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음의 모친은 어느새 눈매가 매서워졌다.“뒷배가 아무리 든든하기로서니 이렇게 건방질 수 있는 건가?”“정말 우리 용문에서 당신 하나 어떻게 못할 거라고 생각해?”“잘 들어! 우리 용문에는 실력이 출중한 고수들이 널리고 널렸어!”“지금 당신이 조금 앞서가는 것 같으니까 이젠 나를 괴롭히겠다? 내 남편을 끌어내리겠다고?”“당신은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어!”“당신이 지금 누굴 상대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지?”이가음의 모친은 냉소를 지으며 매서운 눈빛으로 일관했다.“여기 있는 분들이 누구인지 알려 줄 테니까 똑똑히 들어!”“이 분은 용문 금정 지회 부지회장!”“이 분은 용문 외삼당의 둘째 자제분!”“이 분은 용문 집법당의 집법 제자로 아주 신분이 높은 분이지!”이가음의 모친이 연이어 호명을 하며 소개를 하자 십여 명의 남녀들이 모두 일어서서 거들먹거리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이가음의 모친은 이 사람들 때문에 잃어버렸던 용기를 다시 되찾은 듯했다.그녀는 눈꼬리를 매섭게 휘어감어 천천히 하현 앞으로 걸어 나와 냉소적인 입매로 말했다.“이 사람들은 모두 용문의 어른들이야!”“용문과는 얽히고설킨 사람들이지!”“감히 이 사람들의 미움을 사겠다는 건가?”“용문은 대하의 4대 초석 중 하나야!”“무성에서 우리 용문 사람들과 싸우겠다고?”“오만함도 이 정도면 병이지!”“아무리 뭘 몰라도 그렇지!”이가음의 부인이 하는 말을 듣고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거들었다.시쳇말로 용문은 강호의 무림 지존이라 할 수 있었다.강호에서 무학의 성지에서 온 사람이 아니고서는 누가 감히 용문과 겨루겠다고 큰소리칠 수 있겠는가?아무리 실력이 뛰어난다고 해도 용문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하현은 냉랭한 표정으로 이가음의 모친 뒤를 돌아보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용문의 계율 제1조는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옳고 그름을 분
용문 집법당 영패?!영패를 보는 것은 당주를 보는 것과 같다?!순간 장내는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이가음의 모친 일행은 벼락을 맞은 듯 온몸에 힘이 빠지고 얼굴은 창백하게 식어갔다.그들은 하현이 툭 던진 영패가 용문 집법당의 영패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이럴 수가!이럴 수는 없다?!정적에 휩싸인 그들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지금까지 용문의 신분을 자랑하던 자들도 모두 뒤로 물러서서 넋이 나간 얼굴이 되었다.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무적의 고수를 만났다고 해도 이렇게 얼어붙지 않았다.그러나 영패는 다르다.영패 앞에서는 그 누구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이것은 용문 집법당의 영패였다.영패를 보는 것은 당주를 보는 것과 같다.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절대자의 상징이었다!집법당 제자들은 지금 일어서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고 눈만 껌뻑껌뻑거릴 뿐이었다.그는 갑자기 신임 집법당 당주에 관한 얘기가 떠올랐다.당주를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고 실제적으로도 진주희가 모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고 했다.그런데...집법당 영패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그가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지금 그가 보는 것은 허깨비가 아니다.금빛이 감도는 분명한 집법당 영패였다.이제 집법당 제자인 그는 어떻게 해야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는가?그러자 집법당 제자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당신과 이 영패가 무슨...”“퍽!”집법당 제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현은 손바닥으로 이 사람을 쓰러뜨렸다.“자신이 집법당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거지?”“그러면 법을 알고도 법을 어겼다는 건데 법을 어길 시 어떻게 된다는 것도 알겠군, 안 그래?”“당신은 집법당 사람으로서 용문의 연줄을 앞세워 위세를 부리는 사람들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어.”“당신은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동조했어!”“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짓을 한 거
