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제 씨, 나 배고파요.”그녀는 계단을 더듬으며 내려가려고 했다.반승제가 다가오더니 그녀를 옆으로 돌려 안았다.“넘어질지도 모르니 내가 안고 내려가지.”“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얌전히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의 몸에서 안심되는 상쾌한 향기가 났다.아래층 거실에 도착한 후 그녀는 손으로 탁자를 만졌다.잠시 후 담백한 저녁 식사가 그녀 앞에 차려졌다.반승제가 숟가락을 들었다.“내가 먹여줄게.”“네.”그녀는 히죽 웃더니 입을 벌리고 받아먹었다.다 먹은 후 반승제는 또 그녀를 부축해 위층에 올라가 쉬게 했다.“승제 씨, 지금 낮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저 잠깐 소파에 앉아 있으면 안 돼요?”그녀는 아직 자고 싶지 않았다.“혜인아, 많이 쉬어야 눈이 빨리 회복돼.”“알았어요.”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의 부축을 받으며 방에 올라갔다. 침대에 앉자마자 그녀는 갑자기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혼자서 잠이 안 오는데, 같이 자면 안 돼요?”“업무상 처리할 일이 있어서 금방 갔다 올게.”“아, 그럼 일 봐요.”성혜인은 그의 허리를 풀어주고, 멀어져 가는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었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방 안의 냄새를 맡으려고 심호흡했다. 방 안에는 온통 그 향 냄새였다.천천히 몸을 웅크리고 손끝으로 마룻바닥을 만지던 그녀는 온몸이 굳어졌다.네이처 빌리지의 인테리어는 그녀가 디자인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디테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특히 네이처 빌리지의 마룻바닥은 그녀가 몸소 서천에 가서 찾은 원목마루로, 구하기 힘들고 매년 다 팔리면 없었다.그녀는 당시 이 마루를 위해 서천에 여러 번 갔었다.지금 그녀가 머무는 방은 네이처 빌리지와 비슷하다.특히 침대의 쾌적함, 문, 식탁 디테일까지 네이처 빌리지와 똑같다.이런 물건들은 국제 유명 브랜드라 쉽게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지만 원목마루는 쉽게 찾을 수 없다.이곳은 네이처 빌리지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녀를 위해 네이처 빌리지와 비슷한 집을 만든 것이다.방금
순간 조급해진 그녀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물었다.“승제 씨, 괜찮아요?”반승제가 그녀를 소파에 눌러 앉혔다.“괜찮으니 움직이지 말아요.”그녀의 눈물이 순식간에 흘러내렸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다른 사람이 승제 씨를 사칭한 줄 알았어요. 승제 씨 몸에서 나는 냄새도 다르고 마룻바닥도 달랐어요. 중간에 누군가가 저를 옮기지 않았나요? 제가 조금 전에 이곳에 온 건 아니에요?”그녀는 머릿속이 너무 혼란했다.반승제는 가슴팍을 꿰매고 있는 와중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혜인아, 넌 그저 악몽을 꿨을 뿐이야.”그녀의 말은 횡설수설하는 수준이었고, 심지어 듣는 사람이 그녀가 놀라서 정신이 나갔나 의심할 정도였다.“아니에요. 저는 진짜...”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세운이 반승제에게 당부하는 소리가 들렸다.“요 며칠 상처가 물에 닿으면 안 돼.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해. 칼이 심장에 꽂혔다면 누구도 너를 구하지 못했을 거야.”그의 말에 급소를 찔린 성혜인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하마터면 반승제를 죽일 뻔했다.그가 방금 그 칼을 피하지 않았다면, 지금...그녀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면서 갑자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의문이 너무 많았다.진세운은 그녀가 적어도 3일은 있어야 소리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겨우 하룻밤이 지났는데, 그녀는 왜 말을 할 수 있을까?“승제 씨, 제가 왜 말할 수 있는 거죠? 제가...”그녀는 어둠 속에 갇힌 불나방처럼 사방으로 부딪히지만, 어디가 출구인지 몰랐다.반승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진정시켰다.“너 나흘 동안 혼수상태로 열이 계속 나다가 이틀 전에 겨우 열이 내렸어. 막 깨어나서 얼떨떨한 거야. 괜찮아. 난 괜찮아.”나흘 동안 혼수상태로 있었던 거였구나. 그런데 왜 아무 느낌도 없지?“그럼 집에 향은? 왜 집에 갑자기 향을 놓았어요?”“내가 세운한테 달라고 했어. 너 잠을 잘 자지 못하겠다며? 이 향은 신경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어
