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이지원을 뿌리쳤다.“남준 오빠, 고마워요.”감격스럽게 말한 이지원은 득의양양하게 박민정을 돌아봤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시집간 것을 후회했고, 그에게 시집가지 않으면 어떠한 조건도 제시할 수 있고, 또 대부분 동의한다는 것을 알았다.애초에 위험을 무릅쓰고 고영란을 구한 사람이 자신이라니 정말 다행이다...박민정은 차가운 표정으로 이지원이 눈앞에서 자랑하는 것을 바라봤다.두원의 크고 많은 방 중에서 이지원은 안방에서 가장 가까운 방을 선택했는데 그 속뜻은 자명했다.이지원이 방을 정리하러 갔을 때, 박민정도 방으로 돌아갈 준비했다.유남준은 거실에 앉아서 그녀를 불렀다.“이리 와.”박민정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모른 채 다가갔다.“무슨 일이에요?”유남준은 박민정의 안색을 살폈다.그는 줄곧 결혼 후 그녀가 말하기를, 두원은 앞으로 두 사람의 보금자리이며 친척과 친구 외에는 다른 여자가 절대 올 수 없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화 안 났어?”그가 이지원의 요구를 동의한 것은 첫째는 진짜 죽을까 봐 두려웠고 둘째는 박민정의 태도를 보고 싶어서였다.유남준은 박민정이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 그녀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돈을 다 갚으면 이혼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왜 화내야 해요?”유남준은 목이 메었다.“계속 그 태도를 유지하기를 바라.”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 약속있어서 저녁에 안들어올거야.”이지원은 자기가 온갖 궁리를 다해서 어렵게 남았는데 유남준이 떠날줄 몰랐다.이지원은 박민정의 방 앞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박민정은 헛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곡을 계속 쓸 생각이었는데 또 방해꾼이 나타날 줄이야. 그녀는 오늘 더이상 악보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박민정은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여름인데도 긴팔에 긴 바지를 입은 박민정을 바라보던 이지원은 목에 있는 붉은 발진을 발견했다.박씨 집안의 지원을 받았던 이지원은 예전에 자주 박씨 집안에 가서 밥을 먹었는데 예전에 박민정이 실수로 해산물을 먹었을때
“민정 씨,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이지원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그토록 청렴하고 순수하던 사람이 어떻게 유남준을 돈으로 계산한단 말인가.박민정이 반박했다.“유 대표님 아내 자리면 2,000억 정도의 가치는 충분히 있는 거 아닌가요?”“진짜 변하셨네요. 함께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절대 남자로 싸울 일은 없다더니... 뺏은 걸로도 모자라 2,000억을 주고 다시 데려가라는 건 뭐 하자는 거예요?”이지원이 헛웃음 쳤다.내로남불이라 했던가, 지금 박민정에게 어울리는 말은 이뿐이었다.박민정의 눈에서 안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제가 뺏은 건 아니죠. 남준 씨가 고아인 당신을 싫어했던 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이지원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그만해요. 돈만 주면 되는 거죠?”고개를 끄덕인 박민정이 덧붙였다.“이 일이 만약 남준 씨 귀에 들어간다면 계약은 그 즉시 파기하는 걸로 하죠.”이건 다 박민정의 계획이었다.“평생 남준 씨 배우자 자리는 꿈도 못 꾸게 할 테니까.”말은 이렇게 했지만 박민정은 이지원이 유남준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리기를 바랐다.만약 이지원이 정말로 2,000억을 준비한다면 그냥 받으려 했지만 박민정은 이지원이 유남준에게 모든 걸 말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야 이지원이니까. 예전부터 이지원은 박민정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을 밥 먹듯 했다. 이번에는 밥상까지 차려 줬는데 그걸 제 발로 걷어찰 리가 없었다.“고민 좀 해 볼게요.”이지원이 말을 마치자마자 떠날 채비를 했다.박민정을 지나치기 직전, 바람이 불며 악보가 팔락여 어딘가 기괴한 음표가 눈에 들어왔다.하지만 박민정에게 난청이 있으니 음악을 몰라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해외 천재 작곡가가 눈앞의 박민정이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다.이지원이 떠난 뒤 박민정이 여유롭게 악보를 정리하고 누웠다.한편, 이지원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좋을지 고민이 깊었다. 고자질한 전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 의심을 받을 게 뻔한데
