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이 슬리퍼를 끌고 거실로 나왔을 때 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언제?""오전 열 시."조하랑이었다."지금 갈게."박민정이 전화를 끊고 잠시 고민하더니 유남준에게 문자를 남겼다.「친구 집 좀 갔다 올게요.」조하랑네 집에 가는 김에 박예찬도 볼 수 있으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고작 며칠 못 본 것뿐인데도 꽤 오래 못 본 것처럼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수호 클럽 내부는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남준아, 아침부터 무슨 술이야."억지로 불려 온 김인우가 피곤한 듯 말했다."나 요즘 바쁜 거 알잖아."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김인우는 가운조차 못 벗고 달려왔다.건들거리는 김인우를 보던 유남준이 말했다."네가 성원이처럼 아내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바쁘긴 뭐가 바빠.""그럼 넌 아내도 있는 놈이 왜 여기 있어?"유남준이 할 말을 잃자 분위기를 읽은 김인우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요즘 의학 제대로 배우느라 요 며칠 수술만 몇 번 집도했는지 몰라."물론 조하랑을 조사하는 것도 바쁜 일에 포함이었다.그 여자가 도대체 자신과 겹치는 게 얼마나 있는지 알고 싶었는데 심지어 애도 있었다. 물론 그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왜?"유남준은 김인우가 이렇게까지 변한 이유가 궁금했다."왜라니?""전엔 죽어도 의사는 안 한다며."김인우가 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그땐 어렸잖아. 이제 보니까 의사 하면 사람도 살릴 수 있고 얼마나 좋아."거짓이었다.박민정이 돌아온 후, 김인우는 쭉 박민정의 난청과 출혈을 연구했다.얼른 의사가 되어서 박민정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들었으면 좋겠다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건 그가 박민정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했다.유남준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아 굳이 더 묻지 않았다.핸드폰을 보니 박민정이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사과하려는 줄 알았더니 친구 집에 간다는 통보였다."왜, 민정이가 감시해?"유남준의 얇은 입술이 달싹였다."아니, 친
박민정은 일찍이 조하랑의 집에 도착하여 함께 아침밥을 먹고 이지원을 기다렸다."이지원이 왜 갑자기 사과하겠다는 거야?"조하랑이 궁금증을 못 참고 물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지원은 돈으로 기사를 막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사과하겠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그런데 박민정도 의문스러운건 마찬가지였다.이지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유남준과 김인우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스캔들은 그들에게 있어 손쉽게 덮어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무슨 연유든 간에 이지원을 돕고 싶지 않아진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됐어. 억울한 것만 풀면 됐지."박민정이 가볍게 답했다."이따가 자리 비켜 줄 테니까 잘해 봐.""알았어~"열 시가 되자 이지원이 정말로 조하랑의 거실에 발을 들였다. 박민정은 잠시 안방에 들어가 있었다.이지원은 변호사와 함께였는데 마스크와 선글라스까지 쓴 채였고 소파에 앉아 있는 조하랑은 젖살이 있어 나이답지 않게 꽤나 어려 보였다."하랑 씨, 안녕하세요."이지원은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이에 조하랑은 이지원에게 앉으라 권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이지원 씨, 그런 건 됐고 사과부터 하시죠."이지원이 멈칫했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사과했다."죄송해요.""성의가 전혀 안 보이는데, 합의는 없던 걸로 하는 게 낫겠네요."조하랑이 일부러 이지원을 궁지에 몰자 욱한 이지원을 변호사가 겨우 말렸다."죄송합니다."이지원이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허리 굽혀 사과했다."일을 더 이상 크게 벌리지 않는 대신 원하시는 모든 보상을 해 드리겠습니다."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던 이지원이 저렇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조하랑의 마음속에 말로 설명 못 할 쾌감이 피어올랐다."제 위탁인이 말한 조건에 따르면 사과한 뒤에 표절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하던데, 괜찮으시겠어요?"박민정이 이미 조하랑에게 조건을 말해 뒀다.조하랑은 이지원이 표절한 사건을 묻으라니, 누구 좋으라고
