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한은 반승제의 눈길에서 어딘가 불편함을 느꼈다. 그래서 일부러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페니 씨, 많이 놀라셨을 텐데 제가 병원까지 모셔다드릴까요?”“낯빛이 좋지 않은데 약이라도 사 올까요?”신이한의 관심에 성혜인은 거절하기도 어려워졌다. 이미 신이한은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기로 약속했고 또 비밀도 지켜주겠다고 했었으니. “신 대표님, 전 괜찮아요.”반승제의 숨소리가 더욱 차가워졌지만 뭐라고 입을 열지도 않았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성혜인이 먼저 걸어 나왔다. 반승제는 그 뒤에서 걸어 나오며 신이한을 그대로 지나쳤다. 신이한도 반승제와 스쳐 지나가 와 성혜인 앞에 왔다. “이것 봐요, 낯빛이 창백해져서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성혜인은 신이한이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몰랐다. 옆의 반승제야 말로 눈썹을 찌푸렸지만 흔들다리 효과라고 생각하며 돌아섰다. 온시환은 반승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얘기했다. “놀라라, 엘리베이터는 왜 갑자기 오늘 밤에 고장이 나서... 가자, 옆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그리고 또 옆의 성혜인을 보며 얘기했다. “페니 씨도 괜찮으니 다행이에요.”성혜인은 겨우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전 괜찮아요.”그들은 옆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신이한은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와 조희준의 사업을 취소했어요. 아마도 다시 페니 씨를 찾아올 겁니다.”하지만 성혜인은 더 이상 조희준과 함께 사업하기 싫었다. 만약 조희준이 다음 사람을 찾은 후 그녀에게 원인을 알려줬었으면 그녀가 이렇게 매달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업을 하면서 적자생존의 룰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조희준은 HS그룹과도 한배를 타고 싶었고 성혜인한테는 계속 감추기만 했다. 두 사람은 3년이나 같이 일해왔는데 성혜인은 인제야 조희준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네, 저는 조 대표님하고는 다시 사업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회사를 알아볼 거예요.”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
성혜원은 더욱 긴장했다. 아주 오래전에 반승제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반승제는 사람들 사이에 서있었는데 길게 뻗은 눈썹 아래 두 눈이 아름답게 휘어졌었다. 옆의 사람과 얘기하던 중이었는데 몸에 딱 맞게 수선된 정장과 그의 자태에서 기품이 흘러넘쳤다. 지금 성혜원은 처음으로 그의 앞에 나섰다. 너무 긴장되어서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3년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이 사람을 좋아했다. 그녀는 재경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알았다. 반승제. 그 후에는 어쩌다 보니 성혜원의 형부가 되었지만 괜찮았다. 두 사람은 이혼할 사이니까. 반승제는 성혜원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왜 저를 찾아온 거죠?”성혜원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불안함에 두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그저 반 대표님이 여기 계신다고 하니...”반승제의 낯빛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날 미행했어요?”성혜원의 눈에 담은 감정이 너무도 분명해서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이미 아버님께 말을 전했으니 다른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성혜원은 그 자리에 선 채 낯빛이 파리해졌다. 하지만 또 기뻐하며 생각했다. 반승제는 성혜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좋아한다면 성씨 가문을 이렇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둘이 같은 침대에서 밤을 보냈다고 해도 반승제는 성혜인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것이었다. 성혜인은 시선을 내리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질투심에 심장이 아파졌다. 오랫동안 짝사랑 해온 사람이 성혜인과 관계를 했었다니. 하지만 괜찮다, 성혜원에게도 기회가 있었다. 반승제는 이미 차에 탔고 온시환은 같이 그 차에 타서 고개를 저었다. “혹시 이분이 성씨 그분?”보통 사람들은 다 그쪽으로 생각할 것이었다. 성혜원이 나타난 시기가 딱 맞춤했을뿐더러 다른 말도 하지 않았으니. 도대체 그 여자가 할아버지한테 무슨 짓을 해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대단하게 포장하여 칭찬하는 것인지. 온시환은 눈썹을 까딱거리며 곧이곧대로 얘기했다. “윤단미보다 많이 떨어지
