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입술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다치지 않은 손으로 ‘수락’ 버튼을 누르기는 했다만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때 마침 반태승이 먼저 위로의 말을 건넸다.“승제야, 잘했다. 이제는 너도 다 컸구나. 이번엔 잔소리하지 않을 테니 오늘 안 와도 된다.”반승제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반태승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예전에는 전화만 받으면 세 마디를 못 넘기고 성혜인을 언급하는 사람이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얼마 전에 성사시킨 인수 때문에 그러시나?’과거의 반태승은 BH그룹을 반승제에게 물려준 이후 계속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만 할 뿐 비즈니스계에 대한 관심이 전무했다. 편안한 노년 생활을 즐기는 중이라 할 수 있겠다.이번에 성공적으로 성사된 인수 건이 아니었다면, 무엇 때문에 반태승이 이렇게 기뻐하는 것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반승제는 자연스럽게 인수 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당연한 일을 했는 걸요. 앞으로도 노력할게요.”하지만 반태승은 그 말을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오늘 밤, 반태승은 분노를 꾸역꾸역 삼킬 생각이었다. 반승제에게 성혜인을 데리러 가라고 하니, 반승제는 정 없는 사람처럼 야근을 해야 한다고 답했기 때문이었다. 일이 며느리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가?성혜인의 정체를 사람들 앞에서 성대하게 공개할 생각이었던 반태승은 반승제와 성혜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지금까지도 제원 내에서 성혜인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만큼, 몇 년 동안 혜인이 뜻하지 않게도 우여곡절을 많이 겪게 된 것은 사실이다.반씨 집안으로 시집을 오고 난 이후에는 괴롭힘까지 당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보니 찾아오지 않는 반승제를 볼 때면 반태승은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소식을 듣고 난 후, 반승제가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승제야, 난 네가 말로만 노력한다고 하는 줄 알았다. 내가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된
감정이 격해진 임남호가 주체하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면서 복도 전체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만약 임남호가 정확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었다면, 반승제 역시 이들의 대화 내용을 듣고 성혜인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임남호 입에서 그녀의 본명이 튀어나왔으니 말이다.일찍이 자퇴한 임남호는 학업을 포기하고 지방에 있는 공사 현장을 돌았다. 이 가난한 서천을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그 과정에서 전국 각지에서 온 노동자들을 알게 되었고, 일부러 그들의 억양을 배웠다.사실 토종 사투리를 쓴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사투리가 뒤죽박죽 섞이니 발음도 분명하지 않아 이상하게 들렸다. 그런 이유로 반승제는 두 사람이 왜 싸우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여러 외국어를 거뜬히 구사하는 그였지만, 성혜인이 하는 말만 어렴풋이 들릴 뿐 임남호의 말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복도 밖.성혜인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외삼촌 외숙모만 아니었으면 제가 이럴 일도 없거든요?”28살이나 된 남자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직장 하나 찾지 못한 데다가, 고객 돈 몇 천만 원을 빼돌리다니. 그것으로 모자라 도박으로 2억을 탕진해 부모님이 사채를 갚아주는 삶을 사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을까?성혜인은 임남호를 잡아당기며 전화를 받았다.“외삼촌.”하지만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임동원이 아닌 이소애였다.이소애의 갈라지는 목소리에서 묵직한 피로가 느껴졌다.“혜인아, 외숙모도 너에게 이러고 싶지 않지만... 정말 어쩔 수 없어서 전화했어. 반 사장님 연락처도 없는데 경찰은 네 올케언니를 못 풀어준다고 하네. 그 큰돈을 도저히 마련할 수가 없는 상황이야. 우리 집 곧 철거하잖아. 이웃들 집을 좀 사려고 네 외삼촌이랑 친척들한테 돈을 빌렸어. 그걸로 일부를 좀 메꿔보려 했는데, 철거 소식에 그 집 자녀들이 찾아와서 외삼촌 다리를 부러뜨리고 머리에 피까지 흘려서 지금 병원에서 응급조치하는 중이야. 흑흑...
