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은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 이렇게 속물이에요? 이 여자는 손님이고, 나는 손님이 아닌가요?”솔직히 이 옷은 설은아가 아주 마음에 들어 했는데 거기다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옷을 벗으라고 하니 그녀는 정말 굴욕감을 느꼈다. 맞은편 안내원은 입 꼬리를 치켜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아가씨, 손님들도 상중하로 나뉜다는 걸 아셔야 해요. 다른 건 말할 것도 없고 이 분의 구매력을 당신과 견줄 수 있겠어요?”“아마 이 분이 한 번 사는 옷이 당신이 평생 사는 것보다 더 많을 걸요!”이 말을 듣고 그 요염한 여자도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분수를 확실히 알아야 돼요. 망신당하지 않으려면……”“자신의 분수를 좀 가늠해보고 다시 나랑 비교해 볼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구요!”이때 그 열쇠를 허리에 차고 있는 남자가 요염한 여자 곁으로 다가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 가난뱅이들과 이렇게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해서 뭐해?”“요즘은 돈이면 다 돼!”“이놈들 아무리 봐도 돈이 없어 보이는데, 그렇게 날뛰고 싶다면 돈이라도 좀 보여줘봐!”설은아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 여자는 딱 봐도 셋째 마누라 같아 보였는데 이지경이 되도록 날뛰고 있다니. 그녀 역시 한숨을 쉬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집안이 이런 상황이라 옷 한 벌 사고 나면 끝이다. 그 다음 방세와 숙식은 어떻게 하지?“당신……”설은아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현이 갑자기 일어서서 담담하게 말했다. “이 가게에서는 누가 많이 사냐에 따라 물건을 누구에게 팔지 결정합니까?”아까 그 남자가 하현을 경멸하듯 쳐다보며 말했다. “왜? 너 나랑 겨뤄볼래?”“이 어르신이 가진 집 한 채는 너희 같은 가난뱅이들이 평생 고군분투해도 얻을 수 없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흔들자,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원의 집값으로 따지면 이런 집 한 채는 적어도 6억에서 10억 정도 됐는데 이
설은아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녀는 이 때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 요염한 여인은 오래 전부터 이런 모습에 익숙했던 것 같았고 그녀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하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 가난뱅이야. 내 남편은 아주 대범한 사람이야. 4천 만원이면 네 몇 년치 월급이지.”“만약 내가 너라면 지금 당장 이 여동생은 놔두고 돈 받고 꺼지겠다!”한쪽에 있던 안내원도 일이 생길까 싶어 지금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이고, 저도 저의 이런 불쌍함을 알아봐 줄 수 있는 큰 오라버니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었어요……”“아가씨,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이 오빠가 너를 위해서 4천 만원을 낼 테니까.”하현은 점점 표정이 싸늘해지더니 안내원과 집 부자를 담담히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기왕 쇼핑몰에 왔으니 당신들 규정에 따라서 하지.”“돈만 있으면 되는 거죠? 이 상점에 있는 옷 전부 살게요……”“그리고 당신! 4천만 원은 내가 줄게. 근데 네 여자한테 관심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나는 단지 이 여자가 내 여자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기를 바랄 뿐이야……”하현의 말투는 담담하기 그지 없었지만 오히려 의심할 여지 없이 압도적이었다. 설은아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그녀는 하현이 의외로 이런 기세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가장 관건은 그가 뜻밖에도 전부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가게의 물건들이 얼마나 비싼지 알고 있을까?전부 다 산다면 몇 천만 원으로도 안될 것이다. “하현, 너 너무 정신이 없는 거 아니야? 너 여기 있는 옷들이 얼만지 알아?”설은아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는 그저 데릴사위일 뿐이었다!이전에 서울에서 일할 때 모아둔 돈이 있다 해도 문제는 빌린 돈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가게 안의 그런 물건들을 살 수 있을까? 그 집 부자는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잠시 후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선생님, 돈이 없으시면 지금 돌아가셔도 늦지 않습니다.”안내원도 하현과 낭비하는 시간을 계속 기다려 주지는 못했다. 거기다 직접적으로 나가라며 쫓아냈다. “전화 한 통 하겠습니다.” 