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 줄 테니 나와.”핸드폰 넘어 유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박민정은 손에 있는 핸드폰을 꽉 쥔 채 창밖을 내다봤다.“여기 왔어요?”“아니면?”유남준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박민정은 이내 연지석을 돌아보며 미안한 듯 얘기했다. “미안해. 나 나가봐야 할 것 같아.”유남준은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다가 박민정의 긴장한 모습을 보고선 더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조심히 갔다 와.”박민정은 가방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유남준은 말없이 베란다로 향했다. 멀어져가는 박민정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의 얼굴은 복잡한 기색이 역력했다.별장 밖에는 어두운 야경과 어우러진 무광 블랙 캐딜락 한대가 서있었다. 박민정이 다가가자 운전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지고 유남준의 옆모습이 보였다.“차에 타.”유남준의 눈빛이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개인 별장에 어떻게 들어온 건지 박민정은 의아했지만 그의 말대로 차에 탔다. 차는 출발해 별장 대문을 빠져나왔다. 그제야 박민정은 별장 문 앞에 경호원들이 까만 정장을 입은 채 줄지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갑자기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재밌게 잘 놀았나 봐?”유남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네.”박민정은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대충 둘러댔다.“나를 속이니까 더 재밌었겠네?”유남준이 갑자기 차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을 보면서 박민정은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지만 침착하게 물었다.“뭘 속였다는 거죠?”유남준은 박민정을 힐긋 보고는 갑자기 차를 세웠다. 머리를 부딪힐뻔한 박민정이 무슨 일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남자의 큰 손아귀가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차 안의 어두운 불빛만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박민정은 유남준의 어두운 윤곽만 보일 뿐 그의 붉어진 눈시울은 알아채지 못했다.“이지원의 말이 맞았네. 당신은 정말 거짓말쟁이야.”유남준이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 그의 말은 비수가 되어 박민정의 가슴에 꽂
반항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안 박민정은 가만히 있었다. 유남준의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대고 으르렁거렸다.“둘이 다시 만난다면 그땐 진짜 모두 가만 안 둘 테니까 그렇게 알아!”그 순간 유남준의 손에 끈적한 액체가 떨어졌다. 놀란 유남준이 박민정의 몸을 돌려 움켜잡았다. 선홍빛 피가 박민정의 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급히 박민정의 보청기를 빼냈다. “왜 또 피가 나는 거야?”박민정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아 그냥 멍하게 앉아 있었다. ‘어차피 또 상처 주는 말일 테지.’ 그녀는 차라리 안 들려서 다행이라 생각했다.“약은 가져왔어?”침묵만 흐르고. 유남준은 그녀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의사가 처치를 해주었지만 그녀는 한동안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의사가 떠나고 병실은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유남준은 물에 약을 타서 잘 저은 후 박민정에게 건넸다. 미동이 없는 그녀를 보고 그는 전화기를 꺼내 메모장을 켰다.[약 먹어!]핸드폰을 꺼내 자신과 대화하는 유남준을 보면서 박민정의 기억은 10여 년 전 그날 밤으로 돌아갔다. 그날도 박민정은 학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잠시 청력이 돌아오지 않았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유남준은 핸드폰으로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지금 상황은 마치 그날 밤과 똑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다정하던 소년이 아니었다. “다 소용없어요. 고쳐지지도 않는 것을.”박민정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핏기가 가신 입술을 깨물었다. 유남준은 가슴이 철렁했다. 급히 메모장을 열어 써 내려갔다.[누가 고칠 수 없다고 그래?]“의사가요.”유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컵을 박민정의 입가에 가져갔다. 이런 유남준은 예전의 그와 완전히 달랐다. 그날 밤 차가 고장이 나자 두 사람은 차 안에서 한참을 있었다. 박민정이 무서워하는 것을 알고 유남준은 밤새 노트로 그녀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박민정은 약을 단숨에 들이키고 침대에 누웠다. 유남준은
