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의 손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밥만 먹은 건 아닌가 보지?”그의 말에 박민정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밥만 먹은 건 아닌 것 같다고?’그녀는 그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당신의 그 더러운 상상에 날 끼워 넣지는 말아 줄래요?”유남준의 손은 허공에서 멈춰버렸다.“더러운 상상? 지금 더러운 꼴을 하고 있는 건 너야!”박민정이 왜 이런 꼴이 됐는지 그가 왜 모르겠는가. 유남준은 단지 그녀에게서 왜 이런 꼴이 됐는지에 대한 해명이 듣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해명을 채 듣기도 전에 그녀가 비아냥거리는 바람에 유남준도 그만 소리를 질러버렸다.“그럼 눈 더럽히지 말고 이만 나가는 게 어때요?”박민정의 말에 그는 그녀를 거칠게 품에 끌어안더니 한껏 비꼬았다.“이렇게 입으면 그 남자가 네 목에 새겨진 흔적들을 못 볼 줄 알았나 보지?”박민정은 그제야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아까는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이라 몰랐는데 지금 보니 꼭꼭 잠가뒀던 단추가 다 풀어져 있었다.화장실로 달려오기 전 연지석의 눈빛이 조금 이상했던 이유가 이거였다.“그건 또 어떻게... 설마 나 또 감시한 거예요?”박민정의 눈이 금세 눈물로 가득 찼다.그녀의 상처받은 듯한 눈빛은 비수가 되어 유남준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왔다.그는 자신의 마음이 왜 이렇게 따끔거리며 아픈지 알 길이 없었다.“감시 따위 안 해도 알 수 있어.”굳이 거짓말할 이유는 없었지만, 곧 울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그녀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이 나갔다.하지만 그의 거짓말에도 박민정은 수치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상대가 연지석이 아닌 조하랑이었어도 아마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그녀는 키스 마크를 달고 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보기 좋지 않음을 떠나 불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런 행위는 사랑하는 남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줄곧 생각해왔던 그녀라서 더 이런듯싶다.물론 그녀도 이런
고작 그 남자에게 키스 마크 좀 보인 것뿐이지 않나?“그렇게 그 남자가 신경 쓰여? 이거 보고 너한테 실망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그의 말에 박민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남자는 자신이 왜 우는 건지 아무것도 몰랐다.예전의 유남준이라면 박민정의 눈물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의 그는 그녀의 눈물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만 울어.”그는 말을 마친 후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이마와 코 그리고 볼에 가져다 댔다.그에 박민정은 순간 동공이 흔들리더니 힘껏 그를 밀쳤다. 하지만 역부족이었고 그의 손에 잡힌 채로 그저 그의 입술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그때,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저, 손님, 여기 옷 가져왔습니다.”아까 그 웨이트리스였다.유남준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추더니 박민정의 귓가에 대고 달뜬 호흡을 내쉬었다.박민정은 서둘러 눈물을 닦고는 도끼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유남준은 몸을 옆으로 비켜서 그녀가 옷을 가질 수 있게 해줬고 빅민정은 열린 문틈 사이로 옷을 건네받은 후 간신히 마음을 진정했다.“옷 갈아입어야 해서 그러는데 이제 그만 나가주시죠?”유남준은 그녀의 우는 모습을 또 보게 될까 봐 군말 없이 화장실을 나갔다.밖으로 나와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담배 한 개비를 물었지만,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그는 대체 박민정의 눈물에 왜 이토록 가슴이 답답한 걸까?웨이트리스가 사 온 옷은 시원한 반팔 티셔츠였고 그 탓에 그녀의 목은 머리카락에도 가려질 수 없을 정도로 훤히 드러났다.박민정은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보고 난 뒤에야 천천히 화장실에서 나왔다.유남준은 아직 화장실 앞에 있었고 그녀가 나오는 걸 보더니 담배를 꺼버렸다.“어디 가?”“다 알면서 뭘 물어요? 다시 식사하러 가야죠.”감시카메라로 박민정의 행동을 보지 않았더라면 유남준은 절대 이대로 그녀를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지금은 그녀를 울렸다는 약간의 죄책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박민정이
