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고국왕 15년, 어느 봄날, 안남후부(安南侯府).“교지(詔旨)를 받들라!”소씨 가문(蕭家) 사람들은 이미 대문 앞에 모여있었다.소씨 가문의 노부인과 수년간 과부로 지낸 소량의 모친 양씨를 비롯한 하인들은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는 안남후(安南侯)의 식속들과 달리, 최안여는 소복을 입고 있었다.최안여는 정2품 진국공(镇国公)의 유일한 적녀(嫡女)이다.모든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백성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던 진국공 부자는 얼마 전 전장에서 함께 전사했다. 주상은 특별히 진국공의 국상(國喪)을 9일간 치르도록 윤허하였고 어제가 바로 7일장이었다.“왕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셨다. 원 안남백(安南伯) 소량은 호로관 전투(虎牢關壹役)에서 용맹하게 공성 병력을 격퇴하고 남쪽을 지킨 공을 인정하여 안남후에 봉하며 특별히 야전 지휘관에도 임명하노라…”“호부원 외랑(戶部員 外廊)의 여식 임지음은 변경을 지키겠노라 자원하여, 의술로 병사들의 목숨을 구한 훌륭한 인재이도다. 안남후가 자신의 공으로 그녀와 혼례를 윤허하여달라 간청하였는바, 과인은 깊은 고민 끝에 안남후의 큰 공을 인정하여 일부이처(一夫二妻)를 허하노라. 두 사람은 택일(擇日)하여 혼례를 올리 거라.”촤안여는 순간 주위의 공기가 삭막하게 느껴지더니 모든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들려왔다. 최안여의 부군, 소량이 장인어른과 처남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자신의 군공으로 둘째 부인을 들이는 것이었다.갑작스러운 교지에 최안여는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며칠간 잔뜩 긴장했던 가슴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아가야, 내가 미안하구나. 내 분명 이 일은 나중에 다시 논하자고 말했거늘…”양씨가 싸늘해진 그녀의 표정을 발견하고 급히 다가와 한마디 거들었다.그러나 최안여는 양씨의 손을 뿌리치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어머님께서는 제 억울함이 걱정되지만서도 임씨 가문의 낭자를 받아들일 생각에 기쁘시지요?”그녀의 반문에 양씨는 한동안 입
궁으로 가는 마차 안.단청이 분노에 차서 말했다."염치없는 집안 같으니라고. 마님… 아니, 아씨께서 그곳에 계속 계시는 것이야말로 불행한 일이 옵니다.”단주도 단청의 말에 동감하지만 그럼에도 걱정스러웠다.“진국공부엔 대감과 대감 마님이 떠나신 뒤로, 조카님이신 영공 저하와 부인만 계시옵니다. 아씨께선 어디로…” 최안여가 단주의 말을 끊었다.“어디를 가든 저 배은망덕한 자들과 함께 사는 것보단 낫지 않겠느냐?”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늘 자중하면서 능력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왔다. 또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보다 미천한 가문에 시집을 가 안위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판단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 걸린 시간은 햇수로 2년이었다.더는 숨죽이며 살지 않기로 했다.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은 과부가 된 오라버니댁과 조카였고 어떻게든 진국공부를 지켜야 했다.“단백에게 알렸으니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우린 전하를 알현할 준비만 하면 된다.”단청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단주는 점점 가까워지는 궁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아씨, 전하께서 정말 우리의 사정을 들어주실까요?"최안여가 차분하게 답했다“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공신과 부모와 형제를 여읜 고아 중 누구의 공이 더 크겠느냐? ”순간, 마차 안에 침묵이 찾아왔다. “아이를 조심하십시오!”외마디 고함 소리와 함께 거리가 혼잡해졌고 마차 한 대가 급히 돌진해 오는 아이를 피하고자 방향을 틀다가 그녀가 타고 있는 마차와 부딪힐 뻔했다.“괜찮으십니까?”마부가 마차를 멈추며 그녀를 먼저 살폈다.“송구하옵니다. 급히 방향을 틀다 보니 모두를 놀라게 했사옵니다. 주인님께서 모든 손해를 책임지시겠다고 하옵니다… 혹, 안남후부의 어느 귀인께서 타고 계시는지요?” 다른 마차의 마부가 달려와 물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시위(侍衛)는 이미 주변 상인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었다.그녀도 살짝 놀랐지만, 두 마부가 능숙하게 상황을 처리했기에 큰 문제를 삼지 않았다.“괜찮소. 급히 가야 할 곳