이지원이 전화를 끊고 조하랑 집위치를 보냈다.한편, 조하랑은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몰래카메라를 가져왔다."역시 박민정. 공식적으로 사과할 리 없으니까 동영상으로 남긴거구나. 이런건 어떻게 생각해냈대?"이지원이 사과하는 과정, 매수하는 과정까지 전부 카메라에 담겨 있었다."이지원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으니까. 뭔가 얻는 게 없다면 절대 사과하지 않을 사람이야.""당장 인터넷에 뿌릴게."흥분한 조하랑을 박민정이 말렸다."좀 참아 봐. 아직 때가 아니니까..."아직 이지원은 명성이 있기에 이 영상만으로는 많이 봐야 명예훼손이고 잘못하면 맞고소까지 당할 수 있었다."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조하랑은 박민정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박민정이 조하랑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해보니 연지석이었다."민정아, 나 이제 곧 비행기 타는데 진주시에 도착하는 건 아마 밤 열한 시쯤일 거야."낮고 굵은 목소리였다.밤 열한 시라면 박민정이 마중 나갈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그 시각, 연지석은 핸드폰을 꽉 쥐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내일 네 생일이지?"자신도 까먹은 생일을 연지석이 언급하자 박민정은 잠시 놀랐다.박민정의 생일이 한수민에게는 재난이나 다름없어 부모님과 함께 산 후로는 생일을 지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남준과 결혼하고 나서는 매번 혼자 보내다 보니 결국 생일을 안 쇠게 되었다."응.""오늘 밤에 같이 축하하자.""그래, 마중 나갈게. 오늘 친구네서 자기로 했거든."그러자 연지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실례 아닐까?"박민정이 엿듣고 있던 조하랑을 쳐다보자 조하랑이 말했다."괜찮아, 와도 돼."근 사 년 동안 조하랑은 그저 멀리서 몇 번 본 게 다였지만, 그의 용모는 늘 단정하고 수려했기에 조하랑은 그를 거의 남자 구미호로 여기고 있었다."와도 괜찮대.""알았어, 이만 끊을게. 저녁에 봐."전화를 끊은 연지석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전용기에 오
회의실에 남아 있는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남준은 지금껏 회의 중에 나가는 일이 없었다.서다희가 눈총에 못 이겨 유남준을 쫓아나갔다."대표님."유남준이 조용히 하라는 눈빛을 보내고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지금 전화를 건다면 자신이 박민정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유남준은 그대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결국 유남준은 종일 안절부절못하며 밤이 올 때까지 밥도 못 먹고 집으로 갔다.문을 열자 유남준을 반기는 건 소름 끼치도록 조용하고 어두운 집이었지만 유남준은 불을 켜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핸드폰을 수시로 확인하면서도 유남준은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때쯤 화면이 켜졌다.「사모님께서 공항으로 가셨습니다.」경호원이 보낸 메시지였다.동공이 축소되며 박민정이 도망가려 한다 생각했다.박민정은 한 번 사라졌다 하면 4년이기에 유남준은 겉옷도 제대로 못 챙기고 차 키만 챙겨 그대로 집을 나섰다.풀 악셀을 밟으며 정림원 쪽으로 전화해 물었다."그 아이 잘 있나 확인해 봐."잠들었었던 가정부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박윤우의 방으로 향해 확인했다. "네, 잘 있어요."박윤우는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그제야 유남준이 한시름 놓았다. 박윤우가 있는 한 박민정이 도망갈 일은 없으니."오늘 밤 잘 감시하고 계세요."정림원은 경비가 삼엄해서 아무나 아이를 데려갈 수는 없었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당부했다."네."가정부는 다시 자려던 생각을 지워 버리고는 사람을 시켜 보안 장치를 모두 켜게 했다.금세 경호원이 보낸 위치에 도착한 유남준이 인파 사이에서 공항으로 들어가는 박민정을 발견했다.출구 게이트 가까이 박민정이 시간을 확인하니 연지석이 나오기까지는 십여 분 남아 있었다.그녀는 오늘 나올 때 미행하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공항으로 출발했다. 그녀는 유남준의 부하들이 시간이 늦었으니 집에 갔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유남
