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도시를 가로질러 달리다가 바로 한가운데서 멈췄다. 성혜인은 고개를 들자마자 거대한 스크린에 나타난 자기 사진을 보았다.가장 고급스러운 건물 한가운데에 걸려 있었는데 그 옆에는 ‘혜인아 내 번호는...’이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성혜인은 순간적으로 무언가에 심장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내린 성혜인이 고개를 들었을 때 스크린에 반승제의 메시지와 함께 나타난 사진이 더욱 커 보였다.어찌나 감격했는지 뺨까지 붉어진 성혜인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이 되기도 전에 옆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쪽이야?”성혜인이 고개를 돌려 보니 아주 아름다운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여자는 성혜이인의 곁으로 다가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당신 성혜인 맞지?”“그쪽은 누구?”여자는 스스럼없는 태도로 손을 내밀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반승제가 첫날 밤에 깨어났을 때 내 방에 있었어. 내 첫 손님이었지.”성혜인은 그녀를 무시하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전화는 통했지만 벨소리가 여자의 가방에서 울렸다.여자는 휴대폰을 꺼내 낯선 번호를 보더니 다시 성혜인이 전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당신이 전화했어? 반승제의 휴대폰이 나한테 있거든.”여자는 차분해 보였지만 잘난 척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반승제 생명의 은인이거든. 나에게 큰 집도 사줬어.”그녀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거기서 지낼래, 성혜인?”그녀는 자랑하고 있었다. 성혜인이 다시 차에 타려고 할 때 옆으로 몇 사람이 지나갔는데 그 사람들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다.“마수연, 너 오늘은 왜 반승제와 함께 있지 않아? 어디를 가든 항상 널 데리고 다니지 않았어?”“널 첩으로 삼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어?”말을 마친 남자의 시선이 성혜인에게로 향했다. 그는 곧바로 입을 가렸다.“본처가 여기 있었네. 그래서 수연이 표정이 좋지 않았구나.”“그래도 반승제와 있은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집 한 채와 차를
성혜인은 켜진 스크린을 보자 안심되었다. 차에 타려고 할 때 반승제의 휴대폰이 여전히 마수연이라는 사람의 손에 있다는 것이 떠올라 상대방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마수연은 성혜인이 돈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작은 스크린의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 반승제가 큰 스크린을 한 달 계약했을 때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 성혜인이라는 여자도 마찬가지였다.마수연은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성혜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가슴을 내밀었다.성혜인은 그녀의 옆으로 걸어가 반승제의 휴대폰을 뺏었다. 마수연은 화가 치밀어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내 휴대폰은 왜 뺏어?” “이거 당신 거 아니잖아. 반승제가 어쩌다 실수로 잃어버린 휴대폰을 당신이 마침 주웠겠지.”마수연이 다가와 다시 휴대폰을 뺏으려고 하자 성혜인은 그녀를 밀쳐냈다. “뻔뻔하게 대낮에 남의 물건을 훔치다니!”마수연은 너무 화가 나서 다시 앞으로 가려고 했지만 성혜인은 이미 차에 앉아 있었다. 중간 섬에는 반승제를 아는 사람이 많았는데 성혜인이 아무에게나 물어봐도 상대방은 반승제가 한 일을 몇 가지 거론할 수 있었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면 아무도 몰랐다.어쩔 수 없이 성혜인은 먼저 노예찬과 배현우를 데리고 머물 곳부터 찾아야 했다. 배현우는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아주 신나 있었는데 마당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진흙 놀이를 하고 있었다.진흙을 문지르던 그의 두 손목에 드러난 주삿바늘 구멍을 보자 성혜인은 마음이 불편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배현우가 말했다.“혜인아, 나 집에 가고 싶어.”성혜인이라고 왜 집에 가고 싶지 않을까. 그녀는 배현우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조금만 놀다가 들어오라고 말했다.지친 모습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는 지금 반승제가 먼저 연락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 먼저 반승제의 생일을 입력했지만 잠금이 해제되지 않았다. 다시 자신의