그 말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최안여는 사람들을 돌아보더니 말을 이어갔다.“내가 소씨 가문에 시집온 지 두 해, 집안 어른들께 효도했고 시누이를 보살피며 어떤 잘못도 범하지 않았소. 가족을 떠나보낸 것도 모자라 이런 모욕까지 당했으니, 내 기필코 소씨 가문과 인연을 끊을 것이오. 오늘부터 노부인께 드리던 약포(藥鋪)의 귀한 약재며 큰마님께서 비단 집에서 고른 의복이며 소설령 낭자의 장신구 비용들은 더는 내 혼수로 장만할 수 없으니 못 받은 돈은 안남후부로 가서 결산 받으시오.” 그간 며느리의 혼수로 호화롭게 산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어쩐지, 몰락한 소씨 가문이 여유롭게 산다고 했더니…”“며느리의 혼수를 쓰면서 며느리를 이리 못살게 굴어서야…”허심이 의관을 데리고 급히 달려와 여인을 다시 진찰하게 했지만, 최안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사람들 이목이 의관에게 집중된 사이, 그녀가 남자에게 말했다.“잠시 말씀 좀 나누지요.” 남자는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 없이 그녀 뒤를 따랐다. 둘은 마차 옆에 멈췄다.“거래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남자는 평온해 보이는 최안여에게 호기심을 느꼈지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차갑고도 냉정한 모습이 그와 잘 어울렸다.“단청, 해독약.”그녀는 남자가 거절하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아씨의 뜻을 알 수 없었던 단청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매에서 도자기 병을 꺼내, 그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냈다. “이것은 의선이 만든 해독약으로 어떤 독이든 해독할 수 있사옵니다. 지금 나으리께 필요해 보입니다.”그녀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내가 중독된 것을 단순히 보고 알아차린 것인가?’사실 남자는 그녀가 의선이 만든 약을 가지고 있는 것에 더욱 놀랐다. 의선의 약은 하도 귀해 시중에서는 거래되지도 않을뿐더러, 최안여는 여러 알을 소지하고 있었다. 순간, 남자의 뇌리로 많은 여러 생각들이 빠르게 스쳐 지났지만, 궁금증을 억누르고 담담하게 물었다.“나는 무엇을 하면
최안여의 입궁 소식에 소씨 가문 사람들은 좋은 날 손님을 맞이할 기분도 나지 않았다.임지음도 눈치껏 귀가하겠다며 일어섰고 소량은 다정한 위로를 건네며 그녀를 집까지 배웅했다. 예상외의 선전에 흥이 났던 그녀는 대문을 지키고 있는 수위에게 은자까지 내렸다.임씨 가문의 하인들도 자기네 아씨께서, 부모님 몰래 전장으로 나간 사고뭉치 아씨께서 조만간 신분 상승을 할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알 수 없는 연유로 임씨 가문의 대문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줄을 서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소란스러운 광경에 궁금증을 못 참고 살펴보았다.사람들이 건넨 축하의 말에 임씨 가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 댁 여식이 전공을 앞세워 부모 형제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가정이 있는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지요?”축하는 커녕 모욕을 주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 임지음은 분노에 휩싸였다.“여기가 뉘 댁인 줄 알고 소란을 피우는 게요!”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딸이 안쓰러웠던 온씨(溫氏)가 크게 호통쳤으나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커다란 글자가 선명하게 적힌 방문(榜文)을 펼치더니 소리 높여 읽었다. “임씨 가문의 효녀는 다른 사람의 서방을 빼앗기 위해 군공을 세운 것으로, 이는 부친의 정치적 생명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닐 지뢰다.”“변경에서 안남후와 수차례 동침한 임씨 가문의 적녀가 귀경하던 중 회임까지 했으니, 이 얼마나 감축할 일인가.”방문에 적힌 내용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특히 두 번째 방문에 적힌 진국공 부자가 전사한 와중에도 밀회를 가지다가 결국 회임까지 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내 여식은 절개를 잃지 않았을뿐더러 군공을 세운 공신으로 추대받았고 왕비마마께서도 찬탄을 금치 못하셨다. 내 여식을 모욕한 자들을 용서치 않겠다!”호부원 외랑이었던 임지음의 부친, 임지원(林志遠)이 으름장을 놓자, 사람들은 그제야 조용해졌다. 이 틈에 온씨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무 근거도 없는 소문으로 전하와 왕
서둘러 마차에서 내린 최안여는 소씨 가문으로 달려갔다.가까이 갈수록 소란스러운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소씨 가문 사람들은 양심을 팔아먹은 것이오? 어찌 이리 뻔뻔하고 몰상식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벼락 맞아 죽을 인간들이 여기 다 있었구려!”“어떤 집안에서 장인과 처남이 세상을 뜨자마자 첩을 들이는지 물어보시오. 전하께 둘째 부인을 들이는 것을 윤허하여달라 청한 것도 모자라 본처를 내쫓고 첩을 그 자리에 앉히려 하다니, 조상님들 격분이 두렵지 않소? 자손들 보기 부끄럽지 않소?” “진국공부에 우리 모자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시누를 괴롭힐 수 없네! 과부까지 된 마당에 뭐가 겁나겠소?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시누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니 그리 아시오!”진국공부의 위세를 홀로 지키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오라버니댁인 것을 알게 된 최안여는 가슴이 뭉클했다. 지아비를 잃은 부인으로, 한 아이의 어미로 겪은 압박감이 결코 자기보다 작지 않음에도 자기를 위해 싸우고 있는 올케를 보자 최안여는 든든했다.