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진은 하현의 취향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잘 숙성된 보이차를 준비해 두었다.은은한 차 향기가 퍼지는 가운데 하현은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를 하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비로소 온몸이 상쾌해지는 느낌이었다.양유훤은 하현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다가 결국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하현, 이렇게 내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당신을 내가 갑자기 탐내서 덮치기라도 할까 봐 겁 안 나?”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오는 여인의 암시에 하현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뭐라는 거야? 양방주, 난 당신을 내 형제로 생각하는데! 설마 당신이 날 덮치려고?”“당신이 그런 유혹도 못 참는다고?”“쳇!”양유훤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날 어떻게 해 보려는 남자들이 페낭에 얼마나 많은 줄 알아?!”“안타깝게도 난 그 사람들한테 눈길도 주지 않았어. 내가 반한 건 당신이거든.”“단호하게 말하건대 말이야.”“잘 들어.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기회는 다신 없어.”하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냥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 안 되는 걸까?꼭 이렇게 민감하고 난감한 주제를 다뤄야 하는 건가?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와중에 양유훤의 핸드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핸드폰을 힐끔 쳐다보았다.채연이었다.채연은 양유훤에게 꼭 제시간에 갈 것을 반복해서 일렀고 꼭 혼자 갈 것을 신신당부했다.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고 일렀다.동시에 채연은 부문상의 배후가 페낭 무맹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듯 반복해서 말했다.그래서 그가 막무가내로 행동하더라도 절대 그와 맞서 싸우지 말 것을 세뇌시키듯 말했다.양유훤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겼다.페낭 무맹도 남양무맹도 강한 상대이긴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못 넘을 산은 아니었다.오히려 옆에서 듣고 있던 하현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말했다.“양유훤, 채연이란 여자 정말 재미있군.”“브로커가 당신 일에 이렇게 신경을 쓰다니 말
”하긴, 페낭 무맹인 여영창의 씀씀이로 봐서 천억이라는 액수는 눈에도 안 차지.”“그러니 이번에 가장 잘 처리해야 할 사람은 결국 부문상이야.”양유훤은 핸드폰을 뒤적거리다가 자료를 하나 꺼내 하현에게 건넸다.“내가 이미 파악해 둔 부문상이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야.”“그는 공명심이 강한 사람이야. 그 외에 먹고 마시고 도박하고 여자 놀음하는 데도 아주 취미가 많지.”“외지에서 온 여성 관광객한테 아주 흥미가 많다나 봐.”“섬나라 사람이든 미국 사람이든 인도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아주 관심이 많대.”“대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양유훤은 하현을 쳐다보며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전에 페낭으로 여행 온 대하 여자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건드렸다가 그 여자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 놨지.”“결국 강직한 성격인 여자는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여자 가족들이 페낭에 와서 직접 관청에 신고를 할 정도로 파장이 컸어.”“하지만 이 일은 결국 여영창의 손에 넘어가 처리되었지.”양유훤의 눈에 찬 서리가 가득 고였다.“그 일로 부문상은 자신이 페낭의 밤의 황제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정말 상대도 하기 싫은 사람이야.”하현의 눈 속엔 파렴치한에 대한 분노로 한기가 흘러넘쳤다.“그런데 그놈은 파렴치한 짓을 많이 저지르면 반드시 자멸한다는 이치도 모르는 건가?”양유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만약 부문상 같은 사람들이 그런 이치를 믿었다면 아마 일찌감치 부처님 앞에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겠지, 안 그래?”“우리 가문은 남양 3대 가문이라고 불려. 내가 그 가문 명패를 내걸고 있는데도 부문상은 천억이라는 부채를 상환하지 않고 있어.”“다른 집안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와 같은 협상 테이블에 앉을 기회조차 없었을 거야!”하현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생각에 잠긴 후 핸드폰을 꺼내 원청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7시가 가까워 오자 하현과 양유훤은 함께 집을 나섰고 차를 타자마자
