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의종은 설기웅의 연락을 받은 후 단 3시간 만에 기자회견을 열었다.모든 언론 매체가 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움직였다. 누구나 이 중요한 소식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기자회견이 열리는 장소는 이미 기자들로 가득 찼고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설의종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또래보다 훨씬 젊어 보였지만 최근 회복 중인 탓에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욱 활기차 보였다.밑에서는 플래시가 끊임없이 터졌다. 그러나 설의종은 차분한 모습으로 중앙 자리에 앉았다.이번 기자회견에는 여러 국가의 언론이 참석해 설씨 가문의 사업 부문에서 큰 변화가 있었는지를 묻고 있었다.설의종은 기자들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기자회견의 목적을 밝혔다.“설씨 가문에 매우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 유일한 딸이 누군가에 의해 바꿔치기 되어, 20여 년간 밖에서 방황하다가 최근 반년 만에 겨우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누군가의 음모로 병상에 누워 지내며 딸과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설씨 가문 대표로서가 아닌 평범한 아버지로서입니다. 저는 막 혼수상태에서 깨어났고, 딸이 H국에서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H국 측과 연락을 취했지만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저는 모든 지분을 딸에게 넘겼습니다. 딸의 안전이 설씨 가문의 앞으로의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H국 언론이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뤄주기를 바라며 제 딸이 무사하기를 바랍니다.”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회사가 이렇게 대규모의 기자회견을 연 덕분에 각국에서 이 기자회견이 생중계되었다. 많은 이들이 H국 언론에 왜 설씨 가문의 딸을 구출하는 데 협조하지 않는지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일부 사람들은 음모론을 제기하며 H국 측에서 설씨 가문의 국내 경제 거래를 제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다. 그래서 설씨 가문의 공주가 납치되는 것을 방조했다는 주장이 나왔다.이런 말들이 H국 상층부에 큰 압박을
나설희 같은 착한 아이가 왜 하필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 그것도 부모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현장의 분위기는 여전히 무겁고 긴장감이 돌았다. 모두가 방금 말을 꺼낸 나경택을 바라보았다.나경택은 앞에 놓인 서류를 응시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조사해 보게. 만약 정말 백겸이 맞다면 나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걸세.”분명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나경택의 권력이 가장 컸다. 그가 이렇게 말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곧바로 상층부는 행동을 개시하여 포위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어느새 밤이 깊어졌다.성혜인이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음을 알았다. 눈동자는 움직일 수 있었지만 몸의 다른 부분은 감각이 없었다. 눈앞의 공간은 온통 하얗고 자신이 마치 휴면 캡슐 같은 곳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그녀는 눈을 깜빡였지만 아무것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위쪽의 작은 유리창을 통해 겨우 바깥의 천장만이 보였다.휴면 캡슐 밖에서는 사라가 앞에 표시되는 일련의 데이터를 보며 차가운 눈빛을 드리운 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스크린을 몇 번 터치한 후 옆에 있는 서주혁을 바라보았다.서주혁의 실험이 가장 먼저 진행되었다. 이제 그의 신체 기능이 최상의 상태에 도달하기만 하면 두 번째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사라는 남은 데이터를 주시하며 실수 하나 없이 일을 진행하려고 했다. 동시에 그녀는 백겸에게 전화를 걸었다.“백겸 씨, 내일 저녁에 직접 와서 지켜보시겠어요? 서주혁의 실험은 아마 내일 저녁이면 완료될 겁니다. 그 이후 한 시간만 지나면 당신의 아들이 천천히 깨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바로 이어서 성혜인의 실험이 시작될 거고요. 모든 것이 끝나는 시간은 대략 밤 11시쯤 될 거예요. 그때 오시지 않겠어요?”수년간 준비해 온 일이니, 그가 이 순간을 직접 목격하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백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긴장한 것이 분명했다.“내일 오후 2시에 갈게요. 사라 박사님,
누군가 일부러 던진 것 같아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원래는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려 했지만 몇 미터 가지 않아 그녀는 귀신이라도 들린 듯 다시 뒤로 물러서서 쪼그리고 앉아 대나무 헬리콥터를 주웠다.대나무 헬리콥터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마른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기억이 온전하지 않았기에 사라는 자신이 이 물건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손에 쥐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 물건을 놀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잎사귀 두 개가 저 멀리 날아갔다.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그 잎사귀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사라의 눈앞에 아주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옛날 옛적, 대나무 헬리콥터가 푸른 하늘을 날고 있고 어린 소녀가 소리쳤다.“우와, 엄청 높아요. 엄마, 헬리콥터가 엄청 높이 날고 있어요. 엄마가 만들어서 그렇나 봐요.”“너무 대단하다. 