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혁은 담배 절반을 피우고 꽁초를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계속 보고 있을 거야?”그는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모퉁이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마치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장하리는 자리에 얼어붙은 채 뺨에 있는 마스크를 만지더니 가만히 서 있었다. 서주혁은 성냥갑을 들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장하리는 전에 이런 종류의 성냥갑을 본 적이 있었다. 사고 싶었지만 인터넷에서도 매점에서도 판매하지 않았다. 이것은 특별히 주문 제작한 성냥갑인 것 같았다. 때때로 그는 라이터를 사용하고, 때로는 이런 종류의 성냥갑을 사용했다.그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입안 가득한 연기를 내뿜었다. 그를 바라보던 장하리는 마음이 시큰거렸다. 그녀는 마스크를 내리고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려는 듯 조용히 돌아섰다.지금 상태로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일에 관한 협상 건은 유해은과 송아현이 실수 없이 처리할 것이니 장하리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서주혁은 떠나는 발소리가 들리자 속눈섭이 떨렸다. 복도의 등도 꺼지고 그의 입에 물고 있는 담배만 미약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한참 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성냥에 불을 붙이고 불이 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짜증이 치밀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서주혁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다시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때 온시환도 담배를 피우러 다가왔다.“냄새가 왜 이렇게 심해? 몇 대나 피운 거야?”온시환은 반대편 벽에 기대어 담배를 입에 물었다.“오늘 저녁 장하리를 봤는데 두 연예인과 함께 왔더라. 성혜인이 떠난 후 장하리가 회사를 관리하는 것 같던데.” “응.”서주혁은 그녀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온시환은 계속 그 이야기를 꺼냈다.“너 기억 상실했을 때, 맨날 저 여자를 덮쳤잖아.”모두가 서주혁이 기억상실을 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온시환이 누구인가? 서주혁이 깨어난 첫날
성혜인과 반승제는 격투장에서 하룻밤을 쉬고 제원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출발을 결심했다.반승제는 처음 배현우를 데리고 한국을 떠났을 때 백겸에게 연구 기지를 찾아내겠다고 약속했다.그 때문에 백겸은 배현우를 데려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수배자라는 혐의를 받고 있어도 아무도 한국에서 배현우를 데려갈 수 없었을 것이다.격투장의 빌라 꼭대기 층. 배현우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반승제, 정말 나를 데려갈 거야?”반승제는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워 헬기에 고정하고 문을 닫았다.“X발!”배현우는 머리가 날카로운 무언가에 부딪히며 고통으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반승제를 바라보니 성혜인과 함께 다른 헬기에 타고 있었다.빨리 임지연을 찾아 해독제를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제 설의종 쪽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먼저 BK에 대해 알아야만 연구 기지에 대해서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배현우의 몸에는 아무런 통신 장비가 없었다. 반승제가 그를 눈앞에 두고 감시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배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면과 점점 더 멀어지는 땅만 내려다보았다. 다른 헬기에서는 성혜인이 총을 조립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인터넷에서 수없이 이곳을 찾아봤지만 알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바다 한가운데에 완전히 둘러싸인 세 개의 섬은, 수천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한다.그곳은 지하 격투장과 다소 비슷했지만 지하 격투장은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지만 그곳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달랐다.그곳은 구금섬으로 불리며 300여 년 전에는 정신병이 있는 범인을 가두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섬에 보내진 사람들은 모두 정신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했다.백여 년 전에 갑자기 화재가 발생하여 질서가 다시 확립되고 완전히 분리되고 폐쇄된 국가가 만들어졌다.그곳의 원주민들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외부인과 결혼 할 수 없었으며 외부 세계와의 무역은 온전히 네 가문에서 관리했다.최용호가 알려준 몇 가지 단서를 근거로 성혜인이
