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이지원을 뿌리쳤다.“남준 오빠, 고마워요.”감격스럽게 말한 이지원은 득의양양하게 박민정을 돌아봤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시집간 것을 후회했고, 그에게 시집가지 않으면 어떠한 조건도 제시할 수 있고, 또 대부분 동의한다는 것을 알았다.애초에 위험을 무릅쓰고 고영란을 구한 사람이 자신이라니 정말 다행이다...박민정은 차가운 표정으로 이지원이 눈앞에서 자랑하는 것을 바라봤다.두원의 크고 많은 방 중에서 이지원은 안방에서 가장 가까운 방을 선택했는데 그 속뜻은 자명했다.이지원이 방을 정리하러 갔을 때, 박민정도 방으로 돌아갈 준비했다.유남준은 거실에 앉아서 그녀를 불렀다.“이리 와.”박민정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모른 채 다가갔다.“무슨 일이에요?”유남준은 박민정의 안색을 살폈다.그는 줄곧 결혼 후 그녀가 말하기를, 두원은 앞으로 두 사람의 보금자리이며 친척과 친구 외에는 다른 여자가 절대 올 수 없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화 안 났어?”그가 이지원의 요구를 동의한 것은 첫째는 진짜 죽을까 봐 두려웠고 둘째는 박민정의 태도를 보고 싶어서였다.유남준은 박민정이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 그녀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돈을 다 갚으면 이혼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왜 화내야 해요?”유남준은 목이 메었다.“계속 그 태도를 유지하기를 바라.”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 약속있어서 저녁에 안들어올거야.”이지원은 자기가 온갖 궁리를 다해서 어렵게 남았는데 유남준이 떠날줄 몰랐다.이지원은 박민정의 방 앞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박민정은 헛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곡을 계속 쓸 생각이었는데 또 방해꾼이 나타날 줄이야. 그녀는 오늘 더이상 악보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박민정은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여름인데도 긴팔에 긴 바지를 입은 박민정을 바라보던 이지원은 목에 있는 붉은 발진을 발견했다.박씨 집안의 지원을 받았던 이지원은 예전에 자주 박씨 집안에 가서 밥을 먹었는데 예전에 박민정이 실수로 해산물을 먹었을때
“민정 씨,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이지원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그토록 청렴하고 순수하던 사람이 어떻게 유남준을 돈으로 계산한단 말인가.박민정이 반박했다.“유 대표님 아내 자리면 2,000억 정도의 가치는 충분히 있는 거 아닌가요?”“진짜 변하셨네요. 함께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절대 남자로 싸울 일은 없다더니... 뺏은 걸로도 모자라 2,000억을 주고 다시 데려가라는 건 뭐 하자는 거예요?”이지원이 헛웃음 쳤다.내로남불이라 했던가, 지금 박민정에게 어울리는 말은 이뿐이었다.박민정의 눈에서 안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제가 뺏은 건 아니죠. 남준 씨가 고아인 당신을 싫어했던 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이지원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그만해요. 돈만 주면 되는 거죠?”고개를 끄덕인 박민정이 덧붙였다.“이 일이 만약 남준 씨 귀에 들어간다면 계약은 그 즉시 파기하는 걸로 하죠.”이건 다 박민정의 계획이었다.“평생 남준 씨 배우자 자리는 꿈도 못 꾸게 할 테니까.”말은 이렇게 했지만 박민정은 이지원이 유남준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리기를 바랐다.만약 이지원이 정말로 2,000억을 준비한다면 그냥 받으려 했지만 박민정은 이지원이 유남준에게 모든 걸 말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야 이지원이니까. 예전부터 이지원은 박민정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을 밥 먹듯 했다. 이번에는 밥상까지 차려 줬는데 그걸 제 발로 걷어찰 리가 없었다.“고민 좀 해 볼게요.”이지원이 말을 마치자마자 떠날 채비를 했다.박민정을 지나치기 직전, 바람이 불며 악보가 팔락여 어딘가 기괴한 음표가 눈에 들어왔다.하지만 박민정에게 난청이 있으니 음악을 몰라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해외 천재 작곡가가 눈앞의 박민정이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다.이지원이 떠난 뒤 박민정이 여유롭게 악보를 정리하고 누웠다.한편, 이지원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좋을지 고민이 깊었다. 고자질한 전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 의심을 받을 게 뻔한데
