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리의 시선은 다시 서주혁에게로 향했다. 그에게 술을 권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는 담담하게 잔을 들고 마시지 않았지만 술을 권한 사람들은 마지못해 잔을 비웠다.서주혁은 어디서든 빛나는 금수저였지만 그녀는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흙수저였다. 역시나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 자신만 인연이라고 우길 뿐이었다.조현은 장하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를 떠났다. 장하리는 몇 분 동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때 서수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X년이 왜 또 여기 있어! 우리 오빠 뒷조사를 하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서수연은 오늘 밤 분홍색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분명 부드러운 이미지였지만, 입으로 내뱉는 말은 마치 길거리의 불량소녀 같았다.“장하리 맞지? 그 미천한 여자.”서수연의 주변에는 여전히 거짓된 친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장하리는 그녀들 중 몇 명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지난 몇 번의 파티에서 이 몇 명은 계속 장하리를 괴롭혔다. 다만 장하리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그녀의 신분으로 어떻게 이 부잣집 아가씨들에게 강력히 맞설 수 있겠는가. 게다가 회사에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서수연은 턱을 치켜들고 오만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장하리, 따라 와!”그녀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크게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서수연은 여전히 걱정하고 있었다. 어쨌든 서주혁이 예전 장하리에게 꽤 관심이 많았는데 혹시라도 그녀가 괴롭힘당하는 모습을 본다면 갑자기 없던 정이라도 살아난다면 큰일이었다.그래서 장하리를 괴롭힐 때면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조용히 괴롭혔다. 장하리는 물러터져서 그녀들이 마음껏 괴롭힐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그녀들은 장하리를 여자 화장실에 데려와서 미친 듯이 뺨을 때렸다.“X년! 앞으로 우리 오빠한테 접근하지 마!” “수연아, 너 왜 힘없이 때려. 내가 때리는 거 봐.”짝! 짝!쉴 새 없이 뺨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건 마치 학창 시절
서주혁은 담배 절반을 피우고 꽁초를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계속 보고 있을 거야?”그는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모퉁이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마치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장하리는 자리에 얼어붙은 채 뺨에 있는 마스크를 만지더니 가만히 서 있었다. 서주혁은 성냥갑을 들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장하리는 전에 이런 종류의 성냥갑을 본 적이 있었다. 사고 싶었지만 인터넷에서도 매점에서도 판매하지 않았다. 이것은 특별히 주문 제작한 성냥갑인 것 같았다. 때때로 그는 라이터를 사용하고, 때로는 이런 종류의 성냥갑을 사용했다.그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입안 가득한 연기를 내뿜었다. 그를 바라보던 장하리는 마음이 시큰거렸다. 그녀는 마스크를 내리고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려는 듯 조용히 돌아섰다.지금 상태로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일에 관한 협상 건은 유해은과 송아현이 실수 없이 처리할 것이니 장하리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서주혁은 떠나는 발소리가 들리자 속눈섭이 떨렸다. 복도의 등도 꺼지고 그의 입에 물고 있는 담배만 미약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한참 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성냥에 불을 붙이고 불이 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짜증이 치밀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서주혁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다시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때 온시환도 담배를 피우러 다가왔다.“냄새가 왜 이렇게 심해? 몇 대나 피운 거야?”온시환은 반대편 벽에 기대어 담배를 입에 물었다.“오늘 저녁 장하리를 봤는데 두 연예인과 함께 왔더라. 성혜인이 떠난 후 장하리가 회사를 관리하는 것 같던데.” “응.”서주혁은 그녀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온시환은 계속 그 이야기를 꺼냈다.“너 기억 상실했을 때, 맨날 저 여자를 덮쳤잖아.”모두가 서주혁이 기억상실을 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온시환이 누구인가? 서주혁이 깨어난 첫날
성혜인과 반승제는 격투장에서 하룻밤을 쉬고 제원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출발을 결심했다.반승제는 처음 배현우를 데리고 한국을 떠났을 때 백겸에게 연구 기지를 찾아내겠다고 약속했다.그 때문에 백겸은 배현우를 데려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수배자라는 혐의를 받고 있어도 아무도 한국에서 배현우를 데려갈 수 없었을 것이다.격투장의 빌라 꼭대기 층. 배현우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반승제, 정말 나를 데려갈 거야?”반승제는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워 헬기에 고정하고 문을 닫았다.“X발!”배현우는 머리가 날카로운 무언가에 부딪히며 고통으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반승제를 바라보니 성혜인과 함께 다른 헬기에 타고 있었다.