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다시 물을 반 컵 마시고 나서야 입안의 갈증이 조금은 해소된 듯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백겸이 노리는 게 서주혁이라면 반승제를 건드린 이유는 대체 뭐죠?”설기웅은 한 자료를 집어 들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지금 상황을 보면, 두 가지 목적이 있을 수 있어. 첫 번째는 반승제를 미끼로 서주혁을 덫에 빠뜨리려는 거지. 이 자료에 따르면, 서주혁이랑 반승제는 어렸을 때 백겸의 집에서 잠깐 같이 지낸 적이 있대. 그때 백겸의 아내도 아직 살아 있었고. 지금 서주혁이랑 반승제가 있는 곳이 그 집이니까, 서주혁이 경계심을 늦추고 결국 함정에 빠진 거야. 두 번째로는 가짜 반승제의 존재를 잊으면 안 돼. 지금 잡혀 있는 게 진짜 반승제인지 가짜 반승제인지 아무도 몰라. 이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연막일 수도 있어. 게다가 반승제를 호송하는 사람이 오혜수인데, 누군가가 죄수 호송차를 습격하려 한다는 걸 알게 되면 그녀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으려고 할 거야. 그때 누가 더 손해를 볼지는 장담할 수 없어..”설기웅은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내려놓았다.“오혜수에 대한 자료를 봤는데, 그녀는 여러 사건에서 공을 세워서 급속도로 승진했어. 예전에 백겸이 복지시설에서 데려온 이후로 계속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왔고 그 능력은 다른 남자들 못지않아. 오혜수는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인물이지. 반승제를 이송하는 차량 근처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할 거야.”“오빠, 그럼 8번 쪽에 연락해서 지금이라도 반승제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어요?”설기웅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잠시 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백겸이 그곳을 선택한 이유를 알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상부의 보호를 받는 국가 인재들이나 중요한 지도자들의 가족들이야. 상부의 절반 이상이 수색 영장을 승인하지 않는 한 그곳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 8번 쪽에는 딱 두 명밖에 없는데, 만약 그들이 무리하게 움직이면 그 주변의 군 병력이 그들을 순식간에 제압할
성혜인은 두 오빠의 위로를 받고서야 중요한 부분을 깨달았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장, 그 해파리 도장!”그건 나하늘이 임지연일 때부터 숨겨둔 것이었고 그녀에게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사용할 수 있다고 알려줬던 물건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 위험한 순간이었다.“오빠, 예전에 원진 씨가 여석진 집을 폭파하러 갔을 때 도장 하나를 가져온 적 있지 않아요? 원진 씨에게 연락해서 그 도장을 보내달라고 해요.”설기웅은 곧바로 원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마침 원진은 제원에 있었고 직접 도장을 가져왔다. 이 도장은 플로리아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칸다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당시 연구소가 혼란에 빠졌을 때 원진도 자신의 사람들을 보내 반승제를 찾으려 했지만 반승제는 찾지 못하고 이상한 모양의 도장만 발견하게 되었다.원진의 부하가 그 도장을 가져온 후 성혜인이 그것을 원하자마자 별다른 말 없이 곧바로 넘겨주었다.원진은 소파에 앉아 무겁게 말했다.“그러고 보니 그때 최용호 쪽 사람들도 같이 있었는데, 그중에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두 개의 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을 가지고 있었어요. 여석진 집 폭파 현장에서 주워온 건데, 누가 떨어뜨린 건지 알 수 없지만 꽤 신기해 보였어요.”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성혜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특이한 모양이라는 말을 듣자 눈가가 붉어졌다. 예전에 임지연도 그녀를 위해 이런 것들을 만들곤 했다. 그 당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장난감이 있었지만 그녀는 부러워하면서도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다. 엄마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지연은 그런 성혜인 몰래 나무로 장난감을 만들어주었고 그 장난감들은 매우 정교했다.그런 기억들 때문에 성혜인은 임지연을 꼭 만나고 싶었다. 자신에게 모든 따뜻함을 준 그 여인을.“그 나무 장난감들은 아직도 있어요?”“네, 있어요. 이번에 배신을 당했을 때 최용호한테 사람 몇 명 빌렸거든요. 그중 장난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는데,
몇 개의 작은 물건들이 곧바로 전달되었다. 성혜인은 8번의 뒷모습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8번이 나왔고 다른 한 사람은 그쪽을 감시하고 있지만 여전히 확신할 수 없는 게 있었다. 지금 잡혀 있는 사람이 진짜 반승제인지, 가짜 반승제인지 말이다.두 사람이 너무 닮아서 성혜인 자신도 어두운 환경에서는 쉽게 혼동할 수 있었다. 8번이 반승제를 잘못 알아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그래서 그들은 지금 사라 박사가 그 작은 물건들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기다리면서도, 김상아 쪽으로 가서 반드시 그 차를 멈추고 내부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한편, 백겸은 서랍에서 물고기 먹이를 꺼내 큰 수족관의 물고기들에게 주기 시작했다.물고기들은 앞다투어 먹이를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백겸은 수면 위로 퍼져가는 물결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김상아가 사람을 데리고 갔나?”“네, 데려갔습니다.”“그렇다면 됐어. 그 아이가 일을 처리할 때 난 항상 믿음직하다고 생각해. 이제부터 그 상황을 조사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김상아에게 발목이 잡히게 될 거야.”