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다희는 작은 도발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만 유남준의 인내심은 한계가 있어 계속 그러다간 두 사람은 결국 파국을 맞을까 걱정되었다. 박민정은 서다희의 말에 담긴 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비서님은 결혼하셨나요? 아니면 여자 친구가 있으세요?”금색 테 안경에 가려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약혼녀가 있습니다.”약혼녀의 생각만 하면 그는 한숨이 나왔다. 선보고 만나서 연애까지 성공하였지만 여자 친구는 유치할 뿐만 아니라 성격도 만만치 않았다. 서다희가 일 때문에 그녀와의 약속에 나가지 못했을 뿐인데 여자는 이러면 결혼할 수 없다며 드러누웠다. ‘결혼이 애들 장난인가.’“그러면 그 여자분도 비서님을 아주 사랑하겠네요.” 박민정이 보기에 서다희도 제 상사처럼 남을 배려하지 않은 냉혈한으로 보였다. 약혼녀가 정말 서다희를 사랑하니까 결혼까지 할 수 있는거라고 생각했다. “사랑까지는 아니고. 그냥 적당한 사람끼리 결혼하는 거죠.”“앞으로 살아가면서 그 생각에 변함이 없길 바라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고개 숙여 자기 업무를 시작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서다희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나온 서다희는 여자 친구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였다. [또 야근이야? 맨날 야근, 야근. 그냥 회사랑 결혼하지 그랬어. 우리 헤어져.] 서다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또 시작이네. 계속 해 봐.]결혼 안 하면 말지.“내가 결혼 할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연애도 하지 말걸. 시간이 아깝게.”...유남준과 연지석은 정오가 되어서야 회의실에서 나왔다.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아무도 몰랐다. 박민정은 연지석이 걱정되었다. 국내에선 유남준이 안 닿은 곳이 없어 연지석의 대부분 프로젝트가 진행에 문제가 생겼다. 연지석은 회의실에서 나온 후 바로 박민정을 찾아갔다. “가자. 밥 먹으러.”어제 그녀같이 생일을 함께 하지 못해 그는 못내 아쉬웠다. 박민정은 연지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레아 레스토랑 룸.연지석은 박민정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들로 주문했다.“요즘 너 살이 너무 많이 빠진 것 같아. 그러니까 오늘은 많이 먹어.”“그래.”하지만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음식을 앞에 두고도 박민정은 입맛이 돌지 않았다.“아까... 그 사람하고는 무슨 얘기했어?”연지석은 그녀에게 스테이크를 썰어주며 답했다.“그냥 일 얘기 좀 했어.”“혹시 그 사람이 너 괴롭히거나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았고?”박민정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그러자 연지석이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예쁜 반달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봤다.“유남준 그 사람이 뭐 사춘기 남자애라도 돼? 괴롭히긴 뭘 괴롭혀.”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박민정은 밖에서는 항상 진지한 얼굴이던 연지석이 자기 앞에만 서면 장난을 치지 못해 안달 난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나 지금 진지하게 묻고 있는 거니까 제대로 대답해.”“그럼 더 안 되겠네. 남자가 돼서 여자한테 쪼르르 이르면 안 되지.”연지석이 연신 웃으며 빨리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었다.그렇게 한창 식사를 이어가고 있을 때쯤, 연지석은 문득 박민정의 옷에 시선이 갔다. 무척이나 더운 날, 그녀가 목과 팔을 전부 다 가리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혹시 요즘 또 몸이 안 좋아?”박민정이 추위를 탄다는 사실을 떠올린 연지석이 물었다.그러자 그녀는 조금 부자연스럽게 자신의 목 주위를 매만지며 머리를 저었다.“아니, 회사 에어컨 바람이 너무 강해서 입은 것뿐이야.”“그런 거면 차라리 카디건을 입어. 목 답답할 거 아니야.”“응, 알겠어.”박민정은 자신의 목에 새겨진 키스 마크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두 사람은 이 모든 상황을 누군가가 감시카메라로 전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유남준은 다른 방에서 두 남녀가 식사하는 장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웨이트리스를 불러와 뭐라고 지시를 내렸다.그러자 몇 분 뒤, 해당 웨이트리스는 손에 와인을