빨리 임지연을 찾아 해독제를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제 설의종 쪽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먼저 BK에 대해 알아야만 연구 기지에 대해서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배현우의 몸에는 아무런 통신 장비가 없었다. 반승제가 그를 눈앞에 두고 감시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배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면과 점점 더 멀어지는 땅만 내려다보았다. 다른 헬기에서는 성혜인이 총을 조립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인터넷에서 수없이 이곳을 찾아봤지만 알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바다 한가운데에 완전히 둘러싸인 세 개의 섬은, 수천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한다.그곳은 지하 격투장과 다소 비슷했지만 지하 격투장은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지만 그곳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달랐다.그곳은 구금섬으로 불리며 300여 년 전에는 정신병이 있는 범인을 가두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섬에 보내진 사람들은 모두 정신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했다.백여 년 전에 갑자기 화재가 발생하여 질서가 다시 확립되고 완전히 분리되고 폐쇄된 국가가 만들어졌다.그곳의 원주민들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외부인과 결혼 할 수 없었으며 외부 세계와의 무역은 온전히 네 가문에서 관리했다.최용호가 알려준 몇 가지 단서를 근거로 성혜인이
세 사람 모두 보안 검색을 통과했다. 성혜인이 더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곳은 반년에 한 번만 개방되고 한 번에 세 사람만 통과할 수 있으며 이번 입장 자격을 얻기 위해 큰 대가를 치렀다.게다가 이 섬에 들어가기 위한 아주 역겨운 규칙이 하나 있었다. 외부인이 힘을 합쳐 내부의 운영을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들어가는 사람은 환각제를 복용해야 하고 다시 깨어나면 함께 들어온 사람과 헤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성혜인은 최용호가 준 정보를 통해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석판에 새겨진 천 개가 넘는 빼곡하게 적힌 규칙을 보자 극도의 불쾌감을 느꼈다.현대 사회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런 규칙을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려웠다.반승제는 그녀의 곁에 서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들어가서 나를 찾으려고 서두르지 말고 너부터 지켜.”말을 마친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성혜인의 배를 바라보았다.“혜인아, 정말 널 돌려보내고 싶어.”이곳은 그녀에게 안전하지 않았고 언제 다시 나올 수 있을지 몰랐다.“괜찮아요.”성혜인은 차분한 표정으로 총을 건넸다.“승제 씨도 자신을 잘 지켜요.”그녀는 차가운 표정의 배현우를 흘겨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이 사람을 따라오게 놔둬도 괜찮을까요? 들어가면 우리랑 떨어질 텐데.”“꼭 필요해서 어쩔 수 없어.”반승우라면 이 섬에 대한 단서를 줄 수 있었고,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배현우의 존재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밝히지 못하는 것 같았다.성혜인을 본 경비병은 눈빛이 빛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쯧쯧, 몇 년 동안 여자가 들어가는 건 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예쁘게 생긴 여자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구금섬에 숨으려는 건지.”그들은 모든 국가에서 수배 중인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아닌 이상 스스로 이곳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어쨌든 이곳은 구금섬이었고, 그 당시에는 이곳에 정신병원이 가득했다. 지금까지도 섬에는
소년은 고개를 돌려 성혜인을 바라봤다.그러자 성혜인의 얼굴에는 금세 미소가 번졌다.“그게...”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몸이 너무 안 좋은 원인도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이 녀석에게 따로 말을 걸 기회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여 연약한 척할 수밖에 없었다.‘양심이 있다면 날 데리고 가겠지.’그러나 예상과 달리 성혜인이 쓰러진 후, 소년의 발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쓰러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은 채 제 갈 길을 갔다.10분 정도 기다려 소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성혜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처음 온 곳이라 사람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조차 몰랐으나 일단 일어나서 거리로 나갔다.이곳은 연락과 의사소통이 힘든 것 외에 바깥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그렇게 한 시간 동안 걷다가 피곤함을 느껴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 밖에 앉았다.“주문 도와드릴까요?”남자의 목소리는 풋풋함과 성숙함이 공존했다.고개를 들어보자 방금 전에 매정하게 돌아섰던 그 자식이었다.노예찬도 성혜인을 알아본 듯했으나 별 표정 없이 메뉴판을 건넸다.성혜인은 오는 길 내내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폈지만, 눈에 띄는 부분에 해파리 문신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앞의 이 고등학생을 제외하고는.‘설마 BK 쪽 사람인 건가?’성혜인은 자신이 우연히 BK의 본거지에 들어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임지연이 숨어 있는 곳은 BK의 은신처가 아닐까?마음속에 의심이 피어날수록 불안함도 동시에 밀려왔다.