성혜인은 이곳에서 밤새워 기다렸다. 그런데 돌아오는 질문이 이런 것이라니.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 한편이 시큰거리는 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성휘의 연이은 기침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 성휘의 기침이 점점 심해졌다. 성혜인이 종이를 건네주자 하얀 종이에 피가 살짝 튀어있었다. 성휘 본인도 보고 놀란 모양인지 미간이 좁혀졌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혜인아, 네가 반승제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알아. 예전에 대학에 있을 때 남친이 있지 않았던가?”성혜인은 머릿속에 핏자국 생각으로 가득해서 성휘의 말에 반응하지 못했다. 의사도 성휘한테 비밀로 하고 있으니 성휘는 계속 자신이 회사에 돌아와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성휘는 성혜인이 대답하지 않자 살짝 후회되는 마음으로 얘기했다. “다 내 탓이다. 회사는 내가 하나하나 쌓아 올린 것인데 지금 이 지경까지 왔으니 손을 놓기도 어려워서 반승제와 혼인을 맺게 했다. 게다가 반 회장님이 너를 꽤 좋아하는 눈치길래 시집가도 괜찮을 줄 알았다. 제원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가 반승제와 엮이려고 노력하는지 너도 알잖냐. 반승제가 내 사위라니, 난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게다.”“아빠!”성혜인은 그의 말을 막고 싶었다. '죽는다'는 단어를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느 날 버티지 못해서 회사가 망하더라도 너는 뒷배가 있으니 괜찮을 거다. 요 며칠 사람을 시켜 10%의 지분을 네게로 넘기마. 소윤 이모와 더 이상 이걸로 싸우지 말거라.”병 주고 약 주는 것이 바로 성휘가 자주 쓰는 방법이었다. 성혜인은 성휘를 완전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남은 날이 얼마 없었으니. “혜인아, 반승제와 잘 지내려고 해봐라. 네 대학 때의 남자친구는 어디 출신인지도 얘기해주지 않았으니 그게 어떻게 진심으로 널 좋아한 것이겠니.”성혜인은 그저 피곤함을 느껴 대답하고 그대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옆의 허진이 가만히 서 있다가 빗소리를 듣고 물었다. “혜인
반승제에게 실례가 될까 봐 몸을 돌려 재채기한 성혜인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비에 젖어서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고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었으며 속눈썹에도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얇게 입은 옷이 다 젖어 몸에 붙는 바람에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성혜인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눈을 비볐다. 반승제의 차가 아직도 출발하지 않자 예의상 말을 건넸다. “반 대표님, 야근하세요?”반승제는 확실히 야근 중이었다. 내일 큰 저택에서 연회가 있었기에 무조건 참가해야 했다. 그래서 회의를 앞당겨서 방금 끝냈다. 그는 성혜인인 주동적으로 차에 타도 되냐고 물을 줄 알았다. 이곳에선 택시를 잡기도 어렵고 그녀는 가방과 핸드폰도 못 챙긴 상태니까. 반승제의 차가 2분간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뒤의 차들이 조급해서 클락션을 울릴 때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성혜인도 그저 웃으며 고객을 대하듯 그를 보았다. 반승제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자기도 몰랐다. “집이 어딘데.”딱딱한 말투와 표정에서 냉랭함이 느껴졌다. 성혜인은 성씨 저택에 가서 서류를 챙겨야 한다. 만약 반승제가 그녀를 태워서 성씨 저택에 도착한다면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성혜인은 이미 몸이 다 젖어서 차에 탄다면 차를 더럽힐 것이었다. “가까운 곳에 있어요.”반승제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처음으로 여자한테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꺼낸 것인데 그마저도 거절당했다. 진짜 온시환의 말대로 밀당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반승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차 문을 열었다. 성혜인은 반승제가 차에 타라는 뜻인 줄 알고 덜컥 겁이 났다. 거절할 핑곗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 문에서 은색의 손잡이가 튀어나왔다. “우산이다. 쓰고 가.”성혜인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은색 손잡이를 건네받았다.“감사합니다, 반 대표님. 나중에 꼭 돌려드리겠습니다.”반승제는 그제야 성혜인이 지금까지 그를 '반 대표님'이라고 불러왔다는 것이 떠올랐다. 예의 있