하현은 말하면서 가게를 나왔다. “허허허, 전화를 한다고? 돈이 없으면 돈 있는 척을 하질 말지, 무슨 전화를 하겠다는 거야? 내가 보니 이 전화는 오래 걸릴 거 같은데?”요염한 여자는 팔짱을 끼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보기에 하현은 전화한다는 핑계로 도망간 거 같았다. 설은아도 민망한 얼굴이었다. 돈이 없으면 없다고 말을 하면 되지. 왜 전화한다는 핑계를 대는 건지. 지금 그녀는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한 동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 30분쯤 지나자 가게 안에서 누군가 하이힐을 신고 급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그 가게 점장이 빠른 걸음으로 나와 핸드폰을 쥐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점장님, 여기 어떤 사람이 소란을 피우고 있는데……”그 안내원은 자신의 점장을 보자 마자 알랑거리는 얼굴로 건너갔다. “탁_____”쟁쟁거리는 소리가 나자 점장은 안내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뺨을 한 대 갈겼다. 그리고는 설은아 앞으로 달려가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아가씨, 저희 안내원의 서비스가 좋지 않아 쇼핑에 불편을 끼쳐 드린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변상하는 뜻으로 지금 입고 계신 옷은 저희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을 마치고 점장은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랜드 하얏트 역시 이전에 하현이 사들인 것으로 최근 천일그룹에 통합되고 있었다. 방금 그랜드 하얏트의 총매니저가 이 점장에게 전화를 걸어 회장이 그 가게에 쇼핑을 하러 갔는데 카드를 놓고 왔으니 알아서 잘 처리하라고 하였다. 이 점장은 줄곧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니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연히 알 수 있었다. 딱 봐도 집 부자인 남자는 아무리 봐도 그들의 회장일 리가 없었다. 이 남자 말고 가게에
지금 이 집 부자는 점장과 눈이 마주쳤다.두 사람이 이 순간만큼은 서로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요염한 여자를 목 졸라 죽이고 싶었다. 한 사람은 하현의 신분을 추측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하현의 신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지금 이 큰 일이 별일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이 미련한 여인은 아직도 여기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고 있었다!이건 그들을 죽이려는 거다! 그런데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현이 벌써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지금 그 역시 그 졸부는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점장을 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방금 천주환씨한테 전화를 했는데 조금 있으면 와서 결제 해줄 거예요.”‘천주환’이 세 글자를 들었을 때 이 점장의 머리가 ‘쿵’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은 이 세 글자가 무엇을 의지하는지 몰랐지만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사장님, 이건 그 그랜드 하얏트 사장의 이름이었다!웬만한 사람은 사장의 성도 뭔지도 모른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사장의 이름을 그대로 말할 수 있다니.게다가 방금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다니, 이건 모든 것은 자신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빠짐없이 설명해 주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이 점장은 겨우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 식은 땀을 흘리며 말했다. “선생님, 마음에 드시는 물것이 있으시면 가져가셔도 됩니다. 제 성의라고 봐주세요……”“성의?”하현은 웃었다.“내가 돈이 모자라서?”“네네, 안 부족하시죠, 저저……”점장은 ‘저’라는 말만 한참 하다가 이 한 글자 밖에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때 바로 양복 차림에 하현과 비슷한 젊은이가 가게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하현 앞에 이르자, 그는 황송한 얼굴로 말했다. “하……”하현은 담담하게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 젊은이는 숨을 깊이 들이 쉬며, ‘세자’라는 두 글자는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난 후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현금 인출 할 수 있죠?”하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럼 저 4천만 원만 뽑을게요.”