하민재는 연예인들의 본모습을 질리도록 잘 알고 있기에 연지석의 선택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연지석은 그의 오해를 바로잡았다.“내가 말하는 건 그 여자가 아니야.”그러자 하민재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누군데?”그가 알고 있는 건 유남준과 이지원의 소문뿐이었으니까.“박민정.”박민정...하민재는 곰곰이 이 이름을 떠올리고는 몇 초 뒤 더욱더 황당한 듯 소리를 질렀다.“유남준 와이프??”만약 이지원을 좋아하는 거라면 아직 잘 될 가능성이라도 있었지만, 상대가 박민정이라면...하민재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기억 속 그녀는 박씨 가문의 청각장애 아가씨로 유남준의 유일한 흠으로 소개되고 있는 여자였다.게다가 듣기로 결혼 당시 그녀의 남동생과 어머니가 그녀의 앞으로 온 예물들을 전부 꿀꺽해버린 데다가 유남준은 이 결혼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하여 그의 결혼사는 상류층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그 당시 그 소문을 안주 삼아 웃고 떠들던 사람 중에 하민재도 있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박민정이라는 존재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점차 잊혀 갔다. 이렇게 오늘 연지석이 그녀의 이름을 말하기 전까지 그는 유남준에게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 또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형, 미쳤어? 그 여자 유부녀야. 게다가 귀머거...”하민재는 아차 싶었는지 단어 선택을 달리하고 말을 이었다.“청각장애가 있는 여자잖아. 형이랑은 안 어울려.”“어울리고 말고는 내가 결정해. 그리고 난 그런 것 따위에 흔들리지 않아.”단호한 그의 말에 하민재는 연지석이 여자에게 아주 단단히 빠졌다고 생각했다.그러면서 문득 박민정이 무슨 수로 이런 냉혈한을 홀렸는지 궁금하기도 했다.하지만 문제는 좋아하는 건 둘째치고 유남준이 과연 자신의 아내를 순순히 넘겨줄까?유남준은 자신에게 필요 없는 여자라 할지라도 그게 자신의 수중에 있는 한 절대 다른 남자에게 건네줄 사람이 아니었다.“됐다. 이만 끊어.”연지석은 하민재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은 잔소리들이 튀어나올까 봐
말을 마친 후 박민정은 자기 자리에서 가방을 챙겨 다시 회사를 나왔다.유남준은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가 했던 말을 되새기고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저 여자가 정말 자신이 알던 박민정이 맞나? 양보가 몸에 밴 유약한 자신의 아내가 맞나?웬일인지 조금 화가 날 법한 그녀의 말에도 유남준은 화가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그리고 전에는 그녀를 너무 얕잡아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그때 서다희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대표님.”유남준은 금세 차가운 얼굴로 돌아와 물었다.“무슨 일이지?”“이지원 씨 일로 주상 엔터의 주가가 하락하고 있습니다. 저희 쪽에서 대신 처리할까요?”유남준이 전에 했던 얘기 때문에 서다희는 멋대로 결정하는 게 아닌 그의 의견을 먼저 구했다.유남준은 미간을 치켜세우더니 서다희를 향해 말했다.“에스토니아의 민 선생이라는 작곡가에 대해 좀 알아봐.”서다희는 그가 또 이지원의 뒤처리를 해주려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일전 남모를 루트로 박민정의 소식도 알아낸 서다희라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해외에 연락을 넣었다.그러자 얼마 안 가 해외에서 소식이 전해졌다.“민 선생이라는 사람 해외에서는 꽤 이름 있는 작곡가라고 합니다. 가수들에게 만들어 준 곡도 꽤 되고요.”서다희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리고 조사해본 결과 민 선생이라는 사람은 바로 박민정 씨였습니다.”서다희는 이지원이 그렇게 얻으려고 했던 정보들을 금세 알아냈다.“박민정?”유남준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아까 박민정이 그렇게 화를 낸 이유가 그 곡이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었나?그러다 문득 박민정이 근 몇 년간 해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그가 모르는 또 다른 건 없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이 일은 나 말고 그 누구도 몰라야 해. 알겠어?”유남준이 서다희를 향해 신신당부했다.“네, 알겠습니다.”서다희는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물었다.