이 광경에 용문 무성 지회 제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절망적인 얼굴이 되었다.그들은 집법당이라는 세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영패가 같은 용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도구가 아니라 더욱더 크나큰 시련을 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이가음의 모친은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고 손톱이 살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하현은 영패를 쥐어 들고 심드렁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겨 길을 막고 있던 이 씨 가문의 경호원들을 걷어찼다.그리고 나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가음의 모친 앞으로 다가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부인, 똑똑히 말해 보세요? 지금 내가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이 누구죠?”하현은 냉담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그러나 순간 그의 말 한마디는 이가음의 모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왜 그래?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이가음의 모친은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정말 날 건드리려는 거야?”영패를 보는 순간 이가음의 모친은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가득 찼지만 절대로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는다고 해도 그녀만은 무릎을 꿇을 수 없다!용문 무성 지회의 지회장 부인으로서 자부심과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 뒤에 아주 큰 후원자가 있다는 것이었다.그 후원자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철옹성 같은 것이었다.“당신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내 처제를 다치게 했어요. 그녀의 옷까지 벗기려고 했고요. 정신적 육체적으로 내 처제를 망가뜨리려 한 거죠!”하현은 겨울바람처럼 싸늘한 눈빛으로 이 씨 가문 경호원의 손에서 총 한 자루를 빼낸 후 안전장치를 풀어 냉랭하게 말했다.“내가 처제를 대신해 정의를 되찾아 줄 거예요. 다른 사람을 마구 망가뜨린 그 손발을 망쳐 놔도 과하지 않죠, 안 그래요?”“당신이 직접 할래요? 아니면 내가 직접 도와드릴까요?”하현의 말을 들은 이가음의 모친은 눈꺼풀이 화들짝 들썩였고 입술을 벌벌
잘난 체하며 의미심장한 듯한 눈빛을 보이는 이가음의 모친 뒤에서 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내려놓았다.“그럼, 당신한테 기회를 드리죠.”“용천오에게 전화하세요!”“그리고 물어보세요.”“그가 감히 당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지, 당신을 지지해 줄 수 있는지.”부인은 갑자기 어리둥절해졌다.하현이 용천오라는 이름을 듣고도 이렇게 담담하게 자신만만할 줄 몰랐다.다만 지금 이가음의 모친은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눈앞의 상황에 떠밀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용천오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벨이 몇 번 울린 뒤 마침내 전화기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순간 핸드폰을 사이에 두고 한껏 낮은 자세를 보이며 이가음의 모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용천오, 난 용문 무성 지회 지회장 부인입니다. 오늘 밤 좀 사소한 마찰이 일어났는데 그 사람이 용문 집법당 영패를 가지고 있어요.”“그가 날 아주 없애버릴 작정으로 큰소리를 뻥뻥 치고 있길래 전화를 걸었어요.”“집법당?”전화기 맞은편 용천오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하게 식었다.“언제부터 집법당 영패를 든 사람이 무성에서 날뛰게 된 거죠?”이 말을 듣고 이가음의 모친은 기쁜 기색을 떠올리며 하현을 쳐다보았다.속으로 아주 통쾌해 죽겠는 모양이었다.하현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용천오한테 말하세요. 내 잘못이라고 한다면 내가 집법당의 영패를 가지고 있는 것과 내 이름이 하현이라는 것뿐이라고.”이가음의 모친은 하현의 이런 당당함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자신의 이름이 용문 집법당 영패보다 더 대단하다고 여기는 건가?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용천오, 저기. 내가 하현이라는 사람을 건드렸어요. 그가 집법당 영패를 들고 위세를 떨지 뭐예요! 그리고 그가 말하길...”상대의 싸늘한 목소리는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고 용천오의 숨소리가 옅게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잠잠해졌다.이가음의 모친이 목