방우찬과 그 어머니는 속으로 분노했지만 말은 못 했다. 이전에 장하리가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불평 한마디 없이 밥해 주던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클까 싶다.아들이 홍규연과 결혼하더니 아들 얼굴조차 보기 힘들다.어머니가 그를 찾아와 울면서 하소연하는데, 그 자신도 방법이 없고 게다가 업무적인 일까지 겹쳐 짜증이 날 뿐이다.현모양처인 장하리의 장점을 점차 깨달은 그는 참지 못하고 회사 밑에 달려와 그녀를 기다렸다.장하리를 봤을 때, 그는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장하리는 옷 입는 스타일이 더 여성스러워졌고,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그녀는 시대극에 나오는 아씨같이 분위기가 있었다.눈이 번쩍 뜨인 그는 즉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하리야.”이 소리를 들은 장하리는 눈에 혐오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고,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자기 차에 오르려 했다.하지만 방우찬이 잽싸게 다가가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그녀의 몸을 훑었다.“하리야, 오랜만이야. 이뻐진 것 같다.”예쁘다고 말할 때 그의 눈빛은 더 밝아졌다.장하리는 이런 남자와 쓸데없는 말을 하기 싫어 눈살을 찌푸렸다.“뭘 하려는 거야?”방우찬도 자기가 한 짓이 지나쳤다는 것을 안다. 집의 시공이 중단되자 그녀를 버린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돈을 갚으라고 한 후 신속히 사장의 딸을 꼬셨으니 그녀가 곱게 보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하지만 이렇게 화내는 것도 아직 그를 내려놓지 못했다는 뜻이 아닌가.하긴, 두 사람이 7년을 만났고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였는데 잊기가 쉽겠는가. 여자는 가장 감정이 오래가는 동물이다.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하리야, 이전에 내가 한 말을 새겨들었구나. 너 옷 입는 스타일이 확실히 좋아졌어. 나와 홍규연의 결혼이 너에게 큰 타격이었나 봐. 사실 너의 이런 모습을 보고 설렜어.”장하리는 이 말을 듣고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하지만 방우찬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내가 결혼했는데도 넌 나를 잊지 못하는구나. 우리가 7년을 사귀었으니 내
장하리는 차에 앉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그녀는 남자가 오늘 저녁 기분이 별로 안 좋다는 것을 예민하게 눈치챘다.그가 기분이 안 좋을 때면 그녀는 더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호텔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녀는 겁을 먹어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방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귀찮은 듯 양복을 벗더니 손목시계를 풀면서 그녀에게 엎드리라는 신호를 보냈다.장하리는 이걸 하기 전에 샤워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남자는 흥미만 중요했다.“샤워하고 오겠습니다.”“필요 없어. 엎드리면 돼.”장하리는 감히 그를 거역하지 못했다. 그 앞에서 그녀는 발언권이 없었다.말을 잘 들어야 조금 부드럽게 했다.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창턱에 엎드려 실크 스커트를 위로 허리춤까지 끌어올렸다.냉정히 말해서, 그녀는 몸매가 좋고 일을 잘하는데 하필 성격은 연약해 그 사람 앞에서 줏대가 없었다.처음에 그녀는 남자와 관계를 가지는 것이 역겨웠다. 처음 몇 번은 계속 토했지만 지금은 토하지 않는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억눌려 있던 소리를 내기도 한다.남자는 그녀가 그런 소리를 내도록 유도한 후 그녀를 모욕하고, 수치와 분노로 그녀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보는 것에 재미가 들린 것 같다.그녀가 엎드리자, 그도 사양하지 않고 허리띠를 풀었다.장하리는 빛이 반사되는 거울을 감히 보지 못했고, 그가 다가오자 몸이 제멋대로 떨렸다.곧이어 그가 그녀의 그곳에 무언가를 바르는 것 같았다.“이게 뭐예요?”그녀는 조금 당황했다. 그가 저속한 곳에서 저속한 처방을 받아왔을까 봐 걱정됐다.“너를 즐겁게 해주는 물건이니 움직이지 마. 곧 알게 될 거야.”장하리는 겁에 질려 온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런 떨림은 남자에게 쾌감을 주었다.그는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가볍게 애무했다.그럴수록 장하리는 더 무서웠다. 그녀는 곧 가려움을 느꼈지만 이 가려움은 겉이 아니라 깊은 곳에 있어 긁을 수 없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몸을 비비 꼴 수밖에 없었다.그 물건이 효과를 냈다는 것을 안 남자는 이때다 싶어
