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에게 실례가 될까 봐 몸을 돌려 재채기한 성혜인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비에 젖어서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고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었으며 속눈썹에도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얇게 입은 옷이 다 젖어 몸에 붙는 바람에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성혜인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눈을 비볐다. 반승제의 차가 아직도 출발하지 않자 예의상 말을 건넸다. “반 대표님, 야근하세요?”반승제는 확실히 야근 중이었다. 내일 큰 저택에서 연회가 있었기에 무조건 참가해야 했다. 그래서 회의를 앞당겨서 방금 끝냈다. 그는 성혜인인 주동적으로 차에 타도 되냐고 물을 줄 알았다. 이곳에선 택시를 잡기도 어렵고 그녀는 가방과 핸드폰도 못 챙긴 상태니까. 반승제의 차가 2분간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뒤의 차들이 조급해서 클락션을 울릴 때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성혜인도 그저 웃으며 고객을 대하듯 그를 보았다. 반승제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자기도 몰랐다. “집이 어딘데.”딱딱한 말투와 표정에서 냉랭함이 느껴졌다. 성혜인은 성씨 저택에 가서 서류를 챙겨야 한다. 만약 반승제가 그녀를 태워서 성씨 저택에 도착한다면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성혜인은 이미 몸이 다 젖어서 차에 탄다면 차를 더럽힐 것이었다. “가까운 곳에 있어요.”반승제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처음으로 여자한테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꺼낸 것인데 그마저도 거절당했다. 진짜 온시환의 말대로 밀당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반승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차 문을 열었다. 성혜인은 반승제가 차에 타라는 뜻인 줄 알고 덜컥 겁이 났다. 거절할 핑곗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 문에서 은색의 손잡이가 튀어나왔다. “우산이다. 쓰고 가.”성혜인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은색 손잡이를 건네받았다.“감사합니다, 반 대표님. 나중에 꼭 돌려드리겠습니다.”반승제는 그제야 성혜인이 지금까지 그를 '반 대표님'이라고 불러왔다는 것이 떠올랐다. 예의 있
성혜인은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소윤이 어두운 안색으로 소파에 앉아있었다.소윤의 피부는 나이에 맞지 않게 아주 깨끗했다. 안 그러면 성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고, 성한 같은 아들을 데리고 성씨 집안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소윤은 지금도 반짝이는 눈으로 소파에 앉아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소윤에게 왜 오늘 병원으로 가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집에서 쉰다고 해서 불만 있을 사람은 없었기에 그냥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문밖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성혜인은 방금 전의 냄새가 떠오르면서 또다시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성한이었다.성한은 금방 회사에서 돌아왔는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는 음흉한 눈빛으로 성혜인의 몸매를 훑어봤다. 하지만 금세 눈빛을 숨기고 찬란하게 웃으며 인사했다.“혜인아, 오늘은 어떻게 밤에 돌아왔어?”“네.”예나 지금이나 성한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성혜인은 대답도 아닌 대답을 짧게 하고 그를 지나쳐 버렸다.성한은 코끝에서 맴도는 성혜인의 향기에 애써 본능을 억누르며 그녀에게 말했다.“너 차 안 갖고 왔지? 밖에 차가 안 보이던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까?”“됐어요.”“아무리 그래도 오빠라고 불러주지 그래.”성혜인은 이미 멀어져 갔고 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곧 몸을 돌려 거실로 들어간 그는 이상한 냄새를 맡고 얼굴을 찡그렸다.“앞으로는 조심 좀 해요. 그러다 들키면 어떡하려고 그래요?”성한의 말을 들은 소윤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걔가 갑자기 돌아올 줄 난들 어떻게 알았겠어?”성한은 정장 재킷을 벗어 팔에 걸쳤다.“남자를 만나고 싶으면 밖에서 만나요. 안 그래도 몸 안 좋은 사람이 엄마 때문에 죽으면 어떡해요? 지금 죽으면 지분이고 뭐고 전부 성혜인 앞으로 간단 말이에요. 제가 지분을 물려받기 전에는 조심 좀 해줘요.”“알아, 내가 잘못했어. 다
성혜인은 애초에 반승제의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문자를 보내자마자 바로 샤워하러 갔다. 얼마 후, 욕실에서 나와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반승제는 말도 없이 2천만 원을 돌려줬다.‘이건 배상이 필요 없다는 뜻인가?’반승제는 언제나 성혜인을 차갑게 대했다, 정확히는 서로 차갑게 대했다. 2천만 원을 주고받기도 껄끄러울 정도로 말이다.성혜인은 반승제의 생각을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심지어 그와 함께했던 식사 자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였다.성혜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망가진 우산을 사진 찍어 반승제에게 보내줬다. 그러고는 부동산에 연락해 은행 절차가 언제쯤 끝나는지 물어봤다. 그녀는 하루빨리 포레스트 펜션에서 나오고 싶었다. 언제까지 지금처럼 반승제를 피해 가며 살 수는 없었다.반승제도 성혜인의 두 가지 정체를 알게 된다면 빨리 쫓아내려 할 것이다. 그녀는 그래도 이 정도의 양심은 있었다.머리를 말리고 나서 사진을 확인한 반승제는 이번에도 역시 단답으로 답장했다.「그래.」「이건 혹시 배상이 필요 없다는 뜻인가요?」