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말을 들은 순간, 성혜인의 머릿속은 윙하고 울렸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 가는 순간이었다. 불과 40분 전에 문자를 받고 달려와 봤더니 시체만 남아 있는 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술집은 바로 폐쇄당하고 경찰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김양훈이 안으로 들어간 이후의 CCTV 영상은 이미 지워진 상태였다. 경찰은 결국 김양훈 본인의 과음을 이유로 삼고 피살의 가능성을 배제했다.이런 술집은 청소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지문 채취가 아예 불가능했다. 일일이 채취하는 것은 수천 명을 조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게다가 지문 위에 지문이 덮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시간이 말도 안 되게 오래 걸릴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술집의 보안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었다.병원 복도로 나온 성혜인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했다. 얼마 후 김양훈의 가족들이 도착했고 병원 복도는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최근 따라 병원에 자주 다녔던 성혜인은 절규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누르며 김양훈이 생전 자신에게 보낸 문자를 바라봤다. 조금 전 경찰 측에 넘겨 조사를 부탁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성혜인은 답답한 마음에 다시 술집으로 돌아갔다. 증거가 없기는 했지만 일단 사람이 죽었으니, 주변에는 폴리스 라인이 있었다. 유흥을 즐기러 온 사람들은 빼도 박도 못하고 갇히게 되었다.그렇다고 해서 경찰들이 조사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의사도 알코올중독이라고 한 마당에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김양훈에게 해를 가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연락한 적 있는 사람인 성혜인은 사망 시간에 술집 밖에 있었으니 역시 혐의가 없었다.술집에서 헤매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겼다. 성혜인은 술집 사장에게 CCTV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경찰 조사를 받느라 긴장한 사장에게서 만족스러운 대답은 듣지 못했다. 현장에는 또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먼저 밖으로
반승제는 자료를 확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길가에 서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성혜인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걸 봐서는 문제가 생긴 듯했다.성혜인의 뒤로 보이는 술집 앞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중에는 분주하게 오가며 사진 촬영을 막는 경찰도 있었다. 술집 주변에 둘린 노란색 폴리스 라인은 어두운 밤거리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반승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심인우에게 물었다.“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 줘.”심인우는 반승제가 관심을 가질 줄 몰랐다는 듯 잠깐 멈칫하다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 나서 반승제에게 통화 내용을 전달했다.“대표님, 이곳에서 알코올중독으로 사람이 죽었답니다.”‘그게 페니랑 무슨 상관이길래 이 시간에 밖에서 서성거리는 거지?’온시환은 반승제의 곁에 앉아 그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온시환의 입에서 ‘페니’라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반승제의 시선은 줄곧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병원 측과 통화하고 있던 성혜인은 반승제의 차가 바로 앞에 세워져 있는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차 안에서 반승제는 조금 전 다른 술집 앞에서 만난 유도현과 연관된 일은 아닌가 생각하다가 돌연 고개를 돌리며 덤덤하게 말했다.“심 비서, 출발해. 회의가 시작하겠어.”1초 전까지만 해도 온시환은 반승제가 남자로서의 모든 처음을 받친 성혜인에게 남다른 감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신체적 접촉도 일어난 적 없는 윤단미에 비해 특별하게 여기는 것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성혜인이 난감한 처지에 빠진 게 분명한 지금, 조금 전과 다름없이 차갑게 돌아서는 걸 보면 잠깐 착각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온시환은 시선을 거두며 피식 웃었다.“승제야, 나 궁금한 게 있어. 너 페니 씨랑 자고 나서 다시 그때를 떠올린 적 있어?”반승제는 자료를 보던 동작 그대로 굳어버렸다.차는 어느덧 온시환의 별장 밑에 도착했다. 반승제는 창밖을 힐끗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도착했으니까 꺼져.”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차