처치를 마친 의사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준 후 자리를 떠났다.성혜인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임남호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반승제에게 향했다.“대표님. 자동차를 파손한 그 여자, 기억하시나요? 제 올케언니요.”반승제는 머릿속에 심술 가득한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자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응.”성혜인은 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아 시선을 떨궜다.“16억은 제가 갚을게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일단 제 인건비에서 공제해 주시겠어요? 부족한 부분은 천천히 나눠서 갚을게요. 가능할까요?”이번 사업 건의 디자인 비용은 분명 수억 원일 것이다. 반승제가 통 크게 준다면 10억까지도 받을 수 있다.네이처빌리지의 별장은 그렇게까지 크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프리미엄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주하기 편한 곳이다.반승제가 그곳에서 장기적으로 거주할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성혜인도 더욱 심혈을 기울이고 있기에 반승제도 디자인 비용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반승제가 기꺼이 바가지를 쓰겠다고 나서지 않는 이상 16억까지는 무리다.반승제는 한동안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혜인도 난처했다. 지난번에는 하진희가 꼴사나운 짓을 한 게 사실이었으니 말이다.“대표님, 이자 더해서 갚겠습니다.”반승제는 손바닥에 난 상처를 바라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16억이면, 하루 이자가 얼마인지 알아?”결코 적지 않다는 건 성혜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성휘가 준 카드가 있기는 했지만, 그 안에는 용돈으로 넣어준 2억 밖에 없었다. 게다가 성휘가 입원해 있을 때 가지고 있던 카드를 성혜인에게 건넨 것이었다. 그러니 한도 높은 카드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알아요.”“원래 이렇게 다른 사람이 사고 친 일 수습하는 게 취미인가?”반승제는 병상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키며 다친 손을 움직였다. 아직 통증이 있는지 미간에 반응이 있었다.성혜인의 행동이 너
무슨 일이든 다 한다?언제든지?하루 세 끼 식사를 BH그룹으로 갖다준다?어느 것 하나 반승제에게 낯선 말은 없었다.하지만 곁눈질로 본 성혜인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역력했다. 어떻게든 보상하겠다는 생각으로 한 말이 분명했다.문 앞에 서 있던 임남호는 그런 비굴한 성혜인의 모습을 봐줄 수 없었다.성혜인은 제원대학을 졸업한 인재다. 남자가 아무리 부자라 해도 이렇게 굴욕적으로 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혜인아, 뭐 하는 거야? 최고 명문대까지 나온 애가 가정부를 자처하겠다고?”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뱉는 임남호에 성혜인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반승제는 임남호가 저렇게 성을 내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굴욕’이라는 단어는 정확히 들었다.애초에 성혜인이 제시한 조건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임남호의 말을 듣고 난 후, 반승제는 다친 손목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어느 호텔인지 알고 있지?”호텔에서 마주친 적이 있으니 모를 리 만무했다.성혜인은 지난번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얼굴을 붉혔다.그때 일이 다시 생각나니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성혜인은 차마 반승제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네.”“BH그룹으로 올 것 없어. 밤 9시에 호텔로 가져다줘.”성혜인은 사실 의구심이 들었다. 반태승이 언제 찾아올지 몰라 포레스트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이 왜 또 호텔로 가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물어볼 입장이 되지 않으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알겠습니다, 대표님.”임남호는 어금니를 꾹 깨물며 성혜인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반승제를 직시했다.하지만 180cm인 임남호가 187cm인 반승제와 눈을 맞추려면 조금은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이미 기 싸움으로 반은 지고 들어가는 셈이다.“명심해. 아무리 회사 대표라고 해도 혜인이를 괴롭힐 수는 없어. 우리 집에서 가장 성공한 아이라고! 제원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잔치까지 벌일 정도였으니까.”임