김상아의 개인 능력이 뛰어나니, 양쪽 모두 상당한 노력을 들여야 할 것이다.백겸은 마지막 남은 먹이를 수족관에 던져넣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오늘 밤 드디어 행동에 나설 수 있겠군. 내일 실험을 함께 진행하기에 좋은 기회가 될 거야.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더는 미룰 수 없어.”“알겠습니다.”그렇게 말했지만 그 행동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다.저녁 7시, 성혜인은 강민지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성혜인은 이전에 강민지에게 만약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강민지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왔으니, 성혜인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강씨 저택으로 직접 가야만 했다.게다가 강민지가 보낸 메시지는 다름 아닌 여섯 글자였다.[혜인아, 잘 있어.]성혜인 눈에 비친 강민지는 언제나 자존심 강한 부잣집 아가씨였다. 이제 강씨 집안이 이토
설기웅은 원래 김상아 쪽으로 사람들을 보내 자동차를 멈추게 하고 반승제 본인이 감옥에 보내지는 것을 막으려던 중이었다.하지만 그는 지시를 내리던 중 갑자기 이마를 찌푸렸다.만약 그가 백겸이라면 진짜 반승제를 보낼까?답은 ‘그럴 것’이었다.그래야만 자신의 다음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지금 김상아가 호송 중인 사람이 진짜 반승제라면 설기웅이 그 차량을 공격하는 순간 H국의 상층부를 자극하게 될 것이다.이들은 가까스로 백겸을 퇴직시키고 반승제를 감옥에 넣은 상황에서 설기웅이 이 일에 개입하려는 것은 그들의 눈에 결코 좋은 의도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결국 설기웅은 그들로부터 추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이 점을 깨달은 설기웅은 김상아의 차량을 납치하는 계획을 포기하고 대신 성혜인이 있는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성혜인이 현재 네이처 빌리지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설기웅은 순간적으로 초조해졌다. 그리고 곧바로 백겸이 노린 또 다른 ‘그릇’이 성혜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그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H국 내에서 설씨 가문과 연결된 인맥들 특히 고위직에 있는 몇몇 인사들과 곧바로 연락을 취했다.설기웅은 설씨 가문의 후계자라는 명의로 자기 생각을 전달했다.지금 설씨 가문의 유일한 공주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그녀의 배 속에는 아이까지 있는 상황이다. 반승제가 잘못을 했든 아니든, 임신 중인 성혜인은 아무런 죄가 없다.만약 성혜인이 백겸에게, 아니면 백겸의 정적들에게 해를 입게 된다면 설씨 가문은 이 문제를 국제적으로 크게 부각할 것이다.현재 설씨 가문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산업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 매년 개발되는 IP들은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며 많은 어린이의 마음속에 꿈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만약 설씨 가문이 국제 언론에 가문의 공주가 H국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발표한다면 이는 H국에게 큰 신뢰도 위기로 다가올 것이다.한 나라가 투자자를 보호할 수 없다면 다른 투자자들 역시 망설이게
설의종은 설기웅의 연락을 받은 후 단 3시간 만에 기자회견을 열었다.모든 언론 매체가 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움직였다. 누구나 이 중요한 소식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기자회견이 열리는 장소는 이미 기자들로 가득 찼고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설의종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또래보다 훨씬 젊어 보였지만 최근 회복 중인 탓에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욱 활기차 보였다.밑에서는 플래시가 끊임없이 터졌다. 그러나 설의종은 차분한 모습으로 중앙 자리에 앉았다.이번 기자회견에는 여러 국가의 언론이 참석해 설씨 가문의 사업 부문에서 큰 변화가 있었는지를 묻고 있었다.설의종은 기자들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기자회견의 목적을 밝혔다.“설씨 가문에 매우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 유일한 딸이 누군가에 의해 바꿔치기 되어, 20여 년간 밖에서 방황하다가 최근 반년 만에 겨우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누군가의 음모로 병상에 누워 지내며 딸과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설씨 가문 대표로서가 아닌 평범한 아버지로서입니다. 저는 막 혼수상태에서 깨어났고, 딸이 H국에서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H국 측과 연락을 취했지만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저는 모든 지분을 딸에게 넘겼습니다. 딸의 안전이 설씨 가문의 앞으로의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H국 언론이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뤄주기를 바라며 제 딸이 무사하기를 바랍니다.”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회사가 이렇게 대규모의 기자회견을 연 덕분에 각국에서 이 기자회견이 생중계되었다. 많은 이들이 H국 언론에 왜 설씨 가문의 딸을 구출하는 데 협조하지 않는지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일부 사람들은 음모론을 제기하며 H국 측에서 설씨 가문의 국내 경제 거래를 제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다. 그래서 설씨 가문의 공주가 납치되는 것을 방조했다는 주장이 나왔다.이런 말들이 H국 상층부에 큰 압박을