우리 헬리콥터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이 날고 있어요.”정체를 알 수 없는 기억에 두통이 시작되자 사라는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그 대나무 헬리콥터의 날개는 그사이에 어디로 간 건지 사라는 순간 당황하여 여기저기 찾기 시작했다.잔디밭에서 여기저기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그녀는 또 서둘러 옆의 수풀을 헤집기 시작했다.한편, 사라가 그렇게 찾던 대나무 헬리콥터는 덤불 속에 고요히 누워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작은 나무 조각 장난감도 놓여있었다.사라의 눈동자가 매섭게 움츠러들더니 갑자기 무언가가 심장에 꽂히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입술을 오므리고 떨리는 손을 뻗어 작은 장난감의 스위치를 천천히 눌러보았다.그 순간, 나무로 조각된 작은 곤충 한 마리가 그녀의 눈앞으로 뛰쳐나왔는데 그 모습은 마치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다.“하늘아, 울지 말고 이거 봐.”“와, 셋째 삼촌 감사합니다.”“넌 항상 셋째 삼촌한테만 고맙지? 왜, 내가 만들어 준 대나무 헬리콥터는 마음에 안 들어?”“그럴 리가요. 전 다 좋아요!”주변 공기가
자신이 대체 왜 반승제에게 그토록 집착하는지는 김상아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반승제를 본 순간, 그와의 깊은 인연을 느꼈을 뿐이다.앞으로 반승제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김상아는 피가 들끓어 오르고 입꼬리가 휘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여 그녀 역시 이 모든 것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상아는 곧바로 모든 데이터를 최적화하기 위해 더욱 빨리 움직였다.오후 2시, 백겸은 정시에 차를 타고 출발하여 작은 양옥에 도착했다.입구의 경비원은 이미 2년 전, 백겸 측의 인원으로 교체해 두었다.하여 백겸은 매우 순조롭게 들어올 수 있었지만 막상 양옥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자 조금 망설여졌다.양옥의 익숙한 모습을 보니 심장이 조금 뻐근했지만 그 또한 한순간이었고 백겸은 이미 진즉 감정을 추슬렀다.하늘에서는 가끔 헬리콥터가 날아다니는데 분명 저쪽 사람들이 이곳의 상황을 탐사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백겸은 전혀 두려울 것이 없다. 지금 이 구역은 이미 완전히 봉쇄되어 있고 그들이 이 안의 인질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한, 절대로 손을 쓰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오늘 밤만 지나면 지하 감옥에서 바로 국경으로 도망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백겸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음침한 미소가 입가에 그려졌다.방에 들어간 백겸은 심지어 부엌을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곳은 예전에 나설희가 가장 즐겨 머물던 곳이었다.이윽고 백겸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이미 실험실로 개조된 위층을 바라보았다.백겸이 지시한 것이었지만 직접 와서 본 적이 없기에 오늘 처음 온 것이다.그때, 사라는 고개를 들었다가 백겸이 도착한 것을 보자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박사님, 오셨어요?”백겸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반재인도 있었다.김상아는 반승제와 똑 닮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이게 바로 반승제의 그 대역이란 말인가? 정말 반승제 본인이라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반재인은 백겸의 뒤에 서 있었는데 몸매도 그렇고
저 멀리 하늘가에 위태롭게 걸려있던 마지막 햇빛 한 줄기마저 전부 사라지자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자신이 가택연금을 당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도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온 가족이 거실에 앉아 그저 조용히 바깥에서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양측의 대화는 이미 끝나버렸고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그들의 생명은 현재 모두 백겸의 손에 달려 있다.그러나 백겸은 현재 이미 미쳐버렸다. 아니, 어쩌면 옛날에 진즉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이윽고 백겸은 자리에 다시 앉아 천천히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바깥에서 더 이상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백겸은 더욱 빈정거리며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하여 그는 뒤에 있던 반재인에게 말을 건넸다.“재인아, 저 사람들 좀 봐라. 처자들이 위험에 처하니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잖니. 참말로 도덕군자인 양 점잔을 빼고 있네. 이 사람들이 대체 나와 무슨 차이가 있냐?”그러자 반재인은 그에게 차를 따라주며 답했다.“선생님, 차 드세요.”백겸은 반재인이 건네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물었다.“참, 오혜수 쪽은 어떻게 되었냐?”“오혜수 씨는 진짜 반승제를 데려갔지만 설기웅이 쉽게 속아주지 않더군요. 원래는 직접 쫓아갈 거라고 예상했지만 오히려 곧바로 설씨 가문으로 하여금 기자회견을 열게 하더라고요.”“그래도 뭔가 뜻이 있나 보군.”백겸은 차 반 컵을 마시고 수면창 안에서 깊게 잠들어 있는 성혜인을 바라보았다.“아쉽게도 성혜인은 임신 중이라 데이터가 불안정하네. 임신만 아니었어도 가장 먼저 실험했을 텐데.”솔직히 백겸은 아들보다 아내가 더 마음에 걸렸다.“선생님, 걱정 마세요. 오늘 밤 11시면 수술이 끝날 거라고 박사님이 말씀하셨어요.”그러자 백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미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탓에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게다가 이제 곧 나설희가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더욱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렇게 오랜
