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은 주방으로 가서 요리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냉장고에서 얼음팩도 꺼냈다.하지만 당시연은 너무 피곤했다. 소파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얼굴에 차가운 감촉이 닿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원진의 진지한 표정을 마주했다.그의 눈에는 걱정, 아쉬움, 그리고 무언가 깊숙이 감춰진 감정이 담겨 있었다.당시연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원진이 자신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원진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 순간 더 진지하게 변한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얼마간 당시연의 얼굴에 얼음을 대고 있던 원진이 물었다.“시연 누나, 정말 저를 돌려보내실 건가요?”당시연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제야 그녀는 그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 알았다.원진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후로 그는 수없이 그녀와 가족들 간의 다툼을 목격해왔다. 아마 그는 늘 불안 속에서 지냈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했을 것이다.당시연이 눈을 뜨자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원진의 손이 점점 더 불안하게 움켜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소년의 눈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꼬리를 흔들며 애원하는 강아지 같았다.당시연은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늘 원진의 성적만 신경 썼지 그의 마음 상태는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한 번도 도시의 높은 빌딩을 본 적 없는 산골 소년이, 갑자기 낯선 세상으로 끌려왔다면 얼마나 무서웠을까?그제야 당시연은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를 키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그녀는 원진을 끌어안았다.원진은 그녀보다 키가 훨씬 컸지만 이 순간에는 몸을 최대한 낮추어 그녀의 어깨에 기대었다.당시연은 위로하듯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원진을 안고 있는 동안 당시연은 그가 꽤나 건장해졌다는 걸 느꼈다. 처음 산속에서 그를 봤을 때에도 그를 안아본 적이 있지만 그때는 마치 작은 고슴도치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사람을 밀어냈었다.그때 당시연은 이 아이가 너무 말라서 마음이 아팠다.이제 원진의
당시연은 원진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의 얼굴을 보다가 원진이 정말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쫓아다니는 것도 당연하다고 느꼈다.그녀는 웃음이 나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뚝, 그만 울어. 열일곱 살이나 먹고 우는 게 말이 돼. 누나가 생일 선물 사왔어.”당시연은 원진을 살짝 밀어내고 발치에 놓여 있던 가방을 열었다.가방 안에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 상자가 있었다.당시연은 선물 상자를 원진 앞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열어봐.”원진은 눈가가 아직도 빨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차분히 소파에 앉아 선물 상자를 받았다.“고마워요, 누나.”그 말이 끝나자마자 당시연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케이크가 도착했다는 택배 기사의 전화였다.당시연은 집 안에서 문을 열어 두고 택배 기사가 그 층으로 올라오자 밖으로 나가 케이크를 받아왔다.1호 사이즈의 작은 케이크였지만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그때 원진은 이미 선물 상자를 열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한정판 농구화가 들어 있었다.당시연은 설명을 덧붙였다.“이수희 선생님께서 네가 체육 시간에 농구를 좋아하고 또 잘한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너한테 신발을 사줬어. 이걸 신고 농구하러 가.”원진은 이제 브랜드에 대해 알 만큼 알게 되어 이 신발이 비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목소리가 잠기며 짧게 대답했다.“네.”당시연은 케이크를 탁자 위에 놓고 숫자 1과7 모형의 초를 꽂은 후 불을 붙였다.“소원 빌어봐. 지금 좀 늦었지만 그래도 의식은 치러야지.”원진은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일 분이 지나도 눈을 뜨지 않자 당시연은 웃음이 나왔다.“소원이 그렇게 많아?”“제가 너무 욕심이 많은 건가요?”“괜찮아. 내가 사준 케이크니까, 네가 원하는 만큼 소원 빌어도 돼.”원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네.”두 사람은 함께 케이크를 나눠 먹었다.당시연은 너무 피곤해서 지금까지 겨우 버티고 있었다.“누나, 가서 좀 자요. 내가 다 정리할게요.”“그래. 나 진짜
