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는 설인아가 다 심킨 걸 보고서야 경호원에게 힘을 풀라고 눈치 줬다.목은 물론이고 온몸이 아파진 설인아는 피를 한 모금 토하기도 했다.순간 그녀가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기억난 장미는 어쩌면 이곳에서 살아 나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가 방을 나갈 때쯤 곧바로 설인아의 비명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성혜인, 죽여버릴 거야. 내가 여기서 나가면 넌 내 손에 죽었어.”목이 터지라 울부짖으며 또 한 모금의 피를 토했다.장미가 밖으로 나오자 누군가 다급하게 다가왔다.“설기웅 씨가 또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50명이 넘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저마다 손에 총을 들고 있습니다.”장미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곧 홀까지 따라갔다.홀 중앙에 설기웅이 서 있었고 주위에는 도박이나 장사를 하러 온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이런 상황은 지하 격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문제를 일으킨 게 설씨 가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플로리아의 제1 명문 가문이자 황실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지하 격투장은 아무도 관여하지 않는 구역이다. 이곳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은 거의 모두 사기 행각을 벌인 사기꾼이거나 사람 수십 명의 목숨을 빼앗은 살인자들이다. 총격전은 자주 있었던 일이기에 그들은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되레 쇼를 보기 위해 머물렀다.키가 1.9m에 육박한 설기웅은 플로리아에서도 군계일학의 존재였다.검은색 장갑을 낀 채 손에 총을 들고 있던 그는 장미가 나오자 입을 열었다.“내 동생 지금 어딨어?”설기웅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을 찾아왔지만 워낙 능구렁이인 장미는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장미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채 요염하게 걸으며 앞으로 다가왔다.“도련님, 격투장에서 총을 쓰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아직 모르시나 봐요?”설기웅은 총구를 장미에게 겨눴다.“다시 한번 물어볼게. 내 동생 어딨어?”장미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었다.“동생? 누구죠?”그녀는
차 안.설기웅은 뭔가 이상함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설인아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설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온 후 침대에 눕히고서야 설인아는 의식을 되찾았다.“아! 아! 아!”설인아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주위를 더듬기 시작했고 어디로 보내졌는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그녀를 덮쳤다.설기웅은 사방을 더듬는 그녀의 모습에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인아야, 왜 그래?”그의 목소리를 들은 설인아는 잠시 당황하더니 자신의 목과 눈을 번갈아 만지기 시작했고 이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그제야 알아차린 설기웅은 손을 들어 흔들었으나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화가 치밀어 오른 그는 이내 설인아의 목을 향해 손을 얹었지만 돌아오는 건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초라한 모습뿐이었다.나미선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래층에서 걸어 올라왔다.“무슨 일이야? 제원에 갔다던 애가 왜 이렇게 된 거야?”나미선의 목소리를 들은 설인아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발버둥 쳤다.나미선은 그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고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인아야, 엄마 여기 있으니까 무서워하지 마.”설인아는 미친 듯이 울기 시작했지만, 목은 이미 완전히 쉬어 한 음절조차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온몸이 떨릴 정도로 가슴이 미어진 설기웅은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반승제의 복수라는 걸 깨달았다. 성혜인이 겪었던 모든 일을 그대로 똑같이 겪게 만든 게 분명했으니까.설기웅은 입에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그는 당시 독약 한 그릇으로 성혜인을 벙어리로 만든 스스로를 자책했다. 반승제가 복수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겠지만, 그 상황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그는 머리가 아픈 듯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문지르기 시작했고 이내 나미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인아야, 엄마가 의사 선생님 찾아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도대체 누가 널 이렇게 만든 거니?”그녀는 눈물을 흘리
