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냐고?”하현은 총의 안전장치를 풀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리고 옅은 미소를 띠며 이가음의 모친을 향해 총을 들어 올렸다.“내가 말하지 않았어요?”“하현이라고. 내 처제를 대신해 정의를 되찾으러 온 설유아의 형부!”하현은 말이 끝나자마자 무덤덤한 표정으로 방아쇠를 당겼다.납탄이 ‘펑'하고 날아가 이가음의 모친 손목을 관통했다.장내는 비명으로 가득 찼고 사람들은 놀란 입을 가린 채 눈이 휘둥그레졌다.하현이 정말로 총을 쏠 줄은 몰랐다.사람들이 말리고 할 틈도 주지 않았다.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니 이제야 용천오가 왜 그렇게 이놈 앞에 서기를 꺼렸는지 알 것 같았다.고작 이가음의 모친이 뭐라고 앞에 나서겠는가?죽으면 죽는 거지!비명을 지르며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던 이가음의 모친은 아픈 것보다 충격이 너무나 커서 정신이 혼미해졌다.그녀는 피를 흘리는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요 몇 년 동안 그녀는 무성에서 큰소리 뻥뻥 치며 기고만장했었다.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는 여자였다.거슬리는 사람은 밟아 버리면 그만이었다.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꼴을 맞았을까?그녀는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탕!”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가음의 모친 허벅지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이가음의 모친은 한 손과 한 발을 못 쓰게 된 것이다.하현은 한 손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실수로 하현을 자극하게 될까 봐 끙끙거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다른 사람들도 이제 슬슬 스스로 내 앞에 나올 준비가 되었겠지? 아니면 내가 일일이 나오게 할까?”하현은 총구를 훅 하고 불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사람들 속에서 몇 명이 이가음의 모친과 눈빛을 주고받고는 잠시 후 이를 악물고 덜덜 떨며 앞으로 나왔다.그들은 하현처럼 무자비한 사람 앞에서 도망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이 사람들 앞에서 하현은
”하현! 하현!”“하현! 이 개자식!”자신을 구해 달라는 이가음의 모친 전화를 받은 뒤 용천오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이가음의 모친을 구해 주지 않으면 자신의 체면이 구겨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현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알리게 된다는 것이었다.심지어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점도 시사했다.하지만 문제는 무성 신시가지의 일로 그는 하현에게 큰 손해를 입었다는 것이었다.아직 눈앞에 거슬리는 찜찜한 일이 남아 있었고 여전히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이런 때 하현을 계속 자극한다면 언제 다시 하현과 전면전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었다.용천오는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이런 시점에서 하현이 전면전을 선택한다면 용천오는 집안의 두 라이벌에게 좋은 일만 시켜 주게 되는 꼴이 된다.이렇게 되면 자신이 수년 동안 쌓아왔던 노력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다.그래서 그는 지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지회장의 부인 목숨은 운명에 맡길 수밖에!“하현! 이놈! 내가 상석에 앉기만 하면 당장 네놈의 목부터 칠 것이야!”용천오는 평생 처음으로 무력함을 느꼈다.그는 지금 화를 분출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용천오, 당신은 우리한테 큰일이 있을 때마다 침착하고 냉정하게 생각하라고 가르쳤어요.”마영아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영아의 말에 용천오는 냉정을 되찾아 천천히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 좋은 꼴만 시키지.”하지만 그가 마음을 추스르고 냉정해지려고 했을 때 바깥에서 누군가가 선물 상자 같은 것을 들고 왔다.“방금 어떤 사람이 이걸 보내왔습니다. 직접 열어보라고 했구요.”용천오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상자를 바라보았다.명절도 아니고 큰일도 없는데 웬 선물?누가?하지만 용천오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부하를 시켜 얼른 상자를 열어 보게 했다