세 사람 모두 보안 검색을 통과했다. 성혜인이 더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곳은 반년에 한 번만 개방되고 한 번에 세 사람만 통과할 수 있으며 이번 입장 자격을 얻기 위해 큰 대가를 치렀다.게다가 이 섬에 들어가기 위한 아주 역겨운 규칙이 하나 있었다. 외부인이 힘을 합쳐 내부의 운영을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들어가는 사람은 환각제를 복용해야 하고 다시 깨어나면 함께 들어온 사람과 헤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성혜인은 최용호가 준 정보를 통해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석판에 새겨진 천 개가 넘는 빼곡하게 적힌 규칙을 보자 극도의 불쾌감을 느꼈다.현대 사회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런 규칙을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려웠다.반승제는 그녀의 곁에 서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들어가서 나를 찾으려고 서두르지 말고 너부터 지켜.”말을 마친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성혜인의 배를 바라보았다.“혜인아, 정말 널 돌려보내고 싶어.”이곳은 그녀에게 안전하지 않았고 언제 다시 나올 수 있을지 몰랐다.“괜찮아요.”성혜인은 차분한 표정으로 총을 건넸다.“승제 씨도 자신을 잘 지켜요.”그녀는 차가운 표정의 배현우를 흘겨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이 사람을 따라오게 놔둬도 괜찮을까요? 들어가면 우리랑 떨어질 텐데.”“꼭 필요해서 어쩔 수 없어.”반승우라면 이 섬에 대한 단서를 줄 수 있었고,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배현우의 존재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밝히지 못하는 것 같았다.성혜인을 본 경비병은 눈빛이 빛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쯧쯧, 몇 년 동안 여자가 들어가는 건 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예쁘게 생긴 여자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구금섬에 숨으려는 건지.”그들은 모든 국가에서 수배 중인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아닌 이상 스스로 이곳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어쨌든 이곳은 구금섬이었고, 그 당시에는 이곳에 정신병원이 가득했다. 지금까지도 섬에는
소년은 고개를 돌려 성혜인을 바라봤다.그러자 성혜인의 얼굴에는 금세 미소가 번졌다.“그게...”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몸이 너무 안 좋은 원인도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이 녀석에게 따로 말을 걸 기회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여 연약한 척할 수밖에 없었다.‘양심이 있다면 날 데리고 가겠지.’그러나 예상과 달리 성혜인이 쓰러진 후, 소년의 발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쓰러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은 채 제 갈 길을 갔다.10분 정도 기다려 소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성혜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처음 온 곳이라 사람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조차 몰랐으나 일단 일어나서 거리로 나갔다.이곳은 연락과 의사소통이 힘든 것 외에 바깥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그렇게 한 시간 동안 걷다가 피곤함을 느껴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 밖에 앉았다.“주문 도와드릴까요?”남자의 목소리는 풋풋함과 성숙함이 공존했다.고개를 들어보자 방금 전에 매정하게 돌아섰던 그 자식이었다.노예찬도 성혜인을 알아본 듯했으나 별 표정 없이 메뉴판을 건넸다.성혜인은 오는 길 내내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폈지만, 눈에 띄는 부분에 해파리 문신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앞의 이 고등학생을 제외하고는.‘설마 BK 쪽 사람인 건가?’성혜인은 자신이 우연히 BK의 본거지에 들어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임지연이 숨어 있는 곳은 BK의 은신처가 아닐까?마음속에 의심이 피어날수록 불안함도 동시에 밀려왔다.미스터 K는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성혜인이 이곳에 왔다는 걸 그가 알게 된다면 독 안의 든 쥐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다.