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로 돌아온 장하리는 피곤함을 느끼며 좌석에 기대었다. 어젯밤 잘 쉬지 못한데다가 볼까지 이따금 아팠다. 차창을 통해 가게를 들여다보면 돈뭉치를 세며 기뻐하는 노임향의 얼굴이 보였다. 눈에 희열이 가득한 모습. 잠시 후, 한 남성이 가게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장하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의 의붓 아버지였다. 처음엔 하마터면 어머니의 남자에게 당할 뻔했었지. 그때 노임향과 마주친 뒤에도 그는 얼굴에 당황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노임향이 절대적으로 딸을 불신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노임향은 장하리의 말따위 듣지 않고 매를 들었다. “이 천한 년. 어린 애가 어떻게 아버지를 꼬실 생각을 해? 당장 꺼져버려.”장하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이 그런 일을 겪고서도 어머니에게 뺨을 맞고 욕설을 들었어야 했는지.나중에 방우찬과 만나게 된 후 아버지는 더이상 자신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장하리는 두 손으로 운전대를꽉 잡았다. 아예 액셀을 밟아 지금 당장 차로 치어죽이고 싶은 충동마저 생겼다. 그는 살이 더 찐 상태였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꿈틀거리는 벌레같았다. 왜 자신의 어머니가 저런 남자를 보물단지처럼 애지중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하리는 역겨워졌다. 서둘러 차에서 내려 한쪽에 있는 화단 앞으로 가 헛구역질을 했다. 그 사람의 등장에 어릴적의 트라우마가 다시 발작해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그녀는 심지어 방금 자리에 어머니가 저 사람까지 초대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더 메스꺼워져 두번이나 토했지만 나오는 것은 노란 액체 뿐이었다. 오늘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까. 장하리는 차에서 생수 한병을 꺼내 입을 헹구려고 했다. 그러나 정신이 혼미해졌을 무렵 귓가에 느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리? 하리 맞구나. 너무 멀어서 못 알아봤어.”살이 뒤룩뒤룩 찐 벌레가 장하리에게로 걸어온다. 장하리가 고개를 들자 기름진 턱과 번쩍이는 이
성혜인의 허리를 감싸 안으려던 반승제가 빠르게 뒷걸음치는 그녀를 보았다. 너무 갑작스레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하마터면 옆에 있는 큰 화분에 부딪힐 뻔했다.“혜인아!”다급히 성혜인을 부른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려 했다.성혜인은 몸을 움츠렸고 머릿속이 심하게 복잡해졌다.그녀는 더듬거리며 몸을 일으켰다.“승제 씨, 저 가서 쉴게요. 머리가 아파서.”손가락 끝이 벽에 닿자 곧바로 벽을 더듬으며 성혜인은 반승제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바로 떠났다.반승제가 얼른 쫓아 나왔다. 성혜인이 복도로 왔을 때,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반승제 씨 오늘은 있어요? 여러 번이나 왔는데 나와서 만나지도 않고. 제 물건이 아직도 네이처 빌리지에 있는걸요.”밖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임수아가 고개를 들어 성혜인을 보았다. 그녀는 단번에 자신과 비슷한 얼굴인 이 여인이 반승제가 좋아한다는 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성혜인은 그저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 없이 벽을 더듬으며 떠나려 했다.임수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생각했다.‘그래서, 그 좋아한다는 여자가 맹인인 건가?’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느껴졌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당연히 맹인보다는 정상인이 나지 않겠는가.그녀가 입꼬리를 반달처럼 예쁘게 접으며 그제야 성혜인을 발견한 듯 능청스럽게 말을 걸어왔다.“언니, 앞이 잘 안 보여요? 어디 가시려고요?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저 여기 잘 알아요.”성혜인이 대답도 하기 전에 임수아가 그녀의 팔뚝을 잡아 부축했다.이에 성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했다.“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놔주세요.”성혜인은 정말로 다른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게다가 낯선 사람에게 부축받는 건 더 익숙하지 않았다.지금 성혜인은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후각과 청각은 매우 영민해진 상태였다. 슬쩍 다가오는 여인의 향기를 맡아보니 전에 반승제에게서 맡았던 냄새와 같았다.성혜인은 배현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실천에 옮길 용기는 없었기에 그저 눈물이 나왔다.“대표님 분명 저 좋아한다고, 절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었으면서... 다 거짓말이었어.”그 목소리가 매우 컸기 때문에 침실 안에 있는 성혜인은 듣지 못했을 리 만무했다.