달빛 아래, 박민정은 자신이 오랫동안 사랑해 온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목소리가 잠긴 채 물었다. “유 대표님, 저랑 약속하셨잖아요.”박민정의 얼굴을 만지던 유남준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그녀의 눈과 마주친 그는 마음이 아려왔다. 유남준은 침대에서 내려와 병실을 나왔다. 밖에 나온 유남준은 낯선 사람을 보는듯한 박민정의 눈길을 잊을 수가 없었다.“유 대표라고?”차에 탄 그는 바로 비서에게 전화 걸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새벽 두 시, 밑도 끝도 없는 전화에 서다희는 찾아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뭐지? 프로젝트 기간도 아니고. 행사 날짜도 아닌데.”허둥대던 서다희는 그제야 컴퓨터를 보고 오늘이 박민정의 생일임을 알아챘다. 그는 바로 유남준에게 전화했다.“대표님, 오늘 민정 씨 생일입니다.”다행히 둘이 결혼할 때 서다희는 박민정의 정보를 조금 외우고 있었다. 유남준은 그녀의 생일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물었나?’‘어쩐지 연지석이 어젯밤에 돌아오더라니.’유남준이 말이 없자 서다희가 물었다.“대표님, 선물 준비할까요?”담배 재가 유남준의 손에 떨어지자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전화를 끊은 뒤 유남준은 그렇게 차에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유남준은 병실에 들어섰다. 박민정은 아무 때나 퇴원할 수 있었다. “가자. 같이 갈 데가 있어.”“어디요?”박민정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당신 계속 그 아이 만나고 싶다고 했잖아.”순간 박민정의 눈이 반짝거렸다.“고마워요.”“그래.”차 안의 분위기가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정림원.병세가 안정된 박윤우는 매일 잘 먹고 잘 놀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저 언제쯤 쓰레기 아빠가 자기를 보러오는지 궁금했다. ‘오늘 엄마 생일인데. 쓰레기 아빠가 잘 챙겨주는지 모르겠네.’“이모, 아저씨 언제 또 나 보러 와요?”박윤우는 커다란 눈망울로 가정부를 쳐다봤다. 가정부도 사실 몰랐다. 지난번 그
가정부는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진짜야?”박윤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진짜 인척 꾸며댔다.“네. 그렇지 않으면 왜 부인도 없고, 아이도 없겠어요?”유남준은 올해 거의 서른이 되었다. 일반적인 남자들도 그 나이에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는데 부잣집 남자면 말할 것도 없었다. 가정부는 박윤우를 치켜세우며 칭찬했다.“윤우 진짜 대단한데. 아는 게 어쩜 그렇게 많아?”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사이 유남준과 박민정이 도착했다.박민정은 오는 동안 길을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었다. 그런 그녀를 유남준은 지켜보기만 할 뿐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곳을 안다고 해도 아이를 데려갈 수 없다. 차에서 내린 박민정은 바로 집안으로 향했다. 유남준이 예쁜 여자를 데리고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가정부는 이내 박윤우에게 알려줬다. 박윤우는 가장 처음 떠오른 사람이 이지원이었다. ‘티비에서만 봤는데 오늘은 실물을 볼 수 있겠군.'만반의 준비하고 이지원을 기다리던 박윤우는 박민정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만 눈이 빨개진 채 울먹였다. 여기에 온 후로 한번 도 울어본 적이 없는 박윤우였다. “엄마...”창백한 얼굴에 작은 몸을 달려 자신한테 달려오는 아들을 보면서 박민정은 박윤우를 와락 품에 안았다. “윤우야.”“엄마. 보고 싶었어.”“엄마도 윤우가 많이 보고 싶었어.”유남준은 문에 기댄 채 모자의 상봉을 지켜봤다. 그러고는 가정부에게 손짓해서 내보낸 후 둘만 방에 남겨두고 나왔다. 박민정은 조심스레 박윤우의 몸을 살펴보면 물었다.“요즘 아픈 곳은 없어?”“아니. 없어. 나 여기서 아주 잘 지내.”박윤우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이내 목소리를 낮춰 박민정에게 속삭였다.“엄마, 여기 아저씨 진짜 바보야. 내가 달라는 걸 다 가져다줘.”“그리고 지난번에 내가 실수로 아저씨한테 오줌도 쌌어.”박민정은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뭐? 윤우야 엄마한테 천천히 말해줘.”박윤우는 왜 유남준에게 오줌을 싸게 되었는지 자세히 얘기해줬다.“다