박민정의 답을 본 이지원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오빠, 오빠가 민정 씨랑 무슨 사이인진 몰라도 민정 씨 절대 보통 아니에요.」「못 믿으시겠으면 오늘 밤 열 시, 사거리 카페로 오세요.」반드시 유남준이 보는 데서 박민정의 속내를 드러내고 말겠다 다짐한 이지원이었다.박민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간단하게 씻고 거실로 나왔는데 유남준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는 중이었다.발소리를 들은 유남준이 이지원에게서 온 메시지를 지우고 박민정을 봤다.“나가서 밥 먹자.”분명 식탁에 음식이 있는 걸 본 박민정은 의아했지만 별생각 없이 따라나갔다.식당에는 아침에 먹기 적절한 음식이 가득이었고 박민정은 그중 좋아하는 것 몇 가지만 골라 먹기 시작했다. 이에 유남준이 박민정의 행동을 주시했다.“나한테 할 말 없어?”“무슨 말이요?”박민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지원과의 일을 떠올렸다.“됐어.”유남준도 더 묻지는 않았다.박민정은 최근 너무 한가한 유남준 때문에 그가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를 할 것만 같았다.얼마 걸리지 않아 밥을 다 먹은 둘을 기사가 회사까지 데려다주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각자 일을 시작했건만 박민정은 전혀 곡이 써지지 않았고 결국 슬금슬금 유남준의 책상으로 다가갔다.“나가고 싶어요.”“그래.”서류를 넘기던 손이 멈췄다.유남준이 이렇게까지 순순히 대답할 줄 몰랐던 박민정은 당황스러웠다.사무실을 나가기 전에 박민정이 덧붙였다.“저 오늘 일이 있어서 조금 늦을 것 같아요.”유남준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잠깐 박민정의 얼굴을 살피던 유남준의 얇은 입술이 달싹였다.“무슨 일?”“개인사정이요.”박민정이 비밀인 양 말했다.딱잘라 말하는 박민정에 조금 당황한 유남준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얼음장 같아졌다.“경고하는데, 무슨 짓을 하든 날 화나게만 하지 마.”그의 말을 통해 박민정은 이지원이 일러바쳤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런데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유남준은 이런 일을 참
박민정은 그저 멀리서 그 밭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아직 있을 줄은 몰랐네...”정민기가 박민정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곳엔 자유롭고 드넓은 초원을 연상시키는 해당화 밭이 펼쳐져 있었다. 조금 낡아 보이긴 했지만 모든것이 누군가의 손길을 거친듯 생기가 돌지 않는 곳이 없다. 별장의 주인이 정성스레 고심해서 가꾼듯 했다.“여긴?”“옛날에 진주에서 살 때 살던 집이에요.”정민기의 질문에 박민정이 답했다.들어갈 자격이 없어 그저 보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이만 가죠.”박민정이 차에 올라탔고 곧이어 차는 천천히 별장에서 멀어져갔다. 관목숲 사이 어딘가 한 남자가 이상한 모습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박민정은 그 남자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시내에서 한 바퀴 더 돌던 박민정이 정민기에게 이만 두원에 데려다 달라고 했고 두원에 도착한뒤 그녀는 작업실에서 곡을 썼다.경호원이 박민정의 행적을 모두 유남준에게 알렸고 유남준은 그 카페로 가기 위해 아홉 시 조금 넘은 시각에 출발했다.한편, 박민정도 두원에서 출발하려는 참에 정민기가 메시지를 보냈다.「유남준 씨 차가 역시나 사거리로 가고 있습니다.」두원으로 가기 전, 정민기에게 유남준이 어디로 가는지 지켜봐 달라 했는데 역시 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이지원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고자질을 좋아했으니.늦은 밤, 카페에는 별다른 사람이 없었다.이지원이 예약한 룸은 야경뷰였고 박민정은 정시에 도착했다.박민정이 원피스에 위에 작은 겉옷 하나를 걸친 이유는 알레르기 때문이었는데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겉옷을 챙겼을 것이다. 밖에 오래 있을 때면 추위를 극도로 타는 체질이기에 여름이더라도 늘 겉옷을 챙겼기 때문이다. 박민정의 분위기와 모습은 시야를 탁 트이게 하기 충분한 모습이었다. 몸매는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왔고 얼굴은 고상하여 한 번 본 사람은 절대 잊지 못할 모습이었다.이지원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박민정을 질투한다 하는 게 더 맞았다.한수민
박민정이 일어나 이지원의 앞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제가 변했다면서 왜 아직도 예전의 저를 대하듯 하세요? 아직도 지원 씨한테 속을 것 같나요, 제가? 사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요. 그냥 지원 씨랑 같은 사람 되기 싫어서 반격하지 않았던 거지."박민정이 룸을 나가며 덧붙였다."다음에는 조금 발전하셨으면 좋겠네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안타깝다는 표정이 어딘가 음침해 보여 두렵기 시작했다.카페를 벗어난 박민정이 정민기가 알려 준 자리의 차가 없어진 걸 발견하고 숨을 내쉬었다.문득 유남준이 더 이상 자신이 예전에 좋아하던 그 어린 소년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그 소년은 속내를 다 드러냈고, 자신에게 잘해 줬다. 물론 의심 같은 것도 하지 않았었다.박민정이 생각에 잠긴 채 차를 타고 떠났다.이지원이 건물을 나와 몇 걸음 채 걷지 않았을 때 어떤 남자가 불쑥 나타나 이지원의 손목을 붙잡고 으슥한 곳으로 갔다."지원아, 보고 싶었어."눈앞의 남자는 수염이 거뭇거뭇했고 눈 밑은 푸르뎅뎅했다. 누가 봐도 잠을 못 잔 사람의 모습이었다."임수호,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몇 번을 더 얘기해야 해? 난 너랑 LA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정말 날 위한 거면 어서 돌아가."임수호가 상처받은 눈빛으로 말했다."유남준 때문이지? 걘 너한테 마음 없다니까? 널 좋아했다면 진작 결혼했겠지.""그게 뭐? 적어도 내가 원하는 건 줄 수 있는 사람이야."이지원은 흔들리지 않았다."넌 뭘 줄 수 있는데?""난...""지금의 넌 아무것도 못 해."임수호가 이지원의 팔을 단단하게 잡았다."내 회사는 망했지만, 곡은 아직 쓸 수 있어. 너만을 위한 노래를 써 줄게."이지원이 비웃었다."그딴 곡 필요 없어. 넌 재능이 없다고. 언제 인정할래?"임수호의 눈이 빨개졌다."사람이 어떻게... 왜 이렇게 냉정해진 거야. 그때 내가 없었으면 지금의 네가 있을 것 같아? 이제는 내가 널 원한다고!"임수호가 화내는 걸 보더니 이지원이 말투를