“알았어. 내가 잘 지켜볼게.”노예찬은 얌전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온 성혜인은 반승제의 휴대폰을 이리저리 뒤져보았지만 새 휴대폰에는 쓸만한 정보가 없었다.마지막으로 메모를 였었는데 그 안에는 반승제가 적어둔 몇 개의 메시지가 있었다.[중간 섬에는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안쪽 섬에 있는 거야?][설마 바깥 섬에 있는 건 아니겠지? 대체 어디 있는 거야.][진작 알았더라면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짜증 나.]메시지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 그녀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성혜인의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부승민은 그녀의 연락처가 없어서 메모에 대고 불평할 수밖에 없었다.성혜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속 아래로 내리다가 맨 마지막 메시지를 보았다.[혜인이가 죽었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실종되지도 않았을 거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혜인은 미간을 구겼다.누군가 반승제에게 그녀가 무슨 일이 생겼다고 말한 걸까? 그리고 방금 전화 와서 반승제가 다른 선택을 하면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또 뭐고. 성혜인의 죽음이 거짓 소식이라면 방금 전화에서 한 말은 도대체 진실인가, 거짓인가?휴대폰을 꽉 움켜쥔 그녀는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팠지만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밖에서 노예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밖에 비가 내리고 있는데 저 배현우라는 사람이 비를 맞으며 마당에서 계속 진흙을 가지고 놀아. 들어가자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아.”성혜인은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현우 옆으로 갔다. 배현우는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있는 개미굴을 파고 있었다.“밖에 비 오잖아. 빨리 집으로 들어가.”그의 손은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고, 여전히 땅을 비비며 흙을 점토 삼아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혜인아, 먹어.”배현우는 흙덩이를 집어 성혜인의 앞으로 가져갔다. 성혜인은 그의 순진무구한 눈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었다. 바보라서 때릴 수도, 욕할 수도 없었다. 성혜인은 흙을
10분 후, 노예찬이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누나, 현우 씨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집에 약이 없어. 내가 나가서 해열제를 사 올게.”“그래, 수고해.”성혜인은 문을 열고 배현우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배현우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약을 사러 나간 노예찬은 적어도 30분 뒤에나 돌아올 수 있었다.배현우의 옷은 이미 갈아입힌 상태였다. 성혜인은 옆에 있던 수건을 가져다가 물에 적셔 그의 이마에 얹었다.배현우의 속눈썹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편히 잠들 수 없는 듯 몸을 뒤척이다가 팔 전체에 빼곡히 있는 바늘구멍이 드러났는데 몹시 끔찍해 보였다.성혜인은 이 몸이 반승우의 것이라고 생각하자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말하자면 반승우 본인은 그녀를 해친 적이 없었다. 그 일은 모두 배현우가 한 짓이지 반승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이 몸에 있는 수많은 상처는 전부 반승우가 감당해야 했다.한편, 노예찬은 우산을 들고 모퉁이를 돌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그는 천천히 옆에 있는 집 처마 밑으로 걸어가 우산을 거두며 뒤에 있는 사람에게 담담하게 물었다.“무슨 소식 있어?”“10장로님, 아직 성녀를 찾지 못했지만 K는 이미 조직으로 돌아왔습니다. 최근 밖으로 일절 나오지 않는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노예찬이 고개를 숙이자 소년의 분위기가 싹 가셨다. 그는 손끝을 문지르며 말했다.“계속 지켜봐. K가 큰 움직임을 보이면 언제든지 내게 보고해. 이미 해파리 인장의 행방을 알았으니 곧 찾아서 돌아갈 거야.”뒤에 있던 사람은 털썩 무릎을 꿇으며 기쁨에 찬 표정을 지었다.“축하합니다, 10장로님.”10장로의 자리는 그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성녀가 사라진 이후 모두 해파리 인장을 찾아 떳떳하게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해파리 인장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10장로의 눈빛이 음침하게 변했다.“바깥 섬 그 여자를 잘 감시해. 성녀를 배신한 자이니 절대 내버려