성혜인은 그제야 제가 사라졌던 그 시간 동안 확실히 반승제가 다른 여자에게 곁을 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 배현우는 성혜인을 속이지 않았다.여자아이의 울음소리에 성혜인이 벌컥 문을 열었다.반승제는 짜증이 나던 터였다. 이미 저에게서 몇억이나 가져가 놓고 이런 행패를 부리고 있으니.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뒤돌아보았고 문 앞에 서 있는 성혜인을 발견했다.성혜인은 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한 손으로 담담히 문틀을 잡고 있었다.“승제 씨.”성혜인의 부름에 반승제가 우물쭈물 대답하며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 혜인아, 일단 좀 더 자는 건 어때? 안색이 안 좋아 보여.”“승제 씨, 이 여자애는 누구죠?”반승제는 시원히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성혜인의 손을 꼭 잡을 뿐이었다.오히려 곁에 있던 임수아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저는 반 대표님 여자 친구예요. 얼마 전에 사귀게 되어서 저 때문에 회사도 여러 개 인수했는데 이제 와서 헤어지자네요... 언니, 혹시 제 존재가 언니한테 위협이 되는 거예요? 전 대표님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다른 명분은 다 필요 없고 전 그냥 대표님이 정말 좋아서 곁에 있고 싶은 것뿐이에요. 용서해주세요...”임수아가 무릎을 꿇었다.성혜인은 그저 무릎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었다.잠시 멍해 있다가 성혜인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 아이는 용서를 구하는 방법으로 오히려 자신을 순진한 동생 하나 품어주지 못하는 나쁜 언니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성혜인은 아무 말 없이 차갑게 서 있었다.그리고 그녀가 말이 없자 반승제는 더 조급해졌다.결국 반승제가 잘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얼른 심인우와 경호원을 불러왔다
반승제가 성혜인의 손을 부드럽게 문지르다 품에 안고 가볍게 토닥였다.“일단 들어가서 좀 자.”성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향기가 또 코끝에 퍼지는 것이 느껴져 짜증이 났다.더 이상 임수아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이 훈향 진세운에게서 가져온 거예요?”“승제 씨, 이 훈향 좀 전문 기관에 가져가서 검사해 보면 안 돼요? 냄새가 너무 불편해요.”그녀는 K 씨에게서 맡았던 향기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었다. 어쨌든 진세운은 자신을 도와주었고 이 일로 인해 반승제가 또 자신에게 의심을 품는다면 앞으로 그들의 관계는 절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그녀는 천하의 죄인이 될 것이다.성혜인은 터질 듯이 아픈 머리를 어루만지며 또 화가 치밀어올랐다.“그냥, 훈향의 성분이 궁금해서 그러는 거예요.”그녀가 특정 성분에 알레르기가 있을까 걱정되었던 반승제는 얼른 심인우를 시켜 검사해 보도록 했다.한 시간 후 기관의 검사 보고서가 왔는데 훈향의 모든 성분은 안전하며 건강에 좋은 것들이었다.반승제는 특별히 이 검사 보고서를 성혜인에게 읽어주었다.“이 재료 중에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어? 세운이한테 제거해달라고 하면 돼.”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확인된 다음에야 널뛰기하던 심장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그러나 성혜인은 여전히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과하게 화를 내고 의심이 많아졌다.반승제를 다치게 한데다가 지금은 뺨까지 때렸다.심지어 임수아가 구구절절 반승제가 자신을 얼마나 아꼈었는지 설명할 때, 포커페이스조차 되지 않았다.그녀는 반승제에게 가차 없이 심한 욕설을 퍼붓고 싶어졌고, 이른바 그의 호감까지 비웃고 싶었다.이는 평소의 감정 컨트롤을 잘하던 그녀와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람을 이렇게 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던가.성혜인이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뺨... 부었어요?”“아니, 걱정 안 해도 돼.”임수아는 이미 끌려간 뒤였고 짐도 보이지 않았다
반승제의 손에 이끌려 침대에 누웠지만 심한 두통 때문인지 졸리지도 않았다.“혹시 세운 씨 제 두통의 원인에 대해서 말한 적 없어요?”“그때 머리 부상 때문에 아직도 피가 고여있어서 가끔 어지럼증을 느낄 거라 했어. 그러니까 많이 쉬어야지.”성혜인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품에 안겼다. 고작 십몇분의 시간이었는데 이마는 이미 두통으로 인해 땀이 맺혔다.반승제가 끊임없이 성혜인의 등을 토닥이며 책을 읽어주었다.“읽어줄게.”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특히나 책을 읽어줄 때.반승제의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씩 졸음이 몰려왔다.졸리면서 행복하기도 했다.꿈과 현실 그 사이의 흐린 의식 속에서 또 K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그날 서재 밖에서 몰래 들은 대화처럼 말이다.목소리는 마치 귓가에서 울리는 듯 가까웠다.성혜인은 문득 겁이 나며 불안해졌다. 처음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성혜인은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했다.