천주환은 감히 묻지도 못하고 달려가더니 잠시 후 봉투를 하현에게 건넸다. 하현은 쳐다보지도 않고 정문 쪽을 향해 봉투를 든 손을 흔들었다. 봉투 안에 있던 돈 뭉치들이 전부 쏟아져 나와 사람들의 주위를 끌었고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여기 4천만 원이요.”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슬그머니 빠져나갈 채비를 하던 집 부자와 요염한 여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방금 이 젊은이가 그들에게 4천만 원을 줄 테니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까짓 돈이 뭐? 내가 거진 줄 아니? 꼴랑 이 4천만 원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요염한 여자는 불만이 가라앉지 않는 얼굴로 하현을 쳐다보았다. 하현은 말 없이 그저 그 집 부자를 바라보았다. 집 부자는 하현의 표정을 보며 이 순간 자신의 솜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만약 스스로 할 수 없다면 눈앞에 있는 이 젊은이가 반드시 그가 무릎을 꿇도록 도와줄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랜드 하얏트 사장 천주환도 그 앞에서 공손하고 깍듯하게 하니 그 누구도 감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돈이 좀 있다고 그 앞에서 뭐라도 되겠는가?곧 이어 그 집 부자는 군소리 없이 바로 요염한 여자의 얼굴에 뺨을 때렸다. “어디서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 이 여자분께 무릎 꿇고 사과해!”요염한 여자는 어리둥절 했다. 이 순간 그녀는 눈앞에 있는 이 젊은이의 신분이 분명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집 부자가 이렇게 엉뚱하게 행동 했을 리 없다. 잠시 후 그녀는 ‘투둑’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고 설은아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가 사과를 마치자 이 집 부자는 그제서야 하현의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 “선생님 다른 볼 일은 없어서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하현이 고개를 끄덕이
여자는 천성이 쇼핑광이라고들 한다. 이 밤, 설은아는 이 옷들 속에 빠져있었다. 심지어 잠도 드레스 룸에서 잤다. 하현은 발등에 돌이 찍힌 느낌이었다. 하지만 쓴웃음을 짓고 있을 수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설은아의 관심을 이렇게 돌렸다.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하현이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는지 묻는 것을 잊어 버렸다.왜냐하면 그녀는 방금 핸드폰 충전을 마쳤고, 벨소리가 다급하게 울렸기 때문이다. 설은아는 아직 어리둥절했고 하현이 전화를 받으며 한마디 욕을 했다. “이렇게 아침 일찍 누가 전화를 합니까? 지금이 몇 신지 보지도 않은 거에요?”전화가 연결되자 상대방은 놀라며 또 기뻐했다. 하현과 은아는 밤새 옷을 입어봤다. 설민혁과 두 사람은 모두 어디 가지도 않고 설은아의 집 아래층에 쳐 박혀서 밤새 전화를 했었다. 지금 전화가 연결되자 세 사람은 뛸 듯이 기뻤다. 설동수는 설민혁이 화를 낼 까봐 황급히 핸드폰을 뺏어갔다. “하현아. 나 네 큰 아버지 설동수야!”“어? 그러세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안 주무세요? 정신이 어디 이상해진 거 아니에요!?”하현이 이렇게 입을 열자 전화 맞은편에 있던 설동수는 거의 화가 폭발할거 같았다. 하지만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차분한 마음으로 말했다. “하현아, 은아는? 바꿔줄 수 있어? 내가 급하게 말할 게 있거든!”하현은 아직 잠이 덜 깬 은아를 한 번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아내가 아직 자고 있어서 전화 받기가 어려우니 무슨 일인지 저한테 말해보세요.”설동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현아, 전에 너희 집 식구들을 제명하고, 설은아를 해고 시킨 건 실수였어!”“어르신께서 방금 은아한테 재무부장을 새롭게 맡기기로 결정 하셨어!”“정말 좋은 소식이지? 은아한테 빨리 일어나 보라고 해. 별장으로 건너오라고. 어르신이 직접 결정하신 일이야.”지금 이 일은 분명 축하할 일이었다. 필경 설동
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일하는 거 안 좋아해요. 저는 제 아내가 저를 돌봐주는 걸 좋아해요.”하현의 말투는 담담했고, 맞은편에 있던 설동수와 두 사람은 화가 나서 거의 흰자위가 뒤집힐 뻔했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는 들어봤지만, 정말로 여자한테 빌붙어 살면서도 이렇게 당당한 남자는 처음 봤다. “좋아, 그럼 도대체 너희들이 원하는 조건이 뭐야?”설동수는 계속 성질을 참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투가 안 좋아서 하현이 또 전화를 끊을까봐 무서웠다. “조건은 아주 간단해요. 누군가 그녀를 해고 했으니, 그 누군가가 직접 그녀를 구하러 오면 돼요!”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좋아. 내가 그녀를 해고 했으니 내가 직접 부탁할게!”설동수가 서둘러 말했다.