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혜는 축 처져 있다가도 금세 환하게 웃으며 겨울이를 바라봤다.“겨울이가 그 강아지랑 너무 닮았어요. 페니 씨, 어디 살아요? 저 앞으로 겨울이랑 같이 놀아도 돼요?”반승혜는 성혜인이 걸어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녀는 제원에서도 비싸기로 유명한 동네에서 나왔다. 이 동네는 땅값이 금값과 마찬가지였고,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페니 씨 집안이 생각보다 좋은가 보네.’성혜인은 반승혜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바로 설명했다.“저는 근처에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이 동네가 산책하기 좋다는 말을 들은 적 있거든요. 그리고 저 요즘 이사를 준비하고 있어서 새로운 집 주소는 제대로 결정되고 알려줄게요.”반승혜는 별 의심 없이 겨울이와 놀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뒤에서 그녀가 그리다 만 그림을 바라봤다. 보아하니 그녀도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그림은 안 그려요?”반승혜는 약간 짜증 섞인 얼굴로 겨울이를 놔주고 붓을 들었다.“안 그래도 저녁에 시간이 없어서 빨리 그려놔야 해요. 내일이 제출 마지막 날이거든요.”“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리고 생일 축하해요, 승혜 씨. 선물은 다음에 만날 때 줄게요.”생일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선물 준비는 당연하였다. 성혜인은 자신이 공부하면서 만들어 놓은 모든 필기에서 중요한 것만 따로 정리해 선물로 만들었다. 반승혜에게는 모자란 물건이 없었으니, 주얼리 같은 걸 선물하면 오히려 식상할 것 같았다.“고마워요. 너무 비싼 걸 준비할 필요는 없어요. 제가 딱히 모자란 물건이 없거든요.”“승혜 씨가 무조건 좋아할 거니까 기대해요.”성혜인은 혹시라도 또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포레스트펜션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반승제의 차가 그녀를 유유히 스쳐 지나가 펜션을 향해 갔다.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며 발걸음을 멈추더니, 겨울이를 데리고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그녀는 반승제가 죄를 물으러 온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유경아는 반승제가 성혜인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급했다. 그녀는 속으로 성혜인이 빨리 돌아왔으면 했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은 부부이니, 지금처럼 어색하게 지내는 것은 보기 좋지 않았다.게다가 반승제는 일분일초 바쁘게 지내는 사람이었고, 너무 오래 기다리다가 안 그래도 나쁘던 감정이 더 틀어지면 어떡하나 걱정되기도 했다. 자칫 백연서가 또다시 찾아올 수도 있고 말이다.유경아는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몰래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사모님, 대표님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겨울이를 밖에 두고 일단 들어오시는 건 어때요?”만약 겨울이를 데리고 들어온다면 반승제에게 들킬 수밖에 없게 된다.성혜인은 반승제가 죄를 물으러 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지금으로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이 계약을 해지고 대외로 선포하는 것이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금세 어차피 이혼할 마당에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기에, 반승제가 화를 내도 진심을 다해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겨울이가 포레스트편센에서 지내고 있는 건 절대 들키면 안 됐다. 그녀는 반승혜를 찾아가 겨울이를 잠깐 부탁했다. 급할 일만 처리하고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개털 알레르기가 있는 반승제 앞에 개를 데려가는 것은 안 그래도 바닥 치는 호감도를 더 깎기만 할 뿐이었다.반승혜는 물론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성혜인은 길에서 20분이나 낭비하고 포레스트펜션을 향해 달려갔다. 혹시라도 반승제가 기다림에 지칠까 봐서 말이다.반승제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 20분을 기다린 것은 이미 그의 최선이었다. 그는 사업 파트너조차 5분 이상 기다리지 않는데, 성혜인은 이미 두 번이나 그를 바람 맞혔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이때 황급하게 달려오고 있던 성혜인이 반승제의 차를 발견하고 약간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잠깐 정신을 판 사이에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리며
