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내가 널 도울 수 있다는 거야.”남자는 진세운의 실명된 한쪽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승부욕이 강한 사람에게 이런 상처는 치명적인 타격일 것이다.“어때? 나와 함께 갈래?”진세운의 눈에는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했다. 옆에 있던 진백운이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했다. “세운아, 나 정말로 작은 섬에 가서 조용히 살고 싶어.”하지만 진세운은 진백운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그의 이상과 진백운의 이상은 근본적으로 달랐다.진백운은 그저 하늘을 보고 나뭇잎을 모으며 이 세상을 느끼고 싶어 했지만 진세운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을 통제하는 것이었다.지금 자신은 이렇게 초라한데 반승제와 성혜인은 평온하고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 게다가 나하늘조차도 평안하게 끝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왜 그들만 그래야 하지?진세운은 이 평온을 깨트릴 돌멩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진세운은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거짓이 아니어야 할 거야.”“내가 뭐 하러 널 속이겠어? 내 목표도 반승제인데.”반승제와 똑같이 생긴 이 남자는 누가 봐도 일부러 성형한 것이 분명한데,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진세운은 깊이 탐구할 생각도 없었다. 적의 적은 친구라 하지 않았던가.그는 한 발짝 내디디며 바로 남자를 따라 가려 했다. 그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진백운이 따라온 것이었다.“넌 왜 따라와? 작은 섬에 가서 살고 싶다며?”이 세상에서 진세운은 진백운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만약 진세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진백운은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진세운의 야망은 너무나 컸다.“나도 같이 갈래. 나, 나 이제 섬에 가서 살고 싶지 않아.”진세운은 진백운의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넌 꼭두각시야? 계속 기계처럼 행동하지 말고 제발 너만의 생각을 좀 가져!”진백운은 진세운에게 호되게 꾸중을 듣고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진세운은
한편 개인 공항에서 진세운은 조용히 그 남자의 뒤를 따라 한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여러 개의 가면이 걸려 있었다. 그중 하나는 고위층 인사들이 자주 사용하던 가면이었다. 이는 진세운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남자는 고위층 인사이거나 고위층의 신뢰를 받는 사람일 것이다.만약 성혜인이 이곳에 있었다면 이 남자가 칸다에서 반승제로 위장해 그녀를 데려가려 했던 사람임을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반승제가 마침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의 짐이 사라졌지만 그녀는 이 일을 반승제에게 언급하지 않았다.현재 방 안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이 남자는 반승제와 거의 판박이처럼 보였다. 반승제와 배현우는 몇 가지 비슷한 점이 있었지만 이 남자는 거의 완벽하게 복제된 수준이었다.진세운은 그가 기기 앞에 서서 복잡한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기기에서 음성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찾았어?”“찾았습니다. 오늘 밤 그들을 데리고 갈 겁니다.”“여석진은?”“여석진은 다리가 부러지고 완전히 무기력해져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 죽였습니다.”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진세운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상대방이 다시 물었다. “배현우는? 그와 나하늘은 첫 번째, 두 번째 실험체야. 반드시 둘 다 찾아야 해.”“배현우는 행방불명입니다. 현재로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습니다.”“우선 진세운을 데리고 와.”“알겠습니다.”남자가 손가락을 기기 위에 올려놓고 버튼을 누르는 순간, 기기가 꺼졌다. 이 장치에는 자폭 장치가 내장되어 있어 외부인의 지문이 감지되면 즉시 폭발하여 목숨을 앗아간다. 남자는 몸을 돌려 진세운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넌 여석진보다 더 가치 있어. 이제 비행기에 오르자. 우리가 가야 할 곳으로 가야지.”진세운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진백운은 계속해서 진세운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비행기는 오랜 시간 하늘을 날았다. 진세운은 익숙한 도
진세운은 할 말이 없었으나 은은히 가슴이 벅차올랐다.자동차가 맨 안쪽 건물에서 멈춰 섰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죽을 때까지도 백겸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반태승의 절친한 친구로서 반승제 역시 군대에 있을 때 그를 적극적으로 발탁해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사람의 속이 이토록 검을 줄이야.진세운은 그저 피식 웃으며 앞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문을 사이에 둔 저 너머에 반승제와 비슷하게 생긴 남자가 문 앞에 서서 눈앞의 방문을 두드렸다.“선생님, 그가 왔습니다.”그러자 방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를 만나러 올 필요는 없다. 가치가 남아있다면 남겨두도록 해.”그 말은 즉 가치가 없으면 죽여버리라는 뜻이다.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백겸은 산처럼 쌓아둔 자료 더미 앞에 앉아있었다.그 자료들은 모두 연구기지 내부에서 가져온 자료인데 아무리 기지 고위층이더라도 내부에서 제작한 약은 얻을 수 있지만 삼엄한 보안 속에서 그 누구도 고위층이 자발적으로 이 기밀 자료를 가져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이 또한 하나의 큰 추세가 되어버릴 것이다.