「응.」반승제의 차가운 태도에 성혜인도 길게 말하지 않았다.「감사합니다.」지루하기 그지없는 채팅 내용에 성혜인은 휴대전화를 한쪽에 놓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반승제는 노트북을 열고 서류를 결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의 눈빛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선물상자로 향했다. 이건 반태승이 성혜인에게 전해 주라고 했던 선물이다.반승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선물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청소하고 있던 유경아는 반승제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걸레를 내려놓았다.“대표님, 혹시 필요한 게 있으세요?”유경아는 혹시라도 백연서가 트집을 잡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깍듯한 태도로 말했다.“그 여자는 아직도 안 돌아왔어요?”반승제는 복도 끝에 있는 방을 바라보며 물었다.“네.”“이걸 전해줘요.”반승제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차가운 말투를 일관했다.유경아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무래도 비싼 물건 같은데 대표님이 직접 사모님의
결혼한 3년 동안,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아내와 만난 적 없었다. 그러니 방 안에 이상한 토이가 있어도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용기로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뒀는지는 정말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그 물건을 다시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최대한 빨리 이혼하고 싶었지만 반태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부 관계를 이어가야만 했다. 그는 애써 기분을 진정시키며 일이나 계속했다.성혜인은 자신의 얼굴 안마기가 어떤 오해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고 새로운 시공팀과 내일 밤의 파티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반승제가 개인 번호로 보냈던 문자를 바라봤다.반승제는 성혜인과 반씨 저택에서 만나려고 했지만 그녀가 지각하는 바람에 결국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한참 고민하다가 개인 번호로 예고라도 하기 위해 문자 한 줄 보냈다.「대표님, 사실 저희 이미 만난 적 있어요.」반승제는 한참이 지나서도 답장이 없었다.성혜인은 자신이 약간 우습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반승제는 일말의 호기심도 없을 정도로 명의상의 아내가 싫은 듯했다.‘됐어, 시간이 늦었으니 나머지는 내일 다시 얘기하자. 어차피 난 이미 알려주려고 노력했어.’...이튿날, 성혜인은 잠결에 전화벨 소리를 듣고 정신 차렸다. 성휘는 아침부터 전화 와서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를 준비했는지 물었다.파티에 처음 참석하는 성혜인은 당연히 드레스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고, 이제야 일어나서 드레스를 사러 가야겠다고 했다.“혜인아, 드레스는 내가 이미 포레스트 펜션으로 보냈어. 넌 그걸 입고 가면 돼.”파티 장소가 반씨 저택이었기에 성휘는 성혜인의 드레스에 많은 신경을 썼다.제원 전체를 놓고 봐도 반씨 저택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게다가 반태성도 참석하는 자리여서, 이는 성혜인을 사람들에게 알릴 최적의 기회였다.“난 몸이 안 좋아서 병원 밖으로 못 나갈 것 같구나. 괜히 파티에 참석했다가 회장님의 눈에 나면 안 되니 오늘은 네가 알아
“사모님, 혹시 사라진 물건이라도 있어요?”유경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침실을 두리번거렸다.“아니에요, 그냥 책 위치가 달라져서요.”성혜인의 말을 들은 유경아는 드디어 한시름 놓고 식사를 차리러 갔다.성혜인은 반승제가 갖고 왔다는 선물상자를 열어봤다. 상자 안에는 옥으로 만든 팔찌가 들어 있었다. 반태승이 준비한 물건이니 당연히 비쌀 것 같아서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반태승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고 휴대전화 건너편에서는 반태승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혜인아, 네 아버지는 좀 어떻냐?”반태승은 성혜인에게 진심으로 잘해 줬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했던 거짓말과 사인했던 계약서만 생각하면 죄책감이 들었다.“아버지는 많이 좋아졌어요. 저 방금 할아버지께서 주신 선물을 봤어요. 비싼 팔찌 같은데 정말 고마워요.”“내가 승제 놈한테 문병을 가라고 이르기는 했지만 갔는지 모르겠구나.”반태승은 반승제의 말을 믿을 수 없어 성혜인에게 간접적으로 물었다.“갔었어요. 승제 씨가 많이 도와주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만족스러운 대답에 반태승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오늘 밤 팔찌를 끼고 나오거라, 내 잘 어울리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구나. 그리고 너를 사람들한테 소개해 줘야겠다. 무식한 놈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리지 못하게끔 말이다.”반태승의 말에 감동한 성혜인은 눈물을 글썽였다.“알겠어요.”“그리고 두 사람 꼭 잘 지내야 한다. 내가 증손주를 볼 날만을 기다리고 있어.”“저랑 대...”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대표님이라고 하려다 말고 말을 고쳤다.“저희도 노력하고 있어요. 근데 제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서 시간이 조금 걸리네요.”하나의 거짓말은 수많은 거짓말을 낳기 마련이다.“괜찮아, 나도 그리 급한 것은 아니니. 둘이 노력만 하고 있으면 됐지.”성혜인은 안부의 말을 몇 마디 더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팔찌를 바라봤다. 이는 임경헌의 어머니가 선물했던 팔찌와 똑같은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성혜인