미스터 K는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성혜인이 이곳에 왔다는 걸 그가 알게 된다면 독 안의 든 쥐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다.성혜인이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자 노예찬은 묻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순간 정신을 차린 성혜인은 메뉴판을 건네받고 음식을 몇 개 주문했다.“다 못 먹을 거예요. 양이 많으니까 두 개만 시켜요.”노예찬은 마침내 입을 열었고 성혜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오솔길을 따라 30분간 버스를 타다가 노예찬은 어느 황폐한 마당 앞에 멈춰 섰다.성혜인도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여는 순간 한약 냄새가 진동했고 동시에 노인과 아이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형, 왔어?”“오빠, 왜 이렇게 늦게 왔어!”이윽고 주변에서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쏟아져 나와 모두 노예찬을 에워쌌다.노예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을 달래다가 성혜인을 보며 말했다.“이쪽으로 따라와.”성혜인은 걸음을 옮겨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맨 안쪽 방은 채광이 상대적으로 좋았으나 환경이 너무 초라했고 천장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물을 받기 위해 바닥에는 그릇이 놓여 있었다.“선생님, 저 오늘 이분을 만났어요.”노예찬이 문을 열자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중년 여성이 잔뜩 초라한 모습으로 그곳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성혜인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입을 가리고 심하게 기침했다.“누구신지?”“돈이 엄청 많대요. 그리고 제 문신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셨어요.”성혜인은 눈앞의 여성에게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여자는 순간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노예찬이 계속 말을 이었다.“이분에게 수업을 맡기는 건 어떠세요?”성혜인은 도무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침대에 앉아 있던 여자는 침묵을 지키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너무 위험해.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야.”“문신을 조사한다는 건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 아닐까요?”침대 위의 여자는 온몸이 얼어붙더니 씁쓸한 미소를 드러냈다.“내가 생각이 짧았네.”성혜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이때 기침 소리가 들려오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고 마침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성함이 어떻게 되시죠?”“성혜인입니다.”“그럼 혜인 씨라고 부르죠. 해파리 문신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요?”성혜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바로 다음 순간 그 여자는 노예찬과 눈이
이 문신의 의미를 몰랐다면 분명히 그들이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성혜인은 이미 문신의 험악함을 직접 목격했기에 그들이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다고 짐작했다.구금섬은 BK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지금 보니 BK로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특별히 선발된 엘리트들이다. 그 말인즉 그들은 더 높은 교육을 받으러 간 게 아닌 다른 뭔가를 배우러 간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연구를 위해 끌려갔을 수도 있다.자고로 연구란 IQ가 높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그럼 BK와 베일에 싸인 연구 기지는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성혜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으나 노예찬의 목소리는 멈출 줄 몰랐다.“선생님이 우연히 그 대화를 들은 뒤부터 계속 날 걱정하고 계셨어. 본인도 건강이 안 좋으면서... 알다시피 고등학교는 관리제도가 매우 엄격해서 선생님이 함부로 그만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일단 후임자를 찾아야 하고, 그 사람이 전공 테스트를 통과해야 집에서 쉴 수가 있어. 후임자가 없다면 선택지는 두 개뿐이야. 이대로 죽거나 죽기 직전까지 학교를 나가거나.”“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노예찬은 고개를 숙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그냥 느낌이 왔어.”성혜인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이 해파리 문신에 대해서 또 숨겨진 흑막이 있다는 거네?”“선생님 자리에 앉게 되면 작품으로 대회에 참가할 수 있거든? 만약 제출한 작품이 기준에 부합해서 채택된다면 중간 섬으로 들어갈 수 있어. 여기까지는 쉬운데 문신의 흑막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제일 안쪽 섬으로 들어가야 돼. 그건 엄청 복잡해.”노예찬은 자기 목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두 달 후면 또 한차례의 수능이 끝나. 그때쯤이면 난 아마 끌려갔겠지? 이것 또한 내 운명이라고 생각해야지.”그는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차분함과 냉정함을 갖고 있었다.“누나, 해파리 문신의 비밀은 안쪽 섬에 있어. 내가 아는 건 이게