성혜인은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소윤이 어두운 안색으로 소파에 앉아있었다.소윤의 피부는 나이에 맞지 않게 아주 깨끗했다. 안 그러면 성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고, 성한 같은 아들을 데리고 성씨 집안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소윤은 지금도 반짝이는 눈으로 소파에 앉아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소윤에게 왜 오늘 병원으로 가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집에서 쉰다고 해서 불만 있을 사람은 없었기에 그냥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문밖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성혜인은 방금 전의 냄새가 떠오르면서 또다시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성한이었다.성한은 금방 회사에서 돌아왔는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는 음흉한 눈빛으로 성혜인의 몸매를 훑어봤다. 하지만 금세 눈빛을 숨기고 찬란하게 웃으며 인사했다.“혜인아, 오늘은 어떻게 밤에 돌아왔어?”“네.”예나 지금이나 성한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성혜인은 대답도 아닌 대답을 짧게 하고 그를 지나쳐 버렸다.성한은 코끝에서 맴도는 성혜인의 향기에 애써 본능을 억누르며 그녀에게 말했다.“너 차 안 갖고 왔지? 밖에 차가 안 보이던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까?”“됐어요.”“아무리 그래도 오빠라고 불러주지 그래.”성혜인은 이미 멀어져 갔고 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곧 몸을 돌려 거실로 들어간 그는 이상한 냄새를 맡고 얼굴을 찡그렸다.“앞으로는 조심 좀 해요. 그러다 들키면 어떡하려고 그래요?”성한의 말을 들은 소윤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걔가 갑자기 돌아올 줄 난들 어떻게 알았겠어?”성한은 정장 재킷을 벗어 팔에 걸쳤다.“남자를 만나고 싶으면 밖에서 만나요. 안 그래도 몸 안 좋은 사람이 엄마 때문에 죽으면 어떡해요? 지금 죽으면 지분이고 뭐고 전부 성혜인 앞으로 간단 말이에요. 제가 지분을 물려받기 전에는 조심 좀 해줘요.”“알아, 내가 잘못했어. 다
성혜인은 애초에 반승제의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문자를 보내자마자 바로 샤워하러 갔다. 얼마 후, 욕실에서 나와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반승제는 말도 없이 2천만 원을 돌려줬다.‘이건 배상이 필요 없다는 뜻인가?’반승제는 언제나 성혜인을 차갑게 대했다, 정확히는 서로 차갑게 대했다. 2천만 원을 주고받기도 껄끄러울 정도로 말이다.성혜인은 반승제의 생각을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심지어 그와 함께했던 식사 자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였다.성혜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망가진 우산을 사진 찍어 반승제에게 보내줬다. 그러고는 부동산에 연락해 은행 절차가 언제쯤 끝나는지 물어봤다. 그녀는 하루빨리 포레스트 펜션에서 나오고 싶었다. 언제까지 지금처럼 반승제를 피해 가며 살 수는 없었다.반승제도 성혜인의 두 가지 정체를 알게 된다면 빨리 쫓아내려 할 것이다. 그녀는 그래도 이 정도의 양심은 있었다.머리를 말리고 나서 사진을 확인한 반승제는 이번에도 역시 단답으로 답장했다.「그래.」「이건 혹시 배상이 필요 없다는 뜻인가요?」「응.」반승제의 차가운 태도에 성혜인도 길게 말하지 않았다.「감사합니다.」지루하기 그지없는 채팅 내용에 성혜인은 휴대전화를 한쪽에 놓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반승제는 노트북을 열고 서류를 결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의 눈빛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선물상자로 향했다. 이건 반태승이 성혜인에게 전해 주라고 했던 선물이다.반승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선물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청소하고 있던 유경아는 반승제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걸레를 내려놓았다.“대표님, 혹시 필요한 게 있으세요?”유경아는 혹시라도 백연서가 트집을 잡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깍듯한 태도로 말했다.“그 여자는 아직도 안 돌아왔어요?”반승제는 복도 끝에 있는 방을 바라보며 물었다.“네.”“이걸 전해줘요.”반승제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차가운 말투를 일관했다.유경아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무래도 비싼 물건 같은데 대표님이 직접 사모님의