그럼 이번엔 또 얼마나 혼수상태에 빠지려는 건가.성혜인의 몸은 석상처럼 딱딱히 굳어있었다. 옆에선 그 목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어떻게 성혜인을 자기 뜻대로 조종할지 의논 중이었다.그 말들을 들으면서도 성혜인은 가위에 눌린 듯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군가 손으로 그녀의 몸을 쓰다듬을 때까지.성혜인은 깜짝 놀라며 손을 피하려 했다. 숨을 가쁘게 쉬며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몸은 중력을 10배로 받은 듯 무거웠고 손가락조차 들 수 없었다.“놔! 놔요!”성혜인이 손을 뿌리치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지려 했다. 그러나 이때 K 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혜인 씨, 이건 혜인 씨가 제 말을 듣지 않은 대가예요. 누가 혜인 씨더러 그 피어싱을 빼라고 했죠? 저 지금 너무 화나는데요?”“우리가 다시 협력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당신에게 달려있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요. 혜인 씨는 오늘 확실히 절 실망하게 했어요.”K 씨의 목소리는 전과 다름없이 온화하고 부드러웠지만 여전히 웃음 속에 칼
네이처 빌리지에 들어선 배현우가 사방을 둘러보았다.이 별장은 확실히 성혜인이 좋아하는 인테리어이다.문득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한 생각에 놀라 온몸이 굳었다. 성혜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그가 어떻게 이 인테리어가 그녀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이렇게 확신하는 건가.양미간을 찌푸리며 둘러보던 그가 반승제의 외침을 들었다.“혜인이 봐줘요.”배현우는 가소롭게 생각했다. 이 여자가 죽든 말든 자신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혹시 죽으면, 반승우가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르는데?반승제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그는 다가갈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러나 그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소파에 누워있는 성혜인을 향했다. 성혜인은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린 채였고 이마가 땀으로 젖어있었다.반승제는 한 손으로는 성혜인의 손을 다정히 잡고, 한 손으로는 부지런히 땀을 닦아주었다.배현우는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와 성혜인을 관찰했다.“혜인이 최근에 뭐 먹은 거 없어?”반승제가 얼른 성혜인에게 물었다.“혜인아, K 씨가 혹시 뭐 먹였어?”성혜인은 자신이 먹었던 이상한 약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약은 여러 번 먹었는데 성분은 잘 몰라요. 그저 그중 하나가 한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만 알아요.”성혜인은 고통에 시달리며 맥없이 반승제의 손을 잡았다.반승제가 배현우를 바라보았다.“채혈이라도 해볼까요? 혹시 아직 약물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니까요.”이때 배현우가 옆에 앉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나한테 보여줘서 뭐 해. 내가 의학을 아는 것도 아닌데.”말실수한 것을 자각한 그가 어깨를 약간 으쓱했다.“네 의학 잘 안다는 친구 오면 다시 보지 뭐.”배현우의 말이 끝나자 머릿속에 반승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신체에 아직 약물이 남아있다면 해독제는 내가 빠르게 만들 수 있어. 약물이 남아있지 않다면 해결하기 어려울 거야.”“얼마나 어려운데?”그러나 반승우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혜인이한테 지금 느낌이 어떤지 물어봐 줘. 혹시
“지능 높은 사람들을 통제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지능 높은 사람들은 이 약물을 먹으면 초반에는 마음이 더 굳세어지지만 며칠 더 지나면 아예 무너져버려. 최대 열흘이면 정신 나간 미치광이가 돼. 만약 이 약물이 맞다면 연구기지 사람이 혜인이 쪽에 붙은 거야.”배현우가 눈에 빛을 내며 씩 웃었다.그는 반승우가 연구기지를 언급할 때 목소리가 가라앉아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두려움이 아니다. 반승우는 복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 기지에서 당했던 모든 일에 대한 복수.“배현우, 내가 말한 거 그대로 전달해 줘.”“아니, 싫어. 너나 반승제나 다 멍청이야? 내가 왜 너흴 도와줘?”배현우는 득의양양하게 대답하며 옆에 있는 컵의 물을 마시려 했다.그러나 물이 아직 입에 들어오기도 전에 반승제가 컵을 쳐냈다.“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으면서 왜 마셔요. 물은 돈 안 내요?”그의 차가운 말투 속에 독기가 서렸다.“계속 봐줘야죠.”배현우: “...”제원에서 반승제를 이길만한 뒷배만 있었다면 배현우는 진작 그를 죽여버렸을 것이다.배현우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치료 못 해. 아마 연구기지의 약일 거고 혜인이처럼 마음이 굳센 사람들 의지를 꺾기 위해 만든 약이야. 길어야 10일 버틸 수 있고 그 이후엔 정신이상자, 미치광이가 될 거야. 약 만든 사람이라야 해결할 방법을 알겠지. 연구기지는 세계의 의학 천재들이 모인 곳이야. 그 사람들이 연구해 낸 약물인데 고작 엘리트 하나가 어떻게 해독제를 만들어.그럼 혜인이 데려가서 가서 정밀검사 시킬 테니 신체에 남은 약물이라도 대조하면서 해독제 만들어요.”“내가 말했지. 엘리트 한 명 혼자서 절대 못 한다고. 게다가 이미 약물이 사라진 지 오래일 텐데. 이래서 그 무리가 무섭다는 거야. 보아하니 너흴 견제하는 사람들이 꽤 대답한 신분인 것 같은데. 연구기지에서도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적어도 관리계층 급이야.”반승제의 안색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사업으로 돈을 버는