그녀의 말에 임수호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는 도로에 다른 차량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천천히 속도를 올리더니 박민정이 타고 있는 차량을 향해 망설임 없이 돌진했다.박민정을 태운 차량의 기사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는 서둘러 핸들을 돌려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차량을 피할 길은 없었고 두 차는 그대로 큰소리를 내며 부딪혀버렸다.쾅!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박민정이 타고 있던 차체가 움푹 파이더니 이내 차가 전복됐다.기사는 그 자리에서 바로 기절해버렸다.박민정도 머리를 세게 부딪히긴 했지만, 다행히 아직 정신은 있었다. 그녀는 얼굴 가득 흐르는 피와 점점 눈앞이 빨갛게 보이기 시작하는 느낌에 있는 힘껏 차에서 기어나가려고 몸을 움직였다.그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수염이 덜 정리된 남자가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살... 살려주세요...”박민정은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생각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그러자 임수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녀가 기어 나오려는 차 문을 잠가놓고는 싸늘한 말을 내뱉었다.“난 당신을 구하러 온 게 아니야.”박민정은 그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임수호는 그런 그녀를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죽이려고 왔지.”“난 그쪽이 누군지도 몰라요...”박민정은 이 남자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고 왜 자신을 죽이려 드는지는 더더욱 알 길이 없었다.임수호는 혹시 그녀가 창문을 부수고 기어 나오기라도 할까 봐 자신의 몸을 차에 찰싹 밀착시키고 앉았다.“내가 왜 당신을 죽이려는지 알고 싶어?”박민정이 힘들게 고개를 끄덕이자 임수호도 감출 생각이 없는지 그녀를 향해 말했다.“그러게 지원이를 왜 건드려.”지원...이지원...!“당신은 대체 누구죠?”박민정은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나? 지원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임수호의 말에 그녀는 문득 얼마 전 이지원이 유남준에게 자기 사생팬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했던 장면이 떠올랐다.“혹시 이지원 씨 팬인가요?”사생팬이라면 간혹 이런
임수호는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차를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박민정은 최대한 몸을 뒤로 옮겨 그와 거리를 두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아직도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이지원 씨에게 전화해서 내가 죽었다고 얘기해 보세요.”임수호는 휴드폰을 꺼내 바로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그의 번호를 차단한 건지 좀처럼 이지원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그쪽과 엮이게 될까 봐 진작에 차단한 것 같네요. 지금이라도 나와 기사님을 구해주면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해줄게요. 당신은 실수로 차를 들이받은 거고 우리는 목숨을 건졌으니 형사책임은 피할 수 있을 거예요.”임수호는 박민정의 말에 상당히 흔들리고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 점점 몸을 가누지 못했고 의식도 점점 흐려져 갔다.그때 주위가 갑자기 시끄러워지는가 싶더니 임수호는 뭔가를 보고는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쳤다.박민정은 마지막 순간 몽롱한 시선 속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보았다. 하지만 끝내 그 얼굴이 누군지는 확인하지 못한 채 천천히 눈이 감겨버렸다.단지 자신을 업은 남자의 어깨가 엄청 넓고 따뜻했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병원 병실 안.유남준은 베란다 쪽으로 다가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는 그의 손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가득 나 있었다.하지만 한 모금 빨아들이려다가 문득 병상에 누워있는 박민정을 보고는 담배를 가차 없이 껐다.그녀가 이곳으로 돌아온 후로 병원 신세를 진 건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이다.그때 벨 소리가 울려 전화를 받아보니 서다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뺑소니범은 연지석 씨 쪽 사람이 확보한 것 같습니다.”유남준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알았어. 박민정 경호원들은 지금 당장 해고해.”그는 용건만 간단히 전달한 후 전화를 끊었다.박민정이 사고 나기 전 유남준은 두원 별장으로 갔다가 박민정이 없는 걸 보고는 그녀를 지키던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고 뒤늦게서야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눈을 깜빡거리다 겨우 정신을 차린 박민정은 그제야 자신의 이마와 손 그리고 다리가 전부 붕대로 감겨있다는 걸 발견했다.창문 밖을 바라보니 새벽이라 그런지 하늘이 유독 까맣게 느껴졌다.병실을 둘러보다 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거기에는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지석아...”