박민정의 답을 본 이지원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오빠, 오빠가 민정 씨랑 무슨 사이인진 몰라도 민정 씨 절대 보통 아니에요.」「못 믿으시겠으면 오늘 밤 열 시, 사거리 카페로 오세요.」반드시 유남준이 보는 데서 박민정의 속내를 드러내고 말겠다 다짐한 이지원이었다.박민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간단하게 씻고 거실로 나왔는데 유남준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는 중이었다.발소리를 들은 유남준이 이지원에게서 온 메시지를 지우고 박민정을 봤다.“나가서 밥 먹자.”분명 식탁에 음식이 있는 걸 본 박민정은 의아했지만 별생각 없이 따라나갔다.식당에는 아침에 먹기 적절한 음식이 가득이었고 박민정은 그중 좋아하는 것 몇 가지만 골라 먹기 시작했다. 이에 유남준이 박민정의 행동을 주시했다.“나한테 할 말 없어?”“무슨 말이요?”박민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지원과의 일을 떠올렸다.“됐어.”유남준도 더 묻지는 않았다.박민정은 최근 너무 한가한 유남준 때문에 그가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를 할 것만 같았다.얼마 걸리지 않아 밥을 다 먹은 둘을 기사가 회사까지 데려다주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각자 일을 시작했건만 박민정은 전혀 곡이 써지지 않았고 결국 슬금슬금 유남준의 책상으로 다가갔다.“나가고 싶어요.”“그래.”서류를 넘기던 손이 멈췄다.유남준이 이렇게까지 순순히 대답할 줄 몰랐던 박민정은 당황스러웠다.사무실을 나가기 전에 박민정이 덧붙였다.“저 오늘 일이 있어서 조금 늦을 것 같아요.”유남준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잠깐 박민정의 얼굴을 살피던 유남준의 얇은 입술이 달싹였다.“무슨 일?”“개인사정이요.”박민정이 비밀인 양 말했다.딱잘라 말하는 박민정에 조금 당황한 유남준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얼음장 같아졌다.“경고하는데, 무슨 짓을 하든 날 화나게만 하지 마.”그의 말을 통해 박민정은 이지원이 일러바쳤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런데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유남준은 이런 일을 참
박민정은 그저 멀리서 그 밭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아직 있을 줄은 몰랐네...”정민기가 박민정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곳엔 자유롭고 드넓은 초원을 연상시키는 해당화 밭이 펼쳐져 있었다. 조금 낡아 보이긴 했지만 모든것이 누군가의 손길을 거친듯 생기가 돌지 않는 곳이 없다. 별장의 주인이 정성스레 고심해서 가꾼듯 했다.“여긴?”“옛날에 진주에서 살 때 살던 집이에요.”정민기의 질문에 박민정이 답했다.들어갈 자격이 없어 그저 보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이만 가죠.”박민정이 차에 올라탔고 곧이어 차는 천천히 별장에서 멀어져갔다. 관목숲 사이 어딘가 한 남자가 이상한 모습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박민정은 그 남자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시내에서 한 바퀴 더 돌던 박민정이 정민기에게 이만 두원에 데려다 달라고 했고 두원에 도착한뒤 그녀는 작업실에서 곡을 썼다.경호원이 박민정의 행적을 모두 유남준에게 알렸고 유남준은 그 카페로 가기 위해 아홉 시 조금 넘은 시각에 출발했다.한편, 박민정도 두원에서 출발하려는 참에 정민기가 메시지를 보냈다.「유남준 씨 차가 역시나 사거리로 가고 있습니다.」두원으로 가기 전, 정민기에게 유남준이 어디로 가는지 지켜봐 달라 했는데 역시 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이지원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고자질을 좋아했으니.늦은 밤, 카페에는 별다른 사람이 없었다.이지원이 예약한 룸은 야경뷰였고 박민정은 정시에 도착했다.박민정이 원피스에 위에 작은 겉옷 하나를 걸친 이유는 알레르기 때문이었는데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겉옷을 챙겼을 것이다. 밖에 오래 있을 때면 추위를 극도로 타는 체질이기에 여름이더라도 늘 겉옷을 챙겼기 때문이다. 박민정의 분위기와 모습은 시야를 탁 트이게 하기 충분한 모습이었다. 몸매는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왔고 얼굴은 고상하여 한 번 본 사람은 절대 잊지 못할 모습이었다.이지원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박민정을 질투한다 하는 게 더 맞았다.한수민