”내가 누구냐고?”하현은 총의 안전장치를 풀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리고 옅은 미소를 띠며 이가음의 모친을 향해 총을 들어 올렸다.“내가 말하지 않았어요?”“하현이라고. 내 처제를 대신해 정의를 되찾으러 온 설유아의 형부!”하현은 말이 끝나자마자 무덤덤한 표정으로 방아쇠를 당겼다.납탄이 ‘펑'하고 날아가 이가음의 모친 손목을 관통했다.장내는 비명으로 가득 찼고 사람들은 놀란 입을 가린 채 눈이 휘둥그레졌다.하현이 정말로 총을 쏠 줄은 몰랐다.사람들이 말리고 할 틈도 주지 않았다.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니 이제야 용천오가 왜 그렇게 이놈 앞에 서기를 꺼렸는지 알 것 같았다.고작 이가음의 모친이 뭐라고 앞에 나서겠는가?죽으면 죽는 거지!비명을 지르며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던 이가음의 모친은 아픈 것보다 충격이 너무나 커서 정신이 혼미해졌다.그녀는 피를 흘리는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요 몇 년 동안 그녀는 무성에서 큰소리 뻥뻥 치며 기고만장했었다.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는 여자였다.거슬리는 사람은 밟아 버리면 그만이었다.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꼴을 맞았을까?그녀는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탕!”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가음의 모친 허벅지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이가음의 모친은 한 손과 한 발을 못 쓰게 된 것이다.하현은 한 손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실수로 하현을 자극하게 될까 봐 끙끙거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다른 사람들도 이제 슬슬 스스로 내 앞에 나올 준비가 되었겠지? 아니면 내가 일일이 나오게 할까?”하현은 총구를 훅 하고 불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사람들 속에서 몇 명이 이가음의 모친과 눈빛을 주고받고는 잠시 후 이를 악물고 덜덜 떨며 앞으로 나왔다.그들은 하현처럼 무자비한 사람 앞에서 도망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이 사람들 앞에서 하현은
”하현! 하현!”“하현! 이 개자식!”자신을 구해 달라는 이가음의 모친 전화를 받은 뒤 용천오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이가음의 모친을 구해 주지 않으면 자신의 체면이 구겨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현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알리게 된다는 것이었다.심지어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점도 시사했다.하지만 문제는 무성 신시가지의 일로 그는 하현에게 큰 손해를 입었다는 것이었다.아직 눈앞에 거슬리는 찜찜한 일이 남아 있었고 여전히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이런 때 하현을 계속 자극한다면 언제 다시 하현과 전면전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었다.용천오는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이런 시점에서 하현이 전면전을 선택한다면 용천오는 집안의 두 라이벌에게 좋은 일만 시켜 주게 되는 꼴이 된다.이렇게 되면 자신이 수년 동안 쌓아왔던 노력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다.그래서 그는 지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지회장의 부인 목숨은 운명에 맡길 수밖에!“하현! 이놈! 내가 상석에 앉기만 하면 당장 네놈의 목부터 칠 것이야!”용천오는 평생 처음으로 무력함을 느꼈다.그는 지금 화를 분출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용천오, 당신은 우리한테 큰일이 있을 때마다 침착하고 냉정하게 생각하라고 가르쳤어요.”마영아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영아의 말에 용천오는 냉정을 되찾아 천천히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 좋은 꼴만 시키지.”하지만 그가 마음을 추스르고 냉정해지려고 했을 때 바깥에서 누군가가 선물 상자 같은 것을 들고 왔다.“방금 어떤 사람이 이걸 보내왔습니다. 직접 열어보라고 했구요.”용천오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상자를 바라보았다.명절도 아니고 큰일도 없는데 웬 선물?누가?하지만 용천오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부하를 시켜 얼른 상자를 열어 보게 했다
용천오는 와신상담을 해야 할지, 아니면 결사의 각오로 출사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그때 하현은 용천오에게 심부름꾼을 시켜 서화를 선물한 일을 완전히 잊고 있은 채 병원에서 설유아의 재검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루돌프 팀이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은 설유아에게 있어 정말 행운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하룻밤이 지난 후 설유아의 외상은 완전히 호전되었다.그녀는 정신도 아주 맑아졌다.완전히 깨어났을 뿐만 아니라 식욕도 생겼다.“방금 처제 주려고 주문한 거야. 처제가 좋아하는 닭고기 죽이야. 내가 이미 좀 식혀 놨으니까 바로 먹어도 될 거야.”하현은 표장지를 열고 미소를 머금은 채 죽 그릇을 설유아의 침대맡에 놓았다.하현은 스스로 요리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럴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음식을 배달했다.배달은 최근 그에게 생긴 필수 기술이 되었다.“형부, 손이 아파서 그런데 먹여 주시면 안 돼요?”설유아는 약간 힘없는 표정으로 말했다.