30분 뒤.박민정과 연지석은 마침내 조하랑의 별장에 도착했다.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조심해. 이따 너의 엄마에게 서프라이즈를 줘야 해. 케이크는 이쪽, 이쪽에...”듣고 있던 박민정은 그만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 졸려서 공항에 못 가겠다고 속이더니. 생일 축하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두 사람 실망하게 생겼는데.”연지석이 입을 열었다.“아니면 우리 이따가 들어갈까?”“그러자.”연지석은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보면서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밖에서 잠깐 저녁 바람을 쐬고 있었다.“아줌마는 요즘 잘 지내?”“응. 잘 지내셔. 너희들 빨리 데려오라고 닦달하셔.”박민정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나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 그런데 우선 윤우의 병을 빨리 치료해야 해.”“응. 다 이해해.”연지석은 고개를 숙여 박민정을 달랬다.“그러니까 얼굴을 펴. 다 지나갈 거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지석은 단둘이 있는 틈을 타 그녀에게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주려는 순간 뒤에서 문소리가 들렸다.“하랑 이모, 케이크를 떨어뜨리면 어떡해요!”“내가 일부러 그랬니? 다 네가 바닥을 이렇게 미끄럽게 닦으니까 그렇지. 다시 나가 사 오는 수밖에...”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밖에 서있던 박민정과 연지석을 발견했다.“지석 삼촌。”“그래.”연지석은 그런 박윤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조하랑은 한참 동안 연지석을 넋 놓고 보다가 정신 차리고 인사했다.“연지석 씨 안녕하세요. 저희 민정이를 잘 챙겨주셔서 감사해요.”“별말씀을요. 제 친구이기도 한 걸요.”“하하, 그러네요. 안으로 들어오세요.”조하랑은 어색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이내 박민정을 향해 말했다.“민정아, 미안해. 우리가 아까...”“응. 밖에서 다 들었어.”“그럼 케이크는...”“괜찮아. 시간도 늦었으니 케이크 안 먹어도 돼. 우리 일찍 들어가서 쉬자.”“알았어.”방안에 들어온 조하랑은 박예찬에게 눈짓했다.“예찬아, 너도 졸리지? 피곤하
“1분 줄 테니 나와.”핸드폰 넘어 유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박민정은 손에 있는 핸드폰을 꽉 쥔 채 창밖을 내다봤다.“여기 왔어요?”“아니면?”유남준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박민정은 이내 연지석을 돌아보며 미안한 듯 얘기했다. “미안해. 나 나가봐야 할 것 같아.”유남준은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다가 박민정의 긴장한 모습을 보고선 더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조심히 갔다 와.”박민정은 가방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유남준은 말없이 베란다로 향했다. 멀어져가는 박민정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의 얼굴은 복잡한 기색이 역력했다.별장 밖에는 어두운 야경과 어우러진 무광 블랙 캐딜락 한대가 서있었다. 박민정이 다가가자 운전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지고 유남준의 옆모습이 보였다.“차에 타.”유남준의 눈빛이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개인 별장에 어떻게 들어온 건지 박민정은 의아했지만 그의 말대로 차에 탔다. 차는 출발해 별장 대문을 빠져나왔다. 그제야 박민정은 별장 문 앞에 경호원들이 까만 정장을 입은 채 줄지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갑자기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재밌게 잘 놀았나 봐?”유남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네.”박민정은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대충 둘러댔다.“나를 속이니까 더 재밌었겠네?”유남준이 갑자기 차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을 보면서 박민정은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지만 침착하게 물었다.“뭘 속였다는 거죠?”유남준은 박민정을 힐긋 보고는 갑자기 차를 세웠다. 머리를 부딪힐뻔한 박민정이 무슨 일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남자의 큰 손아귀가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차 안의 어두운 불빛만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박민정은 유남준의 어두운 윤곽만 보일 뿐 그의 붉어진 눈시울은 알아채지 못했다.“이지원의 말이 맞았네. 당신은 정말 거짓말쟁이야.”유남준이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 그의 말은 비수가 되어 박민정의 가슴에 꽂
