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했더니 일꾼 노예찬이잖아? 드디어 돈 생겨서 인테리어 하는 거야? 아니, 돈이 있으면 물이 새는 지붕부터 고쳐야지. 안 그러면 지금처럼 옷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잖아. 다들 너랑 짝궁하기 싫어하는데 자존심 상하지 않아?”재벌 2세 하정우는 차 문을 열고 거만한 표정으로 트럭을 훑었다.“대출로 이 많은 걸 산 거야? 언제 다 갚으려고? 저 안에 있는 거지들을 다 팔아도 트럭 한 대 값도 못 벌 것 같은데?”하정우는 팔짱을 끼며 입꼬리를 올렸다.그의 시선은 마침내 성혜인에게 머물렀고 순간 눈이 반짝이더니 곧바로 싸늘하게 돌변했다.“네 얼굴에 반해서 들러붙은 여자야?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전에 우리 학교 퀸카가 너한테 조금 잘해줬다고 바로 러브레터를 썼잖아. 결국에는 어떻게 됐어? 걔는 그냥 널 갖고 논 거야. 성적만 좋아서 뭐 하냐?”하정우는 욕설을 퍼부으면서 한편으로는 질투심에 겨워 뚫어지라 노예찬의 목을 바라봤다.지난 몇 년 동안, 노예찬은 이 섬에서 상위 10위에 진입한 최초의 학생이었다.학교 측은 이 영광을 누리려고 며칠 동안 현수막을 걸었고 감사의 의미로 10만 원을 줬다고 한다.하정우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망설임 없이 성혜인을 만졌다.“너한테 들러붙은 여차 치고는 예쁘네? 어느 학교 퀸카야?”성혜인은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랐다. 어이가 없는 듯 곧장 하정우의 손을 내리쳤다.그러자 하정우는 순식간에 표정이 돌변했다.“X발. 네까짓 게 뭔데 나한테 이래? 좋아해 주면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내가 손 하나만 까딱해도 고마워하는 인간들이 널렸다고.”이때 또다시 차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저분이 마음에 드셨어요?”하정우는 ‘퉤’하며 바닥에 침을 뱉더니 수표 몇 장을 꺼내 던졌다.“이게 뭔지 알아? 이걸 보고도 저 거지 새끼랑 붙어먹는 건 아니겠지? 경고하는데, 내가 이대로 가잖아? 넌 내일 무조건 울면서 찾아와서 나한테 빌
성혜인은 노예찬이 돈을 주우려 하자 덥석 붙잡고선 먼저 허리를 굽혔다.“내가 주울게.”그녀는 오늘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바로 사람들의 월급이 대체로 너무 낮다는 것이다.그러니 1000억 정도의 몸값이라면 충분히 이 섬에서 큰소리 떵떵 치며 살 수 있다.하지만 성혜인이 부족한 건 돈이 아니다.그녀가 떠나기 전 설의종은 1000억에 비할 수 없는 금액이 담긴 카드를 줬다.심지어 제원에 있는 회사를 포함한다면 1000억은 비할 것도 없다.노예찬은 성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지만, 그저 묵묵히 트럭에서 짐을 옮겼다.바로 이때 성혜인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1000억으로 하씨 가문 소유의 그룹을 살까?”노예찬은 그 말에 놀란 듯 짐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성혜인이 자극을 받아 흥분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성혜인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호화로운 고층 빌딩 몇 개를 발견했다.고층 빌딩은 아마도 이 섬의 소위 엘리트들이 일하는 곳이다. 어쩌면 섬 밖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지만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바다뿐이다.성혜인은 몸을 숙이며 짐을 안으로 옮겼다.“그런데 나 혼자만으로는 안돼. 심지어 아직은 인수 절차를 모르니까 며칠 정도는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거야.”노예찬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성혜인이 결코 장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짐들이 하나둘씩 안쪽으로 옮겨지자, 헛겊을 덧댄 옷을 입은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우르르 몰려왔다.“형, 이게 뭐야? 우리 오늘 저녁에 고기 먹는 거야? 너무 좋아.”“형아 짱이야. 맛있겠다.”노예찬은 미소를 머금고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말고 저 누나한테 고마워해.”아이들이 하나같이 시선을 돌린 그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누나, 고마워.”“고마워요.”성혜인은 그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안쪽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그 시각 노예찬은 아직도 방을 치우고 있었다. 밤에 비가 살짝 내리자, 천장에서는 물이 뚝뚝 새기 시
다음 날 아침 일찍, 성혜인은 씻고 일어나서 대충 끼니를 때우다가 유난히 조용한 노예찬을 발견했다.“선생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이제는 아예 말조차 못 해요.”상태를 보니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 더 버틸듯싶다.어떻게 위로할지 몰랐던 성혜인은 손을 들어 노예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그렇게 두 사람은 고등학교로 향했다.성혜인은 그 선생님의 자료를 챙겨 교무실에서 등록하고 간단한 테스트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별도의 사무실에 앉게 되었다.학교에서 그림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단 둘뿐이라 누구도 결석해서는 안 된다.성혜인은 곧장 수업 시간표를 살펴봤다. 의외인 건 바깥세상보다 훨씬 뒤떨어진 구금성의 학생들은 피아노, 베이킹, 승마 등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비록 수업 횟수는 적지만 적어도 여러 분야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모두에게 있을법한 특별한 재능을 도출하려는 목적인가?어떤 사람은 국어와 수학 같은 전문 지식을 잘 배우지 못했지만, 베이킹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이런 여러 가지 수업에서 남들과 다른 재능을 보인 학생은 엘리트로 선발된다.성혜인은 이 시간표를 보고 처음에는 놀랐으나 곧이어 역겨움을 느꼈다.