용천오는 와신상담을 해야 할지, 아니면 결사의 각오로 출사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그때 하현은 용천오에게 심부름꾼을 시켜 서화를 선물한 일을 완전히 잊고 있은 채 병원에서 설유아의 재검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루돌프 팀이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은 설유아에게 있어 정말 행운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하룻밤이 지난 후 설유아의 외상은 완전히 호전되었다.그녀는 정신도 아주 맑아졌다.완전히 깨어났을 뿐만 아니라 식욕도 생겼다.“방금 처제 주려고 주문한 거야. 처제가 좋아하는 닭고기 죽이야. 내가 이미 좀 식혀 놨으니까 바로 먹어도 될 거야.”하현은 표장지를 열고 미소를 머금은 채 죽 그릇을 설유아의 침대맡에 놓았다.하현은 스스로 요리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럴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음식을 배달했다.배달은 최근 그에게 생긴 필수 기술이 되었다.“형부, 손이 아파서 그런데 먹여 주시면 안 돼요?”설유아는 약간 힘없는 표정으로 말했다.하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렇게 컸는데 다른 사람한테 먹여 달라고 하면 나중에 어떻게 시집갈 거야? 시집 못 갈까 봐 두렵지도 않아?”“쳇!”설유아는 콧방귀를 뀌며 빙그레 웃었다.“난 시집 안 갈 거예요. 왜냐하면 결혼하면 형부는 지금처럼 날 이렇게 보살펴 주지 않을 테니까”하현은 설유아의 이마에 딱밤을 놓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지금처럼 보살펴 주는 형부가 없다는 게 무슨 소리야? 처제가 결혼하면 난 죽는다는 소리야?”설유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뾰로통하게 말했다.“모르겠어요. 형부한테 부탁할래요.”“앞으로 난 형부 같은 사람 찾기로 결심했어요!”“못 찾으면 결혼도 안 할 거예요!”하현은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나 같은 사람을 찾는다면 아마 장모님이 처제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릴 거야!”“게다가 나 같은 절세의 좋은 남자는 찾고 싶다고 찾아지는 게 아니야.”“세상에 똑같은 사
설유아의 모습을 보고 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두 자매의 성격이 어떻게 이렇게 그들 모친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조그마한 손실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성격과 인품의 최희정에게서 이런 서글서글한 성격의 딸이 나왔다니 조상이 은덕을 톡톡히 쌓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하현은 설유아와 계속 이렇게 노닥거릴 때가 아니란 걸 문득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그럼 나도 더 이상 처제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긴장하지 말고.”“내일 그들이 무릎 꿇는 걸 지켜보면 돼.”“알았어요. 형부.”설유아는 하현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긴장이 조금 풀리자 마침 다른 일이 생각이 난 듯 설유아가 눈을 번쩍였다.“형부, 가음이는 어때요?”“듣기로는 아직 정신이 말짱하게 깨어나진 않은 것 같던데 정말 내가 쏜 그 총 때문이에요?”자기 얘기가 끝나자 마음씨 착한 설유아는 참지 못하고 절친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몰라.”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하지만 처제가 쏜 총이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거야.”“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그래요? 그럼 왜 그런 거예요?”설유아가 의아해하며 말했다.“너무 놀라서 충격이 심했던 거 아니에요? 왜 아직도 나아지지 않는 거죠?”하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총으로 다친 건 피부 외상일 뿐이야. 조금 놀라긴 했겠지만 그렇게 많은 충격을 받을 일은 아니지, 안 그래?”“다만 의사든 간호사든 모두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에 치료가 잘 안되는 거야.”“서양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도 있어. 그럴 땐 우리 동양의학이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지.”하현은 여기까지 말한 뒤 더 깊게 설명하기 복잡해서 화제를 바꾸었다.“그 친구한테 뭘 그렇게 관심이 많아? 그 친구와의 일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비난을 받았으면서 처제는 화도 안 나?”설유아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반짝였다.“원래는 화가 많이 났었죠.”“하지만 문득 깨