반승혜는 축 처져 있다가도 금세 환하게 웃으며 겨울이를 바라봤다.“겨울이가 그 강아지랑 너무 닮았어요. 페니 씨, 어디 살아요? 저 앞으로 겨울이랑 같이 놀아도 돼요?”반승혜는 성혜인이 걸어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녀는 제원에서도 비싸기로 유명한 동네에서 나왔다. 이 동네는 땅값이 금값과 마찬가지였고,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페니 씨 집안이 생각보다 좋은가 보네.’성혜인은 반승혜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바로 설명했다.“저는 근처에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이 동네가 산책하기 좋다는 말을 들은 적 있거든요. 그리고 저 요즘 이사를 준비하고 있어서 새로운 집 주소는 제대로 결정되고 알려줄게요.”반승혜는 별 의심 없이 겨울이와 놀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뒤에서 그녀가 그리다 만 그림을 바라봤다. 보아하니 그녀도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그림은 안 그려요?”반승혜는 약간 짜증 섞인 얼굴로 겨울이를 놔주고 붓을 들었다.“안 그래도 저녁에 시간이 없어서 빨리 그려놔야 해요. 내일이 제출 마지막 날이거든요.”“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리고 생일 축하해요, 승혜 씨. 선물은 다음에 만날 때 줄게요.”생일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선물 준비는 당연하였다. 성혜인은 자신이 공부하면서 만들어 놓은 모든 필기에서 중요한 것만 따로 정리해 선물로 만들었다. 반승혜에게는 모자란 물건이 없었으니, 주얼리 같은 걸 선물하면 오히려 식상할 것 같았다.“고마워요. 너무 비싼 걸 준비할 필요는 없어요. 제가 딱히 모자란 물건이 없거든요.”“승혜 씨가 무조건 좋아할 거니까 기대해요.”성혜인은 혹시라도 또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포레스트펜션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반승제의 차가 그녀를 유유히 스쳐 지나가 펜션을 향해 갔다.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며 발걸음을 멈추더니, 겨울이를 데리고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그녀는 반승제가 죄를 물으러 온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유경아는 반승제가 성혜인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급했다. 그녀는 속으로 성혜인이 빨리 돌아왔으면 했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은 부부이니, 지금처럼 어색하게 지내는 것은 보기 좋지 않았다.게다가 반승제는 일분일초 바쁘게 지내는 사람이었고, 너무 오래 기다리다가 안 그래도 나쁘던 감정이 더 틀어지면 어떡하나 걱정되기도 했다. 자칫 백연서가 또다시 찾아올 수도 있고 말이다.유경아는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몰래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사모님, 대표님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겨울이를 밖에 두고 일단 들어오시는 건 어때요?”만약 겨울이를 데리고 들어온다면 반승제에게 들킬 수밖에 없게 된다.성혜인은 반승제가 죄를 물으러 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지금으로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이 계약을 해지고 대외로 선포하는 것이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금세 어차피 이혼할 마당에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기에, 반승제가 화를 내도 진심을 다해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겨울이가 포레스트편센에서 지내고 있는 건 절대 들키면 안 됐다. 그녀는 반승혜를 찾아가 겨울이를 잠깐 부탁했다. 급할 일만 처리하고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개털 알레르기가 있는 반승제 앞에 개를 데려가는 것은 안 그래도 바닥 치는 호감도를 더 깎기만 할 뿐이었다.반승혜는 물론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성혜인은 길에서 20분이나 낭비하고 포레스트펜션을 향해 달려갔다. 혹시라도 반승제가 기다림에 지칠까 봐서 말이다.반승제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 20분을 기다린 것은 이미 그의 최선이었다. 그는 사업 파트너조차 5분 이상 기다리지 않는데, 성혜인은 이미 두 번이나 그를 바람 맞혔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이때 황급하게 달려오고 있던 성혜인이 반승제의 차를 발견하고 약간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잠깐 정신을 판 사이에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리며
성혜인은 문틀을 짚고 겨우 차에 올라탔다. 무릎 통증과 발목 통증이 심하기는 했지만 반승제도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짓기만 했다.“고마워요, 대표님.”공기 중에는 피비린내가 서서히 퍼져나갔다.성혜인은 반승제에게 방해가 될까 봐 말없이 조용히 구석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반승제의 시선은 차에 올라타서부터 그녀의 무릎에 집중되어 있었다.성혜인의 무릎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고 발목은 퉁퉁 부어있었다. 다른 여자라면 진작에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테지만 그녀는 인상만 찡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차는 반승혜의 집을 지나쳐 갔다. 겨울이의 존재감은 아주 강했고 차로 지나가면서도 반승혜와 놀고 있는 그가 한눈에 보였다.반승제가 돌연 물었다.“아까는 어디로 그렇게 달려가고 있었던 거지?”반승제는 강아지와 산책하고 있던 성혜인이 왜 갑자기 강아지를 반승혜에게 맡기고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도 그의 첫 번째 질문에 답을 주지 않았다.‘페니의 집은 꽤 먼 곳에 있지 않았나?’반승제의 의아함을 눈치챘는지, 성혜인은 차분한 말투로 늘 그랬듯이 에둘러 설명했다.