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하민석이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하 소주, 이 일은 생각보다 후폭풍이 커.”“문제는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야.”“하 소주의 평판에 영향을 미치느냐 아니냐지.”“특히 이 중요한 시기에 국내외에 파장이 미칠 경우 항도 하 씨 문주는 이를 핑계로 당신을 상석에 앉히는 걸 거절할 수도 있어.”“그래서 지금 당장 현장에 있던 국내외 언론사 책임자들을 찾아가서 한 사람, 한 사람 매수하는 게 급선무야!”“그런 다음 그들을 우리 수군으로 만든 다음 인터넷에 하 소주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기사를 푸는 거야.”“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거지만 늦진 않았어...”하구천은 깊은숨을 내뱉었다.그의 신분으로 허리를 숙여 일일이 언론사 기자들을 찾아 나선다는 게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하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그도 당연히 자세를 낮추어야 한다는 걸 잘 안다.생각이 이에 미치자 하구천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결정하자고...”“띵!”바로 그때 곽영준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핸드폰에 살짝 시선을 돌리더니 금세 안색이 어두워졌고 굳은 표정으로 하구천을 바라보았다.“하 소주, 큰일 났어.”“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국내외 언론에 소문이 다 퍼졌어. 지금은 실시간 검색을 장악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워졌어!”“누군가 댓글부대를 고용해서 하 소주를 겨냥하고 있는 게 분명해!”“이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분명히 타깃을 정하고 공격하는 거라고!”“오매도관에서도 전화를 걸어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어.”“하 소주가 이런 사람이라면 오매도관은 당장에라도 사송란의 죽음에 대해 캐물으려 할지도 몰라.”다른 일은 몰라도 오매도관과 사송란의 죽음이라는 말이 나오자 하구천의 안색은 급격히 일그러졌다.그의 시선은 순간 하백진과 마주쳤다.두 사람 모두 사방에서 그들을 향해 빗발치는 폭풍우가 몰
항도 하 씨 가문 본가가 선택한 이곳은 처음에는 척박하고 연고가 없는 무덤이 마구 널려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그래서 결국 항도 하 씨 가문은 한번 고꾸라지고 말았다.하지만 거의 백 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이곳은 깨끗하고 맑은 풍광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 되었다.그 안에는 유유히 흐르는 시냇물 사이로 작은 정자도 있었다.대하에 현존하는 각양각색의 건축양식이 어우러진 이곳은 원명원의 복제품이라 불릴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특히 야경은 항성에서 단연 일품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온갖 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하백진과 하구천은 이 절경을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구천과 하백진조차도 항도 하 씨 본가를 드나들려면 신분 확인이 필요했다.그야말로 이곳은 항성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입구를 지나자 오래된 작은 정원이 하백진과 하구천의 눈앞에 나타났다.이곳은 바깥에서의 화려한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소박하고 정갈한 맛이 물씬 풍겨났다.하지만 항도 하 씨 가문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거대한 가문의 시작이 이 작은 정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정원 한가운데에는 회색 가운을 입은 여인들이 손을 모으며 나란히 서 있었다.소리 없이 조용한 가운데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엄숙함이 밀려왔다.이들의 실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저절로 알 수 있었다.이 밖에도 그녀들이 지키고 있는 통로 한가운데 오래된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여든 살쯤으로 보이는 노파가 정갈한 옷차림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미동이 없어서 마치 잠든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그러나 그녀에게는 우아하기 그지없는 상류층의 기운이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말할 수 없는 위엄이 사방을 에워쌌다.이 모습을 본 하구천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앞으로 나섰다.“할머니, 손자가 할머니 보러 왔어요.”하백진도 거들었다.“엄마.