나설희 같은 착한 아이가 왜 하필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 그것도 부모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현장의 분위기는 여전히 무겁고 긴장감이 돌았다. 모두가 방금 말을 꺼낸 나경택을 바라보았다.나경택은 앞에 놓인 서류를 응시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조사해 보게. 만약 정말 백겸이 맞다면 나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걸세.”분명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나경택의 권력이 가장 컸다. 그가 이렇게 말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곧바로 상층부는 행동을 개시하여 포위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어느새 밤이 깊어졌다.성혜인이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음을 알았다. 눈동자는 움직일 수 있었지만 몸의 다른 부분은 감각이 없었다. 눈앞의 공간은 온통 하얗고 자신이 마치 휴면 캡슐 같은 곳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그녀는 눈을 깜빡였지만 아무것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위쪽의 작은 유리창을 통해 겨우 바깥의 천장만이 보였다.휴면 캡슐 밖에서는 사라가 앞에 표시되는 일련의 데이터를 보며 차가운 눈빛을 드리운 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스크린을 몇 번 터치한 후 옆에 있는 서주혁을 바라보았다.서주혁의 실험이 가장 먼저 진행되었다. 이제 그의 신체 기능이 최상의 상태에 도달하기만 하면 두 번째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사라는 남은 데이터를 주시하며 실수 하나 없이 일을 진행하려고 했다. 동시에 그녀는 백겸에게 전화를 걸었다.“백겸 씨, 내일 저녁에 직접 와서 지켜보시겠어요? 서주혁의 실험은 아마 내일 저녁이면 완료될 겁니다. 그 이후 한 시간만 지나면 당신의 아들이 천천히 깨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바로 이어서 성혜인의 실험이 시작될 거고요. 모든 것이 끝나는 시간은 대략 밤 11시쯤 될 거예요. 그때 오시지 않겠어요?”수년간 준비해 온 일이니, 그가 이 순간을 직접 목격하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백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긴장한 것이 분명했다.“내일 오후 2시에 갈게요. 사라 박사님,
누군가 일부러 던진 것 같아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원래는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려 했지만 몇 미터 가지 않아 그녀는 귀신이라도 들린 듯 다시 뒤로 물러서서 쪼그리고 앉아 대나무 헬리콥터를 주웠다.대나무 헬리콥터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마른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기억이 온전하지 않았기에 사라는 자신이 이 물건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손에 쥐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 물건을 놀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잎사귀 두 개가 저 멀리 날아갔다.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그 잎사귀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사라의 눈앞에 아주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옛날 옛적, 대나무 헬리콥터가 푸른 하늘을 날고 있고 어린 소녀가 소리쳤다.“우와, 엄청 높아요. 엄마, 헬리콥터가 엄청 높이 날고 있어요. 엄마가 만들어서 그렇나 봐요.”“너무 대단하다. 우리 헬리콥터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이 날고 있어요.”정체를 알 수 없는 기억에 두통이 시작되자 사라는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그 대나무 헬리콥터의 날개는 그사이에 어디로 간 건지 사라는 순간 당황하여 여기저기 찾기 시작했다.잔디밭에서 여기저기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그녀는 또 서둘러 옆의 수풀을 헤집기 시작했다.한편, 사라가 그렇게 찾던 대나무 헬리콥터는 덤불 속에 고요히 누워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작은 나무 조각 장난감도 놓여있었다.사라의 눈동자가 매섭게 움츠러들더니 갑자기 무언가가 심장에 꽂히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입술을 오므리고 떨리는 손을 뻗어 작은 장난감의 스위치를 천천히 눌러보았다.그 순간, 나무로 조각된 작은 곤충 한 마리가 그녀의 눈앞으로 뛰쳐나왔는데 그 모습은 마치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다.“하늘아, 울지 말고 이거 봐.”“와, 셋째 삼촌 감사합니다.”“넌 항상 셋째 삼촌한테만 고맙지? 왜, 내가 만들어 준 대나무 헬리콥터는 마음에 안 들어?”“그럴 리가요. 전 다 좋아요!”주변 공기가
자신이 대체 왜 반승제에게 그토록 집착하는지는 김상아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반승제를 본 순간, 그와의 깊은 인연을 느꼈을 뿐이다.앞으로 반승제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김상아는 피가 들끓어 오르고 입꼬리가 휘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여 그녀 역시 이 모든 것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상아는 곧바로 모든 데이터를 최적화하기 위해 더욱 빨리 움직였다.오후 2시, 백겸은 정시에 차를 타고 출발하여 작은 양옥에 도착했다.입구의 경비원은 이미 2년 전, 백겸 측의 인원으로 교체해 두었다.하여 백겸은 매우 순조롭게 들어올 수 있었지만 막상 양옥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자 조금 망설여졌다.양옥의 익숙한 모습을 보니 심장이 조금 뻐근했지만 그 또한 한순간이었고 백겸은 이미 진즉 감정을 추슬렀다.하늘에서는 가끔 헬리콥터가 날아다니는데 분명 저쪽 사람들이 이곳의 상황을 탐사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백겸은 전혀 두려울 것이 없다. 지금 이 구역은 이미 완전히 봉쇄되어 있고 그들이 이 안의 인질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한, 절대로 손을 쓰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오늘 밤만 지나면 지하 감옥에서 바로 국경으로 도망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백겸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음침한 미소가 입가에 그려졌다.