성혜인이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자 노예찬은 묻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순간 정신을 차린 성혜인은 메뉴판을 건네받고 음식을 몇 개 주문했다.“다 못 먹을 거예요. 양이 많으니까 두 개만 시켜요.”노예찬은 마침내 입을 열었고 성혜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오솔길을 따라 30분간 버스를 타다가 노예찬은 어느 황폐한 마당 앞에 멈춰 섰다.성혜인도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여는 순간 한약 냄새가 진동했고 동시에 노인과 아이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형, 왔어?”“오빠, 왜 이렇게 늦게 왔어!”이윽고 주변에서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쏟아져 나와 모두 노예찬을 에워쌌다.노예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을 달래다가 성혜인을 보며 말했다.“이쪽으로 따라와.”성혜인은 걸음을 옮겨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맨 안쪽 방은 채광이 상대적으로 좋았으나 환경이 너무 초라했고 천장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물을 받기 위해 바닥에는 그릇이 놓여 있었다.“선생님, 저 오늘 이분을 만났어요.”노예찬이 문을 열자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중년 여성이 잔뜩 초라한 모습으로 그곳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성혜인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입을 가리고 심하게 기침했다.“누구신지?”“돈이 엄청 많대요. 그리고 제 문신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셨어요.”성혜인은 눈앞의 여성에게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여자는 순간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노예찬이 계속 말을 이었다.“이분에게 수업을 맡기는 건 어떠세요?”성혜인은 도무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침대에 앉아 있던 여자는 침묵을 지키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너무 위험해.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야.”“문신을 조사한다는 건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 아닐까요?”침대 위의 여자는 온몸이 얼어붙더니 씁쓸한 미소를 드러냈다.“내가 생각이 짧았네.”성혜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이때 기침 소리가 들려오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고 마침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성함이 어떻게 되시죠?”“성혜인입니다.”“그럼 혜인 씨라고 부르죠. 해파리 문신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요?”성혜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바로 다음 순간 그 여자는 노예찬과 눈이
이 문신의 의미를 몰랐다면 분명히 그들이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성혜인은 이미 문신의 험악함을 직접 목격했기에 그들이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다고 짐작했다.구금섬은 BK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지금 보니 BK로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특별히 선발된 엘리트들이다. 그 말인즉 그들은 더 높은 교육을 받으러 간 게 아닌 다른 뭔가를 배우러 간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연구를 위해 끌려갔을 수도 있다.자고로 연구란 IQ가 높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그럼 BK와 베일에 싸인 연구 기지는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성혜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으나 노예찬의 목소리는 멈출 줄 몰랐다.“선생님이 우연히 그 대화를 들은 뒤부터 계속 날 걱정하고 계셨어. 본인도 건강이 안 좋으면서... 알다시피 고등학교는 관리제도가 매우 엄격해서 선생님이 함부로 그만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일단 후임자를 찾아야 하고, 그 사람이 전공 테스트를 통과해야 집에서 쉴 수가 있어. 후임자가 없다면 선택지는 두 개뿐이야. 이대로 죽거나 죽기 직전까지 학교를 나가거나.”“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노예찬은 고개를 숙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그냥 느낌이 왔어.”성혜인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이 해파리 문신에 대해서 또 숨겨진 흑막이 있다는 거네?”“선생님 자리에 앉게 되면 작품으로 대회에 참가할 수 있거든? 만약 제출한 작품이 기준에 부합해서 채택된다면 중간 섬으로 들어갈 수 있어. 여기까지는 쉬운데 문신의 흑막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제일 안쪽 섬으로 들어가야 돼. 그건 엄청 복잡해.”노예찬은 자기 목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두 달 후면 또 한차례의 수능이 끝나. 그때쯤이면 난 아마 끌려갔겠지? 이것 또한 내 운명이라고 생각해야지.”그는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차분함과 냉정함을 갖고 있었다.“누나, 해파리 문신의 비밀은 안쪽 섬에 있어. 내가 아는 건 이게