그리고 그의 손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밥만 먹은 건 아닌가 보지?”그의 말에 박민정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밥만 먹은 건 아닌 것 같다고?’그녀는 그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당신의 그 더러운 상상에 날 끼워 넣지는 말아 줄래요?”유남준의 손은 허공에서 멈춰버렸다.“더러운 상상? 지금 더러운 꼴을 하고 있는 건 너야!”박민정이 왜 이런 꼴이 됐는지 그가 왜 모르겠는가. 유남준은 단지 그녀에게서 왜 이런 꼴이 됐는지에 대한 해명이 듣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해명을 채 듣기도 전에 그녀가 비아냥거리는 바람에 유남준도 그만 소리를 질러버렸다.“그럼 눈 더럽히지 말고 이만 나가는 게 어때요?”박민정의 말에 그는 그녀를 거칠게 품에 끌어안더니 한껏 비꼬았다.“이렇게 입으면 그 남자가 네 목에 새겨진 흔적들을 못 볼 줄 알았나 보지?”박민정은 그제야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아까는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이라 몰랐는데 지금 보니 꼭꼭 잠가뒀던 단추가 다 풀어져 있었다.화장실로 달려오기 전 연지석의 눈빛이 조금 이상했던 이유가 이거였다.“그건 또 어떻게... 설마 나 또 감시한 거예요?”박민정의 눈이 금세 눈물로 가득 찼다.그녀의 상처받은 듯한 눈빛은 비수가 되어 유남준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왔다.그는 자신의 마음이 왜 이렇게 따끔거리며 아픈지 알 길이 없었다.“감시 따위 안 해도 알 수 있어.”굳이 거짓말할 이유는 없었지만, 곧 울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그녀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이 나갔다.하지만 그의 거짓말에도 박민정은 수치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상대가 연지석이 아닌 조하랑이었어도 아마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그녀는 키스 마크를 달고 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보기 좋지 않음을 떠나 불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런 행위는 사랑하는 남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줄곧 생각해왔던 그녀라서 더 이런듯싶다.물론 그녀도 이런
고작 그 남자에게 키스 마크 좀 보인 것뿐이지 않나?“그렇게 그 남자가 신경 쓰여? 이거 보고 너한테 실망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그의 말에 박민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남자는 자신이 왜 우는 건지 아무것도 몰랐다.예전의 유남준이라면 박민정의 눈물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의 그는 그녀의 눈물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만 울어.”그는 말을 마친 후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이마와 코 그리고 볼에 가져다 댔다.그에 박민정은 순간 동공이 흔들리더니 힘껏 그를 밀쳤다. 하지만 역부족이었고 그의 손에 잡힌 채로 그저 그의 입술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그때,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저, 손님, 여기 옷 가져왔습니다.”아까 그 웨이트리스였다.유남준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추더니 박민정의 귓가에 대고 달뜬 호흡을 내쉬었다.박민정은 서둘러 눈물을 닦고는 도끼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유남준은 몸을 옆으로 비켜서 그녀가 옷을 가질 수 있게 해줬고 빅민정은 열린 문틈 사이로 옷을 건네받은 후 간신히 마음을 진정했다.“옷 갈아입어야 해서 그러는데 이제 그만 나가주시죠?”유남준은 그녀의 우는 모습을 또 보게 될까 봐 군말 없이 화장실을 나갔다.밖으로 나와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담배 한 개비를 물었지만,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그는 대체 박민정의 눈물에 왜 이토록 가슴이 답답한 걸까?웨이트리스가 사 온 옷은 시원한 반팔 티셔츠였고 그 탓에 그녀의 목은 머리카락에도 가려질 수 없을 정도로 훤히 드러났다.박민정은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보고 난 뒤에야 천천히 화장실에서 나왔다.유남준은 아직 화장실 앞에 있었고 그녀가 나오는 걸 보더니 담배를 꺼버렸다.“어디 가?”“다 알면서 뭘 물어요? 다시 식사하러 가야죠.”감시카메라로 박민정의 행동을 보지 않았더라면 유남준은 절대 이대로 그녀를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지금은 그녀를 울렸다는 약간의 죄책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박민정이
