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선생님이 죽은 줄도 모르고 그녀의 침대맡에 간식을 놓아두었다.노예찬은 그녀가 일주일도 못 버틸 걸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마당이 엄청 화려해졌는데 보셨을까?’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쉰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물었다.“선생님이 마당 인테리어 하는 거 보셨어?”“응. 침대에서 내려오고 싶어 했는데 내가 힘이 없어서 부축하지 못했어. 더 자고 싶다고 해서 옆에 간식을 올려놓고 나온 거야.”“착하네.”노예찬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문 옆에서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성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자리를 떴다.아이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후 노예찬은 삽을 들고 마당에 나가 땅을 팠다.그 옆의 돗자리에는 더 이상 아무런 기척이 없는 여자가 누워있었다.성혜인도 삽을 들고나와 노예찬과 함께 땅을 팠고 1미터 깊이까지 파낸 후 조심스럽게 시체를 움직였다.노예찬은 비석을 세우지 않고 그저 흙더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연신 절을 했다.“선생님은 한평생 우릴 돌봐주시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어. 매일 고생만 했지. 누나, 고마워. 누나가 없었다면 병든 몸을 이끌고 학교로 갔을 거야. 어쩌면 힘들게 수업하다가 피를 토하며 생을 마감했을 텐데 누나 덕분에 편히 간 것 같네.”순간 임지연이 떠오른 그녀는 마음이 미어졌다.노예찬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릎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찾고 싶다는 사람이 누구야? 계획은 있어?”성혜인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임지연의 사진이다.“이 사람 본 적 있어?”노예찬은 눈빛이 흔들렸다.“선생님이 예전에 여기로 데려와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성혜인은 충격에 하마터면 사진을 떨어뜨릴 뻔했다.노예찬의 말투는 매우 차분했다.“선생님이 저분을 구하려고 하다가 실패했어. 그래서 아까 우리가 한 것처럼 나랑 선생님이 그분을 땅에 묻었어.”“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그쪽으로 가볼래? 엄청 어릴때라서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마당 반대편이었을 거야.”
노예찬은 씨익 웃더니 사악함을 드러냈다.“이건 맛없는 거야. 착하지? 소란 피우지 말고 얼른 들어가.”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례차례 이곳을 떠났고 노예찬을 팔짱을 낀채 기절한 성혜인을 바라봤다.그렇게 한참을 보다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치고선 방을 나갔다.밖에 나가니 조금 전까지 흙 속에 묻혀 있던 여자가 보란 듯이 바닥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었다.“예찬아, 이게 몇 번째지? 기억이 잘 안 나네.”“선생님, 이번에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잘 숨으셔야 해요.”“알아. 우리 예찬이 말 들어야지. 오늘 밤은 날 안 때릴 거지? 괴롭히지도 않을 거지?”노예찬은 입술을 가리고 웃으며 싸늘함을 풍겼다.“좋아요. 그럼 오늘 밤은 안 하죠. 아참, 연기가 나날이 좋아지네요? 이제 저조차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 못 하겠다니까요?”여자는 재빨리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미친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내가 잘한 건 아무것도 없어. 다 예찬이 덕분이야.”노예찬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선생님, 이제 일어나요.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해서 당분간은 안 때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고마워. 정말 고마워.”여자의 말투에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길래 이 지경이 된 걸까?노예찬은 목뒤에 있는 문신을 만지작거리다가 입꼬리를 올렸다.그 미소를 본 여자는 온몸을 움츠리더니 귀신이라도 본 듯 뒷걸음질 쳤다.“하늘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선생님, 미친 짓 그만하고 얼른 숨어요.”그 말에 여자는 머리를 감싸안고 황급히 도망쳤다.노예찬은 심호흡하고선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아이들은 마치 성혜인이 진수성찬이라도 되는 양 호시탐탐 주변을 맴돌았다.그들은 노예찬의 명령을 기다리며 언제든지 성혜인을 찢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노예찬의 말투는 매우 부드러웠다.“들어가서 자.”노예찬 앞에서만 예의 바르고 앙증맞게 변하는 아이들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물론 성혜인은 그들이 하는 대화와 이 기
성혜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노예찬도 이미 학교에서 돌아왔다. 학교에 새로운 교장이 선출되었다고 하는데 성혜인은 그닥 관심이 없었다.저녁쯤 바람을 쐬려 마당으로 나온 성혜인은 누군가에게 입을 꽉 막혀버렸다.그 사람은 강한 힘으로 성혜인을 뒤로 끌고 갔다.코끝에서는 짙은 피비린내가 났고 곧바로 등 뒤에서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성혜인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플래시를 켰고 몸을 돌린 순간 두 눈이 반짝였다.배현우다!배현우가 외곽 섬에 있었다니!성혜인은 재빨리 노예찬을 불러내 의식을 잃고 쓰러진 그를 안으로 옮겼다.배현우는 환자복 차림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고 노예찬은 단번에 알아봤다.“성남 정신병원 환자복이야. 그곳으로 보내진 사람들은 보통 심각한 병을 가지고 있어. 이분은 누나 친구야?”이런 상황에 대해 전혀 예상 못 한 성혜인은 놀란 듯 얼어붙었다.‘여기로 온 지 불과 며칠 만에 정신병원에 보내졌단 말이야?’