성혜인은 문틀을 짚고 겨우 차에 올라탔다. 무릎 통증과 발목 통증이 심하기는 했지만 반승제도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짓기만 했다.“고마워요, 대표님.”공기 중에는 피비린내가 서서히 퍼져나갔다.성혜인은 반승제에게 방해가 될까 봐 말없이 조용히 구석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반승제의 시선은 차에 올라타서부터 그녀의 무릎에 집중되어 있었다.성혜인의 무릎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고 발목은 퉁퉁 부어있었다. 다른 여자라면 진작에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테지만 그녀는 인상만 찡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차는 반승혜의 집을 지나쳐 갔다. 겨울이의 존재감은 아주 강했고 차로 지나가면서도 반승혜와 놀고 있는 그가 한눈에 보였다.반승제가 돌연 물었다.“아까는 어디로 그렇게 달려가고 있었던 거지?”반승제는 강아지와 산책하고 있던 성혜인이 왜 갑자기 강아지를 반승혜에게 맡기고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도 그의 첫 번째 질문에 답을 주지 않았다.‘페니의 집은 꽤 먼 곳에 있지 않았나?’반승제의 의아함을 눈치챘는지, 성혜인은 차분한 말투로 늘 그랬듯이 에둘러 설명했다.“이 동네 산책로가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요. 강아지를 키우기도 너무 좋고요. 저는 이 근처의 윌셋집에 살고 있어요. 비록 금방 또 이사하겠지만.”‘월세?’반승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성혜인의 의뢰비는 건당 몇억 원은 했다. 제원의 집값이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월셋집에 살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결혼도 했기에 아직도 내 집 마련을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저 방금 전에 대표님이 오는 것을 봤어요. 이곳에서 다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성혜인은 교묘하게 화제를 돌려 주도권을 잡았다.“그러게.”반승제는 짧게 답했다. 그녀는 포레스트펜션에 살고 있는 여자를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얼마 후, 병원 앞에 도착한 성혜인은 절뚝거리며 혼자 차에서 내려왔다. 한쪽 다리 전체가 고통에 휩싸인 채로 중심을 잡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유경아는 금방 얼음을 갖고 왔고 성혜인은 약 한 시간 동안 찜질했다. 하지만 발목 통증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고, 하이힐을 신자 침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성혜인은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지만 억지로 참고 메이크업을 했다.유경아는 가슴 아픈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모님, 제가 회장님한테 사정을 설명해 드릴게요. 오늘 말고 다음에 가시는 게 어때요?”“안 돼요.”성혜인은 자신에게 그토록 잘해주는 반태승을 실망하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공항 마중도 못 가서 오늘만큼은 절대 불참할 수 없었다.메이크업을 완성한 성혜인은 반태승이 선물한 팔찌를 꼈다. 그 외의 주얼리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도도한 인상의 성혜인에게 허리선을 강조한 드레스는 아주 어울렸고 마치 겨울에 핀 한 송이의 꽃과 같았다. 거기다 눈 부신 빛을 자랑하는 옥팔찌까지 더해져 더욱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단장을 끝낸 성혜인은 바로 차에 올라탔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성휘에게서 전화 왔다. 그는 성씨 저택에 들러 성혜원도 데리고 가라고 전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혜원이는 왜 데려가요? 몸도 아픈 애가 어떻게 버티려고요.”“혜원이가 파티한다는 소리를 듣더니 가고 싶은 눈치더라. 회장님이 너를 많이 아끼시니 한 명 더 데려가도 괜찮을 거야. 병원에 누워만 있느라 파티 같은 곳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네 동생도 불쌍하잖아. 나는 바쁘니 그냥 네가 데리고 가.”성혜인은 성혜원이 좋지도 싫지도 않았기에 그냥 동의했다.차를 돌려 성씨 저택으로 가니, 성혜원은 진작에 드레스를 차려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몸이 약한 관계로 또래보다 훨씬 야위었다.소윤은 오늘 성혜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반씨 저택의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녀도 물론 참석하고 싶기는 했지만 체면을 내려놓고 성혜인에게 부탁하기는 싫었기에 성혜원이 가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성혜원이 갔다가 훌륭한 사윗감을 낚아올지 또 누가