“내 오늘 오지 않았다면, 우리 시누의 혼수로 첩과 혼례를 치렀을테지. 지금 진국공부에 가장이 없다고 이리 멸시하는 게요?”“랑(琅)아, 이 자들의 얼굴을 잘 기억해두렴. 너의 고모를 괴롭힌 자들이니, 네가 자란 뒤에도 이들이 살아있다면 반드시 너의 고모 앞에 무릎을 꿇려 사죄하게 해야 하느니라. 특히 안남후, 저 배은망덕한 자는 꼭 기억해야 한다. 비열한 자이니 혹여 네가 저런 사람이 되면, 이 어미는 널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최씨 가문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양자옥(梁紫玉)의 호통 소리만 들릴 뿐, 소씨 가문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최안여는 양자옥에게 다가가 말했다. “올케…”정신없이 호통을 치던 양자옥이 최안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눈물을 떨궜다.“아가씨, 많이 늦었지요? 벼락 맞아 죽어도 모자랄 인간들이 이런 짓을 꾸밀 줄이야.”올해 여섯 살이 된 최랑이 최안여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내관이 오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소씨 가문 사람들은 최안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살짝 긴장했다. 양자옥도 놀란 눈치였다. “안심하세요.” 최안여는 양자옥의 손을 가볍게 두드린 후, 최랑을 자기 옆으로 끌어당겨 함께 무릎을 꿇고 교지를 받들 준비를 했다.“왕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셨다. 안남후가 국상 기간에 첩을 들이려 한 것은 윤리를 인간의 도리를 어긴 것이니라. 과인은 안남후의 전공을 인정하여 선례를 열었기에 진국공의 여식이 간청한 휴부는 불허하였으나 두 사람의 합의 이혼은 허락하는바, 즉시 효력이 발생하니 안남후부는 삼일 이내에 지난 두 해 동안 소비했던 진국공의 적녀, 최안여에게 은자 75만 냥을 반환하라.” 소량은 넋이 나갔다. ‘전하께 휴부를 간청해?’“미친 게 아니고서야, 가족을 여읜 여인이 지아비도 없이 살수 있을 것 같소? 받아줄 사람이 있을 것 같소?”소설령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은자 75만 냥을 반환할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가족들이 다 같이 도둑질라도 하십시오.” 최안여는 그들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만일 교지에 불만이 있거든 궁으로 가 전하께 어명을 거둬달라 청하십시오.”지난번 자기가 했던 말을 최안여가 그대로 되돌려주자, 보기 안 좋았던 노부인의 얼굴이 흉측하게 변했다.일가족을 살펴본 내관은 곧장 떠났고 소량은 그제야 큰소리 치기 시작했다.“그간 좋게 대했더니 점점 선을 넘는구려!”“교지에 적힌 대로, 시누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자기 물건을 찾아가는 게 당연지사 아니오? 안남후, 언행을 조심하시게.”양자옥이 나서서 그녀의 편을 들었다.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양씨가 입을 열었다.“영공 저하 부인…”“주상께서 서방님을 호국 대장군에 봉하셨기에 나도 이제부터 장군 부인이네. 우리의 인연을 언급하려거든 삼가시오. 우린 이제 아무 사이 아니잖소?”선을 긋는 양자옥의 말에 양씨가 살짝 민망해하더니 한마디 했다. “분명 무언가 잘못…”“기어코 나쁜 소리를 하게 만들 작정이오?”양자옥은 모
임씨 가문.“회임한 사실을 최안여가 어찌 안 것이냐?”온씨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임지음은 절망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당당하게 안남후부로 입성하려 했던 계획이 최안여 때문에 수포가 되었고 힘들게 쌓은 명성까지 잃었다.“어머니, 소녀 정말 몰랐습니다.”임지음이 쉰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그 집안 노부인이 너무 기쁜 나머지 입을 나불거린 것 같습니다. 소씨 가문의 어른 중 한 명은 견이망의(見利忘義)의 전형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소리장도(笑裏藏刀) 그 자체이니 누이가 분명 고생할 것입니다.”소설령이 마음을 품고 있는 임지음의 오라버니, 임천(林川)이 불평을 늘어놓았다.임지원은 창백한 얼굴로 말을 아꼈다.“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느냐? 너 하나 때문에 우리 가문은 명성을 잃었다.”“최안여 그 여인은 진국공부가 망한 마당에 안남후에게 붙어있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드는지 알 수가 없구나.”온씨는 차마 자기 여식을 원망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안남후에게 달려있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해야 할 것이며 누이에게도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할 겁니다.”임천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여인이 보상을 거부하면 어찌합니까? 혼수를 내놓고 가라 강요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임지음이 걱정스레 말했다. “그것까지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리라. 안남후가 우리 가문에 마음을 보이겠다고 했으니, 그의 행동을 지켜보자꾸나. 걱정 말거라. 비록 임씨 가문 세력이 강하진 않으나 숙부님과 외조부께서 네 편이 되어주실 거다.” 시름이 놓이지 않았던 임지음은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할지 고뇌했다.그때, 하인 하나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대감마님, 마님 큰일 났사옵니다.”하인의 말에 임지원은 가슴이 철렁했다.‘오늘 겪은 일로 충분하거늘, 아직 뭐가 남은 것인가?’“웬 소란이냐!”온씨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호국 대장군댁 부인께서 오셨습니다.”임지원과 온씨는 말문이 막혔다. 그들은 진국공부가 쫄딱 망했다고 여겼다. “과부가