“누군가 했더니 일꾼 노예찬이잖아? 드디어 돈 생겨서 인테리어 하는 거야? 아니, 돈이 있으면 물이 새는 지붕부터 고쳐야지. 안 그러면 지금처럼 옷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잖아. 다들 너랑 짝궁하기 싫어하는데 자존심 상하지 않아?”재벌 2세 하정우는 차 문을 열고 거만한 표정으로 트럭을 훑었다.“대출로 이 많은 걸 산 거야? 언제 다 갚으려고? 저 안에 있는 거지들을 다 팔아도 트럭 한 대 값도 못 벌 것 같은데?”하정우는 팔짱을 끼며 입꼬리를 올렸다.그의 시선은 마침내 성혜인에게 머물렀고 순간 눈이 반짝이더니 곧바로 싸늘하게 돌변했다.“네 얼굴에 반해서 들러붙은 여자야?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전에 우리 학교 퀸카가 너한테 조금 잘해줬다고 바로 러브레터를 썼잖아. 결국에는 어떻게 됐어? 걔는 그냥 널 갖고 논 거야. 성적만 좋아서 뭐 하냐?”하정우는 욕설을 퍼부으면서 한편으로는 질투심에 겨워 뚫어지라 노예찬의 목을 바라봤다.지난 몇 년 동안, 노예찬은 이 섬에서 상위 10위에 진입한 최초의 학생이었다.학교 측은 이 영광을 누리려고 며칠 동안 현수막을 걸었고 감사의 의미로 10만 원을 줬다고 한다.하정우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망설임 없이 성혜인을 만졌다.“너한테 들러붙은 여차 치고는 예쁘네? 어느 학교 퀸카야?”성혜인은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랐다. 어이가 없는 듯 곧장 하정우의 손을 내리쳤다.그러자 하정우는 순식간에 표정이 돌변했다.“X발. 네까짓 게 뭔데 나한테 이래? 좋아해 주면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내가 손 하나만 까딱해도 고마워하는 인간들이 널렸다고.”이때 또다시 차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저분이 마음에 드셨어요?”하정우는 ‘퉤’하며 바닥에 침을 뱉더니 수표 몇 장을 꺼내 던졌다.“이게 뭔지 알아? 이걸 보고도 저 거지 새끼랑 붙어먹는 건 아니겠지? 경고하는데, 내가 이대로 가잖아? 넌 내일 무조건 울면서 찾아와서 나한테 빌
연승혁을 마주했을 때 원아정의 눈가에 잠시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오빠...”하지만 연승혁은 등을 기대며 차갑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쓸데없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거라면, 당장 사람 불러서 쫓아낼 테니까.”원아정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꾸며낸 애잔함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연승혁이 옆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조용히 자리에 앉은 원아정은 이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았다.그때 안정숙이 입을 열었다.“마침 승혁이도 있으니, 구은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거라.”애초에 원아정은 이 일을 말하려고 온 터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오늘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으니까요.”그녀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자의 눈매는 연승혁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안정숙과 연승혁 모두 한눈에 알아챘다. 이 남자는 분명 연씨 가문의 핏줄이었다.이미 벼랑 끝에 선 원아정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공지민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해외로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승혁 오빠, 이 얼굴 잘 보세요. 연씨 가문이 큰 혼란에 휩싸였던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아버님께서 밖에 아들을 하나 두셨다고요. 물론 그건 아버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계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이 그 일을 평생 떨쳐내지 못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언니가 실종된 것도 큰 상처였지만 아버님이 다른 여자를 품었다는 사실은 어머님께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어요. 그 상처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여자가 임신한 걸 알고도 가만두지 않으셨어요. 그 여자는 목숨을 건져 간신히 도망쳤고, 결국 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구은우예요. 그러니까 구은우는 승혁 오빠의 이복동생이라는 말이에요.”연승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안정숙의 시선을 의식하고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진 원아정은 불안감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만약 안정숙이 원진과 상의한다면 그녀는 반드시 해외로 쫓겨날 것이다. 원진은 절대 그녀 편에 서지 않을 터였다.원아정은 서둘러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공지민 그년 때문에 내 인생은 완전히 끝장났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녀는 곧장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래는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의 정체를 밝혀내라고 시켰건만 돌아온 보고는 실수로 그 사람을 놓쳤다는 것이었다.“뭐? 놓쳤다고?”원아정은 분노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면 모든 걸 잃고 말 것이다.그녀는 차를 몰고 공지민이 사는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원아정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지금이라도 공지민을 보기만 하면 망설임 없이 액셀을 밟아 그대로 들이받아 죽여버리겠다고.하지만 공지민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원아정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매일 공지민의 집 근처를 돌며 기회를 엿보았다.차를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두고 혹시라도 온시환의 사람들이 눈치챌까 멀리서 관찰했다.하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공지민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대신 안정숙이 공지민을 만나러 오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그 광경을 보자 원아정의 얼굴에는 질투가 가득 차올랐다.‘고등학교 때 그렇게 짓밟아 놓았던 공지민이 나를 밟고 올라가다니... 이게 말이 돼?’분노를 삭이며 핸들을 꽉 움켜쥔 그녀의 시야에 드디어 공지민이 나타났다.공지민은 안정숙과 함께 나와 있었다. 안정숙은 공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그 평온한 광경을 바라보는 원아정은 질투에 사로잡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를 악문 원아정은 다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사람 정체 아직도 못 밝혀냈어?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 말이야!”“그 집에 배달을 다녀온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은 여자