하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큰 아버지, 정말 저를 바보로 아세요?”설씨 집안에서 그런 권력이 있었다면 지금 저에게 전화를 하셨겠어요?”“설씨 어르신께 청하라고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는 안 돌아갑니다.”“뚜뚜뚜……”하현의 태도는 비할 데 없이 완강했다. 설동수는 시간을 보았고 이미 아침 8시가 넘었다. 그는 지체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 보고 할 수밖에 없었다. 설씨 어르신 역시 밤을 꼬박 샜다. 지금 설동수의 보고를 듣고 숨을 헐떡거리다 거의 기절할 뻔 했다. “뭐? 그 데릴사위가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우리에게 순식간에 쓸려갈 수 있는 놈이 감히 이런 조건을 내 놨다고!”“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이때 설씨 어르신은 일종의 치욕스러움을 느꼈다.그의 손이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는데 한쪽은 그의 자존심이었고, 한쪽은 그의 가업이었다.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는 이미 그의 마음속에 답이 있었다. ……같은 시각, 그랜드 하얏트의 드레스 룸. 쉬고 있던 은아는 이미 깨어났다. 이때 그녀는 조금 이상한 듯 하현을 쳐다봤다. 남원에 온 후로 하현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게다
설은아는 일찌감치 설씨 집안의 이중잣대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과거 서울에 있었을 때 설씨 어르신이 직접 물러서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그는 높은 신분과 권위를 유지했다.그런데 이번에 뜻밖에도 자신이 직접 나서다니? 상상을 초월했다. “그의 이익이 걸려 있으니 그가 안 올 수가 있겠어?”하현은 웃었다. 설은아는 신기한 듯 하현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하현, 솔직히 말해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아무것도 안 했어. 맞춰봐.”하현이 말했다. “그날 하 세자의 환영 만찬에서 이슬기 비서가 너한테 오지 않았어?”“그녀가 너한테 가서 천일 그룹 출범식 때 왕림해달라고 초대했었잖아.”“네가 설씨 집안을 대표하지 않으면 설씨 집안을 대표해서 갈 사람이 누가 있겠어?”“천일 그룹도 하 세자가 세운 건데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어? “그러니까 내가 추측하기로 설씨 어르신은 요즘 분명 천일 그룹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고 있는 거 같아.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러 오지 않을 수가 없는 거지.” 하현의 분석이 그럴 듯 하게 들리자 설은아도 빙그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네가 설명하는 걸 들으면 네가 하 세자인 줄 알겠다!”하현은 으쓱해 하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내가 하 세자라고. 근데 문제는 네가 믿지 않는다는 거야!”하현은 진지하게 진실을 말했다. 하지만 설은아는 ‘피식’웃어 넘겼다.“그래,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말해도 괜찮아. 밖에서는 절대 이런 농담하지마!” “만약 이 말이 하 세자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해져.”하현은 웃으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을 말해도 믿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 30분쯤 지나자 서울 번호판을 단 차 한대가 그랜드 하얏트 입구에 멈춰 섰다. 설씨 어르신도 뒷좌석에서 내리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눈앞에 있는 호화로운 쇼핑몰을 보았다. 하현은 창가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좋아, 설
이때 왕인걸은 남을 괴롭히던 습성을 드디어 드러내며 사나운 진면목을 가감 없이 표출했다.그의 말이 떨어지자 몇몇 사나운 친구들은 모두 맥주병을 들고 다가와 하현의 머리를 깨뜨릴 준비를 했다.설은아는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당신들, 함부로 굴면 관청에 신고할 거야!”“신고?”예쁜 종업원이 냉소를 흘렸다.“신고가 먹힌다면 내가 성을 갈겠어!”“경찰서는 모두 우리 왕 도련님 사람들이야!”“경찰서에 신고는커녕!”“당신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부탁해 봐도 아무 소용없어!”“설은아, 괜찮아. 내가 처리할게.”하현은 전화를 걸려던 설은아를 제지했고 냉담한 시선으로 왕인걸을 쳐다보았다.“스스로 용서를 구할 기회를 정말로 포기할 작정이야?”왕인걸은 냉소를 지으며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내뱉었다.“용서를 구하라고? 당신이 나한테 그런 말할 자격이나 된다고 생각해?”“그래? 내가 그런 자격이 없는 건가?”하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손가락으로 튕겨 한 번에 왕인걸의 이마에 올려놓았다.“이젠 어때? 이만하면 내가 자격이 되는 건가?”“무슨 허튼수작이야?!”왕인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마를 찌푸렸다.