노부인의 화가 한풀 꺾이는 것을 보고 하구천은 자신도 모르게 기뻐하며 노부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할머니, 일이 이렇게 되어 저도 속상해요. 저도 원래는 할머니를 찾아오고 싶지 않았다구요...”“하지만 하수진은 지금 넷째 숙부님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는 데다 저는 넷째 공주의 일마저 엮여 버렸지 뭐예요.”“나더러 폐가 사건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넷째 공주는 저한테 버림을 받았다고 비난하고 있어요...”“지금은 인터넷에 댓글부대마저 동원되었어요...”“언론사들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고요...”“종합해 보면 하수진 이 여자가 든 칼이 날 꼼짝달싹도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항도 하 씨 가문이 백 년 동안 쌓은 명성을 하루아침에 요절내고 있어요...”“할머니 손자가 스스로 해결할 방법도 있지만 그건 효과가 너무 느려요...”“아무리 해도 할머니 생신 전까지 해결할 방법이 없어요...”“그래서 오늘 이 손자가 감히 할머니한테 도움을 청하러 왔어요...”“할머니가 나서서 이번 고비만 좀 잘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할머니 생신이 끝나실 때까지 잘 기다렸다가 할머니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게요. 다시는 밖에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게요!”“예쁘고 꼬물꼬물한 손자도 많이 낳아드릴 수 있어요!”하백진도 옆에서 조곤조곤 하구천의 말을 거들었다.“엄마, 구천이는 장손이에요.”“엄마가 구천이를 돕지 않으면 얘가 곤란해질 텐데 그럼 누가 구천이한테 시집오려고 하겠어요?”노부인의 얼굴에는 조금도 미동이 없었다.그녀는 가만히 의자에 기대어 있다가 잠시 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수진이는 능력도 수완도 역량도 충분한 아이야...”“그러나 안타깝게도 수진이는 우리 항도 하 씨 가문 핏줄이 아니야. 아무리 날고 기어 봐도 수양딸일 뿐이지!”“만약 수진이가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한다면 우리 항도 하 씨 가문에서는 아마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높은 자리에 앉을 수도 있겠지...”“하지만 지금 수
노부인의 말을 듣고 하구천과 하백진의 안색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그전엔 하현과 하수진이 쓸데없는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하구천과 하백진의 진영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하문준이 돌아온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조용하고 무기력해 보이던 하문준은 돌아온 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하수진을 풀어주는 일만 했다.하수진 때문에 하구천은 연달아 뒤로 밀려나기만 했다.심지어 하문준은 하현과 하수진을 통해 일을 집행시킨 일도 있지 않은가?하백진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러게. 어떻게 하현이 금의환향한 이걸윤을 이렇게 쉽게 처리할 수 있겠어? 노국의 넷째 공주를 어떻게 이렇게 처리할 수 있겠냐고?”“원래는 불가능한 일이야!”“하지만 그들 뒤에 넷째 오빠가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하백진은 하문준이 가진 역량과 무서운 실력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구천은 심호흡을 하고 난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할머니, 그럼 할머니 뜻은...”하구천을 상석에 앉히고자 하는 것이 노부인의 뜻이었다.노부인이 하문준을 싫어하고 하문성을 편애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하지만 하구천도 노부인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왜? 이제는 대놓고 당당하게 문주인 네 숙부에게 덤벼들려고?”“잊지 마. 네 숙부는 이 가문의 문주라는 걸.”“비실비실한 네 수하들을 데리고 문주를 상대하려고 하는 것이냐?”“그걸로 누구 코에 붙이려고?”노부인이 냉랭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더군다나 난 너희들 내부의 선의의 경쟁을 막지 않아. 유능한 사람이 올라오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지. 단 어디까지나 선이란 게 있는 것이야.”“해서는 안 될 일은 하지 않는 것. 최소한의 도리 같은 것 말이야.”“문주를 암살하려고 한다는 소문으로 더 이상 주변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싶지 않구나.”하구천은 눈을 껌뻑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알겠어요.”“그