“이 동네 산책로가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요. 강아지를 키우기도 너무 좋고요. 저는 이 근처의 윌셋집에 살고 있어요. 비록 금방 또 이사하겠지만.”‘월세?’반승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성혜인의 의뢰비는 건당 몇억 원은 했다. 제원의 집값이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월셋집에 살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결혼도 했기에 아직도 내 집 마련을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저 방금 전에 대표님이 오는 것을 봤어요. 이곳에서 다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성혜인은 교묘하게 화제를 돌려 주도권을 잡았다.“그러게.”반승제는 짧게 답했다. 그녀는 포레스트펜션에 살고 있는 여자를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얼마 후, 병원 앞에 도착한 성혜인은 절뚝거리며 혼자 차에서 내려왔다. 한쪽 다리 전체가 고통에 휩싸인 채로 중심을 잡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
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샤워를 마치고 다시 한번 세수를 마치고 나서야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설우현은 이미 떠난 모양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아침 일찍 설기웅에게 불려가 두 아이를 돌보러 갔다고 한다.순식간에 할 일이 없어진 설연주는 그저 별장 안에 앉아 바깥에 활짝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저녁, 방금 해열제를 먹고 다시 바라보니 정원에는 설우현의 차가 멈춰 세워져 있었다.그리고 설우현은 품에 꽃다발을 안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다정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순간,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길이 멈칫하고 설연주는 먹고 있던 과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설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설우현이 위층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다시 꽃을 안고 외출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잠깐 고민해보던 설연주는 결국 다시 올라가 설우현에게 인사를 건넸다.“오빠, 데이트하러 나가요?”설우현은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네, 좀 나아졌어요.”그러자 설우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액셀을 밟았다.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여니 대체 뭘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같은 시각, 설우현은 이미 차를 몰고 떠났고 설연주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그녀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그때,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설강민이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 어떻게 그 20억을 갚을지 생각 중이라고 한다.“명목상이지만 설연주 씨 친오빠 진짜 너무 멍청한 것 같네요. 이렇게 간단한 사기극에도 속다니... 두팔이 빌려준 20억은 이윤이 이미 30억이 됐어요. 그런데 설준석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안 하고 도리어 두팔에게 또 대출을 받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또 20억을 빌렸죠.”오번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웃음이 나왔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그럼 설강민은 지
설우현은 자신의 잡혀버린 소매와 설연주의 눈빛을 번갈아 보았다.한 치의 빛깔도 없이 캄캄하기만 했다.당황스러울 정도로 낭패한 그녀의 모습에 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나 어디 안 가. 물 따라올게.”“물 안 마셔도 돼요. 목 안 말라요.”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핏발이 보일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설우현은 이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설연주의 몸은 여전히 조금씩 떨고 있었고 설우현을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그때, 도우미 아주머니가 문밖에 찾아왔다. 설연주의 목소리가 워낙 날카로워 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자 설우현은 침대 옆에 앉은 채, 도우미에게 말을 건넸다.“미지근한 물 한 잔과 해열제 한 알 주세요.”설연주의 열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정말 의사의 말대로 너무 긴장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잠시 후, 도우미는 설우현의 말을 따라 재빨리 물을 가져다 놓고는 약을 설우현의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이윽고 설우현은 설연주의 턱을 치켜들고 약을 먹여주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입을 벌리고 있을 뿐 약을 삼키려 하지 않았다.몇 초간 머뭇거리던 설우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손끝을 그녀의 입에 넣고는 목 가장 깊은 곳에 약을 대었다.이에 설연주는 결국 마지못해 약을 삼키게 되었고 설우현은 또다시 물컵을 그녀 앞에 놓아두고 턱을 잡더니 천천히 물을 먹여주었다.물이 목구멍을 따라 흘러내리며 설연주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두 번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그렇게 물 반 컵을 마신 후에야 설우현은 물컵을 옆에 있는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이제 그만 자.”“오빠, 제발 가지 말아요.”설연주는 마치 가지 말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하여 그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하지만 설우현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그저 웃겼다. 이제 정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설우현이 정말 설연주의 오빠인지 아닌지도 아직 확실하