박민정의 우울한 마음을 눈치챈 박윤우는 이내 애교를 부렸다.“엄마, 뭐 잊은 거 없어?”“뭐?”“뽀뽀.”박윤우는 자신의 볼을 가리켰다. 박민정은 피식 웃으며 아들의 볼에 입맞췄다.“됐지?”“응!”아이들과 같이 있으면 박민정은 항상 따스한 마음이 들었다. 요 며칠의 서러웠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시간은 유난히 빨리 지나갔고 어느덧 오후가 되었다. 떠나기 전 박민정은 박윤우에게 여러 가지 당부를 잊지 않았다.해외에 있을 때와 달리, 오늘 박윤우는 떼도 쓰지 않고 얌전히 박민정과 작별 인사를 했다.예전에 진주시에 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박윤우는 울고불고 떼를 쓰면서 그녀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박민정은 한참 아들을 달래주곤 했었다. 박민정은 그동안 박윤우가 그저 지능이 또래 애들보다 조금 높을 뿐 보통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차 안에서 박민정은 별장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돌아보았다.옆에 앉은 유남준은 생일 얘기를 하려 했지만 결국에 꺼내지 못했다. “이따 먹고 싶은 거 있어?”“아무거나 괜찮아요.”박민정은 입맛이 없었다. 유남준은 그가 항상 가던 가계로 향했다. 박민정은 저녁 내내 음식을 별로 입에 대지 않았다. 어떻게 생일을 보내야 할지 몰라 유남준은 돌아가는 길에 집으로 케익을 주문했다. 두원 별장에 돌아온 박민정은 테이블 위의 케익을 보고 의아했다. 유남준은 아무 말 없이 서재로 향했다. 박민정은 그제야 전화기를 꺼내 확인했다. 연지석과 조하랑이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 와있었다. 무음 모드로 해놔서 전화 온 줄도 몰랐었다. 두 사람이 걱정할까봐 박민정은 우선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정아, 왜 이제야 전화 받아? 어제는 왜 그냥 갔어?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어제는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랬어. 전화가 무음으로 되어서 받지 못했어.”조하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별일 없으면 됐어.”통화가 끝나고 박민정은 바로 연지석에게도 전화해서 오늘 정림원에 갔
유남준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박민정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는 연지석이 해외 신분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어떤 일을 하는지 몰랐었다. 그저 가끔 그가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는 것만 알았다.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한테 피해 주는 게 당신 스타일은 아니잖아요?”박민정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유남준의 넓은 어깨가 박민정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를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들리네. 나한테 손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박민정은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렇게 큰 비용을 들여서 밑지는 장사를 하는데. 손해가 아닌가요?”유남준은 차갑게 비웃었다.“틀렸어. 난 한 번도 밑지는 장사를 해본 적이 없어.”“이 자리까지 오니깐, 돈이 다가 아닌 게 있더라고.”그가 몇 년 동안 국내에 있는 연지석의 회사들을 압박하여 힘들어지게 한 게 다 무엇 때문인데. 다 원한을 풀기 위해서 아닌가?"‘연지석이 아니면, 당신이 나한테 감히 이럴 수가 있을까?’유남준은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박민정은 점점 눈앞의 남자를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두 사람은 10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결혼 후에도, 지금도 그녀는 유남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도 그렇겠지...’두 사람이 헤어진 건 잘된 일이었다.“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해요?:박민정이 물었다.“그 사람과 당신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어서.”유남준은 당당한 듯 말했다. 박민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 뺨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가짜 결혼 말고 없잖아요!”유남준은 박민정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귀에 속삭였다.“당신, 도망가지 말았어야 했어. 나를 속이면 안 됐다고.”그녀가 가짜 사망을 꾸민 이 몇 년 동안, 유남준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박민정은 눈을 내리깐 채 물었다.“그래서 이렇게 나를 괴롭히고 반항도 못 하게 하는 건가요?”박민정의 어깨 올린 손이 움찔했다.“내가 언제 괴롭혔어?”결혼한 후 유남준은 그래도 그녀에게
