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도끼파 본거지.하현은 정원에 다기 세트를 차려놓고 손수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얼마 후 가냘픈 그림자가 멀리서 비치는 게 보였다.“하현, 한밤중에 이렇게 부르면 부인이 질투하실 텐데요.”진주희는 하현의 맞은편에 앉아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오늘 밤 그녀는 비단으로 된 전통의상 한 벌을 우아하게 입은 채 긴 머리를 풀어헤친 모습이었다.평소 똑똑하고 세련된 모습은 사라지고 오히려 여성스러운 매력을 물씬 풍겼다.하현은 흐뭇한 미소로 진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이 나와 함께 차를 마시며 달을 구경한다고 그녀가 설마 화를 낼까?”진주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오직 당신만 따르니까요...”하현은 아연실색했다.그는 진주희가 이런 농담을 할 줄은 몰랐다.피식하고 헛웃음을 짓다가 하현은 진주희에게 손수 차를 한 잔 따라준 뒤 말했다.“자, 농담은 여기까지야.”“본론으로 들어가자고.”“내일부터 무성 황금 회사의 운영은 설은아에게 맡길 거야.”“당신은 안심하고 집법당 일에 집중해. 나 대신 전반적인 상황을 안정시켜 줘.”“그럼요. 문제없습니다.”진주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부진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문제없죠.”“다만 무성 황금 회사의 상황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아요.”“우리가 쫓아낸 마하성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무성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도 모두 무성 황금 회사에 눈독을 들이고 있어요.”“무성 황금 회사는 여러 세력들이 물려 있어요. 그만큼 얻어먹을 게 많으니까요.”“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우리의 살점을 뜯고 싶어 하죠.”“알고 있어.”하현은 눈꼬리를 가늘게 뽑으며 말했다.“설은아 성격상 무성 황금 회사를 맡으면 아주 많이 공격을 받을 거야.”“결국 회사를 내줘야 할 수도 있어.”“그런데 그럼 또 어때?”“그녀에게는 지금이 또 다른 기회가 된 거야.”“그녀는
용이국의 곁에는 용 씨 가문 경호원이 따라다녔지만 현장에는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도 너무 많았다.보는 눈이 많아 용이국의 경호원들은 성가시게 구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고 피해자 가족들은 계속 으르렁대며 용이국을 귀찮게 했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에 용이국의 사람들은 피해자 가족들의 공격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십여 명이 참다 참다 무기를 꺼내들어 그들을 막았다.용이국도 이 틈에 그들을 막아내느라 있는 힘을 다 짜내었다.만약 그가 몇 년 동안 수련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손발이 다 부러졌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상처투성이에 눈밑까지 퍼렇게 멍들었다.그렇다고 그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이제 아무 의미도 없어졌기 때문이다.그는 일이 이렇게 된 것이 하현 그 개자식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감히 날 이렇게 만들어?!”“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용이국은 치밀하고 철저하게 계략을 짰을 뿐만 아니라 하현을 반격할 배짱도 두둑했었다.그러나 뜻밖에도 자신과 용천오에게 큰 손실을 입히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용이국,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그때 날씬한 몸매에 세련된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여비서가 태블릿 PC를 안고 들어왔다.“이제 하현은 완전히 혐의를 벗어났습니다.”“그동안 우리 쪽에서 깔아놓은 포석들은 모두 쓸모없어졌고요. 그뿐만 아니라 언제든 불똥이 튈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용이국은 냉소를 흘리며 애꿎은 여비서의 뺨을 때렸다.“하 씨 그놈! 당장 죽여도 시원찮을 놈! 감히 날 이 꼴로 만들어?!”이번 일로 하현은 완전히 혐의를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용이국에게 대망신을 주었다.가장 화가 나는 일은 무성 상류층에서도 자신이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용이국의 마음속에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왜 용천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렇게 오만하게 굴었던가?결국 그는 모든 것을 잃었고 하현은 모든 판세를 뒤집어 버렸다.빠른 시일