방에 들어간 백겸은 심지어 부엌을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곳은 예전에 나설희가 가장 즐겨 머물던 곳이었다.이윽고 백겸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이미 실험실로 개조된 위층을 바라보았다.백겸이 지시한 것이었지만 직접 와서 본 적이 없기에 오늘 처음 온 것이다.그때, 사라는 고개를 들었다가 백겸이 도착한 것을 보자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박사님, 오셨어요?”백겸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반재인도 있었다.김상아는 반승제와 똑 닮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이게 바로 반승제의 그 대역이란 말인가? 정말 반승제 본인이라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반재인은 백겸의 뒤에 서 있었는데 몸매도 그렇고
“계속 조사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요즘은 다들 섣부른 행동 하지 말라고.”잠시 후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항상 하는 말이지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목숨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옆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연승혁은 옆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공허했다.과거 연씨 가문이 회색지대 사업을 했을 때는 항상 목숨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사업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전환한 이후 몇 년 동안 연씨 가문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에 불쾌하면서도 묘한 흥미를 느꼈다. 연승혁은 타고난 모험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그래, 누군지 한번 보자고.’연승혁은 문득 조금 전 할머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한 이름을 언급했었다.‘구은우?’하지만 연승혁은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왔기에 그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하찮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뭔가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알겠습니다, 형님.”배는 여전히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한편, 제원에서 원아정은 연씨 가문을 떠난 뒤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그녀는 공지민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공지민이 더 이상 제원에서 발붙일 수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차에 올라탄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집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아가씨, 우리가 10시간 동안 지켜봤지만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밖에서 음식을 배달한 것 같습니다.”원아정은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밖에서 배달 음식이 들어갔다고? 너희들 머리는 장식이야? 배달원으로 위장해서 안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해? 도대체 내가 왜 너희들을 고용한 거야!”전화를 끊은 뒤 그들은 그제야 원아정의 말에 따라 배달원으로 위장해 염정아가 머무
안정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게 무슨 뜻이니?”원아정은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히 말했다.“아, 할머니. 정말 모르신다면 승혁 오빠를 불러보세요. 저도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니까요. 어차피 지금은 공지민이라는 친손녀를 얻으셨으니 제 말은 믿지도 않으실 테고요. 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아정아, 너 나를 원망하는 거니?”원아정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안정숙은 지팡이를 꽉 쥐며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어르신, 아정 씨는 아마 결혼식 사건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 무례했습니다.”안정숙은 옆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분히 말했다.“아정이가 뭘 원망할 자격이 있나. 그날 일을 문제 삼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가 충분히 관대했던 거야. 저 아이는 단지 체면만 구긴 거지. 하지만 지민이는 그날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나. 역시나 반성할 줄 모르고, 저 아이를 집안에 들이지 않길 정말 잘했어.”가정부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위로했다.“어르신, 보시는 눈이 정확하십니다. 아정 씨는 확실히 그런 그릇이 아니죠.”설령 공지민과 관련된 일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원아정이 연씨 가문에 들어오면 결국 문제만 일으키게 될 것이다.최근 공지민과 관련된 일로 안절부절못하던 안정숙은 원아정의 말이 떠올라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혹시 그 당시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닐까?그녀는 즉시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이미 바다에 나가 있었다. 최근 거래에 문제가 생겼고 돌아오려면 사흘이 걸릴 거라고 했다.“할머니, 사흘 후에 찾아뵙겠습니다.”안정숙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안했다.