성혜인은 하룻밤 새에 병원에 수도 없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알코올중독밖에 없었다. 경찰 측도 최선을 다하기는 했지만, CCTV 복구가 안 되는 관계로 유가족들에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라고 했다.경찰도 반쯤 포기한 일이기는 하지만 성혜인은 도무지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번 일이 김양훈이 그녀에게 알려주려고 했던 일과 연관 있는 것 같았다.성혜인은 부랴부랴 김양훈의 아내를 만나러 갔다. 김양훈은 꼰대스러운 성격과 별개로 아내와 사이가 아주 좋은 가정적인 남편이었다. 성혜인도 한때 그의 아내와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는 했다. 하지만 작은 다툼이 있었던 뒤로부터는 사이가 서먹해져서 별로 만난 적 없다.병원으로 돌아와 보니 김양훈의 아내는 아직도 복도에 앉아 울고 있었다.“아주머니, 아저씨 요즘 어디 어디 갔었는지 알아요?”그녀는 울음을 멈추고 잠깐 생각에 잠긴 듯했다. 짧은 몇 시간 사이에 훌쩍 수척해진 모습이었다.“얼마 전 건강검진에서 여러 문제가 나온 뒤로는 줄곧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술도 끊었어. 그런 사람이 알코올중독이라니 말도 안 돼...”그녀는 입을 막고 끙끙 소리를 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평소에 딱히 다니는 곳도 없어. 매일 회사 아니면 집이었으니까. 오늘 밤 집에 돌아와서는 이상하게 불안해 보인다 했더니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회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외출하더라고.”그게 마지막 외출이 될 줄은 몰랐겠지만...친척의 어깨에 기댄 그녀는 울음이 완전히 터져버렸다.성혜인은 덕분에 결정적인 단서를 얻었다. 김양훈은 오늘 회사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한 바탕 고민하고 난 뒤 그녀에게 연락한 게 분명했다.‘회사에서 도대체 뭘 발견했을까?’SY그룹에서 누군가를 놀라게 할 만한 일을 할 사람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소윤과 성한이 떠올랐다. 성휘가 자리를 비운 회사에서 둘이 과연 무슨 짓을 저릴렀을지, 성혜인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성한은 반반한 생김새와 다르게 검은 속내를 갖고 있었다. 평소 경영에 능한
성혜인은 곧바로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 들고 성한의 얼굴에 뿌렸다.“이거 뭐야?!”성한은 눈을 꼭 감은 채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눈물은 주체가 되지 않고 줄줄 흘러내렸다.성한이 더러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진작에 알아차린 성혜인은 회사에 올 때마다 호신용품을 하나씩 들고 왔다. 드디어 성한의 속박에서 벗어난 그녀는 의자를 쳐들고 사정없이 내리쳤다.퍽!성한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자빠졌다. 하지만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화가 풀리지 않았던 성혜인은 이번에 남자의 가장 예민한 부위를 노리고 발로 걷어찼다.“악!!”성한의 비명이 귀를 찢었다. 안색은 통증으로 인해 완전히 창백해졌고, 식은땀은 온몸을 흠뻑 적셨다. 견디지 못할 통증에 차라리 정신이라도 잃고 싶은 지경이었다.이때 문밖에 있던 소윤이 이상을 눈치채고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떠는 성한을 보고서는 눈을 크게 뜨고 털썩 주저앉았다.“성혜인! 너 우리 한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성휘가 회사 안에서 대놓고 추태를 부리는 것을 보고 성혜인은 진작에 밖에 누군가가 지키고 있겠거니 했다. 그 사람이 보디가드가 아닌 소윤일 줄은 몰랐지만...소윤은 벌떡 일어나 성혜인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매서운 눈빛으로 손을 올려 성혜인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성혜인은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뺨을 때렸다.소윤은 자신의 볼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네가 감히 나를 때려?”“성한이 무슨 짓을 할지 뻔히 알면서 밖에서 지키고 서 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성혜인만큼 젊고 힘 있지 못한 데다가 성한이 바닥에서 몸부림치고 있어서 마음이 급했던 소윤은 반격은커녕 자기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성혜인 너 딱 기다려. 만약 한이한테 문제가 생긴다면 넌 꼼짝없이 감옥에 가게 될 테니까.”성혜인은 태연하게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그러자 녹음 중이라는 화면이 떴다. 그녀
소윤은 단 한 번도 자기 아들이 생식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 없었다. 장가를 못 가는 건 둘째 치고 아이를 못 가진다는 생각에 그녀는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혜원이는 몸이 아프고, 한이는 생식 능력을 잃고... 이게 다 성혜인 때문이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든 복수할 거라고!’“한아...”소윤은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렸다. 생식 능력을 잃었다는 것은 남자에게 가장 큰 충격이니 말이다.성한은 안색이 창백한 채로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진통제를 맞고 나서도 조금 전의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봐도 온몸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성한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머릿속에는 성혜인을 상대할 여러 가지 방법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소윤마저 겁먹을 정도로 무서운 표정이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야수와도 같았다.