서로 간의 견제가 있어야 연구기지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데 현재 기지는 무너지고 자료도 모두 반승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니 반승제가 이 전쟁의 가장 큰 승자가 된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잠깐 사색에 잠긴 백겸은 이내 콧등의 안경을 밀어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옆에 있는 앵글로 걸어갔다.암문이 열리고 그 안에 숨겨진 방 하나가 드러났다.안에는 두 개의 얼음 관이 있었는데 한 명은 그의 아들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아내였다.백겸은 어느덧 고령의 노인이 되어버렸고 몇 년 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그 뒤를 이어 아들도 그녀를 따라 저세상으로 가버렸다.반승제에게 전했던 말에 따르면 그의 아들을 포함한 많은 H국의 천재들이 연구기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달리 그의 아들은 연구기지에
한편, 성혜인은 이미 대학에 와 있었다.이 대학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로써 순위는 제원대와 막상막하이다. 그런데 서른밖에 되지 않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연이 이곳에서 교수직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매우 우수한 인재임을 알 수 있었다.성혜인은 그녀가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허리를 숙이고 배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에 목도리를 둘러 부드러움을 연출해낸 당시연의 시선이 곧장 성혜인에게 몇 초간 머물렀다. 이윽고 상황파악을 하던 그녀는 조금 당황한 듯 천천히 다가가 망설이며 물었다.“괜찮으세요? 혹시 어디 불편하십니까?”바로 그때, 성혜인이 고개를 들었고 두 사람의 시선이 한 공간에서 부딪혔다.그리고 당시연은 성혜인을 알고 있는 듯 조금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당신은... 혹시 S.M의 성혜인 씨?”올 한 해 동안 S.M이 워낙 눈에 띄었는지라 그룹 대표인 성혜인의 개인 정보도 이미 사람들에 의해 수백 번 털려버렸다.게다가 반승제와 스캔들까지 터지는 바람에 실검까지 올라갔었다.이에 조금 민망해진 성혜인은 비로소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깨닫고 다시 허리를 폈다.“아, 저 맞습니다.”그러자 당시연은 귓가의 머리카락 한 올을 뒤로 넘기며 입술을 오므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지난번에 병원 밖에 있을 때도 혜인 씨를 만났는데... 혜인 씨는 그때 저를 찾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혜인 씨 회사에 제 학생이 있습니다. 아직 정식 데뷔는 아니지만 대우가 좋다고 얼마나 칭찬해대는지...”그 말을 들으니 성혜인은 더 어색해지고 말았다. 원래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그녀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계획이었으나 당시연이 그녀를 알고 있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임신하며 지능까지 수직으로 하락한 것인지 모를 노릇이다.“아, 그것참 영광이네요. 저도 확실히 시연 씨를 찾을 일이 있어요. 전에 들은 바로는 영어 선생님이시라면서요?”당시연은 그녀와 나란히 걸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
나이 얘기가 나오자마자 한없이 작아지는 당시연에 성혜인은 또다시 상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혹시 원진이 아직 24살이라 30살인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너무 커서 감히 고백하지 못했던 걸까?하지만 원진이 먼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가 사랑에 빠졌을 때, 당시연은 약혼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그래서 원진은 줄곧 당시연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억누르며 지금에 와서 결국 참지 못하고 몰래 그녀의 삶을 염탐하면서도 그녀와 만나지 않는 것이다.“최근 승제 씨가 원진 씨에게 밥을 사주려고 하는데 시연 씨도 시간이 있으실지 모르겠네요. 두 분은 이미 안면이 있으시고 저도 시연 씨와 친구로 지내고 싶으니 이 기회에 시연 씨도 같이 오시겠어요?”그러자 당시연은 처음에는 멍하니 넋을 잃더니 그 뒤에는 안절부절못하며 망설였지만 결국 입을 오므린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성혜인도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기다려주었다.그렇게 10초 후에야 당시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하지만 그 사람은 저를 별로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 어쨌든 당시 조금 불쾌하게 끝나버렸으니까요.”아마 약혼자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성혜인은 순간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다급히 말을 꺼냈다.“좋아요. 주소가 확정되면 보내드릴게요. 혹시 카톡 연락처 교환해도 될까요?”그러자 당시연은 즉시 QR코드를 제시해주었고 두 사람은 친구 추가에 성공했다.성혜인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일은 절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연 본인이 원한 것이고 아무도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이제 서른 살이 되었으니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당시연도 잘 알고 있다.그리고 원진에 대해서도 감정이 아예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그렇게 성혜인은 대학교에서 나와 차를 타고 네이처 빌리지로 돌아갔다.같은 시각, 반승제는 흰둥이를 훈련하고 있었다. 흰둥이는 높이 뛰어다니며 훈련을 즐겼고 한편, 겨울이는 다른 한