그러자 사라는 또 김상아를 다독여주며 말을 덧붙였다.“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기억하고 있잖아요. 상아 씨는 옆에서 협조만 해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호들갑은 떨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요. 백겸 선생님께서 옆에서 지켜보고 계시는데 상아 씨도 나쁜 인상을 남기고 싶진 않잖아요.”반재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김상아는 사라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반승제와 너무 비슷한 얼굴을 한 반재인이 바로 옆에 있으니 김상아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심지어 이 중요한 순간에도 그녀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반재인에게 향하곤 했다.그리고 이 순간에 사라의 위로를 듣고 나니 김상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습니다. 협조할게요.”하여 사라는 눈을 내리깔고 계속하여 그 안에 약물을 투입했다.하지만 곧 마지막 단계에 다다르자 김상아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사라는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고개를 들어 김상아를 바라보았다.김상아의 행동에 대해 경고한 지 불과 30분이 지났고 현재 저녁 7시가 되었다.같은 시각, 하늘에는 희미한 저녁노을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김상아는 사라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굳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박사님, 저 약물에 대한 이해는 박사님보다 못할지도 모르지만 저도 연구기지에 오래 머물면서 천재로 불리던 사람입니다. 박사님 약물은 서주혁을 혼수상태에 빠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깨우기 위한 약물이에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있던 반재인이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이윽고 김상아는 일찌감치 텅 비어버린 시험관을 보며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틀릴 수는 있어도 그 번호를 전부 틀릴 수는 없어요.”두 사람의 소란에 반재인이 성큼성큼 걸어와 어두운 안색으로 캐물었다.“어찌 된 일입니까?”그러자 김상아는 옆 서랍을 가리키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사라 박사님께서 오늘 오전에 외출한 후, 작은 물건 몇 개를 가지고 오더니 오늘따라 뭔가 이상해졌어요. 혹시 그 작은 물건들에 영향을 받아 기억이 회
사라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구성 전에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여러 시약을 계속 투입하기 시작했다.한편, 김상아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기양양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이번에 큰 공을 세웠으니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반드시 반승제와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그녀의 손놀림은 더욱 빨라졌다. 정말 당장이라도 서주혁의 몸에서 실험을 시작하고 싶을 지경이다.같은 시각, 방 안에서 가장 평온한 사람은 오히려 백겸이다.그는 심지어 반재인 더러 스테이크와 와인을 준비하도록 지시한 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천천히 나이프와 포크를 움직이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밖에 있는 저격수들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이 지역에도 이미 백겸 측의 사람을 마련해두었고 그에게도 저격수가 있다. 만약 누가 감히 이곳에 침입한다면 바로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땅에는 폭탄이 매설되어 있고 손안에는 인질도 많았다.이번에야말로 이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승리를 만끽하며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다가 옆에서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은 피아노를 보며 반재인에게 물었다.“재인아, 지금 상황에 맞는 곡을 연주해 봐.”반재인의 모든 것은 백겸이 가르친 것이다. 물론 그가 할 수 있는 기술도 포함해서 말이다.백겸은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 젊었을 때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도 알았는데 심지어 그 실력도 엄청났다.심지어 당시 나설희가 피아노를 칠 때 옆에서 바이올린을 켜서 상대방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두 사람은 더욱이 소꿉친구였기에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약혼했다.반재인은 옆에 있던 구형 피아노 앞에 앉아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와인을 한 모금 마신 백겸은 창밖으로 이따금 날아가는 헬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새벽 6시 반, 실험은 제시간에 시작되었다.사라는 이미 서주혁에게 다가가 첫 번째 약물을 주입하였고 밖에서는 갑자기 경보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백겸은 앞에 놓인 와인을 우아하게 흔들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