고통 때문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어도 성혜인은 반승제가 한 말을 똑똑히 들었다.무엇을 알겠다는 거야?성혜인이 그의 소매를 꽉 쥐었지만 그는 묵묵히 성혜인을 껴안을 뿐이었다.성혜인은 그저 자신이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들고 귓가가 윙윙거렸다.반승제가 옆의 두 사람에게 물었다.“고통을 줄이는 약은 없나요? 진통제는요?”진세운이 성혜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대답했다.“나한테 진통제가 있긴 한데. 효과는 겨우 3일이야. 게다가 3일이 지나면 고통이 배가 돼.”배현우가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연구기지에서 만들어낸 약물에 대응할 수 있는 진통제, 그 진통제가 있는 사람 역시 보통이 아니다.“그럼 먹게 해줘. 힘들어하는 거 더는 못 보겠어.”잠긴 목소리로 어렵게 대답한 반승제가 진세운이 바늘을 꺼내 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이때, 성혜인이 어디서 힘이 솟구친 건지 반승제의 손목을 움켜쥐었다.“주사 안 맞을래요. 승제 씨 마음 다 이해하는데 그래도 전 가고 싶지 않아요. 승제 씨 곁에 있을래요.”성혜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한자 한자 어렵게 말하고 있었다. 안색은 백지장같이 창백했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얼굴에 아무런 핏기가 보이지 않았고, 게다가 눈앞도 보이지 않으니 말로써 그 초췌함을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런데 반승제가 어떻게 제 애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혜인아, 일단 진통제만.”“싫어요.”그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만 까무러칠 뻔했다.진세운도 동작을 멈추고 반승제에게 다시 물었다.“정말 맞힐 거야? 설마 3일째 되는 날 효과가 사라지면 바로 보낼 생각인 거야?”반승제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별다른 방법이 없다.전에 성혜인이 K 씨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든 적어도 성혜인의 목숨을 살려둘 것이다. 또 수령에 대해 말하기도 했었다. 지금 상황도 말을 듣지 않아 복수 당한 것이라고 했다.반승제가 한쪽
공지민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연승혁한테 기대어 있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침대에 눕혔다.이곳은 작은 섬으로 보였고 원주민들도 꽤 많아서 야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공지민은 안겨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노점상들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또 30분이 지났을 때 음식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연승혁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야? 너 하루 종일 잠만 잤어.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따가 야시장 구경하러 가보자.”“사람 잡으러 왔다면서 야시장을 구경할 기분은 나요?”“그 사람이 지금 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어.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야. 이곳의 출입구는 이미 부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 사람이 함정에 빠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공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뽀뽀했다.“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연승혁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네 약혼자가 될 수 있는 걸 봐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네가 보는 눈이 있네.”“그럼요. 내가 안목이 높긴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연승혁은 기분이 더 좋아졌고 그녀를 품에 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인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봐봐.”연승혁은 많은 음식을 사 왔고 그녀는 확실히 배가 고파서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연승혁은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전부다 네 거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그러죠.”