하민재는 연예인들의 본모습을 질리도록 잘 알고 있기에 연지석의 선택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연지석은 그의 오해를 바로잡았다.“내가 말하는 건 그 여자가 아니야.”그러자 하민재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누군데?”그가 알고 있는 건 유남준과 이지원의 소문뿐이었으니까.“박민정.”박민정...하민재는 곰곰이 이 이름을 떠올리고는 몇 초 뒤 더욱더 황당한 듯 소리를 질렀다.“유남준 와이프??”만약 이지원을 좋아하는 거라면 아직 잘 될 가능성이라도 있었지만, 상대가 박민정이라면...하민재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기억 속 그녀는 박씨 가문의 청각장애 아가씨로 유남준의 유일한 흠으로 소개되고 있는 여자였다.게다가 듣기로 결혼 당시 그녀의 남동생과 어머니가 그녀의 앞으로 온 예물들을 전부 꿀꺽해버린 데다가 유남준은 이 결혼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하여 그의 결혼사는 상류층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그 당시 그 소문을 안주 삼아 웃고 떠들던 사람 중에 하민재도 있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박민정이라는 존재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점차 잊혀 갔다. 이렇게 오늘 연지석이 그녀의 이름을 말하기 전까지 그는 유남준에게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 또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형, 미쳤어? 그 여자 유부녀야. 게다가 귀머거...”하민재는 아차 싶었는지 단어 선택을 달리하고 말을 이었다.“청각장애가 있는 여자잖아. 형이랑은 안 어울려.”“어울리고 말고는 내가 결정해. 그리고 난 그런 것 따위에 흔들리지 않아.”단호한 그의 말에 하민재는 연지석이 여자에게 아주 단단히 빠졌다고 생각했다.그러면서 문득 박민정이 무슨 수로 이런 냉혈한을 홀렸는지 궁금하기도 했다.하지만 문제는 좋아하는 건 둘째치고 유남준이 과연 자신의 아내를 순순히 넘겨줄까?유남준은 자신에게 필요 없는 여자라 할지라도 그게 자신의 수중에 있는 한 절대 다른 남자에게 건네줄 사람이 아니었다.“됐다. 이만 끊어.”연지석은 하민재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은 잔소리들이 튀어나올까 봐
말을 마친 후 박민정은 자기 자리에서 가방을 챙겨 다시 회사를 나왔다.유남준은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가 했던 말을 되새기고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저 여자가 정말 자신이 알던 박민정이 맞나? 양보가 몸에 밴 유약한 자신의 아내가 맞나?웬일인지 조금 화가 날 법한 그녀의 말에도 유남준은 화가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그리고 전에는 그녀를 너무 얕잡아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그때 서다희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대표님.”유남준은 금세 차가운 얼굴로 돌아와 물었다.“무슨 일이지?”“이지원 씨 일로 주상 엔터의 주가가 하락하고 있습니다. 저희 쪽에서 대신 처리할까요?”유남준이 전에 했던 얘기 때문에 서다희는 멋대로 결정하는 게 아닌 그의 의견을 먼저 구했다.유남준은 미간을 치켜세우더니 서다희를 향해 말했다.“에스토니아의 민 선생이라는 작곡가에 대해 좀 알아봐.”서다희는 그가 또 이지원의 뒤처리를 해주려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일전 남모를 루트로 박민정의 소식도 알아낸 서다희라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해외에 연락을 넣었다.그러자 얼마 안 가 해외에서 소식이 전해졌다.“민 선생이라는 사람 해외에서는 꽤 이름 있는 작곡가라고 합니다. 가수들에게 만들어 준 곡도 꽤 되고요.”서다희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리고 조사해본 결과 민 선생이라는 사람은 바로 박민정 씨였습니다.”서다희는 이지원이 그렇게 얻으려고 했던 정보들을 금세 알아냈다.“박민정?”유남준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아까 박민정이 그렇게 화를 낸 이유가 그 곡이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었나?그러다 문득 박민정이 근 몇 년간 해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그가 모르는 또 다른 건 없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이 일은 나 말고 그 누구도 몰라야 해. 알겠어?”유남준이 서다희를 향해 신신당부했다.“네, 알겠습니다.”서다희는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물었다.
