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이 깨끗해질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해서 소독한 후 그는 멈춰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10대 소년처럼 보였지만 눈빛은 잔혹하고 사악했다.그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성혜인의 목소리를 듣고 얼른 나갔다. 의사는 이미 성혜인의 상처를 다 꿰맸지만 전기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 테이블 위에 촛불을 켜놓았다. 의사는 구급상자를 정리하고 떠나기 전에 노예찬을 흘끗 보았다. 노예찬은 소파에 앉아 곁눈으로 성혜인을 관찰했다. 최근 반승제에 대한 걱정에 더해 오늘 밤 발목을 다치며 몹시 초췌해진 성혜인은 소파에서 졸고 있었다.빛이 매우 어두웠지만 농예찬은 그녀가 열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충격 때문인 것 같았다. 거실 안에는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옆에서 주사기를 꺼내 성혜인의 손목을 잡고 주사를 놓으려는 순간 밖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롭게 귀를 꿰뚫는 높은 총소리에 성혜인은 눈을 번쩍 떴다. 노예찬은 손에 있던 주사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소파 밑으로 차서 넣었다.“누나, 열이 나는 것 같아.”성혜인은 일어나서 그를 옆방으로 밀어 넣었다.“너와 배현우는 여기 숨어있어. 내가 나가서 무슨 상황인지 보고 올 테니까, 내가 올 때까지 섣불리 나오지 마.”노예찬은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설핏 그의 눈동자에 악의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누나, 구금섬에서는 총기 소지가 금지되어 있어. 밖은 위험해.”성혜인은 노예찬의 손등을 토닥였다.“괜찮아. 나가서 보고 금방 돌아올 테니 잘 숨어 있어.”노예찬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천천히 손을 풀었다. 성혜인은 몸을 추스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성혜인이 나가자마자 노예찬은 전화를 걸어 중간 섬의 상황을 물었다.“10장로님, 안쪽 섬에 있던 사람이 직접 검문소를 뚫고 중간 섬으로 온 것 같습니다.”노예찬은 손가락으로 전화기를 꽉 움켜쥐고 얼굴을 굳혔다.“어떤 놈인
성혜인은 20분 정도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차도 그림자도 모두 사라졌지만 여전히 몸이 뻣뻣한 느낌이 들었다. 이때 노예찬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슨 일이야?”성혜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내가 안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계속 돌아오지 않으니까 걱정돼서 나와봤어.”성혜인은 방에 들어가 모자를 쓰고 나왔다.“예찬아, 나 지금 일이 있어서 나갔다 와야해. 배현우를 부탁할게. 고열에 정신까지 이상해져서 아무것도 못하니까 네가 잠시 나 대신 좀 도와줘.”“언제 돌아와?”“모르겠어.”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방금 그 세력이 누구인지, 체포된 남자가 반승제가 맞는지 아닌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맞다면 그녀는 가서 그를 구해야만 했다. 변장하고 들어가야만 한다.노예찬의 눈빛이 음침해졌다. 내섬에 있는 사람들은 뭘 하고 있길래 한밤중에 중간 섬에 침입하여 이렇게 큰 소동을 일으킨단 말인가.성혜인이 섣불리 그들을 따라갔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해파리 인장은 어디가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그래서 그는 성혜인을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누나. 저 사람들은 내섬에서 온 사람들이야.”“네가 어떻게 알아?”“외섬, 중간 섬, 내섬의 번호판이 다 달라. 내섬의 세력은 매우 복잡해. 몇 가문이 관리하고 있는데 이 가문 사람들만 총을 사용할 수 있거든. 그들을 건드리면 아마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 거야.” “섣불리 행동하지 않을 게. 예찮아, 배현우 잘 부탁해.”지금 짐을 떠넘기는 건 좀 뻔뻔한 일이지만, 배현우는 돌봐줄 사람이 정말 필요했다.노예찬은 눈썹을 찌푸리며 마음속으로 오늘 밤 일을 일으킨 사람들을 욕했다. 부하들이 아직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성혜인을 붙잡아 둬야 했다.하지만 성혜인은 반승제에 관한 일을 마주쳤고 게다가 아침에 누군가 반승제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으니 침착할 수 없었다. 그녀는 노예찬의 손을 뿌리치고 차가 사라진 방향으로 쫓아갔다. 심지어 택시를 타고.“X발!”