“어머니, 저 그년을 꼭 죽이고 말 거예요. 가장 더럽고 잔인한 방법으로 죽일 거라고요!”소윤은 눈가가 빨개진 채로 성한을 꼭 끌어안았다.“그래, 한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엄마는 언제나 너의 옆에 있어. 흑흑흑... 이게 다 내가 복 없어서 그래.”병실 밖으로 나온 소윤은 허진에게 전화를 걸어 몰래 성한의 상황 전했다. 허진은 놀란 듯했지만 일단 진정하고 소윤을 위로했다.“윤아, 성혜인은 한이한테 맡겨서 직접 처리하도록 해. 지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건 성휘가 깨어나는 걸 막는 거야.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돼. 그러니 얼른 방법을 생각해 봐.”소윤은 허진의 말을 듣자마자 집 나갔던 이성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지금은 SY그룹을 삼켜야 할 때지, 속상하다는 핑계로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소윤은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가 성한의 손을 꼭 잡았다.“한아, 우리가 SY그룹을 얻기만 하면 성혜인을 너한테 넘길게. 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뒷감당해 줄 테니까 마음대로 해도 좋아. 엄마가 미안해, 이번 일은 엄마가 생각이 짧았어.”소윤은 다른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
BH그룹 안으로 들어가자, 안내 데스크에 있는 최효원이 보였다. 성혜인을 발견한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가 스쳐 지나갔지만, 곧 콧방귀를 뀌며 곁에 있던 다른 직원에게 자랑하기 시작했다.“그래, 경헌 씨가 2억이나 주고 사줬다니까. 차 한 대 나올 값이라 아까워 죽겠어.”최효원이 임경헌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최효원의 자랑을 들은 직원들은 저마다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BH그룹의 안내 데스크에 설 수 있을 정도면 다들 용모가 아주 뛰어났고, BH그룹의 임원과 만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러니 대표 반승제의 사촌 동생과 만나는 최효원은 벌써 사모님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임경헌은 또 여자친구인 최효원에게 호탕한 씀씀이를 보였다. 몇억짜리 목걸이부터 마세라티까지 거침없이 선물하니 말이다. 덕분에 최효원은 공주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최효원은 또 팔찌를 자랑하며 말했다.“나랑 경헌 씨는 순수한 사랑이야. 내가 누구처럼 여기저기 다 흘리고 어장관리 하지는 않잖아? 사람이 말이야, 욕심이 적당해야지. 안 그러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나의 이런 순수한 생각 때문에 경헌 씨도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최효원은 성혜인을 바라보며 이 말을 했다. 그녀는 미래 반씨 집안에 시집갈 몸이었기에 성혜인이 더 이상 반씨 집안과 엮이지 말았으면 했다. 지난번 반희월에게 그런 문자를 보냈으니 반승제가 마음이 있다고 해도 이뤄지지 못하겠지만 말이다.최효원은 성혜인의 뒷모습을 향해 콧방귀를 뀌더니 자랑을 계속했다.성혜인은 최효원이 자신을 저격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못 들은 척했다. 지난번 일에는 그녀의 잘못도 있고, 또 아플 때 보살핌을 받은 것도 있기 때문이다.최효원은 성혜인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은 윤단미가 회사로 찾아온 날이다. 성혜인과 윤단미가 반승제를 사이에 두고 만나는 장면이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디자이너 주제에 꿈도 크네, 하하.’임경헌과 만나기 시작한 뒤로 최효원은 아
성혜인은 사무적인 태도로 앞장섰다.“최근에 시공팀에서 문제가 조금 생겼어요. 예전에 보셨던 설계도의 이쪽 구역을 조금 바꿀까 해요.”뽀얀 손가락으로 기둥이 놓여야 했던 곳을 짚었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하게 설계도를 들여다볼 뿐 윤단미에게는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성혜인이 나타나는 순간, 윤단미는 눈을 가늘게 떴다.‘선미가 말한 그 디자이너인가?’확실히 눈에 띄는 외모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윤단미는 반승제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때마침 반승제는 성혜인이 건넨 설계도를 받고자 손을 들었다.허공에 홀로 남은 윤단미의 손은 괜히 머쓱해 보였다. 윤단미는 민망한 듯 손을 거두며 성혜인을 노려보았다.성혜인은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반승제의 대답을 기다릴 뿐.반승제는 한 손으로 설계도를 들고 한 손은 검은색 사무용 책상을 짚고 있었다. 공기에 맞닿은 손목이 얼음처럼 차가워 보인다. 볼펜을 쥐고 있어 튀어나온 핏줄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휴일이 되면 근력 운동에 매진하는 게 분명하다.사실 반승제의 시선은 줄곧 설계도가 아닌 성혜인을 향하고 있었다. 성혜인이 끝까지 윤단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자 미간이 좁아졌다.“시공팀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데?”“제가 설계한 조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반드시 없애야 하는 기둥이 있어요. 이쪽에서 들어오는 일조량이 많아질 거예요.”보통 디자이너들은 조명까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미술 전공을 한 성혜인은 달랐다.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바로 조명이다.그래서 까다로운 고객도 성혜인이 설계한 집을 모두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다.반승제가 대답하기도 전에 윤단미가 입을 열었다.“승제야, 나 현장에 가볼래. 나도 그림 그리잖아. 현장 가보면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를 거야. 나도 이번 설계에 참여하고 싶어.”윤단미는 반승제의 팔뚝을 귀엽게 껴안았다.반승제 역시 들고 있던 설계도를 내려놨다.“페니, 그래도 돼?”그의 시선은 여전히 성혜인을 향했다. 그녀의 대
