이 친딸을 못 찾으시는 게 가장 좋을 텐데, 어떻게 누군가를 내세워 대표님의 딸 행세를 하게 하는 걸까요? 그 사람이 정말로 아가씨의 지위를 빼앗는다면 곤란하실 텐데요.”정수미가 쓴웃음을 지었다.“그 아이는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을 내세워서, 내가 친딸을 찾는 걸 방해하려는 거야. 소현이의 행동 패턴을 보면 이미 이지원의 약점도 쥐고 있을 텐데, 과연 정씨 가문에서 위치가 흔들릴
박예찬은 그렇게 위로를 받았지만, 여전히 동생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고 있었다.일행은 수술실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박윤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두려웠다.한편, 정씨 가문도 조용하지 않았다.정수미는 곧 누군가 자신의 서재를 뒤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문서가 사라져 버렸으니까.“어떻게 된 거지?”비서는 엉망이 된 서재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혹시 그 두 아이가 한 짓일까요?”정수미는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컴퓨터를 확인했다. 중요한 자료 파일들이 많이 있었으니까.다행히도 노트북은 손상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 꼬마들은 그저 아이들일 뿐이니, 종이만 찢을 줄 알지 컴퓨터를 망가뜨릴 줄은 모를 것이다.정수미가 이렇게 안도하며 컴퓨터를 켰다.평소에는 빨리 켜지던 컴퓨터가 이번에는 한참이 지나서야 화면이 나타났다.하지만 화면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곧이어 정수미의 흑백 사진이 조롱하듯 화면에 나타났다.거기에는 ‘죽어버려!’라는 글씨도 쓰여 있었다.정수미의 눈썹이 순간 찌푸려졌다.비서도 그 흑백 사진을 보고 분노했다. “이 괘씸한 녀석들!”“겨우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데, 이런 걸 어떻게 했지?” 정수미가 말하면서 파일들을 찾으려 했다.하지만 찾아보니 컴퓨터의 모든 파일이 자신의 흑백 사진으로 변해있었다!정수미는 이 상황을 보고 현기증이 났다.“빨리 전문 기술자를 불러와.”“네, 네.”비서가 서둘러 나갔다.윤소현과 이지원이 밖에서 기다리다가 안의 소리를 듣고 참지 못하고 들어왔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컴퓨터가 해킹당해서 회사의 기밀 문서가 전부 사라졌어.” 정수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떻게 이런 일이...” 이지원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엄마, 제가 한번 봐 드릴까요? 저 대학 다닐 때 컴퓨터 관련 지식을 배웠거든요.”이지원이 말하면서 컴퓨터에 손을 뻗었다.하지만 정수미는 그녀의 손을 바로 쳐냈다. “필요 없어.”
박윤우와 박예찬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박예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 저희가 뉴스를 봤어요. 정씨 가문이 엄마를 괴롭혔다는 걸 알고, 엄마를 위해 분풀이를 하고 싶었어요.”박민정은 마음이 아팠다. 두 아이는 또래보다 철이 들었기에 이유 없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얼마나 컸다고 나를 위해 분풀이를 하려고 해.”박윤우가 서둘러 말했다. “엄마, 저랑 형은 이제 세 살배기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리고 오늘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됐어요.”박민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비밀인데?”“이지원이 정수미 아줌마 친딸이 아니래요.” 박윤우가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말했다. “게다가 아줌마도 이미 알고 있대요.”이 소식은 정말 믿기 힘든 것이었다.박민정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떻게 그걸 알게 된 거니?”“제가 책상 뒤에 숨어서 들었어요.” 박윤우가 말을 마치고, 당시 상황을 박민정에게 자세히 설명했다.박민정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이지원이 어떻게 멀쩡하게 정씨 가문에 있을 수 있었을까.박윤우는 뭔가 빠뜨린 게 있을까 봐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맞다, 또 일을 키우지 말라고 했어요.”“일을 키우지 말라고?” 박민정이 물었다.“네!”박윤우가 흥분해서 말하는 순간, 그의 코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박민정은 아이가 코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 “윤우야...”“기사님, 빨리 병원으로 가요!”그녀는 즉시 기사에게 병원으로 방향을 돌리라고 외쳤다.박예찬은 그제야 아까 윤소현이 동생을 꽤 세게 때렸다는 걸 떠올렸다.“윤우야...”박윤우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박민정과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유남준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엄마, 아빠, 앞으로 두 분 잘 지내세요...”“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박민정의 눈가가 붉어졌다.유남준은 오히려 침착했다. 병원이 보이자 박윤우를 한 팔에 안아 들며 박민정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윤우를 데리고 갈