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눈이 깊어졌다.공지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야시장 구경하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나도 너무 구경하고 싶고 이곳의 풍습이 궁금해요. 여기 국내는 아니겠죠?”연승혁은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이전에는 연승혁의 주변에 여자가 별로 없었고 오직 원아정 한 명뿐이었다. 원아정과는 단순히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만났던 거라서 그녀와의 경험은 그저 상쾌함만 느껴졌고 내면의 만족감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공지민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달랐다.연승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피부를 만지기 시작했고 무기력하게 기대어 있는 공지민이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연승혁은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그는 공지민이 다 씻은 후 옆에 있던 타월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침대에 누운 공지민은 곧 잠이 들 것 같았지만 연승혁은 욕구를 참느라 너무 힘들었다.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무해한 모습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고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이 손끝으로 그녀의 허리에서 가슴까지 쓰다듬을 때 공지민은 가끔 눈을 떠 그를 쳐다보았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연승혁은 더욱 불타올랐지만 그녀가 현재 아픈 상태라는 걸 잊지 않았다.연승혁은 몸을 숙여 그녀의 목에 흔적을 남겼고 공지민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낸 후 그한테 물었다.“오빠, 우리 정말 약혼한 사이에요?”그녀의 질문에 연승혁은 순간 몸이 굳었다.공지민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냥 우리 둘 사이가 너무 순수해 보여서요.”연승혁이 그녀의 목을 힘껏 깨물자 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소리 질렀다.연승혁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직도 순수해 보여? 오늘 밤, 네 몸 전체에 흔적을 남겨줄게.”공지민의 볼이 빨개졌고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연승혁은 그냥 말해본 거였는데 그녀의 반응을 보니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그가 그녀의 몸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하자 공지민은 허리를 굽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연승혁이 그녀의 몸에 키스하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많은 비도덕적인 생각들이 떠올랐고 자신이 지금의 행위를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간다면 벌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흔적을 하나하나 남길 적마다 그의 이성은 사라졌고 오늘 밤만은 그녀
공지민의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곳은 온시환이 차를 세워둔 위치였다.오후부터 그녀는 강한 시선이 느껴졌고 신기하게도 그녀는 그 시선의 주인이 온시환이라는 걸 알았다. 온시환은 열 몇 시간 동안 은밀한 곳에 숨은 채 그녀의 곁을 지켰다.공지민은 연승혁를 향해 미소를 짓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연승혁은 그녀를 안아 들고 곧장 차로 돌아간 후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그녀의 몸에 덮어줬다.별장으로 돌아온 후 그는 공지민을 안고 안방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악몽을 꾸는 듯 이마에 땀이 맺힌 채 계속 뭔가를 중얼거렸다.“가지 마요.”“날 괴롭히지 마요.”그런 공지민의 얼굴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는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중간에 공지민이 눈을 떴지만 그가 돌아온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다시 눈을 감았다.도우미가 몸보신하는 죽을 들고 오면서 물었다.“도련님, 제가 지민 씨 먹여드릴까요?”연승혁은 손을 들어 죽을 건네받으며 말했다.“제가 할게요.”도우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연승혁은 공지민을 일으켜 세우고 흔들어 깨웠다.“지민아, 얼른 일어나서 이거 좀 먹어. 너 지금 열도 나고 저녁에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공지민은 어렴풋이 눈을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오빠 돌아왔네요.”연승혁은 고개를 기울여 그녀한테 입을 맞추며 말했다.“네가 그렇게 슬프게 우는데 내가 어떻게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어?”공지민은 그의 목을 감싸안으며 말했다.“역시 오빠밖에 없어요. 근데 또다시 나갈 건가요?”연승혁은 늦어도 날이 밝은 후 일 보러 다시 나가봐야 했다. 하지만 공지민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았고 혹시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었다.그렇다고 이상우를 불러 공지민의 기억을 되돌리고 온시환 곁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걸 생각만 해도 연승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 없이 그녀한테 죽을 먹여준 다음 옆에 있던 휴지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염정아는