임씨 가문은 체면 때문이라도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동생, 무슨 뜻인가? 우리가 진국공 부자를 얼마나 존경하는데, 그런 요구를 할 리 없잖소. 안남후부의 하인이 말을 잘못 전달하는 바람에 안남후도 오해한 것 같네.”임지음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돌리며 변명했다.“죽을 생각은 없나 보군.”“다음에 만날 때는 동생이라고 좀 하지 마시오. 난 낭자처럼 천박하지도 않네. 한데, 내 어찌 낭자 동생일 수 있단 말이오?”옆에서 듣고 있던 임천이 나섰다. “말이 지나치군. 누이가 이 정도로 사죄했으면 받아줄 줄도 알아야지.” “우리 시누가 뭐 그리 지나쳤는지 말해보게. 누이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도 웃으면서 참으라 할 것이오?”임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기가 이중잣대 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결국 임지원이 입을 열었다.“장군 부인과 최씨 낭자의 심정을 소관(小官)도 이해하나 이렇게 집까지 찾아와 시비를 걸 필요는 없다고 여깁니다. 제 여식은 공을 세웠지,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변경에서 병자를 치료한 공이 있고 관건적인 순간, 안남후를 구한 것도 공이지요. 안남후가 여식과 혼례를 올리겠다고 한 것도 우리 가문 입장에선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불만이 있으시거든 안남후부에 불만을 제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온씨가 얼른 말을 이었다.“같은 여인끼리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팍팍한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구태여 서로를 괴롭히며 살아야 하는지요?”백성들이 술렁이며 동요하자 임지음이 재깍 말을 덧붙였다. “처음부터 동생 자리를 포함한 어떤 것도 빼앗지 않는다고 그리 말했거늘… 그럴 생각 아니었다고 그리 말했거늘…”최안여는 그들의 변명을 예상하였기에 놀랍지 않았다. “그러시오? 어쩔 수 없어서 하필 부형의 상을 치를 때 안남후를 찾아와 난동을 피우며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라 한 것이고, 어쩔수 없이 안남후부까지 찾아가 인사를 올린 것이며, 어쩔 수 없이 회임을 빌미 삼아 첩으론 못 산다고 한 것이오?”양자옥이 싸늘하
기럭 아범은 소량이 폭발 직전인 것을 알아차렸다.그는 혼례일인 것을 되새기며 애써 분노를 억눌렀다.“안내하게.”소량은 이를 악물고 한 마디 내뱉았다.기럭 아범은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은 두 가문에게 몹시 중요한 날이다. 예정된 시간보다 늦을 시 책임을 묻는 것은 안남후부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쪽 길도 이미 다른 점포로 인해 여인들이 줄지어 있었다.이 점포도 최안여의 것으로, 여기선 옷감과 옷을 파는 점포였다. 역시나 반값에 팔고 있었다.억눌렀던 소량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계속 가거라.”소량이 서늘하게 명령했다.기럭 아범이 다급하게 말했다.“전부 여인들이오. 충돌한다면 누군가는 다칠 것이오. 혼삿날 피를 보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니…”소량이 싸늘하게 말했다. “다른 길에는 최안여의 점포가 없을 것 같으냐?”소량은 최안여의 속셈을 알 것 같았다.기럭 아범은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편, 흥겹기만 하던 임씨 가문은 혼란스러워졌다.“시간이 다 되었거늘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것이요?”온씨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임지원은 심기 불편한 얼굴로 서 있었다.“사람을 보내 알아보거라.”임지원은 수하를 보내 알아보게 했다.“어머님, 염려 마세요. 무슨 일이 생겨 시간이 지체되는 것 같습니다… 저랑 혼례 하겠다는 진심은 변함없을 겁니다.”다른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기도 했으나, 사실은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기도 했다.온씨가 손에 쥔 손수건을 꽉 잡으며 임지원에게 말했다.“대감, 사람을 보내 알아보세요.”온 태사와 해씨 부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안남후부에서 여까지 얼마나 멀다고 이리 오래 걸리는 게냐? 아무 거리나 골라서 오면 될 것을, 좋아하는 것을 하나 택해서 오겠다느냐?”온 태사의 말에 뼈가 있었다.“외조부님, 안남후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길을 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진국공부의 앞으로 돌아오느라 늦나 봅니다.”임지음도 마음이 초조했지만 어떻게든 소량을 옹호했다.