박민정이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유남준은 짙은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강렬한 눈빛을 박민정에게 보냈다."재미있었어?""나쁘지 않았어요."유남준이 일어나자 그 몸이 박민정의 시야 반을 가렸다."이지원이 그러던데, 2,000억에 날 팔려 했다고."박민정이 멈칫했다. 분명 다 들었으면서 왜 나한테 또 묻는 건지 의아했다."그런 적 없어요.""그래?"유남준이 몸을 가까이하자 박민정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저랑 지원 씨 사이가 안 좋은 건 아실 테고, 전에 어머님께서 주신 돈도 받지 않았는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예요?"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을 다 듣고도 쉽사리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이지원이 박민정에게 자신이 했던 짓을 모두 들킨 게 아니라면 유남준을 부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딱히 더 묻지는 않았다."더 하실 말씀 있어요?"박민정의 등이 벽에 닿았다.그 조심스러운 모습에 유남준의 목울대가 울렁였다.탐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할 때면 정신줄을 꽉 붙잡고 있기 힘들었다."돈은, 준비했어?"이렇게 빨리 달라 할 줄 몰랐던 박민정이 흠칫했다."아직이요.""그럼 내가 제안 하나 하지."유남준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우린 결혼한 사이인데, 당신이 아내로서의 책임을 다한다면 예물은 당연히 안 줘도 돼."‘아내로서의 책임?’성인인 박민정이 이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오른 박민정이 당황한 틈을 타 유남준의 뜨거운 손이 박민정의 얼굴을 쥐고 살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한 번에 200억, 어때?"박민정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대체 유남준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짜증이 났다.이 말을 들으니 첫날 반항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탐했던 유남준이 떠올랐다."싫어요."박민정이 유남준을 밀어내고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문을 잠갔다.품속이 갑자기 텅 비어 버린 유남준은 박민정이 왜 또 화난 건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그는 자신이 아는 여자들 중 오직 박민정만이
"난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는데."유남준이 차갑게 말했다.그럼에도 강은지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 경호원이 끌어내려 해도 테이블을 잡고 놓지 않았다."대표님, 절 때린 사람이 그랬어요. 제가 일을 잘 못해서 대표님께 누가 되었다고. 제발 저 좀 한 번만 봐주세요, 대표님. 여기서 죽고 싶진 않아요..."강은지가 통곡하며 간절하게 말했다. 그 얼굴에 가득한 상처는 다 나은 뒤에도 흉터가 남을 게 뻔했다.유남준은 원래 개입할 생각이 없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명분으로 내세워 폭력을 휘두른다니 생각이 바뀌었다."자세히 얘기해 보지."경호원에게 강은지를 놓으라 이르자 강은지가 다시 무릎 꿇고 말했다."대표님을 뵌 날, 퇴근하고 돌아갔는데 새벽 두세 시쯤에 누가 절 침대에서 끌어내렸어요. 절 때리고 욕하면서 어떻게 감히 저 같은 게 대표님을 성가시게 하냐고... 그날부터 저한테 손님 접대를 하라고 시켰어요. 거부하면 또 때리고 욕하면서..."강은지의 눈에서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렀다. 유남준은 누군가의 지시가 없이는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그는 경호원에게 강은지를 데려다주게 하고, 누가 벌인 짓인지 찾아내게 했다.수호 클럽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범인을 찾는 건 시간 문제였고 한 시간 정도 지나자 경호원이 보고를 올렸다."대표님, 범인을 찾아보니 배후에 이지원 씨가 있었습니다."또 이지원이다.유남준이 전부터 이지원이 하는 일에 관심을 껐더니 이젠 이렇게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짓을 한다."이지원한테 전해.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그땐 이렇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잠깐 멈칫했던 경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유남준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유남준이 화를 낸 포인트는 사람을 시켜 강은지를 때린 게 아니라, 명분으로 자기를 댔다는 것이었다.이지원은 유남준이 이 사실을 알게 돼도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경호원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선을 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어떻게 변명해