예쁘장한 여비서는 힘겨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만약 용천오께서 정말 우리를 도와주지 않고 이 일을 계속 밀어붙인다면 우리의 결말은 불 보듯 참담해요!”“닥쳐!”“지금 날 가르치는 거야?”용이국은 마음이 초조했다.“생각하고 있는 게 있으세요? 외지인 놈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무성에서 지낼 수 있겠어요?!”순간 용이국은 얼른 핸드폰을 들어 통화기록으로 들어갔다.문득 눈앞이 환해진 그는 해외 번호를 누르며 입가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번졌다.“용천오는 지금 나한테서 손을 떼려고 하고 있지만 어떤 이는 나한테 손을 내밀어 줄 수도 있지!”“나 혼자서는 하현을 상대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를 단번에 죽일 수도 있어!”“지금 인도 회관으로 가서 브라흐마한테 내일 골프나 치러 오라고 전해...”“지난번에 날 도와주려고 고수를 보낸 준 거 아직 정식으로 고맙다는 말을 못 했다고 전하고...”...이튿날 오후.하현은 설은아를 데리고 무성 황금 회사에 가서 회사의 각종 절차를 인수인계했다.곧이어 설은아는 무성 황금 회사의 총재가 되었다.안 그래도 하현에게 불만이 많았던 최희정은 하현의 결정에 말문이 막혔다.설유아도 무성 황금 회사의 부총재직을 맡았으니 어느 정도 회사의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일을 다 처리한 후 하현은 한여침에게 경호원을 몇 명 더 보내라고 당부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결국 설은아도 언제까지 자신의 비호 아래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히 회사 일에 개입하지 않고 물러난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설은아는 진정으로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붕!”하현이 무성 황금 회사를 나서자마자 검은색 아우디 한 대가 그의 옆에 멈춰 섰다.문이 열리자 무성 경찰서장 만천우가 차에서 내리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하현.”만천우는 하현을 오래 기다린 것이 분명했다.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바로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하현도 사양하지 않고 만천우가 안내하는
”그래서 당신이 아버지를 한번 봐 줬으면 좋겠어요.”만 씨 가문의 이력을 들은 하현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만천우, 당신 잊었어? 난 당신의 총교관이었지 의사가 아니야.”“물론 의사가 아니죠. 하지만 세상의 거의 모든 살인술을 알고 계시잖아요.”“칠절탈명지, 이것도 살인술 중의 하나예요.”“아마 세상에서 당신만이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 거예요.”“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면 당신한테 부탁하지도 않았겠죠.”만천우는 분명 하현이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아침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염치없지만 하현에게 부탁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만천우, 그런 말 하면 섭섭하지. 내가 뭐라고.”하현이 입을 열었다.“당신 아버지를 치료할 수 있다고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걱정하지 마. 어쨌든 당신은 내 핏줄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까!”만천우는 하현의 말을 듣고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그런 말씀을 들으니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그러면서 만천우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빨리 몰고 가라는 손짓을 했다.“참, 하현. 제가 이틀 동안 사람을 보내 사건을 조사하면서 단서를 하나 발견했어요.”“CCTV에 당신과 똑같이 생긴 그 사람을 알아냈어요. 아마 브라흐마 아부와 얽혀 있는 것 같아요.”하현이 웃으며 말했다.“브라흐마 아부가 누구야?”“브라흐마 아부는 인도 상회의 부이사예요. 젊고 돈도 많죠.”“무엇보다 상업의 귀재일 뿐만 아니라 인도 요가술에도 능통하다고 해요. 그 솜씨가 무서울 지경이라는데요.”“인도에 무슨 10대 기인 중 하나라고 들었어요.”만천우는 똑바로 앉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하현, 인도의 요가술이 절대 신체 단련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그건 진짜 살인술이에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이는 거죠.”“브라흐마 아부는 어려서부터 유명했어
전설에 의하면 이 산장은 건국 초기에 무성 최고 책임자가 자리를 잡아 세웠다고 한다.그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백 년 동안 이 산장은 고치고 세우고를 반복하다 지금은 거의 십여 채의 건물만 남아 있다.그러나 산장의 주인은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무성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무성의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이 사람이 아니라면 1호 정원의 주인이 될 사람은 없었다.하현은 이런 것들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무성 사람들에게는 무성의 자금성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몇 분 후 차는 1호 정원 안에 있는 건물로 들어와 멈춰 섰다.이 건물은 전체 건물 중 가장 지리적으로 높고 전망도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문이 열리고 하현과 만천우 두 사람이 내렸다.