노예찬의 표정은 조금 진지해 보였다.“얼른 옷부터 갈아입히자. 그 정신병원은 관리가 하도 엄격해서 환자가 세상 끝까지 도망쳐도 잡으러 간다는 소문이 돌 정도야.”“왜?”“그 안에는 심각한 폭력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야. 심지어 교활하고 잔인해서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 사람 돌려보내는 게 어때? 깨어나면 분명히 누나를 해칠 거야.”성혜인은 몸을 돌렸다.“예찬아, 옷 좀 갈아입혀 줘. 지금 입고 온 옷은 불에 태우자.”말을 마친 후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문을 닫은 노예찬은 의식 잃은 남자를 바라보며 ‘쯧’ 소리를 내더니 자신의 옷을 꺼내 갈아입혀 줬다.옷을 갈아입은 후, 그는 입구에서 성혜인을 불렀다.성혜인은 방으로 들어와 배현우의 곳곳을 살폈다. 특별한 외상이 없는 거로 보아 방금전에 진동했던 피비린내는 옷에서 난 게 틀림없다.‘누구랑 싸운 건가?’다음 날 점심쯤에 배현우는 천천히 의식을 되찾았고 마침 죽 한 그릇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성혜인과 시선이 마주
성혜인은 어쩌면 배현우가 연기하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진지하게 그의 두 눈을 들여다봤다.배현우는 잔꾀가 많은 사람이다. 게다가 어젯밤 갑자기 나타나 입을 막고 끌고 가려 했으니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그러나 뚫어지라 1분 넘게 봤음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혜인아, 아파.”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팔을 가리켰다.성혜인은 눈빛이 흔들렸다. 안 그래도 주삿바늘 자국이 가득한 곳에 새로운 자국이 많이 생겼다.누가 봐도 학대를 받은 흔적이다.성혜인이 배현우의 손을 잡고 무슨 말을 하려던 참에 그는 갑자기 쪼그리고 앉더니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안았다.“아파. 주사가 너무 아파. 집 가고 싶어.”“집이 어딘데?”“그게...”말끝을 흐리던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긴가민가하며 입을 열었다.“네이처 빌리지. 혜인이가 예쁘게 인테리어 해놓은 네이처 빌리지.”그 말을 들은 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고 배현우는 아픈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네이처 빌리지는 네가 아니라 승제 씨가 사는 곳이야.”예상외로 배현우의 반응은 엄청났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험상궂은 표정으로 말했다.“내 꺼야! 내 꺼라고!”성혜인은 더 이상 따지고 싶지 않았다.‘배현우는 완전히 미쳤는데 승제 씨는 괜찮을까?’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배현우를 상대하기 싫은 티를 팍팍 냈다. 반승제가 외곽 섬에 없으니, 지금으로선 하진표의 연락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배현우는 언제든지 정신병원에 잡혀갈 위험성이 있기에 연락을 받는 순간 최대한 빨리 이동해야 한다.방으로 돌아온 성혜인은 문을 닫은 후 손을 들어 배를 어루만졌다.오후 4시. 드디어 하진표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그 섬까지 갈 수 있는 차를 보내준다고 했다.성혜인은 배현우와 함께 차에 오르려 했지만, 배현우는 한사코 차에 오르지 않았다.“난 혜인이랑 여기 있을래. 가기 싫어. 차 안 탈 거야.”차 옆에 서서 한참을 생각하던 노예찬을 그를 끌어내고선 직접 차에 올라탔다.성
차가 도시를 가로질러 달리다가 바로 한가운데서 멈췄다. 성혜인은 고개를 들자마자 거대한 스크린에 나타난 자기 사진을 보았다.가장 고급스러운 건물 한가운데에 걸려 있었는데 그 옆에는 ‘혜인아 내 번호는...’이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성혜인은 순간적으로 무언가에 심장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내린 성혜인이 고개를 들었을 때 스크린에 반승제의 메시지와 함께 나타난 사진이 더욱 커 보였다.어찌나 감격했는지 뺨까지 붉어진 성혜인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이 되기도 전에 옆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쪽이야?”성혜인이 고개를 돌려 보니 아주 아름다운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여자는 성혜이인의 곁으로 다가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당신 성혜인 맞지?”“그쪽은 누구?”여자는 스스럼없는 태도로 손을 내밀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반승제가 첫날 밤에 깨어났을 때 내 방에 있었어. 내 첫 손님이었지.”성혜인은 그녀를 무시하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전화는 통했지만 벨소리가 여자의 가방에서 울렸다.여자는 휴대폰을 꺼내 낯선 번호를 보더니 다시 성혜인이 전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당신이 전화했어? 반승제의 휴대폰이 나한테 있거든.”여자는 차분해 보였지만 잘난 척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반승제 생명의 은인이거든. 나에게 큰 집도 사줬어.”그녀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거기서 지낼래, 성혜인?”그녀는 자랑하고 있었다. 성혜인이 다시 차에 타려고 할 때 옆으로 몇 사람이 지나갔는데 그 사람들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다.“마수연, 너 오늘은 왜 반승제와 함께 있지 않아? 어디를 가든 항상 널 데리고 다니지 않았어?”“널 첩으로 삼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어?”말을 마친 남자의 시선이 성혜인에게로 향했다. 그는 곧바로 입을 가렸다.“본처가 여기 있었네. 그래서 수연이 표정이 좋지 않았구나.”“그래도 반승제와 있은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집 한 채와 차를