이곳의 학생들은 엄청난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전문적인 기초 지식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면 마치 쓸모가 없는 학생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다른 무언가로 그들의 재능을 끌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어쩌면 어느 한 분야에서 재능을 보이면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성혜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매년 졸업하는 대부분의 학생이 인체 실험에 이용된 건 아니겠지?’만약 그렇다면 BK와 연구 기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밀접한 사이일수도 있다.자리에 앉자마자 누군가 사무실의 문을 걷어찼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제 만났던 재벌 2세 하정우였다.“싸구려 교생 자리에 후임이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그게 너였어?”하정우는 더욱 대범하게 성혜인의 몸을 훑어보더니 사무실 문을 닫았다.밖에서는 그의 친구들이 소
하정우는 성혜인에게 복수할 생각보다는 자신의 소중한 그곳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지 더 걱정이었다.“병원!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 줘.”한바탕 고함을 지르자 친구들은 그를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의자에 앉은 성혜인은 옆에 있는 컴퓨터를 켠 뒤 회사 인수 과정을 온라인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그러다가 이곳은 다른 데에 비해 훨씬 단순하고 투박하다는 걸 깨달았다. 복잡한 중간 과정 없이 돈만 주면 끝이다.간단히 말해서 돈이 많은 사람이 왕이 되는 곳이다.다른 곳에서 여기로 온 사람들은 거의 다 법을 어겼던 범죄자였기에 주머니에 돈이 거의 없었다. 성혜인처럼 카드에 수천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예 찾을 수가 없다.그녀는 고민에 잠긴 듯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반승제를 찾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바로 여기서 유명해지는 것이다.아직 이곳이 BK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다만 만약 구금섬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게 BK 쪽 사람이었다면 들어온 첫날부터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노예찬의 문신을 보면 아직 BK가 이 섬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심지어 BK는 섬 학생들이 문신을 신처럼 모시도록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갑자기 노트 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상냥하게 말했다.“새로 오신 혜인 씨 맞으시죠? 교장 선생님이 부르십니다.”40대 중반의 여선생이 말을 전하러 왔는데 그녀를 힐끗 보고선 싸늘하게 시선을 돌렸다.성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교장실로 향했다.교장 선생님 앞에는 그림 하나가 놓여있었는데 방금 성혜인이 그린 것이다. 비록 10밖에 투자하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 앉을만한 충분한 자격조건을 보여줬다.“혜인 씨, 실력이 아주 뛰어나시네요.”하정우의 일로 따지지 않는 교장 선생님을 보니 참 현명하고 고상한 분이라는 칭찬이 목젖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곧이어 들려온 말 한마디에 성혜인은 기분이 언짢았다.“혜인 씨는 방금 이 학교에 오셔서 아직 잘 모르실 것 같은
노예찬은 키가 아주 컸다. 그런 사람이 떡하니 문 앞에 서 있자 여학생들은 손해를 볼까 봐 부랴부랴 도망쳤다.그 사이에 연지아가 불러온 또 다른 경호원 두 명은 노예찬을 사정없이 때렸고 어느새 얼굴이 빨갛게 부어올랐다.그러나 그는 끝까지 문을 지키며 그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그렇게 한 시간 동안 끈질기게 버틴 끝에 성혜인은 자신의 지분율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역시나 간단하고 깔끔한 규칙들은 많은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다.성혜인이 마우스를 내려놓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노예찬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고 목까지 꼬집힌 자국이 있었다.한 시간 동안 싸웠는데도 승부가 나지 않은 걸 보니 두 경호원의 실력이 그닥 뛰어난 편은 아닌 것 같다.노예찬의 부상은 점점 더 심해졌고 그는 기절하지 않기 위해 벽에 기댔다.그 모습에 성혜인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바보 같은 녀석.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시키는 대로 하다니.’두 경호원은 문 앞에 서서 숨을 헐떡이며 성혜인을 향해 손가락질했다.“야. 너 우리랑 같이 하씨 가문으로 가자.”“싫어. 어차피 그 사람들이 곧 이곳으로 올 거야.”두 경호원은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저렇게 당당한 거지?’이때 그들의 핸드폰이 울렸다. 연지아에서 걸려 온 전화였는데 하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경호원들이 떠나자마자 성혜인은 노예찬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괜찮아?”노예찬은 이마에 피가 줄줄 흐르고 있음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변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여있었는데 모두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구경했다.성혜인과 노예찬은 순식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구경꾼들 사이에는 교장과 다른 선생님들도 있었다.교장은 여전히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콧등에 걸린 안경을 밀었다.“혜인 씨, 출근 첫날부터 사고를 많이 치시네요. 사무실 꼴이 이게 뭡니까? 어떻게 배상할 거예요?”노예찬은 코끝에서 느껴지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상황을 지켜봤다. 눈앞이 흐려지고 사