”좋아, 좋아!”“아주 쓸 만한 여자군!”부문상은 앞에 놓인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태블릿 화면에는 양유훤의 사진들로 가득했다.그는 한 장 한 장 뒤적거리며 음흉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듣자 하니 양 씨 가문 이 아가씨는 계속 해외에서 공부했다고 하던데 아직까지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다고? 흐흐, 좋아. 아주 좋아!”“내가 최근에 운이 좀 안 좋아서 기분이 꿀꿀하던 참이었는데 오늘 마침 아주 싱싱한 꽃망울을 건드리게 되었군! 흐흐!”“너무 좋아! 하하!”말을 하면서 부문상은 레드 와인 한 병을 열어 한 모금 벌컥 마신 뒤 상기된 얼굴을 한 채 혀끝으로 입가를 쓱 훑었다.채연은 간드러지게 웃으며 파랗고 작은 알약 몇 개를 쥐어서 부문상에게 건네주었다.“부 사장님이 기쁘시다니 저도 아주 기쁩니다. 이건 인도 쪽에서만 있는 귀한 물건이에요. 오늘 사장님 백전백승하셔야죠!”부문상은 껄껄 웃으며 손을 뻗어 채연의 얼굴을 조몰락거렸다.“아주 센스가 좋군! 센스쟁이야!”“걱정 마. 오늘 이 일이 잘 성사되면 내가 약속한 돈은 한 푼도 빠짐없이 줄 테니까.”채연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외쳤다.“고맙습니다, 사장님!”“끼익!”바로 그때 룸의 문이 열렸다.문이 열리는 소리가 크지 않았지만 룸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부문상도 말을 멈추고 잔을 움켜쥐며 자신도 모르게 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도대체 누가 감히 겁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예전에 부문상이 한번 놀러 왔을 때도 이런 비슷한 일을 겪었었다.술에 취한 젊은이가 룸으로 달려와 술주정을 부렸다가 부문상의 발길질에 바로 병원으로 실려갔다.그런 경험이 있었던지라 룸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시선을 모으고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오늘은 또 어떤 남자가 여자한테 흥분해 침을 질질 흘리고 있을지 잔뜩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그들은 눈앞에서 재미난 구경거리를 볼 생각에 들떠 있었다.이런 볼거리도 없으면 인생
부문상은 직접 입을 열지는 않고 옆에 있던 여자에게 주무르라는 듯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태연스럽게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신이 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경호원들도 팔짱을 낀 채 양유훤과 하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도대체 이 남녀가 어떤 뒷배를 가졌길래 부문상 앞에서 이렇게 허세를 부리는 건지 어디 한번 보자는 심산인 듯했다.“개자식!”부문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장발의 청년이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디며 하현을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부 사장님이 한번 보자고 하시는데 남자를 데리고 와?”“어서 이 남자 보내! 당장!”“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나중에 원망해도 소용없어!”장발의 청년이 입을 열자 그의 동료들은 모두 사나운 미소를 입가에 내걸며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하현이 물러나지 않으면 당장 혼내주겠다는 협박이었다.하현은 이 사람들을 힐끔 쳐다보며 싱긋 웃어 보이다가 입을 열었다.“양유훤, 보아하니 오늘 밤 이 사람들이 당신과 협상할 준비가 안 된 모양인데?”“날 임시 경호원으로 너무 잘 고용한 것 같아, 그렇지?”“이따가 부문상을 당신 앞에 무릎 꿇리게 만들까?”양유훤은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어, 부탁할게. 하현 경호원!”하현과 양유훤은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상대를 도발하고 있었다.장발의 청년은 자신이 엄청난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다.“이 개자식!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부 사장님 앞에서 어디 함부로 허세를 부려!”“살기가 아주 지겨워 죽겠어?”“이봐!”“어서 손발부터 부러뜨려!”채연을 비롯한 일행들이 모두 고소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경호원들이 소매를 걷어붙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장발의 청년은 탁자 위에 놓인 맥주병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이 모습을 본 몇몇 예쁘장한 여자들은 그의 거침없는 기세에 반쯤 넋이 나간 눈빛이었다.그녀들이 보기에도 양유훤은 아주 예쁜 얼굴이었다.그런데 제대로 된
부문상은 지그시 실눈을 뜨고 눈앞에 서 있는 하현의 모습을 쳐다보았다.마치 곧 죽을 사람의 마지막 발악을 지켜보듯 느긋한 시선이었다.양유훤이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하현이 먼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내 손발을 부러뜨리고 여기서 못 나가게 한다고? 당신이 그럴 자격이 있어?”자격이 있냐고?이 말에 채연과 몇몇 예쁜 여자들은 모두 비아냥거리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어디서 굴러온 건지 근본도 모르는 새파란 놈이 세상 물정 모르고 떠들어 대는 말이라니!어디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건가?어디서 이렇게 허세를 부리는 거야?부문상 앞에서 이렇게 호기롭게 굴다니!