“이게 뭐야?”“명함?”“이게 날 밟을 수 있는 자격이라는 거야?”“당신은 당신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세자라도 돼? 아님 부잣집 도련님?”이번엔 예쁜 종업원이 나섰다.“명함 한 장으로 우리 왕 도련님을 겁주려고?”“막장 드라마를 너무 본 거 아니야? 당신이 막장 드라마 주인공인 줄 알아?”왕인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마에 있던 명함을 집어 들어 찢을 준비를 했다.그러나 그가 찢으려고 했을 때 눈가에 예기치 못한 잔광이 비치기 시작했다.그가 유심히 명함을 보는 순간 전선에 온몸이 닿은 것처럼 찌릿하고 전율이 솟아올랐다.간민효.간결하고 명료한 이 이름 석 자가 왕인걸의 온몸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간민효의 명함을?!게다
”개자식! 감히 날 때려?!”이때 왕인걸이 얼굴을 가린 채 비틀거리며 기어올랐다.그는 얼굴 가득 원망과 흉악함으로 뒤덮인 채 하현을 향해 이를 갈며 격노했다.“넌 이제 죽었어!”“넌 이제 끝이야!”몇몇 불량한 친구들도 잡아먹을 듯 눈빛을 사납게 이글거리며 하현과 설은아를 노려보았다.분명 이 두 사람은 오늘 여기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예쁜 종업원도 얼른 양복 차림의 사나운 남자 십여 명을 불렀다.아마도 식당 경비원들인 것 같았다.하현은 이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테이블 위에 있는 차를 집어 들고 단숨에 들이마신 후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아직도 무릎을 꿇고 사과할 기회가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당신들 손은 부러질 거야!”하현의 말을 듣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코웃음을 쳤다.사람들은 모두 하현처럼 허여멀건한 사람이 감히 자신들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금정이란 곳은 힘이나 능력 좀 있다고 함부로 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금정 같은 대도시에서는 역량, 인맥, 배경, 출신, 권력, 지위 그 모든 것이 갖춰져야 어느 정도 어깨에 힘깨나 줄 수 있다.하현이 감히 부잣집 도련님을 건드렸으니 아마 목숨을 부지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촌뜨기! 넌 이제 죽었어!”예쁜 종업원이 노여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왕 도련님이랑 싸운단 말이야!”“왕 도련님이 누군지 알기나 해?”“왕 도련님은 금정 간 씨 가문 산하의 명성 필름 사장님이야.”“그는 금정 간 씨 가문의 먼 친척이야. 어떻게 당신 같은 촌놈이 모욕을 줄 수 있겠어?!”“못 들어봤어?”“옛날 왕사당 앞에 평범한 백성들이 드나들었다는 말 말이야!”예쁜 종업원은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왕인걸은 탑클래스 인물이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금정 사 씨 가문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얼뜨기 한 놈이 왕인걸을 함부로 발로
하현의 말이 떨어지자 장내가 조용해졌고 모두들 멍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며 자신의 귀를 후벼팠다.이 말이 왕인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모두가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촌뜨기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어불성설 아닌가?왕인걸도 놀라서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재미있군. 내 앞에서 이렇게 날뛰는 사람은 오랫동안 없었어.”“당신이 처음은 아니지만, 단연코 가장 재미있는 사람이야.”“이렇게 하지. 무릎 꿇고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물러가.”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거기에 세 번 더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어.”하현의 말을 들은 왕인걸의 얼굴에는 더욱더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더해졌다.이 촌뜨기가 지금 누구랑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한 건가?“왕인걸, 이놈이 전혀 체면을 세워 주지 않는군!”“뭐? 왕인걸한테 머리를 세 번 조아리라고? 네놈이 무덤에 들어가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거야!”“왕인걸, 이놈이 이렇게 뻔뻔스럽게 나오니 하늘과 땅이 얼마나 무서운지 죽는 게 뭔지 직접 알려줘야 할 것 같은데?!”한 무리의 불량배들이 모두 호들갑을 떨며 한마디씩 덧붙였다.그들은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처럼 험한 말을 마구 내뱉었다.왕인걸은 무리들의 비아냥거리는 말을 듣고 이대로 있는 것은 너무 창피하다고 생각했다.결국 왕인걸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현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개자식! 더 이상 네놈 체면 따위 생각할 필요 없어! 