저녁.최근 반승제가 다른 그룹을 마구 인수하자 사람들은 모두 불안에 떨고 있었다.그러나 지난 이틀 동안 그는 갑자기 행동을 멈췄고 그제야 모두 경계 태세를 늦췄다.동시에 그가 어디로 갔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새벽 1시가 된 별장.성혜인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밀치며 손끝으로 그의 손바닥을 두드렸다.“이러다 들켜요.”배현우는 매우 예민한 사람이기에 어젯밤에 안 들켰다고 하여 오늘 밤도 그럴 거란 보장이 없다. 심지어 그녀는 배현우가 어떠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다.반승제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살살할게.”살살하기는커녕 어찌나 힘이 넘치는지 저녁 11시부터 지금까지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성혜인이 어깨를 깨물자 아픈 듯 ‘스읍’하는 소리를 냈다.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갑자기 방문을 두드렸고 이내 배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아직 안 자지?”너무 놀라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던 성혜인은 나가라며 재빨리 반승제를 밀쳤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았다.“아무 답도 하지 마.”반승제는 땀범벅으로 된 성혜인의 이마를 보고선 가슴이 아픈 듯 손을 들어 닦더니 다시 그녀에게 키스를 한 뒤 더 빠르게 움직였다.성혜인은 그의 강심장에 혀를 내둘렀다. 배현우가 바로 앞에 있는데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그 시각 밖에 있던 배현우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저녁에 약 먹었어?”경호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약에 수면제 성분이 들어있으니 지금 이 시간이라면 잠을 자는 게 정상이다.의심이 들었지만 자는데 방해가 될까 봐 굳이 들어가서 확인하지는 않았다.같은 시각 방안의 반승제는 성혜인의 이마를 맞대고 숨을 크게 몰아쉬고 있었다.성혜인은 바깥의 불빛을 빌려 홧김에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머리를 잡아당겼다.반승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 그녀를 달랬다.“괜찮아, 안 들어올 거 알아.”성혜인은 화가 난 듯 그를 피했고 반승제는 재빨리 그녀의 손에 입맞춤했다.“지난번에 네가 말했던 미스터k를 조
제원의 새벽 4시는 만물이 조용해지는 시간이다.남자는 성혜인의 목소리를 듣는 데 특별히 사용되는 작은 이어폰을 손끝에 쥐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제부터 연락이 닿지 않았다.‘설마 바보같이 반승제의 달콤한 말 몇 마디에 흔들린 건가?’손에 쥐고 있던 이어폰을 내려놓자 누군가 조용히 물었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성혜인을 계속 배현우의 곁에 놔둘 수는 없었다.남자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떴고 그의 아우라에 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한참 후, 그는 이어폰 한쪽을 휴지통에 버렸다.“배현우에게 반승제가 그 별장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해.”말을 마친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여유롭게 눈을 감았다.“아참, 그리고 성혜인한테 얘기해. 임지연의 생사를 개의치 않는다면 쭉 지금처럼 반승제랑 붙어있으라고. 어차피 난 다음 달 5일 저녁에 떠날 거니까 손잡을지 말지는 성혜인한테 달려있어.”“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존경심이 가득한 눈길로 남자를 바라봤다. 그들에게 있어 눈앞의 이 남자는 BK를 질서정연하게 관리하는 최강의 존재나 다름없었다.경호원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30분 후, 배현우는 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반승제가 여기에 숨어있다고?”그는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주위의 경호원들을 훑어보았고,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현우는 손을 들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답했다.“내가 반드시 찾아낼 거야.”성혜인이 방에서 쉬고 있던 그때 창가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그녀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 건 미스터 K였다. 