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남호의 곁에는 갑자기 깡패 같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임남호의 어깨를 잡고 인적이 드문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성혜인은 몇 발짝 걷지도 못하고 길가의 나무를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임남호가 위험에 빠질까 봐 이를 악물고 쫓아갔다.어두운 거리에는 주먹질하는 소리와 욕설이 간간이 들려왔다.“돈은 왜 아직도 안 갚아?! 너 죽고 싶어?”“미친놈, 감히 우리를 상대로 숨바꼭질을 해?”성혜인은 골목 앞으로 오자마자 깡패들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일단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그만 해요!”깡패들은 동작을 멈추고 드레스를 차려입은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음흉한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며 하나둘씩 걸어왔다.“올~ 임남호 네가 언제부터 이런 미인이랑 알고 지냈어?”임남호는 몸을 웅크린 채로 머리를 보호하고 있었다. 살짝 머리를 들어 성혜인을 발견한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혜인이니?”임남호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 갈비뼈 몇 대가 나갔는지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아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성혜인은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임남호가 한심했다. 20대 후반에 들어선 사람이 취직하기는커녕 거지처럼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외삼촌과 외숙모를 생각해서라도 듣기 싫은 말은 삼켜버렸다.깡패들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고 성혜인은 뒷걸음질을 쳤다. 발목이 아직 아픈 데다가 하이힐까지 신고 있어서 그녀는 길가의 돌부리에 걸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이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잠시 후 걷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통증은 전해오지 않았고 한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부축해 줬다.성혜인은 머리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과 향기에 그녀는 후다닥 자세를 바로 하며 거리를 벌렸다.“대표님?”성혜인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반승제의 차는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꽤 먼 곳까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이곳
성혜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넋이 나가버렸다. 반승제는 차분하게 비수를 휘두른 사람을 발로 차버렸다.깡패들은 잘못 걸렸다는 표정으로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고 비척거리며 멀어져갔다.“대표님, 제가 병원으로 데려다줄게요.”성혜인은 떨리는 손으로 반승제의 상처를 확인했다. 하이힐을 신고 잠깐 서 있었더니, 발목이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기 시작했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하필이면 오른손을 다쳐서 한동안은 불편하게 지내게 될 것 같다. 그는 성혜인이 갑자기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서는 것을 보고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만약 반승제가 자신을 위해 다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백연서에게 갈기갈기 찢겨져서 죽겠다고 생각하며 성혜인은 맨발 투혼에 나섰다. 그녀는 오늘 반승제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말았다.성혜인은 반승제를 따라 그의 차를 향해 걸어가면서 몰래 도망가려는 임남호의 목덜미를 잡았다.“오빠도 따라와요.”임남호는 성혜인에게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반승제의 고급 외제 차를 보고 겁먹고는 감히 오르지도 못했다. 길가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던 성혜인은 그를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심인우는 반승제가 다친 것을 보고 말없이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출발했다.이쪽 길은 성혜인이 세워둔 차 때문에 길이 막히고 있었다. 그녀는 임남호를 잡으러 가느라 길가에 차를 세워도 되는지 확인도 하지 못했다.슬슬 운전자들의 욕설이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성혜원은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우리는 일단 출발하죠. 언니한테는 제가 따로 전화할게요. 다른 차를 타고 저택으로 가도 되는 거니까요.”곧 있으면 파티가 시작될 것이기에, 기사는 어쩔 수 없이 먼저 출발했다. 성혜원은 성혜인과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성혜원은 처음으로 공식적인 장소에서 반승제와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예전의 그녀는 지나가는 행인처럼 보잘것없는 존재로 멀리서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약간의 복
반승제는 입술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다치지 않은 손으로 ‘수락’ 버튼을 누르기는 했다만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때 마침 반태승이 먼저 위로의 말을 건넸다.“승제야, 잘했다. 이제는 너도 다 컸구나. 이번엔 잔소리하지 않을 테니 오늘 안 와도 된다.”반승제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반태승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예전에는 전화만 받으면 세 마디를 못 넘기고 성혜인을 언급하는 사람이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얼마 전에 성사시킨 인수 때문에 그러시나?’과거의 반태승은 BH그룹을 반승제에게 물려준 이후 계속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만 할 뿐 비즈니스계에 대한 관심이 전무했다. 편안한 노년 생활을 즐기는 중이라 할 수 있겠다.이번에 성공적으로 성사된 인수 건이 아니었다면, 무엇 때문에 반태승이 이렇게 기뻐하는 것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반승제는 자연스럽게 인수 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당연한 일을 했는 걸요. 