박민정이 슬리퍼를 끌고 거실로 나왔을 때 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언제?""오전 열 시."조하랑이었다."지금 갈게."박민정이 전화를 끊고 잠시 고민하더니 유남준에게 문자를 남겼다.「친구 집 좀 갔다 올게요.」조하랑네 집에 가는 김에 박예찬도 볼 수 있으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고작 며칠 못 본 것뿐인데도 꽤 오래 못 본 것처럼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수호 클럽 내부는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남준아, 아침부터 무슨 술이야."억지로 불려 온 김인우가 피곤한 듯 말했다."나 요즘 바쁜 거 알잖아."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김인우는 가운조차 못 벗고 달려왔다.건들거리는 김인우를 보던 유남준이 말했다."네가 성원이처럼 아내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바쁘긴 뭐가 바빠.""그럼 넌 아내도 있는 놈이 왜 여기 있어?"유남준이 할 말을 잃자 분위기를 읽은 김인우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요즘 의학 제대로 배우느라 요 며칠 수술만 몇 번 집도했는지 몰라."물론 조하랑을 조사하는 것도 바쁜 일에 포함이었다.그 여자가 도대체 자신과 겹치는 게 얼마나 있는지 알고 싶었는데 심지어 애도 있었다. 물론 그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왜?"유남준은 김인우가 이렇게까지 변한 이유가 궁금했다."왜라니?""전엔 죽어도 의사는 안 한다며."김인우가 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그땐 어렸잖아. 이제 보니까 의사 하면 사람도 살릴 수 있고 얼마나 좋아."거짓이었다.박민정이 돌아온 후, 김인우는 쭉 박민정의 난청과 출혈을 연구했다.얼른 의사가 되어서 박민정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들었으면 좋겠다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건 그가 박민정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했다.유남준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아 굳이 더 묻지 않았다.핸드폰을 보니 박민정이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사과하려는 줄 알았더니 친구 집에 간다는 통보였다."왜, 민정이가 감시해?"유남준의 얇은 입술이 달싹였다."아니, 친
결국 진서연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들어줬다.그리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정민기에게 오늘은 안 될 것 같으니 내일 같이 밥 먹자고 문자를 보냈다.이 시각, 정민기는 문자를 보자마자 혹시나 진서연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원래 많이 물어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는 비록 궁금하긴 하지만 애써 참고 메시지에 답장했다.“네.”저녁때쯤, 에리는 진서연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정민기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따라오던 그의 부하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보스, 오늘 형수님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일 있대.”“헐, 저거 엄청 비싼 차인데!”그의 말에 정민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은 값비싼 슈퍼 카를 타고 자리를 떴다.부하들은 원래 정민기를 무서워했지만 같이 지낸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많이 편해진 것 같았다.“보스, 형수님은 왜 갑자기 저런 차를 타고 갈까요?”정민기는 원래 몇십억짜리 자동차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했지만 부하가 대놓고 물어보니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나도 몰라.”그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다시 자기 차에 올라탔다.지금 그가 타고 다는 차는 고작 몇천만짜리였고 길거리에 몰고 나가도 눈길 한 번을 안 줄 그런 차였다.그저 박민정의 보디가드로서 너무 좋은 차를 끌고 다녀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민기가 말없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본 부하들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설마 형수님이랑 다툰 건가?” “아까 그 차는 한눈에 봐도 엄청 비싼 차일 것 같은데 설마 형수님께서 마음을 바꾼 건 아니겠지? 우리 보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어떻게...”“대단하면 뭐 해? 지금 시대는 돈이 제일 쓸모가 있단 걸 몰라?”“하긴 요즘 사람들은 너무 현실적이야.”부하들의 말을 정민기는 차 안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그러나 지금은 퇴근한 박민정을 박씨