그는 임지연의 생사를 정말 신경 쓰지 않느냐고 물었다.그럴 리가 있겠는가.성혜인이 고개를 숙인 그때 누군가 방문을 털컥 열고 들어왔다.배현우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곧바로 욕실로 직행했다.욕실에는 성혜인의 세면도구만 있었는데 거울 뒤편의 서랍을 열자 역시나 남성용 세면도구가 잔뜩 나왔다.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그는 살기를 내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반승제는 눈썹을 치켜뜨더니 밖에 있는 사람에게 의자 두 개를 건네달라고 했다.밖에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배현우가 납치됐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반승제는 문을 다시 닫고 의자로 창문을 부쉈다.밖에서 헬기의 굉음이 울리고 사다리가 내려졌다.그는 옷장으로 문을 받쳐 밖에 지키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혜인아, 가자.”성혜인은 망설이지 않고 직접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반승제는 배현우에게 한 마디만 남겼다.“백 할아버지한테 찾아가는 걸 잊지 마세요. 그리고 여기 있는 며칠 동안 저와 혜인에게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해요.”배현우는 어두운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헬기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성혜인은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꼭 껴안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바람이 세게 불어서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렸다.반승제의 품에 머리를 파묻은 그녀는 두 사람의 심장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네이처 빌리지에 도착하기 전에 반승제는 미리 진세운에게 연락해 그녀의 눈을 봐 달라고 했다.진세운은 이내 도착했고, 서주혁과 온시환도 함께 왔다.세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반승제는 성혜인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진세운은 한바탕 검사하더니 들고 온 구급상자를 꺼냈다.“두 군데 모두 회복 불가는 아니야. 눈의 회복은 뇌에 있는 어혈이 깨끗이 제거된 후에 논의하도록 하고, 목은 일주일 안에 회복될 수 있어. 너무 부어서 말을 못 할 뿐이지 독약이 그렇게 세지는 않아.”그는 차가운 손끝으로 성혜인의 목을 만져본 후 약 한 병을 남겼다.“이걸 먹으면 사흘이면 말할 수 있고 일주일이면 회복될 거야. 그런데 눈은 좀 더 봐야 할 것 같다. 일단 약으로 개선하면서 시기를 기다려 보자.”회복될 수 있다는 말에 반승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옆에 있던 온시환이 입을 열었다.“세운아, 너 의술이 정말 대단하구나. 그 당시 연구기지의 사람들이 왜 너를 데려가지 않았어? 너도 반승우 만큼이
“승제 씨, 나 배고파요.”그녀는 계단을 더듬으며 내려가려고 했다.반승제가 다가오더니 그녀를 옆으로 돌려 안았다.“넘어질지도 모르니 내가 안고 내려가지.”“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얌전히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의 몸에서 안심되는 상쾌한 향기가 났다.아래층 거실에 도착한 후 그녀는 손으로 탁자를 만졌다.잠시 후 담백한 저녁 식사가 그녀 앞에 차려졌다.반승제가 숟가락을 들었다.“내가 먹여줄게.”“네.”그녀는 히죽 웃더니 입을 벌리고 받아먹었다.다 먹은 후 반승제는 또 그녀를 부축해 위층에 올라가 쉬게 했다.“승제 씨, 지금 낮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저 잠깐 소파에 앉아 있으면 안 돼요?”그녀는 아직 자고 싶지 않았다.“혜인아, 많이 쉬어야 눈이 빨리 회복돼.”“알았어요.”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의 부축을 받으며 방에 올라갔다. 침대에 앉자마자 그녀는 갑자기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혼자서 잠이 안 오는데, 같이 자면 안 돼요?”“업무상 처리할 일이 있어서 금방 갔다 올게.”“아, 그럼 일 봐요.”성혜인은 그의 허리를 풀어주고, 멀어져 가는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었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방 안의 냄새를 맡으려고 심호흡했다. 방 안에는 온통 그 향 냄새였다.천천히 몸을 웅크리고 손끝으로 마룻바닥을 만지던 그녀는 온몸이 굳어졌다.네이처 빌리지의 인테리어는 그녀가 디자인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디테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특히 네이처 빌리지의 마룻바닥은 그녀가 몸소 서천에 가서 찾은 원목마루로, 구하기 힘들고 매년 다 팔리면 없었다.그녀는 당시 이 마루를 위해 서천에 여러 번 갔었다.지금 그녀가 머무는 방은 네이처 빌리지와 비슷하다.특히 침대의 쾌적함, 문, 식탁 디테일까지 네이처 빌리지와 똑같다.이런 물건들은 국제 유명 브랜드라 쉽게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지만 원목마루는 쉽게 찾을 수 없다.이곳은 네이처 빌리지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녀를 위해 네이처 빌리지와 비슷한 집을 만든 것이다.방금