목소리가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지석은 바로 눈을 떴다.“깼어? 몸은 좀 어때? 괜찮아?”의사 말로는 그녀가 뒷좌석에 앉아 큰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고 했다.“기사님은...”“괜찮아. 다행히 빨리 병원으로 옮겨져서 무사해.”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이 기절할 뒤의 상황에 관해 물었다.연지석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기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사람을 데리고 현장에 도착해 임수호를 잡았다고 한다.“유남준 씨도 왔었어. 널 병원에 데려다준 거 그 사람이야.”연지석은 굳이 그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다만 유남준이 어떻게 그녀를 차에서 구했는지와 그가 이제까지 줄곧 그녀 곁에 있다가 반 시간 전에 막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서는 구태여 전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자신에게 경호원을 붙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사고 당시 같이 있었던 기사 역시 유남준 사람이라 그가 현장에 도착한 것이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그리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연지석이 유남준보다 더 빨리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것이고 자신을 차 안에서 구해준 사람도 당연히 연지석일 거라고 생각했다.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마음도 이기적으로 변하게 되는 걸까? 연지석은 그녀에게 사고 당시 구체적인 상황 설명은 하지 않았다.“남준 씨는 우리가 만나는 걸 싫어해. 너 여기 있는 거 그 사람은 알아?”연지석은 박민정이 뭘 걱정하는지 안다는 듯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유남준 씨도 알아.”몇 시간 전 박민정이 응급 수술에 들어간 후 두 남자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누구도 서로를 건드리지 않았다.그리고 급한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됐을 때 유남준은 경호
연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뜻인지 알겠어. 이번 일은 나한테 맡기고 너는 푹 쉬기나 해.”그는 곧바로 의사를 불러 박민정의 상태에 대해 보고를 들은 후 아무 문제가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유남준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연지석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김인우도 유남준을 따라 함께 병원으로 왔다.병실에 가보니 마침 간호사가 약을 갈아주고 있어 두 남자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병원 산책로에 도착했다.“갑자기 교통사고는 왜 난 거야? 뺑소니범은 잡았어?”김인우의 질문에 유남준은 사고가 있고 난 뒤 자신이 박민정을 병원에 데려온 사실부터 연지석이 뺑소니범을 잡은 사실까지 전부 다 얘기해주었다.그러자 김인우의 표정이 조금 달라지더니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했다.“너보다 먼저 뺑소니범을 잡은 걸 보면 보통 놈은 아닌데?”유남준은 그의 말에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했다.“나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아?”박민정이 사고 난 후 가장 먼저 연락했던 사람이 연지석이라는 걸 떠올린 듯싶다.그에 김인우가 몇 초간 반응이 없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남준아, 비교할 걸 해야지. 국내에서 네 힘이 어디까지 닿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걸 말이라고.”유남준은 그저 묵묵히 들을 뿐 기뻐하거나 만족스러워하지는 않았다.“박민정이 사고를 당하고 가장 먼저 연락한 사람이 바로 연지석이야.”김인우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곧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여자 다루는 데 도가 텄나 보지. 여자들은 조금만 공감해주고 달콤한 말로 속삭이면 금세 넘어오잖아. 지금 보니 얼굴도 약간 여자들 잘 홀릴 것처럼 생기긴 했어.”유남준이 쉽게 다가가지 못할 것 같은 냉 미남 얼굴이라면 연지석은 잘생긴 얼굴에 매혹적인 느낌이 더해져 비유하자면 꼭 여우 같은 느낌이었다.그리고 여자들은 높은 확률로 이러한 여우과 남자들의 사탕발림에 쉽게 넘어간다.물론 김인우는 이런 부류의 남자는 겉만 번지르르한 알맹이 없는 인간이라며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늦었는데 이만 가봐.”유남준
홍주영은 오늘 유남우와 함께 회사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차에서 내리겠다는 유남우의 말에 그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직접 찾아왔다.그리고 그녀가 마주한 것은 지금 이 끔찍한 장면이었다.홍주영은 여실히 박민정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급히 소리쳤다.“도련님, 빨리 민정 씨를 놓아주세요! 지금 위험해 보여요.”그제야 홍주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유남우는 급히 박민정을 놓았다.하지만 이미 박민정은 얼굴이 창백하고 보랏빛이 돌 정도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민정아!”