성혜인은 헛웃음이 나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빨리 선을 그었을 텐데 노예찬은 되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쨌든 수능까지 두 달이 남았고 문신이 있으니 현재로서는 보호 대상인 건 확실했다.그곳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그는 아마 주요 보호 대상일 것이다.“바보냐? 빨리 가서 상처부터 치료해.”노예찬은 모처럼 고집을 부리며 끝까지 버텼다.“싫어.” 그 말 한마디에 감동한 성혜인은 마치 남동생을 보는 것처럼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때 교장이 입을 열었다.“학생, 많이 다쳤으니까 일단 양호실에서 치료받고 있어. 어차피 저 선생님은 오늘 아무 데도 못 갈 거야. 그 문신이 뭘 의미하는지는 잘 알지? 쉬운 일도 아닌데 지난 몇 년간의 노력을 이대로 포기할 거니?”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없었던 노예찬은 끈기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그런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낯선 사람 때문에 미래를 망친다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겠는가?교장의 말을 들은 노예찬은 그저 우스웠다.이 문신이 결코 명예를 상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아마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돼지우리에서 살찐 돼지가 가장 먼저 끌려가듯 때가 되면 노예찬도 뼈가 남지 않을 때까지 이용되다가 버려질 수 있다.교장은 지금까지도 소위 명예를 이용하여 모두를 속이고 있다.문신을 동경하는 학생들의 얼굴에는 질투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얻으려는 이 문신과 그에 관해 들어왔던 모든 소식이 엄청난 거짓말이란 걸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일까?문신은 영광이 아니라 생사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를 상징했다.하지만 이 모든 진실을 노예찬은 말할 수 없었다.말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게 뻔하다. 이미 세뇌당한 그들은 노예찬을 미쳤다고 생각하거나 이 모든 게 지어낸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심지어 주위에 널린 게 병원이니 어쩌면 정신 나간 행동을 한다며 정신 병원에 끌려갈 수도 있다. 그러니 침묵을 지키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노예찬은 마치 물에 빠진
현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평소에 얼굴한번 보기 힘든 하진표가 직접 고등학교에 찾아와 낯선 여자에게 굽신거리다니?성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진표는 경호원에게 눈치를 줬다.그러자 경호원은 재빨리 하정우를 밀어냈고 그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큰소리치며 건방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할아버지, 미쳤어요? 저한테 왜 이래요!”하정우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한듯 얼굴에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그는 병원에서부터 묶인 채로 이곳까지 끌려왔고 오늘 길 내내 이유를 물어봤으나 다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하정우는 하씨 가문의 유일한 후손이었기에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든 하진표가 전부 눈감아줬다.“할아버지!”하정우가 다시 한번 소리쳤지만 하진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마치 성혜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나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연지아가 이런 상황에 수치심이 밀려오는지 죽일듯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노려봤다.“빨리 저 미친X 잡지 않고 뭐 하는 거야?”하진표는 화를 내며 지팡이를 두 번 내리쳤다.“닥쳐! 그 입 다물어! 하씨 가문의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 혜인 씨다.”비즈니스에 몸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라는 건 회사 전체의 생사를 결정하는 큰 권한을 갖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이제 누군가가 심기를 건드린다면 얼마든지 하씨 가문을 빈털터리로 만들 수 있다.연지아는 귀를 의심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말도 안 돼. 저 거지가 무슨 돈으로 주식을 산 거야?’연지아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고 성혜인과 눈을 마주치고선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성혜인은 노예찬을 일으켜 세우고 옆에 있던 학생에게 물었다.“양호실이 어디니?”학생은 손을 바르르 떨며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노예찬은 머리가 어지럽고