“그쪽 길에서 마주친 적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쪽에 분명 집이 있을 거라 생각했죠.”성혜인은 극적으로 변명거리가 떠올랐다. 그제야 반승제는 성혜인이 다리를 다쳤던 일이 생각났다.‘근데 방금 병원에서 따로 치료를 안 받은 것 같은데...’성혜인은 여태 불편한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참고 있는 건가?’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성혜인은 엑셀을 밟을 때마다 다리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반승제도 자신 때문에 이렇게 크게 다쳐 파티에도 가지 못했다는 것에 마음이 쓰였다.어떤 식으로든 반승제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대표님, 정확히 어느 동에 사시는지는 잘 몰라서요. 이따가 길 좀 알려 주시겠어요?”성혜인은 끝까지 모른 척을 했다.뒷자석에 앉아있던 반승제는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성혜인은 뭔지 모를 따가운 시선이 뒤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통증 때문에 손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포레스트를 발견하자 또다시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포레스트 앞에 멈춰 선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백미러를 보는 순간 반승제와 눈이 마주쳤다.반승제의 검은 동공이 조금 더 짙어졌다.“왜 여기에 멈춘 거야?”성혜인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에 등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다리가 아파서 좀 문지르려고요.”“아.”반승제는 눈을 희미하게 뜨며 감탄사를 툭 내뱉었다.‘천하무적인 줄 알았는데, 아픈 걸 알긴 하네.’하지만 너무나 절묘하게도, 멈춰 선 곳은 다름 아닌 포레스트 입구였다.유경아는 반승제의 차를 발견하고 급히 마중을 나왔다.“대표님, 파티는 끝나셨나요?”유리창 때문에 아직 성혜인을 발견하지 못했다.반승제는 앉은 자리에서 창문을 살짝 내리고 ‘네’하고 답했다.유경아는 뭔가 이상했다.“사모님과 같이 안 오셨어요?”성혜인을 언급하는 순간, 반승제의 미간에서 짜증이 느껴졌다.“네. 오늘 집에 안 들어올 거니까 마중 안 나오셔도 됩니다.”유경아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반승제는
반승제는 눈썹을 들썩였다. 성혜인이 너무나도 과묵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 순간이었다.“응.”성혜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감동 그 자체였다.“네. 시간 맞춰 올게요.”진통 스프레이를 뿌리고 나니 발목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성혜인은 고개를 숙여 구급상자를 정리한 후 현관 수납장에 가져다 두었다.닫히는 문틈 사이로 성혜인의 목소리가 전해졌다.“그럼 일찍 쉬세요.”반승제의 얼굴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먹먹하면서도 답답한 느낌.반승제는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 같았다.하지만 넥타이가 손바닥의 상처를 쓸면서 통증이 올라와 미간을 좁혔다.‘어차피 별로 친하지 않은 여자일 뿐이야.’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성혜인은 반승제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 리 만무했다. 그녀는 황급히 외삼촌의 가정사를 해결하고자 서천으로 향했다.하지만 임남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에 화가 솟구쳤다.성혜인은 관자놀이가 얼얼할 정도로 화가 났다. 하지만 이 멍청한 사촌 오빠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서천에 도착한 그녀는 하루 정도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며칠 뒤면 하진희를 빼낼 수 있다며 이소애를 위로했고, 병원에 치료비를 지불하기도 했다. 임동원의 응급 치료가 끝난 걸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피곤한 몸을 이끌고 포레스트 펜션으로 돌아왔다.하지만 성혜인을 짓누르는 건 반드시 갚아야 하는 반승제의 16억이었다.성혜인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쉴 새도 없었다. 벌써 저녁 6시였다. 그녀는 급히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피곤했던 그녀는 모과를 자르다 하마터면 손을 벨 뻔했다.옆에 있던 유경아가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사모님. 드시고 싶은 국이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할게요.”성혜인은 몰려오는 졸음에 눈조차 뜰 수 없었다. 결국 유경아의 만류에 칼을 내려놓았다.“모과를 넣은 갈비탕