”문주 어르신.”“아버지.”하구천과 하백진이 항도 하 씨 본가를 떠나던 그 시각.하현과 하수진 두 사람은 해변에 있는 당난영의 거처로 향했다.당난영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만 하문준은 해변 별장 근처 모래사장에서 바비큐 그릴을 준비하고 있었다.하현과 하수진이 도착했을 때 바비큐 그릴 위에 생굴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향긋한 냄새를 사방에 풍기고 있었다.하현은 사양하지 않고 향긋한 냄새로 코끝을 자극하는 굴을 집어 ‘후룹'하고 들이마시듯 한입에 털어 넣었다.“섬나라에서 온 굴은 정말로 입에서 살살 녹는군요.”“섬나라 사람들은 다 별로지만 그들의 음식은 배울 점이 많습니다.”하현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 하문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상석에 앉은 자는 적들에 대해 강약을 잘 조절할 줄 알아야 하네. 이렇게 작은 것은 한입에 털어 넣고 큰 것은 군대부터 하나하나 철저히 살펴 공평하고 치우치지 않은 시야를 가져야 해.”“한 나라가 싫다고 해서 편견을 가져서는 안 돼. 반대로 한 나라를 좋게 본다고 해서 너무 치켜세워서도 안 되지.”“실사구시만이 진정 부강한 나라를 이룩할 수 있어.”하문준의 말에 하현은 빙긋이 웃으며 하수진에게 시선을 돌렸다.“잘 들었어? 지금 문주 어르신께서 당신한테 상석에 앉은 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가르쳐 주고 계신 거야.”하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리 없이 웃었다.하현이 일부러 화제를 돌리는 것을 보고 하문준도 더 이상의 얘기는 하지 않고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좋아. 야식 먹으러 왔으니 이런 헛소리는 이제 그만하자고.”“닭 날개 몇 개 더 구워지면 이제 준비는 거의 다 된 셈이구만.”하현은 옆에 있는 아이스박스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더니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문주 어르신, 요즘 바쁘시죠?”“십 년 전 일은 잘 진행되고 계십니까?”하현의 눈에 오늘 하문준이 여기에 나와 한잔하자는 걸 보니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아주
”정확히 말하면 섬나라의 신당류일 거야.”하문준은 직접 닭 날개 하나를 집어 하현에게 주었다.“다른 곳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임무를 맡겼을지도 몰라.”“하지만 자네와 섬나라 신당류가 좀 불편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은 자네한테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어.”“호위대 사람들을 같이 보내 주겠네. 호위대의 리더는 하구봉이야.”“자네는 그와 맞춰 행동하면 되네.”“이 일이 성공을 거둬 이의평을 데려온다면 하구봉은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는 셈이 되지.”“물론 자네의 은혜는 내 평생 잊지 않겠네.”하현은 눈꼬리를 가늘게 뽑았다가 잠시 후 옅은 미소를 띠었다.“문주 어르신, 다른 곳이라면 정말 거절했을지도 모릅니다.”“하지만 신당류라면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텐푸 쥬시로가 지난번 도망갔을 때 제가 직접 섬나라에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기회가 주어졌으니 놓치면 안 되죠.”“언제 출격할까요?”하문준은 웃으며 손뼉을 쳤다.그의 동작과 함께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를 뚫고 요트가 파도를 헤치며 접안을 시도했다.요트 위에는 위장복을 입은 호위대가 있었다.“군사를 움직이는 데 있어 가장 첫 번째는 신속성이죠.”“지금 출발해서 동틀 무렵에 돌아오겠습니다.”하현이 웃으며 흔쾌히 승낙하고 일어나 요트에 올랐다.하현의 모습이 사라지자 하수진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신당류를 처리하는 일은 아버지 밑에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요.”“왜 외부인을 보내셨어요?”하문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네 할머니께서 이미 손을 쓰셨기 때문이야.”“방금 들은 바로는 할머니가 천도를 내세워 하현을 24시간 내에 출국시키라고 명령하셨다더군.”“천도의 성격을 알지 않느냐? 하현이 그 시간 안에 떠나지 않으면 반드시 무슨 일을 저지르실 거야.”“하현도 대단한 친구지만 천도가 누구냐? 최고의 전투신 아니냐?!”“그는 여러 해 동안 노부인의 곁은 지켰어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처럼 하문준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잠시 후 그는 조용히 말했다.“그러니까 네 말은 하현이 천도를 능가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거야?”“잊으셨군요. 그가 직접 섬나라 음류검객을 참살했다는 걸요. 그에 놀라 텐푸 쥬시로는 줄행랑을 쳤죠.”“능력이 없으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겠어요?”하문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갑자기 껄껄껄 웃었다.“좋아, 좋아.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느냐?”“그의 실력이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나다면 손쉽게 신당류를 처리하고 이의평을 데려올 수 있을 거야.”“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좋은 일이 되는 것이고.”“할머니는 다 좋은데 자신감이 너무 넘치세요.”“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할머니는 아직도 천도 하나로 항도 하 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을 다 제압할 수 있다고 믿으시니까요.”“이번에는 시대가 변했다는 걸 똑똑히 보여 드려야 해요...”...세 시간이 흐른 새벽 4시, 섬나라.이 지역은 섬나라의 남동쪽 해안에 위치하며 예로부터 개인 영지였다.바다 건너 해변가에는 건물들이 즐비하게 위용을 드러내며 우뚝 서 있었다.구름 사이로 우뚝 서 있는 건물들은 신선의 나라에 신비롭게 떠 있는 묘령의 성 같았다.