유남우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박민정은 숨을 헐떡이며 말할 겨를조차 없었고 홍주영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민정 씨, 천천히 숨을 고르세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고르려 노력했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유남우의 눈빛에는 뚜렷한 죄책감이 어렸고 그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괜찮아? 다친 데는 없지?”하지만 박민정은 곧바로 몇 걸음 물러나 그의 손길을 피했다.“나, 방금 거의 죽을 뻔했어요.”그녀는 아직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만약 유남우가 조금이라도 더 심하게 했다면 그녀는 정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유남우의 손은 공중에서 멈춰버렸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홍주영이 대신 사과하며 말했다.“민정 씨,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을 거예요.”홍주영은 누구보다도 유남우가 박민정에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방금 들었던 유남우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는지라 그녀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더는 오빠를 보고 싶지 않아요.”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유남우의 머릿속에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만이 맴돌았다.‘보고 싶지 않아요.’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던 홍주영은 조심스레 말했다.
박민정은 손바닥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오빠는 거짓말쟁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오빠를 믿을 수 있겠어요? 오빠가 준 그 약들, 내가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신을 아껴주던 남우 오빠가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까지 해칠 수 있는지.유남우의 눈에는 깊은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이 방법밖에 없었어!”그는 박민정을 자기 곁에 완전히 붙잡아 둘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박민정은 냉소를 흘렸다.“방법이 이것뿐이라니. 오빠는 정말 너무 이기적이고 비열해요. 오빠가 이런 사람이 되어버릴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박민정의 마지막 말이 유남우의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을 끊어버린 것 같았다.그는 손을 들어 박민정의 팔을 움켜쥐었고 분노와 슬픔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변했다고? 네가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어?”유남우가 박민정의 팔을 더 강하게 움켜쥐자 그녀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이거 놔요!”하지만 유남우는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그녀를 붙잡았다.“변한 건 너야! 네가 먼저 변했어! 너 어릴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나를 좋아한다고, 크면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잖아!”그는 목이 메었다.“너는 나랑 유남준도 구별 못 했어.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그 인간이랑 결혼하고 그 인간을 사랑할 수 있어?”유남우의 목소리가 떨렸다.“넌 원래 나만 좋아해야 했어. 네가 변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유남우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내가 헛소리를 하는 건지 아닌지, 네가 제일 잘 알 거야.”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내가 너를 1년 넘게 보살폈어. 그런데 유남준이 나타나자마자 넌 또 유남준한테 가버렸지. 너한테 사랑은 그렇게 쉬운 거야?”박민정은 그가 너무 꽉 끌어안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
박예찬 역시 하루빨리 박민정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병세가 계속 나아졌다 악화됐다를 반복하며 안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의 마음도 놓이지 않았다.게다가 김인우와 조하랑은 여전히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다투었고 이 끝없는 싸움이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었다.그렇게 매일 부딪히면서도 결국 두 사람이 잘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이런저런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박예찬은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박씨 가문.그날 밤, 박민정은 금세 잠에 들었다.이곳에서의 밤은 신림현에서 지낼 때와 달랐는데 전에 느끼던 두려움 없이 평온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휴식을 방해할까 두려워 결국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그렇게 밤새 뒤척이던 그는 다음 날 아침, 눈 밑에 푸른 기운이 남아 있을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제대로 쉬지 못한 티가 났다.유남준은 아침부터 박민정을 찾았지만 진서연에게 뜻밖의 답을 들었다.“보스는 이미 나가셨어요.”“언제 나간 거야? 어디로 갔는데?” 