소량은 풍채가 좋은 말을 타고 안남후부에서 떠났다. 며칠 동안 아프다며 난리를 치던 노부인은 아무도 대꾸해 주지 않자 다시 기운을 차렸는지 그에게 당부했다.“안남후, 색시를 데리고 돌아올 때, 반드시 진국공부 앞으로 지나야 한다. 그 댁 여인에게 안남후부의 화려한 혼례를 보여줘야 한다. 몰락해 가는 진국공부에서 부군과 가족을 잃은 두 여인이 너의 혼례를 지켜볼 것이다.”소량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최안여에 대한 불만과 적대심이 갈수록 커졌기 때문이다. “조모님, 제가 그자들의 자존심을 짓밟겠습니다.”임지음이 소씨 가문에 들어오면, 소량도 온씨 가문의 외손서가 된다. 온 태사와 온 재신께서 과거의 일 때문에 그를 탐탁지 않아 했으나, 임지음을 봐서 소량에게 신경을 써줄 것이다.“가거라.”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영친 행렬이 북을 울리며 흥겹게 나아갔지만, 길에는 백성들이 많지 않았다. 이 시각이면 임씨 가문으로 향하는 대로에는 백성들로 가득해야 했으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세 가문의 일로 큰 소란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궁금해서라도 몰려들 것이다. 그러나 길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앞에서 가고 있던 기럭 아범도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안남후, 전방에 길이 막혔소.”“왜지?”안남후가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군악대의 북소리도 그쳤다. “백성들이 앞에 너무 몰려서 길을 내기 어렵소.”기럭 아범도 이런 일은 처음 겪는 듯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영친 행렬인데도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단 말인가?”“인원이 워낙 많아…”기럭 아범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은자 좀 주고 길을 지켜달라 하게. 저들 때문에 시간 낭비할 수 없소.”소량이 한발 물러섰다.기럭 아범은 머뭇거리더니 그들에게 다가갔다.하지만 백성들이 워낙 많기도 했고 한 점포에 열정적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제치기가 쉽지 않았다. “무슨 점포요?”소량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기쁜 혼삿날, 혼례가 끝나면 최씨 가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
소설령은 오라버니의 말에 대꾸하며 임천과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다.소씨 가문에서 의도적으로 몸을 사리는 바람에, 사흘 동안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어느덧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 혼례 당일 되었다.소씨 가문과 임씨 가문은 혼례 준비로 북적였다. 소량에 대한 소문이 어떻든 간에, 그가 이끌었던 병사들은 축하해주기 위해 참석했다. 조정의 일부 대신들도 온씨 가문의 눈치를 보며 참석했다.임씨 가문에는 온겨례뿐만 아니라, 기분에 따라 조정에 나가는 온 태사도 참석했다.재신과 태사께서 여식의 혼례에 참석해 주자, 임지원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비록 딸의 명성을 잃긴 했으나, 시댁에서 체면을 차리긴 좋았다.“장인어른, 처남, 안으로 드시지요. 지음이가 두 분이 오신 걸 알게 되면 엉엉 울지도 모릅니다.”“좋은 날 울면 안 되지, 우리 이만 갈까요?”온겨례가 진지한 얼굴로 묻자 임지원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온씨가 거들었다.“오라버니, 좋은 날 농이 지나치십니다. 조카가 숙부 얼굴도 못 보고 시집가게 할 거예요?”끔찍이 아끼는 누이가 이리 부탁을 하니 그도 어쩔 수 없었다.“농이다. 부모님 두 분 다 오셨으니, 오늘은 내 말에 힘이 없겠구나.”온 태사의 부인. 해씨가 온겨례를 살짝 쳤다.“아드님 농 때문에 아범이 긴장했잖소.”임지원은 간신히 긴장을 풀었다.“어머님, 처남 농을 듣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간만에 하는 농인데, 그냥 봐주세요.”온 태사는 진중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자네 사위가 안남후가 됐다지? 평소엔 자네가 위엄이 있게 행동하게. 우리 가문의 외손녀를 데려간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아야 하네. 어쨌든 이혼한 남자잖소.”해씨는 두 사람이 얘기를 하는 틈을 타, 자기 딸에게 말했다. “남자끼리 얘기 나누라 하고 우린 지음이한테 가자꾸나.”온씨는 그녀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해씨의 뒤에는 온씨 가문의 서녀(庶女), 온여상이 있었다.“어머님, 올케랑 두 조카들은 왜 안 보입니까?”