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혜는 축 처져 있다가도 금세 환하게 웃으며 겨울이를 바라봤다.“겨울이가 그 강아지랑 너무 닮았어요. 페니 씨, 어디 살아요? 저 앞으로 겨울이랑 같이 놀아도 돼요?”반승혜는 성혜인이 걸어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녀는 제원에서도 비싸기로 유명한 동네에서 나왔다. 이 동네는 땅값이 금값과 마찬가지였고,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페니 씨 집안이 생각보다 좋은가 보네.’성혜인은 반승혜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바로 설명했다.“저는 근처에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이 동네가 산책하기 좋다는 말을 들은 적 있거든요. 그리고 저 요즘 이사를 준비하고 있어서 새로운 집 주소는 제대로 결정되고 알려줄게요.”반승혜는 별 의심 없이 겨울이와 놀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뒤에서 그녀가 그리다 만 그림을 바라봤다. 보아하니 그녀도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그림은 안 그려요?”반승혜는 약간 짜증 섞인 얼굴로 겨울이를 놔주고 붓을 들었다.“안 그래도 저녁에 시간이 없어서 빨리 그려놔야 해요. 내일이 제출 마지막 날이거든요.”“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리고 생일 축하해요, 승혜 씨. 선물은 다음에 만날 때 줄게요.”생일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선물 준비는 당연하였다. 성혜인은 자신이 공부하면서 만들어 놓은 모든 필기에서 중요한 것만 따로 정리해 선물로 만들었다. 반승혜에게는 모자란 물건이 없었으니, 주얼리 같은 걸 선물하면 오히려 식상할 것 같았다.“고마워요. 너무 비싼 걸 준비할 필요는 없어요. 제가 딱히 모자란 물건이 없거든요.”“승혜 씨가 무조건 좋아할 거니까 기대해요.”성혜인은 혹시라도 또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포레스트펜션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반승제의 차가 그녀를 유유히 스쳐 지나가 펜션을 향해 갔다.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며 발걸음을 멈추더니, 겨울이를 데리고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그녀는 반승제가 죄를 물으러 온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유경아는 반승제가 성혜인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급했다. 그녀는 속으로 성혜인이 빨리 돌아왔으면 했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은 부부이니, 지금처럼 어색하게 지내는 것은 보기 좋지 않았다.게다가 반승제는 일분일초 바쁘게 지내는 사람이었고, 너무 오래 기다리다가 안 그래도 나쁘던 감정이 더 틀어지면 어떡하나 걱정되기도 했다. 자칫 백연서가 또다시 찾아올 수도 있고 말이다.유경아는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몰래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사모님, 대표님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겨울이를 밖에 두고 일단 들어오시는 건 어때요?”만약 겨울이를 데리고 들어온다면 반승제에게 들킬 수밖에 없게 된다.성혜인은 반승제가 죄를 물으러 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지금으로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이 계약을 해지고 대외로 선포하는 것이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금세 어차피 이혼할 마당에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기에, 반승제가 화를 내도 진심을 다해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겨울이가 포레스트편센에서 지내고 있는 건 절대 들키면 안 됐다. 그녀는 반승혜를 찾아가 겨울이를 잠깐 부탁했다. 급할 일만 처리하고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개털 알레르기가 있는 반승제 앞에 개를 데려가는 것은 안 그래도 바닥 치는 호감도를 더 깎기만 할 뿐이었다.반승혜는 물론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성혜인은 길에서 20분이나 낭비하고 포레스트펜션을 향해 달려갔다. 혹시라도 반승제가 기다림에 지칠까 봐서 말이다.반승제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 20분을 기다린 것은 이미 그의 최선이었다. 그는 사업 파트너조차 5분 이상 기다리지 않는데, 성혜인은 이미 두 번이나 그를 바람 맞혔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이때 황급하게 달려오고 있던 성혜인이 반승제의 차를 발견하고 약간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잠깐 정신을 판 사이에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리며