방우찬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씩씩거렸다. 그는 ‘창녀’ 두 글자를 아예 장하리의 이마에 새기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장하리는 가소롭기만 했다. 그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자신을 비난하는지 알 수 없었다.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아 문을 닫으려는 찰나, 방우찬이 그런 장하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방 안의 냄새는 이미 거의 사라진 뒤였는데 장하리가 어제 입은 옷이 여전히 창가에 널브러져 있는 걸로 보아 어디에서 거사를 치른 건지 추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리고 장하리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그녀가 직접 가져온 것이었다.방우찬이 옷이 있는 창가를 가리키며 윽박질렀다.“야, 좋았냐?”인격모독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장하리가 또다시 뺨을 내리치려고 손을 들었지만, 이번에는 방우찬의 억센 힘에 막혀버렸다.“내가 틀린 말 했어? 이런 대담한 짓을 할거였으면 들킬 것도 각오했었어야지. 두고 봐, 장하리. 지금 바로 어머님께 네가 밖에서 몸 팔고 다닌다고 다 말해버릴 거니까.”부모님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장하리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 몇 년 동안 돈으로 어렵게 가족의 환심을 샀는데 방우찬 하나 때문에 또 무너뜨릴 순 없다.“당장 나가.”방우찬은 냉소하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 남자도 그냥 그러했나 보지? 아니면 지금 내 앞에서 이렇게 소리칠 힘이 남아있을 리가. 규연이는 나랑 한 번 하고 나면 싸울 힘도 없이 며칠간 곤히 누워있어. 하리야, 그쪽으로 만족하지 못하겠으면 나 찾아와도 돼. 그 사람이 주는 돈 따위 나도 줄 수 있어.”장하리는 역겨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전에 저런 남자를 맘에 들어 했던 자신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6억. 그 사람이 준 돈이야. 오빠도 이만큼 줄 수 있어?”뭐? 6억? 고작 여자랑 하룻밤을 위해 6억이라고?방우찬은 자신이 환청을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그가 또 냉소했다.“웃기시네. 넌 네 몸이 그만큼 한 값이
방우찬이 떠나고 나서야 장하리는 맥없이 문을 닫고 벽에 기대었다.온몸이 아팠다. 이렇게 방우찬이 소란을 피우고 가니 더욱 피곤한 듯했다.장하리는 눈마저 뻑뻑한 듯 해 힘겹게 눈을 깜박였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이 주말이라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침대에 몸을 뉘려던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그녀에게 남은 가족은 어머니 한 명뿐이었다이었다. 이미 몇 년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더구나 딸에게 전화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장하리는 심장이 떨려옴을 느끼며 핸드폰을 들었다. 손가락까지 벌벌 떨렸다.수신 버튼을 여러 번 헛누르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엄마...?”“하리야, 저녁에 시간 좀 있니? 할 말이 있다.”어머니가 먼저 약속을 잡은 것이 처음이었기에 장하리는 조금 놀라운 마음이었다.예전에 부모님께서 이혼하지 않으셨을 때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지만 재판 당시 어머니에게 양육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가족 간의 사랑이란 느낄 수 없는 것이 되었다.사람은 늘 어릴 적 갖지 못한 것에 미련을 갖는 법이다. 장하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돈만 밝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용돈을 드릴 때만 말투가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눈치챘음에도 모른척했다. 그 부드러움이 바로 자신이 미친 듯이 원하던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는 병적인 심리이기도 했다. 일찍부터 알아차렸지만 고칠 수 없었고 그런 자신을 미워하기도 했다.하지만 이미 집에 돈을 보내는 것도 습관이 된 터였다.어머니의 입에서 관심 어린 말이 들릴 때마다 그녀는 더더욱 울분이 쌓였다.“네, 엄마. 장소 정해주세요.”노임향은 딸이 나올 것을 확신하고 위치를 보냈다.주소를 본 장하리는 오후까지 호텔에서 숙면을 취했다.이제 가을이 되었으므로, 그녀는 스카프까지 두르고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만나기로 한 곳은 국숫집이었다. 돈을 지극히도 아끼는 노임향이 딸에게 비싼 음식을 대접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차로 돌아온 장하리는 피곤함을 느끼며 좌석에 기대었다. 