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헛웃음이 나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빨리 선을 그었을 텐데 노예찬은 되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쨌든 수능까지 두 달이 남았고 문신이 있으니 현재로서는 보호 대상인 건 확실했다.그곳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그는 아마 주요 보호 대상일 것이다.“바보냐? 빨리 가서 상처부터 치료해.”노예찬은 모처럼 고집을 부리며 끝까지 버텼다.“싫어.” 그 말 한마디에 감동한 성혜인은 마치 남동생을 보는 것처럼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때 교장이 입을 열었다.“학생, 많이 다쳤으니까 일단 양호실에서 치료받고 있어. 어차피 저 선생님은 오늘 아무 데도 못 갈 거야. 그 문신이 뭘 의미하는지는 잘 알지? 쉬운 일도 아닌데 지난 몇 년간의 노력을 이대로 포기할 거니?”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없었던 노예찬은 끈기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그런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낯선 사람 때문에 미래를 망친다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겠는가?교장의 말을 들은 노예찬은 그저 우스웠다.이 문신이 결코 명예를 상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아마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돼지우리에서 살찐 돼지가 가장 먼저 끌려가듯 때가 되면 노예찬도 뼈가 남지 않을 때까지 이용되다가 버려질 수 있다.교장은 지금까지도 소위 명예를 이용하여 모두를 속이고 있다.문신을 동경하는 학생들의 얼굴에는 질투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얻으려는 이 문신과 그에 관해 들어왔던 모든 소식이 엄청난 거짓말이란 걸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일까?문신은 영광이 아니라 생사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를 상징했다.하지만 이 모든 진실을 노예찬은 말할 수 없었다.말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게 뻔하다. 이미 세뇌당한 그들은 노예찬을 미쳤다고 생각하거나 이 모든 게 지어낸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심지어 주위에 널린 게 병원이니 어쩌면 정신 나간 행동을 한다며 정신 병원에 끌려갈 수도 있다. 그러니 침묵을 지키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노예찬은 마치 물에 빠진
현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평소에 얼굴한번 보기 힘든 하진표가 직접 고등학교에 찾아와 낯선 여자에게 굽신거리다니?성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진표는 경호원에게 눈치를 줬다.그러자 경호원은 재빨리 하정우를 밀어냈고 그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큰소리치며 건방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할아버지, 미쳤어요? 저한테 왜 이래요!”하정우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한듯 얼굴에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그는 병원에서부터 묶인 채로 이곳까지 끌려왔고 오늘 길 내내 이유를 물어봤으나 다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하정우는 하씨 가문의 유일한 후손이었기에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든 하진표가 전부 눈감아줬다.“할아버지!”하정우가 다시 한번 소리쳤지만 하진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마치 성혜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나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연지아가 이런 상황에 수치심이 밀려오는지 죽일듯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노려봤다.“빨리 저 미친X 잡지 않고 뭐 하는 거야?”하진표는 화를 내며 지팡이를 두 번 내리쳤다.“닥쳐! 그 입 다물어! 하씨 가문의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 혜인 씨다.”비즈니스에 몸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라는 건 회사 전체의 생사를 결정하는 큰 권한을 갖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이제 누군가가 심기를 건드린다면 얼마든지 하씨 가문을 빈털터리로 만들 수 있다.연지아는 귀를 의심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말도 안 돼. 저 거지가 무슨 돈으로 주식을 산 거야?’연지아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고 성혜인과 눈을 마주치고선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성혜인은 노예찬을 일으켜 세우고 옆에 있던 학생에게 물었다.“양호실이 어디니?”학생은 손을 바르르 떨며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노예찬은 머리가 어지럽고