온씨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늘 점잖고 우아하던 양씨의 기품은 온데간데없었다. 두 모녀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했다.제 발로 찾아와 분풀이 상대가 되어준 두 사람 덕분에 최안여는 기분이 한결 좋았다.그녀는 육경침이 전해준 취선각의 찬들을 꺼내며 최랑을 불렀다.요 며칠 말을 잘 들었기에 주는 상이라고 했다.양자옥은 매번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최안여가 자기를 지켜주는 것 같아 미안했다. ‘다른 가문은 몰라도 우리 가문만큼은 내가 처리해야 해. 다음엔 절대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한편, 양씨와 소설령은 집에 가자마자 소량에게 알렸다.“왜 찾아갔습니까?”바로 최안여부터 비난할 줄 알았던 소량이 의외의 질문을 했다.“노부인의 설연을 구하기 위해 약포에 많은 사람을 보냈으나 안남후부라는 연유로 거절했소. 아무도 우리에게 팔지 않겠다고 하더군.”양씨는 전처럼 자애롭고 온순한 모습으로 돌아왔다.“소자가 방벚을 찾아보겠습니다. 혼인 전까지 다시는 최안여에게 시비 걸지 마세요.”혼례 준비로 바빴던 그는 요 며칠 조정에도 나지 않았다. 온씨 가문이 아직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온겨례는 두 사람의 혼례에 참석하겠다고 말은 했으나, 그것은 온전히 조카 임지음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함이었다.전에는 최안여가 있었기에 설연을 언제든지 노부인에게 줄 수 있었지만, 최안여가 없는 지금 안남후부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노부인의 약을 끊을 순 없었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단 며칠 사이에 소량은 명예를 잃고, 처가의 압박과 가족들의 난동, 조모의 끊임없는 요구로 소량은 이미 지쳤다.이것들을 처리하는 것이 전장에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하지만 최안여 없이 자기 혼자 처리 못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 어미는 안남후가 최근 매우 지쳐있는 것을 아오. 아드님이 고집을 지나치게 부린 탓도 있소. 이 세상은 남자에게 관대하기에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새로운가 이야깃거리생길 것이고 우리도 자연스레 묻힐 것이오.”양씨가 소량을 위안했다.“어머님의 말씀,
“마님은 항상 온화하고 무해한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척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네요. 덕분에 사람들은 저를 독하고 계산적인 사람으로 여기니, 소씨 가문의 명성은 회복하겠네요.”“이건 지혜롭지 못한 수단입니다. 안남후의 모친께서 자기보다 어린 여인를 이겨보겠다고 수작 부리는 게 그리 현명해 보이지는 않습니다.”양씨의 속내를 꿰뚫는 최안여 때문에 양씨는 공든탑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시모에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우리 어머님은 너보다 연장자다!”소설령은 촌수로 최안여를 압박하려 했다.“우리 집에서 먹고 잔 주제에 무슨 염치도 없니? 감히 우리 어머님을 모욕해?”소설령은 자기가 내세운 이유가 매우 타당하다고 여겼다.최안여는 이미 예상을 한 듯 비릿하게 웃었다.“소씨 가문 사람들도 우리 아버님과 오라버니를 욕보였잖아? 난 그저 모두 앞에서 진실을 말했을 뿐이다. 소씨 가문 사람 중에 우리 집안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더냐? 누구 덕에 그간 평탄한 삶을 영위했는데, 안남후는 아버님과 오라버니의 죽음으로 전공을 세우고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날 배반했다.” “내 비록 짐승만도 못한 너희를 상대하고 있다만, 내게 소총이 있었다면 당장 너희부터 쏴 죽였을 거다. 안남후와 이혼한 순간부터 소씨 가문과 인연도 끝났다. 설연은 고사하고 멸문하는 소씨 가문을 구할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다 해도, 단호하게 거절할 것이다.”“맞습니다!”“우린 총관을 지지합니다!”소설령이 이를 꽉 물었다.“우리 가문의 생사가 네 손에 달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니 꿈 깨거라.”최안여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썩 꺼지지 않겠느냐? 설연을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냐? 사돈댁이 설연도 못 구할 정도로 가난하더냐? 임씨 가문 첫째 아드님과 혼인하기 위해 계속 임지음의 비위를 맞출 건지 제대로 고민해보거라.” 몸을 부들부들 떠는 소설령을 양씨가 황급히 진정시켰다. “얘야, 그만두어라… 안국총관께 무례를 범하면 안 된다.”최안여는 양씨에게 한마디 했다.“마