그녀는 결국 직접 공지민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직접 그녀를 만나야만 마음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연승혁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원아정은 마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황급히 액셀을 밟아 한적한 도로 위에 차를 멈췄고 주변 교통경찰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확실한 정보야?”“확실해. 연씨 가문에서 이미 공식적으로 발표했어. 혹시 연승혁이 너를 차단해서 SNS에 올린 글을 못 본 거 아니야?”이 말은 원아정의 정곡을 저대로 찔렀다. 연승혁은 정말 그녀를 차단했다.원아정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전화를 끊고 바로 안정숙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안정숙도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쯤 되니, 이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녀는 직감했다.그래서 안정숙이 그렇게 공지민을 신경 쓴 거였다. 심지어 내 결혼식도 취소하면서까지...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그래서 그랬던 거구나!’원아정은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터무니없는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설마 결혼식장에서 안정숙이 공지민을 알아본 걸까?‘망할!’그녀는 속으로 수없이 욕을 퍼부었지만 상황이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연승혁과의 관계는 이제 완전히 끝났고 그녀는 자신이 공지민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공지민이 나에게 복수한다면 어떡하지?’그녀는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안 돼. 내가 먼저 손을 써야 해.’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구은우라는 이름이 떠올랐다.원아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내가 왜 구은우를 잊고 있었지? 구은우를 죽인 건 연승혁 아니었나? 공지민이 이제 연씨 가문의 사람이 됐다면 당연히 복수를 원하지 않을까?’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너무 우연 아닌가?’공지민이 정말 연씨 가문의 사람일까?혹시 공지민이 연승혁에게 접근해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걸 계획한 건 아닐까?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단순히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결론지었다.원아정은 갑자기 연승혁과 공지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떠올랐다.이 생각이 들자
안정숙은 깊은 한숨을 쉬며 연승혁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 네가 지민이를 잘 지켜봐.”연승혁은 안정숙과 함께 밖으로 잠시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원아정이었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전화를 차단해 버렸다.원아정은 화가 치밀었다. 최근 연승혁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SNS에 올려 자신과 완전히 연을 끊겠다고 공표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만 같아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다.‘이게 다 공지민 때문이야!’원아정은 즉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가 들어왔다.“아가씨, 공지민이 오늘 외출해서 쇼핑 중입니다.”“주소를 보내요.”원아정은 바로 차를 몰아 그 장소로 향했다. 그녀는 쇼핑몰에서 공지민을 발견했다.공지민은 아직도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강민지가 함께 있었다.강민지는 공지민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 전환 겸 바람이라도 쐬게 하려고 그녀를 불러냈다.공지민은 목발을 짚고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한 시계 매장을 지나던 중 눈길을 멈췄다. 한정판 시계를 보며 염정아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얼마 전 자신이 가진 40억을 전부 염정아에게 넘겨주고 정작 자신에겐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아침 온시환이 그녀에게 카드를 건넸다. 카드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연씨 가문에서 보낸 선물들에 자극받은 탓인지, 공지민은 보상의 의미로 염정아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매장 직원에게 시계를 꺼내 보여달라고 했다.강민지는 옆에서 시계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정말 예쁘다! 피부 톤이랑도 잘 어울려요. 게다가 다이아까지 박혀 있어서 완전 고급스럽네요.”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환 씨가 오늘 아침에
공지민은 연승혁의 말을 듣고 속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혈육의 정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연승혁은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친근하고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온시환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연승혁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항상 경계해야 해.’공지민은 이 순간에도 그의 말에 따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연승혁은 손에 든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미소를 지었다.“누나, 마음이 바뀌면 나한테 연락해요. 이건 내 전화번호예요.”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개인 번호예요.”