자신의 몇 년간 순정이 한순간에 싸구려 취급을 받다니. 박민정도 정말 이 사랑이 부질없다고 느꼈다. “그러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유남준의 이마에 있는 핏줄이 튀어나올 듯했다. 그는 눈이 빨개진 채 그녀의 머리를 가슴팍에 눌렀다. 숨이 막혀왔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유남준은 사과의 말을 듣고 싶었지만 박민정도 숨이 막힐지언정 사과를 하지 않았다. 박민정은 한번 먹은 마음이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를 좋아할 때도 그랬고 떠날 때도 그랬다. 숨이 점점 가빠지는 박민정을 보면서 유남준은 황급히 손을 놓았다. 그러다 그녀가 정신이 돌아오기도 전에 그가 입맞췄다. 박민정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옷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차가운 벽에 기대며 박민정은 애원했다.“며칠만 더 기다려주면 안 돼요?”“왜 기다려야 해?”얼마 전 유남준은 그녀가 원한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또 거부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박민정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아직 생리 중이에요”유남준은 그제야 그녀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는 박민정을 안은 채 침대에 누웠다. 긴장해서 굳어있던 그녀의 몸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유남준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하루 동안 피곤했던 박민정은 그렇게 그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유남준은 박민정의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듣고서 보청기를 빼주었다. 유남준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마음이 변할 수가 있어?”그는 잠든 박민정을 보면서 속삭였다. 이튿날. 박민정이 깨어났을 때 유남준은 곁에 없었다. 씻으려고 거울 앞에선 박민정은 자기 목에 빨간 자국을 발견했다. 어제 유남준이 남긴 흔적이었다. 파운데이션으로 가려봤지만 가려지지 않았다. 박민정은 할 수 없이 목폴라 니트로 갈아입고 머리를 풀어 내렸다. 씻고 거실로 나가니 유남준이 거실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오늘은 회사에 나가.”그가 입을 열었다.“오늘은 쉬고 싶어요.”박민정은 오늘 병원에 가서 언제 임신하면 좋을지 알아
연지석도 유남준 뒤에 서있는 박민정을 발견하고는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손을 내밀에 유남준에게 악수를 청했다.“유 대표님, 안녕하세요.”생각보다 분위기는 살벌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유남준은 그의 악수에 응하면서 박민정을 소개했다.“여기는 제 아내 박민정입니다.”유남준은 보란 듯이 박민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손을 떼어내려 하자 유남준은 더욱 세게 힘을 줬다. 박민정이 할퀴어 손등에서 피가 났지만 유남준은 여전히 태연했다. 이 모든 걸 지켜보면서 연지석이 입을 열었다.“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둘이 어릴 적 죽마고우였거든요. 제가 유 대표님보다 어쩌면 민정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요.”‘죽마고우라... 진짜 애틋하네. 나보다 더 잘 안다고?’ 박민정에게 빤히 고정된 유남준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여보. 왜 이런 죽마고우 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안 했지?”그는 손에 힘주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박민정은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이럴 때만 자신을 아내라고 불렀다. 하긴 다른 남자한테 지고 싶어 하는 남자는 없으니까.“아마 잊었나 보죠.”박민정은 나직이 읊조렸다.예전의 유남준은 그녀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친구가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연지석도 몰랐다. “그러면 이따 일 얘기가 끝나면 두 사람같이 얘기를 나누세요.”유남준이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그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아는 박민정은 단칼에 거절했다.유남준은 미소를 지으며 박민정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왜? 나중에 나 몰래 만나려고 그러는 거야?”박민정은 입술을 깨문 채 그를 노려봤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와 마주친 유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움찔거려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두 사람을 지켜보는 연지석의 가슴에는 분노가 타올랐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박민정은 아직 유남준의 아내이고 자신은 그저 이름대로 어렸을 적 친구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