성혜인은 문틀을 짚고 겨우 차에 올라탔다. 무릎 통증과 발목 통증이 심하기는 했지만 반승제도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짓기만 했다.“고마워요, 대표님.”공기 중에는 피비린내가 서서히 퍼져나갔다.성혜인은 반승제에게 방해가 될까 봐 말없이 조용히 구석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반승제의 시선은 차에 올라타서부터 그녀의 무릎에 집중되어 있었다.성혜인의 무릎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고 발목은 퉁퉁 부어있었다. 다른 여자라면 진작에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테지만 그녀는 인상만 찡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차는 반승혜의 집을 지나쳐 갔다. 겨울이의 존재감은 아주 강했고 차로 지나가면서도 반승혜와 놀고 있는 그가 한눈에 보였다.반승제가 돌연 물었다.“아까는 어디로 그렇게 달려가고 있었던 거지?”반승제는 강아지와 산책하고 있던 성혜인이 왜 갑자기 강아지를 반승혜에게 맡기고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도 그의 첫 번째 질문에 답을 주지 않았다.‘페니의 집은 꽤 먼 곳에 있지 않았나?’반승제의 의아함을 눈치챘는지, 성혜인은 차분한 말투로 늘 그랬듯이 에둘러 설명했다.“이 동네 산책로가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요. 강아지를 키우기도 너무 좋고요. 저는 이 근처의 윌셋집에 살고 있어요. 비록 금방 또 이사하겠지만.”‘월세?’반승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성혜인의 의뢰비는 건당 몇억 원은 했다. 제원의 집값이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월셋집에 살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결혼도 했기에 아직도 내 집 마련을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저 방금 전에 대표님이 오는 것을 봤어요. 이곳에서 다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성혜인은 교묘하게 화제를 돌려 주도권을 잡았다.“그러게.”반승제는 짧게 답했다. 그녀는 포레스트펜션에 살고 있는 여자를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얼마 후, 병원 앞에 도착한 성혜인은 절뚝거리며 혼자 차에서 내려왔다. 한쪽 다리 전체가 고통에 휩싸인 채로 중심을 잡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유경아는 금방 얼음을 갖고 왔고 성혜인은 약 한 시간 동안 찜질했다. 하지만 발목 통증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고, 하이힐을 신자 침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성혜인은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지만 억지로 참고 메이크업을 했다.유경아는 가슴 아픈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모님, 제가 회장님한테 사정을 설명해 드릴게요. 오늘 말고 다음에 가시는 게 어때요?”“안 돼요.”성혜인은 자신에게 그토록 잘해주는 반태승을 실망하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공항 마중도 못 가서 오늘만큼은 절대 불참할 수 없었다.메이크업을 완성한 성혜인은 반태승이 선물한 팔찌를 꼈다. 그 외의 주얼리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도도한 인상의 성혜인에게 허리선을 강조한 드레스는 아주 어울렸고 마치 겨울에 핀 한 송이의 꽃과 같았다. 거기다 눈 부신 빛을 자랑하는 옥팔찌까지 더해져 더욱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단장을 끝낸 성혜인은 바로 차에 올라탔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성휘에게서 전화 왔다. 그는 성씨 저택에 들러 성혜원도 데리고 가라고 전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혜원이는 왜 데려가요? 몸도 아픈 애가 어떻게 버티려고요.”“혜원이가 파티한다는 소리를 듣더니 가고 싶은 눈치더라. 회장님이 너를 많이 아끼시니 한 명 더 데려가도 괜찮을 거야. 병원에 누워만 있느라 파티 같은 곳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네 동생도 불쌍하잖아. 나는 바쁘니 그냥 네가 데리고 가.”성혜인은 성혜원이 좋지도 싫지도 않았기에 그냥 동의했다.차를 돌려 성씨 저택으로 가니, 성혜원은 진작에 드레스를 차려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몸이 약한 관계로 또래보다 훨씬 야위었다.소윤은 오늘 성혜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반씨 저택의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녀도 물론 참석하고 싶기는 했지만 체면을 내려놓고 성혜인에게 부탁하기는 싫었기에 성혜원이 가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성혜원이 갔다가 훌륭한 사윗감을 낚아올지 또 누가
임남호의 곁에는 갑자기 깡패 같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임남호의 어깨를 잡고 인적이 드문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성혜인은 몇 발짝 걷지도 못하고 길가의 나무를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임남호가 위험에 빠질까 봐 이를 악물고 쫓아갔다.어두운 거리에는 주먹질하는 소리와 욕설이 간간이 들려왔다.“돈은 왜 아직도 안 갚아?! 너 죽고 싶어?”“미친놈, 감히 우리를 상대로 숨바꼭질을 해?”성혜인은 골목 앞으로 오자마자 깡패들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일단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그만 해요!”깡패들은 동작을 멈추고 드레스를 차려입은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음흉한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며 하나둘씩 걸어왔다.“올~ 임남호 네가 언제부터 이런 미인이랑 알고 지냈어?”임남호는 몸을 웅크린 채로 머리를 보호하고 있었다. 살짝 머리를 들어 성혜인을 발견한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혜인이니?”