하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렇게 컸는데 다른 사람한테 먹여 달라고 하면 나중에 어떻게 시집갈 거야? 시집 못 갈까 봐 두렵지도 않아?”“쳇!”설유아는 콧방귀를 뀌며 빙그레 웃었다.“난 시집 안 갈 거예요. 왜냐하면 결혼하면 형부는 지금처럼 날 이렇게 보살펴 주지 않을 테니까”하현은 설유아의 이마에 딱밤을 놓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지금처럼 보살펴 주는 형부가 없다는 게 무슨 소리야? 처제가 결혼하면 난 죽는다는 소리야?”설유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뾰로통하게 말했다.“모르겠어요. 형부한테 부탁할래요.”“앞으로 난 형부 같은 사람 찾기로 결심했어요!”“못 찾으면 결혼도 안 할 거예요!”하현은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나 같은 사람을 찾는다면 아마 장모님이 처제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릴 거야!”“게다가 나 같은 절세의 좋은 남자는 찾고 싶다고 찾아지는 게 아니야.”“세상에 똑같은 사
설유아의 모습을 보고 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두 자매의 성격이 어떻게 이렇게 그들 모친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조그마한 손실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성격과 인품의 최희정에게서 이런 서글서글한 성격의 딸이 나왔다니 조상이 은덕을 톡톡히 쌓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하현은 설유아와 계속 이렇게 노닥거릴 때가 아니란 걸 문득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그럼 나도 더 이상 처제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긴장하지 말고.”“내일 그들이 무릎 꿇는 걸 지켜보면 돼.”“알았어요. 형부.”설유아는 하현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긴장이 조금 풀리자 마침 다른 일이 생각이 난 듯 설유아가 눈을 번쩍였다.“형부, 가음이는 어때요?”“듣기로는 아직 정신이 말짱하게 깨어나진 않은 것 같던데 정말 내가 쏜 그 총 때문이에요?”자기 얘기가 끝나자 마음씨 착한 설유아는 참지 못하고 절친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몰라.”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하지만 처제가 쏜 총이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거야.”“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그래요? 그럼 왜 그런 거예요?”설유아가 의아해하며 말했다.“너무 놀라서 충격이 심했던 거 아니에요? 왜 아직도 나아지지 않는 거죠?”하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총으로 다친 건 피부 외상일 뿐이야. 조금 놀라긴 했겠지만 그렇게 많은 충격을 받을 일은 아니지, 안 그래?”“다만 의사든 간호사든 모두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에 치료가 잘 안되는 거야.”“서양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도 있어. 그럴 땐 우리 동양의학이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지.”하현은 여기까지 말한 뒤 더 깊게 설명하기 복잡해서 화제를 바꾸었다.“그 친구한테 뭘 그렇게 관심이 많아? 그 친구와의 일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비난을 받았으면서 처제는 화도 안 나?”설유아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반짝였다.“원래는 화가 많이 났었죠.”“하지만 문득 깨
”여수혁?”하현은 여음채를 쳐다보며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그가 이 병원 대주주인 동시에 당신의 뒷배라고?”“그래! 알고 나니 이제야 겁이 나?”“무서운 줄 알면 이제 무릎 꿇고 내 신발 밑창을 핥아!”“그리고 다리를 부러뜨리고 이십억을 배상해! 그러면 여수혁도 당신한테 살길을 열어줄지도 모르지!”“그렇지 않으면 당신 오늘 재수 없을 줄 알아!”여음채는 경멸하는 기색을 한껏 드러내었다.하현이 남양 무맹과 여수혁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전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여겼던 것이 분명했다.강옥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현에게 말했다.“하현, 여수혁은 남양 무맹주가 총애하는 제자야.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페낭 무맹의 부문주라서 건드리기가 쉽지 않아.”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어릿광대일 뿐이야.”“뭐? 어릿광대?”하현의 말에 여음채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그런 용기를 줬는지 모르겠군! 흥!”“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이 사람은 페낭 무맹의 부맹주 아들이야!”“이 사람은 페낭 무맹 장로가 아주 아끼는 제자라구!”“게다가 남양 무맹이 페낭 무맹에 파견한 제자라고!”“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딜 가나 거칠 것이 없는 사람들이야. 