임남호의 곁에는 갑자기 깡패 같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임남호의 어깨를 잡고 인적이 드문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성혜인은 몇 발짝 걷지도 못하고 길가의 나무를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임남호가 위험에 빠질까 봐 이를 악물고 쫓아갔다.어두운 거리에는 주먹질하는 소리와 욕설이 간간이 들려왔다.“돈은 왜 아직도 안 갚아?! 너 죽고 싶어?”“미친놈, 감히 우리를 상대로 숨바꼭질을 해?”성혜인은 골목 앞으로 오자마자 깡패들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일단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그만 해요!”깡패들은 동작을 멈추고 드레스를 차려입은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음흉한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며 하나둘씩 걸어왔다.“올~ 임남호 네가 언제부터 이런 미인이랑 알고 지냈어?”임남호는 몸을 웅크린 채로 머리를 보호하고 있었다. 살짝 머리를 들어 성혜인을 발견한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혜인이니?”임남호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 갈비뼈 몇 대가 나갔는지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아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성혜인은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임남호가 한심했다. 20대 후반에 들어선 사람이 취직하기는커녕 거지처럼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외삼촌과 외숙모를 생각해서라도 듣기 싫은 말은 삼켜버렸다.깡패들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고 성혜인은 뒷걸음질을 쳤다. 발목이 아직 아픈 데다가 하이힐까지 신고 있어서 그녀는 길가의 돌부리에 걸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이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잠시 후 걷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통증은 전해오지 않았고 한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부축해 줬다.성혜인은 머리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과 향기에 그녀는 후다닥 자세를 바로 하며 거리를 벌렸다.“대표님?”성혜인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반승제의 차는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꽤 먼 곳까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이곳
성혜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넋이 나가버렸다. 반승제는 차분하게 비수를 휘두른 사람을 발로 차버렸다.깡패들은 잘못 걸렸다는 표정으로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고 비척거리며 멀어져갔다.“대표님, 제가 병원으로 데려다줄게요.”성혜인은 떨리는 손으로 반승제의 상처를 확인했다. 하이힐을 신고 잠깐 서 있었더니, 발목이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기 시작했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하필이면 오른손을 다쳐서 한동안은 불편하게 지내게 될 것 같다. 그는 성혜인이 갑자기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서는 것을 보고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만약 반승제가 자신을 위해 다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백연서에게 갈기갈기 찢겨져서 죽겠다고 생각하며 성혜인은 맨발 투혼에 나섰다. 그녀는 오늘 반승제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말았다.성혜인은 반승제를 따라 그의 차를 향해 걸어가면서 몰래 도망가려는 임남호의 목덜미를 잡았다.“오빠도 따라와요.”임남호는 성혜인에게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반승제의 고급 외제 차를 보고 겁먹고는 감히 오르지도 못했다. 길가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던 성혜인은 그를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심인우는 반승제가 다친 것을 보고 말없이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출발했다.이쪽 길은 성혜인이 세워둔 차 때문에 길이 막히고 있었다. 그녀는 임남호를 잡으러 가느라 길가에 차를 세워도 되는지 확인도 하지 못했다.슬슬 운전자들의 욕설이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성혜원은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우리는 일단 출발하죠. 언니한테는 제가 따로 전화할게요. 다른 차를 타고 저택으로 가도 되는 거니까요.”곧 있으면 파티가 시작될 것이기에, 기사는 어쩔 수 없이 먼저 출발했다. 성혜원은 성혜인과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성혜원은 처음으로 공식적인 장소에서 반승제와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예전의 그녀는 지나가는 행인처럼 보잘것없는 존재로 멀리서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약간의 복