당장 네놈을 죽여버릴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왕인걸은 손바닥을 휘둘러 하현의 얼굴과 코를 때리려고 했다.그러나 그의 손바닥이 막 튀어나왔을 때 하현이 재빨리 손바닥을 휘둘렀다.“퍽!”낭랑한 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왕인걸은 얼굴이 따끔거리고 눈앞이 캄캄해지며 온몸이 멍해져 오는 것 같았다.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친구를 하자는 말을 특히 강조하며 왕인걸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알렸다.그 말속에는 친구 이상의 음흉한 관계를 의미하는 낌새가 다분히 느껴져 그를 따르던 짐승 같은 남자들이 히죽히죽 웃었다.하지만 왕인걸은 마치 해야 할 말을 정상적으로 했을 뿐이라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하현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했다.설은아는 왕인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하현을 향해 차가운 눈빛만 쏘았다.“이제 다 먹었어? 그럼 가자.”이 광경을 본 여자 종업원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고약한 년! 왜 이렇게 자꾸 잘난 척하는 거야?!”“왕인걸이 스스로 발걸음을 했는데 아직도 고고한 척 콧대를 세우는 거야?!”“당신 옆에 있는 그 사람이 그렇게 값어치가 나가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거냐고!”“왕 도련님이 화를 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야!”“자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위협하지 마. 미녀 앞에선 상냥하게 굴어야지!”왕인걸은 여자 종업원에게 손을 내저은 다음 손에 든 와인잔을 흔들며 소금에 절인 채소와 생선볶음을 뒤적거리고 있던 하현을 보고 웃었다.“저기 선생님, 난 당신의 여자가 마음에 들어요!”“대충 다 먹었으면 저리 썩 꺼져 주시죠! 어서요!”“이렇게 예쁜 여자는 못 참죠!”“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해요!”말을 하면서 왕인걸은 자신의 포르쉐 열쇠와 금정 별장 출입카드를 꺼내어 하현 앞에 놓았다.이 모습을 본 한 무리의 불량배들은 모두 껄껄 웃으며 하현을 비웃었다.한 방에 보내버리는군!완전히 더는 큰소리치지 못하도록 쇄기를 박는 거지!눈앞의 얼뜨기는 아마 800년을 분투해도 저런 물건은 손에 넣지 못할 거야!예전에 왕인걸이 이렇게 나오자 보통 남자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겁에 질렸었다.사회 경험이 좀 있는 남자라면 다 알 것이다.이런 물건을 가진 남자에게 함부로 저항할 수 없다는 걸 말
”손님, 다시 한번 자세히 보세요!”“손님 옆에 있는 남자가 밥 먹는 거 말고 뭘 할 줄 알겠어요?”“보세요! 지금도 아무 거절도 못 하잖아요!”“그런데 왕 도련님은 어때요? 손님 옆에 있는 저 남자보다 몇천 배는 더 좋죠! 만약 손님이 이 기회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예요!”말을 하면서 여자 종업원은 하현에게 눈을 내리깔았다.그녀는 줄곧 하현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궁상스럽기 짝이 없는 이 남자를 무시한 것이 틀림없었다.그녀의 눈에 금정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남자는 오직 왕인걸이었다.설은아는 더 이상 여자 종업원과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 홧김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저리 꺼져요!”여자 종업원도 냉소를 흘리며 지지 않고 대꾸했다.“손님, 정말 어지간하시네요!”“그렇게 있는 척하면 뭐가 좋아요? 무슨 소용이 있냐구요?”설은아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로 말했다.“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당신 사장한테 말해서 당신을 해고해 버릴 거예요! 두고 보세요!”바로 그때 이들의 모습을 흐릿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던 왕인걸이 와인잔을 움켜쥐고 천천히 걸어왔다.걸을 때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얼마나 당차고 당당한지 보는 사람들마저 숨이 막힐 정도였다.그의 길을 막고 있던 일부 손님들은 얼른 길을 내주었다.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을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왕인걸은 마치 원하는 것은 모두 손에 넣겠다는 듯 거만하고 당당하게 걸어왔다.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지금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왔다.“쯧쯧쯧, 결국 왕인걸이 이렇게 여자를 빼앗는군!”“자고로 왕인걸의 눈에 띈 여자가 도망갈 곳이 어디 있겠어? 순순히 그의 품에 안기는 게 능사지!”“예전에 청순미녀라고 이름을 날리던 어린 스타가 처음에는 왕인걸한테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었지.”“그러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어? 왕인걸이 모든 지원을 끊자 결국엔 그에게 기어들어왔지.”“그리고 자기가 여신급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줄 알고 왕