임남호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 갈비뼈 몇 대가 나갔는지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아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성혜인은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임남호가 한심했다. 20대 후반에 들어선 사람이 취직하기는커녕 거지처럼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외삼촌과 외숙모를 생각해서라도 듣기 싫은 말은 삼켜버렸다.깡패들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고 성혜인은 뒷걸음질을 쳤다. 발목이 아직 아픈 데다가 하이힐까지 신고 있어서 그녀는 길가의 돌부리에 걸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이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잠시 후 걷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통증은 전해오지 않았고 한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부축해 줬다.성혜인은 머리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과 향기에 그녀는 후다닥 자세를 바로 하며 거리를 벌렸다.“대표님?”성혜인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반승제의 차는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꽤 먼 곳까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이곳
성혜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넋이 나가버렸다. 반승제는 차분하게 비수를 휘두른 사람을 발로 차버렸다.깡패들은 잘못 걸렸다는 표정으로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고 비척거리며 멀어져갔다.“대표님, 제가 병원으로 데려다줄게요.”성혜인은 떨리는 손으로 반승제의 상처를 확인했다. 하이힐을 신고 잠깐 서 있었더니, 발목이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기 시작했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하필이면 오른손을 다쳐서 한동안은 불편하게 지내게 될 것 같다. 그는 성혜인이 갑자기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서는 것을 보고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만약 반승제가 자신을 위해 다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백연서에게 갈기갈기 찢겨져서 죽겠다고 생각하며 성혜인은 맨발 투혼에 나섰다. 그녀는 오늘 반승제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말았다.성혜인은 반승제를 따라 그의 차를 향해 걸어가면서 몰래 도망가려는 임남호의 목덜미를 잡았다.“오빠도 따라와요.”임남호는 성혜인에게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반승제의 고급 외제 차를 보고 겁먹고는 감히 오르지도 못했다. 길가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던 성혜인은 그를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심인우는 반승제가 다친 것을 보고 말없이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출발했다.이쪽 길은 성혜인이 세워둔 차 때문에 길이 막히고 있었다. 그녀는 임남호를 잡으러 가느라 길가에 차를 세워도 되는지 확인도 하지 못했다.슬슬 운전자들의 욕설이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성혜원은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우리는 일단 출발하죠. 언니한테는 제가 따로 전화할게요. 다른 차를 타고 저택으로 가도 되는 거니까요.”곧 있으면 파티가 시작될 것이기에, 기사는 어쩔 수 없이 먼저 출발했다. 성혜원은 성혜인과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성혜원은 처음으로 공식적인 장소에서 반승제와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예전의 그녀는 지나가는 행인처럼 보잘것없는 존재로 멀리서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약간의 복
반승제는 입술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다치지 않은 손으로 ‘수락’ 버튼을 누르기는 했다만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때 마침 반태승이 먼저 위로의 말을 건넸다.“승제야, 잘했다. 이제는 너도 다 컸구나. 이번엔 잔소리하지 않을 테니 오늘 안 와도 된다.”반승제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반태승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예전에는 전화만 받으면 세 마디를 못 넘기고 성혜인을 언급하는 사람이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얼마 전에 성사시킨 인수 때문에 그러시나?’과거의 반태승은 BH그룹을 반승제에게 물려준 이후 계속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만 할 뿐 비즈니스계에 대한 관심이 전무했다. 편안한 노년 생활을 즐기는 중이라 할 수 있겠다.이번에 성공적으로 성사된 인수 건이 아니었다면, 무엇 때문에 반태승이 이렇게 기뻐하는 것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반승제는 자연스럽게 인수 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당연한 일을 했는 걸요. 앞으로도 노력할게요.”하지만 반태승은 그 말을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오늘 밤, 반태승은 분노를 꾸역꾸역 삼킬 생각이었다. 반승제에게 성혜인을 데리러 가라고 하니, 반승제는 정 없는 사람처럼 야근을 해야 한다고 답했기 때문이었다. 일이 며느리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가?성혜인의 정체를 사람들 앞에서 성대하게 공개할 생각이었던 반태승은 반승제와 성혜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지금까지도 제원 내에서 성혜인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만큼, 몇 년 동안 혜인이 뜻하지 않게도 우여곡절을 많이 겪게 된 것은 사실이다.반씨 집안으로 시집을 오고 난 이후에는 괴롭힘까지 당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보니 찾아오지 않는 반승제를 볼 때면 반태승은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소식을 듣고 난 후, 반승제가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승제야, 난 네가 말로만 노력한다고 하는 줄 알았다. 내가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된