하정철의 황당한 물음에 에리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아빠,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제가 어떻게 연 사장님을 좋아해요?”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 얼굴인데 좋아한다고 하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만약 이런 사람이랑 매일 같이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에리의 말에 연지석은 그제야 마음 놓고 여유롭게 물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어르신, 들으셨죠? 정말 오해라니까요.”하정철은 그제야 묵은 체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직 궁금증이 해결이 안 된 게 있어 다시 에리에게 다가갔다.“그러면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구야? 애초에 없는 거 아냐? 만약 없으면 저번에 외삼촌이 소개한 그 여자를 한 번 만나보던지.”여기까지 와서 결혼을 재촉하는 아버지를 보고 에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마침 진서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 앞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에리가 대뜸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바로 저 사람이에요.”순간, 문 어구에 서 있던 진서연은 어안이벙벙해졌다.“네?”‘에리 씨가 날 좋아한다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자신은 정민기와 사귀는 사이인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에리도 외모가 아주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딴마음을 가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저기, 어르신...”진서연이 막 해명하려는데 에리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와 슬쩍 눈빛을 보냈다.이건 분명 도와달라는 구조신호였다.하여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예의상 하정철에게 말했다.“처음 뵙겠습니다.”하정철은 진서연을 다시 아래위로 훑어보니 얼굴도 귀엽고 예의 바른 것 같아 마음에 들었는데 무엇보다도 ‘여자’라는 면에서 크게 안심이 되었다.“아가씨, 이름이 뭐예요?”“진서연이라고 합니다.”하정철 세대의 어르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얼굴상이 바로 진서연처럼 귀엽고 순진한 여자일 것이다.“그래요. 오늘 퇴근하면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요. 제가 제 아내한테 말할 테니까 혹시 특
하정철은 최대한 그가 알아듣기 쉽게 말했으나 연지석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저기 어르신, 혹시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랑 에리가 왜 거짓말하겠어요?”에리랑은 친구 사이라고도 말 못 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과 함께 말을 맞춰 그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하정철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더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그러면 제가 더 알아듣게 말할까요?”순간 직원들의 시선이 전부 두 사람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그의 으름장에도 연지석은 덤덤하게 답했다.“네. 전 괜히 오해를 사기 싫습니다.”그러나 연지석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후회했다.“당신이랑 우리 에리가 지금 사귀는 중인가요?”하정철의 말에 주변은 삽시에 조용해졌고 연지석은 혹시나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그에게 되물었다.“뭐라고요?”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말아요. 저랑 에리 엄마도 이미 다 눈치챘으니까. 만약 두 사람이 진짜 사랑하는 거라면 일찍이 말해주지, 굳이 이렇게까지 늙은이들을 마음고생시킬 필요는 없잖아요!”하정철의 호소에도 연지석은 여전히 이게 무슨 말인지 상황판단이 안 섰다.유부녀를 좋아한다는 소문까지는 견딜 수 있어도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리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가 어떻게 게이란 말인가? 그것도 한때의 라이벌인 사람과?“오해입니다. 저랑 에리는 그저 동료일 뿐,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연지석은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이에 대해 해명하게 되었다.사람 중에서 구경하던 진서연은 갑작스러운 일의 전개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파일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대박, 설마 진짜야?’구경꾼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연지석은 어쩔 수 없이 하정철의 팔을 이끌며 말했다.“일단 제 사무실로 가시죠.”“인정하는 건가요? 그래서 창피해서 이러는 거죠?”하정철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계속 캐물었지만 연지석은 대답할 가치도