이 일은 거의 모두에게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렇게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자살이라니.하지만 나설희는 확실히 자살한 것이 맞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백겸도 모른다.그는 줄곧 자신의 결혼생활이 매우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내와 부부 관계가 화목하고 아들도 활발하게 잘 크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백발이 되도록 머리를 쥐어 잡고 고민해봐도 아무도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그 후 나경택과 아내는 너무 슬퍼 바로 이 구역에서 물러나며 더 이상 외부 일을 상대하지 않았다.그렇게 백겸도 그때부터 명목상의 장인어른을 만난 적이 없었다.그리고 현재 백겸은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나경택을 보고 나서야 나설희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나경택의 모습은 마치 죽을 고비를 넘긴 노인처럼 심지어 걸을 때도 숨을 헐떡거렸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아마도 백겸이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백겸은 순간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뒤로 물러섰고 나경택은 곧바로 집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그는 손을 들어 미간을 주무르며 옆에 있는 반재인에게 알렸다.“재인아, 네가 내려가서 어르신께 이번 일에는 끼어들지 말라고 전해라.”반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뛰쳐나갔다.백겸은 나경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반재인을 바라보았는데 나경택은 숨을 헐떡이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이윽고 반재인은 다시 백겸에게 뛰어왔고 조금 망설이는 듯 말을 더듬었다.“선생님, 어르신께서 이렇게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어젯밤에 어르신의 부인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즉 선생님의 장모님 말씀입니다. 어르신께서 선생님께 전해주고 싶은 편지가 있으시다는데 나설희 사모님께서 남긴 편지라고 합니다. 직접 선생님께 주고 싶다고 합니다.”나설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에 관한 수수께끼가 잔뜩 남아 있었다.처음 3년 동안 백겸은 계속하여 꿈을 꾸었다. 아주 작은 기억부
연승혁을 마주했을 때 원아정의 눈가에 잠시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오빠...”하지만 연승혁은 등을 기대며 차갑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쓸데없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거라면, 당장 사람 불러서 쫓아낼 테니까.”원아정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꾸며낸 애잔함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연승혁이 옆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조용히 자리에 앉은 원아정은 이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았다.그때 안정숙이 입을 열었다.“마침 승혁이도 있으니, 구은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거라.”애초에 원아정은 이 일을 말하려고 온 터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오늘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으니까요.”그녀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자의 눈매는 연승혁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안정숙과 연승혁 모두 한눈에 알아챘다. 이 남자는 분명 연씨 가문의 핏줄이었다.이미 벼랑 끝에 선 원아정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공지민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해외로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승혁 오빠, 이 얼굴 잘 보세요. 연씨 가문이 큰 혼란에 휩싸였던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아버님께서 밖에 아들을 하나 두셨다고요. 물론 그건 아버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계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이 그 일을 평생 떨쳐내지 못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언니가 실종된 것도 큰 상처였지만 아버님이 다른 여자를 품었다는 사실은 어머님께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어요. 그 상처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여자가 임신한 걸 알고도 가만두지 않으셨어요. 그 여자는 목숨을 건져 간신히 도망쳤고, 결국 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구은우예요. 그러니까 구은우는 승혁 오빠의 이복동생이라는 말이에요.”연승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안정숙의 시선을 의식하고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진 원아정은 불안감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만약 안정숙이 원진과 상의한다면 그녀는 반드시 해외로 쫓겨날 것이다. 원진은 절대 그녀 편에 서지 않을 터였다.원아정은 서둘러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공지민 그년 때문에 내 인생은 완전히 끝장났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녀는 곧장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래는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의 정체를 밝혀내라고 시켰건만 돌아온 보고는 실수로 그 사람을 놓쳤다는 것이었다.“뭐? 놓쳤다고?”원아정은 분노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면 모든 걸 잃고 말 것이다.그녀는 차를 몰고 공지민이 사는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원아정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지금이라도 공지민을 보기만 하면 망설임 없이 액셀을 밟아 그대로 들이받아 죽여버리겠다고.하지만 공지민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원아정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매일 공지민의 집 근처를 돌며 기회를 엿보았다.차를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두고 혹시라도 온시환의 사람들이 눈치챌까 멀리서 관찰했다.하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공지민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대신 안정숙이 공지민을 만나러 오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그 광경을 보자 원아정의 얼굴에는 질투가 가득 차올랐다.‘고등학교 때 그렇게 짓밟아 놓았던 공지민이 나를 밟고 올라가다니... 이게 말이 돼?’분노를 삭이며 핸들을 꽉 움켜쥔 그녀의 시야에 드디어 공지민이 나타났다.공지민은 안정숙과 함께 나와 있었다. 안정숙은 공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그 평온한 광경을 바라보는 원아정은 질투에 사로잡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를 악문 원아정은 다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사람 정체 아직도 못 밝혀냈어?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 말이야!”“그 집에 배달을 다녀온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은 여자