오래된 건물 외에도 현대식 건물들도 사이사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골프장, 크루즈 터미널, 공항 등 없는 것이 없었다.아마 이곳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군사기지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그러나 이곳은 실제로 신당류의 본거지였다.그 말인즉슨 군사적으로도 굉장히 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얘기였다.건물의 외곽에는 높이가 3미터에 달하는 성벽이 있었다.성벽 위에는 항상 신당류의 고수들이 주둔하며 철옹성처럼 견고히 지키고 있었다.그리고 이곳은 섬나라 안에서도 무학의 성지로 유명한 곳이었다.다름 아닌 섬나라 6대 유파 중 하나인 신당류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1대 검객 텐푸 쥬시로도 이곳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얼마 전 텐푸 쥬시로가 항
호위대 맨 앞에 서 있는 하구봉의 표정은 냉랭했다.그의 바로 앞에 서 있는 한 줄의 그림자가 뒷짐을 진 채 냉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하현!하구봉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그를 향한 두려움이 일렁거렸다.애초에 그가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은 모두 이 남자 때문이었다.하문준이 호위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더라면 하구봉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세상 밖으로 나올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이번이야말로 하구봉은 재기의 기회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하구봉은 이번에 자신이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린다면 문주 자리를 놓고 싸워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현재로선 문주 자리는 당분간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이런저런 생각이 하구봉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그의 시선도 하현에게서 자연스럽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건물 위로 떨어졌다.이 건물은 하현 일행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기껏해야 300미터 정도였다.절벽과도 같은 성벽을 타고 올라온 하현 일행 앞에 건물 가장자리에 돌담처럼 둘러쳐져 있는 벽은 더 이상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어느 날 갑자기 기습자가 철옹성 같은 성벽을 뚫고 올라올 줄은 신당류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아니면 수백 년 동안 이 신당류에 그 누구도 습격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그래서 신당류는 감히 누가 자신들을 공격하랴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감에 가득 찼던 것이다.이로 인해 그들은 눈앞에서 나타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못했다.심지어 건물 앞의 경비는 성벽에 있던 경비보다도 훨씬 적었고 적외선 순찰로 비춰 보니 행동도 확연히 느릿느릿했다.“하현, 우리가 어떤 임무를 맡고 있는지 잘 알고 있겠지?”하구봉이 전방을 주시하며 깊은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조직의 리더인 이의평을 잡아야 해.”“확실한 소식통이 그러던데 역시나 그가 십 년 전 그 일의 집행자였다더군!”“그를 잡을 수만 있다면 십 년 전 일은 똑똑히 밝혀질지도 몰라.”하현은 하구봉을 힐
”빨리 대답해!”양신이가 또 채찍을 휘둘러 양유훤을 때렸다.양신이의 눈에는 질투와 원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보다 뛰어나고 예쁜 양유훤을 미워했다.오늘 이렇게 양유훤을 혼내줄 기회를 잡았으니 양신이가 어찌 사정을 봐주겠는가?“어서!”또 한 번 채찍에 맞아 비틀거리던 양유훤은 거의 똑바로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또박또박 대꾸했다.“난 여수혁과 결혼하지 않을 거야...”말을 하면서 양유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뒤뜰을 둘러보았다.양제명이 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 양제명의 회복을 방해라도 한다면 결과는 정말로 예측할 수 없게 된다.“왜? 아직도 저 늙은이 걱정할 시간이 있어? 그럴 시간에 당신 자신이나 걱정하는 게 어때?”양신이는 양유훤의 눈빛을 보고 그녀의 마음을 바로 알아차리고 냉소를 흘렸다.그리고 양유훤에게 다가가 간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곧 누군가가 노인네한테 약을 먹일 거야.”“늙은이가 죽은 뒤 우린 그 누명을 당신한테 뒤집어씌우면 돼. 하하하!”양신이가 악마처럼 웃어젖혔다.“네가 승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인네의 말로가 그렇게 되는 거야. 이게 다 너, 양유훤 너 때문이라고!”양유훤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들, 함부로 행동하지 마. 당신들 할아버지이기도 한 사람이야!”“할아버지?”양호남은 코웃음을 지으며 포악한 얼굴로 양유훤을 향해 또 한 번 채찍을 휘둘렀다.“노인네가 이미 폐인이 되었는데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가 된단 말이야?”“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전신이지 폐인이 아니야!”“우리 양 씨 가문은 당신을 포함해 폐인은 다 버릴 수밖에 없어!”“자, 승낙을 할 거야? 말 거야? 승낙하지 않는다면 노인네는 이대로 죽을 거야!”말을 하면서 양호남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전