성혜인이 배현우의 침대 옆에서 거의 30분 동안 기다리고 있을 때 노예찬이 약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누나, 여기 몇 가지 해열제를 사 왔는데 한번 봐 봐.”성혜인은 열을 내리는 데 가장 효과가 빠른 두 가지 약을 골라 배현우에게 먹였다.“내과의원에 다녀왔는데 의사가 와서 주사를 놔줄 수 있대. 전화번호를 남겼는데 주사 맞힐래? 열이 더 빨리 내릴 거야.”팔에 빽빽하게 있는 바늘구멍을 생각하며 성혜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됐어.”노예찬도 옆에 앉았다. 성혜인은 배현우의 입에 약 두 알을 강제로 밀어 넣고 내친김에 물도 조금 부어 넣었다.혼수상태에 빠진 배현우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눈을 뜨고 싶었지만 힘이 없었다.성혜인이 그를 눕히고 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 있을 때 노예찬이 물었다. “사람 불러서 돌보라고 할까?”“그럴 필요 없어. 주변에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 왠지 감시당하고 있는 것 같아.”감시하고 있는 사람의 목적은 알 수 없었지만 항상 누군가의 감시 속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구금섬 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관리가 난잡하고 계급도 존재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비정상적으로 단결되어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은 위험 요소가 하나 더 늘어난다는 뜻이었다.성혜인은 일어나 창문을 닫으려다가 노예찬의 손등에서 피가 나는 것을 보았다.“이건 어쩌다 다친 거야?”“들어올 때 나뭇가지에 긁혔어.”성혜인은 방금 사 온 약들을 살펴봤는데 다행히도 여러 종류의 약이 들어있었고, 그중에는 외상 치료용 약도 있었다. 그녀는 소독 스프레이를 꺼내 노예찬의 손등에 뿌렸다.“예찬아, 너 그 문신이 걱정돼? 걱정하지 마. 승제 씨를 찾고 나면 내가 반드시 해결할 방법을 찾을 거니까.”소독이 끝난 후 그녀는 연고를 발라주었다. 이때 갑자기 방 안의 불이 꺼졌다. 창밖을 내다보니 섬 전체의 불이 꺼져 있었다.“무슨 일이지?...”말을 마치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성혜인은 반사적으로 노예찬을 밀었다.
손가락이 깨끗해질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해서 소독한 후 그는 멈춰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10대 소년처럼 보였지만 눈빛은 잔혹하고 사악했다.그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성혜인의 목소리를 듣고 얼른 나갔다. 의사는 이미 성혜인의 상처를 다 꿰맸지만 전기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 테이블 위에 촛불을 켜놓았다. 의사는 구급상자를 정리하고 떠나기 전에 노예찬을 흘끗 보았다. 노예찬은 소파에 앉아 곁눈으로 성혜인을 관찰했다. 최근 반승제에 대한 걱정에 더해 오늘 밤 발목을 다치며 몹시 초췌해진 성혜인은 소파에서 졸고 있었다.빛이 매우 어두웠지만 농예찬은 그녀가 열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충격 때문인 것 같았다. 거실 안에는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옆에서 주사기를 꺼내 성혜인의 손목을 잡고 주사를 놓으려는 순간 밖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롭게 귀를 꿰뚫는 높은 총소리에 성혜인은 눈을 번쩍 떴다. 노예찬은 손에 있던 주사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소파 밑으로 차서 넣었다.“누나, 열이 나는 것 같아.”성혜인은 일어나서 그를 옆방으로 밀어 넣었다.“너와 배현우는 여기 숨어있어. 내가 나가서 무슨 상황인지 보고 올 테니까, 내가 올 때까지 섣불리 나오지 마.”노예찬은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설핏 그의 눈동자에 악의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누나, 구금섬에서는 총기 소지가 금지되어 있어. 밖은 위험해.”성혜인은 노예찬의 손등을 토닥였다.“괜찮아. 나가서 보고 금방 돌아올 테니 잘 숨어 있어.”노예찬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천천히 손을 풀었다. 성혜인은 몸을 추스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성혜인이 나가자마자 노예찬은 전화를 걸어 중간 섬의 상황을 물었다.“10장로님, 안쪽 섬에 있던 사람이 직접 검문소를 뚫고 중간 섬으로 온 것 같습니다.”노예찬은 손가락으로 전화기를 꽉 움켜쥐고 얼굴을 굳혔다.“어떤 놈인