감정이 격해진 임남호가 주체하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면서 복도 전체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만약 임남호가 정확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었다면, 반승제 역시 이들의 대화 내용을 듣고 성혜인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임남호 입에서 그녀의 본명이 튀어나왔으니 말이다.일찍이 자퇴한 임남호는 학업을 포기하고 지방에 있는 공사 현장을 돌았다. 이 가난한 서천을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그 과정에서 전국 각지에서 온 노동자들을 알게 되었고, 일부러 그들의 억양을 배웠다.사실 토종 사투리를 쓴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사투리가 뒤죽박죽 섞이니 발음도 분명하지 않아 이상하게 들렸다. 그런 이유로 반승제는 두 사람이 왜 싸우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여러 외국어를 거뜬히 구사하는 그였지만, 성혜인이 하는 말만 어렴풋이 들릴 뿐 임남호의 말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복도 밖.성혜인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외삼촌 외숙모만 아니었으면 제가 이럴 일도 없거든요?”28살이나 된 남자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직장 하나 찾지 못한 데다가, 고객 돈 몇 천만 원을 빼돌리다니. 그것으로 모자라 도박으로 2억을 탕진해 부모님이 사채를 갚아주는 삶을 사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을까?성혜인은 임남호를 잡아당기며 전화를 받았다.“외삼촌.”하지만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임동원이 아닌 이소애였다.이소애의 갈라지는 목소리에서 묵직한 피로가 느껴졌다.“혜인아, 외숙모도 너에게 이러고 싶지 않지만... 정말 어쩔 수 없어서 전화했어. 반 사장님 연락처도 없는데 경찰은 네 올케언니를 못 풀어준다고 하네. 그 큰돈을 도저히 마련할 수가 없는 상황이야. 우리 집 곧 철거하잖아. 이웃들 집을 좀 사려고 네 외삼촌이랑 친척들한테 돈을 빌렸어. 그걸로 일부를 좀 메꿔보려 했는데, 철거 소식에 그 집 자녀들이 찾아와서 외삼촌 다리를 부러뜨리고 머리에 피까지 흘려서 지금 병원에서 응급조치하는 중이야. 흑흑...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
“맛있어, 먹고 싶으면 이따 저녁에 나가서 먹자.”동생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런 염정아가 걱정되어 소매를 잡으며 위로하려 했지만, 옷을 더럽힐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누나, 일하는 거 힘들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 우리한테 햄버거도 사주고 저녁에도 좋은 거 먹으러 가자고 하겠어.”염정아는 손을 들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사장도 엄청 좋은 사람이고 월급도 많이 줘.”동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햄버거를 계속해서 허겁지겁 먹어댔다.염정아는 공지민의 계획에 피해라도 줄까 봐 내일 돌아가야 해서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었다.아이들은 모두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야 밥상에서 일어섰고 동생은 배가 부름에도 토할 정도로 그냥 먹고 있었다.염정아는 동생의 손에 남은 햄버거를 뺏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배부르면 먹지 말라고, 왜 아직도 그 습관 못 버려?”“오늘 안 먹으면 다음엔 없을가봐...”“이젠 그런 걱정 하지 마.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쭉 있을 거야.”“그래, 누나 말 잘 들을게.”염정아는 웃으면서 남은 햄버거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집에 있던 냉장고는 전에 중고로 샀던 거라 너무 작았고 티비도 화면이 매우 작아 아이들이 한데 모여야만 볼 수 있어서 염정아는 집에 온 틈을 타 냉장고랑 티비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새 티비는 백 인치라서 화면이 큰 소파에 앉아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췄고 젤 작은 막내 둘까지 신이 나서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염정아는 집 안에 있는 모든것 들을 교환하고 정리 한 다음 몇 시간이 지나 아이들을 데리고 랍스타 먹으러 나섰다.식당에 도착하자 동생은 낯선 환경이라 염정아 곁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처음 보는 주변의 분위기에 큰 소리로 말도 못 하고 있자 염정아는 바로 조용한 방으로 예약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전부 주문했