한편, 성혜인은 방긋 웃으며 당시연을 바라보았다.“들어와요. 자리 남겨놨어요.”당시연은 목에 두른 캐시미어 얇은 목도리를 벗자마자 검은 옷을 입은 원진이 한눈에 들어왔다.그러나 원진은 똑바로 앉은 채 그녀를 보지 않았다.당시연은 괜히 마음이 쓰려와 성혜인을 따라 룸으로 들어왔다.성혜인이 의자를 당겨주자 당시연도 감사 인사를 표했다.“감사합니다.”조금 전까지도 반승제에게 비아냥거리던 원진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당시연이 먼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진아, 오랜만이야.”그러자 원진은 더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몇 초 뒤에야 대충 응해주었다.“네.”당시연은 갑자기 이곳에 온 것이 후회되었다. 괜히 그녀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만 같았다.이윽고 성혜인이 그녀에게 젓가락을 건네주자 그녀는 또 고맙다고 감사를 표했다.룸 안의 분위기는 확실히 미묘하게 흘러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원진은 마침내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오랜만이에요.”순식간에 달라진 원진의 태도에 반승제는 어이가 없었다. 아마 당시연을 미행한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닐 것이다.사람들은 모두 원진을 미치광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적은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 게다가 정말 미쳐버리면 시체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고 말이다.그런데 그런 원진이 현재 눈앞에 있는 그릇을 응시하며 멍하니 앉아있으니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당시연은 예전부터 원진을 살뜰히 돌봐주었다. 게다가 다정한 누나 스타일이라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원진에게 차 한 잔 따라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하지만 당시연이 손을 쓰기도 전에 이미 원진이 먼저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그러자 당황한 당시연이 약간 자조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아 미안해. 이미 다 컸다는 걸 까먹었다.”참 씁쓸한 말이었다. 때때로 잠깐 몸을 돌렸을 뿐인데 이미 몇 년이라는 긴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리곤 한다.원진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춰 섰고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한편
말을 마친 원진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토록 완벽하던 그도 당시연 앞에만 서면 한없이 멍청해지는 것 같다.당시연은 원래 원진에게 음식을 집어주려고 했지만 원진의 말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두 사람은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분위기는 일순간 침묵으로 변했다.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성혜인은 반승제의 인정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갚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여 성혜인은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배를 슬쩍 어루만졌다. 그리고 원진의 농담거리를 지켜보고 있던 반승제는 그녀의 이 동작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바로 그녀를 부축해주었다.“어디 아파?”“조금요. 바람 쐬러 나가고 싶어요.”“내가 부축해줄게.”그렇게 두 사람은 일어나서 함께 룸을 나섰다.그들이 떠나자 룸 안에 남겨진 두 사람은 더욱 어색해졌다.원진은 당시연에게 차 한 잔을 더 따라주었다.당시연은 눈앞에 나타난 훤칠한 손가락을 쳐다보며 추억에 잠겼다.원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큰 키에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고 안색이 약간 병적인 느낌이 드는 것을 보아 명백한 영양실조였다.그 후 1년 동안 꾸준히 몸조리한 후에야 비로소 회복할 수 있었다.“진아, 수능 끝나고 왜 인사도 없이 갔어? 혹시 우리 부모님이 너 곤란하게 하셨어?”“아니에요.”이번에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원진이 천천히 앞에 놓인 잔을 쥐어 잡았다.시연 누나라는 말은 아무리 노력해도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묵묵히 원진을 지켜보던 당시연은 입꼬리를 올리고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그러나 다 쓰다듬은 뒤에야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동작에 충격을 받았고 곧이어 원진은 이미 24살의 성인 남자라는 것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손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미안해, 쓰다듬어주는 게 익숙해서... 그때 우리 부모님과 심하게 싸우며 듣기 싫은 말들이 오갔는데 아직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도 못 했네. 어렵게 연락처를 얻
그러자 성혜인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팔짱을 끼며 차에 올라탔다.원진과 당시연만 행복하다면 그녀의 노력도 결코 물거품이 아니다.위층.반승제의 조롱을 받고 원진의 몸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렸다.그는 손을 대지도 않은 눈앞의 요리들을 바라보며 한쪽의 공용 젓가락으로 당시연에게 갈비를 하나 집어주었다.당시연도 원래 더 머물고 싶었지만 그 순간, 그녀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어머니였다.당시연은 수신 버튼을 누르고는 조금 허탈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엄마, 나 오늘 진짜 야근했어. 일부러 안 만난 거 아니야... 그건 나도 알아. 그래, 그럼 한 시간 후에 만나.”전화를 끊은 뒤, 당시연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진아, 너 제원에서 며칠 동안 지낼 계획이야? 나 앞으로 며칠 동안은 외지로 출장 갈 것 같은데 혹시 나중에 제원에 다시 오게 되면 그때도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을까?”