그뿐만 아니라 실력도 비할 데 없어!”화려한 옷차림의 남녀 예닐곱 명이 걸어와 소리치며 하현을 향해 멸시하는 눈빛을 보이며 비아냥거렸다.“야, 너 오늘 큰일 났어! 아주 재수 옴 붙은 날이라고! 우리가 당신 목숨뿐만 아니라 가죽까지 싹 벗겨버릴 거거든! 하하하!”이 사람들은 하현이 무슨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원하는 대로 칼질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험한 말을 마구 내뱉었다.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들은 더욱 경멸하는 눈초리로 하현을 노려보았다.하현 같은 외지인이 감히 그들 같은 거물들한테 입을 놀리다니 정말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망나니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하현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 광경을 보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외지인 관광객 주제에 너무 오만하고 포악하지 않는가?진 반장이 이미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나려는데 여전히 권세를 믿고 남을 괴롭히려고 하다니, 이건 지나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진 반장은 얼굴을 가리고 일어나 하현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도대체 이놈의 정체가 뭔지 알 길이 없어 진 반장은 순간 분노했지만 애써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젊은이, 당신 너무 심한 거 아니야?”“퍽!”하현은 손바닥을 휘둘러 또다시 뺨을 때리며 냉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대단하게 나한테 큰소리쳤다는 건 잘못을 하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도리도 잘 안다는 뜻 아니셨나?”“이렇게 간단한 이치도 몰라?”진 반장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았다.생각 같아서는 하현을 죽이고 싶었지만 결국 그는 소리 없이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미안해! 잘못했어!”그는 하현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구봉이 전화를 건 정종화 총경이 두려운 것이 분명했다.감히 이런 상황에서 어찌 그가 하현을 상대로 싸울 수 있겠는가?상대방의 사과를 들은 후에야 하현은 앞으로 나와 그의 오른쪽 얼굴을 툭툭 건드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꺼져!”진 반장은 그의 무리들을 데리고 쏜살같이 꽁무니를 뺐다.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들은 하현이 진 반장을 내쫓을 만큼 강력한 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진 반장 일행이 꽁무니를 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진 반장의 얼굴까지 때렸다.“내가 당신을 얕잡아 본 것 같군. 당신이 이렇게 큰 뒷배를 뒀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진 반장이 황급히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여음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냉소를 흘렸다.“그렇지만 똑똑히 들어. 당신 뒤에 얼마나 큰 거물이 있든 간에!”“페낭 병원의 뒷배가 훨씬 강할 거야!”“날 건드려?! 흥! 두고 봐! 당신은 죽
선두에 선 남자를 보자 여음채는 안색이 환해졌다.그리고 나서 얼른 다정하게 남자의 팔짱을 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진 반장님, 마침 잘 오셨어요. 바로 저 자식이에요. 저 자식은 우리가 의료 윤리를 중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때린다고 호도하고 있어요.”“게다가 내 아랫배까지 걷어찼다구요!”“저놈을 반드시 감옥에 가둬 주세요. 그 안에서 제대로 반성할 수 있게요.”여음채는 하현을 가리키며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부일민 일행도 모두 큰소리로 맞장구를 치며 하현이 억지를 부린다고 한마디씩 보탰다.“뭐? 감히 병원에서 원장님을 때려요?”“대낮에 그런 짓을 한단 말이에요?”“법도 뭣도 없답니까?”진 형사는 하현의 얼굴을 주시했고 곧바로 그가 남양인이 아니란 걸 눈치챘다.그러자 얼굴이 싸늘하게 바뀌며 비아냥거렸다.“이봐, 어서 저놈을 데려가! 모질게 심문해! 지독하게 조사해!”“감히 반항한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법으로 다스려!”하현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진 형사를 쳐다보았다.“당신은 어쨌든 형사반 반장이면 경찰서를 대표해서 일을 해야죠. 무슨 일이 생겼으면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일을 어떻게 하든 당신 같은 사람이 날 가르칠 건 아니지!”“당신이 먼저 사람을 치고 법을 어겼어. 그러니 법 집행자로서 당신을 연행하는 건 당연한 거야!”“물론 당신도 저항하는 길을 택할 수 있어!”“하지만 저항한 결과는 내가 당신을 한 방에 죽이는 거야!”진 반장은 언성을 높였고 눈을 부릅뜨고 하현의 얼굴을 툭툭 건드리려고 손을 내밀었다.하현은 손을 들어 진 반장의 오른손을 막은 뒤 담담하게 하구봉을 쳐다보며 말했다.“전화 걸어.”하구봉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곧바로 하현이 말하는 뜻을 알아차리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전화기 건너편에 냉랭한 목소리가 전해오자 하구봉은 핸드폰을 진 반장에게 건네주었다.“당신의 직속 상사가 전화를 받아