“구씨 가문 측에 최근 여자를 죽이려거든 먼저 나와 상의하라고 전해.”“네.”전화를 끊은 노예찬은 바지 주머니에 전화를 넣었다. 이때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노예찬.”노예찬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바보는 언제 나왔지?문 안에 서 있던 배현우는 노예찬의 살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순진하게 물었다.“혜인이는? 혜인이 보고 싶어.”노예찬은 짜증을 내며 손을 흔들었다.“물건 사러 나갔어. 곧 돌아올 거야.”배현우의 열은 아직 내리지 않았고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운 상태였다.“정말이야? 안 믿어. 나 견과류가 들어간 요구르트 먹고 싶어.”노예찬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곧장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먹고 싶으면 더 기다려. 지금 섬 전체가 정전되어서 가게들이 다 문을 닫아서 살 수 없어.”“안 믿어.”배현우는 그대로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안 믿어. 빨리 나가서 사줘.”노예찬이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 보니 그는 땅에서 구르고 있었다.“너무 배고파. 안 먹으면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요구르트, 스테이크, 불고기... 먹고 싶어.”배현우가 음식 이름을 줄줄이 읊었지만 노예찬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후 비가 한바탕 퍼부어서 땅은 아직도 축축했다. 배현우는 땅에서 구르며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자각이 없는 것 같았다.노예찬은 의자를 테라스로 옮겨와 앉았다. 주변에 촛불을 켜 놓았지만 여전히 매우 어두웠다. 전기가 언제 들어오는지도 모르겠고, 그는 진흙탕에서 아이처럼 데굴데굴 구르는 남자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10분 동안 구르던 배현우는 아마도 오늘 밤에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너무 화가 나서 그대로 기절했다.노예찬은 일어나 그의 앞으로 걸어가 다리를 뻗어 발로 차고 나서야 그 남자가 정말 기절했다는 것을 알았다.그는 배현우를 안으로 끌고 들어가 난방을 켜고 온도를 올린 후 바닥에 내팽개쳐 버린 채로 내버려두었다.배현우는 원래 열이 나고 있었는데 이렇게 누워있으며 열이 더 심해졌지만 정신을 차
성혜인은 성큼성큼 다가가 두 사람의 상처를 확인했다.“우선 숨을 곳부터 찾아야 겠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 밤 중간 섬이 너무 어수선해. 우리도 표적이 됐어.”성혜인은 총을 들고 매우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배현우, 예찬이를 부축해줘.”“혜인아, 나 너무 배고파.”방금 바닥에서 오랫 동안 굴렀지만 노예찬은 그에게 음식을 주지 않았다. 그는 정말 배가 고프고 몸이 뜨껍고 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성혜인은 서둘러 뜨거운 우유 한 병을 꺼내 비스킷과 함께 먹였다. 그 사이 또 5분이 지체되었다.“역시 혜인이가 좋아.”배가 부른 배현우는 노예찬을 일으켜 세울 힘이 있었다. 성혜인은 총을 들고 길을 열었다. 노예찬은 절뚝거리며 잠시 성혜인을 바라보다가 다시 묵묵히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바보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둘 다 바보였다. 그에게 놀아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오늘 밤 일은 그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해파리 인장에 대해 물을 수 있는 기회였다. 어렸을 때부터 체질이 남달랐던 그는 죽을 수 없었다. 구석진 곳에 방치되더라도 숨이 조금만 붙어 있으면 스스로 살아날 수 있었다.“이 사람들 왜 우리를 감시하는 거야? 누나한테 뭔가 있어서 그래?”이때 세 사람은 한 골목길에 이르렀다. 한참을 걸어왔는데도 뒤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아마 방금 전에 머물렀던 작은 별장을 폭파한 것 같았다.“누나,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그는 구금섬 전체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무리를 피해 숨을 수 있는 곳을 몇 군데 알고 있었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성혜인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오늘 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모른다. 총을 잡은 손이 이 순간까지도 계속 떨리고 있었다.오늘 밤은 그녀의 관점이 뒤집힌 밤이었다. 예전 바깥 세상에 있을 때 그녀는 이렇게 스릴있고, 자극적인 일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실제 총격전을 한 적도 없었다.낡아빠진 다리 아래의 구멍에 도착해서야 그녀는 멈춰섰다. 이 다리 구멍의 위치는 매우
해파리 인장을 가진 사람이 조직의 수장이 될 수 있었다. K가 10장로 에게 복종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인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예찬은 항상 K가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성녀가 K를 안아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가 그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을까.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K는 해파리 인장만 찾을 뿐이지 성녀를 찾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성혜인은 노예찬을 부축하여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텐트 안은 겨우 1평 남짓했는데 세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정도였지만, 성혜인은 여자이기 때문에 두 남자 사이에 약과 음식을 놓고 선을 그어 놓았다. 