성혜인은 켜진 스크린을 보자 안심되었다. 차에 타려고 할 때 반승제의 휴대폰이 여전히 마수연이라는 사람의 손에 있다는 것이 떠올라 상대방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마수연은 성혜인이 돈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작은 스크린의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 반승제가 큰 스크린을 한 달 계약했을 때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 성혜인이라는 여자도 마찬가지였다.마수연은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성혜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가슴을 내밀었다.성혜인은 그녀의 옆으로 걸어가 반승제의 휴대폰을 뺏었다. 마수연은 화가 치밀어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내 휴대폰은 왜 뺏어?” “이거 당신 거 아니잖아. 반승제가 어쩌다 실수로 잃어버린 휴대폰을 당신이 마침 주웠겠지.”마수연이 다가와 다시 휴대폰을 뺏으려고 하자 성혜인은 그녀를 밀쳐냈다. “뻔뻔하게 대낮에 남의 물건을 훔치다니!”마수연은 너무 화가 나서 다시 앞으로 가려고 했지만 성혜인은 이미 차에 앉아 있었다. 중간 섬에는 반승제를 아는 사람이 많았는데 성혜인이 아무에게나 물어봐도 상대방은 반승제가 한 일을 몇 가지 거론할 수 있었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면 아무도 몰랐다.어쩔 수 없이 성혜인은 먼저 노예찬과 배현우를 데리고 머물 곳부터 찾아야 했다. 배현우는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아주 신나 있었는데 마당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진흙 놀이를 하고 있었다.진흙을 문지르던 그의 두 손목에 드러난 주삿바늘 구멍을 보자 성혜인은 마음이 불편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배현우가 말했다.“혜인아, 나 집에 가고 싶어.”성혜인이라고 왜 집에 가고 싶지 않을까. 그녀는 배현우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조금만 놀다가 들어오라고 말했다.지친 모습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는 지금 반승제가 먼저 연락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 먼저 반승제의 생일을 입력했지만 잠금이 해제되지 않았다. 다시 자신의
“알았어. 내가 잘 지켜볼게.”노예찬은 얌전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온 성혜인은 반승제의 휴대폰을 이리저리 뒤져보았지만 새 휴대폰에는 쓸만한 정보가 없었다.마지막으로 메모를 였었는데 그 안에는 반승제가 적어둔 몇 개의 메시지가 있었다.[중간 섬에는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안쪽 섬에 있는 거야?][설마 바깥 섬에 있는 건 아니겠지? 대체 어디 있는 거야.][진작 알았더라면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짜증 나.]메시지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 그녀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성혜인의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부승민은 그녀의 연락처가 없어서 메모에 대고 불평할 수밖에 없었다.성혜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속 아래로 내리다가 맨 마지막 메시지를 보았다.[혜인이가 죽었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실종되지도 않았을 거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혜인은 미간을 구겼다.누군가 반승제에게 그녀가 무슨 일이 생겼다고 말한 걸까? 그리고 방금 전화 와서 반승제가 다른 선택을 하면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또 뭐고. 성혜인의 죽음이 거짓 소식이라면 방금 전화에서 한 말은 도대체 진실인가, 거짓인가?휴대폰을 꽉 움켜쥔 그녀는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팠지만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밖에서 노예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밖에 비가 내리고 있는데 저 배현우라는 사람이 비를 맞으며 마당에서 계속 진흙을 가지고 놀아. 들어가자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아.”성혜인은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현우 옆으로 갔다. 배현우는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있는 개미굴을 파고 있었다.“밖에 비 오잖아. 빨리 집으로 들어가.”그의 손은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고, 여전히 땅을 비비며 흙을 점토 삼아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혜인아, 먹어.”배현우는 흙덩이를 집어 성혜인의 앞으로 가져갔다. 성혜인은 그의 순진무구한 눈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었다. 바보라서 때릴 수도, 욕할 수도 없었다. 성혜인은 흙을
10분 후, 노예찬이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누나, 현우 씨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집에 약이 없어. 내가 나가서 해열제를 사 올게.”“그래, 수고해.”성혜인은 문을 열고 배현우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배현우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약을 사러 나간 노예찬은 적어도 30분 뒤에나 돌아올 수 있었다.배현우의 옷은 이미 갈아입힌 상태였다. 성혜인은 옆에 있던 수건을 가져다가 물에 적셔 그의 이마에 얹었다.배현우의 속눈썹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편히 잠들 수 없는 듯 몸을 뒤척이다가 팔 전체에 빼곡히 있는 바늘구멍이 드러났는데 몹시 끔찍해 보였다.성혜인은 이 몸이 반승우의 것이라고 생각하자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말하자면 반승우 본인은 그녀를 해친 적이 없었다. 그 일은 모두 배현우가 한 짓이지 반승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이 몸에 있는 수많은 상처는 전부 반승우가 감당해야 했다.한편, 노예찬은 우산을 들고 모퉁이를 돌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그는 천천히 옆에 있는 집 처마 밑으로 걸어가 우산을 거두며 뒤에 있는 사람에게 담담하게 물었다.