정수미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밖으로 나가보니 보안 요원들이 두 아이를 제압하고 있었다.그리고 윤소현의 손은 이미 박윤우의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다.박윤우는 윤소현에게 맞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하더니 귀까지 울려댔다.“윤우야!”마음이 급해진 박예찬이 어떻게든 박윤우를 막으려 했지만 보안 요원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나한테 하라고! 내 동생한테 손대지 마!”박윤우를 때리면서 모든 힘을 쏟아부은 윤소현의 손바닥은 아직도 얼얼했다.그녀는 자신을 도발하는 박예찬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손을 들어 박예찬에게도 폭력을 행사하려 했다.그 순간, 밖에서 소란스러운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윤소현이 그 소리에 멍하니 서 있는 동안, 박민정만 유남준이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섰다.“예찬아, 윤우야!”박민정은 집안의 보안 요원들에게 제압당한 두 아이들을 발견하자마자 임신 중이라는 사실도 입은 채 다급히 두 아이에게 달려갔다.하지만 보안 요원들은 아이를 단단히 포박한 채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유남준의 표정도 눈에 띄게 굳었다. 그는 자신이 데려온 경호원들에게 즉시 움직일 것을 요구했고 박예찬과 박윤우를 제압 중이던 보안 요원 두 명은 순식간에 나가떨어졌다.박민정은 다급히 달려가 두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괜찮아?”그녀의 눈빛에는 온통 걱정뿐이었다.박윤우는 아픔을 꾹 참은 채 박민정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괜찮아요, 엄마.”박윤우는 어딘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박예찬 역시 박민정을 안심시키며 말했다.“맞아요, 우리 괜찮아요.”두 아이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이 나오자 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을 놓으며 정수미와 윤소현에게 시선을 돌렸다.“정 대표님, 아이들한테까지 손을 대시다니,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정수미는 그 말에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민정아. 네 아이들이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왔는지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니니?”그 말에 박민정은 두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아이들은 고
정수미는 심상치 않은 윤소현과 이지원의 눈빛을 보며 말했다.“나도 모르겠구나. 아이들이 길을 잃고 실수로 들어왔다고 하는데.”“길을 잃었다고요? 여긴 얘네 유치원에서 최소 십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는 데다가 박민정 집이랑은 더 먼데 어떻게 단순히 길을 잃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거예요?”윤소현은 점점 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두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물었다.“솔직히 말해. 너희 엄마가 우릴 해치려는 거지?”그 말에 박예찬은 그만 참지 못하고 윤소현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아!”윤소현은 곧장 비명을 지르며 박예찬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손을 높이 들었다.하지만 윤소현의 손이 박예찬의 얼굴에 닿기 직전, 박예찬이 달려들어 그녀의 손등을 힘껏 물었다.“아!”윤소현은 또다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이 꼬맹이가, 얼른 이거 안 놔?”옆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박윤우가 입을 열었다.“우리 형한테 사과하면, 놔줄지도 모르지.”그렇다고 윤소현이 아이에게 사과할 리 없었다. 이내 반대쪽 손을 든 윤소현은 아이를 떼어놓기 위해 또다시 폭력을 행사하려 했다.그리고 박윤우가 곧장 그녀에게 달려들었다.“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정수미는 그 모습을 지켜만 보던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당황스러운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보안 요원들이 급히 박예찬과 박윤우를 떼어놓았다.윤소현의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박예찬이 있는 힘껏 그녀의 손을 물었던 것이다.“이 꼬맹이들 당장 잡아들여!”윤소현은 당장이라도 이 두 아이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그녀의 명령에 두 보안 요원들은 두 아이에게 달려들기 시작했지만 이내 정수미에 의해 제지당했다.“됐어, 소현아. 그냥 아이들이잖니. 너무 화내지 마, 네 배 속에 애도 있는데.”정수미는 윤소현을 사랑했지만 어른이 아이들을 때리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엄마! 제 손 좀 보세요.”윤소현은 그 어느 때보다 억울했다.그녀는 살벌한 눈빛으로 박예찬과 박윤우를 당장이라도 찢어버릴 듯 노려보았다.