공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바라보았다.카드는 별다른 장식 없이 간단했고 확실히 개인적인 물건처럼 보였다.그녀는 카드를 가방에 넣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연승혁의 의도가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이 집 밖으로 나가 차에 오르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상대는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그는 운전석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최근에 재미있는 걸 발견해서 가끔 들러서 장난 좀 치고 있어.”전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들리는 말로는 누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야?”“그래, 진짜야.”연승혁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대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씨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상대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승혁아, 근데 너 태도가 좀 이상한데? 그동안 네가 누나를 찾은 건 할머니를 위해서였잖아. 설사 누나를 찾았다고 해도 이렇게 적극적일 이유는 없을 텐데, 왜 그렇게 흥미를 보이는 거야?”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정말 흥미로운 여자거든.”상대가 무언가 더 말하자 그는 가볍게 욕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차를 몰아 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
공지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무슨 일이시죠? 시환 씨를 찾으러 오셨다면 오늘 집에 없어요.”아침 일찍부터 온시환은 외출한 상태였다. 어디로 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난 누나를 만나러 온 거예요. 누나, 정말 연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할머니가 오늘 아침 너무 상심하셔서 거의 쓰러질 뻔하셨어요.”연승혁은 부끄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입에 붙은 듯 자연스럽게 누나라고 부르면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반면 공지민은 그 호칭이 불편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그 호칭 좀 하지 마요.”연승혁은 근처 의자에 털썩 앉아 정원에 활짝 핀 꽃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공지민과 그 꽃들이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문득 과거에 자신이 창피당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약간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그럼 뭐라고 부르죠?”연승혁은 깔끔한 외모와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눈가의 십자 흉터는 그의 인상에 강인하고 냉혹한 분위기를 더했다.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는 그를 이국적인 매력으로 감싸고 있었다.“그냥 제 이름을 부르면 돼요.”“하지만 할머니가 그러지 말라시던데.”그의 시선은 계속 공지민에게 머물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누나, 원아정 때문이에요? 그래서 연씨 가문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공식적으로 발표했어요. 앞으로 원아정과는 더 이상 어떤 관계도 없을 거라고.”공지민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그게 이유 중 하나긴 해요.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요.”“다른 이유라니? 설마 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이 누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문제는 내가 다 처리할게요.”공지민은 앞에 핀 꽃 한 송이를 만지며 차갑게 말했다.“승혁 씨, 당신은 나를 연씨 가문에 진심으로 환영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나를 시험하거나, 관찰
마치 자기기만처럼 느껴졌다.공지민은 이미 온시환에게 약간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자 그 감정이 더욱 커졌다.사실 온시환의 말은 맞았다. 두 사람은 진지하게 앉아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들 사이에는 서로를 속이려는 의도만 가득했다.온시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차는 두 사람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집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공지민은 그를 바라보더니 양손으로 그의 목을 감쌌다.그는 그 순간 얼어붙었다. 공지민이 먼저 다가온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예전에는 언제나 자신을 대체품으로 여긴 것이 분명했다.그렇다면 지금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진심이 있는 걸까?온시환은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두려웠다. 대신 그녀를 안아 올려 2층으로 올라갔다.그 뒤의 일들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는 그녀를 단단히 품에 안았다.모든 것이 끝난 후에는 이미 한밤중이었다.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잠들지 않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풀리면서 묵었던 긴장감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지민아, 앞으로 무슨 계획이 있어?”“연씨 가문 사람들은 아직 나를 의심하고 있어요. 당장 들뜬 표정으로 연씨 가문에 들어갈 순 없어요. 그 사람들과 조금 더 연극을 해야 해요.”처음으로 공지민은 온시환 앞에서 자신의 이기적이고 냉혹한 면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봤고 그의 눈에는 단지 부드러운 미소만이 담겨 있었다.