“이봐, 당신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짓 그만해. 나중에 우리를 원망하지 말고.”장발의 청년은 냉소를 흘린 후 술병을 든 채 하현을 가리켰다.“저놈을 해치워!”경호원 셋이 냉소를 흘리며 하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와 하현의 손발을 부러뜨리려고 했다.그러나 하현에게 다가오자마자 경호원들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그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하현이 이미 한 걸음 내디뎌 손바닥으로 그들의 뺨을 후려갈긴 것이다.맨 앞에 서 있던 사람은 피할 겨를도 없이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었다.뇌가 먼저 반응했지만 몸이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던 것이다.“퍽!”둔탁한 소리와 함께 경호원은 눈앞이 완전히 캄캄해졌다.그리고 그의 육중한 몸은 날아가 벽에 부딪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이에 그치지 않고 하현은 계속해서 손바닥을 날렸다.그러자 나머지 두 명의 경호원도 순식간에 바닥에 널브러졌다.채연을 비롯한 예쁜 여자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채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잠시 후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부 사장님, 사장님 경호원들이 당했어요!”하현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티슈를 꺼내 무덤덤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닦았다.그의 몸놀림을 본 사람들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몇몇 여자들은 놀란 얼굴로 하현을 바라보았다.하현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하현이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부문상은 냉소를 흘리며 손가락을 뻗어 하현을 가리키며 광기를 드러내었다.“남양 사람도 아닌 자가 남양에서 갖은 위세를 떨치다니! 참 우습군!”“주먹 좀 날릴 줄 알고 몇 명 쓰러뜨렸다고 당신이 아주 대단한 줄 알아?”“유치하게 굴지 마!”“우리 페낭 땅에서는 말이야. 내가 당신을 때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당신이 감히 날 때리는 건 법에 저촉되는 일이야!”“당신의 이런 행동 때문에 결국 당신은 감옥에 가게 될 거야!”“내가 좋은 말로 충고 하나 하지. 이후에는 절대 주먹을 쓰지 않는 게 좋을 거야!”말을 마치며 부문상은 손뼉을 치며 누군가를 불렀다.그의 동작에 문이 스르륵 열리면서 수십 명의 남자들이 몰려왔다.가죽옷을 입은 짧은 머리 여자가 부문상에게 곧장 다가왔고 차가운 눈빛으로 하현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이 사람들이 나타나자 부문상은 더욱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당신의 그 패기를 봐서 내가 기회를 주겠어.”“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손을 부러뜨려. 그리고 양유훤은 나한테 넘겨.”“아니면 내가 당신의 사지를 부러뜨려 저 태평양 바다에 물고기밥으로 던져버릴 거야!”“부 사장님, 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 없습니다.”짧은 머리의 여자가 하현에게 눈을 흘기며 냉랭하게 웃었다.“전 이런 생고기를 가장 좋아합니다. 이놈을 저에게 주시면 사장님께 덤벼든 결과가 어떤 건지 호된 맛을 보여주겠습니다.”“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만큼 호되게 꾸짖어 주겠습니다.”분명 이 가죽옷을 입은 여자는 부문상의 제1 경호원임에 틀림없었다.기세가 대단할 뿐만 아니라 심보까지도 잔인하기 그지없었다.하현이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고 그녀는 진작부터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그녀는 자신이 하현을 발로 걷어차기만 한다면 하현이 당장 무릎 꿇고 두 손을 싹싹 빌 거라고 생각했다.하현은 이 여자를 담담한 눈길로 쳐다보았다.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에
”부 사장, 당신 부하들은 나한테 안 된다고 했잖아!”하현은 싱긋 웃으며 오른손에 힘을 주었고 날카로운 칼끝이 부문상의 목을 파고들어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순식간에 일어난 하현의 재빠른 동작에 부문상은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졌다.소리 없이 미소 짓고 있던 양유훤도 하현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 사방에 있던 수십 명의 경호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하나같이 흉악한 얼굴로 하현을 노려보았다.“개자식! 너 죽고 싶어?!”“어서 풀어줘!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네놈을 죽여버릴 거야!”“부 사장님을 협박하다니! 간이 배 밖에 나왔어?!”지수는 부메랑처럼 꼬부라진 남양칼을 손에 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개자식! 내가 경고하는데 만약 부 사장님한테 조금이라도 상처가 난다면 네놈을 산산조각 내버릴 거야!”“상처?”하현은 눈꺼풀을 살짝 들썩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고 망설임 없이 부문상의 얼굴을 후려쳤다.“이것도 상처를 낸다고 할 수 있는 건가?”“퍽!”“이건 어때?”