입구에 서 있던 윤단미는 이 장면을 보지 못했다. 봤어도 반승제의 고의성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여자에게 늘 차가운 반승제가 이런 유치한 방법으로 플러팅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밖으로 나가 사무실 문을 닫자마자 윤단미의 시선이 성혜인의 얼굴로 향했다.처음에 봤을 때 놀랄 정도로 예쁜 외모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윤선미가 주의를 준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이 여자가 꼬리 치려는 마음을 먹었더라면 반승제 역시 적어도 하룻밤을 보내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윤단미는 근처에 있던 윤선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윤선미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줄곧 반승제의 사무실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밖으로 나온 윤단미와 성혜인을 발견하는 순간 눈을 반짝였다.“언니, 무슨 일이야?”“승제가 가서 집 보고 오래. 내 아이디어 좀 추가하고 싶거든. 너도 같이 가자.”윤선미는 기뻐하면서도 질투가 났다.가서 집을 보라고 할 정도면 이미 윤단미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 아닌가.윤선미는 옆에 서 있던 성혜인을 쳐다봤다. 화풀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들었어요? 대표님의 디자이너잖아요. 어서 안내하지 않고 뭐 해요?”성혜인은 굳이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아 정중히 말했다.“이쪽으로 오세요.”윤단미는 그제야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성혜인의 뒤를 따랐다.윤선미는 살짝 뒤처져 걸었다. 질투에 몸서리칠 지경이었다. 자기도 반승제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정확히 말하면, 반승제 같은 남자를 싫어할 여자는 없다.반승제처럼 잘생긴 남자와는 몇 마디만 섞어도 기쁠 것이다. 하지만 윤단미가 돌아온 이상 그럴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을 것이다. 혹여 누군가 윤단미에게 일러바친다면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성혜인은 1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안에는 세 사람뿐이었다. 윤선미는 성혜인의 심기를 건드리고자 보란 듯이 반승제를 언급했다.“형부가 언니랑 결혼하려는 생각인가 봐. 집 설계에도 참여하라고 하는 거 보면 몰래 웨딩드레스도 다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
한편, 설연주는 눈이 가려진 채로 설우현 앞에 끌려왔다.오늘 단지 슈퍼에 가서 음식이나 좀 사려고 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다. 도대체 누가 잡아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 귀 옆에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설우현은 의자에 앉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설연주의 얼굴이 굳어지며 본능적으로 ‘우현 오빠’라고 부르려다 멈칫했다.하지만 설우현이 입을 떼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네가 사는 그 집 사실 해커가 소유한 거더군. 그런데 그 해커가 혜인이 납치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어. 내가 그놈을 잡았을 때 끝까지 배후를 자백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네가 바로 그 배후였구나, 설연주.”설연주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설우현이 명확한 증거를 찾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이제 자신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설연주는 고개를 푹 떨구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설우현은 그녀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고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머리카락이 잡힌 설연주는 두피에 전해지는 고통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이제 다 알아낸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설연주는 바닥에 나뒹굴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설연주, 가족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었어.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우현은 짜증이 치밀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평소 여자는 절대 때리지 않았지만 설연주가 저지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듣자 하니 너 두팔과 어울려 다녔다더라. 마침 그놈도 지금 널 찾고 있더군.”설연주는 몸이 떨리며 순간 얼어붙었다. 혹시 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보내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널 두팔에게 넘길 거야.