그리고 노예찬에게 해열제를 먹였다.“열이 날 것 같으니까 우선 한 알 먹어.”노예찬은 텐트 꼭대기를 바라보며 이런 곳을 만든 그녀의 손재주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누나, 그 인장을 이용해 그 조직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할까 봐 두렵지는 않아?”성혜인은 피곤한 기색으로 자리에 누웠다.“오늘 밤 승제 씨를 봤는데, 안쪽 섬에서 온 사람들에게 잡힌 것 같아. 그들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으니 날이 밝으면 가서 살펴봐야겠어.” “안쪽 섬 사람들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여. 정말로 잡혔다면 이미 죽었을 수도 있어. 누나 지금 임신 중이잖아. 혹시 반승제라는 사람이 아이 아버지야?”“맞아. 그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돼서 너무 불안해.”노예찬은 눈썹을 찡그리며 구씨 가문의 포로가 혹시 반승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반승제가 중간 섬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며 안쪽 섬 사람들은 이미 그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가진 재력이 상당해서 안쪽 섬에 들어가면 권력 구도가 바뀐다는 것을 의미했다.오랫동안 안쪽 섬에서 평온하게 지내온 가문들이 어떻게 반승제가 저들의 자원을 빼앗아 가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외부에서 온 자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오래전부터 그곳에 자리 잡아 온 세력을 이길 수는 없다.따라서 그들은 분명 반승제를 처리하려 할 것이고, 아무 죄명이나 갖
한편 구지한은 작은 철창 안에 웅크리고 앉아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밖의 남자를 보며 미간을 바짝 좁혔다.“널 진짜 믿어도 돼? 네 여자 친구는 찾았어?”반승제는 검은 로브를 밑으로 당겨 두 눈을 가렸다.“곧 찾을 거야.”구지한은 바닥에 내려앉자 너무 차가워서 엉덩이가 마비될 것 같았다.“반승제,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 있지마. 지금 구씨 가문 주인 인장이 네 손에 들어갔으니 일부 세력을 부릴 수 있을 텐데, 왜 아직도 우물쭈물하고 있는 거야?”반승제는 옆에 있는 벽에 기대어 이 큰 도련님의 초라한 행색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더 강력한 인물이 존재하는데 아직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했어.”구지한은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속이 아주 깊어 좀체로 내색을 하지 않으며 사람을 보는 통찰력이 날카로웠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모험을 하며 자신의 전부를 반승제에게 걸지 않았을 것이다. 반승제를 처음 본 날 밤, 그가 외부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구지한은 구금섬을 떠나려고 결심했다. 그의 성향은 여기있는 모든 사람들이 혐오했지만 광대한 외부 세계라면 분명 머물 곳을 찾을 수 있었다.구씨 가문의 차기 가주로서 여자와 결혼하지 않으면 그는 모든 사람들의 비난 대상이 될 것이다. 그의 성향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날에는 암살까지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구금섬은 자유로운 곳이 아니었다.“아마 여러 가문과 비밀리에 거래를 해온 그 사람일 거야. 나타날 때마다 변장을 하고 목소리도 때로는 노인처럼, 때로는 여자처럼, 때로는 소년처럼 변해서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몰라. 게다가 잔혹하기까지 해서 그의 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어. 그를 파헤치려면 좀 어려울 거야.”구지한은 바닥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짚고 말했다.“그런데 반승제 너도 정말 대단해. 신분을 위조할 생각을 하다니.”원래 내섬에는 검은 로브로 가리고 다니는 인물이 있었는데, 매년 여러 가문에 약
“구지한, 우리 구씨 가문에 어떻게 너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역겨운 짐승이 태어났을까!”그 남자는 구지한이 말을 듣지 않자 그의 가슴을 후벼팠다.“외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다면, 특히 너 같은 놈을 극혐하는 사람들이라면 과연 널 살려둘까?”구금섬의 규칙상 구지한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에 어떠한 가치도 창출할 수 없다고 여기므로 죽음을 선사한다.구금섬의 규칙은 모두 상류층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런 성향의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아이를 낳을 수 없고 구금섬에 신선한 피를 제공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다.구지한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 손을 머리 뒤로 얹었다. “그래, 그래. 난 죽어 마땅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살아 있네. 넌 우리 밖에서 계속 개처럼 짖으렴.”남자는 분노에 몸을 떨며 깊은숨을 들이마셨다.“할아버지께서 이미 네 소식을 듣고 여기로 오시는 중이야. 그래, 두고 봐!”남자는 말을 마친 후 반승제에게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돌아서서 화를 내며 자리를 떠났다.문이 닫히자 이곳에는 반승제와 구지한만 남았다.구지한의 목소리에는 설렘이 가득했다.“플로리아라는 곳에 가면 정말 나 같은 사람도 차별하지 않는 거야? 