박민정이 일어나 이지원의 앞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제가 변했다면서 왜 아직도 예전의 저를 대하듯 하세요? 아직도 지원 씨한테 속을 것 같나요, 제가? 사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요. 그냥 지원 씨랑 같은 사람 되기 싫어서 반격하지 않았던 거지."박민정이 룸을 나가며 덧붙였다."다음에는 조금 발전하셨으면 좋겠네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안타깝다는 표정이 어딘가 음침해 보여 두렵기 시작했다.카페를 벗어난 박민정이 정민기가 알려 준 자리의 차가 없어진 걸 발견하고 숨을 내쉬었다.문득 유남준이 더 이상 자신이 예전에 좋아하던 그 어린 소년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그 소년은 속내를 다 드러냈고, 자신에게 잘해 줬다. 물론 의심 같은 것도 하지 않았었다.박민정이 생각에 잠긴 채 차를 타고 떠났다.이지원이 건물을 나와 몇 걸음 채 걷지 않았을 때 어떤 남자가 불쑥 나타나 이지원의 손목을 붙잡고 으슥한 곳으로 갔다."지원아, 보고 싶었어."눈앞의 남자는 수염이 거뭇거뭇했고 눈 밑은 푸르뎅뎅했다. 누가 봐도 잠을 못 잔 사람의 모습이었다."임수호,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몇 번을 더 얘기해야 해? 난 너랑 LA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정말 날 위한 거면 어서 돌아가."임수호가 상처받은 눈빛으로 말했다."유남준 때문이지? 걘 너한테 마음 없다니까? 널 좋아했다면 진작 결혼했겠지.""그게 뭐? 적어도 내가 원하는 건 줄 수 있는 사람이야."이지원은 흔들리지 않았다."넌 뭘 줄 수 있는데?""난...""지금의 넌 아무것도 못 해."임수호가 이지원의 팔을 단단하게 잡았다."내 회사는 망했지만, 곡은 아직 쓸 수 있어. 너만을 위한 노래를 써 줄게."이지원이 비웃었다."그딴 곡 필요 없어. 넌 재능이 없다고. 언제 인정할래?"임수호의 눈이 빨개졌다."사람이 어떻게... 왜 이렇게 냉정해진 거야. 그때 내가 없었으면 지금의 네가 있을 것 같아? 이제는 내가 널 원한다고!"임수호가 화내는 걸 보더니 이지원이 말투를
박민정이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유남준은 짙은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강렬한 눈빛을 박민정에게 보냈다."재미있었어?""나쁘지 않았어요."유남준이 일어나자 그 몸이 박민정의 시야 반을 가렸다."이지원이 그러던데, 2,000억에 날 팔려 했다고."박민정이 멈칫했다. 분명 다 들었으면서 왜 나한테 또 묻는 건지 의아했다."그런 적 없어요.""그래?"유남준이 몸을 가까이하자 박민정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저랑 지원 씨 사이가 안 좋은 건 아실 테고, 전에 어머님께서 주신 돈도 받지 않았는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예요?"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을 다 듣고도 쉽사리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이지원이 박민정에게 자신이 했던 짓을 모두 들킨 게 아니라면 유남준을 부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딱히 더 묻지는 않았다."더 하실 말씀 있어요?"박민정의 등이 벽에 닿았다.그 조심스러운 모습에 유남준의 목울대가 울렁였다.탐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할 때면 정신줄을 꽉 붙잡고 있기 힘들었다."돈은, 준비했어?"이렇게 빨리 달라 할 줄 몰랐던 박민정이 흠칫했다."아직이요.""그럼 내가 제안 하나 하지."유남준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우린 결혼한 사이인데, 당신이 아내로서의 책임을 다한다면 예물은 당연히 안 줘도 돼."‘아내로서의 책임?’성인인 박민정이 이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오른 박민정이 당황한 틈을 타 유남준의 뜨거운 손이 박민정의 얼굴을 쥐고 살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한 번에 200억, 어때?"박민정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대체 유남준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짜증이 났다.이 말을 들으니 첫날 반항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탐했던 유남준이 떠올랐다."싫어요."박민정이 유남준을 밀어내고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문을 잠갔다.품속이 갑자기 텅 비어 버린 유남준은 박민정이 왜 또 화난 건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그는 자신이 아는 여자들 중 오직 박민정만이
