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선생님이 죽은 줄도 모르고 그녀의 침대맡에 간식을 놓아두었다.노예찬은 그녀가 일주일도 못 버틸 걸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마당이 엄청 화려해졌는데 보셨을까?’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쉰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물었다.“선생님이 마당 인테리어 하는 거 보셨어?”“응. 침대에서 내려오고 싶어 했는데 내가 힘이 없어서 부축하지 못했어. 더 자고 싶다고 해서 옆에 간식을 올려놓고 나온 거야.”“착하네.”노예찬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문 옆에서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성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자리를 떴다.아이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후 노예찬은 삽을 들고 마당에 나가 땅을 팠다.그 옆의 돗자리에는 더 이상 아무런 기척이 없는 여자가 누워있었다.성혜인도 삽을 들고나와 노예찬과 함께 땅을 팠고 1미터 깊이까지 파낸 후 조심스럽게 시체를 움직였다.노예찬은 비석을 세우지 않고 그저 흙더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연신 절을 했다.“선생님은 한평생 우릴 돌봐주시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어. 매일 고생만 했지. 누나, 고마워. 누나가 없었다면 병든 몸을 이끌고 학교로 갔을 거야. 어쩌면 힘들게 수업하다가 피를 토하며 생을 마감했을 텐데 누나 덕분에 편히 간 것 같네.”순간 임지연이 떠오른 그녀는 마음이 미어졌다.노예찬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릎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찾고 싶다는 사람이 누구야? 계획은 있어?”성혜인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임지연의 사진이다.“이 사람 본 적 있어?”노예찬은 눈빛이 흔들렸다.“선생님이 예전에 여기로 데려와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성혜인은 충격에 하마터면 사진을 떨어뜨릴 뻔했다.노예찬의 말투는 매우 차분했다.“선생님이 저분을 구하려고 하다가 실패했어. 그래서 아까 우리가 한 것처럼 나랑 선생님이 그분을 땅에 묻었어.”“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그쪽으로 가볼래? 엄청 어릴때라서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마당 반대편이었을 거야.”
노예찬은 씨익 웃더니 사악함을 드러냈다.“이건 맛없는 거야. 착하지? 소란 피우지 말고 얼른 들어가.”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례차례 이곳을 떠났고 노예찬을 팔짱을 낀채 기절한 성혜인을 바라봤다.그렇게 한참을 보다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치고선 방을 나갔다.밖에 나가니 조금 전까지 흙 속에 묻혀 있던 여자가 보란 듯이 바닥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었다.“예찬아, 이게 몇 번째지? 기억이 잘 안 나네.”“선생님, 이번에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잘 숨으셔야 해요.”“알아. 우리 예찬이 말 들어야지. 오늘 밤은 날 안 때릴 거지? 괴롭히지도 않을 거지?”노예찬은 입술을 가리고 웃으며 싸늘함을 풍겼다.“좋아요. 그럼 오늘 밤은 안 하죠. 아참, 연기가 나날이 좋아지네요? 이제 저조차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 못 하겠다니까요?”여자는 재빨리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미친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내가 잘한 건 아무것도 없어. 다 예찬이 덕분이야.”노예찬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선생님, 이제 일어나요.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해서 당분간은 안 때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고마워. 정말 고마워.”여자의 말투에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길래 이 지경이 된 걸까?노예찬은 목뒤에 있는 문신을 만지작거리다가 입꼬리를 올렸다.그 미소를 본 여자는 온몸을 움츠리더니 귀신이라도 본 듯 뒷걸음질 쳤다.“하늘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선생님, 미친 짓 그만하고 얼른 숨어요.”그 말에 여자는 머리를 감싸안고 황급히 도망쳤다.노예찬은 심호흡하고선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아이들은 마치 성혜인이 진수성찬이라도 되는 양 호시탐탐 주변을 맴돌았다.그들은 노예찬의 명령을 기다리며 언제든지 성혜인을 찢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노예찬의 말투는 매우 부드러웠다.“들어가서 자.”노예찬 앞에서만 예의 바르고 앙증맞게 변하는 아이들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물론 성혜인은 그들이 하는 대화와 이 기