하현은 여음채의 말을 듣고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페낭은 정말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곳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이렇게 공공연하게 정경유착이 만연할 줄이야!하현의 표정을 살피던 여음채는 순간 하현이 겁을 먹은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자 여음채는 다시 의기양양한 기운을 내뿜으며 이를 악물고 하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왜? 무서워?”“이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어?”“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봐줄 수도 있어. 아직 늦지 않았다구.”“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기다리는 건 억세게 불행한 일들뿐일 거야!”말을 하는 동안 여음채는 부일민에게 손짓을 하며 다른 의료진과 경호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하현 일행을 겹겹이 에워쌌다.기세등등하게 하현 일행을 노려보고 있는 그들 무리는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사나운 모습이었다.이 광경을 본 여음채는 더욱 득의만만해져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이봐, 이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 어서 사과하고 내 신발 밑창을 개처럼 깨끗이 핥아!”“그렇지 않으면 당장 오늘 밤부터 감옥에서 썩어야 할 거야!”강옥연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하구봉은 콧방귀를 뀌며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다.주위의 구경꾼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현에게 다가올 불운을 생각하며 탄식했다.아무리 거세게 싸운다고 해도 경찰관들 앞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설마 하현 일행은 법이라도 어기려는 건가?하현은 냉담한 얼굴로 여음채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평온한 표정이 되었다.“내가 감옥에 갈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의료 윤리를 중시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어떻게 이익만 챙기고 인명을 돌보지 않는 거야?”“멀쩡한 병원이 사기꾼 소굴이 되어 관광객을 속이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군.”“당신들 오늘 잘 만났어. 당신들은 이제 좋은 날 끝났어.”“이 병원, 망하게 해 줄게.”하현의 말을 들은 부일민과 예쁘장한 간호사들은 모두 코웃음을 쳤다.그녀들은 허
잠시 후 넋이 나간 듯 멍하던 여음채는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배를 움켜쥐고 일어나 하현을 노려보며 말했다.“개자식! 감히 날 걷어차?”“내 엄마가 누군지 알아?”“당신은 누구야? 의료 윤리를 저버린 원장 아니야?”하현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때린 건 당신이야.”“뭐?”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현의 목소리와 행동에 여음채는 화가 치밀어 올라 하현을 가리키며 호통쳤다.“모두 저놈을 죽여!”“일이 터지면 내가 다 수습할 거야!”그녀의 말에 수십 명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사납게 웃으며 하현을 에워쌌다.강옥연은 이런 막무가내 인사를 본 적이 없었다.병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라니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결국 강옥연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조심해!”그녀의 말을 들은 부일민은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우리 원장님한테 미움을 산 사람은 살아남지 못해!”예쁘장한 간호사들은 앳된 얼굴로 눈을 흘기며 거들었다.“흥! 조심해 봤자 소용없어! 죽어야 해!”주위를 둘러보던 환자와 의료진들도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하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여음채의 인품이 별로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녀의 영향력과 인맥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이 페낭 병원에서 누가 감히 그녀한테 대들 수 있겠는가?아무 물정 모르는 외지에서 온 관광객이 하필 여음채를 건드리다니!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이때 선두에 선 경호원은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하현에게 다가왔다.그는 고개를 옆으로 까딱까딱 꺾으며 광분한 사냥개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이놈아! 감히 여기서 소란을 피워? 여기가 어디라고? 눈을 어디다 둔 거야?”“퍽!”“앗!”경호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현은 듣기 귀찮다는 듯이 손바닥을 휘둘러 그를 내동댕이쳤다.맨 앞에 있던 경호원은 눈앞이 캄캄해졌고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기절하고 말았다.기절했어?!이 광경을 보고 놀