박윤우가 막 도망치려던 순간, 정수미의 집에서 일하고 있던 한 가정부가 아이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너는 누구니? 여기서 뭐 하는 거야?”가정부가 물었다.그 목소리에 정수미와 비서가 동시에 그쪽을 쳐다보았다. 박윤우가 가정부에게 가로막힌 채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 아이, 어디서 많이 본 아이인데?”정수미가 말했다.박윤우는 억지로라도 도망쳐보려 했지만 그의 작은 체구로 도망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결국, 아이는 가정부에게 붙잡혀 정수미의 앞으로 가게 되었다.“놔줘, 이 나쁜 사람들. 마귀할멈!”박윤우가 작은 몸을 힘껏 몸부림치며 외쳤다.하지만 아이의 몸부림과 외침이 하인과 정수미에게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정수미는 이내 박윤우를 알아보았다.“너, 박윤우 아니니?”정수미는 박윤우와 박예찬을 기억하고 있었다.박윤우는 서늘한 눈빛으로 정수미를 바라보며 애써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그래, 나야. 얼른 날 놔 주는 게 좋을걸. 안 그러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가만두지 않는다고?정수미의 답답했던 가슴이 사르르 녹아 웃음이 터져 나왔다.“너 같은 꼬마가 날 어떻게 가만 안 둘 건데?”그 질문에 박윤우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지금 날 놔주면 내가 18년 뒤에 찾아와서 복수할 거야!”“그렇다면, 더더욱 널 놔줄 이유가 없는데?”그 말에 정수미는 일부러 아이를 더 놀리기 시작했다.그런 말을 하는 박윤우의 마음도 편치만은 못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벌써 이런 곳에 갇히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하지만 다행히도 아직 엄마에게는 형이 있었고, 아직 태어나지 못한 동생이 있었던 덕에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말해 봐, 우리 집엔 왜 온 거야?“정수미가 다시 물었다.이렇게 어린아이가 자신의 집에 잠입했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박윤우는 이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우연히 실수로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야. 여기가 아줌마 집일 줄은 몰랐어.”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정씨 가문처
다른 병원들에서 온 감정서들을 바라보던 최민환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그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다.“정 대표님, 이건 분명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겁니다.”최민환이 서둘러 말했다.그와 오랜 세월 동안 접촉해왔던 정수미는 어느 정도 최민환을 신뢰하고 있었다.“그럼 그 오해가 뭔지 얘기해보세요. 왜 이지원은 내 친딸이 아닌데도, 친자 감정서에는 친자라고 나와 있었는지.”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최민환은 뭔가 떠오른 듯 그날 친자 감정서를 진행했던 모든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그날 친자 감정을 진행할 때, 큰 아가씨께서 갑자기 샘플을 잘못 챙겼다며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새로 가져오신 그 샘플로 교체해서 진행했죠. 그리고 남은 절차는 다 제 직원들에게 맡겼습니다. 맹세컨데 제 직원들이 그런 날조를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그 답변에 더 멍해진 쪽은 정수미였다.샘플을 교체했다니?“확실해요?”“확실합니다!”잠시 망설이던 최민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사실 큰 아가씨께서 저에게 몰래 찾아와 만약 감정서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그 결과를 수정해 달라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그 말을 하는 최민환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저는 절대 정 대표님께서 제게 주셨던 기회와,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믿음을 저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대표님을 왜 배신하겠습니까?”그 말에 정수미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럼 최 선생 말은, 소현이가 최 선생에게 감정 결과를 혈연관계가 아닌 거로 바꿔 달라고 했다는 건가요?”최민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그냥 결과를 바꾸라는 말만 했습니다. 제가 거절했더니 결과가 나온 이후에도 더는 아무 얘기 하지 않더군요. 저도 이때까지 대표님과 아가씨 사이에 불화가 생길까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겁니다.”그 말에 정수미는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다. 윤소현의 성격대로라면 자신이 친딸을 찾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하지만 샘플은 왜 바꿔치기했던 걸까
정씨 가문 본가.정수미는 새로운 친자 확인 결과지를 받아들었다.그녀의 눈빛에는 냉기만 감돌았다.그리고 옆에 있던 비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이지원 정말 겁도 없네요, 감히 이런 친자 확인 공문서까지 위조할 생각을 하다니.”정수미는 모녀 관계가 아니라는 친자 확인 감정서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함미현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은 받지 않은 듯 평온해 보였다.“난 항상 최 선생을 믿어왔는데, 왜 그 사람이 이지원을 도와주는 거지?”최 선생이라면 정수미의 개인 주치의로서 그의 여러 유전자 감정을 도왔던 인물이다.며칠 전, 그는 아주 자신 있는 표정으로 감정서를 들고 정수미를 찾아와 그녀와 이지원은 모녀가 맞다는 말을 해주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항상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큰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정수미는 최 선생이 이지원에게 매수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지금 당장 전화해서 최 선생 부르겠습니다.”비서가 입을 열었다.“그래, 우선 무슨 일인지는 알려주지 마. 그냥 내 몸이 좀 안 좋다고만 전해.”정수미는 자신의 계획이 들킬 것을 염려해 비서에게 재차 당부했다.“알겠습니다.”비서는 곧장 최민환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자리를 떴다.그 탓에 저택 안으로 몰래 숨어드는 두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여기야?”박윤우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주위를 살폈다.“응, 조심해.”이미 이곳의 시스템을 완전히 파악한 박예찬은 일시적으로 모든 보안 시스템을 종료시켰다.빠르게 정수미가 지내는 곳을 발견한 두 아이는 멀리서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넌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니? 엄마가 어디가 그렇게 미워서 날 만나려고 하지도 않는 거야?”정수미는 자신의 딸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은 기분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박윤우는 그런 정수미의 모습을 관찰하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뭐라고 저렇게 중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