양유훤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르도록 그 이후에도 양호남은 손바닥을 몇 번이고 휘날렸다.이 광경을 보고 양호남이 데리고 온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들은 모두 한마디씩 거들었다.“양유훤은 정말 남한테 피해를 입힌다니까. 이전에도 시집가기 싫어 멀리 항성과 도성에 가서 우리 양 씨 가문을 곤란하게 했지!”“이제 와서 또 우리 가문을 죽이려 하다니! 절대 가만둘 수 없지!”“여영창 어르신도 이번엔 단단히 화가 나셨어. 만약 그가 우리 가문과 페낭 무맹의 모든 거래를 끊는다면 우리 집안의 손실은 어마어마할 거야!”“양유훤이 이 일을 다 책임질 수 있겠어?”“집안 큰집이라고 아주 떠받들어 줬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져서 결국 이렇게 우리 집안을 함정에 빠뜨리고 말았어!”양 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비난했다.가문의 권력을 대표하는 몇몇 장로들은 양유훤의 행동에 단단히 실망한 듯 차디찬 눈빛을 보냈다.양유훤은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양호남, 납품권은 내가 해결할 테니 사람들을 풀어줘.”“당신이?”“어떻게 해결한다는 거야? 당신 얼굴로? 아니면 몸으로?”양유훤이 두 손이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양호남은 아주 기고만장해진 모양이었다.그는 양유훤의 머리채를 덥석 잡았고 옥처럼 고운 양유훤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절대 가져서는 안 될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결국 그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입을 열었다.“이번에 당신이 남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양 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매우 기뻐했어. 당신이 큰집을 대표하여 우리 가문의 권세를 되찾고 다시 남양 3대 가문의 영광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예전과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어!”“우리 양 씨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오히려 우리 가문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어!”“이 일에 대한 해결책은 내가 이미 다 생각해 뒀어!”“당신이 여수혁한테 시집가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여 씨 가문은
”야비한 남자 때문에 여수혁에게 미움을 사다니!”“야비한 놈을 우리 양 씨 가문 데릴사위라고 감히 말하고 다녀?!”“당신 부끄러움도 몰라?!”“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양호남이 함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당신 때문에 우리 양 씨 가문이 페낭의 웃음거리가 된 걸 알기나 해?!”여기까지 말하며 양호남은 더는 못 참겠는지 양유훤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뺨을 때렸다.양호남의 말에 당황해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양유훤은 갑자기 뺨까지 맞게 되었다.조각처럼 정교한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손바닥 자국이 크게 생기더니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이를 본 양신이와 몇몇 그의 사람들은 말리기는커녕 한결같이 통쾌해하는 표정이었다.“양호남,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책임질 거니까 당신이 일부러 나서서 날 가르칠 필요는 없어.”양유훤은 밀려오는 고통과 분노를 억누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비록 그녀는 자신이 어젯밤에 한 일이 분명 양 씨 가문 둘째와 셋째에게 비난의 빌미를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양호남이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우리는 당신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뿐이야!”양호남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잘 들어. 오늘 아침 여 씨 집안사람이 우릴 찾아왔어!”“페낭 무맹 부맹주 여영창 어르신이 직접 사랍들을 이끌고 우리 양 씨 가문을 찾아와 해명을 하라고 했어!”“똑똑히 들어. 이 일은 네가 우리 양 씨 가문을 대표해 반드시 여 씨 가문에 해명을 해야 해!”“그렇지 않으면 이 일은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거야!”양유훤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순전히 나를 노리고 한 일이니 여 씨 가문은 나를 직접 찾아와 결판내면 될 일이야.”“셋째 집안과는 무슨 상관있어?”“뭐 더 할 말 있어?”양호남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여 씨 가문은 이 일 때문에 우리 양 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페낭 무맹 납품권을 끊어버리려고 한다고!