얼마 후 설은아의 전용 차량인 마이바흐 한 대가 차고에서 나왔다.마이바흐는 예전부터 무성 황금 회사의 자산으로 사장의 전유물이어서 타 본 사람도 별로 없어 아직 새것처럼 반짝반짝했다.하현은 감탄해하는 눈빛으로 뒷좌석에 올랐다.설은아는 하현이 올라타는 것을 보고 아침 식사를 건네준 뒤 운전기사에게 출발해도 된다고 말했다.“벌써 용천진한테 연락한 거야?”“이렇게 빨리? 상대가 이천억을 돌려주기로 한 거야?”설은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용천진이 누구야? 무성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잖아?!”“용천진은 용 씨 집안 젊은 세 사람 중 으뜸으로 불리며 줄곧 그 사실에 심취해 있었어.”“보통 사람들과 함부로 만나기는커녕 TV로도 보기 힘든 사람이라고.”“머무는 숙소만 해도 열여덟 개인데 매일 무작위로 한 곳을 골라 머문다고 하더라고.”“한 번 입었던 옷은 다시 입지 않는대.”“모든 행적을 절대 비밀로 하기 위해서라지.”하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용천진은 용문 장로회와 서른여섯 지회 중 절반의 지지를 얻고 있고 용문 내의 세 개의 당과 외부의 다섯 개 당 중에서도 절반의 당주가 그를 지지하고 있어.”“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자신을 죽일까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어쨌든 그의 자리는 옛날 동궁 태자와도 같으니까 말이야.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정상적으로 선종한 사람이 몇이나 돼?”“용천진이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한다는 건 상석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반증이지.”하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말한 뒤 짐짓 흥미로운 눈빛을 띠며 말을 이었다.“그러니 용천진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거야.” “그럼 오늘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은 누구야?”설은아는 안색이 갑자기 무거워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우리가 만날 사람은 용천진의 다섯 번째 첩이야.”“첩?”하현은 꺼림직한 표정을 지었다.설은아는 하현의 표정을 보며 지그시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응, 첩이야. 용천
하현이 옅은 미소를 띠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왜? 당신이 말하는 걸 보니 흐름상 그녀는 슈퍼스타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설은아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연예계의 그늘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참혹하잖아. 사청인은 몇몇 거물들의 잠자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찬밥 신세로 전락했고 그렇게 그렇게 점점 인기가 떨어지게 되어 조연이나 전전하게 된 거지.”“몸도 마음도 큰 상처와 모욕을 받았을 거야.”“그러다 용천진을 우연히 알게 되어 그의 여자 중 한 명이 된 뒤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그뿐이야?”하현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아무리 그래도 사청인은 지금 용천진의 노리개일 뿐인데 용천진을 대신해 우리와 협상할 자격이 돼?”설은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청인이 용천진의 첩이 된 뒤 그의 세력을 빌려 한 가지 일을 했어. 그녀를 핍박했던 연예계 거물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가족들까지 가만두지 않았어.”“심지어 연예계 거물들의 조상들 무덤까지 파헤쳐 뼈를 날려버렸지!”연예계에서 거물들의 잠자리를 거절한 대가로 핍박받던 여자가 얼마나 한이 많았으면 이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지 설은아는 한탄하듯 말을 맺었다.하현은 심호흡을 한 뒤 조용히 말했다.“독한 사람이군!”“용천진이 애지중지하겠어, 안 그래?”설은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애지중지할 뿐만 아니라 모시다시피하지!”“용천진의 72명 첩 중 유일하게 한 회사를 독자적으로 장악하고 있어.”“그녀가 장악하고 있는 회사는 무성 최고급 쇼핑과 오락의 중심지인 무성 백양몰이야.”설은아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내가 여러 인맥을 통해서 그녀와의 자리를 마련한 거야. 오늘 그녀가 운영하는 투우장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평화적으로 잘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어.”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투우장? 평화적인 마무리?”“그럴 확률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 거야?”“확률이 높진 않겠지.”설은아가 한숨을 내쉬