하현은 주변 건물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푸른 벽돌과 붉은 기와가 세월의 위용을 자랑하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무엇보다 건물 곳곳에 총과 실탄이 장착된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이 이 건물의 위세를 말해 주었다.“하현, 이쪽이에요.”만천우는 각종 증명서를 꺼내서 제복 입은 남자에게 일일이 검사를 마친 후에야 하현을 데리고 건물 안을 통과했다.건물 안쪽으로 들어서자 마당이 또 나왔다.마당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다.십여 분을 걸은 뒤에야 두 사람은 뒤뜰에 도착했다.이곳에는 산꼭대기 호수가 있었고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곳에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정자와 누각이 다소곳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한 사람이 정자 한가운데 뒷짐을 지고 서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해발 팔천 미터에 달하는 높이였고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도 했다.하현은 눈앞에 우뚝 서 있는 뒷모습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그는 약간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여전히 체구는 우람했고 머리는 희끗희끗했지만 흐트러짐이 없었다.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느낄 수가 있었다.분
만진해는 분명히 하현을 조사했을 것이다.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젊은 사람이 사람 됨됨이가 안 되어 있는데 말도 건방지게 하는군.”하현의 말에 화가 난 것 아닌 것 같았다.다만 하현의 기세에 약간의 방어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절제된 삶과 겸손한 말, 이것이 제 삶의 원칙입니다.”“뿌리를 완전히 뽑지 않으면 언젠가 또 싹을 틔운다는 거, 저도 잘 압니다.”“그런데 그것 말고도 한 가지 더 아는 게 있습니다. 큰 물고기를 잡기 위해선 좀 더 긴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요.”“한 번에 큰 걸 거두고 오랫동안 편안해질 수 있는데 뭐 하러 그리 힘을 빼야 합니까?”“의사가 진찰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처럼 근본을 고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가벼운 약으로 우선 눈앞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뽑아낸 뒤 한꺼번에 뿌리를 뽑아 버려야지요.”“이렇게 해야 완전히 뽑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만진해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당신 생각이고!”“내가 보기에 당신의 이런 행동은 우유부단하고 후환을 남길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만천우는 처음에는 난감하고 어리둥절했지만 차츰차츰 알아듣게 되었다.하현과 아버지는 용이국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아버지는 줄곧 무성의 전반적인 상황에만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렇게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용천오도 만진해의 눈에는 그저 그런 사람인데 용이국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하지만 만천우는 감히 아버지에게 자세하게 물어보지 못했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하현을 바라보았다.“하현, 사실 나도 좀 이해가 안 돼요. 왜 용이국 같은 사람을 남겨둔 거예요?”“어제 그런 판국에는 용이국을 죽여 버려도 되었을 텐데요.”“그는 그럴 자격도 없는 사람이야.”하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소인배를 죽이는 일에 내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지.”“그리고 그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결국은 하찮은 존재일
충격에 빠진 만천우를 보며 만진해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만 지을 뿐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그리고 그는 하현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하현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아버지, 하현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했죠? 이제 믿으시겠어요?”만천우가 웃으며 말했다.“이제 하현에게 아버지의 환부를 보여 드려도 되지 않겠어요?”만진해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아저씨, 어디 계세요?”“우리 응접실로 가지.”만진해는 손뼉을 치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영지루가 왔군.”“며칠 전에 나한테 명의를 데려온다고 했었거든.”