성혜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노예찬도 이미 학교에서 돌아왔다. 학교에 새로운 교장이 선출되었다고 하는데 성혜인은 그닥 관심이 없었다.저녁쯤 바람을 쐬려 마당으로 나온 성혜인은 누군가에게 입을 꽉 막혀버렸다.그 사람은 강한 힘으로 성혜인을 뒤로 끌고 갔다.코끝에서는 짙은 피비린내가 났고 곧바로 등 뒤에서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성혜인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플래시를 켰고 몸을 돌린 순간 두 눈이 반짝였다.배현우다!배현우가 외곽 섬에 있었다니!성혜인은 재빨리 노예찬을 불러내 의식을 잃고 쓰러진 그를 안으로 옮겼다.배현우는 환자복 차림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고 노예찬은 단번에 알아봤다.“성남 정신병원 환자복이야. 그곳으로 보내진 사람들은 보통 심각한 병을 가지고 있어. 이분은 누나 친구야?”이런 상황에 대해 전혀 예상 못 한 성혜인은 놀란 듯 얼어붙었다.‘여기로 온 지 불과 며칠 만에 정신병원에 보내졌단 말이야?’노예찬의 표정은 조금 진지해 보였다.“얼른 옷부터 갈아입히자. 그 정신병원은 관리가 하도 엄격해서 환자가 세상 끝까지 도망쳐도 잡으러 간다는 소문이 돌 정도야.”“왜?”“그 안에는 심각한 폭력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야. 심지어 교활하고 잔인해서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 사람 돌려보내는 게 어때? 깨어나면 분명히 누나를 해칠 거야.”성혜인은 몸을 돌렸다.“예찬아, 옷 좀 갈아입혀 줘. 지금 입고 온 옷은 불에 태우자.”말을 마친 후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문을 닫은 노예찬은 의식 잃은 남자를 바라보며 ‘쯧’ 소리를 내더니 자신의 옷을 꺼내 갈아입혀 줬다.옷을 갈아입은 후, 그는 입구에서 성혜인을 불렀다.성혜인은 방으로 들어와 배현우의 곳곳을 살폈다. 특별한 외상이 없는 거로 보아 방금전에 진동했던 피비린내는 옷에서 난 게 틀림없다.‘누구랑 싸운 건가?’다음 날 점심쯤에 배현우는 천천히 의식을 되찾았고 마침 죽 한 그릇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성혜인과 시선이 마주
성혜인은 어쩌면 배현우가 연기하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진지하게 그의 두 눈을 들여다봤다.배현우는 잔꾀가 많은 사람이다. 게다가 어젯밤 갑자기 나타나 입을 막고 끌고 가려 했으니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그러나 뚫어지라 1분 넘게 봤음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혜인아, 아파.”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팔을 가리켰다.성혜인은 눈빛이 흔들렸다. 안 그래도 주삿바늘 자국이 가득한 곳에 새로운 자국이 많이 생겼다.누가 봐도 학대를 받은 흔적이다.성혜인이 배현우의 손을 잡고 무슨 말을 하려던 참에 그는 갑자기 쪼그리고 앉더니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안았다.“아파. 주사가 너무 아파. 집 가고 싶어.”“집이 어딘데?”“그게...”말끝을 흐리던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긴가민가하며 입을 열었다.“네이처 빌리지. 혜인이가 예쁘게 인테리어 해놓은 네이처 빌리지.”그 말을 들은 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고 배현우는 아픈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네이처 빌리지는 네가 아니라 승제 씨가 사는 곳이야.”예상외로 배현우의 반응은 엄청났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험상궂은 표정으로 말했다.“내 꺼야! 내 꺼라고!”성혜인은 더 이상 따지고 싶지 않았다.‘배현우는 완전히 미쳤는데 승제 씨는 괜찮을까?’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배현우를 상대하기 싫은 티를 팍팍 냈다. 반승제가 외곽 섬에 없으니, 지금으로선 하진표의 연락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배현우는 언제든지 정신병원에 잡혀갈 위험성이 있기에 연락을 받는 순간 최대한 빨리 이동해야 한다.방으로 돌아온 성혜인은 문을 닫은 후 손을 들어 배를 어루만졌다.오후 4시. 드디어 하진표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그 섬까지 갈 수 있는 차를 보내준다고 했다.성혜인은 배현우와 함께 차에 오르려 했지만, 배현우는 한사코 차에 오르지 않았다.“난 혜인이랑 여기 있을래. 가기 싫어. 차 안 탈 거야.”차 옆에 서서 한참을 생각하던 노예찬을 그를 끌어내고선 직접 차에 올라탔다.성