결혼한 3년 동안,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아내와 만난 적 없었다. 그러니 방 안에 이상한 토이가 있어도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용기로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뒀는지는 정말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그 물건을 다시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최대한 빨리 이혼하고 싶었지만 반태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부 관계를 이어가야만 했다. 그는 애써 기분을 진정시키며 일이나 계속했다.성혜인은 자신의 얼굴 안마기가 어떤 오해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고 새로운 시공팀과 내일 밤의 파티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반승제가 개인 번호로 보냈던 문자를 바라봤다.반승제는 성혜인과 반씨 저택에서 만나려고 했지만 그녀가 지각하는 바람에 결국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한참 고민하다가 개인 번호로 예고라도 하기 위해 문자 한 줄 보냈다.「대표님, 사실 저희 이미 만난 적 있어요.」반승제는 한참이 지나서도 답장이 없었다.성혜인은 자신이 약간 우습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반승제는 일말의 호기심도 없을 정도로 명의상의 아내가 싫은 듯했다.‘됐어, 시간이 늦었으니 나머지는 내일 다시 얘기하자. 어차피 난 이미 알려주려고 노력했어.’...이튿날, 성혜인은 잠결에 전화벨 소리를 듣고 정신 차렸다. 성휘는 아침부터 전화 와서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를 준비했는지 물었다.파티에 처음 참석하는 성혜인은 당연히 드레스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고, 이제야 일어나서 드레스를 사러 가야겠다고 했다.“혜인아, 드레스는 내가 이미 포레스트 펜션으로 보냈어. 넌 그걸 입고 가면 돼.”파티 장소가 반씨 저택이었기에 성휘는 성혜인의 드레스에 많은 신경을 썼다.제원 전체를 놓고 봐도 반씨 저택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게다가 반태성도 참석하는 자리여서, 이는 성혜인을 사람들에게 알릴 최적의 기회였다.“난 몸이 안 좋아서 병원 밖으로 못 나갈 것 같구나. 괜히 파티에 참석했다가 회장님의 눈에 나면 안 되니 오늘은 네가 알아
“사모님, 혹시 사라진 물건이라도 있어요?”유경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침실을 두리번거렸다.“아니에요, 그냥 책 위치가 달라져서요.”성혜인의 말을 들은 유경아는 드디어 한시름 놓고 식사를 차리러 갔다.성혜인은 반승제가 갖고 왔다는 선물상자를 열어봤다. 상자 안에는 옥으로 만든 팔찌가 들어 있었다. 반태승이 준비한 물건이니 당연히 비쌀 것 같아서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반태승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고 휴대전화 건너편에서는 반태승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혜인아, 네 아버지는 좀 어떻냐?”반태승은 성혜인에게 진심으로 잘해 줬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했던 거짓말과 사인했던 계약서만 생각하면 죄책감이 들었다.“아버지는 많이 좋아졌어요. 저 방금 할아버지께서 주신 선물을 봤어요. 비싼 팔찌 같은데 정말 고마워요.”“내가 승제 놈한테 문병을 가라고 이르기는 했지만 갔는지 모르겠구나.”반태승은 반승제의 말을 믿을 수 없어 성혜인에게 간접적으로 물었다.“갔었어요. 승제 씨가 많이 도와주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만족스러운 대답에 반태승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오늘 밤 팔찌를 끼고 나오거라, 내 잘 어울리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구나. 그리고 너를 사람들한테 소개해 줘야겠다. 무식한 놈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리지 못하게끔 말이다.”반태승의 말에 감동한 성혜인은 눈물을 글썽였다.“알겠어요.”“그리고 두 사람 꼭 잘 지내야 한다. 내가 증손주를 볼 날만을 기다리고 있어.”“저랑 대...”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대표님이라고 하려다 말고 말을 고쳤다.“저희도 노력하고 있어요. 근데 제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서 시간이 조금 걸리네요.”하나의 거짓말은 수많은 거짓말을 낳기 마련이다.“괜찮아, 나도 그리 급한 것은 아니니. 둘이 노력만 하고 있으면 됐지.”성혜인은 안부의 말을 몇 마디 더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팔찌를 바라봤다. 이는 임경헌의 어머니가 선물했던 팔찌와 똑같은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성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