어젯밤 잘 쉬지 못한데다가 볼까지 이따금 아팠다. 차창을 통해 가게를 들여다보면 돈뭉치를 세며 기뻐하는 노임향의 얼굴이 보였다. 눈에 희열이 가득한 모습. 잠시 후, 한 남성이 가게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장하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의 의붓 아버지였다. 처음엔 하마터면 어머니의 남자에게 당할 뻔했었지. 그때 노임향과 마주친 뒤에도 그는 얼굴에 당황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노임향이 절대적으로 딸을 불신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노임향은 장하리의 말따위 듣지 않고 매를 들었다. “이 천한 년. 어린 애가 어떻게 아버지를 꼬실 생각을 해? 당장 꺼져버려.”장하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이 그런 일을 겪고서도 어머니에게 뺨을 맞고 욕설을 들었어야 했는지.나중에 방우찬과 만나게 된 후 아버지는 더이상 자신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장하리는 두 손으로 운전대를꽉 잡았다. 아예 액셀을 밟아 지금 당장 차로 치어죽이고 싶은 충동마저 생겼다. 그는 살이 더 찐 상태였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꿈틀거리는 벌레같았다. 왜 자신의 어머니가 저런 남자를 보물단지처럼 애지중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하리는 역겨워졌다. 서둘러 차에서 내려 한쪽에 있는 화단 앞으로 가 헛구역질을 했다. 그 사람의 등장에 어릴적의 트라우마가 다시 발작해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그녀는 심지어 방금 자리에 어머니가 저 사람까지 초대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더 메스꺼워져 두번이나 토했지만 나오는 것은 노란 액체 뿐이었다. 오늘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까. 장하리는 차에서 생수 한병을 꺼내 입을 헹구려고 했다. 그러나 정신이 혼미해졌을 무렵 귓가에 느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리? 하리 맞구나. 너무 멀어서 못 알아봤어.”살이 뒤룩뒤룩 찐 벌레가 장하리에게로 걸어온다. 장하리가 고개를 들자 기름진 턱과 번쩍이는 이
성혜인의 허리를 감싸 안으려던 반승제가 빠르게 뒷걸음치는 그녀를 보았다. 너무 갑작스레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하마터면 옆에 있는 큰 화분에 부딪힐 뻔했다.“혜인아!”다급히 성혜인을 부른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려 했다.성혜인은 몸을 움츠렸고 머릿속이 심하게 복잡해졌다.그녀는 더듬거리며 몸을 일으켰다.“승제 씨, 저 가서 쉴게요. 머리가 아파서.”손가락 끝이 벽에 닿자 곧바로 벽을 더듬으며 성혜인은 반승제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바로 떠났다.반승제가 얼른 쫓아 나왔다. 성혜인이 복도로 왔을 때,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반승제 씨 오늘은 있어요? 여러 번이나 왔는데 나와서 만나지도 않고. 제 물건이 아직도 네이처 빌리지에 있는걸요.”밖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임수아가 고개를 들어 성혜인을 보았다. 그녀는 단번에 자신과 비슷한 얼굴인 이 여인이 반승제가 좋아한다는 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성혜인은 그저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 없이 벽을 더듬으며 떠나려 했다.임수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생각했다.‘그래서, 그 좋아한다는 여자가 맹인인 건가?’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느껴졌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당연히 맹인보다는 정상인이 나지 않겠는가.그녀가 입꼬리를 반달처럼 예쁘게 접으며 그제야 성혜인을 발견한 듯 능청스럽게 말을 걸어왔다.“언니, 앞이 잘 안 보여요? 어디 가시려고요?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저 여기 잘 알아요.”성혜인이 대답도 하기 전에 임수아가 그녀의 팔뚝을 잡아 부축했다.이에 성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했다.“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놔주세요.”성혜인은 정말로 다른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게다가 낯선 사람에게 부축받는 건 더 익숙하지 않았다.지금 성혜인은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후각과 청각은 매우 영민해진 상태였다. 슬쩍 다가오는 여인의 향기를 맡아보니 전에 반승제에게서 맡았던 냄새와 같았다.성혜인은 배현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