유남준이 다급히 묻자 진서연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민기 씨가 따라갔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준은 그녀가 안전한지 걱정되는 한편, 어제의 감정이 풀렸는지도 알고 싶었다.한편, 박민정은 차에 앉아 어제의 불쾌한 감정을 이미 잊은 듯했다.운전기사가 차를 몰며 앞길을 달리는 동안 박민정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정민기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며 동행자 역할을 했다. 박민정이 묻는 질문에만 간단히 대답했을 뿐, 먼저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박민정은 그의 존재를 쉽게 잊어버릴 정도였다.얼마 후, 두 사람은 한 대학의 정문에 도착했다.이곳은 박민정이 예전에 다녔던 대학교였다.익숙하면서도 낯선 이곳에 발을 내딛으며 그녀는 말했다.“분명 여기서 학교를
저녁 식사 시간 내내 박민정은 유남준을 철저히 무시했다.유남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기로 결심했다.식사가 끝난 후 박민정이 소화를 시키기 위해 산책을 나서자 유남준은 그녀를 따라갔다.민수아와 다른 사람들은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주었다.박민정은 걸음을 멈추고 살짝 짜증 난 표정으로 유남준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민정아, 화 풀어.”유남준이 다가가며 말했으나 박민정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아까는 내가 너무 성급했어.” 유남준이 다시 말을 꺼냈다.사실 박민정은 그렇게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했던 모습이 떠올랐다.그 순간 그녀는 두 사람이 결혼 후 어떻게 지내왔는지 문득 궁금해졌다.“우리가 결혼했을 때에도 평소에 자주 내 일에 간섭했어요?”박민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그건 유남준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유남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급히 대답했다.“당연히 아니지.”그가 어찌 감히 박민정을 화나게 할 수 있었겠는가.“그런데 아까는 왜 그렇게 자연스러웠는데요?”박민정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유남준은 말문이 막혔다. 아직 변명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박민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은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이만 얘기 그만하죠.”“민정아...”유남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그러나 박민정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피하며 경계하는 얼굴로 말했다.“유남준 씨, 자중하세요.”유남준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민수아, 설인하, 그리고 진서연은 흥미진진하게 속닥거렸다.“무슨 일이야? 부부싸움 한 건가?”“부부싸움은 개도 안 끼는 법이라더니. 우리 얼른 자러 가자.”“나도 그게 맞는 것 같아.”그들은 수군거리며 한쪽으로 사라졌다.박민정은 그들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더는 산책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유남준을 뒤로 하고 거실로 돌아갔다.유남준은 딱딱하게 굳은 발걸음으로 민수아와 두 사람에게
박민정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는데 낯선 번호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민정아, 나야, 에리.”청량하고 활기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자 박민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날 완전히 잊어버렸나 봐.”에리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예전에 나한테 밥 한 끼 빚진 거 기억 안 나? 게다가 지금 난 네 회사에 소속된 배우야. 이렇게 날 방치해서 되겠어?”그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하며 살짝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렸다.박민정은 이런 방식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처음 접해본 터라 당황스러웠다.“저기, 그거... 조금만 더 미뤄도 될까?”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안 돼! 벌써 1년이나 빚진 건데 또 미루겠다고?”에리는 단호하면서도 애교를 섞어 불만을 드러냈다.옆에 서 있던 유남준은 통화 내용으로 대충 누군지 짐작이 갔다. 그는 박민정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예상대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에리였다.“민정아, 설마 유 대표가 우리 약속을 눈치채는 게 걱정되는 거야? 안심해. 절대 비밀로 할게!”‘우리 약속’라는 말에 유남준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에리 씨, 다시 제 아내를 귀찮게 굴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단숨에 전화를 끊어버렸다.박민정은 휴대폰을 빼앗기고 전화를 끊어버린 유남준의 행동에 잠시 멍해졌다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남준 씨,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그녀는 분명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남의 휴대폰을 빼앗아 전화를 끊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유남준은 그녀가 화가 난 것을 보고 곧장 해명에 나섰다.“민정아, 에리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배우라는 것들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고.”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그를 올려다봤다.“그게 당신이 내 휴대폰을 빼앗고 내 전화를 끊은 이유예요?”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유남준은 순간 말을 잃었다.어쩐지 아내 앞