염정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공지민은 그녀의 표정을 통해 그녀가 그다지 나오고 싶어 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면회가 끝나갈 무렵 염정아는 갑자기 공지민한테 다가가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지민 언니, 나는 내가 그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공지민은 온몸이 굳어버렸고 눈이 따가워졌다.염정아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고 경찰을 따라 다시 들어갔다.홀로 남은 공지민은 몸과 마음이 너무 괴로웠고 마치 수만 마리의 개미가 그녀의 심장을 갉아 먹는듯한 느낌이었다. 경찰서 문 앞까지 나온 그녀는 속이 울렁거려서 토하고 싶었지만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처음으로 복수를 계속할 것인가에 대해 망설이기 시작했다.마침 연승혁의 전화가 걸려 와 그녀의 위치를 물었다.공지민의 목소리는 여전히 쉬어있었고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연승혁은 드디어 도망간 사람에 관한 단서를 얻게 되어 그 사람을 잡으러 가는 중이었는데 공지민이 걱정되고 마음에 걸려 전화를 한 거였다.“나 지금 경찰서에요. 내 친구가 사람을 죽였어요. 오빠, 나 걔랑 있었던 일이 기억났어요. 고등학교 때 우린 둘 다 괴롭힘을 당했었어요. 근데 우리를 괴롭힌 사람이 누군지 기억이 안 나요.”연승혁은 그녀들을 괴롭힌 사람이 이미 죽은 원아정이란 걸 알고 있었다.그가 목을 가다듬고 그녀를 위로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공지민이 울기 시작했다.“오빠, 보고 싶어요. 왜 아직도 안 돌아오는 거예요? 너무 보고 싶어요. 나 지금 심장이 너무 아파서 숨이 멎을 것 같아요.”그녀의 울음소리를 듣자 연승혁의 심장도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헬리콥터에 올라탔고 원래는 도망친 그 사람을 잡으러 가야 했지만 그녀가 걱정되어 조종사한테 목적지를 바꾸라고 말했다.“우린 먼저 제국으로 돌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추적하라고 해.”조종사는 조금 놀랐다. 보스가 도망친 그 사람을 잡으려고 신경을 많이 썼고 이제 겨우 단서를 얻었는데 제국으로 돌아간다
경찰서에서 나온 온시환은 마침내 밖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사실 그는 공지민을 다시 찾아가 그녀한테 복수를 그만두라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복수에 집착했다가 염정아와 염정아 동생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하지만 공지민이 건드린 건 연씨 가문이기에 그녀의 미래 운명은 염정아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이었다.온시환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너무 오랫동안 경찰서 앞에 서 있다 보니 허벅지가 마비될 정도였다.과거의 그는 상류층에 속해 있어서 인간성의 복잡성과 인정의 차고 따뜻함을 깊이 느낀 적이 없었다. 염정아의 일을 통해 그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꼭 설명이 필요한 건 아니고 당사자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느꼈다.다만 온시환은 이제 정말 지쳤고 그는 그저 공지민이랑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마음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고 오랫동안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도 TV 뉴스를 통해 교통사고가 난 사람이 염정아의 동생이란 걸 알았다. 그녀는 매우 걱정스러웠고 염정아의 동생이 왜 제국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서둘러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바람 쐬러 나가겠다고 전했다.연승혁은 그녀가 나가면 온시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됐고 그로 인해 지금 진행 중인 게임도 끝나버려서 그한테 불리할까 봐 단박에 거절했다.하지만 몇 시간 후 공지민은 울먹이면서 또다시 연승혁한테 전화를 걸었다.“고등학교 때 친구가 방금 뉴스에 나왔어요. 기억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아요. 흑흑, 걔가 사람을 죽였대요. 오빠, 걔 만나러 가야 돼요.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걔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요?”염정아의 동생이 죽은 다음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걸 봐서 염정아 동생의 죽음이 원아정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고 염정아가 원아정한테 복수하려고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공지민의 울음소리를 들은 연승혁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바로 동의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오늘의 뉴스를 조사해