“내일 회사에 가서 그 여자가 누구인지 한번 봐야겠어.”에리의 아버지 하정철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하자 조미연도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우리 아들이 나쁜 길로 빠지게 할 수는 없잖아요.”사실 그녀도 에리가 진짜로 남자를 좋아할까 봐 걱정되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오히려 돌싱에 아이도 있는 여자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되었다.이튿날 아침.박민정이 회사로 와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고 설인하의 모습도 보였다.“인하 씨, 무슨 일이에요?”“에리 씨 아버님께서 오셨는데 에리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네?”박민정은 화들짝 놀라더니 어제 에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혹시 인하 씨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박민정의 물음에 설인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저야 당연히 모르죠. 회사에 이렇게 많은 인플루언서며 예쁜 여배우들이 있는데 에리는 다 싫대요. 눈이 아주 높은가 봐요.”“그럼 에리랑 아주 친한 사람이겠네요?”아마 그의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혼기가 찬 에리가 걱정되어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또한 신경외과 전문의의인데도 이렇게 회사까지 직접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거면 분명 에리의 아버지도 큰 용기를 냈을 것이다.설인하는 에리가 평소에도 자주 교류하는 사람이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 사람들을 다 제외한다면...그녀의 얼굴이 순간 돌변하더니 박민정에게 물었다.“에리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설마 연 사장님은 아니겠죠?”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말처럼 아마 에리는 연지석을 좋아해서 그와 자주 트러블이 생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네?”박민정은 순간 깜짝 놀랐다.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연지석과 두 사람이 티격태격 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보통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괜히 그 사람한테 장난치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어진다.“설마 진짜일까요?”박민정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뭐가?”이때 연지석이 언제 왔는지 문 앞에서 두 사람을 가만
유남우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윤소현을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위로해 줬는데 이런 모습을 일부러 박민정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아니면 홍주영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홍주영과 박민정 두 사람은 그저 한쪽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그들에게 말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거부 반응은 없는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박민정과 조하랑도 그곳에 한참 동안 머물다가 병원을 빠져나왔다.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은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했다.그녀는 원래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했지만 오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유다혜를 본 뒤로는 이상하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모든 아이한테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가 주어지는데 괜히 그 기회를 마음대로 저버리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김인우 씨가 혹시나 아이를 원치 않으면 어떡하지?’“민정아, 내가 임신한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해줘. 특히 인우 씨한테.”박민정은 왜 그래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갔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먼저 조하랑을 데려다준 뒤 박민정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에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정아, 아까 급하게 나가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야. 그저 하랑이 만나고 왔어.”“그럼 됐어.”그렇게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만 에리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민정아, 저번에 그 뉴스 기사 봤어?”‘기사?’순간 저번에 최현아가 에리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에리가 다급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민정아, 난 극히 정상적인 남자야. 절대 게이가 아니니까 믿어줘.”그의 말에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래. 믿을게.”박민정이 웃자 에리