당시연은 업무에서 문제를 겪고 있었지만 원진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그녀는 손에 든 술잔을 가볍게 흔들며 물었다.“학교에 친구는 있어?”“있어요, 제 짝이요.”“그럼 다행이네. 너 학교에 적응 못 할까 봐 걱정했는데 반 애들이랑은 잘 지내?”당시연은 원진과 이런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예전엔 그저 그에게 충분한 돈을 주는 것만으로도 잘 챙겨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의 마음이 이렇게 여리다는 걸 알고 난 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었다.“네, 다들 잘해줘요.”당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기댔다.이곳은 그녀가 가장 자주 찾는 술집이었다. 오늘도 술을 두 잔 더 마셨다.“예전에 오산 마을에서 너 처음 봤을 때는 정말 말랐었지. 하지만 눈빛은 강렬했어. 나를 경계하는 그 모습이 꼭 작은 늑대 새끼 같았어. 그런데 해가 될 것 같진 않더라. 그래서 내가 너를 후원하겠다고 한 건 네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야. 솔직히 나도 학생이었으니까 먼 미래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진아, 하지만 나는 시작한 건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네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널 버리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 넌 나를 믿으면 돼, 알겠지? 지금 내 일도 바빠서, 내일 비행기를 타야 해. 아직 해외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거든. 사실 네가 보낸 메시지를 못 본 게 아니야. 단지 시차가 너무 커서 네가 밤에 잘 때 내가 연락하면 방해될까 봐 조심했던 거야. 그러니까 학교에서 즐겁게 지내. 이제 네가 공부 잘하는 것도 안 바랄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기만 하면 돼.”“이번 학기도 곧 끝나잖아. 내가 다시 돌아오면 아마 너 고3 생활도 한 달은 지났을 거야. 생각해 보면 너랑 오래 같이 있어 주지 못한 것 같아. 하지만 이번에 돌아오면 다시는 떠나지 않을 거야. 네가 고3 졸업할 때쯤 나도 지도 교수님과의 연구 과정이 끝날 거니까, 그때부터는 학교에 남아서 강의할 수 있을 거야.”당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당시연은 턱을 괴고 멀리 보이는 녹색 식물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진아, 나중에 나는 정원이 있는 집을 사고 싶어. 사계절 내내 꽃이 피는 식물들을 많이 심어놓고.”원진은 손바닥이 여전히 간질거려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때도 누나랑 저랑 같이 살아요?”“물론이지. 내가 지금 교수님이랑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꽤 수익성이 좋아. 비록 조금 힘들긴 해도 프로젝트 하나당 보너스가 크거든. 2년만 지나면 집 살 수 있을 거야. 그때쯤이면 넌 아직 대학 졸업도 안 했을 텐데.”당시연의 눈은 약간 술에 취한 듯 반짝였지만 말할수록 더 큰 기대감에 젖어 있었다.원진도 기분이 좋아졌다. 적어도 당시연의 짧은 계획 속에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게다가 그가 대학을 졸업하려면 아직 5년이나 남아 있었다.원진은 안도하며 테이블에 놓인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그런데 그때 당시연이 살짝 몸을 기울이며 그에게 기대왔다.원진의 손이 떨리며 들고 있던 컵을 놓칠 뻔했다.당시연은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고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아까 먹은 과일 조각이 살짝 묻어 있었다.그는 몸을 기울여 손가락으로 그 과일 조각을 살짝 떼어냈다.그러나 멀리서 본 김성진의 눈에는 원진이 당시연을 몰래 키스하려는 것처럼 보였다.더는 참을 수 없었던 김성진은 큰 걸음으로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원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에게 술을 퍼부었다.차가운 술이 온몸에 번지자 당시연도 깜짝 놀라 깨어나 김성진을 바라보았다.김성진은 가슴이 심하게 들썩이며 분노에 차 있었다. 심지어 원진의 옷깃을 잡고는 주먹을 들어 그를 치려 했다.그러나 원진은 그를 잡아채어 곧바로 테이블 위로 넘겨버렸다.허리가 부딪친 김성진은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가 힘겹게 일어서려 하자 이번에는 당시연이 원진의 앞에서 그를 막아섰다.“그만해!”김성진은 화가 나서 거의 피를 토할 것 같았다.“이 더러운 것들!”당시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원진이 주눅 들수록 당시연은 점점 더 화가 났다.김성진은 원래 사과할 성격이 아니었고 애초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떳떳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기에 더욱 그럴 리 없었다.술집 직원이 CCTV 영상을 가져와 천천히 재생했다. 