"난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는데."유남준이 차갑게 말했다.그럼에도 강은지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 경호원이 끌어내려 해도 테이블을 잡고 놓지 않았다."대표님, 절 때린 사람이 그랬어요. 제가 일을 잘 못해서 대표님께 누가 되었다고. 제발 저 좀 한 번만 봐주세요, 대표님. 여기서 죽고 싶진 않아요..."강은지가 통곡하며 간절하게 말했다. 그 얼굴에 가득한 상처는 다 나은 뒤에도 흉터가 남을 게 뻔했다.유남준은 원래 개입할 생각이 없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명분으로 내세워 폭력을 휘두른다니 생각이 바뀌었다."자세히 얘기해 보지."경호원에게 강은지를 놓으라 이르자 강은지가 다시 무릎 꿇고 말했다."대표님을 뵌 날, 퇴근하고 돌아갔는데 새벽 두세 시쯤에 누가 절 침대에서 끌어내렸어요. 절 때리고 욕하면서 어떻게 감히 저 같은 게 대표님을 성가시게 하냐고... 그날부터 저한테 손님 접대를 하라고 시켰어요. 거부하면 또 때리고 욕하면서..."강은지의 눈에서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렀다. 유남준은 누군가의 지시가 없이는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그는 경호원에게 강은지를 데려다주게 하고, 누가 벌인 짓인지 찾아내게 했다.수호 클럽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범인을 찾는 건 시간 문제였고 한 시간 정도 지나자 경호원이 보고를 올렸다."대표님, 범인을 찾아보니 배후에 이지원 씨가 있었습니다."또 이지원이다.유남준이 전부터 이지원이 하는 일에 관심을 껐더니 이젠 이렇게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짓을 한다."이지원한테 전해.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그땐 이렇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잠깐 멈칫했던 경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유남준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유남준이 화를 낸 포인트는 사람을 시켜 강은지를 때린 게 아니라, 명분으로 자기를 댔다는 것이었다.이지원은 유남준이 이 사실을 알게 돼도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경호원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선을 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어떻게 변명해
박민정이 슬리퍼를 끌고 거실로 나왔을 때 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언제?""오전 열 시."조하랑이었다."지금 갈게."박민정이 전화를 끊고 잠시 고민하더니 유남준에게 문자를 남겼다.「친구 집 좀 갔다 올게요.」조하랑네 집에 가는 김에 박예찬도 볼 수 있으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고작 며칠 못 본 것뿐인데도 꽤 오래 못 본 것처럼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수호 클럽 내부는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남준아, 아침부터 무슨 술이야."억지로 불려 온 김인우가 피곤한 듯 말했다."나 요즘 바쁜 거 알잖아."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김인우는 가운조차 못 벗고 달려왔다.건들거리는 김인우를 보던 유남준이 말했다."네가 성원이처럼 아내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바쁘긴 뭐가 바빠.""그럼 넌 아내도 있는 놈이 왜 여기 있어?"유남준이 할 말을 잃자 분위기를 읽은 김인우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요즘 의학 제대로 배우느라 요 며칠 수술만 몇 번 집도했는지 몰라."물론 조하랑을 조사하는 것도 바쁜 일에 포함이었다.그 여자가 도대체 자신과 겹치는 게 얼마나 있는지 알고 싶었는데 심지어 애도 있었다. 물론 그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왜?"유남준은 김인우가 이렇게까지 변한 이유가 궁금했다."왜라니?""전엔 죽어도 의사는 안 한다며."김인우가 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그땐 어렸잖아. 이제 보니까 의사 하면 사람도 살릴 수 있고 얼마나 좋아."거짓이었다.박민정이 돌아온 후, 김인우는 쭉 박민정의 난청과 출혈을 연구했다.얼른 의사가 되어서 박민정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들었으면 좋겠다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건 그가 박민정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했다.유남준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아 굳이 더 묻지 않았다.핸드폰을 보니 박민정이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사과하려는 줄 알았더니 친구 집에 간다는 통보였다."왜, 민정이가 감시해?"유남준의 얇은 입술이 달싹였다."아니, 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