최안여의 직설적인 질문에 소설령은 듣기 불쾌했다.“안국총관까지 된 사람이 언행을 조심하는 게 어떠시오?”양씨는 소설령를 핑계 삼아 다시 연기를 했다.“설령아, 싸우지 말거라. 우린 그럴 자격이 없다. 우리 집안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잖니? 만일 약포에서 안남후부에 설연만 팔아준다면, 총관이 약포에 팔라는 명령만 내리면 너희 조모님은 연명할 수 있다. 어떤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참아야만 하느니라.”양자옥은 양씨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했다. 그래서 최안여를 자기 뒤에 숨긴 뒤 양씨에게 맞섰다.“이보게, 자네는 어찌 그리 뻔뻔하시오? 우리 시누는 자기 혼수로 안남후부를 지원하지 않는다고 했을 뿐, 약포에서 약을 안남후부에 공급하지 않는 것은 점포 주인이 안남후부와 거래하고 싶지 않았던 거요. 왜 우리 시누에게 뭐라 하시오?”양씨는 그 말에 눈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며 말했다.“장군 부인의 질책에 반박할 수 없소. 소씨 가문이 잘못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오.”순순히 인정하는 양씨 때문에 양자옥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최안여는 양씨 같은 사람들이 제일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다.“소씨 가문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부인의 병을 돌봤습니다. 그때부터 노부인께서 자기 며느리는 한 번도 자기를 간호한 적 없다며, 입으로만 걱정한다며 한탄했습니다.”“그런데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하는 것은 안남후의 혼사일 전에 상을 먼저 치를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겁니까? 뱃속의 아이도 신분 없는 아이로 태어날까 두려운 겁니까?”자신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는 최안여 때문에 살짝 당황했다.“난… 사실대로 말하마. 노부인의 병이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생활에 영황을 끼쳐,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한다.”“좋은 날 노부인께서 혼자 고통을 호소하며 괴로워할까 봐 그러시는 겁니까?”양씨의 말문이 다시 막혔다.“아니다…”“마님, 노부인께서 다리가 불편하여 처음엔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밤새 다리를 주무르며 찜질을 한 것입니다.
최안여는 대문 앞으로 걸어가 양자옥 곁에 나란히 섰다.양씨는 최안여를 발견하고 매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있는지 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안남후 잘못이 크다. 하지만 노부인께서 연세가 많으시고, 너도 알다시피 얼마 전에 병이 호전되었잖니? 어르신께서 병 치료 제대로 못 받으면 너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니?”양씨는 소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을 낮추며 명백한 잘못을 한 소량도 비판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최안여에게 통하지 않았다. “마님 말씀이 옳습니다. 궁에 들어가 전하께 이혼하겠다고 청한 것도 노부인께서 용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단호하게 불만이 있으면 궁에 들어 전하를 찾으라는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기세등등하시던 분이 어찌 편찮으실 수 있겠어요?”양씨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다.“안남후에게 화나 난 것을 알고 있다. 그날 노부인께서 말을 심하게 한 것 때문에 네가 화가 난 것을 알고 있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땐 너도 진국공 부자의 상을 치르느라 바빴고 우리도 네게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안남후에게 솔직히 말하고 상의해 보라 전했거늘…”양씨는 자기 아들에게 속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결국 내 말을 듣지 않았고 임씨 가문에 명확한 뜻을 밝히겠다는 안남후를 말리지 못해 네게 상처를 줬다. 내가 대신 미안하다. 교지가 내려온 마당에 우리가 뭣을 할 수 있겠니? 안남후에게 화가 났으나 전하를 찾아가 명을 거둬달라고 할 순 없잖니?”“네가 이리 열성적인 줄은 몰랐다. 우리에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장 집을 나갈 줄이야. 그 뒤에 발생한 일은 우리의 예상을 초월했다…”최안여는 말 없이 양씨의 말을 들었다.양씨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현혹할지 보고 싶었다.최안여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양씨는 자신감을 가졌다.“왜 모든 약포에서 설연 공급을 중지한 것이니? 그러면 안 된다. 노부인께서 설연으로 연명하셨는데 모든 약포에서 네 허락 없인 안남후부에 절대 안 팔겠다고 하더구나. 노부인께서