하진표는 순간 표정이 돌변하더니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바짝 줬다.아무리 하정우가 무능하다고 해도 애지중지하며 키운 손자인데 전혀 체면을 세워주지 않는 성혜인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현장에는 하정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사람들은 그 누구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성혜인은 노예찬을 부축해 양호실로 데려갔다.그 시각 왁자지껄한 현장에서는 교장이 창백해진 얼굴로 부랴부랴 하진표에게 다가갔다.“어르신, 이번에는...”교장 역시 방금 전에 일어난 모든 것들이 믿기지 않은 듯 머릿속이 뒤직박죽되었다.그것보다도 성혜인에게 미움을 샀다는 생각에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었다.불안함이 밀려오며 초조해진 그는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났다.“어르신,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정우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요. 심지어 어르신 앞에서 이렇게 날뛰다니 정말 무서운 게 없나 봅니다. 차라리 안쪽 섬으로 보내는 게 어떠실지요?”하진표는 지팡이를 짚은 채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교장의 뜻은 성혜인을 다른 섬으로 보내 아예 기를 죽여버리자는 뜻이었다.그쪽에는 4대 가문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혜인의 순자산은 아마 상위권에 속할 것이다.4000억을 적은 돈이라고 부르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하진표가 손자 바보인 건 맞지만 교장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옆에 있는 경호원에게 눈치를 주자 그들은 즉시 교장을 잡았다.“어르신, 지금 이게 무슨 뜻이죠?”하진표는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이제 사람 바뀔 때도 되지 않았나? 혜인 씨가 누굴 교장으로 내세우고 싶은지 여쭤봐야지.”교장은 동공이 급격하게 움츠러들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하진표는 걸음을 옮기며 단호하게 말했다.“이만 가자고. 정우랑 교장 선생님은 경찰에게 넘겨.”하진표는 혈육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었다.죽은 척하고 바닥에 누워있던 하정우는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더니 재빨리 다려가 하진표의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
[원진과는 이미 연락했어요. 원진도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는 데 동의했어요. 다만 문제는 원아정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당장은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거예요.][흥, 그 정도는 해줘야지.]연승혁은 이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공지민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얼굴에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그녀의 시선은 곧장 연승혁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금테 안경을 쓴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첫눈에도 지적이고 세련된 인상을 풍겼다.‘분명 낯익은 얼굴인데... 어디서 봤지?’연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소개했다.“이쪽은 내 친한 친구, 이상우예요.”순간 공지민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이상우, 이 사람은 과거 그녀가 찾아갔던 유명한 최면술사의 수제자였다.최근 그 대가가 은퇴하고 이제 그의 제자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었었다.공지민은 아무 일도 없는 척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공지민입니다.”하지만 이상우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과거 그녀와 짧은 시간 교류한 적이 있었고 그때 그는 그녀를 최면하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그의 스승은 공지민의 마음속 집착이 너무 깊어 최면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었다.더군다나 스승과 함께 수련하던 한 달 동안, 이상우는 공지민에게 진지하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마음속 그 사람을 잊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었다.지금 이 순간, 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이상우의 손을 잡았다.“안녕하세요.”이상우는 한순간 흔들리는 눈빛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혁이한테서 얘기 들었어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서요. 오늘 저랑 편하게 얘기 나눠보실래요?”얘기를 나누자는 말은 곧 그녀를 최면에 빠뜨리겠다는 의미였다.공지민은 그제야 연승혁을 흘깃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 리가 없는 연승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앉아요, 누나.”공지민은 자리에 앉
원아정은 팔꿈치로 미친 듯이 차창을 내리치며 동시에 운전대를 잡아당겼다. 게다가 뒤따라오는 경찰도 따돌리지 못하자 운전자는 결국 공항으로 가는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차는 이리저리 우회하며 간신히 경찰들을 따돌렸지만 결국 사람들로 붐비는 번잡한 지역에 들어서고 말았다.원아정은 문을 발로 차며 열고는 곧장 밖으로 내달렸다.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은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달려들어 경호운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경호원들은 이마에 땀이 맺히며 초조하게 멀어져가는 원아정을 바라보았다. 여자 하나를 공항까지 데려가라는 지시였을 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을까.진작에 마취라도 시킬 걸 싶었지만 마취한 상태로는 공항 보안검색을 통과할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결국 운전자는 급히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들은 연승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겨우 이런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해?”