“내 병을 진찰해 줄 거라더군.” “이렇게 만났으니 안으로 들어가자고.”만천우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영지루는 영 씨 가문 사람이에요.”“그녀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 친구이기 때문에 영지루는 우리 가문과도 사이가 좋아요.”“영지루가 오늘 오는 줄은 몰랐어요. 게다가 명의까지 데려올 줄은. 하현,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영 씨 가문?”하현은 만천우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10대 최고 가문의 수장, 그 영 씨 가문 말이야?”“영지루가 바로 전설의 그 영 씨 집안 공주?”“많은 가문에서 그녀를 데려오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그 영지루?”만천우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만진해는 하현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하현이 영지루의 집안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러나 그는 별다른 말없이 뒷마당을 나와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응접실 안에는 몇 명의 남녀가 이미 걸어 들어왔다.앞장서는 사람은 가냘프고 호리호리한 몸매의 스물넷 정도 되는 여자였다.그녀는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눈썹이 그림같이 아치를 그리고 있었다.게다가 흰색 티셔츠에 슬림한 청바지를 심플하게 입었지만 청순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남자라면 그녀를 보기만 해도 모두 호감을 가질 만했다.그녀의 뒤편에는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서양인이
루돌프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소문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듣자 하니 그는 동서양의 의학을 두루 섭렵하고 섬나라와 인도의 고대 의술도 연구했다고 했다.말 그대로 온몸으로 온갖 잡학다식한 의술을 익힌 사람이었다.그러나 그는 이러한 의술의 군더더기는 제거하고 오직 알맹이만 남겨서 많은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북유럽 여러 나라의 황실에서도 일 년 내내 루돌프를 고용해서 그들의 병을 치료하고 장수를 구가하고 있다고 한다.하지만 루돌프의 진료비는 매우 비싸서 한 번 왕진하는 데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수술이 필요한 경우 수술 비용도 어마어마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돌프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대부분 그의 일정은 꽉 차 있어서 좀체 진료받기가 어려웠다.만천우는 일찍이 루돌프라는 사람의 명성을 들었다.다만 만 씨 가문의 위상이 무성에서는 높다고 하나 루돌프가 와 줄지는 의문이었다.이번에 영지루가 직접 나서지 않았더라면 황실 전문으로 이름을 날린 루돌프도 여기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영지루는 잠시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루돌프 선생님은 아저씨의 병세를 듣고 아저씨가 한 세대의 영웅이신 걸 아시고 영광이라고 생각하셔서 이곳에 특별히 오셨습니다.”루돌프가 이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영지루 말이 맞습니다.”이 말을 듣고 만천우는 기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만진해도 엷은 미소를 지었다.“지루가 마음을 많이 썼구나.”하현은 영지루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절대 만만한 인물이 아닌 것 같았다.만진해가 루돌프의 진찰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몇 마디 말로 입막음을 한 것이다.만진해는 하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지루야, 소개할 사람이 있어.”“이분은 하현이야. 천우가 특별히 모셔온 분이셔. 내 오랜 병환을 봐 주시기로 했지.”“오늘 이렇게 만났으니 서로 인사라도 해야지!”만천우가 옆에서 거들었다.그러나 영지루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하현을 잠시 훑어본 후에야
”좋아, 당신이 그렇게 잘난 척을 하니 한 명이라도 어디 해고해 봐!”우민은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비아냥이 가득한 얼굴로 하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자! 어서 해 보라니까!”“퍽!”바로 그때 은행 로비의 문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차여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남녀 열 명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양복 차림이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부티가 좔좔 흘렀다.그는 바로 금정은행 은행장, 은둔가 나 씨 가문 나천우였다.나천우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우민은과 이국흥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려 굽신거렸다.“행장님!”