염정아는 주삿바늘을 뽑아버리고 병실 문을 나섰다. 밖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온시환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왔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보호 받을 필요가 없었다.경호원이 그녀에게 물었다.“염정아 씨, 어디 나가시려고요?”“여기가 너무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내려가려고요.”경호원들은 그녀를 보호하러 온 것이지 감시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염정아는 진짜 바람 쐬러 나간 게 아니라 병원에서 나온 후 바로 원아정을 찾아 나섰다.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증오와 원아정을 찾아내서 무조건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 복수의 불꽃이 가슴속에 계속해서 타올랐다.염정아는 30분 동안 거리를 헤매다가 하늘나라에 있는 동생이 도운 건지 정말 원아정을 찾아냈다.오늘의 원아정은 더 이상 부잣집 딸의 옷차림이 아닌 수수한 옷차림에 머리는 부스스하고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염정아는 그녀를 너무 잘 알기에 한눈에 알아봤다. 그녀는 백화점 밖에서 오고 가는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원아정을 못 찾을 만했다. 자신의 체면을 그렇게 중히 여기던 원아정이 거지의 모습으로 가장 번화한 상권에 나타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염정아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칼을 사 들고 원아정을 향해 걸어갔다.원아정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감지 못했고 마음속으로는 연승혁의 부하들이 평생 자신을 찾지 못할 거라고 기뻐하고 있었다.하지만 곧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외쳤다.“원아정.”아직 반응하지 못한 원아정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누군가가 그녀의 목을 향해 칼을 꽂았다.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염정아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칼을 뽑았다가 분노에 휩싸여 다시 원아정의 몸을 향해 찔렀다.원아정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언제 발각되었고 또 왜 이토록 처참하게 죽어야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당시 CCTV를 확인한 결과, 남성 피해자가 소형차에 치인 뒤 뒤따라오던 트럭이 남성을 깔아뭉갰고 남성이 트럭 차대에 끼어서 몇 킬로미터를 끌려가다가 트럭 뒤를 따르던 차량이 핏자국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경적을 울려 트럭 운전기사를 멈추게 했다.트럭 운전기사는 너무 놀라서 머리가 멍해졌고 계속 자신이 사람을 쳤다고 여겼는데 CCTV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요 책임은 아니었지만 그도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곧바로 누군가가 사망자의 가족한테 연락하려고 했지만 사망자의 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의 가족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경찰도 난감한 상황에 빠져 사망자의 교통사고 보도를 TV로 방송하고 사망자가 입고 있던 옷을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시각 염정아는 계속해서 동생을 찾고 있었고 흐려진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하고 두려웠다.두 시간 후 온시환의 부하가 마침내 소식을 전해왔는데 바로 차에 치여 사망한 남자의 가족을 찾는 뉴스 보도였다.익숙한 옷을 본 염정아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옷은 동생의 옷이었고 그녀가 사준 거였다.“어디에 있어요? 동생 만나러 가야 해요! 꼭 가야 해요!”그녀는 심한 충격에 기절할뻔했지만, 동생의 곁으로 갈 때까지 이 악물고 버텼다.시신은 병원 영안실로 옮겼는데 머리 빼고는 온전한 데 하나도 없었고 염정아는 시신을 보자마자 기절해 버렸다.온시환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급히 응급실로 데려갔다.염정아는 아주 긴 꿈을 꿨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부모님은 그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뿐이었다.그녀가 슬픔에 잠겨 울고 있을 때 바보 동생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서 막대 사탕을 건네줬다.막대 사탕은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었고 그때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불렀다.“누나.”염정아는 동생을 미워했고 항상 동생의 존재가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생각