말을 하는 동안 하현은 손에 힘을 점점 더 주었다.이번에는 그의 칼끝이 부문상의 대동맥에서 불과 한 치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곳까지 들어왔다.“자, 덤벼 볼 테면 덤벼 봐!”“당신들이 감히 움직인다면 내가 당신들 사장님을 먼저 보내줄 테니까 어서 덤벼 보라고!”지수는 이을 악물고 눈꺼풀을 펄쩍였지만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춰 서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감히 또 우리 사장님을 해친다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줄 거야! 각오해!”“됐어! 헛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물러서.”하현은 손을 뻗어 부문상의 얼굴을 툭툭 쳤다.부문상의 수많은 경호원들을 상대하면서도 하현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여전히 매서운 아우라를 풍겼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덤비다니? 뭘 하려는 건데? 날 겁주겠다는 거야?”“만일 내가 당신들의 행동에 놀라서 실수로 칼을 삐끗하기라도 한다면 당신들의 귀한 사장님은 오늘 여기서
부문상의 태도에 하현은 싱긋 웃으며 반응했다.“솔직히 말해서 당신 부하들은 내 앞에서 전혀 힘도 못 쓰고 있어.”“그런데 당신이 이런 그들한테 기대려고 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하현이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말을 내뱉자 지수는 매서운 눈초리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하 씨! 당신이 그렇게 능력이 있다면 사장님은 풀어주고 나와 당당히 붙어 보자구!”“내가 당신을 죽이지 못한다면 성을 갈겠어!”그녀는 분하고 억울해 죽을 것 같았다.스스로가 고수임을 자처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하현 하나쯤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하현 이 개자식이 겁도 없이 부문상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협박하며 그녀를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었다.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벌써 하현을 백 번이고 더 죽였을 것이다.하현은 지수를 향해 냉랭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기회가 있겠지.”“그때가 되어서 후회하지 않길 바랄 뿐이야.”“헛!”지수는 기가 차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심정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하현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하현은 울그락불그락하는 지수를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눈을 돌려 부문상을 바라보았다.“부 사장, 다시 한번 묻겠어. 천억, 갚을 거야? 안 갚을 거야?”“갚아? 당신 얼굴에 갚아 주지! 흥! 능력 있거든 날 죽여 봐?!”“그래!”하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뒷손으로 탁자 위의 맥주병을 집어 들고 ‘퍽'하고 부문상의 이마에 힘껏 내리쳤다.“앗!”처절한 비명이 울렸다.부문상은 하현이 감히 손을 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어안이 벙벙한 채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자, 다시 말해 봐. 돈 갚을 거야? 안 갚을 거야?”하현은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퉤! 그딴 돈 없어! 그냥 내 목숨을 가져가!”“죽일 테면 죽여 보라구!”부문상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버텼다.“퍽!”하현은 다시 술병을 들고 같은 동작으로 같은 자리를 박살
이의진도 눈살을 찌푸리며 거들었다.“하현, 내 말 잘 들어! 지금 당장 사과해!”“그리고 무릎 꿇어!”“그렇지 않으면 공사장에서 벽돌 나를 생각은 하지도 마!”“당신은 그냥 굶어 죽어!”하현은 이 씨 남매가 하는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오만방자한 사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3분, 고명원에게 어서 와서 차를 따르라고 해.”“나 하현이 말했다고 전해.”“어서 어서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시간을 넘길 시엔 차를 따르는 걸로 해결될 일이 아니야.”이영산을 비롯한 이 씨 가족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얼굴빛이 새까맣게 변했다.하현이 이렇게 고명원을 도발하는 것은 그들을 불구덩이로 집어넣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이놈이 이 씨 가족들을 데리고 같이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야! 당신이 뭔데? 감히 고 사장님을 오라 마라, 차를 따르라 마라 하는 거야?”장발의 사내는 냉랭한 눈빛으로 말했다.“사는 게 지겨워?”장발의 사내는 여차하면 하현을 밟아 죽일 듯 눈을 부라렸다.그때 온몸에 거즈를 두른 남자가 뒤에서 들어왔다.알고 보니 소항 회관에서 하현과 충돌한 그 남자였다.남자는 하현의 얼굴을 똑똑히 본 순간 두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 서린 눈빛으로 온몸을 덜덜 떨었다.그는 장발의 사내에게 얼른 귓속말로 속삭였다.소항 회관에서 그는 하현에게 단번에 걷어차였다.고성양의 손발은 부러졌다.