동생의 연락을 받은 염정아는 아이들 생각에 먼저 공지민한테 연락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약속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결국 온시환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였다.염정아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뜸들이며 못하고 있자 온시환은 그녀가 집을 그리워하는 눈치를 채고 말했다.“이틀 정도 지연되여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사람 시켜 집에 데려다줄게요.”염정아는 그 순간 얼굴색이 밝아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네, 고마워요 시환씨.”온시환은 말한 대로 그날 바로 사람 시켜 헬기로 염정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집에 도착한 염정아는 방문을 열고 동생이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것을 보았다.동생의 행동은 아주 서툴렀고 정상적인 사람들하고는 비교가 되지만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에 잘 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염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동생은 바로 뒤돌아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누나!”염정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능숙하게 아이들한테 분유를 타 주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동생은 염정아의 주변만 맴돌면서 금방 통화한 지 얼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것을 보며 꿈만 같게 생각했다.주방을 보던 염정아는 초라하게 놓인 반찬 몇 가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너희 요즘 이렇게만 먹은 거야?”동생은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1분 만에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시켜줬다고 자백했다.“미안해 누나,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시켰어.”두 남매는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만 햄버거를 먹어봤었고 지금의 그들에겐 이런 음식들은 사치품이였다.그때 염정아는 집을 나서면서 아래층 마트 아줌마한테 돈을 맡겨뒀는데 동생의 요구에 아줌마가 배달을 시켜준 듯 하였다.염정아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먹고 싶으면 우리 오늘도 시켜 먹자.”4억, 그들은 지금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고 공지민이 후에 또 몇천만을 주었다.동생은 또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바닥까지 밀고 닦기 시작했다.염정아는 빨
연승혁은 의자를 찾아 앉아 묵묵히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공격해 온 해커의 추적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시간이 오래 걸리자 연승혁은 귀찮은 어조로 물었다.“얼마나 더 걸려야 되는 거니?”“형님, 이틀은 걸려야 될 듯 해요. 그쪽에서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 아직은 추적하기 어려워요. 일단 움직임이 있을 때 추적해 봐야 할것 같네요. 현재 상황에서 보아 신호는 10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잡히고 있으니 아마 해역 부근에 있는 것 같아요.”연승혁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연승혁은 제원의 별장에서 나오면서 고용인 아줌마한테 공지민을 잘 돌보라고 지시했다.공지민은 휴대전화를 연승혁에게 빼앗겨 당분간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고 별장에 있는 아줌마는 매일 그녀의 건강 상태를 관찰하며 잘 돌봐주었다.이것 또한 연승혁이 지시한 일이었고 그는 이렇게 감시하며 공지민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지켜보고 있었다.별장에서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난 공지민은 아줌마가 연승혁에게 회보하며 온시환이 정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회장님, 저 사람 들여보낼까요?”연승혁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지만 아줌마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 되었고 공지민은 온 하루 별장 안에만 있었다.온시환은 며칠 동안 공지민의 소식이 끊기자 걱정되어 그녀의 집에 찾아갔지만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공지민은 요 며칠 사람도 보이지 않고 통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많이 불안해진 온시환은 공지민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역시 받는 사람이 없었다.당연히 온시환은 공지민의 휴대전화가 연승혁의 손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연승혁은 공지민의 휴대전화에 뜬 온시환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또다시 생기게 되었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연씨 가문은 외래인 출입 금지라서 들어가지도 못한 온시환은 차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염정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