온시환은 뒤에서 움직일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기에 드러난 수단만을 써야 했고 그만큼 더 조심해야 했다.무엇보다 이 일에 서주혁이나 반승제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가 자신의 여자를 위해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고 그러기에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해야 했다.물론 만약 상황이 공지민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악화한다면 그때야 비로소 그 둘에게 도움을 청할지도 몰랐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승혁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인지 새삼 깨달았다.온시환은 그동안 자신이 알아낸 연씨 가문의 과거와 연승혁이 회색지대 사업을 정리하며 보여준 철저하고도 잔혹한 수완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공지민은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온시환이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연승혁이 이토록 잔혹하지 않았다면, 아마 먼 옛날에 태어났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으로 불렸을지도 모른다.이어 온시환은 연씨 가문에서 안정숙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겉보기에는 자애로워 보이는 안정숙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의 품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생각했다.온시환의 눈에 그녀는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해 보였을까?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겠다고 나섰던 그녀가 얼마나 우스웠을까?연씨 가문의 식사 자리에서 온시환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진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는 아마도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려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온시환이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도우려 했을까?공지민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요즘 들어 온시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그날 저녁, 연씨 가문에서 또다시 값비싼 선물들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안정숙이 직접 방문하기까지 했다.안정숙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며 공지민을 받아들이려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태도는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지민아, 이리 와 보렴. 최근에
그날 밤, 온시환의 사람들이 염정아가 머물던 집 주변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원아정의 사람들이 이미 철수했음을 확인했다. 그 즉시 염정아를 온시환의 별장으로 안전하게 옮겼다.염정아는 전과 다름없이 방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조차도 방에서만 해결했다.공지민은 염정아를 제원으로 불러오기 전까지 그녀가 이렇게 협조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특히, 이번에는 염정아가 외부인의 이상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원아정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공지민은 마음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아야, 이번에는 네가 그 배달원의 이상함을 눈치챈 덕분이야.”염정아는 그릇 안의 음식을 먹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너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공지민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니야, 넌 한 번도 내게 폐를 끼친 적이 없어.”염정아는 눈빛이 반짝이며 놀란 듯 공지민을 쳐다보았다. 이내 그녀는 천천히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지민아, 난 그저 네가 구은우의 복수를 끝낸 뒤엔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사실 나도 한때 복수심에 사로잡혀 살았어. 그때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곤 했지. 세상과 부모를 원망하며 미친 사람처럼 살았어.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했어. 이렇게 짧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깨달았지. 나는 너무 나약했고, 도망칠 용기도 반항할 용기도 없었어. 괴롭힘을 당해도 그냥 참기만 했고. 사람은 참을수록 더 고통스러워진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염정아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공지민은 그녀를 천천히 안으며 말했다.“난 모르겠어. 복수가 끝난 후엔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염정아는 별장에 들어오면서 온시환을 보았다.그녀의 눈에 온시환은 매우 훌륭한 남자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가 공지민을 바라보는 눈에는 온통 사랑이 담겨 있었다.