엄도훈은 하현 앞에서 나라님 모시듯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이로 미루어 보아 하현의 신분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장발의 사내는 남자의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쏜살같이 그의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났다.“하현! 당신은 이제 죽었어!”이영산은 하현을 가리키며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의 최후를 한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따가 일이 생기면 당신 혼자 다 책임져! 절대 우리 끌어들이지 마!”이 씨 가족의 친척들도 모두 사나운 눈초리로 하현을 노려보며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
장리나는 이 말을 듣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하현, 얼른 형님께 감사하다고 해야지!”“형님이 아니었으면 어디 가서 그렇게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겠어?”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러다 혓바닥 깨물까 봐 겁도 안 나?”“하 씨! 당신 나한테 무슨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당신 정말...”장리나는 하현에게 조롱이 가득 담긴 말을 퍼부으려고 했다.그런데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퍽’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발로 문을 차고 들어왔다.차를 마시고 있던 하현은 들고 있던 찻잔을 든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곧이어 러닝셔츠를 입은 남자 몇 명이 들이닥쳤다.그들 앞에 서서 담배를 물고 있는 긴 머리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씨 가족들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모두 꺼져! 이 룸은 우리가 접수한다!”이영산은 오늘 아침 마침내 인생의 절정을 맞이했는데 어떻게 이런 꼴을 당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술기운을 내뿜으며 테이블을 세게 쳤다.“무슨 소리야? 우리 아직 다 못 먹었다구!”“우리 장청 캐피털 고 사장님이 여기서 밥을 먹을 건데 당신들 감히 이런 식으로 굴 거야?”시가를 물고 있던 남자는 무심한 듯 이영산을 쳐다보았다.장청 캐피털 고 사장님?고명원?고명원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영산은 술이 확 깨는 듯했다.방금까지의 원망과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무례하다고 느끼던 이 씨 가족들도 장청 캐피털이라는 말을 듣고 모두 겁을 먹었다.고명원은 어쨌든 그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게 어떻게...”이영산은 말할 수 없이 난감한 표정이었다.그는 얼굴을 돌려 주변 친척들을 몇 번이나 쳐다본 뒤 멋쩍은 목소리로 말했다.“저기, 거의 다들 드셨죠?”“고 사장님이 이렇게 내 사업을 챙겨주시고 수백억짜리 프로젝트도 맡겨주셨는데 이 룸을 원하셨다니 드려야죠!”“다
설은아는 안색이 약간 변하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하현에게 제지당했다.그가 오늘 여기 온 것은 이영산이 도대체 어떻게 기고만장한 허풍을 떠는지 보기 위해서였다.이제 막 좋은 볼거리가 시작되었는데 못하게 막아서면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이영산의 부모도 소리를 듣고 와서 눈동자에 살벌한 눈빛을 떠올린 채 주시하고 있었다.데릴사위인 주제에 우리 아들의 경사를 축하하는 자리에 와서 재를 뿌리겠다는 것인가?!하현이 아니었으면 자신의 아들에게 아내가 하나 더 생겨 설 씨 가문의 모든 자산을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아이고, 이게 누구야? 바로 그 전설의 데릴사위 아니야?!”“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어쩜 저렇게 머리가 안 돌아갈까?!”“머리가 좋았으면 노점에서 사 온 무 따위를 장모에게 선물했을까?! 흥!”“게다가 우리 영산이가 선물한 그림을 감히 가짜라고 모욕하다니!”“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꼴같잖게 센 척하기는!”이영산은 그동안 설 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포장해서 이 씨 일가들에게 한껏 허풍을 떤 것이 분명했다.장리나는 당연히 이영산의 편이니 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은아는 이영산이 이렇게 낯짝이 두꺼울 줄은 몰랐다.순간 그녀는 참지 못하고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됐어! 뭐가 어떻게 되고 저렇게 되고 상관없어!”“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고 그 분수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거야!”“자기 것이 아니라면 노력해서 얻을 생각을 해야지!”이 씨 가문 둘째 할아버지는 경험자 같은 자태로 말을 이었다.“젊은이, 내가 자네라면 지금쯤 순순히 설 씨 집안을 떠나 경비원이라도 해서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했을 거야. 그게 데릴사위보다는 훨씬 나아!”“자네가 그러는 걸 자네 조상이 알면 무덤에서도 벌떡 일어날 거야!”하현은 웃으며 말했다.“맞는 말씀입니다. 딱 봐도 데릴사위 경험자로서 하시는 말씀이신 듯하군요!”“뭐?