온시환은 뒤에서 움직일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기에 드러난 수단만을 써야 했고 그만큼 더 조심해야 했다.무엇보다 이 일에 서주혁이나 반승제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가 자신의 여자를 위해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고 그러기에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해야 했다.물론 만약 상황이 공지민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악화한다면 그때야 비로소 그 둘에게 도움을 청할지도 몰랐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승혁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인지 새삼 깨달았다.온시환은 그동안 자신이 알아낸 연씨 가문의 과거와 연승혁이 회색지대 사업을 정리하며 보여준 철저하고도 잔혹한 수완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공지민은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온시환이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연승혁이 이토록 잔혹하지 않았다면, 아마 먼 옛날에 태어났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으로 불렸을지도 모른다.이어 온시환은 연씨 가문에서 안정숙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겉보기에는 자애로워 보이는 안정숙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의 품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생각했다.온시환의 눈에 그녀는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해 보였을까?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겠다고 나섰던 그녀가 얼마나 우스웠을까?연씨 가문의 식사 자리에서 온시환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진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는 아마도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려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온시환이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도우려 했을까?공지민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요즘 들어 온시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그날 저녁, 연씨 가문에서 또다시 값비싼 선물들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안정숙이 직접 방문하기까지 했다.안정숙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며 공지민을 받아들이려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태도는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지민아, 이리 와 보렴. 최근에
그날 밤, 온시환의 사람들이 염정아가 머물던 집 주변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원아정의 사람들이 이미 철수했음을 확인했다. 그 즉시 염정아를 온시환의 별장으로 안전하게 옮겼다.염정아는 전과 다름없이 방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조차도 방에서만 해결했다.공지민은 염정아를 제원으로 불러오기 전까지 그녀가 이렇게 협조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특히, 이번에는 염정아가 외부인의 이상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원아정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공지민은 마음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아야, 이번에는 네가 그 배달원의 이상함을 눈치챈 덕분이야.”염정아는 그릇 안의 음식을 먹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너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공지민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니야, 넌 한 번도 내게 폐를 끼친 적이 없어.”염정아는 눈빛이 반짝이며 놀란 듯 공지민을 쳐다보았다. 이내 그녀는 천천히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지민아, 난 그저 네가 구은우의 복수를 끝낸 뒤엔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사실 나도 한때 복수심에 사로잡혀 살았어. 그때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곤 했지. 세상과 부모를 원망하며 미친 사람처럼 살았어.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했어. 이렇게 짧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깨달았지. 나는 너무 나약했고, 도망칠 용기도 반항할 용기도 없었어. 괴롭힘을 당해도 그냥 참기만 했고. 사람은 참을수록 더 고통스러워진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염정아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공지민은 그녀를 천천히 안으며 말했다.“난 모르겠어. 복수가 끝난 후엔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염정아는 별장에 들어오면서 온시환을 보았다.그녀의 눈에 온시환은 매우 훌륭한 남자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가 공지민을 바라보는 눈에는 온통 사랑이 담겨 있었다.