어머니가 당시연에게 소개팅 상대를 주선해 주며 이미 그 사람과 약속을 잡았으니 멋대로 바람맞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러자 원진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꺼냈다.“내가 배웅해줄게요.”“나 차 가지고 왔어.”“그럼 저 배웅해줘요.”“....”결국, 두 사람은 함께 자동차에 올라탔다.당시연은 운전석에 앉아 호텔 위치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는데 뜻밖에도 이 호텔은 그녀의 집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이렇게 가까운 데 있으며 한 번도 그녀에게 전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단 말인가?서운함을 금치 못한 당시연이 눈꺼풀을 내리 드리우며 눈 속에 담긴 감정을 애써 감췄다.원진은 조수석에 앉아 여러 가지 화제를 떠올렸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진아, 대학은 어디서 다녔어?”당시 원진은 수능이 끝나자마자 집을 떠나는 바람에 그가 어디로 갔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당시연 역시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첫해에는 갖은 방법을 써도 그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플로리아요.”“졸업한 지도 1년이 지났겠다. 제원으로 돌아와 일할 생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
[원진과는 이미 연락했어요. 원진도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는 데 동의했어요. 다만 문제는 원아정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당장은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거예요.][흥, 그 정도는 해줘야지.]연승혁은 이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공지민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얼굴에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그녀의 시선은 곧장 연승혁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금테 안경을 쓴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첫눈에도 지적이고 세련된 인상을 풍겼다.‘분명 낯익은 얼굴인데... 어디서 봤지?’연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소개했다.“이쪽은 내 친한 친구, 이상우예요.”순간 공지민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이상우, 이 사람은 과거 그녀가 찾아갔던 유명한 최면술사의 수제자였다.최근 그 대가가 은퇴하고 이제 그의 제자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었었다.공지민은 아무 일도 없는 척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공지민입니다.”하지만 이상우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과거 그녀와 짧은 시간 교류한 적이 있었고 그때 그는 그녀를 최면하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그의 스승은 공지민의 마음속 집착이 너무 깊어 최면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었다.더군다나 스승과 함께 수련하던 한 달 동안, 이상우는 공지민에게 진지하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마음속 그 사람을 잊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었다.지금 이 순간, 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이상우의 손을 잡았다.“안녕하세요.”이상우는 한순간 흔들리는 눈빛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혁이한테서 얘기 들었어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서요. 오늘 저랑 편하게 얘기 나눠보실래요?”얘기를 나누자는 말은 곧 그녀를 최면에 빠뜨리겠다는 의미였다.공지민은 그제야 연승혁을 흘깃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 리가 없는 연승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앉아요, 누나.”공지민은 자리에 앉
원아정은 팔꿈치로 미친 듯이 차창을 내리치며 동시에 운전대를 잡아당겼다. 게다가 뒤따라오는 경찰도 따돌리지 못하자 운전자는 결국 공항으로 가는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차는 이리저리 우회하며 간신히 경찰들을 따돌렸지만 결국 사람들로 붐비는 번잡한 지역에 들어서고 말았다.원아정은 문을 발로 차며 열고는 곧장 밖으로 내달렸다.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은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달려들어 경호운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경호원들은 이마에 땀이 맺히며 초조하게 멀어져가는 원아정을 바라보았다. 여자 하나를 공항까지 데려가라는 지시였을 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을까.진작에 마취라도 시킬 걸 싶었지만 마취한 상태로는 공항 보안검색을 통과할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결국 운전자는 급히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들은 연승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겨우 이런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해?”경호원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연승혁은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됐어. 다음 기회에 다시 처리하면 되니까. 우선 원진에게 이 일을 설명해야겠군.”원진만 동의하면 원아정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떠나야 할 운명이었다....원아정은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공지민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다 그년 때문이야. 그년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나는 연승혁과 결혼해서 상류층 생활을 하고 있었을 텐데... 이런 꼴을 당할 필요도 없었어.’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이전의 공지민은 그저 그녀 발밑에 있는 하찮은 존재였는데, 이제 상황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원아정은 허름하고 지저분한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지나가던 노숙자와 옷을 바꿔 입은 뒤, 다시 나왔을 때 그녀는 초라하고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거리를 전전하며 숨어 지