앞으로도 노력할게요.”하지만 반태승은 그 말을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오늘 밤, 반태승은 분노를 꾸역꾸역 삼킬 생각이었다. 반승제에게 성혜인을 데리러 가라고 하니, 반승제는 정 없는 사람처럼 야근을 해야 한다고 답했기 때문이었다. 일이 며느리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가?성혜인의 정체를 사람들 앞에서 성대하게 공개할 생각이었던 반태승은 반승제와 성혜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지금까지도 제원 내에서 성혜인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만큼, 몇 년 동안 혜인이 뜻하지 않게도 우여곡절을 많이 겪게 된 것은 사실이다.반씨 집안으로 시집을 오고 난 이후에는 괴롭힘까지 당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보니 찾아오지 않는 반승제를 볼 때면 반태승은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소식을 듣고 난 후, 반승제가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승제야, 난 네가 말로만 노력한다고 하는 줄 알았다. 내가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된
감정이 격해진 임남호가 주체하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면서 복도 전체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만약 임남호가 정확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었다면, 반승제 역시 이들의 대화 내용을 듣고 성혜인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임남호 입에서 그녀의 본명이 튀어나왔으니 말이다.일찍이 자퇴한 임남호는 학업을 포기하고 지방에 있는 공사 현장을 돌았다. 이 가난한 서천을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그 과정에서 전국 각지에서 온 노동자들을 알게 되었고, 일부러 그들의 억양을 배웠다.사실 토종 사투리를 쓴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사투리가 뒤죽박죽 섞이니 발음도 분명하지 않아 이상하게 들렸다. 그런 이유로 반승제는 두 사람이 왜 싸우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여러 외국어를 거뜬히 구사하는 그였지만, 성혜인이 하는 말만 어렴풋이 들릴 뿐 임남호의 말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복도 밖.성혜인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외삼촌 외숙모만 아니었으면 제가 이럴 일도 없거든요?”28살이나 된 남자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직장 하나 찾지 못한 데다가, 고객 돈 몇 천만 원을 빼돌리다니. 그것으로 모자라 도박으로 2억을 탕진해 부모님이 사채를 갚아주는 삶을 사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을까?성혜인은 임남호를 잡아당기며 전화를 받았다.“외삼촌.”하지만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임동원이 아닌 이소애였다.이소애의 갈라지는 목소리에서 묵직한 피로가 느껴졌다.“혜인아, 외숙모도 너에게 이러고 싶지 않지만... 정말 어쩔 수 없어서 전화했어. 반 사장님 연락처도 없는데 경찰은 네 올케언니를 못 풀어준다고 하네. 그 큰돈을 도저히 마련할 수가 없는 상황이야. 우리 집 곧 철거하잖아. 이웃들 집을 좀 사려고 네 외삼촌이랑 친척들한테 돈을 빌렸어. 그걸로 일부를 좀 메꿔보려 했는데, 철거 소식에 그 집 자녀들이 찾아와서 외삼촌 다리를 부러뜨리고 머리에 피까지 흘려서 지금 병원에서 응급조치하는 중이야. 흑흑...
처치를 마친 의사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준 후 자리를 떠났다.성혜인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임남호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반승제에게 향했다.“대표님. 자동차를 파손한 그 여자, 기억하시나요? 제 올케언니요.”반승제는 머릿속에 심술 가득한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자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응.”성혜인은 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아 시선을 떨궜다.“16억은 제가 갚을게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일단 제 인건비에서 공제해 주시겠어요? 부족한 부분은 천천히 나눠서 갚을게요. 가능할까요?”이번 사업 건의 디자인 비용은 분명 수억 원일 것이다. 반승제가 통 크게 준다면 10억까지도 받을 수 있다.네이처빌리지의 별장은 그렇게까지 크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프리미엄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주하기 편한 곳이다.반승제가 그곳에서 장기적으로 거주할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성혜인도 더욱 심혈을 기울이고 있기에 반승제도 디자인 비용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반승제가 기꺼이 바가지를 쓰겠다고 나서지 않는 이상 16억까지는 무리다.반승제는 한동안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혜인도 난처했다. 지난번에는 하진희가 꼴사나운 짓을 한 게 사실이었으니 말이다.“대표님, 이자 더해서 갚겠습니다.”반승제는 손바닥에 난 상처를 바라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16억이면, 하루 이자가 얼마인지 알아?”결코 적지 않다는 건 성혜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성휘가 준 카드가 있기는 했지만, 그 안에는 용돈으로 넣어준 2억 밖에 없었다. 게다가 성휘가 입원해 있을 때 가지고 있던 카드를 성혜인에게 건넨 것이었다. 그러니 한도 높은 카드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알아요.”“원래 이렇게 다른 사람이 사고 친 일 수습하는 게 취미인가?”반승제는 병상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키며 다친 손을 움직였다. 아직 통증이 있는지 미간에 반응이 있었다.성혜인의 행동이 너