“계속 조사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요즘은 다들 섣부른 행동 하지 말라고.”잠시 후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항상 하는 말이지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목숨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옆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연승혁은 옆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공허했다.과거 연씨 가문이 회색지대 사업을 했을 때는 항상 목숨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사업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전환한 이후 몇 년 동안 연씨 가문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에 불쾌하면서도 묘한 흥미를 느꼈다. 연승혁은 타고난 모험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그래, 누군지 한번 보자고.’연승혁은 문득 조금 전 할머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한 이름을 언급했었다.‘구은우?’하지만 연승혁은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왔기에 그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하찮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뭔가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알겠습니다, 형님.”배는 여전히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한편, 제원에서 원아정은 연씨 가문을 떠난 뒤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그녀는 공지민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공지민이 더 이상 제원에서 발붙일 수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차에 올라탄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집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아가씨, 우리가 10시간 동안 지켜봤지만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밖에서 음식을 배달한 것 같습니다.”원아정은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밖에서 배달 음식이 들어갔다고? 너희들 머리는 장식이야? 배달원으로 위장해서 안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해? 도대체 내가 왜 너희들을 고용한 거야!”전화를 끊은 뒤 그들은 그제야 원아정의 말에 따라 배달원으로 위장해 염정아가 머무
안정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게 무슨 뜻이니?”원아정은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히 말했다.“아, 할머니. 정말 모르신다면 승혁 오빠를 불러보세요. 저도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니까요. 어차피 지금은 공지민이라는 친손녀를 얻으셨으니 제 말은 믿지도 않으실 테고요. 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아정아, 너 나를 원망하는 거니?”원아정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안정숙은 지팡이를 꽉 쥐며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어르신, 아정 씨는 아마 결혼식 사건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 무례했습니다.”안정숙은 옆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분히 말했다.“아정이가 뭘 원망할 자격이 있나. 그날 일을 문제 삼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가 충분히 관대했던 거야. 저 아이는 단지 체면만 구긴 거지. 하지만 지민이는 그날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나. 역시나 반성할 줄 모르고, 저 아이를 집안에 들이지 않길 정말 잘했어.”가정부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위로했다.“어르신, 보시는 눈이 정확하십니다. 아정 씨는 확실히 그런 그릇이 아니죠.”설령 공지민과 관련된 일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원아정이 연씨 가문에 들어오면 결국 문제만 일으키게 될 것이다.최근 공지민과 관련된 일로 안절부절못하던 안정숙은 원아정의 말이 떠올라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혹시 그 당시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닐까?그녀는 즉시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이미 바다에 나가 있었다. 최근 거래에 문제가 생겼고 돌아오려면 사흘이 걸릴 거라고 했다.“할머니, 사흘 후에 찾아뵙겠습니다.”안정숙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안했다.그녀는 결국 직접 공지민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직접 그녀를 만나야만 마음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연승혁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원아정은 마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황급히 액셀을 밟아 한적한 도로 위에 차를 멈췄고 주변 교통경찰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확실한 정보야?”“확실해. 연씨 가문에서 이미 공식적으로 발표했어. 혹시 연승혁이 너를 차단해서 SNS에 올린 글을 못 본 거 아니야?”이 말은 원아정의 정곡을 저대로 찔렀다. 연승혁은 정말 그녀를 차단했다.원아정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전화를 끊고 바로 안정숙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안정숙도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쯤 되니, 이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녀는 직감했다.그래서 안정숙이 그렇게 공지민을 신경 쓴 거였다. 심지어 내 결혼식도 취소하면서까지...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그래서 그랬던 거구나!’원아정은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터무니없는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설마 결혼식장에서 안정숙이 공지민을 알아본 걸까?