심지어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나라도 있다고?”“그래.” “꼭 살아서 네가 말한 나라에 갈 수 있었으면 좋겠네.”반승제는 미간을 좁히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내가 널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구지한은 손을 움직이며 편안한 자세로 바꾸었다.“그랬으면 좋겠네. 난 지금까지 한 번도 구금섬을 떠나본 적이 없어. 우리가 접한 지식으로 여태까지 구금섬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나라라고 생각했어.”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고 있던 검은색 로브를 정리했다.“밖에 나가서 좀 둘러볼게.”“네 여자 친구를 보러 가지 않을 거야?”“가야 해. 하지만 오늘 밤 중간 섬에 난동이 일어나서 예전에 살던 집이 파괴됐어.” “그 여자는 괜찮아?”“괜찮아. 하지만 쫓아가지 않아서 다시 연락이 끊겼
성혜인이 한숨을 내쉬자 배현우도 따라서 한숨을 내쉬었다.“혜인아, 나 집에 가고 싶어. 이 섬에서 벗어나 네이처 빌리지로 돌아가고 싶어.”성혜인을 비스킷을 그의 입에 밀어 넣었다.“우선 배부터 채우고 나서 말해”지금의 그녀는 감히 이 다리 구멍을 벗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특히 대낮에 그 무리가 어디를 지키고 있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발목을 잡는 두 사람을 데리고 온전히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성혜인은 비스킷을 먹으며 노예찬에게 잠 좀 자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노예찬이 물었다.“오늘 밤 나갈 거야?”“응, 어젯밤 그 무리의 상황을 보러 가고 싶어. 두 무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한 무리는 나를 처리하러 왔고 다른 한 무리는 내분 중이었어. 그들이 잡고 있는 사람은 아마 승제 씨일 거야. 가서 살펴봐야 해.”노예찬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오늘 밤 그녀가 나간 틈을 타 연극을 한 번 더 해야 할까?이제 부하들과 연락이 닿았고 어젯밤 그 작은 별장을 폭파한 무리가 K의 부하들이라는 것을 확신했다.구금섬은 노예찬의 구역이고 노예찬은 어리지만 유능했다. 자신의 세력에 K가 침투하지 못했지만 K의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다.아마 성혜인이 첫날 이곳에 들어왔을 때 K의 사람들이 이미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노예찬의 구역이라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을 뿐. 노예찬은 조금 짜증이 났다. 그는 그 위선자를 몹시 싫어했다.세 사람은 이렇게 다리 구멍 아래에 하루 동안 숨어있었다. 밤이 되자 성혜인은 밖으로 나가며 노예찬에게 신신당부했다.“만약 그 무리가 여기를 찾아내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배현우를 데리고 도망가. 내 번호를 알고 있으니 언제든지 연락하면 되니까.”“알았어.”노예찬의 입꼬리가 휘어 올라갔다. 오늘 밤은 바로 성혜인이 죽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자백을 토해내야 할 것이다. 성혜인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예찬아, 고민이 있거나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줘.”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
“맛있어, 먹고 싶으면 이따 저녁에 나가서 먹자.”동생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런 염정아가 걱정되어 소매를 잡으며 위로하려 했지만, 옷을 더럽힐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누나, 일하는 거 힘들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 우리한테 햄버거도 사주고 저녁에도 좋은 거 먹으러 가자고 하겠어.”염정아는 손을 들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사장도 엄청 좋은 사람이고 월급도 많이 줘.”동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햄버거를 계속해서 허겁지겁 먹어댔다.염정아는 공지민의 계획에 피해라도 줄까 봐 내일 돌아가야 해서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었다.아이들은 모두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야 밥상에서 일어섰고 동생은 배가 부름에도 토할 정도로 그냥 먹고 있었다.염정아는 동생의 손에 남은 햄버거를 뺏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배부르면 먹지 말라고, 왜 아직도 그 습관 못 버려?”“오늘 안 먹으면 다음엔 없을가봐...”“이젠 그런 걱정 하지 마.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쭉 있을 거야.”“그래, 누나 말 잘 들을게.”염정아는 웃으면서 남은 햄버거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집에 있던 냉장고는 전에 중고로 샀던 거라 너무 작았고 티비도 화면이 매우 작아 아이들이 한데 모여야만 볼 수 있어서 염정아는 집에 온 틈을 타 냉장고랑 티비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새 티비는 백 인치라서 화면이 큰 소파에 앉아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췄고 젤 작은 막내 둘까지 신이 나서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염정아는 집 안에 있는 모든것 들을 교환하고 정리 한 다음 몇 시간이 지나 아이들을 데리고 랍스타 먹으러 나섰다.식당에 도착하자 동생은 낯선 환경이라 염정아 곁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처음 보는 주변의 분위기에 큰 소리로 말도 못 하고 있자 염정아는 바로 조용한 방으로 예약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전부 주문했