하진표는 순간 표정이 돌변하더니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바짝 줬다.아무리 하정우가 무능하다고 해도 애지중지하며 키운 손자인데 전혀 체면을 세워주지 않는 성혜인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현장에는 하정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사람들은 그 누구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성혜인은 노예찬을 부축해 양호실로 데려갔다.그 시각 왁자지껄한 현장에서는 교장이 창백해진 얼굴로 부랴부랴 하진표에게 다가갔다.“어르신, 이번에는...”교장 역시 방금 전에 일어난 모든 것들이 믿기지 않은 듯 머릿속이 뒤직박죽되었다.그것보다도 성혜인에게 미움을 샀다는 생각에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었다.불안함이 밀려오며 초조해진 그는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났다.“어르신,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정우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요. 심지어 어르신 앞에서 이렇게 날뛰다니 정말 무서운 게 없나 봅니다. 차라리 안쪽 섬으로 보내는 게 어떠실지요?”하진표는 지팡이를 짚은 채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교장의 뜻은 성혜인을 다른 섬으로 보내 아예 기를 죽여버리자는 뜻이었다.그쪽에는 4대 가문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혜인의 순자산은 아마 상위권에 속할 것이다.4000억을 적은 돈이라고 부르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하진표가 손자 바보인 건 맞지만 교장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옆에 있는 경호원에게 눈치를 주자 그들은 즉시 교장을 잡았다.“어르신, 지금 이게 무슨 뜻이죠?”하진표는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이제 사람 바뀔 때도 되지 않았나? 혜인 씨가 누굴 교장으로 내세우고 싶은지 여쭤봐야지.”교장은 동공이 급격하게 움츠러들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하진표는 걸음을 옮기며 단호하게 말했다.“이만 가자고. 정우랑 교장 선생님은 경찰에게 넘겨.”하진표는 혈육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었다.죽은 척하고 바닥에 누워있던 하정우는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더니 재빨리 다려가 하진표의
아이들은 선생님이 죽은 줄도 모르고 그녀의 침대맡에 간식을 놓아두었다.노예찬은 그녀가 일주일도 못 버틸 걸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마당이 엄청 화려해졌는데 보셨을까?’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쉰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물었다.“선생님이 마당 인테리어 하는 거 보셨어?”“응. 침대에서 내려오고 싶어 했는데 내가 힘이 없어서 부축하지 못했어. 더 자고 싶다고 해서 옆에 간식을 올려놓고 나온 거야.”“착하네.”노예찬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문 옆에서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성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자리를 떴다.아이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후 노예찬은 삽을 들고 마당에 나가 땅을 팠다.그 옆의 돗자리에는 더 이상 아무런 기척이 없는 여자가 누워있었다.성혜인도 삽을 들고나와 노예찬과 함께 땅을 팠고 1미터 깊이까지 파낸 후 조심스럽게 시체를 움직였다.노예찬은 비석을 세우지 않고 그저 흙더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연신 절을 했다.“선생님은 한평생 우릴 돌봐주시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어. 매일 고생만 했지. 누나, 고마워. 누나가 없었다면 병든 몸을 이끌고 학교로 갔을 거야. 어쩌면 힘들게 수업하다가 피를 토하며 생을 마감했을 텐데 누나 덕분에 편히 간 것 같네.”순간 임지연이 떠오른 그녀는 마음이 미어졌다.노예찬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릎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찾고 싶다는 사람이 누구야? 계획은 있어?”성혜인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임지연의 사진이다.“이 사람 본 적 있어?”노예찬은 눈빛이 흔들렸다.“선생님이 예전에 여기로 데려와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성혜인은 충격에 하마터면 사진을 떨어뜨릴 뻔했다.노예찬의 말투는 매우 차분했다.“선생님이 저분을 구하려고 하다가 실패했어. 그래서 아까 우리가 한 것처럼 나랑 선생님이 그분을 땅에 묻었어.”“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그쪽으로 가볼래? 엄청 어릴때라서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마당 반대편이었을 거야.”
