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의종은 설기웅의 연락을 받은 후 단 3시간 만에 기자회견을 열었다.모든 언론 매체가 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움직였다. 누구나 이 중요한 소식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기자회견이 열리는 장소는 이미 기자들로 가득 찼고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설의종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또래보다 훨씬 젊어 보였지만 최근 회복 중인 탓에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욱 활기차 보였다.밑에서는 플래시가 끊임없이 터졌다. 그러나 설의종은 차분한 모습으로 중앙 자리에 앉았다.이번 기자회견에는 여러 국가의 언론이 참석해 설씨 가문의 사업 부문에서 큰 변화가 있었는지를 묻고 있었다.설의종은 기자들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기자회견의 목적을 밝혔다.“설씨 가문에 매우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 유일한 딸이 누군가에 의해 바꿔치기 되어, 20여 년간 밖에서 방황하다가 최근 반년 만에 겨우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누군가의 음모로 병상에 누워 지내며 딸과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설씨 가문 대표로서가 아닌 평범한 아버지로서입니다. 저는 막 혼수상태에서 깨어났고, 딸이 H국에서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H국 측과 연락을 취했지만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저는 모든 지분을 딸에게 넘겼습니다. 딸의 안전이 설씨 가문의 앞으로의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H국 언론이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뤄주기를 바라며 제 딸이 무사하기를 바랍니다.”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회사가 이렇게 대규모의 기자회견을 연 덕분에 각국에서 이 기자회견이 생중계되었다. 많은 이들이 H국 언론에 왜 설씨 가문의 딸을 구출하는 데 협조하지 않는지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일부 사람들은 음모론을 제기하며 H국 측에서 설씨 가문의 국내 경제 거래를 제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다. 그래서 설씨 가문의 공주가 납치되는 것을 방조했다는 주장이 나왔다.이런 말들이 H국 상층부에 큰 압박을
나설희 같은 착한 아이가 왜 하필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 그것도 부모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현장의 분위기는 여전히 무겁고 긴장감이 돌았다. 모두가 방금 말을 꺼낸 나경택을 바라보았다.나경택은 앞에 놓인 서류를 응시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조사해 보게. 만약 정말 백겸이 맞다면 나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걸세.”분명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나경택의 권력이 가장 컸다. 그가 이렇게 말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곧바로 상층부는 행동을 개시하여 포위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어느새 밤이 깊어졌다.성혜인이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음을 알았다. 눈동자는 움직일 수 있었지만 몸의 다른 부분은 감각이 없었다. 눈앞의 공간은 온통 하얗고 자신이 마치 휴면 캡슐 같은 곳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그녀는 눈을 깜빡였지만 아무것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위쪽의 작은 유리창을 통해 겨우 바깥의 천장만이 보였다.휴면 캡슐 밖에서는 사라가 앞에 표시되는 일련의 데이터를 보며 차가운 눈빛을 드리운 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스크린을 몇 번 터치한 후 옆에 있는 서주혁을 바라보았다.서주혁의 실험이 가장 먼저 진행되었다. 이제 그의 신체 기능이 최상의 상태에 도달하기만 하면 두 번째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사라는 남은 데이터를 주시하며 실수 하나 없이 일을 진행하려고 했다. 동시에 그녀는 백겸에게 전화를 걸었다.“백겸 씨, 내일 저녁에 직접 와서 지켜보시겠어요? 서주혁의 실험은 아마 내일 저녁이면 완료될 겁니다. 그 이후 한 시간만 지나면 당신의 아들이 천천히 깨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바로 이어서 성혜인의 실험이 시작될 거고요. 모든 것이 끝나는 시간은 대략 밤 11시쯤 될 거예요. 그때 오시지 않겠어요?”수년간 준비해 온 일이니, 그가 이 순간을 직접 목격하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백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긴장한 것이 분명했다.“내일 오후 2시에 갈게요. 사라 박사님,
누군가 일부러 던진 것 같아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원래는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려 했지만 몇 미터 가지 않아 그녀는 귀신이라도 들린 듯 다시 뒤로 물러서서 쪼그리고 앉아 대나무 헬리콥터를 주웠다.대나무 헬리콥터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마른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기억이 온전하지 않았기에 사라는 자신이 이 물건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손에 쥐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 물건을 놀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잎사귀 두 개가 저 멀리 날아갔다.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그 잎사귀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사라의 눈앞에 아주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옛날 옛적, 대나무 헬리콥터가 푸른 하늘을 날고 있고 어린 소녀가 소리쳤다.“우와, 엄청 높아요. 엄마, 헬리콥터가 엄청 높이 날고 있어요. 엄마가 만들어서 그렇나 봐요.”“너무 대단하다. 우리 헬리콥터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이 날고 있어요.”정체를 알 수 없는 기억에 두통이 시작되자 사라는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그 대나무 헬리콥터의 날개는 그사이에 어디로 간 건지 사라는 순간 당황하여 여기저기 찾기 시작했다.잔디밭에서 여기저기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그녀는 또 서둘러 옆의 수풀을 헤집기 시작했다.한편, 사라가 그렇게 찾던 대나무 헬리콥터는 덤불 속에 고요히 누워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작은 나무 조각 장난감도 놓여있었다.사라의 눈동자가 매섭게 움츠러들더니 갑자기 무언가가 심장에 꽂히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입술을 오므리고 떨리는 손을 뻗어 작은 장난감의 스위치를 천천히 눌러보았다.그 순간, 나무로 조각된 작은 곤충 한 마리가 그녀의 눈앞으로 뛰쳐나왔는데 그 모습은 마치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다.“하늘아, 울지 말고 이거 봐.”“와, 셋째 삼촌 감사합니다.”“넌 항상 셋째 삼촌한테만 고맙지? 왜, 내가 만들어 준 대나무 헬리콥터는 마음에 안 들어?”“그럴 리가요. 전 다 좋아요!”주변 공기가