방금 전 장면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니 당시연과 원진의 행동은 너무도 평범했다. 최소한 영상에서는 아무런 문제를 찾을 수 없었다.김성진이 왜곡해서 본 장면도 CCTV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다.그 순간 김성진의 눈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고 그는 곁눈으로 당시연의 반응을 살폈다.당시연은 영상에 별다른 게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비웃음을 지었다.김성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더니 말했다.“시연아, 이제 그만하고 우리 다시 시작해.”두 사람은 여러 차례 헤어지고 다시 만났지만 이번 이별이 가장 길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원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이 굳어지며 당시연을 바라보았다. 당시연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면 그는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김성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많이 생각해봤어. 나 소유진의 고백도 받아준 적 없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 진심이야. 우리 이제 그만 싸우고 다시 만나자. 너랑 다시 시작하면 바로 결혼할게.”당시연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김성진, 네 머리 좀 제대로 검사받아봐.”김성진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우리 고등학교 때 기억나? 네가 수업 중에 질문에 답하려고 일어섰을 때 반 친구들이 다 떠들었잖아. 우리 둘이 서로 좋아한다고 말이야. 그런데 우리는 그때까지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어. 대학 때 내가 정말 헤어지려고 했던 건 맞아.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쉽게 끝낼 수가 없었어. 그건 우리가 함께한 진짜 추억이잖아. 네가 다른 사람과 함께할 거라는 생각만 해도 견딜 수가 없어. 나도 유치하고 성숙하지 못했어. 그래서 네가 불편했을 거 알아.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라는 게 원래 서로 맞춰가며
당시연은 과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원진의 불안한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녀가 반응했을 때는 이미 원진이 그녀의 손을 놓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당시연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어리둥절해서 그를 불렀다.“진아?”하지만 원진은 점점 더 빨리 걸었고 곧바로 문밖으로 나가버렸다.당시연은 급하게 그를 쫓으려 했다.“진아!”겨우 한 발짝 내디디자 김성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시연아, 동의한 거야?”당시연은 그의 손을 홱 뿌리치며 인상을 찌푸렸다.“뭐에 동의했다는 건데?”“다시 사귀는 거.”“사귀긴 뭘 사귀어. 그냥 네 말이 맞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고등학교 때는 정말 좋았지. 하지만 우린 이미 대학도 졸업했고 사람은 과거에만 매달려서는 안 돼.”당시연은 그 말을 남기고 곧바로 원진이 간 방향으로 뛰어갔다.이미 원진이 계속 불안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에게 아버지의 존재도, 김성진의 존재도 그를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자극했다.당시연이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이미 원진은 보이지 않았다.한편 홀로 남겨진 김성진은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의 눈에는 어둠이 가득했고 마치 중요한 결정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당시연은 차에 올라타고 원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 녀석, 이제 성질까지 부리는 건가?’차를 몰고 근처를 몇 바퀴 돌아봐도 원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당시연은 밤 12시가 넘도록 그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파트 입구에 도착해 보니 원진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원진은 두 팔로 무릎을 감싸안고 있었고 이제 키가 아주 컸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보였다.당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려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원진의 버림받은 듯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생각해 보면 그가 학교에서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는데 친구가 많을 리 없었다. 이곳 제원에는 그의 가족도 없었다. 어디 갈 데가 있었을까?아마 주변을 한 바퀴 돌