하지만 연승혁은 이 일을 아주 은밀하게 처리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으니 고작 연예계에서 떠도는 무명 배우에 불과한 공지민이 진실을 알아낼 리 없었다.설령 나중에 공지민이 온시환과 얽혔다 해도, 온시환이 처음부터 그녀를 장난감처럼 여겼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를 위해 이런 일을 조사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연승혁은 지금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는 공지민이 아직 진실을 모르고 진짜 연씨 가문의 딸이며 구은우와의 관계는 그저 악연일 뿐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모든 일을 계획해 구은우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연승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만약 후자라면 이거야말로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최근 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평온했다. 그런데 이렇게 흥미진진한 일이 불쑥 나타나다니.그는 안정숙을 찾아가 당시 진행했던 두 번의 유전자 검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했다.하나는 머리카락을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쓰레기통에 버린 이쑤시개를 쓴 결과라는 말을 들은 연승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만약 이 정도까지 속일 수 있다면, 공지민도 참 대단한 사람이겠네.’“승혁아, 난 이제 나이가 많아서 이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너 솔직히 말해봐. 원아정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긴 한 거니?”“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할머니가 진행한 두 번의 친자 검사는 꽤 신뢰할 만한 결과잖아요. 그런 걸 조작하는 건 쉽지 않죠.”“휴,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일인지 원... 난 그저 내 손녀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할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걱정하지 말라니! 내가 어떻게 걱정 안 할 수 있겠니!”안정숙은 화가 난 듯 지팡이를 힘껏 바닥에 내리찍었다.“네가 조사한 구은우에 대한 자료, 나도 봤어. 그 아이 정말 뛰어난 사람이더라. 만약 지민이가 정말 그 아이를 좋아했고,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에 잃었다면? 너 같으면 그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을 잊을 수 있겠니
연승혁을 마주했을 때 원아정의 눈가에 잠시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오빠...”하지만 연승혁은 등을 기대며 차갑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쓸데없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거라면, 당장 사람 불러서 쫓아낼 테니까.”원아정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꾸며낸 애잔함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연승혁이 옆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조용히 자리에 앉은 원아정은 이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았다.그때 안정숙이 입을 열었다.“마침 승혁이도 있으니, 구은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거라.”애초에 원아정은 이 일을 말하려고 온 터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오늘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으니까요.”그녀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자의 눈매는 연승혁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안정숙과 연승혁 모두 한눈에 알아챘다. 이 남자는 분명 연씨 가문의 핏줄이었다.이미 벼랑 끝에 선 원아정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공지민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해외로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승혁 오빠, 이 얼굴 잘 보세요. 연씨 가문이 큰 혼란에 휩싸였던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아버님께서 밖에 아들을 하나 두셨다고요. 물론 그건 아버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계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이 그 일을 평생 떨쳐내지 못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언니가 실종된 것도 큰 상처였지만 아버님이 다른 여자를 품었다는 사실은 어머님께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어요. 그 상처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여자가 임신한 걸 알고도 가만두지 않으셨어요. 그 여자는 목숨을 건져 간신히 도망쳤고, 결국 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구은우예요. 그러니까 구은우는 승혁 오빠의 이복동생이라는 말이에요.”연승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안정숙의 시선을 의식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