“계속 조사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요즘은 다들 섣부른 행동 하지 말라고.”잠시 후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항상 하는 말이지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목숨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옆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연승혁은 옆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공허했다.과거 연씨 가문이 회색지대 사업을 했을 때는 항상 목숨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사업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전환한 이후 몇 년 동안 연씨 가문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에 불쾌하면서도 묘한 흥미를 느꼈다. 연승혁은 타고난 모험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그래, 누군지 한번 보자고.’연승혁은 문득 조금 전 할머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한 이름을 언급했었다.‘구은우?’하지만 연승혁은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왔기에 그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하찮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뭔가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알겠습니다, 형님.”배는 여전히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한편, 제원에서 원아정은 연씨 가문을 떠난 뒤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그녀는 공지민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공지민이 더 이상 제원에서 발붙일 수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차에 올라탄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집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아가씨, 우리가 10시간 동안 지켜봤지만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밖에서 음식을 배달한 것 같습니다.”원아정은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밖에서 배달 음식이 들어갔다고? 너희들 머리는 장식이야? 배달원으로 위장해서 안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해? 도대체 내가 왜 너희들을 고용한 거야!”전화를 끊은 뒤 그들은 그제야 원아정의 말에 따라 배달원으로 위장해 염정아가 머무
안정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게 무슨 뜻이니?”원아정은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히 말했다.“아, 할머니. 정말 모르신다면 승혁 오빠를 불러보세요. 저도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니까요. 어차피 지금은 공지민이라는 친손녀를 얻으셨으니 제 말은 믿지도 않으실 테고요. 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아정아, 너 나를 원망하는 거니?”원아정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안정숙은 지팡이를 꽉 쥐며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어르신, 아정 씨는 아마 결혼식 사건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 무례했습니다.”안정숙은 옆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분히 말했다.“아정이가 뭘 원망할 자격이 있나. 그날 일을 문제 삼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가 충분히 관대했던 거야. 저 아이는 단지 체면만 구긴 거지. 하지만 지민이는 그날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나. 역시나 반성할 줄 모르고, 저 아이를 집안에 들이지 않길 정말 잘했어.”가정부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위로했다.“어르신, 보시는 눈이 정확하십니다. 아정 씨는 확실히 그런 그릇이 아니죠.”설령 공지민과 관련된 일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원아정이 연씨 가문에 들어오면 결국 문제만 일으키게 될 것이다.최근 공지민과 관련된 일로 안절부절못하던 안정숙은 원아정의 말이 떠올라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혹시 그 당시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닐까?그녀는 즉시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이미 바다에 나가 있었다. 최근 거래에 문제가 생겼고 돌아오려면 사흘이 걸릴 거라고 했다.“할머니, 사흘 후에 찾아뵙겠습니다.”안정숙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안했다.그녀는 결국 직접 공지민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직접 그녀를 만나야만 마음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연승혁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원아정은 마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황급히 액셀을 밟아 한적한 도로 위에 차를 멈췄고 주변 교통경찰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확실한 정보야?”“확실해. 연씨 가문에서 이미 공식적으로 발표했어. 혹시 연승혁이 너를 차단해서 SNS에 올린 글을 못 본 거 아니야?”이 말은 원아정의 정곡을 저대로 찔렀다. 연승혁은 정말 그녀를 차단했다.원아정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전화를 끊고 바로 안정숙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안정숙도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쯤 되니, 이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녀는 직감했다.그래서 안정숙이 그렇게 공지민을 신경 쓴 거였다. 심지어 내 결혼식도 취소하면서까지...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그래서 그랬던 거구나!’원아정은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터무니없는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설마 결혼식장에서 안정숙이 공지민을 알아본 걸까?