자신이 대체 왜 반승제에게 그토록 집착하는지는 김상아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반승제를 본 순간, 그와의 깊은 인연을 느꼈을 뿐이다.앞으로 반승제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김상아는 피가 들끓어 오르고 입꼬리가 휘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여 그녀 역시 이 모든 것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상아는 곧바로 모든 데이터를 최적화하기 위해 더욱 빨리 움직였다.오후 2시, 백겸은 정시에 차를 타고 출발하여 작은 양옥에 도착했다.입구의 경비원은 이미 2년 전, 백겸 측의 인원으로 교체해 두었다.하여 백겸은 매우 순조롭게 들어올 수 있었지만 막상 양옥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자 조금 망설여졌다.양옥의 익숙한 모습을 보니 심장이 조금 뻐근했지만 그 또한 한순간이었고 백겸은 이미 진즉 감정을 추슬렀다.하늘에서는 가끔 헬리콥터가 날아다니는데 분명 저쪽 사람들이 이곳의 상황을 탐사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백겸은 전혀 두려울 것이 없다. 지금 이 구역은 이미 완전히 봉쇄되어 있고 그들이 이 안의 인질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한, 절대로 손을 쓰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오늘 밤만 지나면 지하 감옥에서 바로 국경으로 도망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백겸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음침한 미소가 입가에 그려졌다.방에 들어간 백겸은 심지어 부엌을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곳은 예전에 나설희가 가장 즐겨 머물던 곳이었다.이윽고 백겸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이미 실험실로 개조된 위층을 바라보았다.백겸이 지시한 것이었지만 직접 와서 본 적이 없기에 오늘 처음 온 것이다.그때, 사라는 고개를 들었다가 백겸이 도착한 것을 보자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박사님, 오셨어요?”백겸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반재인도 있었다.김상아는 반승제와 똑 닮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이게 바로 반승제의 그 대역이란 말인가? 정말 반승제 본인이라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반재인은 백겸의 뒤에 서 있었는데 몸매도 그렇고
저 멀리 하늘가에 위태롭게 걸려있던 마지막 햇빛 한 줄기마저 전부 사라지자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자신이 가택연금을 당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도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온 가족이 거실에 앉아 그저 조용히 바깥에서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양측의 대화는 이미 끝나버렸고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그들의 생명은 현재 모두 백겸의 손에 달려 있다.그러나 백겸은 현재 이미 미쳐버렸다. 아니, 어쩌면 옛날에 진즉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이윽고 백겸은 자리에 다시 앉아 천천히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바깥에서 더 이상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백겸은 더욱 빈정거리며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하여 그는 뒤에 있던 반재인에게 말을 건넸다.“재인아, 저 사람들 좀 봐라. 처자들이 위험에 처하니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잖니. 참말로 도덕군자인 양 점잔을 빼고 있네. 이 사람들이 대체 나와 무슨 차이가 있냐?”그러자 반재인은 그에게 차를 따라주며 답했다.“선생님, 차 드세요.”백겸은 반재인이 건네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물었다.“참, 오혜수 쪽은 어떻게 되었냐?”“오혜수 씨는 진짜 반승제를 데려갔지만 설기웅이 쉽게 속아주지 않더군요. 원래는 직접 쫓아갈 거라고 예상했지만 오히려 곧바로 설씨 가문으로 하여금 기자회견을 열게 하더라고요.”“그래도 뭔가 뜻이 있나 보군.”백겸은 차 반 컵을 마시고 수면창 안에서 깊게 잠들어 있는 성혜인을 바라보았다.“아쉽게도 성혜인은 임신 중이라 데이터가 불안정하네. 임신만 아니었어도 가장 먼저 실험했을 텐데.”솔직히 백겸은 아들보다 아내가 더 마음에 걸렸다.“선생님, 걱정 마세요. 오늘 밤 11시면 수술이 끝날 거라고 박사님이 말씀하셨어요.”그러자 백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미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탓에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게다가 이제 곧 나설희가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더욱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렇게 오랜
그러자 사라는 또 김상아를 다독여주며 말을 덧붙였다.“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기억하고 있잖아요. 상아 씨는 옆에서 협조만 해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호들갑은 떨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요. 백겸 선생님께서 옆에서 지켜보고 계시는데 상아 씨도 나쁜 인상을 남기고 싶진 않잖아요.”반재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김상아는 사라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반승제와 너무 비슷한 얼굴을 한 반재인이 바로 옆에 있으니 김상아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심지어 이 중요한 순간에도 그녀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반재인에게 향하곤 했다.그리고 이 순간에 사라의 위로를 듣고 나니 김상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습니다. 협조할게요.”하여 사라는 눈을 내리깔고 계속하여 그 안에 약물을 투입했다.하지만 곧 마지막 단계에 다다르자 김상아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사라는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고개를 들어 김상아를 바라보았다.