“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우민은과 이국흥은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나천우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환한 미소를 보였다.그런데 평소에는 친근하게 그들을 대했던 나천우가 오늘 이렇게 차가운 얼굴로 들이닥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나천우는 그들에겐 눈길도 돌리지 않고 하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하현의 손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하현,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이 말을 듣고 장내의 분위기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모두 어안이 벙벙해지다 못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곳곳에서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잠시 후 예쁘장한 여직원들이 자신의 뺨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잘못 본 것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연스럽게 하현에게 쏠렸다.몇몇 여자 고객들도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가 않는지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버렸다.우민은은 마치 사지가 마비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국흥은 더했다.사지가 그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쉼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이게 무슨 상황인가?그들은 하현
이국흥은 염치도 체면도 안중에 없는 사람 같았다.그는 없던 일을 있었던 일처럼 꾸몄다.그의 목적은 단 하나, 우민은이 하현을 혼내 주길 바랐던 것이다.이때 설은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부행장님, 그게 아닙니다...”우민은은 이국흥에게 힘을 실어 주러 온 상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설은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감히 우리 은행에서 사람을 때려요?”“간이 배밖에 나왔어요?”“지금부터 당신은 우리 은행 블랙리스트에 오를 거예요!”“이봐! 어서 관청에 신고해!”그녀의 카랑카랑한 말투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그러자 설은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분명 그녀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설은아가 이끄는 회사의 자금줄이 빠듯한 건 사실이었다.그런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파산하게 되었다.자신이 아홉 번째 집안을 맡은지 얼마나 되었는가?이렇게 빨리 파산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훗날 대구 정 씨 가문의 수장이 되겠다는 것인가?그야말로 허황된 꿈이었다!“하하하! 이게 바로 당신의 최후야!”“이제 알겠어?”이국흥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개자식! 이 개새끼야! 너 방금 정말 미친놈처럼 날 치더라? 정말 대단했지, 안 그래?”“자, 다시 한번 더 해 보시지?!”“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한번 보자고!”“퍽!”하현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그의 요구에 답하며 앞으로 걸어가다가 또 한 번 손바닥을 휘둘렀다.이국흥은 하현이 감히 자신에게 또 손을 쓸 줄은 몰랐다.뺨을 맞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그는 가까스로 우민은의 몸에 기댄 덕분에 쓰러지지는 않았다.“미친 거야?!”“당신들 여기가 무법천지인 줄 알아?”우민은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이봐, 어서 신고해!”“은행 협회에 통보해서 설은아한테 대출 다 막으라고 해!”이때 하현은 싸늘한 표정으로 우민은과 이국흥을 바라보며 말했다.“두 사람이야말로 내 블랙리
하현을 말리는 설은아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국흥은 험상궂은 얼굴로 이를 갈며 일어섰다.그는 입가의 피를 닦고 하현을 가리키며 말했다.“개자식! 당신 누구야?!”“당신이 뭔데 감히 이러는 거야?”“날 때려? 감히 날 때렸어?”“내가 뭐?”하현은 앞으로 나서면서 또 손바닥을 올려 이국흥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감히 내 아내한테 그런 모욕감을 주다니!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어?”“내가 누군지 당신 눈엔 안 보여?”“혹시 설 대표가 당신 부인이야?”이국흥은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뭔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신이 그 소문으로만 듣던 그 쓰레기 같은 놈?”“그런데 감히 날 때려?!”“죽여버릴 거야!”하현은 또 그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퍽!”“날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렇지만 내 여자를 건드리는 놈은...”