차가 도시를 가로질러 달리다가 바로 한가운데서 멈췄다. 성혜인은 고개를 들자마자 거대한 스크린에 나타난 자기 사진을 보았다.가장 고급스러운 건물 한가운데에 걸려 있었는데 그 옆에는 ‘혜인아 내 번호는...’이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성혜인은 순간적으로 무언가에 심장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내린 성혜인이 고개를 들었을 때 스크린에 반승제의 메시지와 함께 나타난 사진이 더욱 커 보였다.어찌나 감격했는지 뺨까지 붉어진 성혜인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이 되기도 전에 옆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쪽이야?”성혜인이 고개를 돌려 보니 아주 아름다운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여자는 성혜이인의 곁으로 다가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당신 성혜인 맞지?”“그쪽은 누구?”여자는 스스럼없는 태도로 손을 내밀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반승제가 첫날 밤에 깨어났을 때 내 방에 있었어. 내 첫 손님이었지.”성혜인은 그녀를 무시하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전화는 통했지만 벨소리가 여자의 가방에서 울렸다.여자는 휴대폰을 꺼내 낯선 번호를 보더니 다시 성혜인이 전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당신이 전화했어? 반승제의 휴대폰이 나한테 있거든.”여자는 차분해 보였지만 잘난 척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반승제 생명의 은인이거든. 나에게 큰 집도 사줬어.”그녀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거기서 지낼래, 성혜인?”그녀는 자랑하고 있었다. 성혜인이 다시 차에 타려고 할 때 옆으로 몇 사람이 지나갔는데 그 사람들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다.“마수연, 너 오늘은 왜 반승제와 함께 있지 않아? 어디를 가든 항상 널 데리고 다니지 않았어?”“널 첩으로 삼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어?”말을 마친 남자의 시선이 성혜인에게로 향했다. 그는 곧바로 입을 가렸다.“본처가 여기 있었네. 그래서 수연이 표정이 좋지 않았구나.”“그래도 반승제와 있은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집 한 채와 차를
성혜인은 켜진 스크린을 보자 안심되었다. 차에 타려고 할 때 반승제의 휴대폰이 여전히 마수연이라는 사람의 손에 있다는 것이 떠올라 상대방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마수연은 성혜인이 돈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작은 스크린의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 반승제가 큰 스크린을 한 달 계약했을 때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 성혜인이라는 여자도 마찬가지였다.마수연은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성혜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가슴을 내밀었다.성혜인은 그녀의 옆으로 걸어가 반승제의 휴대폰을 뺏었다. 마수연은 화가 치밀어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내 휴대폰은 왜 뺏어?” “이거 당신 거 아니잖아. 반승제가 어쩌다 실수로 잃어버린 휴대폰을 당신이 마침 주웠겠지.”마수연이 다가와 다시 휴대폰을 뺏으려고 하자 성혜인은 그녀를 밀쳐냈다. “뻔뻔하게 대낮에 남의 물건을 훔치다니!”마수연은 너무 화가 나서 다시 앞으로 가려고 했지만 성혜인은 이미 차에 앉아 있었다. 중간 섬에는 반승제를 아는 사람이 많았는데 성혜인이 아무에게나 물어봐도 상대방은 반승제가 한 일을 몇 가지 거론할 수 있었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면 아무도 몰랐다.어쩔 수 없이 성혜인은 먼저 노예찬과 배현우를 데리고 머물 곳부터 찾아야 했다. 배현우는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아주 신나 있었는데 마당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진흙 놀이를 하고 있었다.진흙을 문지르던 그의 두 손목에 드러난 주삿바늘 구멍을 보자 성혜인은 마음이 불편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배현우가 말했다.“혜인아, 나 집에 가고 싶어.”성혜인이라고 왜 집에 가고 싶지 않을까. 그녀는 배현우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조금만 놀다가 들어오라고 말했다.지친 모습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는 지금 반승제가 먼저 연락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 먼저 반승제의 생일을 입력했지만 잠금이 해제되지 않았다. 다시 자신의