“누군가 했더니 일꾼 노예찬이잖아? 드디어 돈 생겨서 인테리어 하는 거야? 아니, 돈이 있으면 물이 새는 지붕부터 고쳐야지. 안 그러면 지금처럼 옷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잖아. 다들 너랑 짝궁하기 싫어하는데 자존심 상하지 않아?”재벌 2세 하정우는 차 문을 열고 거만한 표정으로 트럭을 훑었다.“대출로 이 많은 걸 산 거야? 언제 다 갚으려고? 저 안에 있는 거지들을 다 팔아도 트럭 한 대 값도 못 벌 것 같은데?”하정우는 팔짱을 끼며 입꼬리를 올렸다.그의 시선은 마침내 성혜인에게 머물렀고 순간 눈이 반짝이더니 곧바로 싸늘하게 돌변했다.“네 얼굴에 반해서 들러붙은 여자야?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전에 우리 학교 퀸카가 너한테 조금 잘해줬다고 바로 러브레터를 썼잖아. 결국에는 어떻게 됐어? 걔는 그냥 널 갖고 논 거야. 성적만 좋아서 뭐 하냐?”하정우는 욕설을 퍼부으면서 한편으로는 질투심에 겨워 뚫어지라 노예찬의 목을 바라봤다.지난 몇 년 동안, 노예찬은 이 섬에서 상위 10위에 진입한 최초의 학생이었다.학교 측은 이 영광을 누리려고 며칠 동안 현수막을 걸었고 감사의 의미로 10만 원을 줬다고 한다.하정우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망설임 없이 성혜인을 만졌다.“너한테 들러붙은 여차 치고는 예쁘네? 어느 학교 퀸카야?”성혜인은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랐다. 어이가 없는 듯 곧장 하정우의 손을 내리쳤다.그러자 하정우는 순식간에 표정이 돌변했다.“X발. 네까짓 게 뭔데 나한테 이래? 좋아해 주면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내가 손 하나만 까딱해도 고마워하는 인간들이 널렸다고.”이때 또다시 차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저분이 마음에 드셨어요?”하정우는 ‘퉤’하며 바닥에 침을 뱉더니 수표 몇 장을 꺼내 던졌다.“이게 뭔지 알아? 이걸 보고도 저 거지 새끼랑 붙어먹는 건 아니겠지? 경고하는데, 내가 이대로 가잖아? 넌 내일 무조건 울면서 찾아와서 나한테 빌
성혜인은 노예찬이 돈을 주우려 하자 덥석 붙잡고선 먼저 허리를 굽혔다.“내가 주울게.”그녀는 오늘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바로 사람들의 월급이 대체로 너무 낮다는 것이다.그러니 1000억 정도의 몸값이라면 충분히 이 섬에서 큰소리 떵떵 치며 살 수 있다.하지만 성혜인이 부족한 건 돈이 아니다.그녀가 떠나기 전 설의종은 1000억에 비할 수 없는 금액이 담긴 카드를 줬다.심지어 제원에 있는 회사를 포함한다면 1000억은 비할 것도 없다.노예찬은 성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지만, 그저 묵묵히 트럭에서 짐을 옮겼다.바로 이때 성혜인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1000억으로 하씨 가문 소유의 그룹을 살까?”노예찬은 그 말에 놀란 듯 짐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성혜인이 자극을 받아 흥분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성혜인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호화로운 고층 빌딩 몇 개를 발견했다.고층 빌딩은 아마도 이 섬의 소위 엘리트들이 일하는 곳이다. 어쩌면 섬 밖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지만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바다뿐이다.성혜인은 몸을 숙이며 짐을 안으로 옮겼다.“그런데 나 혼자만으로는 안돼. 심지어 아직은 인수 절차를 모르니까 며칠 정도는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거야.”노예찬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성혜인이 결코 장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짐들이 하나둘씩 안쪽으로 옮겨지자, 헛겊을 덧댄 옷을 입은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우르르 몰려왔다.“형, 이게 뭐야? 우리 오늘 저녁에 고기 먹는 거야? 너무 좋아.”“형아 짱이야. 맛있겠다.”노예찬은 미소를 머금고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말고 저 누나한테 고마워해.”아이들이 하나같이 시선을 돌린 그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누나, 고마워.”“고마워요.”성혜인은 그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안쪽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그 시각 노예찬은 아직도 방을 치우고 있었다. 밤에 비가 살짝 내리자, 천장에서는 물이 뚝뚝 새기 시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