허심은 약곡에게 속삭였다.“모든 물건을… 반값에… 사람들이 많겠지.”약곡은 최안여가 체면 때문에 억지로 화를 참는 성격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앞으로 여기서 만나지. 치료 시일은 그대 말에 따르겠소.”“시야가 훤하고 번잡한 시내를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네요. 사흘 후에 뵙겠습니다.” 사실 왕세자도 임지음의 혼삿날 어떤 소동이 일어날지 궁금했다.“의관의 말에 따르지.”“총관께서 집안 걱정을 하는 것 같아, 본 왕이 찬거리를 미리 준비하게 했으니 영공 저하와 장군 부인께 가져다주시오.”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에게 왕세자가 한마디 더 했다.단청과 단주는 서로의 눈만 바라보았다. 취선각의 음식은 외부로 판매되지 않을뿐더러 절대 밖으로 들고 나갈 수 없었다.“저하, 감사하옵니다.”“독 안 들었으니 염려 말고 드시게. 필경 본 왕은 총관의 뛰어난 의술이 필요하지 않소?”“저하를 의심하지 않았사옵니다.”그는 한마디 덧붙였다.“안남후의 노부인께서 몸이 안 좋아졌다고 하더군. 설연이라는 약재를 찾아다닌다고 들었소. 그 댁 부인이 진국공부로 갔을 것이오.”최안여가 흠칫 놀라 물었다.“진국공부를 찾아가면 누가 약재라도 준답니까?”“한때는 그 집안 며느리였으니, 그 댁 부인의 성정과 목적은 나보다 총관이 더 잘 알듯 싶네만.”육경침은 말을 아꼈다.최안여는 한시가 급했다. 소씨 가문이 지위를 들먹이며 진국공부를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것 같았다. 단청과 단주도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씩씩거렸다.“어찌 이리 뻔뻔하단 말입니까? 온 대하에 소문이 다 났을 텐데 무슨 염치로 거길 찾아간답니까?”“인간도 아닌 자들이니,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거겠지요.”단주는 그나마 이성적인 편이었다.소매까지 걷어 올린 단청은 당장에라도 진국공부로 뛰어가 싸울 기세였다.“생각할수록 화가 납니다. 진국공부에서 교양 있게 행동하란 가르침만 안 받았어도 그날 제가 가만 안 있었습니다. 제대로 혼내줬을 겁니다.”단청의 씩씩거리는 모습에 단주가 웃음을 터트렸
“간만에 오셨는데 이 늙은이랑 담소 좀 나누다 가세요.”“…네.”대비는 두 사람을 위해 마차 두 대를 준비해 줬다. 최안여는 육경침을 만나러 가야 했다.“올케, 먼저 돌아가세요. 다른 일 좀 보고 갈게요.”“네, 조심하세요.”사실 양자옥도 집에 혼자 두고 온 최랑이 걱정되던 참이었다. 아무도 없는 틈에 양씨 가문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면 하인들도 막지 못할 것이다. 최안여를 태운 마차는 대비가 말했던 주점, 취선각에 도착했다. 보기만 해도 기품이 넘치는 주점은 손님도 가려 받는 것 같았다. 거칠고 천박한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육경침은 2층에서 여유로운 얼굴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고 허심과 약곡이 긴장된 얼굴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육경침은 그녀가 준 방서대로 약을 지어 먹은 뒤로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그것을 직접 목격한 두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진행했으면 한다.“저하,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위층으로 올라온 최안여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허심과 약곡은 최안여를 보자마자 내심 반가워하며 눈을 반짝였다. 두 사람의 수상한 눈빛에 단청과 단주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자기 주인을 보호했다.“송구합니다, 저희… 저희는 그런 의도가…”허심이 말을 더듬거리며 변명했다.“괜찮소. 궁에 들어 인사를 드리던 중에 이상한 분과 마주치는 바람에 시간을 지체하였습니다.”육경침은 팔꿈치를 자연스레 식탁에 올려놓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번이 두 사람의 세 번째 만남이다. 조용히 자리에 앉은 최안여는 진맥부터 했다.“오랜 투병으로 장기 손상이 심각하옵니다. 전에 드린 방서는 증상을 완화하나 저하의 병을 완전히 치료할 순 없습니다. 모든 증상을 종합해 보면, 저하께서 오랫동안 중독에 노출된 것으로 예상되옵니다.”“오늘도 방서와 해독약 두 알을 드리겠습니다. 지난번 저하께서 빌려주신 호심단은 한 알 더 보태어 총 두 알을 갚겠습니다.”단청은 옷소매에서 약병 두 개를 꺼내어 약곡에게 건넸다. 육경침이 천천히 입을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