“알았어. 내가 잘 지켜볼게.”노예찬은 얌전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온 성혜인은 반승제의 휴대폰을 이리저리 뒤져보았지만 새 휴대폰에는 쓸만한 정보가 없었다.마지막으로 메모를 였었는데 그 안에는 반승제가 적어둔 몇 개의 메시지가 있었다.[중간 섬에는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안쪽 섬에 있는 거야?][설마 바깥 섬에 있는 건 아니겠지? 대체 어디 있는 거야.][진작 알았더라면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짜증 나.]메시지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 그녀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성혜인의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부승민은 그녀의 연락처가 없어서 메모에 대고 불평할 수밖에 없었다.성혜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속 아래로 내리다가 맨 마지막 메시지를 보았다.[혜인이가 죽었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실종되지도 않았을 거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혜인은 미간을 구겼다.누군가 반승제에게 그녀가 무슨 일이 생겼다고 말한 걸까? 그리고 방금 전화 와서 반승제가 다른 선택을 하면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또 뭐고. 성혜인의 죽음이 거짓 소식이라면 방금 전화에서 한 말은 도대체 진실인가, 거짓인가?휴대폰을 꽉 움켜쥔 그녀는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팠지만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밖에서 노예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밖에 비가 내리고 있는데 저 배현우라는 사람이 비를 맞으며 마당에서 계속 진흙을 가지고 놀아. 들어가자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아.”성혜인은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현우 옆으로 갔다. 배현우는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있는 개미굴을 파고 있었다.“밖에 비 오잖아. 빨리 집으로 들어가.”그의 손은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고, 여전히 땅을 비비며 흙을 점토 삼아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혜인아, 먹어.”배현우는 흙덩이를 집어 성혜인의 앞으로 가져갔다. 성혜인은 그의 순진무구한 눈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었다. 바보라서 때릴 수도, 욕할 수도 없었다. 성혜인은 흙을
10분 후, 노예찬이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누나, 현우 씨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집에 약이 없어. 내가 나가서 해열제를 사 올게.”“그래, 수고해.”성혜인은 문을 열고 배현우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배현우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약을 사러 나간 노예찬은 적어도 30분 뒤에나 돌아올 수 있었다.배현우의 옷은 이미 갈아입힌 상태였다. 성혜인은 옆에 있던 수건을 가져다가 물에 적셔 그의 이마에 얹었다.배현우의 속눈썹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편히 잠들 수 없는 듯 몸을 뒤척이다가 팔 전체에 빼곡히 있는 바늘구멍이 드러났는데 몹시 끔찍해 보였다.성혜인은 이 몸이 반승우의 것이라고 생각하자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말하자면 반승우 본인은 그녀를 해친 적이 없었다. 그 일은 모두 배현우가 한 짓이지 반승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이 몸에 있는 수많은 상처는 전부 반승우가 감당해야 했다.한편, 노예찬은 우산을 들고 모퉁이를 돌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그는 천천히 옆에 있는 집 처마 밑으로 걸어가 우산을 거두며 뒤에 있는 사람에게 담담하게 물었다.“무슨 소식 있어?”“10장로님, 아직 성녀를 찾지 못했지만 K는 이미 조직으로 돌아왔습니다. 최근 밖으로 일절 나오지 않는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노예찬이 고개를 숙이자 소년의 분위기가 싹 가셨다. 그는 손끝을 문지르며 말했다.“계속 지켜봐. K가 큰 움직임을 보이면 언제든지 내게 보고해. 이미 해파리 인장의 행방을 알았으니 곧 찾아서 돌아갈 거야.”뒤에 있던 사람은 털썩 무릎을 꿇으며 기쁨에 찬 표정을 지었다.“축하합니다, 10장로님.”10장로의 자리는 그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성녀가 사라진 이후 모두 해파리 인장을 찾아 떳떳하게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해파리 인장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10장로의 눈빛이 음침하게 변했다.“바깥 섬 그 여자를 잘 감시해. 성녀를 배신한 자이니 절대 내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