“민정아, 하랑 씨.”다름 아닌 정수미와 윤소현이었는데 그중 정수미는 빠르게 두 사람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민정아, 병원에는 웬일이야? 어디 아픈 거야?”이때 조하랑이 갑자기 일부러 기침하더니 박민정 대신 답했다.“콜록! 콜록! 제가 감기 걸려서 민정이랑 같이 왔어요.”그러나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의사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보고서를 그녀에게 건네줬다.“조하랑 환자분, 임신 보고서를 두고 가셨어요.”순간 조하랑은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녀의 거짓말이 이렇게 빨리 탄로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민정은 재빨리 일어나 보고서를 건네받았고 조하랑도 멋쩍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왔던 김에 산부인과에도 와봤어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활짝 웃었다.“축하해요.”“감사합니다.”그러나 조하랑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옆에 서 있던 윤소현은 김씨 가문의 후계자를 임신했다는 소리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불타올랐다.이렇게 되면 김씨 가문에서 조하랑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진다고 볼 수 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신분이나 지위, 외모 면에서 조하랑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밀려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유남우와 홍주영 두 사람도 손에 한 무더기 결과서를 갖고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문득 박민정 손에 들린 검사 보고서를 본 순간 표정이 변했다.‘임신 보고서인가?’‘또 임신했다고?’유남우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윤소현이 빠르게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남우 씨, 우리 다혜는 어떻게 됐어요?”“방금 수술이 끝나서 이제 회복 결과를 지켜봐야지.”윤소현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유남우의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만약 우리 다혜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 그러면 저도 그냥 죽어버릴래요.”유남우는 그녀를 밀쳐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애써 참고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야.”“너무 무섭지만 남우 씨가 제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윤
박민정은 왠지 조급하게 들리는 조하랑의 목소리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하던 일을 멈추고 답했다.“그래.”한 시간 뒤, 어느 작은 내과 병원.박민정은 허름한 병원 외부와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조하랑에게 의아해서 물었다.“하랑아, 대체 이런 곳에는 왜 온 거야?”조하랑은 그녀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더니 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조용히 해.”그리고 주머니에서 마스크 두 장을 꺼내더니 하나는 박민정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었다.“민정아, 나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서 검사해 봐야겠어.”“뭐?”박민정은 진짜 큰 일인 줄 알고 가슴을 졸였는데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런 건 먼저 테스트기로 확인해 볼 수 있지 않나?’조하랑은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재빨리 해명했다.“임테기도 다 정확한 건 아니잖아. 무조건 병원에 와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게 제일 확실할 것 같아서.”“그렇지만 꼭 이런 곳에서 검사해야 해?”박민정은 이곳의 위생 상태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러나 진주시의 크고 작은 병원들은 거의 다 김씨 가문 산업이다 보니 조하랑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혹시나 김씨 가문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김인우랑 김훈한테 해명하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가자. 걱정하지 마.”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들어가서 더러운 의료 기기들을 보고는 기겁하더니 빠르게 뛰쳐나왔다.“그냥 다른 병원으로 가자.”두 사람은 다시 짐을 싸서 결국에는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소변 검사와 초음파 검사까지 마친 조하랑은 검사 보고서에 임신 4주 차라는 글씨를 본 순간 눈앞이 아찔해 났다.“어떻게 4주가 되는 거예요?”“마지막 생리 주기를 계산해 본 결과가 그렇게 나왔습니다.”조하랑은 지금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좋은 일인데 인우 씨한테 빨리 알려줘.”그러나 조하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아니, 절대 안 돼.”자신도 아직 받아 들을 준비가 안