”물론 두 사람이 오늘의 이 성과를 이룬 데는 여러 친척들, 어른들, 형제, 자매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저와 제 남편이 이런 연회를 마련한 것은 여러분에게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이영산의 부친은 거만한 자세로 껄껄 웃으며 일어섰다.“여러분, 오늘은 마음 편히 즐겁게 먹고 마시길 바랍니다!”“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82년산 마오타이든 뭐든 원하는 만큼 준비해 뒀으니까요!”이영산도 의기양양한 얼굴로 일어섰다.“부모님, 여기 어르신들, 형제, 자매 여러분!”“오늘 저를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를 빛내 주셔서 고맙습니다.”“저 이영산, 절대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건배!”말을 마치며 그는 호탕한 얼굴로 술 한 잔을 마셨다.“영산이와 의진이가 능력이 있었던 거죠. 그러니 이렇게 빨리 출세할 수 있었던 거구요! 앞으로 우리 친척들 좀 많이 살펴 주세요!”“맞아요.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런 대단한 성과를 거두다니! 정말 대단해요!”“장청 캐피털 일을 따내다니! 그게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요?!”“성월TV도 마찬가지예요! 배후에 금정 간 씨 가문이 떡 받치고 있는 곳이죠! 따라서 이것은 금정 간 씨 가문과 연줄을 맺은 거나 마찬가지예요!”“이제 우리 이 씨 가문이 완전히 떴어요!”친척들은 하나같이 영광스러운 얼굴로 이영산 남매를 바라보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았다.항렬이 가장 높은 둘째 할아버지가 테이블을 탁 치며 큰소리로 말했다.“자손을 낳으려거든 이영산 같은 아들을 낳아야지!”“우리 이 씨 가문에 이영산이 있으니 이제 우리 가문은 더 높은 곳으로 갈 일만 남은 거야!”이에 이영산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입에 내걸며 호탕하게 웃었다.“둘째 할아버지, 숙모님, 숙부님. 과찬이십니다!”“저와 제 여동생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이 씨 가족이라는 사실은 바꿀 수 없습니다!”“이 씨 가문에 꼭 보답하겠습니다!”이어 이의진도 곱게 화장한 얼굴
이튿날 아침, 밤잠을 설친 하현은 방을 나서자마자 설은아의 차에 몸을 실었다.차에 오르자마자 그녀는 하현을 원망하기 시작했다.분명 오늘 이영산이 밥을 사기로 했다고 어제 다 얘기를 했는데 결국 하현은 이렇게 늦게 일어난 것이다.설은아의 스포츠카에 올라타서야 하현은 알게 되었다.이영산이 요 며칠 동안 무슨 개똥 같은 운이 그렇게 좋았는지 수천억짜리 공사를 수주했고 그와 함께 신분이 순식간에 치솟았다는 것이다.그리고 그의 여동생, 이의진도 직장에서 순풍에 돛 단 듯 승진하며 겹경사를 맞았다고 했다!최희정과 설재석 부부도 원래 이 자리에 참석하려고 했지만 임시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설은아를 대표로 내세웠다.설은아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영산은 하현을 콕 집어 말하며 꼭 데려오라고 했다.말하자면 자신의 높아진 위상을 하현에게 보여줌으로써 코를 납작하게 할 셈인 것이다.하현도 이영산이 절대 좋은 마음으로 자신을 부른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상관없었다.설은아가 참석하라고 하니 함께 가 보는 것이다.낮 12시.하현과 설은아가 홍궁관 2번 룸에 도착했다.룸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안에는 커다란 테이블 다섯 개가 놓여 있어서 한 번에 오십 명 정도가 함께 식사할 수 있었다.테이블당 최소 몇백만 원이 든다고 하니 이영산이 떼돈을 벌었다는 얘기가 나올 만도 했다.테이블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고 화색이 가득한 그들의 얼굴은 상류층 자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설은아는 낮은 목소리로 이 사람들이 모두 이 씨 집안사람들이라고 하현에게 설명했다.이 씨 집안은 삼류 가문이었지만 그 수는 적지 않았다.게다가 금정 토박이였기 때문에 항상 자신들의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며 한껏 자존심을 치켜세우고 다녔다.설은아와 하현의 등장은 이 씨 집안사람들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다.이영산의 친부모는 이 자리를 주최한 장본인이지만 하현을 보고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거만하기 짝이 없는 자태로 문 바로 앞자리를