“그래서 너 처음 연예계에 들어간 것도 이걸 준비하기 위해서였어?”공지민은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차분하게 보냈다.반면 연승혁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야말로 그녀가 연기한 것이었다.“맞아요. 그렇다고 봐도 돼요. 언젠가 연기가 필요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공지민이 수년간 연기를 했음에도 여전히 조연 배우에 머무른 것도 바로 이 이유였다. 그녀는 스타가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이 한마디의 여파는 매우 컸다. 온시환은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공지민은 이미 오래전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녀를 버티게 한 것은 오직 구은우를 위한 복수라는 목적뿐이었다. 그녀는 그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목숨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럼 온시환은 대체 뭘까?그가 한 모든 일은 결국 그녀의 눈에 광대짓에 불과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공지민 역시 침묵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또다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온시환은 마침내 자신이 최근 느꼈던 불안의 근원을 깨달았다. 그는 공지민이 절대로 평범하게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언젠가 그녀가 폭발할 것임을 예감했었다. 단지 그녀가 이런 방식으로 행동에 나설 줄은 몰랐을 뿐이다.그는 웃음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웃을 수 없었다.이제 공지민의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고 중간에 멈출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의 속임수가 들통난다면 연승혁과 안정숙은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계략임을 알아챌 것이고 그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공지민은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태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두 사람을 무사히 속여 넘기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핸들을 꽉 쥐고 있던 온시환은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이번에는 공지민이 저항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의 질문이 들려왔다.“구은우를 위해 어떻게 복수할 생각인데? 연승혁을 죽일 거야?”공지민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가능하다면 죽이는 게 제일 좋겠지.”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금 네가 연승혁의 명목상 누나가 됐다고 해서, 연승혁이 너를 경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공지민, 넌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어.”공지민은 그의 품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적어도 지금은 기회가 있어.”온시환은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치 내일이면 더는 그녀를 안을 수 없을 것처럼.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더는 그녀에게 화내지 않겠다고. 그런
공지민은 온시환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의견도 내비치지 않을 줄은 몰랐다.안정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지민을 따라가며 외쳤다.“지민아, 정말 의논할 여지가 조금도 없는 거니? 우리 다 같은 가족인데, 대화를 통해 풀 수 있잖아.”연승혁이 안정숙을 부축하며 부드럽게 웃었다.“맞아요, 누나. 그냥 남아서 얘기 좀 해요. 할머니께서 누나 일로 오랫동안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연씨 가문이 마음에 안 든다 해도, 할머니 생각해서라도 우리랑 잘 얘기해 보는 게 좋잖아요.”공지민의 걸음이 멈췄다. 그 순간 온시환이 그녀의 손을 세게 잡아챘다.그의 힘은 너무 강해서 손가락뼈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풀리지 않았다.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온시환은 위험했다.안정숙이 계속 말을 이었다.“지민아, 우리가 잘못했어. 네 정체만 밝히면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어. 네가 겪은 일이 많아서 이미 마음이 많이 변했을 거란 걸 잊었어. 하지만 우리에게 만회할 기회를 줘. 앞으로는 승혁이가 널 잘 보호하게 할게. 너희 남매가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대화 좀 해봐.”공지민은 돌아서지 않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할머니, 죄송하지만 오늘 들은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라 조금 쉬고 싶어요.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그래, 그래. 아직 상처도 채 회복되지 않았으니 얼른 돌아가서 쉬어.”온시환은 그녀를 끌고 자리를 떠났다. 차에 오르자마자 온시환이 갑자기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공지민은 얼굴이 붉어지며 숨이 막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온시환은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풀지 않았다.공지민은 알고 있었다. 온시환은 이미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그녀는 연승혁에게 접근하여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위험을 감수했다.“공지민! 너 정말 미쳤어?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나를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