정수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의사한테 자신이 사인하겠다고 말하려는데 멀리서부터 유남우가 다가와 그들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윤소현은 유남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굴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눈물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남우 씨, 우리 다혜가 혈액암이래요. 그래서 다른 피를 수혈받아야 한다는데 그래도 살 확률이 그리 높지 않대요. 저희 이제 어떡하죠?”유남우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럼 빨리 수혈부터 진행하자고 해.”윤소현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사인했다.그러나 정수미는 그녀의 빠른 태세 전환에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분명 이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유남우의 원인이 크다는 걸 윤소현도 알 텐데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렇게 그들은 밤새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새벽 때쯤, 홍주영도 전문의들을 데리고 달려왔다.그리고 어린아이가 고생하고 있는 게 너무 안쓰러웠다.“도련님, 다혜는 괜찮나요?”홍주영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유남우는 문득 어제 하민재와 그녀가 같이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나도 아직 몰라. 지금 수술 중이야.”홍주영은 수술실 쪽을 바라보면서 애써 조급한 마음을 달랬다.그러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소현은 그녀의 모습이 참 가증스럽다고 생각되었다.“홍 비서님, 다혜는 제 딸인데 왜 비서님이 난리예요?”그녀의 날카로운 말투에 홍주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이때 유남우가 고개를 돌리고 윤소현에게 물었다.“다혜가 자기 딸인 걸 아는 사람이 왜 지금 하나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그는 원래 이 계기로 윤소현에게도 만약 아이한테 사고가 일어나게 되면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그러나 이 여자는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윤소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이 일은 점점 크게 번져 어느새 김씨 가문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김인우는 유다혜가 병원에서 수술받는다는
“연애해 본 적 없다면서요?”하민재는 다소 의아했다.도대체 자신이 그 남자보다 부족한 게 뭐란 말인가?홍주영은 그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네, 연애는 해 본 적 없어요. 그냥... 짝사랑이었을 뿐이에요.” 하민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렇게 솔직한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럼 왜 고백하지 않았어요?” 그는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홍주영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그 사람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절 좋아하지 않거든요.”“그럼 둘이 이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거네요?”하민재가 다시 한번 확인하자 홍주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헤어질 필요도 없잖아요? 난 신경 안 써.”짝사랑이라면 아무 문제없었다.하민재는 자신만만했다. 연애 경험 없는 홍주영쯤이야 얼마든지 자신의 매력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홍주영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하민재가 가로막았다.“하지만은 무슨. 이제 이 얘긴 그만해요. 연애에 공평함 같은 게 어디 있어요? 난 주영 씨 마음속에 누군가 있는 걸 개의치 않으니까 주영 씨도 내 과거에 신경 쓰지 않으면 돼요.”하민재의 단호한 태도에 홍주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좋아요, 약속할게요.”“네.”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하민재의 할머니가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어떻게 됐어?”“뭐가요?”하민재가 되묻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랑 주영이 말이다. 주영이 같은 아이, 꼭 소중히 여겨야 한다. 부잣집 딸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할 것 없는 아이야.”하민재의 할머니는 함부로 연을 맺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홍주영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었다. 홍주영은 비록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할 만했다.그녀는 가문 사업에는 별 관심 없는 손자가 이런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하민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