경호원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연승혁은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됐어. 다음 기회에 다시 처리하면 되니까. 우선 원진에게 이 일을 설명해야겠군.”원진만 동의하면 원아정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떠나야 할 운명이었다....원아정은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공지민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다 그년 때문이야. 그년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나는 연승혁과 결혼해서 상류층 생활을 하고 있었을 텐데... 이런 꼴을 당할 필요도 없었어.’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이전의 공지민은 그저 그녀 발밑에 있는 하찮은 존재였는데, 이제 상황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원아정은 허름하고 지저분한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지나가던 노숙자와 옷을 바꿔 입은 뒤, 다시 나왔을 때 그녀는 초라하고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거리를 전전하며 숨어 지
하지만 연승혁은 이 일을 아주 은밀하게 처리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으니 고작 연예계에서 떠도는 무명 배우에 불과한 공지민이 진실을 알아낼 리 없었다.설령 나중에 공지민이 온시환과 얽혔다 해도, 온시환이 처음부터 그녀를 장난감처럼 여겼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를 위해 이런 일을 조사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연승혁은 지금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는 공지민이 아직 진실을 모르고 진짜 연씨 가문의 딸이며 구은우와의 관계는 그저 악연일 뿐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모든 일을 계획해 구은우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연승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만약 후자라면 이거야말로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최근 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평온했다. 그런데 이렇게 흥미진진한 일이 불쑥 나타나다니.그는 안정숙을 찾아가 당시 진행했던 두 번의 유전자 검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했다.하나는 머리카락을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쓰레기통에 버린 이쑤시개를 쓴 결과라는 말을 들은 연승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만약 이 정도까지 속일 수 있다면, 공지민도 참 대단한 사람이겠네.’“승혁아, 난 이제 나이가 많아서 이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너 솔직히 말해봐. 원아정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긴 한 거니?”“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할머니가 진행한 두 번의 친자 검사는 꽤 신뢰할 만한 결과잖아요. 그런 걸 조작하는 건 쉽지 않죠.”“휴,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일인지 원... 난 그저 내 손녀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할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걱정하지 말라니! 내가 어떻게 걱정 안 할 수 있겠니!”안정숙은 화가 난 듯 지팡이를 힘껏 바닥에 내리찍었다.“네가 조사한 구은우에 대한 자료, 나도 봤어. 그 아이 정말 뛰어난 사람이더라. 만약 지민이가 정말 그 아이를 좋아했고,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에 잃었다면? 너 같으면 그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을 잊을 수 있겠니
연승혁을 마주했을 때 원아정의 눈가에 잠시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오빠...”하지만 연승혁은 등을 기대며 차갑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쓸데없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거라면, 당장 사람 불러서 쫓아낼 테니까.”원아정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꾸며낸 애잔함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연승혁이 옆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조용히 자리에 앉은 원아정은 이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았다.그때 안정숙이 입을 열었다.“마침 승혁이도 있으니, 구은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거라.”애초에 원아정은 이 일을 말하려고 온 터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오늘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으니까요.”그녀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자의 눈매는 연승혁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안정숙과 연승혁 모두 한눈에 알아챘다. 이 남자는 분명 연씨 가문의 핏줄이었다.이미 벼랑 끝에 선 원아정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공지민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해외로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승혁 오빠, 이 얼굴 잘 보세요. 연씨 가문이 큰 혼란에 휩싸였던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아버님께서 밖에 아들을 하나 두셨다고요. 