“무슨 소식 있어?”“10장로님, 아직 성녀를 찾지 못했지만 K는 이미 조직으로 돌아왔습니다. 최근 밖으로 일절 나오지 않는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노예찬이 고개를 숙이자 소년의 분위기가 싹 가셨다. 그는 손끝을 문지르며 말했다.“계속 지켜봐. K가 큰 움직임을 보이면 언제든지 내게 보고해. 이미 해파리 인장의 행방을 알았으니 곧 찾아서 돌아갈 거야.”뒤에 있던 사람은 털썩 무릎을 꿇으며 기쁨에 찬 표정을 지었다.“축하합니다, 10장로님.”10장로의 자리는 그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성녀가 사라진 이후 모두 해파리 인장을 찾아 떳떳하게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해파리 인장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10장로의 눈빛이 음침하게 변했다.“바깥 섬 그 여자를 잘 감시해. 성녀를 배신한 자이니 절대 내버려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
[원진과는 이미 연락했어요. 원진도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는 데 동의했어요. 다만 문제는 원아정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당장은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거예요.][흥, 그 정도는 해줘야지.]연승혁은 이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공지민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얼굴에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그녀의 시선은 곧장 연승혁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금테 안경을 쓴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첫눈에도 지적이고 세련된 인상을 풍겼다.‘분명 낯익은 얼굴인데... 어디서 봤지?’연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소개했다.“이쪽은 내 친한 친구, 이상우예요.”순간 공지민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이상우, 이 사람은 과거 그녀가 찾아갔던 유명한 최면술사의 수제자였다.최근 그 대가가 은퇴하고 이제 그의 제자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었었다.공지민은 아무 일도 없는 척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공지민입니다.”하지만 이상우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과거 그녀와 짧은 시간 교류한 적이 있었고 그때 그는 그녀를 최면하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그의 스승은 공지민의 마음속 집착이 너무 깊어 최면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었다.더군다나 스승과 함께 수련하던 한 달 동안, 이상우는 공지민에게 진지하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마음속 그 사람을 잊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었다.지금 이 순간, 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이상우의 손을 잡았다.“안녕하세요.”이상우는 한순간 흔들리는 눈빛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혁이한테서 얘기 들었어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서요. 오늘 저랑 편하게 얘기 나눠보실래요?”얘기를 나누자는 말은 곧 그녀를 최면에 빠뜨리겠다는 의미였다.공지민은 그제야 연승혁을 흘깃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 리가 없는 연승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앉아요, 누나.”공지민은 자리에 앉
원아정은 팔꿈치로 미친 듯이 차창을 내리치며 동시에 운전대를 잡아당겼다. 게다가 뒤따라오는 경찰도 따돌리지 못하자 운전자는 결국 공항으로 가는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차는 이리저리 우회하며 간신히 경찰들을 따돌렸지만 결국 사람들로 붐비는 번잡한 지역에 들어서고 말았다.원아정은 문을 발로 차며 열고는 곧장 밖으로 내달렸다.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은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달려들어 경호운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경호원들은 이마에 땀이 맺히며 초조하게 멀어져가는 원아정을 바라보았다. 여자 하나를 공항까지 데려가라는 지시였을 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을까.진작에 마취라도 시킬 걸 싶었지만 마취한 상태로는 공항 보안검색을 통과할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결국 운전자는 급히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들은 연승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겨우 이런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해?”경호원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연승혁은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됐어. 다음 기회에 다시 처리하면 되니까. 우선 원진에게 이 일을 설명해야겠군.”원진만 동의하면 원아정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떠나야 할 운명이었다....원아정은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공지민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다 그년 때문이야. 그년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나는 연승혁과 결혼해서 상류층 생활을 하고 있었을 텐데... 이런 꼴을 당할 필요도 없었어.’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이전의 공지민은 그저 그녀 발밑에 있는 하찮은 존재였는데, 이제 상황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원아정은 허름하고 지저분한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지나가던 노숙자와 옷을 바꿔 입은 뒤, 다시 나왔을 때 그녀는 초라하고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거리를 전전하며 숨어 지