노예찬은 씨익 웃더니 사악함을 드러냈다.“이건 맛없는 거야. 착하지? 소란 피우지 말고 얼른 들어가.”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례차례 이곳을 떠났고 노예찬을 팔짱을 낀채 기절한 성혜인을 바라봤다.그렇게 한참을 보다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치고선 방을 나갔다.밖에 나가니 조금 전까지 흙 속에 묻혀 있던 여자가 보란 듯이 바닥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었다.“예찬아, 이게 몇 번째지? 기억이 잘 안 나네.”“선생님, 이번에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잘 숨으셔야 해요.”“알아. 우리 예찬이 말 들어야지. 오늘 밤은 날 안 때릴 거지? 괴롭히지도 않을 거지?”노예찬은 입술을 가리고 웃으며 싸늘함을 풍겼다.“좋아요. 그럼 오늘 밤은 안 하죠. 아참, 연기가 나날이 좋아지네요? 이제 저조차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 못 하겠다니까요?”여자는 재빨리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미친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내가 잘한 건 아무것도 없어. 다 예찬이 덕분이야.”노예찬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선생님, 이제 일어나요.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해서 당분간은 안 때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고마워. 정말 고마워.”여자의 말투에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길래 이 지경이 된 걸까?노예찬은 목뒤에 있는 문신을 만지작거리다가 입꼬리를 올렸다.그 미소를 본 여자는 온몸을 움츠리더니 귀신이라도 본 듯 뒷걸음질 쳤다.“하늘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선생님, 미친 짓 그만하고 얼른 숨어요.”그 말에 여자는 머리를 감싸안고 황급히 도망쳤다.노예찬은 심호흡하고선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아이들은 마치 성혜인이 진수성찬이라도 되는 양 호시탐탐 주변을 맴돌았다.그들은 노예찬의 명령을 기다리며 언제든지 성혜인을 찢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노예찬의 말투는 매우 부드러웠다.“들어가서 자.”노예찬 앞에서만 예의 바르고 앙증맞게 변하는 아이들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물론 성혜인은 그들이 하는 대화와 이 기
성혜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노예찬도 이미 학교에서 돌아왔다. 학교에 새로운 교장이 선출되었다고 하는데 성혜인은 그닥 관심이 없었다.저녁쯤 바람을 쐬려 마당으로 나온 성혜인은 누군가에게 입을 꽉 막혀버렸다.그 사람은 강한 힘으로 성혜인을 뒤로 끌고 갔다.코끝에서는 짙은 피비린내가 났고 곧바로 등 뒤에서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성혜인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플래시를 켰고 몸을 돌린 순간 두 눈이 반짝였다.배현우다!배현우가 외곽 섬에 있었다니!성혜인은 재빨리 노예찬을 불러내 의식을 잃고 쓰러진 그를 안으로 옮겼다.배현우는 환자복 차림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고 노예찬은 단번에 알아봤다.“성남 정신병원 환자복이야. 그곳으로 보내진 사람들은 보통 심각한 병을 가지고 있어. 이분은 누나 친구야?”이런 상황에 대해 전혀 예상 못 한 성혜인은 놀란 듯 얼어붙었다.‘여기로 온 지 불과 며칠 만에 정신병원에 보내졌단 말이야?’노예찬의 표정은 조금 진지해 보였다.“얼른 옷부터 갈아입히자. 그 정신병원은 관리가 하도 엄격해서 환자가 세상 끝까지 도망쳐도 잡으러 간다는 소문이 돌 정도야.”“왜?”“그 안에는 심각한 폭력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야. 심지어 교활하고 잔인해서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 사람 돌려보내는 게 어때? 깨어나면 분명히 누나를 해칠 거야.”성혜인은 몸을 돌렸다.“예찬아, 옷 좀 갈아입혀 줘. 지금 입고 온 옷은 불에 태우자.”말을 마친 후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문을 닫은 노예찬은 의식 잃은 남자를 바라보며 ‘쯧’ 소리를 내더니 자신의 옷을 꺼내 갈아입혀 줬다.옷을 갈아입은 후, 그는 입구에서 성혜인을 불렀다.성혜인은 방으로 들어와 배현우의 곳곳을 살폈다. 특별한 외상이 없는 거로 보아 방금전에 진동했던 피비린내는 옷에서 난 게 틀림없다.‘누구랑 싸운 건가?’다음 날 점심쯤에 배현우는 천천히 의식을 되찾았고 마침 죽 한 그릇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성혜인과 시선이 마주