하현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 내가 엄도훈의 목숨을 구해 줬으니 그는 나한테 신세를 진 셈이야.”말을 마치며 하현은 화제를 바꾸었다.“참, 대구 정 씨 가문 아홉 번째 집안이나 되면서 왜 갑자기 자금난이 생긴 거야?”“그리고 왜 나한테 한마디도 안 했어?”하현은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원래 아홉 번째 집안에는 아무런 자금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설은아가 상석에 앉게 되자 대구 정 씨 가문의 일부 친족들이 불만을 품었고 그들은 비밀리에 물밑으로 많은 일을 벌여 원래 가문의 자금이었던 돈의 일부를 소리 소문도 없이 빼내었다.아홉 번째 집안이 가장 규모가 컸기 때문에 자금이 유출된 후 여기저기 구멍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설은아는 최선을 다해 구멍을 메워보려 했지만 아무리 해 봐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특히 그녀는 금정에 온 후 대구 정 씨 가문이 벌여 놓은 난장판을 떠안아 자금에 대한 압박이 더욱 커졌다.설은아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은행에 두 배의 이자를 물고 대출을 했지만 여전히 이천억이란 돈이 모자랐다.그래서 그는 오늘 고성양을 만나 돈을 빌려볼 생각이었던 것이다.“당신한테 왜 말 안 했냐고?”설은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말해 봤자 무슨 소용 있어?”“당신 능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한 번에 이천억을 융통하기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을 대구 정 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 당신한테 이로울 게 없거든.”설은아가 아직 하지 않은 말이 있었다.그것은 아홉 번째 집안이 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과 대구 정 씨 가문 고위층 사이에 일생일대 도박과도 같은 계약을 했다는 것이다.만약 그녀가 하현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청한다면 계약을 어기는 것이 된다.문제는 대구 정 씨 가문은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는 만만찮은 가문이라는 것이다.하현은 말끝마다 그녀를 대구 정 씨 가문의 수장으로 만들겠다고
저녁 9시.술과 밥을 배불러 먹은 하현은 소항 회관을 떠나 설 씨 가문으로 돌아갔다.하루 종일 고생한 그는 전에 최희정과 한바탕 크게 싸운 것도 있고 해서 그녀를 다시는 맞닥뜨리고 싶지 않아 소리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자신의 방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설은아의 방에서 ‘아앗’하는 소리가 들렸다.하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갔다.방에 들어서자마자 향긋한 꽃향기가 물씬 풍겨왔다.설은아는 방금 목욕을 한 것으로 보였고 하얀 목욕 수건은 몸의 중요 부위만 감싸고 있었다.그녀의 백옥 같은 긴 다리는 수건 바깥으로 훤히 드러나 있어서 하현의 눈앞을 아찔하게 만들었다.하현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미녀들을 만났다.그녀들 각각의 매력도 상당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그를 가장 설레게 한 사람은 역시 설은아였다.순간 하현은 자신의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다행히 그는 곧바로 냉정을 되찾아 얼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들어왔어?”누군가 들어오자 설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경계하는 눈빛을 보였지만 하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후 긴장을 풀었다.하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이쪽에서 무슨 소리가 나길래 들어왔어. 괜찮아?”설은아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조금 삔 것뿐이야. 주물러주면 괜찮아질 거야.”“내가 해줄게.”하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설은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설은아는 침대에 앉아 곧고 긴 다리를 하현 앞에 쭉 뻗었다.하현은 설은아 앞에 쭈그리고 앉아 긴 다리를 주물렀다.손끝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펄쩍 뛰었다.백옥같이 아름답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을 만큼 그녀의 다리는 곱고 매끄러웠다.하현은 거의 무아지경으로 그녀의 다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설은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하현, 안마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왜 만지작