사실 원아정은 염정아를 잊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얘기를 꺼내자 그녀에 대한 기억이 조금 떠오르긴 했다.공지민이 나타나기 전에 확실히 다른 사람을 괴롭힌 적 있긴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염정아는 심호흡하고 말했다.“나랑 지민 언니는 동병상련의 관계일뿐이고 내 집안 사정이 어려울 때 지민 언니가 도와주고 돈도 줬어. 내가 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서 지민 언니가 날 데려온 거고 날 숨기려고 한 게 아니야. 난 단지 집에서 수공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대학도 못 가고 하니 학력도 없고 인맥도 없어서 돈을 벌려면 할 수 있는 게 수공업뿐이었으니까.”원아정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염정아가 또 무슨 쓸모가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염정아의 집안은 너무 평범했고 심지어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셔서 그녀의 곁에는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다섯 명의 자녀뿐이었다.원아정의 눈에는 혐오감이 감돌았고 특히 길가에 불쌍하게 웅크리고 있는 염정아의동생을 봤을 때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하필이면 이때 염정아의 동생이 일어서면서 원아정한테 물었다.“저 언제 집에 갈 수 있죠?”그는 더 이상 제국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재미도 없고 가장 중요한 건 누나를 화나게 했으니 혹시나 누나가 평생 그를 안볼까 봐서 걱정이었다.동생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억울함이 가득했고 빨리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다.원아정은 자신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고생했는데 결국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자 염정아의 동생을 순순히 보내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끊임없는 차량이 왔다 갔다 하는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안으로 들어가서 걸어 다니다 보면 누군가 널 집으로 데려다줄지도 몰라. 저거 봐, 차가 저렇게 많은데 너희 집 방향으로 가는 차가 당연히 있지 않겠어? 널 집까지 데려다줄 사람도 무조건 저기 있을 거야.”염정아 동생의 눈에는 순간 희망의 빛이 반짝였고 그녀의 말을
염정아는 그들의 집에서 제원까지 오려면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고 동생은 멀리 외출한 적이 없어서 표는 어디서 어떻게 사고 차는 또 어떻게 타야 되는지도 모를 텐테 그냥 애교부리며 농담한다고 생각했다.“내가 말했지. 내가 갈거닉가 그때까지 집에서 애들 잘 돌보라고. 안 그럼 나 화낼거야. 알지? 화내면 널 버릴 수도 있다는걸.”동생이 살면서 제일 무서운 일은 염아정에게 버림받는 일이었고 그 말에 당황한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아니야, 나 집에서 애들 잘 돌보고 있을 테니까 절대 버리면 안 돼.”염정아는 전화기 너머로 동생의 당황함을 눈치채고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말만 잘 들으면 안버릴테닉가 걱정하지 마.”“알았어. 나 누나 말 잘 들어. 진짜 잘 들을 거야.”전화를 끊은 후, 화가 치밀어 오른 원아정은 바로 동생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원아정은 동생을 통해 염정아를 불러내여 공지민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내려 했지만 동생은 그렇게 통화를 끊어버렸다.동생은 뺨을 맞고도 이유를 몰랐고 감히 되받아치지도 못했다.원아정은 힘들게 이 남자를 불러 제원까지 데리고 온 것만 해도 억울함에 미칠것 같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니 더 화가 치밀었다.원아정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고 계속하여 염정아의 동생을 위협했다.“누나한테 다시 전화 걸어 꼭 나오라고 해요. 안 그러면 나도 당신 상관 안 할 거예요. 이렇게 큰 제원에서 누나한테 연락 안 하면 당신은 먹지도 못하고 길바닥에서 그대로 죽어 버릴 수 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누나도 영원히 못 볼 거 아니에요.”동생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누나한테서 버림받는 것이 더 두려워서 더는 연락 하지 않기로 했다.원아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바로 저절로 염정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염정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아까 물어보지 못한 말부터 했다.“너 누구 휴대전화로 연락한 거야? 왜 번호가 틀려?”원아정은 음험하고 악독한 소리로 말했다.“염정아, 잘 들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