무슨 일이든 다 한다?언제든지?하루 세 끼 식사를 BH그룹으로 갖다준다?어느 것 하나 반승제에게 낯선 말은 없었다.하지만 곁눈질로 본 성혜인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역력했다. 어떻게든 보상하겠다는 생각으로 한 말이 분명했다.문 앞에 서 있던 임남호는 그런 비굴한 성혜인의 모습을 봐줄 수 없었다.성혜인은 제원대학을 졸업한 인재다. 남자가 아무리 부자라 해도 이렇게 굴욕적으로 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혜인아, 뭐 하는 거야? 최고 명문대까지 나온 애가 가정부를 자처하겠다고?”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뱉는 임남호에 성혜인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반승제는 임남호가 저렇게 성을 내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굴욕’이라는 단어는 정확히 들었다.애초에 성혜인이 제시한 조건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임남호의 말을 듣고 난 후, 반승제는 다친 손목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어느 호텔인지 알고 있지?”호텔에서 마주친 적이 있으니 모를 리 만무했다.성혜인은 지난번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얼굴을 붉혔다.그때 일이 다시 생각나니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성혜인은 차마 반승제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네.”“BH그룹으로 올 것 없어. 밤 9시에 호텔로 가져다줘.”성혜인은 사실 의구심이 들었다. 반태승이 언제 찾아올지 몰라 포레스트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이 왜 또 호텔로 가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물어볼 입장이 되지 않으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알겠습니다, 대표님.”임남호는 어금니를 꾹 깨물며 성혜인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반승제를 직시했다.하지만 180cm인 임남호가 187cm인 반승제와 눈을 맞추려면 조금은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이미 기 싸움으로 반은 지고 들어가는 셈이다.“명심해. 아무리 회사 대표라고 해도 혜인이를 괴롭힐 수는 없어. 우리 집에서 가장 성공한 아이라고! 제원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잔치까지 벌일 정도였으니까.”임
“그쪽 길에서 마주친 적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쪽에 분명 집이 있을 거라 생각했죠.”성혜인은 극적으로 변명거리가 떠올랐다. 그제야 반승제는 성혜인이 다리를 다쳤던 일이 생각났다.‘근데 방금 병원에서 따로 치료를 안 받은 것 같은데...’성혜인은 여태 불편한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참고 있는 건가?’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성혜인은 엑셀을 밟을 때마다 다리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반승제도 자신 때문에 이렇게 크게 다쳐 파티에도 가지 못했다는 것에 마음이 쓰였다.어떤 식으로든 반승제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대표님, 정확히 어느 동에 사시는지는 잘 몰라서요. 이따가 길 좀 알려 주시겠어요?”성혜인은 끝까지 모른 척을 했다.뒷자석에 앉아있던 반승제는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성혜인은 뭔지 모를 따가운 시선이 뒤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통증 때문에 손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포레스트를 발견하자 또다시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포레스트 앞에 멈춰 선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백미러를 보는 순간 반승제와 눈이 마주쳤다.반승제의 검은 동공이 조금 더 짙어졌다.“왜 여기에 멈춘 거야?”성혜인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에 등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다리가 아파서 좀 문지르려고요.”“아.”반승제는 눈을 희미하게 뜨며 감탄사를 툭 내뱉었다.‘천하무적인 줄 알았는데, 아픈 걸 알긴 하네.’하지만 너무나 절묘하게도, 멈춰 선 곳은 다름 아닌 포레스트 입구였다.유경아는 반승제의 차를 발견하고 급히 마중을 나왔다.“대표님, 파티는 끝나셨나요?”유리창 때문에 아직 성혜인을 발견하지 못했다.반승제는 앉은 자리에서 창문을 살짝 내리고 ‘네’하고 답했다.유경아는 뭔가 이상했다.“사모님과 같이 안 오셨어요?”성혜인을 언급하는 순간, 반승제의 미간에서 짜증이 느껴졌다.“네. 오늘 집에 안 들어올 거니까 마중 안 나오셔도 됩니다.”유경아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반승제는
반승제는 눈썹을 들썩였다. 성혜인이 너무나도 과묵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 순간이었다.“응.”성혜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감동 그 자체였다.“네. 시간 맞춰 올게요.”진통 스프레이를 뿌리고 나니 발목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성혜인은 고개를 숙여 구급상자를 정리한 후 현관 수납장에 가져다 두었다.닫히는 문틈 사이로 성혜인의 목소리가 전해졌다.“그럼 일찍 쉬세요.”반승제의 얼굴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먹먹하면서도 답답한 느낌.반승제는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 같았다.하지만 넥타이가 손바닥의 상처를 쓸면서 통증이 올라와 미간을 좁혔다.‘어차피 별로 친하지 않은 여자일 뿐이야.’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성혜인은 반승제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 리 만무했다. 그녀는 황급히 외삼촌의 가정사를 해결하고자 서천으로 향했다.하지만 임남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에 화가 솟구쳤다.성혜인은 관자놀이가 얼얼할 정도로 화가 났다. 하지만 이 멍청한 사촌 오빠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서천에 도착한 그녀는 하루 정도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며칠 뒤면 하진희를 빼낼 수 있다며 이소애를 위로했고, 병원에 치료비를 지불하기도 했다. 임동원의 응급 치료가 끝난 걸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피곤한 몸을 이끌고 포레스트 펜션으로 돌아왔다.하지만 성혜인을 짓누르는 건 반드시 갚아야 하는 반승제의 16억이었다.성혜인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쉴 새도 없었다. 벌써 저녁 6시였다. 그녀는 급히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피곤했던 그녀는 모과를 자르다 하마터면 손을 벨 뻔했다.옆에 있던 유경아가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사모님. 드시고 싶은 국이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할게요.”성혜인은 몰려오는 졸음에 눈조차 뜰 수 없었다. 결국 유경아의 만류에 칼을 내려놓았다.“모과를 넣은 갈비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