하지만 연승혁은 이 일을 아주 은밀하게 처리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으니 고작 연예계에서 떠도는 무명 배우에 불과한 공지민이 진실을 알아낼 리 없었다.설령 나중에 공지민이 온시환과 얽혔다 해도, 온시환이 처음부터 그녀를 장난감처럼 여겼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를 위해 이런 일을 조사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연승혁은 지금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는 공지민이 아직 진실을 모르고 진짜 연씨 가문의 딸이며 구은우와의 관계는 그저 악연일 뿐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모든 일을 계획해 구은우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연승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만약 후자라면 이거야말로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최근 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평온했다. 그런데 이렇게 흥미진진한 일이 불쑥 나타나다니.그는 안정숙을 찾아가 당시 진행했던 두 번의 유전자 검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했다.하나는 머리카락을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쓰레기통에 버린 이쑤시개를 쓴 결과라는 말을 들은 연승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만약 이 정도까지 속일 수 있다면, 공지민도 참 대단한 사람이겠네.’“승혁아, 난 이제 나이가 많아서 이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너 솔직히 말해봐. 원아정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긴 한 거니?”“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할머니가 진행한 두 번의 친자 검사는 꽤 신뢰할 만한 결과잖아요. 그런 걸 조작하는 건 쉽지 않죠.”“휴,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일인지 원... 난 그저 내 손녀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할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걱정하지 말라니! 내가 어떻게 걱정 안 할 수 있겠니!”안정숙은 화가 난 듯 지팡이를 힘껏 바닥에 내리찍었다.“네가 조사한 구은우에 대한 자료, 나도 봤어. 그 아이 정말 뛰어난 사람이더라. 만약 지민이가 정말 그 아이를 좋아했고,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에 잃었다면? 너 같으면 그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을 잊을 수 있겠니
연승혁을 마주했을 때 원아정의 눈가에 잠시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오빠...”하지만 연승혁은 등을 기대며 차갑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쓸데없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거라면, 당장 사람 불러서 쫓아낼 테니까.”원아정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꾸며낸 애잔함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연승혁이 옆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조용히 자리에 앉은 원아정은 이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았다.그때 안정숙이 입을 열었다.“마침 승혁이도 있으니, 구은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거라.”애초에 원아정은 이 일을 말하려고 온 터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오늘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으니까요.”그녀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자의 눈매는 연승혁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안정숙과 연승혁 모두 한눈에 알아챘다. 이 남자는 분명 연씨 가문의 핏줄이었다.이미 벼랑 끝에 선 원아정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공지민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해외로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승혁 오빠, 이 얼굴 잘 보세요. 연씨 가문이 큰 혼란에 휩싸였던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아버님께서 밖에 아들을 하나 두셨다고요. 물론 그건 아버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계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이 그 일을 평생 떨쳐내지 못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언니가 실종된 것도 큰 상처였지만 아버님이 다른 여자를 품었다는 사실은 어머님께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어요. 그 상처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여자가 임신한 걸 알고도 가만두지 않으셨어요. 그 여자는 목숨을 건져 간신히 도망쳤고, 결국 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구은우예요. 그러니까 구은우는 승혁 오빠의 이복동생이라는 말이에요.”연승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안정숙의 시선을 의식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