동생의 연락을 받은 염정아는 아이들 생각에 먼저 공지민한테 연락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약속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결국 온시환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였다.염정아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뜸들이며 못하고 있자 온시환은 그녀가 집을 그리워하는 눈치를 채고 말했다.“이틀 정도 지연되여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사람 시켜 집에 데려다줄게요.”염정아는 그 순간 얼굴색이 밝아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네, 고마워요 시환씨.”온시환은 말한 대로 그날 바로 사람 시켜 헬기로 염정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집에 도착한 염정아는 방문을 열고 동생이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것을 보았다.동생의 행동은 아주 서툴렀고 정상적인 사람들하고는 비교가 되지만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에 잘 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염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동생은 바로 뒤돌아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누나!”염정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능숙하게 아이들한테 분유를 타 주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동생은 염정아의 주변만 맴돌면서 금방 통화한 지 얼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것을 보며 꿈만 같게 생각했다.주방을 보던 염정아는 초라하게 놓인 반찬 몇 가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너희 요즘 이렇게만 먹은 거야?”동생은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1분 만에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시켜줬다고 자백했다.“미안해 누나,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시켰어.”두 남매는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만 햄버거를 먹어봤었고 지금의 그들에겐 이런 음식들은 사치품이였다.그때 염정아는 집을 나서면서 아래층 마트 아줌마한테 돈을 맡겨뒀는데 동생의 요구에 아줌마가 배달을 시켜준 듯 하였다.염정아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먹고 싶으면 우리 오늘도 시켜 먹자.”4억, 그들은 지금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고 공지민이 후에 또 몇천만을 주었다.동생은 또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바닥까지 밀고 닦기 시작했다.염정아는 빨
연승혁은 의자를 찾아 앉아 묵묵히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공격해 온 해커의 추적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시간이 오래 걸리자 연승혁은 귀찮은 어조로 물었다.“얼마나 더 걸려야 되는 거니?”“형님, 이틀은 걸려야 될 듯 해요. 그쪽에서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 아직은 추적하기 어려워요. 일단 움직임이 있을 때 추적해 봐야 할것 같네요. 현재 상황에서 보아 신호는 10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잡히고 있으니 아마 해역 부근에 있는 것 같아요.”연승혁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연승혁은 제원의 별장에서 나오면서 고용인 아줌마한테 공지민을 잘 돌보라고 지시했다.공지민은 휴대전화를 연승혁에게 빼앗겨 당분간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고 별장에 있는 아줌마는 매일 그녀의 건강 상태를 관찰하며 잘 돌봐주었다.이것 또한 연승혁이 지시한 일이었고 그는 이렇게 감시하며 공지민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지켜보고 있었다.별장에서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난 공지민은 아줌마가 연승혁에게 회보하며 온시환이 정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회장님, 저 사람 들여보낼까요?”연승혁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지만 아줌마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 되었고 공지민은 온 하루 별장 안에만 있었다.온시환은 며칠 동안 공지민의 소식이 끊기자 걱정되어 그녀의 집에 찾아갔지만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공지민은 요 며칠 사람도 보이지 않고 통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많이 불안해진 온시환은 공지민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역시 받는 사람이 없었다.당연히 온시환은 공지민의 휴대전화가 연승혁의 손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연승혁은 공지민의 휴대전화에 뜬 온시환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또다시 생기게 되었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연씨 가문은 외래인 출입 금지라서 들어가지도 못한 온시환은 차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염정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