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내가 널 도울 수 있다는 거야.”남자는 진세운의 실명된 한쪽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승부욕이 강한 사람에게 이런 상처는 치명적인 타격일 것이다.“어때? 나와 함께 갈래?”진세운의 눈에는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했다. 옆에 있던 진백운이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했다. “세운아, 나 정말로 작은 섬에 가서 조용히 살고 싶어.”하지만 진세운은 진백운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그의 이상과 진백운의 이상은 근본적으로 달랐다.진백운은 그저 하늘을 보고 나뭇잎을 모으며 이 세상을 느끼고 싶어 했지만 진세운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을 통제하는 것이었다.지금 자신은 이렇게 초라한데 반승제와 성혜인은 평온하고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 게다가 나하늘조차도 평안하게 끝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왜 그들만 그래야 하지?진세운은 이 평온을 깨트릴 돌멩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진세운은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거짓이 아니어야 할 거야.”“내가 뭐 하러 널 속이겠어? 내 목표도 반승제인데.”반승제와 똑같이 생긴 이 남자는 누가 봐도 일부러 성형한 것이 분명한데,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진세운은 깊이 탐구할 생각도 없었다. 적의 적은 친구라 하지 않았던가.그는 한 발짝 내디디며 바로 남자를 따라 가려 했다. 그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진백운이 따라온 것이었다.“넌 왜 따라와? 작은 섬에 가서 살고 싶다며?”이 세상에서 진세운은 진백운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만약 진세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진백운은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진세운의 야망은 너무나 컸다.“나도 같이 갈래. 나, 나 이제 섬에 가서 살고 싶지 않아.”진세운은 진백운의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넌 꼭두각시야? 계속 기계처럼 행동하지 말고 제발 너만의 생각을 좀 가져!”진백운은 진세운에게 호되게 꾸중을 듣고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진세운은
한편 개인 공항에서 진세운은 조용히 그 남자의 뒤를 따라 한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여러 개의 가면이 걸려 있었다. 그중 하나는 고위층 인사들이 자주 사용하던 가면이었다. 이는 진세운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남자는 고위층 인사이거나 고위층의 신뢰를 받는 사람일 것이다.만약 성혜인이 이곳에 있었다면 이 남자가 칸다에서 반승제로 위장해 그녀를 데려가려 했던 사람임을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반승제가 마침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의 짐이 사라졌지만 그녀는 이 일을 반승제에게 언급하지 않았다.현재 방 안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이 남자는 반승제와 거의 판박이처럼 보였다. 반승제와 배현우는 몇 가지 비슷한 점이 있었지만 이 남자는 거의 완벽하게 복제된 수준이었다.진세운은 그가 기기 앞에 서서 복잡한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기기에서 음성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찾았어?”“찾았습니다. 오늘 밤 그들을 데리고 갈 겁니다.”“여석진은?”“여석진은 다리가 부러지고 완전히 무기력해져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 죽였습니다.”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진세운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상대방이 다시 물었다. “배현우는? 그와 나하늘은 첫 번째, 두 번째 실험체야. 반드시 둘 다 찾아야 해.”“배현우는 행방불명입니다. 현재로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습니다.”“우선 진세운을 데리고 와.”“알겠습니다.”남자가 손가락을 기기 위에 올려놓고 버튼을 누르는 순간, 기기가 꺼졌다. 이 장치에는 자폭 장치가 내장되어 있어 외부인의 지문이 감지되면 즉시 폭발하여 목숨을 앗아간다. 남자는 몸을 돌려 진세운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넌 여석진보다 더 가치 있어. 이제 비행기에 오르자. 우리가 가야 할 곳으로 가야지.”진세운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진백운은 계속해서 진세운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비행기는 오랜 시간 하늘을 날았다. 진세운은 익숙한 도