원진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이 일의 주범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그는 소식을 전해준 친구에게 짧게 고맙다고 말하고 다시 고개를 숙여 문제지를 풀기 시작했다.반 친구들 대부분은 원진을 좋아했다. 성실하고 노력하는 데다 잘생긴 사람이니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그의 존재가 누군가의 주목을 빼앗은 것도 사실이었기에 그를 싫어하는 학생들도 꽤 있었다.그리고 이제 그의 가정사가 알려지자 몇몇 학생들은 비꼬기 시작했다.“학교에서 전학생을 받아주는 건 알겠는데, 전에 담임 선생님이 한 명은 거절했잖아. 그런데 왜 원진은 받아줬지?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가?”“아빠가 강간범이고, 엄마는 거의 창녀 수준이라더라. 유전은 어쩔 수 없다고 하잖아.”두 명의 남학생이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던 한 여자아이가 갑자기 화를 내며 소리쳤다.“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솔직히 원진이 농구 잘해서 너희가 질투하는 거잖아. 역시 남자를 가장 질투하는 건 남자들이야!”주위 학생들도 그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고 두 남학생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하여 양쪽은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 시작했다.정작 그 싸움의 중심에 있어야 할 원진은 오히려 가장 평온하게 문제지를 풀고 있었다.그는 한 시간 동안 차분하게 문제를 풀었고 그러다 이수희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이수희는 아침에 이미 두 명의 학부모와 대면했다. 그들은 원진이 다른 반으로 가길 원했다. 자신들의 아이가 잠재적 범죄자와 같은 반에 있는 게 싫다는 이유였다.이수희는 원진이 성적도 우수하고 품행도 바르다고 계속 설명했지만 학부모들은 위험을 감수할 마음이 없었다.이수희는 고민이 깊어져 결국 원진을 교무실로 불렀다.그녀는 원진을 다른 반으로 보내지는 않을 것이었지만 그의 상황이 너무 걱정되었다.학교 전체가 이미 이 소문을 알고 있었고 일부 학생들은 구경거리 삼아 반에 찾아오기도 했다.원진이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그는 아직 열일곱 살의 아이였다. 이 상황을 정말로 견뎌낼 수 있을까?“진아, 내가 이
당시연이 막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수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원진이 누군가에게 맞았다는 소식이었다.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원진은 아주 얌전하고 항상 문제를 피하는 성격인데 어떻게 싸움에 휘말려 맞을 수 있을까?당시연은 급히 병원으로 향했고 병원 복도에서 이수희를 마주쳤다.“선생님.”“시연아!”이수희는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어젯밤 진이가 응급실에 들어갔어. 지금은 괜찮지만 가벼운 뇌진탕이래. 빨리 들어가 봐. 이 아이가 몇 킬로그램이나 빠졌는지 몰라.”당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둘러 원진의 병실로 들어갔다.원진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이미 깨어나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시연 누나?”“진아!”당시연은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대체 무슨 일이야? 어떻게 싸움에 휘말린 거야?”원진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이수희 선생님이 원진의 가정사가 폭로된 일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당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일이 이미 두 달이나 됐고 그동안 원진은 학교에서 차별과 고립을 겪었는데도 전혀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시연아, 너무 화내지 마. 이번 일은 진이가 먼저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니라 다른 반 학생들이 일부러 진이를 괴롭힌 거야.”당시연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원진의 손을 꼭 잡았다.“왜 이런 일을 나한테 미리 말하지 않았어?”“누나가 걱정할까 봐요.”그 말에 당시연은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이 아이는 어떻게 이렇게 착할 수 있을까.당시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일단 푹 쉬어. 나랑 선생님이 학교 가서 이 일을 처리하고 올게.”그녀의 얼굴은 단호했고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할 계획이었다.원진은 그녀의 소매를 살짝 잡고 놓치기 싫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당시연은 그가 겁을 먹은 줄 알고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다친 곳을 조심스레 피하면서.“괜찮아, 금방 다녀올게.”원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