앞뒤 사리를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여음채의 모습에 강옥연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뭐가 모욕이에요?”“당신들은 환자를 구하고 비용을 청구해야 하는데 환자를 구하기는커녕 무슨 스타가 나타났다고 부리나케 쫓아다니지 않았냐구요?!”“응급실에 30분씩이나 방치해 놓고 이제 와서 보증금은 돌려주지 못하겠다니요?”“당신들 같은 병원이 무슨 의료 윤리 의식이 있겠어요?”“병원이 아니라 사기 소굴이에요!”강옥연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식약청에 고소할 거예요!”하현은 침착한 눈빛으로 여음채의 표정을 살피다가 하구봉에게 원가령의 안전을 보호하라는 손짓을 했다.아마도 강옥연의 강경함에 여음채는 일을 처리하기가 좀 곤란해졌다고 느꼈을 것이다.여음채는 눈빛이 서늘해지더니 달려오는 수십 명의 경비원들에게 하현 일행을 포위하라고 손짓하며 지시했다.이어 그녀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긴 다리를 뻗으며 다가와 말했다.“우리 페낭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고 잘못을 하면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해.”“무릎을 꿇고 잘못을 인정해. 그리고 내 신발 밑창을 깨끗이 핥아. 그뿐만 아니라 우리 부일민 의사에게 십억을 배상해. 그러면 이 일은 이대로 덮어 두겠어!”“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마.”“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칠흑 같은 남양 감옥에 갇히게 될 거야!”“1년 반 동안 안에서 통곡만 하다가 세월을 보내게 될 거라고!”분명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여음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주 능수능란했다.어떤 외국인이라도 감히 페낭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는 모두 이런 꼴을 당했을 것이다.부일민 일행은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린 채 고소하다는 듯 히죽거렸다.큰소리 뻥뻥 치더니 하현이 아주 제대로 걸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페낭 거물도 아닌데 감히 페낭 병원에 와서 행패를 부려?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꺼운지 모르는 거지!강옥연은 한기를 가득 품은 목소리로 소리쳤다.“당신들은 아주 법도 뭣도
응급실에 있던 원가령은 아직도 술에 취한 듯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원래 같았으면 벌써 위를 씻고 상처를 치료해야 했었지만 의료진은 그녀를 병상에 눕혀만 놓고 방치한 것이다.하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뻗어 원가령의 위를 몇 번 누른 다음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하구봉에게 쓰레기통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원가령은 술을 모두 토한 뒤에야 비로소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이 되었다.강옥연에게 응급실의 소독약으로 간단하게 원가령의 상처 부위만 소독한 뒤 휠체어를 구해 원가령을 실었다.그리고 하현 일행은 떠날 준비를 했다.이때 문밖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남양 말로 뭔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분명 경비원들이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하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하구봉에게 눈빛을 보냈고 하구봉은 지체 없이 한 걸음 내디디며 한 발로 세게 문을 걷어찼다.‘퍽'하는 소리와 함께 응급실 문이 벌컥 열렸다.예닐곱 명의 건장한 경비원이 뛰어들려다가 튕겨나가는 부일민과 부딪혀 난장판이 되었다.비슷한 시각 복도 끝 쪽에서는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어딘가 낯이 익어 보이는 여자가 맨 앞에 서 있었다.그녀는 몸매가 유려했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으며 걸어왔다.앳된 간호사 몇 명은 이 여자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 중년 여자는 페낭 병원에서 제일 영향력이 센 원장, 여음채였기 때문이다.여음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우리 병원에서 소란을 피워? 눈도 없어?”“원장님, 외지 사람들이 와서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우리가 의술의 도리를 저버렸다고 하면서 사람을 때리고 응급실 문을 발로 차고 있어요.”“우리는 모두 들어가서 환자를 치료하려고 하는데 환자를 마음대로 데려가려고 합니다!”“이건 아주 우릴 무시하는 거죠!”넘어져 있던 부일민은 여음채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하현 일행의 행동을 가리키며 고자질