진세운은 할 말이 없었으나 은은히 가슴이 벅차올랐다.자동차가 맨 안쪽 건물에서 멈춰 섰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죽을 때까지도 백겸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반태승의 절친한 친구로서 반승제 역시 군대에 있을 때 그를 적극적으로 발탁해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사람의 속이 이토록 검을 줄이야.진세운은 그저 피식 웃으며 앞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문을 사이에 둔 저 너머에 반승제와 비슷하게 생긴 남자가 문 앞에 서서 눈앞의 방문을 두드렸다.“선생님, 그가 왔습니다.”그러자 방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를 만나러 올 필요는 없다. 가치가 남아있다면 남겨두도록 해.”그 말은 즉 가치가 없으면 죽여버리라는 뜻이다.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백겸은 산처럼 쌓아둔 자료 더미 앞에 앉아있었다.그 자료들은 모두 연구기지 내부에서 가져온 자료인데 아무리 기지 고위층이더라도 내부에서 제작한 약은 얻을 수 있지만 삼엄한 보안 속에서 그 누구도 고위층이 자발적으로 이 기밀 자료를 가져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이 또한 하나의 큰 추세가 되어버릴 것이다.서로 간의 견제가 있어야 연구기지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데 현재 기지는 무너지고 자료도 모두 반승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니 반승제가 이 전쟁의 가장 큰 승자가 된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잠깐 사색에 잠긴 백겸은 이내 콧등의 안경을 밀어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옆에 있는 앵글로 걸어갔다.암문이 열리고 그 안에 숨겨진 방 하나가 드러났다.안에는 두 개의 얼음 관이 있었는데 한 명은 그의 아들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아내였다.백겸은 어느덧 고령의 노인이 되어버렸고 몇 년 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그 뒤를 이어 아들도 그녀를 따라 저세상으로 가버렸다.반승제에게 전했던 말에 따르면 그의 아들을 포함한 많은 H국의 천재들이 연구기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달리 그의 아들은 연구기지에
한편, 성혜인은 이미 대학에 와 있었다.이 대학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로써 순위는 제원대와 막상막하이다. 그런데 서른밖에 되지 않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연이 이곳에서 교수직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매우 우수한 인재임을 알 수 있었다.성혜인은 그녀가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허리를 숙이고 배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에 목도리를 둘러 부드러움을 연출해낸 당시연의 시선이 곧장 성혜인에게 몇 초간 머물렀다. 이윽고 상황파악을 하던 그녀는 조금 당황한 듯 천천히 다가가 망설이며 물었다.“괜찮으세요? 혹시 어디 불편하십니까?”바로 그때, 성혜인이 고개를 들었고 두 사람의 시선이 한 공간에서 부딪혔다.그리고 당시연은 성혜인을 알고 있는 듯 조금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당신은... 혹시 S.M의 성혜인 씨?”올 한 해 동안 S.M이 워낙 눈에 띄었는지라 그룹 대표인 성혜인의 개인 정보도 이미 사람들에 의해 수백 번 털려버렸다.게다가 반승제와 스캔들까지 터지는 바람에 실검까지 올라갔었다.이에 조금 민망해진 성혜인은 비로소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깨닫고 다시 허리를 폈다.“아, 저 맞습니다.”그러자 당시연은 귓가의 머리카락 한 올을 뒤로 넘기며 입술을 오므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지난번에 병원 밖에 있을 때도 혜인 씨를 만났는데... 혜인 씨는 그때 저를 찾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혜인 씨 회사에 제 학생이 있습니다. 아직 정식 데뷔는 아니지만 대우가 좋다고 얼마나 칭찬해대는지...”그 말을 들으니 성혜인은 더 어색해지고 말았다. 원래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그녀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계획이었으나 당시연이 그녀를 알고 있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임신하며 지능까지 수직으로 하락한 것인지 모를 노릇이다.“아, 그것참 영광이네요. 저도 확실히 시연 씨를 찾을 일이 있어요. 전에 들은 바로는 영어 선생님이시라면서요?”당시연은 그녀와 나란히 걸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