‘망할!’그녀는 속으로 수없이 욕을 퍼부었지만 상황이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연승혁과의 관계는 이제 완전히 끝났고 그녀는 자신이 공지민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공지민이 나에게 복수한다면 어떡하지?’그녀는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안 돼. 내가 먼저 손을 써야 해.’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구은우라는 이름이 떠올랐다.원아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내가 왜 구은우를 잊고 있었지? 구은우를 죽인 건 연승혁 아니었나? 공지민이 이제 연씨 가문의 사람이 됐다면 당연히 복수를 원하지 않을까?’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너무 우연 아닌가?’공지민이 정말 연씨 가문의 사람일까?혹시 공지민이 연승혁에게 접근해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걸 계획한 건 아닐까?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단순히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결론지었다.원아정은 갑자기 연승혁과 공지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떠올랐다.이 생각이 들자
안정숙은 깊은 한숨을 쉬며 연승혁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 네가 지민이를 잘 지켜봐.”연승혁은 안정숙과 함께 밖으로 잠시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원아정이었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전화를 차단해 버렸다.원아정은 화가 치밀었다. 최근 연승혁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SNS에 올려 자신과 완전히 연을 끊겠다고 공표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만 같아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다.‘이게 다 공지민 때문이야!’원아정은 즉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가 들어왔다.“아가씨, 공지민이 오늘 외출해서 쇼핑 중입니다.”“주소를 보내요.”원아정은 바로 차를 몰아 그 장소로 향했다. 그녀는 쇼핑몰에서 공지민을 발견했다.공지민은 아직도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강민지가 함께 있었다.강민지는 공지민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 전환 겸 바람이라도 쐬게 하려고 그녀를 불러냈다.공지민은 목발을 짚고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한 시계 매장을 지나던 중 눈길을 멈췄다. 한정판 시계를 보며 염정아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얼마 전 자신이 가진 40억을 전부 염정아에게 넘겨주고 정작 자신에겐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아침 온시환이 그녀에게 카드를 건넸다. 카드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연씨 가문에서 보낸 선물들에 자극받은 탓인지, 공지민은 보상의 의미로 염정아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매장 직원에게 시계를 꺼내 보여달라고 했다.강민지는 옆에서 시계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정말 예쁘다! 피부 톤이랑도 잘 어울려요. 게다가 다이아까지 박혀 있어서 완전 고급스럽네요.”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환 씨가 오늘 아침에
공지민은 연승혁의 말을 듣고 속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혈육의 정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연승혁은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친근하고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온시환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연승혁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항상 경계해야 해.’공지민은 이 순간에도 그의 말에 따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연승혁은 손에 든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미소를 지었다.“누나, 마음이 바뀌면 나한테 연락해요. 이건 내 전화번호예요.”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개인 번호예요.”공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바라보았다.카드는 별다른 장식 없이 간단했고 확실히 개인적인 물건처럼 보였다.그녀는 카드를 가방에 넣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연승혁의 의도가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이 집 밖으로 나가 차에 오르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상대는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그는 운전석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최근에 재미있는 걸 발견해서 가끔 들러서 장난 좀 치고 있어.”전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들리는 말로는 누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야?”“그래, 진짜야.”연승혁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대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씨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상대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승혁아, 근데 너 태도가 좀 이상한데? 그동안 네가 누나를 찾은 건 할머니를 위해서였잖아. 설사 누나를 찾았다고 해도 이렇게 적극적일 이유는 없을 텐데, 왜 그렇게 흥미를 보이는 거야?”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정말 흥미로운 여자거든.”상대가 무언가 더 말하자 그는 가볍게 욕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차를 몰아 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