반항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안 박민정은 가만히 있었다. 유남준의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대고 으르렁거렸다.“둘이 다시 만난다면 그땐 진짜 모두 가만 안 둘 테니까 그렇게 알아!”그 순간 유남준의 손에 끈적한 액체가 떨어졌다. 놀란 유남준이 박민정의 몸을 돌려 움켜잡았다. 선홍빛 피가 박민정의 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급히 박민정의 보청기를 빼냈다. “왜 또 피가 나는 거야?”박민정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아 그냥 멍하게 앉아 있었다. ‘어차피 또 상처 주는 말일 테지.’ 그녀는 차라리 안 들려서 다행이라 생각했다.“약은 가져왔어?”침묵만 흐르고. 유남준은 그녀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의사가 처치를 해주었지만 그녀는 한동안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의사가 떠나고 병실은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유남준은 물에 약을 타서 잘 저은 후 박민정에게 건넸다. 미동이 없는 그녀를 보고 그는 전화기를 꺼내 메모장을 켰다.[약 먹어!]핸드폰을 꺼내 자신과 대화하는 유남준을 보면서 박민정의 기억은 10여 년 전 그날 밤으로 돌아갔다. 그날도 박민정은 학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잠시 청력이 돌아오지 않았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유남준은 핸드폰으로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지금 상황은 마치 그날 밤과 똑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다정하던 소년이 아니었다. “다 소용없어요. 고쳐지지도 않는 것을.”박민정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핏기가 가신 입술을 깨물었다. 유남준은 가슴이 철렁했다. 급히 메모장을 열어 써 내려갔다.[누가 고칠 수 없다고 그래?]“의사가요.”유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컵을 박민정의 입가에 가져갔다. 이런 유남준은 예전의 그와 완전히 달랐다. 그날 밤 차가 고장이 나자 두 사람은 차 안에서 한참을 있었다. 박민정이 무서워하는 것을 알고 유남준은 밤새 노트로 그녀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박민정은 약을 단숨에 들이키고 침대에 누웠다. 유남준은
달빛 아래, 박민정은 자신이 오랫동안 사랑해 온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목소리가 잠긴 채 물었다. “유 대표님, 저랑 약속하셨잖아요.”박민정의 얼굴을 만지던 유남준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그녀의 눈과 마주친 그는 마음이 아려왔다. 유남준은 침대에서 내려와 병실을 나왔다. 밖에 나온 유남준은 낯선 사람을 보는듯한 박민정의 눈길을 잊을 수가 없었다.“유 대표라고?”차에 탄 그는 바로 비서에게 전화 걸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새벽 두 시, 밑도 끝도 없는 전화에 서다희는 찾아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뭐지? 프로젝트 기간도 아니고. 행사 날짜도 아닌데.”허둥대던 서다희는 그제야 컴퓨터를 보고 오늘이 박민정의 생일임을 알아챘다. 그는 바로 유남준에게 전화했다.“대표님, 오늘 민정 씨 생일입니다.”다행히 둘이 결혼할 때 서다희는 박민정의 정보를 조금 외우고 있었다. 유남준은 그녀의 생일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물었나?’‘어쩐지 연지석이 어젯밤에 돌아오더라니.’유남준이 말이 없자 서다희가 물었다.“대표님, 선물 준비할까요?”담배 재가 유남준의 손에 떨어지자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전화를 끊은 뒤 유남준은 그렇게 차에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유남준은 병실에 들어섰다. 박민정은 아무 때나 퇴원할 수 있었다. “가자. 같이 갈 데가 있어.”“어디요?”박민정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당신 계속 그 아이 만나고 싶다고 했잖아.”순간 박민정의 눈이 반짝거렸다.“고마워요.”“그래.”차 안의 분위기가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정림원.병세가 안정된 박윤우는 매일 잘 먹고 잘 놀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저 언제쯤 쓰레기 아빠가 자기를 보러오는지 궁금했다. ‘오늘 엄마 생일인데. 쓰레기 아빠가 잘 챙겨주는지 모르겠네.’“이모, 아저씨 언제 또 나 보러 와요?”박윤우는 커다란 눈망울로 가정부를 쳐다봤다. 가정부도 사실 몰랐다. 지난번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