성혜인은 어쩌면 배현우가 연기하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진지하게 그의 두 눈을 들여다봤다.배현우는 잔꾀가 많은 사람이다. 게다가 어젯밤 갑자기 나타나 입을 막고 끌고 가려 했으니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그러나 뚫어지라 1분 넘게 봤음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혜인아, 아파.”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팔을 가리켰다.성혜인은 눈빛이 흔들렸다. 안 그래도 주삿바늘 자국이 가득한 곳에 새로운 자국이 많이 생겼다.누가 봐도 학대를 받은 흔적이다.성혜인이 배현우의 손을 잡고 무슨 말을 하려던 참에 그는 갑자기 쪼그리고 앉더니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안았다.“아파. 주사가 너무 아파. 집 가고 싶어.”“집이 어딘데?”“그게...”말끝을 흐리던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긴가민가하며 입을 열었다.“네이처 빌리지. 혜인이가 예쁘게 인테리어 해놓은 네이처 빌리지.”그 말을 들은 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고 배현우는 아픈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네이처 빌리지는 네가 아니라 승제 씨가 사는 곳이야.”예상외로 배현우의 반응은 엄청났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험상궂은 표정으로 말했다.“내 꺼야! 내 꺼라고!”성혜인은 더 이상 따지고 싶지 않았다.‘배현우는 완전히 미쳤는데 승제 씨는 괜찮을까?’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배현우를 상대하기 싫은 티를 팍팍 냈다. 반승제가 외곽 섬에 없으니, 지금으로선 하진표의 연락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배현우는 언제든지 정신병원에 잡혀갈 위험성이 있기에 연락을 받는 순간 최대한 빨리 이동해야 한다.방으로 돌아온 성혜인은 문을 닫은 후 손을 들어 배를 어루만졌다.오후 4시. 드디어 하진표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그 섬까지 갈 수 있는 차를 보내준다고 했다.성혜인은 배현우와 함께 차에 오르려 했지만, 배현우는 한사코 차에 오르지 않았다.“난 혜인이랑 여기 있을래. 가기 싫어. 차 안 탈 거야.”차 옆에 서서 한참을 생각하던 노예찬을 그를 끌어내고선 직접 차에 올라탔다.성
차가 도시를 가로질러 달리다가 바로 한가운데서 멈췄다. 성혜인은 고개를 들자마자 거대한 스크린에 나타난 자기 사진을 보았다.가장 고급스러운 건물 한가운데에 걸려 있었는데 그 옆에는 ‘혜인아 내 번호는...’이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성혜인은 순간적으로 무언가에 심장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내린 성혜인이 고개를 들었을 때 스크린에 반승제의 메시지와 함께 나타난 사진이 더욱 커 보였다.어찌나 감격했는지 뺨까지 붉어진 성혜인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이 되기도 전에 옆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쪽이야?”성혜인이 고개를 돌려 보니 아주 아름다운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여자는 성혜이인의 곁으로 다가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당신 성혜인 맞지?”“그쪽은 누구?”여자는 스스럼없는 태도로 손을 내밀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반승제가 첫날 밤에 깨어났을 때 내 방에 있었어. 내 첫 손님이었지.”성혜인은 그녀를 무시하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전화는 통했지만 벨소리가 여자의 가방에서 울렸다.여자는 휴대폰을 꺼내 낯선 번호를 보더니 다시 성혜인이 전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당신이 전화했어? 반승제의 휴대폰이 나한테 있거든.”여자는 차분해 보였지만 잘난 척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반승제 생명의 은인이거든. 나에게 큰 집도 사줬어.”그녀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거기서 지낼래, 성혜인?”그녀는 자랑하고 있었다. 성혜인이 다시 차에 타려고 할 때 옆으로 몇 사람이 지나갔는데 그 사람들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다.“마수연, 너 오늘은 왜 반승제와 함께 있지 않아? 어디를 가든 항상 널 데리고 다니지 않았어?”“널 첩으로 삼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어?”말을 마친 남자의 시선이 성혜인에게로 향했다. 그는 곧바로 입을 가렸다.“본처가 여기 있었네. 그래서 수연이 표정이 좋지 않았구나.”“그래도 반승제와 있은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집 한 채와 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