나이 얘기가 나오자마자 한없이 작아지는 당시연에 성혜인은 또다시 상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혹시 원진이 아직 24살이라 30살인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너무 커서 감히 고백하지 못했던 걸까?하지만 원진이 먼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가 사랑에 빠졌을 때, 당시연은 약혼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그래서 원진은 줄곧 당시연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억누르며 지금에 와서 결국 참지 못하고 몰래 그녀의 삶을 염탐하면서도 그녀와 만나지 않는 것이다.“최근 승제 씨가 원진 씨에게 밥을 사주려고 하는데 시연 씨도 시간이 있으실지 모르겠네요. 두 분은 이미 안면이 있으시고 저도 시연 씨와 친구로 지내고 싶으니 이 기회에 시연 씨도 같이 오시겠어요?”그러자 당시연은 처음에는 멍하니 넋을 잃더니 그 뒤에는 안절부절못하며 망설였지만 결국 입을 오므린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성혜인도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기다려주었다.그렇게 10초 후에야 당시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하지만 그 사람은 저를 별로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 어쨌든 당시 조금 불쾌하게 끝나버렸으니까요.”아마 약혼자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성혜인은 순간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다급히 말을 꺼냈다.“좋아요. 주소가 확정되면 보내드릴게요. 혹시 카톡 연락처 교환해도 될까요?”그러자 당시연은 즉시 QR코드를 제시해주었고 두 사람은 친구 추가에 성공했다.성혜인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일은 절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연 본인이 원한 것이고 아무도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이제 서른 살이 되었으니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당시연도 잘 알고 있다.그리고 원진에 대해서도 감정이 아예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그렇게 성혜인은 대학교에서 나와 차를 타고 네이처 빌리지로 돌아갔다.같은 시각, 반승제는 흰둥이를 훈련하고 있었다. 흰둥이는 높이 뛰어다니며 훈련을 즐겼고 한편, 겨울이는 다른 한
한편, 성혜인은 방긋 웃으며 당시연을 바라보았다.“들어와요. 자리 남겨놨어요.”당시연은 목에 두른 캐시미어 얇은 목도리를 벗자마자 검은 옷을 입은 원진이 한눈에 들어왔다.그러나 원진은 똑바로 앉은 채 그녀를 보지 않았다.당시연은 괜히 마음이 쓰려와 성혜인을 따라 룸으로 들어왔다.성혜인이 의자를 당겨주자 당시연도 감사 인사를 표했다.“감사합니다.”조금 전까지도 반승제에게 비아냥거리던 원진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당시연이 먼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진아, 오랜만이야.”그러자 원진은 더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몇 초 뒤에야 대충 응해주었다.“네.”당시연은 갑자기 이곳에 온 것이 후회되었다. 괜히 그녀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만 같았다.이윽고 성혜인이 그녀에게 젓가락을 건네주자 그녀는 또 고맙다고 감사를 표했다.룸 안의 분위기는 확실히 미묘하게 흘러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원진은 마침내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오랜만이에요.”순식간에 달라진 원진의 태도에 반승제는 어이가 없었다. 아마 당시연을 미행한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닐 것이다.사람들은 모두 원진을 미치광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적은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 게다가 정말 미쳐버리면 시체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고 말이다.그런데 그런 원진이 현재 눈앞에 있는 그릇을 응시하며 멍하니 앉아있으니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당시연은 예전부터 원진을 살뜰히 돌봐주었다. 게다가 다정한 누나 스타일이라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원진에게 차 한 잔 따라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하지만 당시연이 손을 쓰기도 전에 이미 원진이 먼저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그러자 당황한 당시연이 약간 자조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아 미안해. 이미 다 컸다는 걸 까먹었다.”참 씁쓸한 말이었다. 때때로 잠깐 몸을 돌렸을 뿐인데 이미 몇 년이라는 긴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리곤 한다.원진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춰 섰고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한편