”안녕하세요.”하현과 설은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곱게 화장을 한 종업원이 82년산 라피트 한 병을 들고 다가왔다.“저분이 두 분께 드리는 것이니 받아주세요.”종업원은 설은아와 하현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귀한 82년산 라피트 한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술을 보냈어요? 82년산 라피트를?”하현과 설은아는 모두 약간 어리둥절해하면서 종업원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지방시에서 옷을 맞춰 입은 멋진 남자가 와인잔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는 젊고 멋있고 부유해 보였다.딱 봐도 금정에서 성공한 사람 같았다.그리고 그의 곁에는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 몇 명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순간 그들은 하현과 설은아를 바라보며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하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설은아가 주저하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죄송하지만 난 저분을 몰라요. 그러니 이거 가져가세요!”“그게...”설은아의 차가운 눈빛에 여자 종업원은 눈썹을 찡그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손님, 손님 뜻은 알겠지만 왕 씨 가문 도련님이 다른 사람한테 이렇게 대하는 건 아주 드물어요. 그러니 저분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예요.”“어쨌든 금정에 왔으니 저분이 젊고 잘생기고 부유하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테니까요!”“많은 여자들이 저분한테 시선 한 번 받으려고 해도 좀체 기회가 없었다구요!”“저분이 와인을 한 병 주셨어요. 그것도 82년산 라피트 한 병을요! 설마 당신들은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르는 건 아니겠죠?”“정말 이해가 안 되네요. 왜 거절하시는 거예요?”예쁜 종업원은 설은아가 배려라는 걸 너무 모른다고 생각한 듯했다.보아하니 왕 씨 가문 도련님은 이곳의 단골이고 신분이 범상치 않으며 이 여자 종업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모양이었다.이것은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었다.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앞에 있는 안줏거리를 씹었다.계속 먹자니 맛이 나쁘지 않았다.방금 비행기
저녁 6시, 금정 쇼핑센터 맞은편에 있는 금정 포장마차.포장마차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곳은 금정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 중 하나이고 매일 수천 번까지 번호가 매겨진다고 한다.그리고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는 모두 각양각색의 고급 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설은아는 진작부터 하현을 이곳에 데리고 와서 식사를 하려고 마음먹었다.그래서 그녀는 가방에서 번호표를 꺼냈을 때 적잖이 놀랐다.두 사람이 차를 세우고 금정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서자 저녁 식사가 절정인 이때 화려한 옷을 입은 손님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설은아는 종업원에게 번호표를 제시했고 두 사람은 미리 남겨둔 자리로 안내되었다.이 과정에서 설은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었다.화장을 곱게 하고 팔과 허벅지를 드러낸 여자들과 달리 설은아는 별로 화장기도 없지만 외모나 기질로 보아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기 충분했다.예쁜 여자를 옆에 둔 남자들도 설은아를 힐끔힐끔 쳐다보았고 눈에선 뜨거운 시선이 광선처럼 빛났다.이 사람들 중에는 금정의 부잣집 2세들도 있었고 이제 막 사업에 분투해 성공 가도에 진입한 사람들도 있었다.물론 의기양양하고 패기 넘치는 스타트업 종사자들도 많았다.기질과 스타일로 볼 때 이 사람들은 하현을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그래서 설은아 옆에 있는 하현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야유를 보냈다.그러나 설은아는 이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은 후 테이블 사이사이를 지나가는 주문 기계에 몇 가지 특별 요리를 주문한 다음 손을 뻗어 하현에게 차를 따라주었다.모처럼 부드러운 여인의 손길을 느끼며 하현은 술을 한잔 마신 뒤 설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샤넬의 코트를 입은 그녀는 늘씬하고 매력적인 몸매를 가졌다.여기에 옥처럼 빛나는 외모와 가끔 다리를 꼴 때마다 흘러내리는 미끈한 각선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달나게 했다.하현은 설은아가 사업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슈퍼우먼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찻잔