설은아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나지막이 말했다.“그녀는 내가 세 번쯤 만나자고 계속 말하니까 겨우 응하며 투우장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어.”“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어. 첫째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굳이 시간을 내서 우리를 만나고 싶지 않았겠지.”“둘째 그녀는 우리 쪽에서 안달이 나게끔 튕긴 거야. 일단 선수를 잡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셋째 그녀는 이번 기회에 내가 누구인지, 그녀와 협상할 자격이 되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는지도 몰라.”하현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재미있는 여자군. 어쩐지 아무 배경도 신분도 없는데 용천진 같은 거물을 쥐락펴락하더라니.”사청인이라는 여자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하현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남을 해칠 마음도 없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남을 경계하는 마음까지 없어서는 안 된다.한 시간 후 차는 이탈리아의 콜로세움 같은 건물이 있는 무성 교외에 도착했다.이곳은 건축 양식이 매우 독특해서 일종의 고대 투우장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동남서 세 방향으로 3미터 높이의 스탠드가 있었고 반대쪽에는 투우가 드나드는 곳이 있었다.그리고 맨 가운데는 축구장같이 움푹 팬 곳이 있었다.주위에는 뾰족한 가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강철 난간도 많아서 바람이 불기만 해도 피비린내가 나는 듯했다.분명 이곳에서 성난 소들이 죽어 나갔을 것이다.지금 투우 경기는 없었지만 사방팔방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가 꽤 있었다.어떤 이들은 침묵하고, 어떤 이들은 분노하고 어떤 이들은 마치 닭의 피를 본 것처럼 흥분했다.주위의 바닥에는 배팅한 종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이곳의 수입은 얼핏 봐도 상당할 것 같았다.설은아는 하현을 데리고 들어와 귀빈석 쪽으로 향했다.“난 무성 황금 회사 설은아예요.”설은아가 신분을 밝히자 입구의 경호원은 무전기를 들고 신원을 확인했고 곧이어 누군가가 나와서 설은아와 하현을 데리고 들어갔다.하현이 줄
명문가 자제가 오랫동안 곁에 둔 양귀비 같은 여자는 존재감부터 남달랐다.여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은 드러내지 않아도 저절로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고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의심할 여지 없이 이 여자는 용천진의 다섯 번째 첩 사청인이였다.사청인 옆에는 역시 안하무인하고 오만한 자태의 남자가 서 있었다.남자는 가늘고 긴 담배를 비스듬하게 물고 이따금씩 담배연기를 내뿜었다.누아르 영화에서 보던 조직의 포스가 이런 느낌이었을까?사납고 난폭한 느낌에 함부로 다가서기 힘들어 보이는 인상이었다.이 남자는 사청인의 경호원이었고 신분도 절대 나쁘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발아래 사람들을 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을 터였다.설은아는 하현에게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눈짓을 한 후 미소를 머금고 사청인 앞으로 다가와 오른손을 내밀었다.“사청인 사장님, 안녕하세요.”“무성 황금 회사의 설은아입니다.”“오늘 만나 뵙기로 약속했죠. 채무에 대해서 얘기하기로.”“사청인 사장님과 얘기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군요.”설은아의 말에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이 심드렁한 미소를 지으며 설은아를 바라보았다.사청인에게 돈을 요구하는 거야?이건 용천진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이 사람이 지금 제정신인가?아니면 사는 게 지겨워서 한바탕 푸닥거리를 해보자는 건가?눈을 위아래로 내리깔며 설은아를 훑어보던 남자는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는 설은아가 사청인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대단한 조상을 두었길래 간덩이가 이렇게 부었나 생각했다.감히 함부로 돈 얘기를 꺼내다니?그것도 빚 독촉이라!“당신이 뭔데 여기 와서 빚 독촉을 하는 겁니까?”“그 돈 정말 사청인 사장님이 빌린 거 맞아요?”“제대로 알아보고 왔어야 할 겁니다!”“우리 사청인 사장님이 당신들한테 돈을 빌렸다고?”“지금 장난하는 겁니까?!”돈을 돌려받을 수