반승제는 입술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다치지 않은 손으로 ‘수락’ 버튼을 누르기는 했다만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때 마침 반태승이 먼저 위로의 말을 건넸다.“승제야, 잘했다. 이제는 너도 다 컸구나. 이번엔 잔소리하지 않을 테니 오늘 안 와도 된다.”반승제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반태승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예전에는 전화만 받으면 세 마디를 못 넘기고 성혜인을 언급하는 사람이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얼마 전에 성사시킨 인수 때문에 그러시나?’과거의 반태승은 BH그룹을 반승제에게 물려준 이후 계속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만 할 뿐 비즈니스계에 대한 관심이 전무했다. 편안한 노년 생활을 즐기는 중이라 할 수 있겠다.이번에 성공적으로 성사된 인수 건이 아니었다면, 무엇 때문에 반태승이 이렇게 기뻐하는 것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반승제는 자연스럽게 인수 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당연한 일을 했는 걸요. 앞으로도 노력할게요.”하지만 반태승은 그 말을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오늘 밤, 반태승은 분노를 꾸역꾸역 삼킬 생각이었다. 반승제에게 성혜인을 데리러 가라고 하니, 반승제는 정 없는 사람처럼 야근을 해야 한다고 답했기 때문이었다. 일이 며느리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가?성혜인의 정체를 사람들 앞에서 성대하게 공개할 생각이었던 반태승은 반승제와 성혜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지금까지도 제원 내에서 성혜인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만큼, 몇 년 동안 혜인이 뜻하지 않게도 우여곡절을 많이 겪게 된 것은 사실이다.반씨 집안으로 시집을 오고 난 이후에는 괴롭힘까지 당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보니 찾아오지 않는 반승제를 볼 때면 반태승은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소식을 듣고 난 후, 반승제가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승제야, 난 네가 말로만 노력한다고 하는 줄 알았다. 내가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된
감정이 격해진 임남호가 주체하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면서 복도 전체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만약 임남호가 정확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었다면, 반승제 역시 이들의 대화 내용을 듣고 성혜인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임남호 입에서 그녀의 본명이 튀어나왔으니 말이다.일찍이 자퇴한 임남호는 학업을 포기하고 지방에 있는 공사 현장을 돌았다. 이 가난한 서천을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그 과정에서 전국 각지에서 온 노동자들을 알게 되었고, 일부러 그들의 억양을 배웠다.사실 토종 사투리를 쓴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사투리가 뒤죽박죽 섞이니 발음도 분명하지 않아 이상하게 들렸다. 그런 이유로 반승제는 두 사람이 왜 싸우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여러 외국어를 거뜬히 구사하는 그였지만, 성혜인이 하는 말만 어렴풋이 들릴 뿐 임남호의 말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복도 밖.성혜인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외삼촌 외숙모만 아니었으면 제가 이럴 일도 없거든요?”28살이나 된 남자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직장 하나 찾지 못한 데다가, 고객 돈 몇 천만 원을 빼돌리다니. 그것으로 모자라 도박으로 2억을 탕진해 부모님이 사채를 갚아주는 삶을 사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을까?성혜인은 임남호를 잡아당기며 전화를 받았다.“외삼촌.”하지만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임동원이 아닌 이소애였다.이소애의 갈라지는 목소리에서 묵직한 피로가 느껴졌다.“혜인아, 외숙모도 너에게 이러고 싶지 않지만... 정말 어쩔 수 없어서 전화했어. 반 사장님 연락처도 없는데 경찰은 네 올케언니를 못 풀어준다고 하네. 그 큰돈을 도저히 마련할 수가 없는 상황이야. 우리 집 곧 철거하잖아. 이웃들 집을 좀 사려고 네 외삼촌이랑 친척들한테 돈을 빌렸어. 그걸로 일부를 좀 메꿔보려 했는데, 철거 소식에 그 집 자녀들이 찾아와서 외삼촌 다리를 부러뜨리고 머리에 피까지 흘려서 지금 병원에서 응급조치하는 중이야.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