그녀의 말에 임수호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는 도로에 다른 차량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천천히 속도를 올리더니 박민정이 타고 있는 차량을 향해 망설임 없이 돌진했다.박민정을 태운 차량의 기사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는 서둘러 핸들을 돌려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차량을 피할 길은 없었고 두 차는 그대로 큰소리를 내며 부딪혀버렸다.쾅!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박민정이 타고 있던 차체가 움푹 파이더니 이내 차가 전복됐다.기사는 그 자리에서 바로 기절해버렸다.박민정도 머리를 세게 부딪히긴 했지만, 다행히 아직 정신은 있었다. 그녀는 얼굴 가득 흐르는 피와 점점 눈앞이 빨갛게 보이기 시작하는 느낌에 있는 힘껏 차에서 기어나가려고 몸을 움직였다.그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수염이 덜 정리된 남자가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살... 살려주세요...”박민정은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생각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그러자 임수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녀가 기어 나오려는 차 문을 잠가놓고는 싸늘한 말을 내뱉었다.“난 당신을 구하러 온 게 아니야.”박민정은 그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임수호는 그런 그녀를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죽이려고 왔지.”“난 그쪽이 누군지도 몰라요...”박민정은 이 남자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고 왜 자신을 죽이려 드는지는 더더욱 알 길이 없었다.임수호는 혹시 그녀가 창문을 부수고 기어 나오기라도 할까 봐 자신의 몸을 차에 찰싹 밀착시키고 앉았다.“내가 왜 당신을 죽이려는지 알고 싶어?”박민정이 힘들게 고개를 끄덕이자 임수호도 감출 생각이 없는지 그녀를 향해 말했다.“그러게 지원이를 왜 건드려.”지원...이지원...!“당신은 대체 누구죠?”박민정은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나? 지원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임수호의 말에 그녀는 문득 얼마 전 이지원이 유남준에게 자기 사생팬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했던 장면이 떠올랐다.“혹시 이지원 씨 팬인가요?”사생팬이라면 간혹 이런
임수호는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차를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박민정은 최대한 몸을 뒤로 옮겨 그와 거리를 두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아직도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이지원 씨에게 전화해서 내가 죽었다고 얘기해 보세요.”임수호는 휴드폰을 꺼내 바로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그의 번호를 차단한 건지 좀처럼 이지원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그쪽과 엮이게 될까 봐 진작에 차단한 것 같네요. 지금이라도 나와 기사님을 구해주면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해줄게요. 당신은 실수로 차를 들이받은 거고 우리는 목숨을 건졌으니 형사책임은 피할 수 있을 거예요.”임수호는 박민정의 말에 상당히 흔들리고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 점점 몸을 가누지 못했고 의식도 점점 흐려져 갔다.그때 주위가 갑자기 시끄러워지는가 싶더니 임수호는 뭔가를 보고는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쳤다.박민정은 마지막 순간 몽롱한 시선 속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보았다. 하지만 끝내 그 얼굴이 누군지는 확인하지 못한 채 천천히 눈이 감겨버렸다.단지 자신을 업은 남자의 어깨가 엄청 넓고 따뜻했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병원 병실 안.유남준은 베란다 쪽으로 다가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는 그의 손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가득 나 있었다.하지만 한 모금 빨아들이려다가 문득 병상에 누워있는 박민정을 보고는 담배를 가차 없이 껐다.그녀가 이곳으로 돌아온 후로 병원 신세를 진 건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이다.그때 벨 소리가 울려 전화를 받아보니 서다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뺑소니범은 연지석 씨 쪽 사람이 확보한 것 같습니다.”유남준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알았어. 박민정 경호원들은 지금 당장 해고해.”그는 용건만 간단히 전달한 후 전화를 끊었다.박민정이 사고 나기 전 유남준은 두원 별장으로 갔다가 박민정이 없는 걸 보고는 그녀를 지키던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고 뒤늦게서야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