물론 그건 아버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계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이 그 일을 평생 떨쳐내지 못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언니가 실종된 것도 큰 상처였지만 아버님이 다른 여자를 품었다는 사실은 어머님께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어요. 그 상처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여자가 임신한 걸 알고도 가만두지 않으셨어요. 그 여자는 목숨을 건져 간신히 도망쳤고, 결국 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구은우예요. 그러니까 구은우는 승혁 오빠의 이복동생이라는 말이에요.”연승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안정숙의 시선을 의식하고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진 원아정은 불안감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만약 안정숙이 원진과 상의한다면 그녀는 반드시 해외로 쫓겨날 것이다. 원진은 절대 그녀 편에 서지 않을 터였다.원아정은 서둘러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공지민 그년 때문에 내 인생은 완전히 끝장났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녀는 곧장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래는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의 정체를 밝혀내라고 시켰건만 돌아온 보고는 실수로 그 사람을 놓쳤다는 것이었다.“뭐? 놓쳤다고?”원아정은 분노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면 모든 걸 잃고 말 것이다.그녀는 차를 몰고 공지민이 사는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원아정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지금이라도 공지민을 보기만 하면 망설임 없이 액셀을 밟아 그대로 들이받아 죽여버리겠다고.하지만 공지민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원아정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매일 공지민의 집 근처를 돌며 기회를 엿보았다.차를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두고 혹시라도 온시환의 사람들이 눈치챌까 멀리서 관찰했다.하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공지민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대신 안정숙이 공지민을 만나러 오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그 광경을 보자 원아정의 얼굴에는 질투가 가득 차올랐다.‘고등학교 때 그렇게 짓밟아 놓았던 공지민이 나를 밟고 올라가다니... 이게 말이 돼?’분노를 삭이며 핸들을 꽉 움켜쥔 그녀의 시야에 드디어 공지민이 나타났다.공지민은 안정숙과 함께 나와 있었다. 안정숙은 공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그 평온한 광경을 바라보는 원아정은 질투에 사로잡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를 악문 원아정은 다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사람 정체 아직도 못 밝혀냈어?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 말이야!”“그 집에 배달을 다녀온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은 여자
온시환은 뒤에서 움직일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기에 드러난 수단만을 써야 했고 그만큼 더 조심해야 했다.무엇보다 이 일에 서주혁이나 반승제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가 자신의 여자를 위해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고 그러기에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해야 했다.물론 만약 상황이 공지민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악화한다면 그때야 비로소 그 둘에게 도움을 청할지도 몰랐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승혁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인지 새삼 깨달았다.온시환은 그동안 자신이 알아낸 연씨 가문의 과거와 연승혁이 회색지대 사업을 정리하며 보여준 철저하고도 잔혹한 수완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공지민은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온시환이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연승혁이 이토록 잔혹하지 않았다면, 아마 먼 옛날에 태어났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으로 불렸을지도 모른다.이어 온시환은 연씨 가문에서 안정숙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겉보기에는 자애로워 보이는 안정숙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의 품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생각했다.온시환의 눈에 그녀는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해 보였을까?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겠다고 나섰던 그녀가 얼마나 우스웠을까?연씨 가문의 식사 자리에서 온시환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진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는 아마도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려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온시환이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도우려 했을까?공지민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요즘 들어 온시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그날 저녁, 연씨 가문에서 또다시 값비싼 선물들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안정숙이 직접 방문하기까지 했다.안정숙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며 공지민을 받아들이려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태도는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지민아, 이리 와 보렴. 최근에