고명원의 눈꺼풀이 파르르 흔들렸다.“뭐라구요?”정홍매도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그녀는 남편이 고향에 가서 조상님께 향불을 올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줄곧 그 이유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다.그런데 이런 이유가 있었다니!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간단합니다. 당신은 기가 강한 사람입니다. 남을 압도할 만큼. 그래서 당신의 강한 기운이 조상의 기운을 눌렀던 거죠.”“만약 당신의 기운이 충분히 강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당신은 열 번도 더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스스로 잘 생각해 보세요. 당신 평생, 당신 아들이 태어난 후 당신이 몇 번이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는지!”하현의 말을 듣고 고명원은 마침내 큰 충격을 받았고 탄복해 마지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하현, 당신은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엄 회장님이 이렇게 당신을 좋아하는군요!”“맞습니다. 난 정말이지 몇 번이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그때마다 중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어요.”“하지만 운이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죠.”“옛날 사람들은 큰 재난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훗날 반드시 복이 온다고 했어요.”하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런 건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당신에게 조상의 비호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신에게 후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죠!”“그래서 지금이라도 가능하다면 아들이든 딸이든 낳아 보길 권합니다.”“그러면 다음에 조상님께 제를 올릴 때 저절로 향불을 태우고 싶을 겁니다.”“봉분의 풀들도 그렇게 푸르지는 않은 것 같군요.”“조상들의 숨결이 모두 기운을 다했기 때문이죠!”“개자식!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자꾸 그런 말 하면 내가 당신 입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여보! 가! 가자구!”“자기가 무당이야? 뭐야?”“저 말을 믿느니 차리리 죽는 게 나아!”말을 마치자마자 정홍매는 고명원을 데리고 얼른 나가려고 했다.“
하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의술은 정말 잘 몰라. 하지만 살인술은 좀 알지.”“한번 보여줘?”“단번에 당신의 목숨을 앗아버릴 수 있는데.”하현의 말을 들은 엄도훈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리고 나서 아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농담하지 마세요! 형님! 농담도 참!”“간 떨어질 뻔했잖아요! 전 지금 형님이 제 목숨을 구해 주길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구요!”하현은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은침을 자신의 손가락에 살짝 찔러 피 한 방울을 짜낸 뒤 엄도훈의 미간에 떨어뜨렸다.그리고 큰 혈이 지나가는 명치 몇 군데에도 떨어뜨렸다.그러자 가슴에 있던 흔적이 천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어? 어? 사라지고 있어?! 정말로 사라졌다구!”몇몇 측근들은 모두 놀란 얼굴을 한 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왜냐하면 그들은 눈앞에서 흔적들이 서서히 옅어지다가 사라지는 것을 똑바로 목격했기 때문이다.엄도훈은 처음에 하현이 뭘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그런데 이제 보니 흔적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온몸을 얽매고 있는 기운도 함께 사라졌고 이윽고 정신도 맑아지는 것 같았다.고명원도 눈앞의 광경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그는 처음에 하현이 농간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일을 보고 자신의 식견이 이렇게 모자랄 줄은 몰랐다.“형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말 대단해요!”“정말 감동했어요! 이건 정말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동이에요!”엄도훈의 얼굴은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였다.“다만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긴 해요.”“집이나 가게에 팔괘경을 비치하는 것을 좋아하는 어른들을 많이 봤어요. 하지만 그들은 모두 무사했는데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은 거예요?”“그 물건이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다들 그런 골동품을 쓰니까요.”하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신이 가지고 있던 팔괘경은 출토될 때부터 원한에 얽혀 있었어.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그 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