하현은 그윽한 눈동자로 양유훤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돌아가는 정세가 그렇게 복잡해? 복잡해서 날 지킬 자신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날 내쫓으려는 거고?”“아니면 내가 페낭에 남아서 당신 밥그릇이라도 한몫 챙길까 봐 그러는 거야?”양유훤은 하현을 바라보고 잠시 후 담담하게 말했다.“상황이 복잡한 게 아니라 당신이 복잡한 일에 얽히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할아버지를 이 정도로 회복시켜 준 것만으로도 당신한테는 너무 감사할 따름이야.”“다른 소소한 일은 더 이상 당신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일등석 세 장이야. 내일 아침 8시 비행기.”“내가 일을 다 처리한 후 당신한테 페낭에 한 번 더 오라고 초대하면 그때 반드시 이 은혜를 다 갚을게.”말을 하면서 양유훤은 하현 앞에 봉투를 놓으며 깊은 시선으로 하현을 바라보다 돌아섰다.양유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현은 손을 뻗어 봉투에 손을 올렸다가 잠시 후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보아하니 당신이 날 여기 두고 싶지 않은가 봐. 정말 재미있군. 내일 아침에 우리 같이 어르신 뵈러 가자구. 그때 모든 게 다 정상이라면 돌아갈게.”말이 끝나자마자 하현도 돌아서서 성큼성큼 병원을 나섰다....다음날 정오, 양 씨 가문 별채.별채 입구에 선 양유훤은 페낭 국제공항 쪽을 희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곳에는 수많은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수없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가 마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 같았다.바로 그때 양 씨 가문 별채 정문 앞에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굳게 닫혀 있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이어 짙은 녹색 랜드로버 오프로드 차량이 선두에 섰고 뒤따라온 여러 대의 차량들이 정문 앞으로 무작정 돌진해 와 정성껏 가꾸어 놓았던 화단을 으스러뜨렸다.그러자 수십 명의 건장한 남자가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나왔다.딱 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양유훤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선두에 선 남자
양유훤의 눈동자에 희미한 실망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이내 표정을 바꾸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남들은 당신을 쓰레기네 뭐네 하지만 난 원래부터 믿지 않았어.”“그런데 지금 보니 당신은 정말 구제불능이야!”“사람을 꼬시고는 이내 도망쳐 버리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군!”하현은 입가를 쌜쭉거리며 양유훤을 힐끔 쳐다보았다.양유훤의 놀림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모두들 아름다운 여자의 친절함과 관심에는 참아낼 재간이 없다고 말한다.양유훤같이 싫고 좋음이 분명한 타입은 하현이 절대 함부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그러자 하현은 애써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방금 여수혁과 당신이 하는 대화를 대충 들었는데 양 씨 가문이 지금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남양지역에서 페낭을 중심으로 양 씨 가문은 남양국 황실 다음으로 가장 뿌리가 깊은 3대 가문이야.”양유훤도 더는 숨길 뜻이 없었다.“이 씨 가문, 원 씨 가문 그리고 우리 양 씨 가문.”“이 외에도 무맹과 수많은 일류 가문들, 그리고 기타 중소 세력들이 남양에서 혼란스러운 국면을 형성하고 있어.”“수십 년 전에는 우리 양 씨 가문과 이 씨 가문, 원 씨 가문의 3파전으로 남양국은 확고한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어.”“각 세력도 이 세 가문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각축을 벌였지.”“고고한 황실은 이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고.”“우리 세 가문이 무너지지 않는 한 황실도 무너지지 않고 공고하게 군림할 수 있었던 거지.”“우리 세 가문이 계속 각축을 벌이는 한 황실의 막대한 이익을 누가 건드리지는 않으니까.”“그런데 이 모든 게 우리 할아버지가 전신이 되고 나서 달라졌어.”하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양 씨 가문이 치고 나왔군, 그렇지?”양유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비슷해.”“하지만 그때 우리 집안은 위기를 눈치채지 못했고 양 씨 가문에서 전신이 나왔으니 당연히 이 씨 가문과 원 씨 가문을 제압해야 한다고