그날 밤, 온시환의 사람들이 염정아가 머물던 집 주변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원아정의 사람들이 이미 철수했음을 확인했다. 그 즉시 염정아를 온시환의 별장으로 안전하게 옮겼다.염정아는 전과 다름없이 방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조차도 방에서만 해결했다.공지민은 염정아를 제원으로 불러오기 전까지 그녀가 이렇게 협조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특히, 이번에는 염정아가 외부인의 이상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원아정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공지민은 마음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아야, 이번에는 네가 그 배달원의 이상함을 눈치챈 덕분이야.”염정아는 그릇 안의 음식을 먹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너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공지민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니야, 넌 한 번도 내게 폐를 끼친 적이 없어.”염정아는 눈빛이 반짝이며 놀란 듯 공지민을 쳐다보았다. 이내 그녀는 천천히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지민아, 난 그저 네가 구은우의 복수를 끝낸 뒤엔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사실 나도 한때 복수심에 사로잡혀 살았어. 그때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곤 했지. 세상과 부모를 원망하며 미친 사람처럼 살았어.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했어. 이렇게 짧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깨달았지. 나는 너무 나약했고, 도망칠 용기도 반항할 용기도 없었어. 괴롭힘을 당해도 그냥 참기만 했고. 사람은 참을수록 더 고통스러워진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염정아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공지민은 그녀를 천천히 안으며 말했다.“난 모르겠어. 복수가 끝난 후엔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염정아는 별장에 들어오면서 온시환을 보았다.그녀의 눈에 온시환은 매우 훌륭한 남자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가 공지민을 바라보는 눈에는 온통 사랑이 담겨 있었다.
“계속 조사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요즘은 다들 섣부른 행동 하지 말라고.”잠시 후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항상 하는 말이지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목숨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옆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연승혁은 옆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공허했다.과거 연씨 가문이 회색지대 사업을 했을 때는 항상 목숨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사업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전환한 이후 몇 년 동안 연씨 가문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에 불쾌하면서도 묘한 흥미를 느꼈다. 연승혁은 타고난 모험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그래, 누군지 한번 보자고.’연승혁은 문득 조금 전 할머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한 이름을 언급했었다.‘구은우?’하지만 연승혁은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왔기에 그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하찮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뭔가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알겠습니다, 형님.”배는 여전히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한편, 제원에서 원아정은 연씨 가문을 떠난 뒤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그녀는 공지민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공지민이 더 이상 제원에서 발붙일 수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차에 올라탄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집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아가씨, 우리가 10시간 동안 지켜봤지만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밖에서 음식을 배달한 것 같습니다.”원아정은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밖에서 배달 음식이 들어갔다고? 너희들 머리는 장식이야? 배달원으로 위장해서 안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해? 도대체 내가 왜 너희들을 고용한 거야!”전화를 끊은 뒤 그들은 그제야 원아정의 말에 따라 배달원으로 위장해 염정아가 머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