박민정이 회사로 복귀한 후 긴장감이 감도는 사람은 윤소현뿐만이 아니었다. 이지원 역시 초조해하고 있었다.어렵사리 다시 연예계에 복귀한 그녀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이 박민정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드러날까 두려웠다.이지원은 종종 몰래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하곤 했다.그날도 촬영을 마친 뒤 그녀의 차는 PMJ 회사 앞에 멈춰 있었다.이지원은 차 안에 앉아 박민정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드디어 박민정이 회사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이지원은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하이힐을 신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도드라진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박민정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누군지 알아보기 전에 이지원은 그녀 앞까지 다가와 길을 막아섰다.“민정 씨, 드디어 돌아왔네요.”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박민정의 마음 한구석에 본능적인 반감이 피어올랐다.비록 그녀는 이지원이 저질렀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불쾌감을 느꼈다.이때 진서연이 재빠르게 박민정 앞을 막아섰다.“당신 누구에요?”이지원은 그제야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는데 필러로 채워진 얼굴이 드러났다. 시간의 흔적과 연예계의 생존 경쟁 속에서 그녀는 온갖 방법으로 외모를 유지하려 애썼다.진서연은 그녀를 알아보자 얼굴을 찌푸렸다.“이지원 씨, 여기 왜 온 거예요? 또 우리 보스한테 해코지하려는 거 아니에요?”이지원의 눈에 차가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천한 년!'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 씨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상태가 어떤지 보러 온 거예요.”박민정은 냉랭하게 대꾸했다.“그렇다면 고맙네요.”그녀의 말투는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졌다.이지원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박민정이 아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혹시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요. 부담 갖지 말고.”이지원은 친절한 척 덧붙였다.“우리 보스가 당신 같은 사람을 찾을 일은 없으니 그만 꺼져요!”진서연
“민정아, 엄마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말아줄래? 날 욕해도, 화를 내도 괜찮으니 제발 그렇게 차갑게만 하지 말아줘, 응?”정수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저는 화낼 이유가 없어요.”박민정은 솔직하게 말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과거에는 기억이 있었기에 정수미가 친모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도 냉대를 받을 때마다 깊이 상처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었다.그녀는 눈앞의 정수미를 낯선 사람처럼 느꼈고 그래서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았다.정수미는 목이 칼로 베인 듯한 고통을 느꼈다.“모두 내 잘못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어떻게 해야 박민정에게 사죄하고 보상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정수미는 눈을 떨구고 등을 살짝 구부린 채 방을 떠났다.그녀가 떠난 뒤, 진서연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이를 다치게 했다니, 무슨 소리죠?”박민정은 어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진서연에게 설명했고 진서연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분노를 터뜨렸다.“윤소현이 어떻게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죠? 제 생각엔 일부러 자기 아이를 다치게 한 게 틀림없어요.”그녀는 단 한마디로 진실을 꿰뚫었지만 박민정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설마. 그래도 자기 친딸인데.”“그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진서연은 단호히 말한 뒤 박민정을 위로했다.“보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래.”하지만 진서연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여러 차례 그녀에게 당부를 했다.박민정은 기억을 잃은 후 꽤 오랜 시간을 보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기억을 되찾으려 했지만 아직 성과는 없었다.그녀는 오늘도 진서연과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점심시간, 박민정은 모두가 쉬고 있을 때 잠깐 밖에 나가겠다며 자리를 떴다.그녀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주