‘망할!’그녀는 속으로 수없이 욕을 퍼부었지만 상황이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연승혁과의 관계는 이제 완전히 끝났고 그녀는 자신이 공지민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공지민이 나에게 복수한다면 어떡하지?’그녀는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안 돼. 내가 먼저 손을 써야 해.’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구은우라는 이름이 떠올랐다.원아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내가 왜 구은우를 잊고 있었지? 구은우를 죽인 건 연승혁 아니었나? 공지민이 이제 연씨 가문의 사람이 됐다면 당연히 복수를 원하지 않을까?’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너무 우연 아닌가?’공지민이 정말 연씨 가문의 사람일까?혹시 공지민이 연승혁에게 접근해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걸 계획한 건 아닐까?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단순히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결론지었다.원아정은 갑자기 연승혁과 공지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떠올랐다.이 생각이 들자
안정숙은 깊은 한숨을 쉬며 연승혁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 네가 지민이를 잘 지켜봐.”연승혁은 안정숙과 함께 밖으로 잠시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원아정이었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전화를 차단해 버렸다.원아정은 화가 치밀었다. 최근 연승혁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SNS에 올려 자신과 완전히 연을 끊겠다고 공표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만 같아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다.‘이게 다 공지민 때문이야!’원아정은 즉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가 들어왔다.“아가씨, 공지민이 오늘 외출해서 쇼핑 중입니다.”“주소를 보내요.”원아정은 바로 차를 몰아 그 장소로 향했다. 그녀는 쇼핑몰에서 공지민을 발견했다.공지민은 아직도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강민지가 함께 있었다.강민지는 공지민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 전환 겸 바람이라도 쐬게 하려고 그녀를 불러냈다.공지민은 목발을 짚고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한 시계 매장을 지나던 중 눈길을 멈췄다. 한정판 시계를 보며 염정아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얼마 전 자신이 가진 40억을 전부 염정아에게 넘겨주고 정작 자신에겐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아침 온시환이 그녀에게 카드를 건넸다. 카드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연씨 가문에서 보낸 선물들에 자극받은 탓인지, 공지민은 보상의 의미로 염정아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매장 직원에게 시계를 꺼내 보여달라고 했다.강민지는 옆에서 시계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정말 예쁘다! 피부 톤이랑도 잘 어울려요. 게다가 다이아까지 박혀 있어서 완전 고급스럽네요.”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환 씨가 오늘 아침에
공지민은 연승혁의 말을 듣고 속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혈육의 정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연승혁은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친근하고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온시환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연승혁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항상 경계해야 해.’공지민은 이 순간에도 그의 말에 따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연승혁은 손에 든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미소를 지었다.“누나, 마음이 바뀌면 나한테 연락해요. 이건 내 전화번호예요.”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개인 번호예요.”공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바라보았다.카드는 별다른 장식 없이 간단했고 확실히 개인적인 물건처럼 보였다.그녀는 카드를 가방에 넣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연승혁의 의도가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이 집 밖으로 나가 차에 오르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상대는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그는 운전석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최근에 재미있는 걸 발견해서 가끔 들러서 장난 좀 치고 있어.”전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들리는 말로는 누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야?”“그래, 진짜야.”연승혁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대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씨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상대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승혁아, 근데 너 태도가 좀 이상한데? 그동안 네가 누나를 찾은 건 할머니를 위해서였잖아. 설사 누나를 찾았다고 해도 이렇게 적극적일 이유는 없을 텐데, 왜 그렇게 흥미를 보이는 거야?”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정말 흥미로운 여자거든.”상대가 무언가 더 말하자 그는 가볍게 욕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차를 몰아 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