우다금은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일어서더니 하현에게 달려왔다.“당신 여기 뭐 하러 왔어? 어?”“설마 당신 장모가 우릴 미행이라도 하라고 시켰어?”“떠도는 소문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 당신 처가는 이제 파산이야!”“그래서 우리를 따라다니며 어떻게든 우리 덕을 보려고 하는 거지!”우다금은 최희정 일가에 대한 미움이 최고조로 달한 것 같았다.도움이 필요할 때는 그렇게 도와주지 않으려고 하더니 이제 자기 딸이 탄탄대로를 걸을 것 같으니까 사위를 대동해 뭐라도 덕을 보려고 치근덕거리다니!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야!“썩 꺼져! 꺼지라고!”우다금은 먹이를 앞에 두고 다툼을 벌이는 사자처럼 포효했다.“어쨌든 형 씨 가문 그룹에서 너 같은 놈을 경비로 부를 일은 없어!”“형 씨 가문 그룹이 어떤 곳인지나 알아?”“제대로 된 졸업장이 없으면 발도 들이지 못할 그룹이야!”“모두가 우리 딸처럼 능력이 뛰어난 줄 알아?”하현은 무지막지하게 퍼붓는 우다금의 억지에는 대꾸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하현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우소희는 옆에서 비아냥거리는 미소를 한껏 떠올리며 말했다.“하 씨! 들었어?”“이곳은 당신 같은 데릴사위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빨리 꺼져! 안 꺼져?!”“어서 꺼지라고! 우리가 당신 같은 사람을 안다는 걸 무 팀장님이 알기라도 한다면 우리 품위가 완전히 떨어진다고!”말을 하면서 그녀는 하현을 밀치려고 했다.하현의 존재가 그녀들에게는 피나 빨아먹는 거머리처럼 보였던 것이다.이렇게 된다면 앞으로 그녀가 형 씨 가문 그룹에서 어떻게 잘생긴 갑부들을 낚을 수 있겠는가?하현이 한 발짝 물러서며 우소희의 손을 피했다.그녀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혐오스러워서였다.그는 소위 말하는 몰상식한 사람들과는 조금도 접촉하고 싶지 않았다.하현이 감히 자신의 손을 피하는 것을 보고 우소희는 자존심이 확 상했다.뭔가 모욕당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그녀는 프런트 데스크 직원
두 모녀를 본 하현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예정대로라면 우소희는 오늘 아침 일찍 출근 보고를 하러 올라갔을 텐데 왜 로비에 이렇게 있는 것인가?결국 하현은 우다금이 전화기에 대고 울먹거리며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인사팀 팀장님 맞으시죠?”“안녕하세요. 저는 우소희 엄마, 우다금입니다.”“아, 맞아요. 맞아요. 바로 오늘 출근하려던 우소희예요! 좋은 연봉으로 입사하게 된 우소희요!”“사실은 어제 너무 기뻐서 온 가족이 축하하느라 우리 딸이 술을 너무 먹어서 오늘 알람 맞추는 걸 깜빡했지 뭐예요!”“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어쨌든 우리 소희는 인재잖아요! 그러니 좀 너그럽게 봐주시면 어떨까 해서요.”하현은 어이가 없었다.정말로 가지가지 하는 진상 모녀였다.어렵게 형 씨 가문 그룹에 취직을 시켜줬더니 지각을 해?그러고도 자신들이 아주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거야?“아, 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마세요.”“우리 딸이 여기 입사하겠다고 했으니 다른 데 가지는 않을 거예요.”우다금은 여전히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우리가 여기 로비에 있는데 팀장님이 좀 내려와서 데려가 주면 안 될까요?”“아, 그리고 점심은 너무 오버할 필요없이 고위층 몇 명과 자리를 마련해서 인사시켜 주면 됩니다.”“참고로 우리 딸은 82년산 라피트만 마셔요. 피부가 상할까 봐 고급술만 마시죠.”“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말을 마친 우다금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전화를 끊은 뒤 우소희를 쳐다보았다.“걱정하지 마. 그렇다고 많이 늦은 것도 아니잖아?”“우리 딸 같은 출중한 인재를 모셔가는 형 씨 가문 그룹이 이 정도도 못 참으면 어쩌겠다는 거야?”“네가 이 회사에 오지 않는다면 형 씨 가문 그룹은 석 달도 안 되어서 문을 닫을 거야!”“아마 무 팀장이 곧 내려와서 우릴 맞이할 거야.”우다금의 말에 프런트 데스크의 예쁜 직원과 잘생긴 경비원은 서로 눈을 마주 보며 어이없다는 눈빛을 주고받았
한바탕 휘몰아치고 맞이한 밤은 모두에게 평온함을 쉽사리 가져다주지 못했다.최희정은 가끔 이를 악물었다가 화가 나서 헐떡거렸다가 도저히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이튿날 아침 하현은 일찌감치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옷을 갈아입고 간민효와 풍수관 일을 상의하기 위해 나서려고 했다.그런데 그가 대문을 나서자마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하현이 전화를 받자마자 형나운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사기꾼...”하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또 맞고 싶어?”하현의 말속에 은근하게 퍼지는 매서운 기운을 감지한 형나운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시간 좀 있어요?”하현은 무심하게 내뱉었다.“시간 없어. 가게를 보러 가야 해. 바빠.”“당신이 원하는 가게, 나한테 없을 것 같아요?”형나운은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계속 말을 이었다.“당신이 원하는 걸 말해 봐요. 내가 삼백 개는 더 보여줄 수 있어요.”“아니야. 필요없어. 내가 찾을 수 있어.”하현은 단칼에 거절했다.“무슨 일로 전화했어? 할 말 없으면 끊어.”“아, 정말 이럴 거예요? 당신이 어제 나한테 부탁한 일 다 처리해 줬는데 이제 와서 입 싹 닦을 거예요?”형나운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하현은 이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그냥 넘어갈 여자가 아니지.하현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형나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로 말했다.“나의 주인님, 지금 하녀를 도와줄 시간이 좀 있을까요?”“오늘 아침에 일어나 무술을 연마하는 데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어요.”“지금은 머리도 아프지 않고 잠잠해졌지만 불안해서 이대로 있을 수가 없어요.”“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숨이 멎고 식물인간으로 살게 되면 어떻게 해요?”“그래서 이렇게 부탁하는 거예요. 주인님, 오늘 잠시 와서 나 좀 봐주면 안 돼요? 주인님이라면 날 구해 줄 수 있