말을 마친 원진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토록 완벽하던 그도 당시연 앞에만 서면 한없이 멍청해지는 것 같다.당시연은 원래 원진에게 음식을 집어주려고 했지만 원진의 말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두 사람은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분위기는 일순간 침묵으로 변했다.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성혜인은 반승제의 인정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갚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여 성혜인은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배를 슬쩍 어루만졌다. 그리고 원진의 농담거리를 지켜보고 있던 반승제는 그녀의 이 동작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바로 그녀를 부축해주었다.“어디 아파?”“조금요. 바람 쐬러 나가고 싶어요.”“내가 부축해줄게.”그렇게 두 사람은 일어나서 함께 룸을 나섰다.그들이 떠나자 룸 안에 남겨진 두 사람은 더욱 어색해졌다.원진은 당시연에게 차 한 잔을 더 따라주었다.당시연은 눈앞에 나타난 훤칠한 손가락을 쳐다보며 추억에 잠겼다.원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큰 키에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고 안색이 약간 병적인 느낌이 드는 것을 보아 명백한 영양실조였다.그 후 1년 동안 꾸준히 몸조리한 후에야 비로소 회복할 수 있었다.“진아, 수능 끝나고 왜 인사도 없이 갔어? 혹시 우리 부모님이 너 곤란하게 하셨어?”“아니에요.”이번에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원진이 천천히 앞에 놓인 잔을 쥐어 잡았다.시연 누나라는 말은 아무리 노력해도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묵묵히 원진을 지켜보던 당시연은 입꼬리를 올리고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그러나 다 쓰다듬은 뒤에야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동작에 충격을 받았고 곧이어 원진은 이미 24살의 성인 남자라는 것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손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미안해, 쓰다듬어주는 게 익숙해서... 그때 우리 부모님과 심하게 싸우며 듣기 싫은 말들이 오갔는데 아직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도 못 했네. 어렵게 연락처를 얻
그러자 성혜인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팔짱을 끼며 차에 올라탔다.원진과 당시연만 행복하다면 그녀의 노력도 결코 물거품이 아니다.위층.반승제의 조롱을 받고 원진의 몸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렸다.그는 손을 대지도 않은 눈앞의 요리들을 바라보며 한쪽의 공용 젓가락으로 당시연에게 갈비를 하나 집어주었다.당시연도 원래 더 머물고 싶었지만 그 순간, 그녀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어머니였다.당시연은 수신 버튼을 누르고는 조금 허탈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엄마, 나 오늘 진짜 야근했어. 일부러 안 만난 거 아니야... 그건 나도 알아. 그래, 그럼 한 시간 후에 만나.”전화를 끊은 뒤, 당시연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진아, 너 제원에서 며칠 동안 지낼 계획이야? 나 앞으로 며칠 동안은 외지로 출장 갈 것 같은데 혹시 나중에 제원에 다시 오게 되면 그때도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을까?”어머니가 당시연에게 소개팅 상대를 주선해 주며 이미 그 사람과 약속을 잡았으니 멋대로 바람맞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러자 원진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꺼냈다.“내가 배웅해줄게요.”“나 차 가지고 왔어.”“그럼 저 배웅해줘요.”“....”결국, 두 사람은 함께 자동차에 올라탔다.당시연은 운전석에 앉아 호텔 위치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는데 뜻밖에도 이 호텔은 그녀의 집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이렇게 가까운 데 있으며 한 번도 그녀에게 전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단 말인가?서운함을 금치 못한 당시연이 눈꺼풀을 내리 드리우며 눈 속에 담긴 감정을 애써 감췄다.원진은 조수석에 앉아 여러 가지 화제를 떠올렸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진아, 대학은 어디서 다녔어?”당시 원진은 수능이 끝나자마자 집을 떠나는 바람에 그가 어디로 갔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당시연 역시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첫해에는 갖은 방법을 써도 그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플로리아요.”“졸업한 지도 1년이 지났겠다. 제원으로 돌아와 일할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