성혜인이 어떤 말도 입에서 뱉지 않았지만 한지은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수치심이 올라왔다.조희준은 이상함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성혜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주변에 어색한 기운이 무겁게 깔렸다.정신이 번쩍 들자 속에서 분노가 솟았다.“성혜인!”조희준은 하지은을 강하게 내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성혜인 역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어느 포인트에서 분노를 느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장님.”성혜인은 예의를 잃지 않으려 했다. 협력 정신이고 뭐고 다 어긴 전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얼굴 붉히면서까지 다투고 싶지 않았다.“정말 대단하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때문에 신이한과의 계약이 물거품 됐다고! 3년을 봐왔지만 이런 사람일 줄이야. 다른 여자와는 다를 줄 알았더니, 역시 몸이나 내주는 여우였구나!”성혜인은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사장님. 먼저 계약을 깬 건 사장님이에요.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저에게 뒤집어씌우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조희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노려보며 픽 웃었다.“신이한이 앞에서는 사람들과 짜고 널 저격해 놓고, 뒤에서는 널 도와주고 있었더라? 같이 밥도 먹었다던데, 네가 밤에 꽤 잘해줬나 보네.”“사장님은 반듯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여성 비하를 좋아하셨군요? 이런 걸 자신의 무능을 남 탓으로 돌린다고 하죠?”“뭐?!”조희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신이한이 계약을 파기할 때 조희준은 곧바로 성혜인 탓을 하기 바빴다.때마침 한지은이 찾아와 성혜인과 같은 회사 사람이라며 접근했다. 성혜인에게 되갚아 주고 싶을 때에 제 편까지 생기고, 또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생각에 한지은을 거부하지 않았다.하지만 이곳에서 성혜인을 마주치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조희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한지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앞으로 너와 함께 일할 일은 없을 거야. 아는 회사에도 네 의뢰는 받지 말라고 다 말해 두겠어. 우리 인테리어 팀이 업
성혜인은 졸음이 쏟아졌다. 반승제가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벽에 기대 잠에 들었을 것이다.그래서인지 엘리베이터 열리는 소리에 눈이 번뜩 떠졌다. 고개를 든 그녀는 금방 자세를 고쳐 잡았다.“오셨어요.”반짝이는 혜인의 눈동자에 반승제는 심장이 간질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 감정에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반승제가 카드를 찍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성혜인 역시 그 뒤를 따라 들어와 티테이블 위에 보온 도시락을 올려놓았다.“오늘 드실 국이에요.”매우 고급지게 보이는 분홍색 도시락이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이 이런 색깔의 보온 도시락을 사용할 줄은 몰랐다. 성혜인은 업무상에서 늘 노련한 모습만 보였고, 할 말 있으면 다 하는 스타일이었다.그런 그녀의 취향에 조금 놀랐지만, 티 내지 않고 정장 단추를 풀었다.임무를 완수한 성혜인은 곧바로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외로운 남녀가 한 공간에 있으면 다른 생각이 들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그럼 맛있게 드세요.”성혜인은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보온 도시락, 안 가져갈 거야?”필요 없다는 말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포레스트에 남아 있는 보온 도시락이 없다는 게 떠올랐다.‘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건가?’성혜인은 바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리낌 없는 모습에 반승제가 오히려 흠칫했다.“그럼 다 드시고 나서 갈게요.”성혜인에게 반승제는 고객이기도 하지만, 곧 이혼을 앞둔 ‘남편’이기도 했다. 물론 법적으로 말이다.솔직히 할 거 다 한 사이인데, 일부러 피한다면 내숭처럼 보일 수도 있다.혹여나 성혜인이 밀당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라도 한다면 그게 더 문제다. 그래서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좋은 인상을 남겨줄 수 있을 것 같았다.반승제는 눈썹을 들썩였다. 원래는 스위트룸 안에 마련된 주방에서 요리를 시킬 생각이었다.이미 9시가 다 된 시각, 남자 클라이언트에게 국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모자라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호텔 방 안에서 기다리다니. 심지어 적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