”너희들은 기껏해야 대구 정 씨 가문 아홉 번째 집안이야. 형홍익 같은 사람이 봐줄 사람들이 아니라고!”“데릴사위 따위가 중간에서 역할을 했다고? 그렇게 잘났다고?”“허풍을 떨어도 좀 그럴싸하게 해야지! 흥!”우다금은 이 일에 하현이 중간 역할을 했을 리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다.“아니, 언니!”우다금이 펄쩍 뛰는 모습을 보고 최희정은 화가 나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비록 그녀도 하현이 그런 능력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우다금의 말엔 참을 수가 없었다.“자네, 어서 자네가 도와줬다고 말해!”최희정은 우소희의 그 정도 능력으로는 SL그룹에도 못 들어올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어떻게 형 씨 가문 그룹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그래서 하현이 정말로 형홍익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특히 무성에서의 일을 떠올리자 최희정은 하현이 확실히 어떤 거물과 인연을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비록 죽일 듯이 하현을 싫어하는 최희정이지만 우다금이 뻔뻔스럽게 모든 일을 자신들의 공으로 돌리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설은아의 난처한 표정을 본 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모님...”“이, 이모라니?!”하현이 뭐라고 해명을 하기도 전에 우다금은 앞뒤 따져 보지도 않고 무지막지한 얼굴로 퍼부었다.“이모라니? 내가 어떻게 당신 이모야? 누가 당신 이모냐고?”“데릴사위 주제에 함부로 입 놀리지 마!”“그렇지 않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쓸데없는 말 하지 마!”“우리 소희가 형 씨 가문 그룹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나도 이제 너네들같이 속물 덩어리들과는 상대하지 않을 거야!”“아까는 온갖 이유를 대며 도와주지 않으려고 데릴사위 하나까지 핑계를 갖다 붙이더니 이제 와서 내 딸이 좋은 곳에 들어간다니까 어떻게든 생색내려는 거잖아?”“정말 이렇게 뻔뻔한 사람들은 처음 봐!”“내가 다시는 이 집에 발을 들이나 봐!”“우리 소희가 이제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고 절
말을 하면서 우소희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보였다.결국 형 씨 가문 그룹에서는 그녀의 체면을 세워 주며 높은 급여를 제시한 것이다.이만큼의 연봉을 받는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우다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소희야. 정말 형 씨 가문 그룹이래? 잘못 들은 거 아니지?”“맞아, 똑똑히 들었어. 인사팀 사람들을 만났었는데 틀림없이 그 목소리가 맞아.”우소희는 만면에 자랑스러운 미소를 띠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형 씨 가문이 정말 눈치 하난 빠르네.”이 광경을 보고 설은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과 형 씨 가문의 관계가 이렇게 공고하고 깊은 줄은 몰랐다.전화 한 통으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해결하다니!설마 간민효 때문은 아니겠지?그녀는 방금 하현이 전화할 때 건너편에서 여자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은 것 같았다.금정에서 형 씨 가문을 이렇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여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하현은 질투의 그림자가 설은아의 얼굴에 드리워진 것을 눈치채고 쓴웃음을 지었다.그렇다고 형나운에게 전화했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자신이 또 다른 여자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안다면 질투의 화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할지도 모른다!하현과 설은아가 서로 무언의 묘한 눈빛을 주고받는 동안 우다금은 이미 자신의 딸의 운명을 점찍었다.“잘됐어! 정말 잘됐어! 형 씨 가문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어!”“하늘이 도왔어!”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을 기회로 삼아 그녀는 친척들 사이에서 한껏 콧대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언니! 하늘이 도운 게 아니야!”최희정이 어떻게 자신의 체면이 구겨지는 일을 참을 수가 있겠는가?“하현이 언니를 도와준 거야!”이 말을 듣고 하현은 깜짝 놀랐다.최희정의 승부욕이 이토록 강할 줄은 몰랐다.“하현? 그 데릴사위가?”최희정의 말을 들은 우다금은 곁눈으로 하현을 흘겨보면서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귀가