여수혁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하현, 나 여수혁이야! 페낭 무맹 무맹주의 여 씨 가문 사람이라구!”“내 스승님은 남양 무맹 맹주야!”“나한테 당신 같은 사람은 목숨도 아니야!”“당신 지금 이런 행동한 거,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땅바닥에 널브러진 여수혁은 힘겨운 얼굴로 남은 힘을 끌어모아 내뱉었다.“퍽!”“저리 꺼져!”하현은 여수혁을 발로 차서 날려버렸다.그러자 여수혁은 벽에 몸을 부딪혔고 입에서는 봇물 터지듯 핏물이 솟구치더니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배후에 누가 있든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어.”하현은 앞으로 나가 손을 뻗어 여음채의 창백한 얼굴을 툭툭 건드렸다.“당신한테 기회를 주겠어. 잠시 문을 닫고 정리하면서 잘 생각해 봐.”“다음에도 또 이런 일로 사기를 치고 있다는 얘기가 내 귀에 들어오면 정말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땐 인정사정없이 완전히 풍비박산을 만들어 버릴 테니까!”...궁지에 빠진 여음채와 여수혁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하현은 길을 막고 있는 페낭 무맹 제자들을 발로 걷어차고 원가령을 부축하며 양유훤의 차에 올라탔다.양유훤은 사람들을 양 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병원으로 데려갔고 원가령을 응급실 침대에 눕힌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현, 오늘 밤 가령이 일로 귀찮게 해서 미안해.”“어떻게 된 건지 들어서 잘 알고 있어.”“당신이 없었다면 오늘 밤 가령이는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하현이 병원 대기실 소파에 앉자 하이힐을 신은 양유훤이 그에게 다가와 생수 한 병을 건넸다.“당연한 일을 한 걸 가지고 뭐. 마침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야.”하현은 어깨를 으쓱하고 난 뒤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하지만 오늘 밤 원가령의 일은 아마 십중팔구 당신을 노리고 한 짓일 거야.”“조심하는 게 좋아.”양유훤도 의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나 때문에 온 게 분명해.”“이번에 내가 천억 대금을 순조롭게 회수해서 적자에 허덕이
”퍽!”여수혁은 무맹 사람이고 남양 무맹의 맹주에게서 수련을 받았으며 그의 아버지는 페낭 무맹 맹주였다.뼈대 있는 집안 자손이었고 천부적인 재능을 겸비했다.그래서 그가 하현과의 거리가 좁힌 지금 한 번에 몸을 날리자 무서운 기세가 펼쳐졌다.방금 양유훤 앞에서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했던가!여수혁은 하현에게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의 계산대로라면 지금 이 주먹으로 하현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대하 촌놈! 죽어!”여수혁은 섬뜩한 미소로 쏜살같이 덤벼들었다.이런 벼락같은 기세라면 소 한 마리도 때려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이 광경을 보고 여음채와 부일민은 눈이 번쩍 뜨였다.여수혁의 대담한 기세에 깜짝 놀란 것이다.“양유훤, 봤지?!”“이게 당신이 선택해야 할 남자의 모습이야! 이 정도는 되어야 양 씨 가문 데릴사위가 되지!”“입으로만 떠드는 남자가 무슨 소용있어?”“여수혁 같은 고수를 만나면 바로 무릎을 꿇을 거야!”부일민과 예쁘장한 간호사들은 모두 비아냥거리는 기색을 띠며 하현을 주제넘은 사람이라고 비꼬았다.주변 구경꾼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왜 여수혁을 감히 도발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이 모든 게 자업자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장내에 오직 양유훤과 하구봉만이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그들은 모두 하현의 실력을 본 적이 있었다.만약 여수혁 같은 사람 한 명도 수습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하현은 헛수고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퍽퍽퍽퍽!”여수형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온몸을 덜덜 떨며 비명을 질렀다.동시에 하현은 그의 두 손을 짓밟아 부러뜨렸다.“이럴 수가?!”여음채와 부일민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여수혁 주변에 있던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들, 그리고 소위 고수라 불리는 사람들도 지금은 눈가