현재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병에 걸린 적이 몇 번 없었는데 이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건강은 점점 악화하여가기만 했다.그저 평생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남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덩달아 마음이 약해진 오번도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당부해주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 하면 안 돼요. 이번에 설우현이 날 놓아준 건 전부 서주혁의 얼굴을 봐서였다고요. 다음부터는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까 가만히 있자고요. 어차피 지금 김현서는 두팔 쪽에 있고 설강민은 사채업자들한테 걸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빚은 졌다는 사실이 설준석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찌릿찌릿 쑤시는듯한 통증에 설연주가 손을 들어 태양혈을 주물렀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설연주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오번 씨, 그거 알아요? 요즘 계속 꿈을 꾸는데 꿈만 꾸면 비싼 카펫 위에서 기어 다니는 내 모습이 보여요. 그래서 가끔 생각해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이 과연 현실일까? 갖은 노력을 다해 설씨 가문에 들어온 게 정말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였을까?”“설연주 씨...”“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요. 전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모두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정승후는 이미 무너졌으니 다음은 설강민, 그리고 다음은 김현서, 마지막은 두팔까지...”오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팔을 상대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두팔의 세력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대했으니까.“이번에는 고마웠어요. 끝까지 저 지켜줬잖아요. 앞으로 다시는 설씨 가문에 손을 대지 않을 거니까 오번 씨도 계속 저한테 소식만 전해줘요.”“그래요.”전화가 끊기고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아무리 뒤척여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우현도 언젠가 성혜인에게 생길뻔한 일이 그녀와 관련
남자가 전화를 한 상대는 오혜수였다. 지금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보스뿐이니까.전화를 받은 오혜수는 여전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오번? 너 퇴직한 거 아니니? 왜 아직도 전화해.”오번은 남자의 암호명 순위일 뿐이다. 전에 오혜수의 곁을 따라다닐 때 해킹을 담당하며 얻은 암호명이다.그 후 제원시에서 미움을 사는 바람에 플로리아로 건너와 자신의 기술로 용돈 벌이를 하는 것이다.비록 전에 충분히 많은 돈을 벌어두었지만 돈이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으니 더 벌면 안될 것도 없었다.“보스, 이번에 저를 구하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주혁과 장하리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설우현 도련님께 잡혀 왔는데 번거로우시겠지만 도련님께 전화 좀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당장 두 다리를 잃을 것 같습니다.”오번이 서주혁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설우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 일이 서주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아하니 남자는 그저 서주혁이 대신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한편, 오혜수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서주혁을 알고 있는 건 맞지만 서주혁도 아직 장하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체면을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보스, 저를 구하지 않으면 오늘 정말 다리가 부러질 겁니다.”“닥쳐. 그러게 멀쩡히 잘 있는 설씨 가문을 왜 건드려?”오혜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부잣집 자제들과 접점이 생기는 것이었다.그러나 오번 역시 상황이 급한지라 또 몇 번이나 거짓 울음을 터뜨리면서 꼭 구해주러 오라고 몇 번이고 당부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전에 제원에 있을 때 장하리의 행방을 감추는 것을 도운 적이 있기에 지금 오번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하리와 서주혁뿐이었다.설우현은 휴대폰을 낚아챈 뒤 바로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 아닌 유심히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겁에 질린 오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감히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5분 후, 누군가가 설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