최희정은 하현이 어디서 이 명함을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맞아. 정말로 형홍익 명함인데?”우다금은 최희정의 말을 듣고 오히려 화를 버럭 내었다.“아휴! 잘난 데릴사위가 형홍익의 명함을 얻었으니 이제는 금정 최고 거물의 명함도 받을 수 있겠군그래!”“설 씨 집안도 대구 정 씨 가문과 연락이 닿아 아홉 번째 집안이 되어 꽤나 번성하고 발전했을 텐데 왜 이렇게 변한 거야?”“도와주고 싶지 않으면 그냥 말로 하면 되지 생색은 한껏 내면서 이런 핑계나 대고 있으니 원!”“정말 실망이야!”“이렇게 우릴 무시할 거면 확실히 말할 것이지! 앞으로 내가 절대 이 집안에 얼씬을 하나 봐! 절대 안 올 거야!’우다금은 노점에서 사 온 선물 꾸러미를 떠올리자 화가 나서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다.그녀는 자신이 쓴 돈을 만회하기 위해 거실에 있는 찻주전자라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우다금의 말에 최희정과 설재석은 어이가 없어서 몸을 부르르 떨었고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설은아는 이 광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하현의 손을 잡아끌었다.“하현, 당신이 좀 도와줘. 그렇지 않으면 우리 부모님이 정말...”이쯤 되니 설은아도 자신의 행동이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었다.하현과 최희정은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그런 하현이 최희정을 위해 나서서 우 씨 고모를 도와주려 하겠는가?설은아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듣고 하현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이런 사소한 일로 형홍익 어르신을 귀찮게 할 필요도 없어. 내 하녀한테... 그러니까 내 친구한테 말 한마디만 꺼내면 돼.”말을 마치며 하현은 핸드폰을 꺼내 형나운에게 전화를 걸어 우소희의 취업 문제를 도와달라고 했다.그는 1분도 되지 않아 전화를 끊었고 우다금 모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잘 해결되었습니다.”“거짓말하지 마!”“어디서 계속 장난질이야!”“데릴사위인 주제에 금정 최고 책임자라도 되는 양 허
”허! 제부! 시도도 안 해 보고 노력도 안 했는데 당신들은 처음부터 안 된다고 못 박고 있잖아요!”“그게 도와주겠다는 사람 태도예요?”우다금은 냉소적인 얼굴로 쏘아붙였다.“당신들이 우릴 친척이라고 생각했으면 어떻게 우리 소희를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어요?”“제부, 난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내가 자존심도 다 버리고 도와달라고 이렇게 애원하는데 사람을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드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정말 너무 뻔뻔들 하네!”최희정은 자신보다 더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정신을 다잡고 이를 갈며 말했다.“지금 뭐라는 거야? 우리한테 도와달라고 찾아온 언니를 내가 영광으로 생각하며 대했어야 한다는 거야?”“엄마, 아빠...”설은아는 또 말다툼이 시작되려 하자 걱정스러운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하현을 힐끔 쳐다보았다.“하현, 혹시 이모 도와줄 수 있겠어?”설은아는 하현이 금정은행에서 형홍익의 개인 명함을 내놓은 것이 문득 떠올랐다.그렇다면 하현과 형홍익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얘기였다.그래서 하현이 방금 그런 말을 꺼낸 것이었다는 걸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허풍이 아니라 정말로 도와줄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눈앞의 난처한 상황을 보고 설은아는 어쩔 수 없이 하현에게 입을 열었다.“하현, 정말 도와줄 수 있어?”설은아의 말에 우다금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은아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면 안 되겠니?”“네 전 남편이 얼뜨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어?”“도와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하면 되지!”“능력이 없다는 둥 변명만 늘어놓더니 이제는 얼뜨기를 내세워 나한테 헛바람이라도 넣으려고 그래?”“놀리는 거야? 놀리니까 재미있어?”“우린 바보가 아니야!”말을 마치며 우다금은 화가 나서 숨을 헐떡거리며 눈을 부라렸다.그녀는 설은아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이런