부일민은 더욱 냉소적으로 말했다.“하지만 우리 앞에서 귀에 거슬리는 그런 말은 해도 되지만 이것만은 알고 가세요. 한번 지불한 돈은 환불되지 않아요.”“사람이야 얼마든 데려가도 되지만 보증금 천만 원은 돌려주지 않습니다!”“그럼 어서 물러가세요!”“여기서 방해하지 말구요!”의사의 오만방자한 말에 강옥연은 얼굴이 싸늘해졌다.“살리기는커녕 환불도 안 된다구요?!”“내가 당신들 고소할 거예요!”“고소?!”부일민은 여간호사 몇 명과 눈을 마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어떤 사람은 손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강옥연이 고소라는 말을 꺼내도 그녀들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게 분명했다.어차피 페낭 병원은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고소? 그래 하세요!”부일민은 눈썹을 치켜세운 뒤 벽에 붙은 전화번호를 가리켰다.“국민신문고, 식약처, 경찰서, 등등, 전화번호들이 여기 다 있으니까!”“아무데나 전화해서 아무나 불러 보세요!”“사람을 불러서 날 고소해 보세요! 그럼 내가 당신들을 할아버지라고 부를게요!”“대하 촌놈들이 감히 우리 남양 땅에 와서 거드름을 피우며 위세를 부리고 있어?! 흥!”“당신들이 전화를 해 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부일민은 한껏 코웃음을 쳤다.그들은 이미 관광객들을 등쳐먹는 데 아주 익숙한 것 같았다.관광객이 신고해도 결국 팔이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당신들 제정신이에요!”강옥연은 눈을 부라렸다.이런 몰상식한 사람들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이때 하현이 앞으로 나와 강옥연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강옥연, 어쨌든 당신은 용문 사람인데 어떻게 기본적인 도리도 몰라?”“뭐라고?”강옥연이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도무지 하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어떤 사람들은 말로 하면 못 알아들어. 그냥 얼굴을 두들겨 맞아야 알아듣지.”
황천화 일행을 해결하고 하현은 강옥연에게 전화를 한 뒤 택시를 타고 페낭 병원으로 향했다.페낭 병원은 사립 병원으로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인테리어가 호화로웠다.거리마다 홍보 간판이 걸려 있는 병원다웠다.다만 의술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했고 보감 그룹 병원에 속하며 페낭 현지에서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다.보통은 관광객을 속이고 사기를 쳐서 이익을 남기는 병원이었다.그리고 해외에서 온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사기를 당해도 신고할 길이 없어 결국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었다.하현은 오는 길에 이런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강옥연도 현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병원에 가게 된 것을 그녀의 잘못만이라고 탓할 수가 없었다.하현과 하구봉은 곧바로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 복도에서 강옥연을 찾았다.“하현.”하현이 나타난 것을 보고 강옥연은 급히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하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응급실에 들어가긴 했지만...”강옥연이 말끝을 흐렸다.하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응급실 문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대여섯 명의 환자가 병상에 누워 있었고 그중 두세 명은 외상을 입고 낮은 소리로 신음하고 있었다.그러나 응급실 안에는 의료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내가 원가령을 데리고 왔을 때 의료진은 어떤 유명 연예인이 다쳐서 나간다고 했어.”“이곳의 한 인플루언서 스타가 영화를 찍다가 손가락을 다쳐서 급하게 응급실 의료진이 갔어!”“곧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보증금 천만 원을 먼저 내라고 했어.”“그래서 보증금을 내고 30분째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직 아무도 안 와...”강옥연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하현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보감 그룹 산하 병원의 평판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그가 다른 의료진을 찾아보려고 하자 강옥연이 그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하현, 내가 가서 재촉해 볼게.”강옥연은 혼자서 달려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