“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오늘이 당신 제삿날인 줄 알아!”퉁퉁 부은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국흥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벌벌 떨었다.“하현, 그만해! 그만하라고!”설은아는 한사코 하현을 말리며 붙잡았다.“또 때리면 정말 사람이 죽겠어!”그녀는 마음속으로는 그를 고맙고 든든하게 여겼지만 불똥이 그에게 튈까 봐 걱정도 되었다.오래된 도시 금정의 은둔가 가문이 뒷배에 있는 금정은행 부장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금정은행의 뒷배인 나 씨 가문은 금정 금융계의 거물이었다.“개자식! 감히 날 때리다니?!”“흥! 넌 이제 죽었어! 내가 반드시 널 죽여버릴 거야!”이국흥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러나 그는 감히 하현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입만 떠들썩하게 떠벌렸다.“반드시 관청에 보고해서 감옥에 처넣어 버릴 거야!”“그리고 제멋대로 날뛰는 네놈 때문에!”“이 여자도 상상하기 힘든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블랙리스트에 올라 금융계에선 다시는 일 원 한 푼 빌릴 수 없게 만들 거라고!”“
설은아는 얼굴이 굳어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부장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부장님이 이천억, 아니 이조를 준다고 해도 난 이런 파렴치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요!”“설 대표님, 왜 그렇게 고지식하게 굴어요!”“아니 그냥 잠 한 번 자는 것 가지고 뭘 그래요? 결국 서로 윈윈하는 거 아닙니까?”“다른 사람들은 이런 기회가 없어서 꿈도 못 꾼다고요!”“그런데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요?”“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혼도 한 번 했겠다 잠 한 번 자는 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남의 편의를 봐주고 내 이익을 챙기면 되는 거죠.’“이번에 잘 하면 앞으로도 대표님은 육 씨 도련님의 사람이 되어서 금정에서 편하게 사업할 텐데, 그런 기회를 발로 차버려요?”“대표님이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러면 금정에선 사업하기 힘들어져요!”“왜 돈을 앞에 두고 내팽개치려는 거예요?”이국흥은 이 바닥에서 닳을 대로 닳은 인물이었다.이런 일에 경험도 많고 비열함 따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상대를 앞에 두고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며 이리저리 이로울 대로 몰아가고 있었다.정신력이 보통인 여자가 아니라면 그의 능수능란한 언변과 뻔뻔스러운 행동에 쉽게 넘어가고도 남았다.설은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섰다.“이 부장님, 내가 돈이 필요하긴 해요!”“하지만 돈 때문에 내 몸과 영혼을 팔진 않을 겁니다!”설은아에겐 분명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었다.“좋아요, 안 받으셔도 됩니다!”“없던 일로 하죠!”이국흥은 테이블을 탁 치며 노기등등한 표정을 지었다.“게다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은 우리 금정은행에 따로 오백억 빚이 있습니다!”“계약대로 다음 달에 갚아야 하고요!”“기한이 지나면 우리 금정은행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 자산을 몰수할 권리가 있습니다!”“그렇게 되면 대표님도 자리를 보전할 수 없을 겁니다!”
”대출이 갱신이 안 되어서 우리 회사가 두 달째 월급을 못 주고 있어요.”“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고 공장 생산도 중단되었어요.”“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정말 파산할 거예요.”설은아는 조심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말했다.“이 부장님, 우리 회사랑 거래하는 게 처음도 아니잖아요.”“부장님도 우리 집안에 대해 잘 알고 계시고요. 우리 뒤에는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대구 정 씨 가문이 있어요.”“도와주신다면 그 은혜 꼭 보답하겠습니다.”이국흥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설은아를 바라보았다.“설 대표님, 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대표님 회사는 지금 장부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 위험평가를 통과할 수가 없어요!”“내가 직업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업윤리를 어겨 가면서까지 대표님을 도와드릴 순 없잖습니까?!”“안타깝지만 우리 은행에서 이번 대출 연장은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하지만 우리 은행에서 대표님께 기회를 안 드리는 건 아닙니다...”말을 마치며 이국흥은 미리 준비해 둔 서류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서남 천문채 육 씨 도련님이 당신한테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하는군요.”