순간 조급해진 그녀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물었다.“승제 씨, 괜찮아요?”반승제가 그녀를 소파에 눌러 앉혔다.“괜찮으니 움직이지 말아요.”그녀의 눈물이 순식간에 흘러내렸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다른 사람이 승제 씨를 사칭한 줄 알았어요. 승제 씨 몸에서 나는 냄새도 다르고 마룻바닥도 달랐어요. 중간에 누군가가 저를 옮기지 않았나요? 제가 조금 전에 이곳에 온 건 아니에요?”그녀는 머릿속이 너무 혼란했다.반승제는 가슴팍을 꿰매고 있는 와중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혜인아, 넌 그저 악몽을 꿨을 뿐이야.”그녀의 말은 횡설수설하는 수준이었고, 심지어 듣는 사람이 그녀가 놀라서 정신이 나갔나 의심할 정도였다.“아니에요. 저는 진짜...”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세운이 반승제에게 당부하는 소리가 들렸다.“요 며칠 상처가 물에 닿으면 안 돼.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해. 칼이 심장에 꽂혔다면 누구도 너를 구하지 못했을 거야.”그의 말에 급소를 찔린 성혜인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하마터면 반승제를 죽일 뻔했다.그가 방금 그 칼을 피하지 않았다면, 지금...그녀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면서 갑자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의문이 너무 많았다.진세운은 그녀가 적어도 3일은 있어야 소리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겨우 하룻밤이 지났는데, 그녀는 왜 말을 할 수 있을까?“승제 씨, 제가 왜 말할 수 있는 거죠? 제가...”그녀는 어둠 속에 갇힌 불나방처럼 사방으로 부딪히지만, 어디가 출구인지 몰랐다.반승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진정시켰다.“너 나흘 동안 혼수상태로 열이 계속 나다가 이틀 전에 겨우 열이 내렸어. 막 깨어나서 얼떨떨한 거야. 괜찮아. 난 괜찮아.”나흘 동안 혼수상태로 있었던 거였구나. 그런데 왜 아무 느낌도 없지?“그럼 집에 향은? 왜 집에 갑자기 향을 놓았어요?”“내가 세운한테 달라고 했어. 너 잠을 잘 자지 못하겠다며? 이 향은 신경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어
방우찬과 그 어머니는 속으로 분노했지만 말은 못 했다. 이전에 장하리가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불평 한마디 없이 밥해 주던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클까 싶다.아들이 홍규연과 결혼하더니 아들 얼굴조차 보기 힘들다.어머니가 그를 찾아와 울면서 하소연하는데, 그 자신도 방법이 없고 게다가 업무적인 일까지 겹쳐 짜증이 날 뿐이다.현모양처인 장하리의 장점을 점차 깨달은 그는 참지 못하고 회사 밑에 달려와 그녀를 기다렸다.장하리를 봤을 때, 그는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장하리는 옷 입는 스타일이 더 여성스러워졌고,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그녀는 시대극에 나오는 아씨같이 분위기가 있었다.눈이 번쩍 뜨인 그는 즉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하리야.”이 소리를 들은 장하리는 눈에 혐오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고,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자기 차에 오르려 했다.하지만 방우찬이 잽싸게 다가가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그녀의 몸을 훑었다.“하리야, 오랜만이야. 이뻐진 것 같다.”예쁘다고 말할 때 그의 눈빛은 더 밝아졌다.장하리는 이런 남자와 쓸데없는 말을 하기 싫어 눈살을 찌푸렸다.“뭘 하려는 거야?”방우찬도 자기가 한 짓이 지나쳤다는 것을 안다. 집의 시공이 중단되자 그녀를 버린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돈을 갚으라고 한 후 신속히 사장의 딸을 꼬셨으니 그녀가 곱게 보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하지만 이렇게 화내는 것도 아직 그를 내려놓지 못했다는 뜻이 아닌가.하긴, 두 사람이 7년을 만났고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였는데 잊기가 쉽겠는가. 여자는 가장 감정이 오래가는 동물이다.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하리야, 이전에 내가 한 말을 새겨들었구나. 너 옷 입는 스타일이 확실히 좋아졌어. 나와 홍규연의 결혼이 너에게 큰 타격이었나 봐. 사실 너의 이런 모습을 보고 설렜어.”장하리는 이 말을 듣고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하지만 방우찬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내가 결혼했는데도 넌 나를 잊지 못하는구나. 우리가 7년을 사귀었으니 내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