”제부, 희정아, 은아야. 이 일은 아무래도 너네들이 해결해 줬으면 좋겠어!”“어쨌든 너네들은 매일 친구 모임에도 다니면서 여러 거물들과 친분도 있고 인맥도 많을 거 아냐?”“너네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 같은 과부와 내 딸은 어떻게 살아?”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최희정의 식구들은 신세한탄과도 같은 말을 내뱉는 우다금을 보고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너네들, 우리 소희가 일자리도 없이 집에서 폐인이 되어 가는 걸 차마 볼 수 있겠어?”“양심에 찔리지 않겠냐고?”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우소희는 핸드폰 배터리가 얼마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손을 놓은 뒤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쳤다.“엄마, 희정이 이모나 이모부가 별로 능력이 없는 것 같아.”“이 사람들은 이제 돈이 많아서 우리 같은 가난한 친척들은 아예 상대하지 않으려고 하나 봐!”“돈푼깨나 좀 있다고 잘난 줄 알아?”“능력 있다고 자랑이나 하지 말던가!”하현은 우소희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머리가 텅텅 빈 데다 당돌하기까지 했다.이 말을 듣고 설은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모, 우리 부모님이 도와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은 금정에서 확실한 인맥이 없어요.”“게다가 형 씨 가문 그룹은 금정뿐만 아니라 전국 단위로 미술품과 골동품을 취급하는 굴지의 그룹이에요.”“매년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수천 명이 넘어요.”“그중에는 배경도 대단하고 능력도 뛰어난 사람도 널렸고요.”“그런데 형 씨 가문이 우리가 뭐라고 우리 요구를 들어주겠어요?”“형 씨 가문 고위층과 아는 사이긴 하지만 취업 청탁을 할 만한 위치는 아니에요. 그럴 능력도 없고요.”“물론 우리도 최선을 다해 볼 거예요!”설은아는 냉정하게 말했다.그녀의 성격은 최희정과는 완전히 달랐다.겉으로 매정한 말을 못 한 채 질질 끌려가지 않았다.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고 실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녀가 지금 이렇게 말한 것도 한편
”나도 형 씨 가문 그룹에 들어가는 게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죠.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굽신거리며 여기 온 거잖아요!”우다금은 맡겨둔 물건을 찾으러 온 것처럼 아주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희정아, 긴말하지 않겠어.”“너네 아홉 번째 집안은 곧 파산하겠지만 속담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 부자가 망해도 3대는 먹고산다고.”“은아가 우리를 형 씨 가문에 다리를 좀 놔주면 되지! 잠시 인사한다고 안면을 트고 물 한 모금 마시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우다금은 아주 노골적으로 의도를 드러내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물론 너네가 혹시라도 그쪽에 신세지는 게 두려워서 우릴 도와주지 않겠다고 한다면...”“솔직하게 말해!”“난 그럼 친척들한테 가서 그대로 전할 테니까!”최희정과 설재석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특히 최희정은 더욱 눈알이 휘둥그레졌다.재물을 탐하는 것 외에 그녀가 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체면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가방 하나를 사도 SNS에 올려 자랑하는 사람이었다.그런데 만약 자신이 우다금을 도와주지 않은 일이 사람들한테 알려진다면 앞으로 그녀는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하지만 이 일은 어떤 방법으로도 도와줄 수가 없는 일이었다.그녀가 돕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능력 밖의 일이라는 말이다.금정처럼 오래된 도시에 토박이들이 깊이 뿌리를 내린 곳의 은둔가 형 씨 가문은 금정 간 씨 가문이나 김 씨 가문과도 비견될 만한 존재였다.대구 정 씨 가문도 확실히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이긴 했지만 문제는 설은아가 아홉 번째 집안이고 그것도 파산 직전 상태라는 것이다.이 상황에서 그녀가 형 씨 가문과 조금 친분이 있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형 씨 가문 그룹에서 이 정도 알량한 친분 때문에 체면을 봐주며 뒷거래를 하겠는가?가능성이 너무나 희박하다는 건 알지만 체면 때문에 최희정은 천천히 설은아의 얼굴에 시선을 돌렸다.최희정은 설은아가 먼저 이 일을 승낙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