김상아의 행동에 대해 경고한 지 불과 30분이 지났고 현재 저녁 7시가 되었다.같은 시각, 하늘에는 희미한 저녁노을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김상아는 사라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굳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박사님, 저 약물에 대한 이해는 박사님보다 못할지도 모르지만 저도 연구기지에 오래 머물면서 천재로 불리던 사람입니다. 박사님 약물은 서주혁을 혼수상태에 빠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깨우기 위한 약물이에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있던 반재인이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이윽고 김상아는 일찌감치 텅 비어버린 시험관을 보며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틀릴 수는 있어도 그 번호를 전부 틀릴 수는 없어요.”두 사람의 소란에 반재인이 성큼성큼 걸어와 어두운 안색으로 캐물었다.“어찌 된 일입니까?”그러자 김상아는 옆 서랍을 가리키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사라 박사님께서 오늘 오전에 외출한 후, 작은 물건 몇 개를 가지고 오더니 오늘따라 뭔가 이상해졌어요. 혹시 그 작은 물건들에 영향을 받아 기억이 회
사라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구성 전에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여러 시약을 계속 투입하기 시작했다.한편, 김상아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기양양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이번에 큰 공을 세웠으니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반드시 반승제와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그녀의 손놀림은 더욱 빨라졌다. 정말 당장이라도 서주혁의 몸에서 실험을 시작하고 싶을 지경이다.같은 시각, 방 안에서 가장 평온한 사람은 오히려 백겸이다.그는 심지어 반재인 더러 스테이크와 와인을 준비하도록 지시한 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천천히 나이프와 포크를 움직이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밖에 있는 저격수들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이 지역에도 이미 백겸 측의 사람을 마련해두었고 그에게도 저격수가 있다. 만약 누가 감히 이곳에 침입한다면 바로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땅에는 폭탄이 매설되어 있고 손안에는 인질도 많았다.이번에야말로 이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승리를 만끽하며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다가 옆에서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은 피아노를 보며 반재인에게 물었다.“재인아, 지금 상황에 맞는 곡을 연주해 봐.”반재인의 모든 것은 백겸이 가르친 것이다. 물론 그가 할 수 있는 기술도 포함해서 말이다.백겸은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 젊었을 때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도 알았는데 심지어 그 실력도 엄청났다.심지어 당시 나설희가 피아노를 칠 때 옆에서 바이올린을 켜서 상대방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두 사람은 더욱이 소꿉친구였기에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약혼했다.반재인은 옆에 있던 구형 피아노 앞에 앉아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와인을 한 모금 마신 백겸은 창밖으로 이따금 날아가는 헬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새벽 6시 반, 실험은 제시간에 시작되었다.사라는 이미 서주혁에게 다가가 첫 번째 약물을 주입하였고 밖에서는 갑자기 경보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백겸은 앞에 놓인 와인을 우아하게 흔들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
이 일은 거의 모두에게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렇게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자살이라니.하지만 나설희는 확실히 자살한 것이 맞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백겸도 모른다.그는 줄곧 자신의 결혼생활이 매우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내와 부부 관계가 화목하고 아들도 활발하게 잘 크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백발이 되도록 머리를 쥐어 잡고 고민해봐도 아무도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그 후 나경택과 아내는 너무 슬퍼 바로 이 구역에서 물러나며 더 이상 외부 일을 상대하지 않았다.그렇게 백겸도 그때부터 명목상의 장인어른을 만난 적이 없었다.그리고 현재 백겸은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나경택을 보고 나서야 나설희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나경택의 모습은 마치 죽을 고비를 넘긴 노인처럼 심지어 걸을 때도 숨을 헐떡거렸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아마도 백겸이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백겸은 순간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뒤로 물러섰고 나경택은 곧바로 집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그는 손을 들어 미간을 주무르며 옆에 있는 반재인에게 알렸다.“재인아, 네가 내려가서 어르신께 이번 일에는 끼어들지 말라고 전해라.”반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뛰쳐나갔다.백겸은 나경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반재인을 바라보았는데 나경택은 숨을 헐떡이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이윽고 반재인은 다시 백겸에게 뛰어왔고 조금 망설이는 듯 말을 더듬었다.“선생님, 어르신께서 이렇게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어젯밤에 어르신의 부인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즉 선생님의 장모님 말씀입니다. 어르신께서 선생님께 전해주고 싶은 편지가 있으시다는데 나설희 사모님께서 남긴 편지라고 합니다. 직접 선생님께 주고 싶다고 합니다.”나설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에 관한 수수께끼가 잔뜩 남아 있었다.처음 3년 동안 백겸은 계속하여 꿈을 꾸었다. 아주 작은 기억부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