이때 간민효는 하현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져서 잔뜩 호기심이 솟아올랐다.그녀는 다시 하현에게 조금 더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입김을 불어넣으며 말했다.“하현, 오늘 밤 시간 있어? 같이 밥 한 끼 할까?”“고맙지만 오늘 밤 하현은 시간이 없어!”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설은아가 마침내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당당하게 걸어와 하현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겨 팔짱을 끼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하현은 오늘 밤 나와 함께 저녁을 먹을 거거든.”간민효는 설은아를 보고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말했다.“설은아, 이 사람이 그 능력 없는 네 전남편이야?”하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비슷한 외모에 비슷한 나이대의 두 여인을 쳐다보았다.설은아와 간민효가 아는 사이?하지만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것이 정상이었다.모두 금정에서 내로라하는 정상급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설은아는 간민효에게 무슨 설명을 하기도 귀찮아서 얼른 하현을 끌고 VIP 출구로 나와 자신의 빨간 페라리로 들어갔다.그 후 그녀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는 굉음을 내며 쌩하니 그 자리를 떠났다.갑자기 혼자가 된 간민효는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조수석에 탄 하현은 안전벨트를 매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에 만난 전처, 아니 와이프라고 해야 하나?이런 어색하고 떨떠름한 자리라니!차는 금정 국제공항을 빠져나왔고 하현이 금정의 가을빛을 감상할 사이도 없이 설은아는 거칠게 차를 몰았다.그리고 가속페달을 사정없이 밟으며 그녀는 떠보는 듯 입을 열었다.“간민효, 예쁘고 상냥하지?”맞는 말이었다.간민효는 전신급에 달하는 독술을 가졌으면서도 아름답고 성격도 시원시원했다.그리고 몇 시간 동안 함께 지내면서 하현은 그녀의 기질이 참 따뜻하고 상냥하다는 것도 알았다.그러나 차 안을 뒤덮은 질투의 불길을 느끼며 하현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간민효가 어느 정도 사람 좋고 매력적이라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비행기는 어느새 금정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하현과 간민효는 함께 VIP 통로를 걸었다.얼핏 보면 두 사람이 한 쌍의 연인처럼 보였다.이에 간민효의 뒤를 따르던 양복 차림의 남자는 못마땅한지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두 사람은 공항의 VIP 출구에 다다랐고 간민효는 하현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현,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가는 길까지 내가 데려다줄게.”하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야. 비행기 탔을 때 이미 아내한테 내 일정을 보냈어.”“아마 마중 나올 거야.”“아내?”‘아내’ 라는 말을 들은 간민효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하현의 네 번째 손가락을 쳐다보았다.반지가 없었다.간민효의 눈빛을 알아차린 하현이 입을 열었다.“아, 이제 전처라고 봐야지.”하현의 말을 듣고 간민효는 그제야 소리 없이 웃었고 한층 더 하현에게 관심이 생기는 것 같았다.“하현, 당신에게 아내가 있든 없든 간에 내가 말했듯이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 금정에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자, 우리 작별의 포옹이라도 해!”이 말을 들은 몇 명의 사내들이 모두 순식간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하나같이 험악한 얼굴로 하현을 노려보았다.“자, 다음에 또 봐!”하현도 험악한 표정의 남자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앞으로 나가 간민효와 포옹을 나누고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참, 마침 내가 무학에 어느 정도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당신 몸에 뭔가 병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아마 십중팔구는 입신에 이르는 독술과 관련이 있을 거야.”“그래서 말인데 내가 필요할 땐 언제든 연락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도와줄게.”말을 하면서 하현은 쪽지 한 장을 여자의 가슴에 쑤셔 넣었다.이 행동은 예의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행동을 함으로써 하현은 침착하게 기운의 광선을 통과해서 여자의 심맥을 보호했다.“내 병을 눈치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