“이건 이천억을 빌린다는 차용증입니다. 대표님이 여기 서명만 하면 당장 효력이 발생하고요.”“언제든지 돈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하지만 육 씨 도련님이 말씀하셨어요. 하룻밤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고.”육 씨 도련님?!설은아는 낯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녀는 분명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그래서 그녀의 눈빛에선 겨울 칼바람 같은 매서운 기운이 넘실거렸다.“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직업윤리도 없고 염치도 없으세요?”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이국흥은 뻔뻔스럽게 입을 열었다.“당연히 무슨 말씀인지 알 텐데요.”“난 대표님이 육 씨 도련님의 요구대로 했으면 합니다!”“그분이 누굽니까? 서남 천문채에서 어마어마한 지위에 있지 않습니까? 잘 아시면서 왜 그러
”아, 아니...”“대, 대사님! 대사님!”이때 나천우는 정신을 차리고 울부짖으며 하현을 쫓아가려고 발버둥쳤다.임단은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나천우를 뒤따랐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현은 그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나천우 부부가 급한 마음에 부하들에게 전화를 걸어 얼른 하현을 뒤쫓으라고 하려던 참이었다.나천우를 뒤쫓아온 형나운은 나천우의 전화기를 툭 쳤다.“천우 오빠, 또 일을 그르치려고 그래?!”그녀는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다.“지금 하현이 화가 나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게 생겼는데 부하들이 쫓아간들 어쩌겠어?”“하현이 돕지 않겠다고 하는데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겠어?”나천우는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 되었다.“형나운, 우리가 잘못했어.”“우리가 눈이 멀었나 봐. 눈앞에 사람을 두고도 제대로 볼 줄 몰랐으니 말이야!”“하지만 너랑 나랑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 부디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잘 좀 봐달라고 말 좀 해 줘!”“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돈 문제는 절대 신경 쓰지 마!”“맞아.”이때 임단도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형나운, 그러면 주소라도 알려줘. 우리가 가서 삼고초려라도 해 볼게!”“좀 진정해. 이렇게 쫓아가 봐야 아무 소용없어.”형나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조금 있다가 내가 전화해 볼게.”그 시각 진회강 강변에 위치한 금정은행 본사 앞.설은아는 머뭇거리다가 뭔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은행 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마침 택시를 타고 지나가던 하현이 설은아의 모습을 보았고 자금난에 허덕이는 그녀의 사정을 급히 떠올리며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한 뒤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뒤따랐다.하현이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마침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전화를 받아보니 형나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나 사장 부부가 잘못을 깨닫고 직접 사과드리고 싶다고 해요.”“내 얼
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형나운도 틀림없이 이 사기꾼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다.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감히 자신을 풍수대사라 할 수 있겠는가?장난하는 건가?이런 사람이 사기꾼이 아니라면 누가 사기꾼이란 말인가?임단이 참지 못하고 옆에서 끼어들었다.“그럼 당신은 음양학을 배운 학생이에요?”하현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아니요. 난 굴착기를 배웠어요. 기술도 좋고 자격증도 있어요.”“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갑자기 표정이 냉랭해졌다.“지금 뭐라는 거예요?”“굴착기를 배운 사람이 무슨 풍수를 본단 말이에요?”“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예요?”“대하에서 풍수지리가 얼마나 큰 위상을 차지하는지 몰라요?”“우리를 속이려 들다니 후환이 두렵지도 않아요?”나천우의 말에 형나운의 안색이 새까맣게 일그러졌다.그녀는 다급하게 나천우에게 눈길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오빠, 그만하면 안 돼!”“우리 두 집안의 친분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내가 이런 중요한 일을 두고 오빠를 속였을 거라고 생각해?”“내가 바보야?!”“너 나 속이는 거 아냐?”나천우의 얼굴은 냉랭하게 식었다.“너도 자세히 봐 봐. 이 젊은 사람은 풍수라는 두 글자도 모르는 것 같은데 어떻게 믿으란 얘기야?!”