그러자 여수혁의 옆에 있던 여음채가 얼굴을 가리고 노기를 띠며 말했다.“하 씨! 당신 뭐가 좋은지 나쁜지 몰라?”“양유훤의 체면을 봐서라도 당신과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살길을 마련해 준 거라고!”“좋게 끝났을 때 그만해야 한다는 것도 몰라? 나중에 얼굴이 찢겨 봐야 아는 거야?”여음채의 마음속에는 불쾌함으로 가득 차올랐다.하현은 계속 자신의 뺨을 때렸을 뿐만 아니라 이빨이 부러지도록 만신창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콧대 높은 여음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그래서 하현이 도발하며 여수혁을 추궁하는 것을 보고 여음채는 도저히 화를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그녀가 특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남자가 여자의 치마폭에 싸여 쉽게 살려는 자들이다.양유훤을 믿고 호랑이처럼 위세를 부릴 뿐만 아니라 아주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모습이라니!여음채의 상식으로 어떻게 하현 같은 사람을 여수혁과 동급으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운이 좋아서 양유훤의 치마폭에 싸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하현은 벌써 수십 번은 죽었을 것이다.“좋은 게 좋은 거라고?”하현은 웃는 듯 마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잘난 척 기고만장한 여음채의 말에 할 말을 잃은 모습이었다.여음채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그렇지 않아? 똑똑히 들어. 양 씨 가문의 호가호위만 믿고 설치는 짓,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당신이 정말로 양유훤의 남자인 줄 알아? 당신이 양 씨 가문 데릴사위라도 된 줄 알아?”“당신이 정말로 양 씨 가문 데릴사위라고 해도 여자 치마폭에 싸인 남자가 얼마나 대단하겠어?”여음채는 엄청 호의를 베풀 듯이 호기롭게 훈계를 했다.“당신이 어떤 속셈이 있고 무슨 실력이 있든 뭐 얼마나 대단하겠어?”하현은 여음채가 하는 말을 더는 듣기 귀찮아서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자, 닥쳐! 쓸데없는 소린 그만해!”“재잘재잘 너무 시끄럽군!”“뭐?!”여음채는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의 입에 차가운 재갈을 물리는 것 같은 수치스러움
남양 무맹 사람들이 나섰음에도 양유훤은 전혀 체면을 세워 주지 않자 여수혁의 안색이 일그러졌다.그는 자신이 오늘 하현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하 씨, 오늘은 내가 운이 나빴군. 하지만 아직 기회는 많아!”“능력이 있으면 어디 이 여자가 영원히 당신을 비호하도록 만들어 봐!”“이 여자가 당신을 얼마나 지켜줄 수 있는지 얼마나 당신을 먹여 살릴 수 있는지 지켜보겠어!”그는 하현을 노려보다 냉소를 흘리며 돌아섰다.여음채도 한껏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외지인 남자가 여자한테 기대서 큰소리치는 꼴이라니!세상은 좁아서 언제든 어디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법이다.이 남자가 괴로워할 때가 분명 올 것이다!“거기 서!”바로 그때 침묵하고 있던 하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순간 하현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아우라가 강하게 감돌았다.비록 양유훤이 나서서 자신을 비호하도록 가만히 놔두는 것이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이긴 했지만 하현은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현재 양유훤의 처지를 거의 파악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양유훤의 어깨에 올려놓을 수 없었다.하현이 한 걸음 내디디며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의사들과 간호사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하현의 행동을 지켜보았다.그들은 하현이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했다.여수혁 같은 거물이 그를 벌하려는 걸 양유훤이 겨우 구해줬는데 뭘 또 바란단 말인가?죽고 싶어서 환장했나?여수혁은 발걸음을 뚝 멈추고 눈살을 찌푸리며 하현을 쳐다보았다.“오늘은 운이 나쁜 걸로 친다고 했는데 뭘 또 바라는 거야?”하현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은 정말 이렇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돈을 받고도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았어. 그리고 당신은 권세로 사람들을 자꾸만 괴롭히려고 해.”“날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내 다리를 부러뜨리고 무릎을 꿇게 만들려고 했어.”“이 모든 것에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