가정부가 나가고 나자 정수미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 있지?”정수미는 깊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왜 하필 윤소현을 입양했을까?비서도 믿기 힘든 듯 고개를 저었다.“큰아가씨의 복수심이 너무 강해요. 자신의 딸마저 이용하다니요.”비서는 윤소현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정수미가 박민정, 그녀의 친딸을 미워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수미는 스스로 중얼거리며 비서에게 묻는 듯 자신에게 묻는 듯한 말을 했다.비서는 사적인 가정사에 대해 조언할 수 없었기에 침묵을 지켰다.오랜 고민 끝에 정수미는 윤소현의 방으로 향했다.윤소현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고열까지 나고 있는데도 이렇게 편안히 잠들 수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소현아!”정수미가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녀를 깨우자 윤소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다.“엄마, 이 시간에 무슨 일이길래 제 방에 오신 거예요? 쉬셔야 할 시간 아니에요?”정수미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얘기할 게 있어서 왔다.”윤소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무슨 얘긴데 내일 하면 안 돼요?”“다혜와 민정이에 대한 얘기야.”정수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그 말을 듣자 윤소현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엄마, 박민정한테 경고할 거죠?”흥분한 그녀의 말투에 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아니, 너한테 경고하려고 왔어.”정수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은 멍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정수미는 가정부가 털어놓은 모든 진실을 이야기했고 윤소현은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멍해졌다.“엄마, 그 여자의 헛소리를 믿지 마세요! 다혜의 친엄마인 제가 어떻게 제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처음엔 나도 네 말을 믿었다. 네가 민정이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네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민정이를 경찰에 넘긴 거였어. 그런데 네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정말 실망이야.”정수미는 깊이 한숨을
비서는 정수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에 둘째 아가씨는 아이에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사람 같지 않아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래. 하지만 소현이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내가 그때 민정이를 도왔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어떤 난리를 칠지 몰랐겠지.”정수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혜 일은 빨리 조사해 봐.”“알겠습니다.” 비서가 대답했다.정수미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외손녀를 바라보며 다짐했다.“다혜야, 걱정하지 마. 외할머니가 꼭 널 다치게 한 사람을 찾아낼게.”그녀는 윤소현을 편드는 것도, 박민정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윤소현을 달래며 조용히 진실을 파악하려 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밝혀내기 위해.밤이 깊었을 때, 정수미는 아이를 돌보던 가정부를 불렀다.“자, 말해 봐. 오늘 왜 거짓말을 했는지. 누가 너한테 뭔가를 줬니?”가정부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저는 거짓말 안 했습니다. 정말로 사모님께서 그랬어요.”정수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아직도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거야? 병원에서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민정이가 다혜를 안은 뒤로 다혜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대체 어떻게 그게 민정이가 했다는 걸로 바뀐 거지? 네가 직접 민정이가 아이를 해치는 걸 봤어?”가정부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얼버무렸다.“민정 아가씨가 다혜를 때리는 걸 희미하게 본 것 같아요...”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희미하게 봤다고? 그럼 왜 그 자리에서 막지 않았지?”가정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 그게 제가 혹시 잘못 본 걸까 봐...”그녀의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다.정수미는 확신했다. 이건 명백히 거짓말이었다.“분명히 말하는데 네가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면 용서해 줄 테지만 계속 거짓말을 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정수미의 위협에 가정부는 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