“이 사기꾼을 만나려고 내가 금정은행 투자 포럼도 안 나가고 여기 왔겠냐고!”임단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비난에 열을 올렸다.“형나운, 당신 정말 경솔했어!”예전 같았으면 두 집 사이에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형나운이 하현에 대해 거의 신처럼 말했다는 것이다.나천우와 임단은 자신들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줄로 알고 커다란 희망을 품고 여기 왔다.다만 희망이 크면 실망도 큰 법이고 분노는 걷잡을 수 없다는 걸 몰랐을 뿐이다.“나 사장님?”형나운은 하현의 목소리에 그에게 눈길을 떨구며 손을 내저었지만 하현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담담한 눈
”형나운, 정말 축하해!”“우릴 속이지 않았군!”“그런데 그 대사님은 어디에 계셔?”“얼른 좀 소개해 줘!”나 사장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병은 이미 수많은 국내외 명의들한테 보여줬어. 국수인 장북산 선생님도 보셨지!”“어르신은 우릴 보고 병이 아니라 악에 부딪힌 것이라고 하셨어.”“풍수에 정통한 사람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대.”“하지만 수많은 풍수지리사를 만나봤지만 도저히 해결되지 않았어.”“어쨌든 형나운, 당신이 대사님한테 말 좀 잘 해 줘!”나 사장의 부인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형나운, 우리를 살릴지 말지 여부는 전적으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어.”“이 일이 잘 해결되면 최고 가문에서 기가 막힌 남편감을 물색해 줄게. 정말 섭섭하지 않게 해 줄 거야!”옆에 살짝 비켜서 있던 하현의 이마에 주름살이 잔뜩 드리워졌다.기가 막힌 남편감?뭐가 기가 막히다는 거지?형나운은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나 사장님, 그 대사님은 바로 가까운 곳에 있어요.”“하현, 소개할게요. 이 분은 나천우 사장님, 그리고 이쪽은 나 사장님 사모님, 임단.”“나 사장님은 나 씨 가문 출신이에요.”“나 씨 가문은 형 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금정에 토박이로 아주 뿌리가 깊은 가문이죠.”“예로부터 은행업을 해 왔고 지금도 금정에서 가장 큰 은행인 금정은행을 움직이는 가장 큰 지주이자 실세죠.”“나 사장님 부부는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자식이 없어요. 그래서 온갖 치료를 받았지만 성과가 없어서 결국 풍수지리술에 기대 보려고 하고 있어요.”“할아버지 얘기를 듣고 여기까지 오셨고요.”“우리 형 씨 가문과 나 씨 가문은 사이가 좋아서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당신한테 말도 없이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형나운은 조금 찔리는지 불안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하현, 이렇게 불쑥 말을 꺼내면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지만 제발 나 사장님 부부를 좀 도와줬으면
하현은 이맛살을 구기며 말했다.“말로 하면 되지! 당신 왜 이러는 거야? 이런 행동을 왜 하는 거냐고?”“내가 그런 사람이야?”“하현, 치료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형나운은 미안한 듯 겸연쩍어하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주동적으로 이런 자세를 보인 거예요. 언제든지 와도 상관없다고.”“아무튼 당신이 날 고쳐 줄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요.”“강하면 강할수록 난 더 좋아요.”“당신 정말...”“마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죠?”하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퍽’하고 내리쳤다.“이렇게 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누가 말했어?”“지난번에 난 기혈과 두통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줬어.”“그런데 지금 당신 문제는 완전히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 호전되지 않아!”하현의 말을 들은 형나운은 순간 얼굴이 벌게졌다.그녀는 얼른 엉덩이를 내리고 똑바로 선 다음 서랍 속에서 노란 가죽으로 싼 고서적 한 권을 꺼내 하현에게 건네주었다.하현이 힐끔 쳐다보니 ‘영춘’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집안을 다스리는 처세술에 관한 책인 ‘영춘’은 여자아이의 수련에 안성맞춤이었다.하지만 진짜 ‘영춘’은 기본적으로 무학의 성지에서 내려오는 비법서 같은 것이고 방금 형나운이 꺼낸 책은 남은 자투리 책이라고 할 수 있다.그녀는 자투리 잡서에 가까운 책으로 수련을 하는 바람에 자주 숨이 막히는 증상이 생긴 것이다.하현은 그제야 뭔가를 알아차리며 빠진 부분을 보충해서 써 준 뒤 그녀에게 책을 던져주며 말했다.“이 책은 영춘의 상반부에 불과해. 그래서 내가 상반부만 보충해 줬어. 이렇게 한다면 별일 없을 거야.”“후반부는 당신이 기회를 봐서 오매 도교 사원에 가서 문의해 봐.”“만약 내가 당신한테 준다면 오매 도교 사원이 아마 날 죽이려고 들 거야.”“아, 알겠어요.”형나운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하현이 보충해 놓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