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두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설강민을 내려놓으라 지시하고 홀로 걸어갔다.설우현은 이미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설강민이 들어오자 설우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두팔은 설우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설우현이 혼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설강민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설우현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두팔의 부하가 설강민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이미 탈진 상태가 된 설강민은 그대로 바닥에 개처럼 엎드렸고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형, 형... 나 구해줘요...”미약한 그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설우현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돈 박스들을 세어보라고 지시했다.두팔은 홀 한가운데 앉아 자신의 공간에 가득 쌓인 박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박스 앞에서 돈을 세며 확인하고 있었다.“설우현, 듣자 하니 설씨 가문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있더군. 설연주라고 했던가?”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자와는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두팔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진연주였어. 내 밑에 있을 때 아주 말 잘 듣던 아이였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습도 제법이었는데, 내가 맛보기도 전에 설연주가 되어 설씨 가문으로 가버렸지. 너희 설씨 가문에서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만.”두팔은 조롱 섞인 미소를 띠며 다리를 옆 의자에 올려놓았다.“연주는 한때 내 충실한 개였어. 그래서 연주를 위해 특별히 여러 개의 목줄을 맞춰놨지.”두팔이 손뼉을 치자 부하들이 맞춤 제작된 목줄을 가져왔다. 목줄은 검은색, 은색, 금색으로 각각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설우현은 이를 보며 곧장 주변 몇몇 사람들의 취향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런 조련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한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설연주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였다.이윽고 설우현의 미간이 잔뜩
설우현은 살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설연주를 상대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다음 날, 설연주는 그대로 별장에서 쫓겨났고 도우미가 다가와 정중하게 설우현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그렇게 일주일 동안 설연주는 설우현을 보지 못했다.오히려 설강민의 소식은 계속하여 들려왔는데 현재 돈을 다 써버려 또 두팔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겁도 없이 독촉하러 온 사람들까지 때렸다는 것이다.두팔 쪽에서는 당연히 설강민의 행패를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고 현재 설강민은 이미 두팔에게 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이제 그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설연주는 설준석의 별장에서 지내며 계속하여 그쪽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저녁이 되고 설준석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돌아왔다.음식이 나오자마자 설준석은 두팔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아들이 100억이나 달하는 빚을 졌으니 당장 돈을 들고 오라는 협박 전화였다.물론 설준석도 두팔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지만 꽤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플로리아 상층부의 목적지는 주로 지하 도박장으로 하룻밤에 벼락부자가 될 수도 있고 즉석에서 돈을 전부 잃어 취직하게 될 수도 있다.물론 지하 도박장에서도 돈을 빌릴 수 있지만 그곳에는 정해진 조건이 있었다.하지만 두팔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에는 조건이 없었고 대신 갚지 않으면 손과 발을 모두 잃고 모든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두팔이 운영하는 무리는 전부 극악무도한 양아치들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천 만 정도로 만약 일가를 독촉하는 데 성공한다면 단번에 몇십억은 벌 수 있다.전화를 받고 화가 치밀어 오른 설준석이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설강민은?”그러자 휴대폰 건너편에서 설강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저 사람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부러뜨릴 거란 말이에요. 빨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