성혜인은 20분 정도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차도 그림자도 모두 사라졌지만 여전히 몸이 뻣뻣한 느낌이 들었다. 이때 노예찬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슨 일이야?”성혜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내가 안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계속 돌아오지 않으니까 걱정돼서 나와봤어.”성혜인은 방에 들어가 모자를 쓰고 나왔다.“예찬아, 나 지금 일이 있어서 나갔다 와야해. 배현우를 부탁할게. 고열에 정신까지 이상해져서 아무것도 못하니까 네가 잠시 나 대신 좀 도와줘.”“언제 돌아와?”“모르겠어.”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방금 그 세력이 누구인지, 체포된 남자가 반승제가 맞는지 아닌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맞다면 그녀는 가서 그를 구해야만 했다. 변장하고 들어가야만 한다.노예찬의 눈빛이 음침해졌다. 내섬에 있는 사람들은 뭘 하고 있길래 한밤중에 중간 섬에 침입하여 이렇게 큰 소동을 일으킨단 말인가.성혜인이 섣불리 그들을 따라갔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해파리 인장은 어디가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그래서 그는 성혜인을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누나. 저 사람들은 내섬에서 온 사람들이야.”“네가 어떻게 알아?”“외섬, 중간 섬, 내섬의 번호판이 다 달라. 내섬의 세력은 매우 복잡해. 몇 가문이 관리하고 있는데 이 가문 사람들만 총을 사용할 수 있거든. 그들을 건드리면 아마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 거야.” “섣불리 행동하지 않을 게. 예찮아, 배현우 잘 부탁해.”지금 짐을 떠넘기는 건 좀 뻔뻔한 일이지만, 배현우는 돌봐줄 사람이 정말 필요했다.노예찬은 눈썹을 찌푸리며 마음속으로 오늘 밤 일을 일으킨 사람들을 욕했다. 부하들이 아직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성혜인을 붙잡아 둬야 했다.하지만 성혜인은 반승제에 관한 일을 마주쳤고 게다가 아침에 누군가 반승제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으니 침착할 수 없었다. 그녀는 노예찬의 손을 뿌리치고 차가 사라진 방향으로 쫓아갔다. 심지어 택시를 타고.“X발!”
“구씨 가문 측에 최근 여자를 죽이려거든 먼저 나와 상의하라고 전해.”“네.”전화를 끊은 노예찬은 바지 주머니에 전화를 넣었다. 이때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노예찬.”노예찬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바보는 언제 나왔지?문 안에 서 있던 배현우는 노예찬의 살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순진하게 물었다.“혜인이는? 혜인이 보고 싶어.”노예찬은 짜증을 내며 손을 흔들었다.“물건 사러 나갔어. 곧 돌아올 거야.”배현우의 열은 아직 내리지 않았고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운 상태였다.“정말이야? 안 믿어. 나 견과류가 들어간 요구르트 먹고 싶어.”노예찬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곧장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먹고 싶으면 더 기다려. 지금 섬 전체가 정전되어서 가게들이 다 문을 닫아서 살 수 없어.”“안 믿어.”배현우는 그대로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안 믿어. 빨리 나가서 사줘.”노예찬이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 보니 그는 땅에서 구르고 있었다.“너무 배고파. 안 먹으면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요구르트, 스테이크, 불고기... 먹고 싶어.”배현우가 음식 이름을 줄줄이 읊었지만 노예찬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후 비가 한바탕 퍼부어서 땅은 아직도 축축했다. 배현우는 땅에서 구르며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자각이 없는 것 같았다.노예찬은 의자를 테라스로 옮겨와 앉았다. 주변에 촛불을 켜 놓았지만 여전히 매우 어두웠다. 전기가 언제 들어오는지도 모르겠고, 그는 진흙탕에서 아이처럼 데굴데굴 구르는 남자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10분 동안 구르던 배현우는 아마도 오늘 밤에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너무 화가 나서 그대로 기절했다.노예찬은 일어나 그의 앞으로 걸어가 다리를 뻗어 발로 차고 나서야 그 남자가 정말 기절했다는 것을 알았다.그는 배현우를 안으로 끌고 들어가 난방을 켜고 온도를 올린 후 바닥에 내팽개쳐 버린 채로 내버려두었다.배현우는 원래 열이 나고 있었는데 이렇게 누워있으며 열이 더 심해졌지만 정신을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